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운이 겹치는 시기가 있다.
해림은 망연자실하게 앉아 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았다. 양옆에 검은 줄이 커튼처럼 드리워진 사진은,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림의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던 이가 마지막으로 찍은 증명사진이었다. 이제는 영정사진이 되고만.
어디서부터 잘못됐더라. 해림이 꺼칠하게 일어난 뺨을 문지르며 과거를 되새김질했다. 불행한 기억의 시작은 이별이 장식하고 있었다. 오 년간의 교제 끝에 이제는 슬슬 결혼을 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의 부모님도 흔쾌히 허락했고 여자 친구도 프러포즈를 하면 당연히 받아 줄 것처럼 사인을 보내곤 했다.
하나 프러포즈를 앞둔 며칠 전에 여자 친구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이별을 고했다.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저 너와 결혼하면 평생을 목각 인형과 사는 기분일 거라며 해림을 축구공처럼 뻥 차 버렸다. 5년의 길고 긴 세월이 무색하게 여자 친구는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한 얼굴로 해림을 떠났다.
일은 연이어 일어났다. 이제 남은 건 직장밖에 없다며 정신을 다잡고 다니려는데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4년 전 모친을 보내고 이제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었다. 한국에 들르라는 덤덤한 말에 외로움이 사무치셨나 싶어 휴가를 내어 들어왔다. 부친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혈육으로서 보여 줄 일말의 정, 내지는 혈육도 모른 체하는 매정한 사람이라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해림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부친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몇 년 만에 조우했어도 반가움보다는 어색함이 앞섰다. 원래부터 무뚝뚝함의 표상이라고 칭해도 될 만한 인간이었다. 해림이 어렸을 때도 따스한 칭찬은 죄다 모친의 몫이었다.
뺨이 쑥 꺼져 광대가 위로 드러난 건 옆에서 챙겨줄 모친이 없어서이며, 마른 몸이나 소매가 해진 옷도 같은 원인일 거라 짐작했다. 서로 잘 지냈냐는 말 한마디도 힘겨웠다. 물어도 잘 지낸다는 말로 대화를 차단할 사람이었다.
부친과 한집에서 지내는 것이 껄끄러워 숙소를 호텔로 옮겼다. 그래서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부친이 왜 저를 굳이 한국까지 불렀는지 몰랐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데면데면한 부자지간이었다.
그리고 하루 전, 경찰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정용섭씨 아들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정용섭 씨가 사망하셨습니다.
그 짧고 삭막한 대화를 해림은 잊을 수가 없었다.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불려온 곳이 영안실이었다. 백열등이 푸른빛을 내뿜는, 냉기가 흐르는 방에 부친이 있었다. 낯설기 짝이 없게 시퍼렇게 질린 낯빛을 하고 목에 벌그죽죽한 자국을 목걸이처럼 걸고서. 평생 목걸이니 반지니 딱 질색하던 양반이었는데.
커튼 봉에 목을 매달았다고 했다. 남은 유서는 종이 한 장이었다. 긴말도 없었다. 생시 무뚝뚝했던 성격이 유서에도 남아 있었다.
「아들아 미안하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쉼표나 마침표 하나 안 찍고 갈긴 문장이었다. 미안한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목숨은 보전했어야지.
아무리 서먹한 사이더라도 피가 물보다 진하지 않나. 누가 뭐래도 부친은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이었다. 해림은 슬픔보다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장례식을 준비했다. 해림이 오기 전부터 죽음을 준비했던 건지, 상조 회사가 해림 대신 일사천리로 자리를 마련했다.
