123화
촬영한다고 신경이 곤두서서인지 아니면 요리 때문인지 모를 피로가 쌓였다. 재경은 제 뻑뻑한 눈을 비비다가 거실을 둘러보았다. 밥을 먹고 나니 알아서 치우겠다고 나서면서 요리한 재경에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멤버들을 보던 재경이 일어나 근처의 아무 방으로 향했다. 작은 방엔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쉬는 장소로는 좋진 않았다. 아무래도 그 방을 오갈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재경은 카메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을 택했다. 뭐, 잠깐 눈만 감고 있을 거니 굳이 카메라를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중간중간 카메라를 의식하며 무언가를 하려는 멤버들과 달리 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를 무시했다. 이미 리얼리티는 많이 찍어봤고 요령이라면 요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절대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거였다.
혼잣말로 제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고 무언가 특별한 걸 할 필요도 없다. 그 룰을 충실히 따르며 재경이 근처에 있는 침대에 올라갔다.
“아, 좋다.”
침대의 푹신함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경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면서 이불을 가져왔다. 적당히 허리와 다리만 덮으니 딱 낮잠 자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잠깐만 쉬다가 일어나자.’
어차피 설거지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릴 거다. 먹은 메뉴는 단순했지만, 이전에 사고 친 것까지 수습하려면 한 시간은 훌쩍 넘길 게 분명했다.
재경은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며 야무지게 베개를 끌어왔다. 절대 자려는 건 아니고 그냥 쉰다는 명목하에 재경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 * *
“재경아, 아직도 자니?”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이어 제 머리카락을 건드는 것까지 느껴지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뽀뽀하면 깨어나려나?”
장난스러운 말투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면 머리통 날려버릴 거예요.”
“너는 그게 형한테 할 말이야?”
“동생한테는 반말로 하는데요.”
“…나한테는 존댓말 했다 이거지? 그런데 너 왜 갑자기 말을 높이냐?”
“혹시나 머리통을 날릴 일이 있을까봐.”
“와…….”
기가 찬 듯한 반응이 아직 잠이 온전히 깨지 못한 재경에게도 느껴졌다.
“재경이도 네 이런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하준이 형 느끼한 것도 알고 다 알아. 그러니까 나가.”
“그래, 간다 가.”
아, 이 목소리가 하준이 형이었구나. 그리고 다른 목소리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재경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생겨났다. 그러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잠깐 조용해지는 틈을 타 재경의 의식이 다시 가라앉으려고 할 때였다.
“재경이 형 아직 자네?”
“어. 가.”
“왜에. 조금만 구경하다가 가면 안 돼?”
“어. 가.”
“치사해.”
아,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태연이네. 태연을 사정없이 밀어낸 정우에게 고맙긴 하면서 이제 조금씩 잠의 경계에 다다를 때였다.
“재경이 자?”
“어.”
“…너는 뭐 하는데?”
“가.”
건후가 찾아와 물었고 정우가 밀어냈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으악.”
문 뒤에서 들린 비명에 재경이 움찔했다.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생생히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야 하는 걸까 싶을 때 머리카락 사이로 정우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더 자.”
정우의 다정한 목소리에 제경은 그쪽으로 상체를 더 숙인 채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시 깨어나려고 했는데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정우는 재경이 다시 잠든 걸 확인하자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방금까지 검색해서 찾아보던 중이었다.
[익게] 지나가던 우리 재경 픽 잠깐 모여봐
주접 놀이 하자
└재경스 뽀다듬 해주고 싶어....
└뭐지 이 청량감은.. 요즘 에어컨 대신 재경이 영상 틀어둠.. 전기세 개꿀
└재경이는 진짜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데 얼굴도 잘생겼네... 근데 인성 완벽하고 어리기까지하네 너는 진짜 천년돌 해야겠다
└우리 경이 안 튀려도 해도 어쩌나.... 너한테 나오는 후광 때문에 계속 이끌리는 걸.... 밤에 전등이 따로 필요없잖아. 너가 나만의 빛인걸.
└재경이 몰랐는데 탈모라며?
'모자람'이 없어서 '헤어날'수 없어서☆
└여기 주접 맛집이네~ 역시 우리 천사 재경이!
└솔직히 천사가 무대하면 불법 아닌가요; 재경이 천사라고 천사치트키 쓰네
└세상에 제가 천국에 있나요? 눈 앞에 천사가 있네요; 천국이 아닐리X 재경이 날개 어디갔나요 그것까지 보이면 숨멎을까봐 배려해줘서 안 보이는 거죠? 그럴 줄 알았어 재경아 넌 에인졀…
└제 안구건조증이 고쳤습니다. 제 맘에는 재경이가 있으니까……☆☆
내용을 가볍게 훑어 내려가던 정우가 보고 웃더니 곧 저도 댓글 창에 손을 올렸다. 그동안 눈으로만 볼뿐 댓글이나 게시글을 올려본 적 없어 어색하던 것도 잠시 손가락이 부지런히 핸드폰 위를 오갔다.