호상이 아니었기에 최대한 간소하게 하려고 했건만, 그렇게 가는 주제에 명복은 많이 받고 싶었는지 장례식은 다른 이들처럼 규격대로 진행됐다. 하나 부친이 가졌던 소원과 달리 조문객은 얼마 없었다. 몇 있는 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해림을 족치려고 달려드는 성난 문객들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쳐 내 돈 내놓으라며 해림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니 애비가 뜯어 먹은 내 돈, 이 개새끼야!」
해림은 대학교 시절 유학 온 후로는 내리 해외에서 살았다. 모친이 소천하실 적에 갔다가 다시 나온 후로는 거의 소식이 없다시피 살았다. 해서 부친이 운영하던 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기어이 부도가 났다는 사실도 조문객을 통해 알았다.
그게 무슨, 이라고 해림이 당황하며 몰랐다고 사실을 말해도 분노한 빚쟁이를 말릴 수는 없었다. 상조 회사 직원이 차분한 어조로.
「방금 아버님을 보낸 분이십니다. 고인을 추모할 시간은 주셔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고 매우 사무적인 어조로 달래지 않았더라면, 해림은 그대로 딱딱한 상 위에 패대기쳐졌을 터였다.
빚쟁이는 씩씩대며 돌아갔고 늦은 새벽 해림만이 남았다. 해림은 길이가 맞지 않는 검은 정장 소매를 잡아당기고 목뒤를 주물렀다. 멱살을 잡혀 흔들린 데다가 풀 먹인 창호지처럼 빳빳하게 허리를 펴고 무릎까지 꿇고 있으려니 영 죽을 맛이었다. 대신 자리를 지켜 줄 사람이 있으면 잠시 맡기고 나가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울 텐데, 형제는커녕 친척도 없다. 한 때 사장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렸던 인물의 장례식치고는 영 썰렁했다.
부친의 자살과 빚쟁이 등, 충격이 연속으로 밀려왔으나 해림은 덤덤하게 정신을 추슬렀다. 마냥 멍하니 앉아 현실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머리 한구석으로 이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했다. 아침이 오면 당장 법원으로 달려가 빚이 승계되지 않도록 처리를 하고, 다시 돌아와 장례를 마치고……, 아니다. 뭣보다 장례를 먼저…….
“하.”
졸음과 피곤과 사건이 뒤엉킨 탓에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니코틴이 필요했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해림이 주머니에 든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졸음과 싸웠다. 폐가 니코틴이 들어오면 졸음을 쫓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일어설까 말까, 빈소에 어울리지 않는 고민을 하며 해림이 눈을 꾹 감았다.
5분 정도야.
빈소에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지 한 시간째였다. 작은 시곗바늘은 부지런히 돌아가 제일 졸린 시간인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긴 바늘은 숫자 2 이후로 한참을 넘어가 있었다. 해림이 고민 끝에 끙차,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상실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나 상실감도, 부친이 회사를 부도내고 빚을 남긴 채 세상을 등졌다는 충격보다도 당장은 담배 한 대가 더 절실했다. 애초에 모친의 소천 이후로 부친과의 혈육의 정이라고는 거의 증발해 가뭄 난 땅에 남은 물웅덩이 수준이었다. 차라리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의 사망 소식이 더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저가 그렇게 냉소적이고 냉철한 인간은 아니었는데. 십 대 때도 안 했던 자아 성찰을 하며 해림이 발을 내디딘 참이었다. 저쪽에서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빈소 앞에서 멈췄다. 해림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가 허리를 폈다. 이 시간에 조문이라니, 범상치 않아 더럭 긴장부터 됐다. 혹시 남은 빚쟁이는 아닐까.
해림이 두 손을 꽉 마주 쥐고 고개를 돌렸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둘이었다. 예감이 맞았다. 둘 다 회사 일을 끝마치고 피곤에 절어 문상을 온 이들은 아니었다. 한 명은 역도 선수처럼 몸집이 황소 같은 데다가 키가 장승처럼 크고, 다른 한 명도 키가 그만큼 크지만 체구는 뒤에 선 이보다 작아 늘씬하다는 인상을 줬다.
물론 앞에 선 남자만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가냘프다는 감상은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갈 터였다. 뒤에 선 이가 살집과 근육이 비대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뿐, 앞에 선 남자도 보통보다 키도 체구도 커다랬다. 키는 어림잡아 백구십 이상이었고 몸무게야 짐작하기 어려우나 팔뚝도 허벅지도 운동을 전문적으로 한 사람처럼 근육이 정장을 뚫고 튀어나올 듯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가슴팍을 가린 단추와 단추 사이가 훤히 열리며 속살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잘 갈린 월도(月刀)의 예기가 풀풀 풍기는 남자였다.
게다가 앞에 있는 남자는 뒤에 선 남자보다 사람의 이목을 확 잡아끄는 구석이 있었다. 굵은 눈썹과 쌍꺼풀 없이 옆으로 쫙 찢어진 눈매, 우뚝하면서도 두툼한 콧날과 콧날을 살짝 가로지르는 흉터, 우묵한 인중과 입술, 입술의 양 끝은 일부러 추켜올린 건지, 아니면 원래 올라가 있는 건지 미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턱선은 강인하고 아래턱은 모서리를 완만하게 잘 깎은 사다리꼴처럼 각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상당한 미남이었다. 전신을 휘감은 불량한 분위기만 아니라면, 지나가면서도 한번 돌아보고 이야, 감탄할 만한 외모였다.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남자를 휘감은 기운이었다.
뒤에 선 자는 덩치가 주는 위압감이 전부일 뿐, 날카로운 인상은 들지 않았다. 앞에 선 이는 평범한 해림이 보기에도 비범했다. 잘못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거라는 동물적인 감이 해림을 바짝 긴장시켰다.
“여기가 정용섭 씨 빈소 맞냐.”
앞에 선 남자가 뒤에 선 이에게 물었다. 덩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 맞습니다,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앞에 선 남자가 답답한지 까만색 넥타이의 고리에 손가락을 걸며 풀었다. 하얀 셔츠 뒤로 꽉 들어찬 목 근육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이고, 이분이 아드님이시구나. 사진으로만 봤지 이렇게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네. 고생이 많으십니다.”
남자가 살갑게 인사했다. 얼굴 만면에 미소가 어리자 길쭉한 눈매가 손톱 달처럼 구부러졌다. 부친과 친한 사이였는지 해림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까만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와 해림의 손을 맞잡았다. 손이 얼마나 큰지 해림의 두 손이 안에 쏙 들어갔다. 아귀힘이 사과도 으깨 버릴 듯이 강했다.
“아닙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 그럼 절부터 올리겠습니다. 형님 앞에 두고 아드님하고만 이야기하면 예의가 아니지.”
남자가 싹싹하게 물러나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절 두 번에 한 번은 반절. 해림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를 음식을 떠올렸다. 국 한 그릇, 밥 한 그릇, 수육 한 그릇, 떡과 과일과 차가운 나물 반찬을. 직원이 없어 해림이 알아서 대접해야 했다.
남자가 절을 마치고 해림과 마주 앉았다. 해림은 무릎을 꿇고 남자는 편하게 양반다리로 앉았다. 빈소에 맞는 검은 정장에 예의를 다 갖추었는데도 남자는 묘하게 불량했다.
“형님하고 하나도 안 닮았어요. 형님이 그렇게 아들이 자기 닮아서 잘생겼다고 했을 때는 하나도 안 믿었는데. 아드님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형님이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잖아요. 아드님은 외탁했나 봐.”
“아, 예…….”
진중하게 생겨서는 말이 많은 부류다. 무책임하게 다 버리고 떠난 부친 이야기도, 부친이 생전에 저 닮은 잘생긴 아들이 있었다고 떠드는 이야기도 모두 불편했다. 해림이 애써 사회성을 발휘해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정말 몰랐네. 아니, 잘생겼다기보다는……”
“먼 길 오셨는데 시장하시지 않으십니까. 제가 상 차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아드님 성질이 급하시네. 그건 형님 닮았다. 형님이 좀 망둥어 같았지요. 응? 그렇게 목맬 일이 아니었는데 책임도 안 지고 뒈져 버리고.”