└딱히 강조할 건 아닌데 재경이는 속이 깊고 배려심이 좋음.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도 잘하고 인사도 잘함. 밥도 맛있게 잘 먹는데 요리도 잘함. 얼굴 굳이 따져본다면 잘생김과 예쁨이 공존하는 잘생쁨이고 가끔 눈치 보는 소심한 아기고양이처럼 굴 때는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음. 아메리카노 써서 못 마시는 걸 아닌척하는데 그럴 때마다 놀리고 싶어짐. 장난칠 때 돌아오는 반응이 통통 튀어서 재밌음.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매력이 있음. 세상에 이런 사랑스러운 인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
“……여기까지 쓸까?”
딱히 떠올려야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기만 해도 충분했다. 정우가 핸드폰을 내려놓는 사이 그가 쓴 댓글 밑으로 대댓글이 붙었다.
└└당신을 주접킹으로 모시겠습니다
└└……저 댓글 정우가 쓴 거 아닌지 의심해 본다
* * *
“다음 미션이야.”
재경이 눈을 비비며 하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그렇게 개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재경은 다음으로 어떤 걸 할지 궁금해서 하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취미생활 즐기기.”
하준이 종이를 뒤집어서 보여주며 말했다. 취미생활이라고 하는데 그 밑으로 깨알같이 적힌 조건이 따라붙었다.
“같은 취미를 즐길 멤버끼리는 꼭 같이 다니기?”
태연이 고개를 내밀어 작은 글씨를 읽어 주었다. 덕분에 종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어떤 미션인지 알게 된 재경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뭘 즐기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럼 여기서 몇 팀이 나올지 모르겠네.”
태연이 나름 날카로운 지적을 하자 하준이 잘했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태연이는 무슨 취미생활을 즐길 거야?”
“나는…….”
태연이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다가 이내 하나가 떠올랐는지 검지를 들었다.
“오락실 갈래.”
“나도.”
건후가 그 검지에 제 손을 야무지게 말았다. 오락실에서 흥미가 돋았는지 헤이스도 거기에 달라붙었다.
하준이 소운을 바라보았다. 너는 뭘 하고 싶으냐는 듯한 눈빛에 소운은 제 볼을 긁적였다.
“저는 그럼…….”
“형이랑 쇼핑 갈래?”
소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면서 하준이 중간에 그에게 하나를 제안했다. 소운은 하준이 언급한 쇼핑을 잠시 입에 굴려보더니 그것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섯 명이 할 것을 정했다. 한찬형은 권태하와 눈을 마주치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노래방 다녀올게요.”
이미 권태하랑 이야기를 나눈 듯 둘이 딱 붙어 앉았다. 그러면서 카메라를 힐끗 보는 게 노래방에 가서 제 실력을 뽐내려는 게 티가 났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기에 하준이 나머지 두 명을 바라보았다.
“둘은?”
이제껏 뭐하지, 하며 반쯤은 멍하니 있던 재경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어쩌다 보니 둘이 남았지만 싫지 않았다. 오락실을 간다거나 쇼핑을 다닌다면 다른 사람과도 붙어서 다녀야 할 것이다.
‘역시 다른 게 좋겠지?’
재경이 잠깐 정우를 바라보다가 대뜸 물었다.
“나랑 데이트 할래?”
정우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는 걸 본 재경의 입가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둘이서만 따로 가자는 걸 가지고 농담을 건넨 것이다. 재경은 정우의 반응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영화 보고 카페 가자.”
하준이 완전히 굳어 버린 정우를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영화 보자고 하면 될 걸 왜 데이트라고 해서 순진한 애를 건드려.”
그러니까 정우가 아무 말도 못 하잖아. 가만히 보면 재경은 촬영 내내 가만히 있겠다는 듯 굴면서 은근히 카메라 각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하준뿐만 아니라 모두가 재경과 정우에게 집중하고 있을까. 카메라들 역시 둘을 클로즈업해서 잡고 있었다.
이제 정우의 대답만 남았다. 재경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다른 취미생활을 하겠다고 할지.
정우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고 또 재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재경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둘이 놀자는데 저렇게 고민할 일인가? 싶어서.
“싫으면 여기서 찢어지고…….”
결국 재경이 먼저 다른 취미 쪽으로 붙어도 좋다고 말하는데 정우가 끼어들었다.
“멜로 영화 괜찮아?”
그는 지금껏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난 뭐든 좋아.”
재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랑 같이 보는데 공포면 어떻고, 액션이면 어떤가. 그러니 멜로도 좋고.
둘이 좋다며 서로 어깨를 부딪치는 걸 본 하준이 잘들 논다는 듯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