“뭐라고요?”
남자는 웃고 있었다. 해림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님을 알면서도. 실수라고 하면 못 들은 척 넘어가 주려고. 남자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못을 박았다.
“정용섭 씨가 아드님한테 넘긴 빚이 구억을 넘겼어요. 오늘 연체 이자까지 합해서 총 구억 팔천육백이십칠만 원. 나는 관대하니까 뒤에 붙은 잔돈은 빼줄게. 아, 근데 내가 가방끈이 짧아서 그러는데, 이런 경우는 보통 반올림한다며? 그럼 십억이네.”
낮에 왔던 빚쟁이들은 예의 바른 축이었다. 해림이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휩쓸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최대한 갚겠습니다. 평생에 걸쳐서라도 모두 갚을 테니 그 점은 걱정 마시고……”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이었다. 빚 갚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상속 포기든 한정 승인이든 날이 밝으면 당장 법원에 가 신청할 예정이었다.
푸핫, 하고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채기처럼 갑작스러웠다. 해림이 놀라서 쳐다보자 남자가 하하하, 하고 이어 웃었다. 웃음은 호쾌했으나 전염성은 없었다.
“이야, 우리 아드님, 아니지. 도련님이 참 깜찍한 생각을 하시네.”
남자가 툭 하고 손등으로 뺨을 쳤다. 툭 하고 한 번 더. 힘이 제법 실려 뺨이 얼얼했다. 속을 들킨 기분에 해림은 남자의 폭력을 막지 못했다.
“도련님. 고 작은 머리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빤히 보여서 귀여운데. 아침이 밝으면 장례고 나발이고 나가서 상속 포기나 한정 승인 신청할라고? 내가 씨발 남의 돈 떼어먹고 법 아래 숨은 놈들을 한두 놈 봤나. ……그래. 법 무섭지. 법 아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데.”
남자가 주저리 늘어놓을수록 해림의 얼굴은 갈수록 창백하게 식었다. 핏기가 실시간으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귀에 들릴 성싶었다.
“근데 그거 아나. 도련님은 지금 우리하고 같이 있고 법원은 여기서 차 타고 30분 거리네. 지금은 무서운 나리들 다 퇴근했으니까, 우리 예쁜 도련님은 우리하고 이 밤의 끝을 잡아야겠네?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을까, 예쁜 도련님아?”
“저는 그럴 생각이……. 꼭, 그쪽 돈을 갚을…….”
“도련님 외국에서 다니는 회사는 잘릴 거고 정용섭 씨 회사 하고 집에 있는 물건에는 죄다 딱지 붙었는데 무슨 수로? 공무원 개새끼들이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아서 도련님 이제 먼지만 남았어. 그런데 뭐 팔게. 몸이라도 팔게?”
제가 한 농담이 꽤나 우스웠는지 남자가 경박하게 낄낄댔다. 해림의 목울대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꿀꺽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남자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남자가 빈소에 들어올 때 느꼈던 위화감이 실질적으로 드러나 해림을 덮쳤다.
“어떤 수를 써서든, 어떻게라도…….”
머리를 굴려도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마련할지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설령 남자 말대로 몸을 판다고 해도 그만한 액수를 벌 수는 없었다. 손에 금세 식은땀이 배었다. 해림이 무릎에 손바닥을 올렸다.
“각오는 좋네. 야, 영수야, 우리 예쁜 도련님이 뭐든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셨단다. 어떻게 안 예뻐하냐? 근데 내가 좀 믿음이 부족해.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못 믿어서 종교가 없어요. 신도 못 믿는데 우리 도련님을 믿을까. 내일 당장 법원으로 안 뛰어간다는 보장이 없잖아.”
“정말 안 갑니다. 빈소 지켜야 하고요.”
“말은 예뻐.”
남자가 키들거리며 영수라 불린 덩치에게 손짓했다. 덩치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손수건과 반대쪽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물 묻히는 것처럼 유리병 뚜껑을 따고 손수건을 흠뻑 적셨다.
설마, 영화도 아니고. 저가 생각하는 그런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만은 아닐 거라고 해림이 남자와 덩치를 번갈아 봤다. 덩치가 남자에게 젖은 손수건을 건넸고, 남자가 불시에 해림의 뒤통수를 움켜잡았다.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잔뜩 쥐고서 남자가 젖은 손수건으로 해림의 코와 입을 막았다.
“읍……!”
몸부림쳐도 소용없었다. 남자의 힘이 워낙 강했다. 소리도 입이 막혀 나가지 않았다. 남자를 밀치려고 어깨를 붙들고 팔을 휘저었지만 아예 올라타서 해림의 반항을 막았다. 겁먹은 동물을 어르듯이 쉬, 쉬 하며 해림을 달랬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남자의 모습도 흐릿하게 물들다가 이내 새카매졌다. 해림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난리가 일어났는데도 빈소는 여전히 조용했다. 남자, 주신도가 미동도 없이 늘어진 해림을 보고서 손수건을 거뒀다. 검지와 엄지로 손수건을 들고 뒤에 선 덩치에게 건넸다. 손바닥 냄새를 맡아 보고는 으, 하며 애처럼 질색했다.
“제가 갖다 놓을까요.”
영수가 물었다. 주신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늘어진 해림의 팔에서 완장을 벗겨 영수에게 던졌다.
“이건 왜…….”
“도련님 데려가면 상주는 누가 해. 네가 앉아 있어. 빚쟁이들 오면 다 죽여 버리고. 우리한테 돈 갚으려면 도련님은 평생 개처럼 일해도 모자라. 상조 직원 오면 사촌 형이라고 잘 둘러대고.”
영수가 납득한 듯 끄덕이며 완장을 검은 팔뚝에 찼다. 누가 와도 멱살 잡힐 일은 없는 덩치와 인상이었다.
주신도가 영정 사진을 한 번 쳐다봤다. 영정 사진마저 시체처럼 눈덩이 움푹 패고 입술이 보랏빛인 중년 남자와, 제 품에 안긴 남자는 피 한 방울 안 섞였대도 믿을 만큼 닮지 않았다.
“정말 놀랍지 않냐. 어떻게 저런 인간이 이런 아들을 낳았지. 정용섭 씨, 가는 발걸음이 무겁긴 할 텐데 원래 빚지고는 편히 못 갑니다. 노잣돈은 빚에서 준 셈 치고, 나머지는 아드님한테서 받을게.”
주신도가 영정 사진에 대고 주저리 말을 걸고는 늘어진 해림의 오금과 등을 받쳤다. 끙 소리 한번 없이 애 안듯이 품에 안고 훌쩍 일어났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간당간당하게 백팔십은 될 남자인데 주신도는 조그마한 강아지라도 안은 듯 가뿐하게 들었다. 어깨에 짊어지고 가도 될 텐데 굳이 공주님처럼 안고 가는 이유를 영수는 몰랐다. 굳이 묻지도 않았다.
“내가 너도 드는데 이 말라깽이가 무겁겠냐. 빈소 잘 보고 있어라. 밥 너무 축내지 말고. 들어간다.”
“예. 들어가십쇼.”
영수가 허리를 꺾으며 구십 도로 인사했다. 주신도가 설렁거리며 빈소를 빠져나왔다. 간간이 아래로 내려가는 해림을 추슬러 올리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다다라서는 한숨을 쉬며 어깨에 턱 하니 짊어졌다. 자세가 바뀌었는데도 기절한 해림은 깨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차를 찾아 해림을 뒷좌석에 실었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서 주신도가 운전석에 앉았다. 룸미러를 제 시각에 맞추려고 비틀다가, 구슬처럼 매끈한 눈알이 거울에 비친 해림의 얼굴에 꽂혔다. 꽉 감은 눈에 속눈썹이 나무에 잘게 박힌 가시처럼 빼곡하고 길었다.
“고놈 참 잘 생겼네.”
주신도의 눈매가 빙긋 호선을 그렸다. 시동을 켜며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가늘게 접힌 눈매가 큼지막한 먹잇감을 사냥한 짐승처럼 흡족한 듯 휘었다. 핸들을 비틀자 시커먼 차가 고요한 지하 주차장을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 * *
기름 냄새가 났다. 퀴퀴한 곰팡내와 쇠 비린내가 코 점막을 자극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증이 뒤를 이었고 퉁, 퉁, 하고 쇠막대가 빈 드럼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해림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워 잘 들리지가 않았다. 간신히 눈꺼풀을 열었으나 백열등이 눈이 부셔 다시 닫았다. 한참 후에 다시 눈을 뜨고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해림이 앉은 곳만 밝을 뿐 다른 곳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드럼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눈을 조금 더 굴리자 빛이 드리워진 한쪽 벽의 아랫부분이 보였다. 녹이 슨 톱날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손목을 까닥여봤다. 거친 줄이 감겨 있는 듯이 손목은 쓰라렸고 팔뚝은 칼날로 후벼 판 듯이 욱신거렸다. 움직임도 자유롭지 않았다.
“도련님, 일어났어?”
드럼통을 퉁, 퉁 느리게 치던 소리가 멎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림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 빈소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남자가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서서 사람 정강이뼈 길이의 렌치로 어깨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 도련님은 잠꾸러기인가 봐. 언제 일어나는지 그냥 두고 보려고 했는데 너무 안 일어나서 뒈진 줄 알고 드럼통 좀 쳤어. 좀 시끄러웠지.”
남자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미안해 죽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해림이 어안이 벙벙해 남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두통이 일어서 그런지, 모든 일이 악몽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에헤이, 다시 자려고 하면 안 되지. 눈 떠. 도련님. 어서. 나 기다리게 하지 말고.”
남자가 렌치로 해림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해림이 흘끗 시선을 들며 남자의 뒤쪽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장정 두엇이 뒷짐을 지고 딱딱하게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쪽 봐야지 어딜 봐.”
파이프 렌치 끝이 해림의 턱 아래 닿았다. 목울대가 쇳덩이의 차가운 표면을 긁었다가 내려갔다. 해림이 눈을 들었다. 백열등 빛에 익숙해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도련님. 우리 빚 이야기부터 하자. 우리 도련님이 갚아야 할 빚이 십억인데 어떻게 갚을래? 나는 친절하니까 도련님 생각부터 들어줄게.”
“어제 분명 구억 팔천육백이십칠만 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액수는 확실하게 하자며 해림이 바로잡았다. 남자가 푸하하 경쾌하게 웃었다. 해림은 따라 웃지 못했다.
“도련님 머리 좋네. 근데 뇌는 산다는 사람이 없어서 못 팔아. 지금은 쓸모가 없어.”
렌치의 끄트머리가 머리를 건드렸다. 해림의 머리가 옆으로 툭툭 밀렸다.
“그래도 도련님아. 그 좋은 대가리로 빨리 어떻게 돈 갚을지 말해 봐. 들어는 준다니까.”
“……제가 가진 돈은 모두 드리겠습니다. 은행에서 최대한 대출 받아서 갚을 수 있는 돈은 먼저 갚을게요. 일단 저를 보내 주시면.”
“아니, 그런 뜬구름 잡는 말 말고. 구체적인 거 있잖아.”
렌치가 해림의 배를 쿡 찔렀다. 해림이 움찔하며 움츠러들었다.
“도련님 담배 피우지? 어제 보니까 주머니에서 담뱃갑 나오더라. 담배 그거 왜 피워. 아까운 폐 버리게.”
긴 렌치가 갈비뼈 사이를 꾸우욱 눌렀다. 폐와 살갗이 눌려 해림이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요새 간 시세가 어떻게 되냐. 각막하고 심장하고 허파하고 췌장, 골수, 피부 싹 다. 고기는 중국 애들한테 넘기고. 팔 수 있는 거 다 팔면.”
“예, 형님. 흡연자는 폐 가격을 별로 안 쳐줍니다. 폐 빼고 어림잡아서 약…….”
해림이 출하를 앞둔 돼지라도 되는 듯이 어둠 속에 선 이와 눈앞의 남자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영화라면 웃고 넘길 텐데, 등장인물이 해림이었다. 그것도 B급 호러 영화에서 가장 먼저 썰려 나갈 엑스트라였다.
“잠깐만요! 잠깐만……. 돈 꼭 갚을게요. 정말이에요. 아버지를 걸고, 저를 걸고 맹세합니다.”
그들의 평범한 대화가 해림에겐 공포였다. 그간 둔하게 살았던 세월이 역습을 가하듯 온몸에 긴장이 서렸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오줌을 지릴 듯이 아랫도리가 찌릿찌릿하고 아팠다. 식은땀이 흰 이마에 금세 고이고 아랫입술은 바짝 말랐다. 낯빛은 영안실에 누웠던 부친만큼이나 창백했다.
“뒈진 사람과 곧 뒈질 사람을 걸고 맹세하면 어떡해, 도련님.”
“진짭니다. 진짜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부친의 전화를 받았어도 한국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 아무 생각 없이 돌아온 곳이 알고 보니 관 묻으려고 파 놓은 땅이었다. 주신도는 파낸 흙더미에 삽을 꽂으며 해림을 내려다보고 웃는 저승사자였다.
남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목숨을 구걸했을 상황에도 해림은 무심할 정도로 반응이 무뎠다. 애초에 무슨 일이 터지든 둔감한 데다가, 모든 게 눈 뜨면 없어질 악몽 같아서, 현실성이 떨어져서 그랬다. 빈소에서 비몽사몽간에 담배를 피우러 나갈까 말까 고민했던 것까지만 현실로 느껴졌다.
피곤과 졸음이 겹쳐서인지 눈알이 뻑뻑하고 시렸다. 눈을 굳세게 감았다 떴다. 실핏줄이 선 흰자위가 축축하게 젖었다가 자그마한 눈물 한 방울이 뺨 아래로 툭 굴러떨어졌다.
“아……. 도련님이 우니까 마음 여린 내가 흔들리잖아. 울지 마, 도련님. 왜 울어. 다 큰 남자가 쪽팔리게. 뚝.”
해림이 겁을 집어먹어 울었다고 생각하는지, 남자가 애 달래듯 혀를 차며 해림의 눈가를 문질렀다. 남자의 손가락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났다.
남자가 뭐라고 착각했든, 눈물을 흘리니 남자가 퍽 친절하게 굴었다. 해림이 얇디얇은 희망의 끈을 발견하고 최대한 불쌍하고 가련한 척 남자를 올려다봤다. 없는 연기력을 끌어 올리느라 속에서 진땀이 다 났다. 남자가 해림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 시선을 맞췄다. 측은한 듯이 굵고 진한 눈썹이 팔(八)자로 구부러졌다.
“그럼 도련님아, 우리 도련님 몸 팔래?”
내장이 해체되는 것보다야 나은 선택이지만 당연히 망설임이 앞섰다. 찰나에 지나간 갈등과 경멸을 남자가 기민하게 읽었다.
“도련님 얼굴이 예뻐 가지고 좋은 제안한 건데. 우리 도련님이 해외에서 살다 왔다더니 국내 말고 해외가 더 마음에 드나 봐. 야, 일본에서 후장 팔고 AV 찍으면 얼마 준대냐?”
“얼마 못 받습니다, 형님. 요새는 그쪽도 경기가 안 좋아서. 장기 내다 파는 게 더 이득입니다.”
“그렇다는데.”
남자가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 해림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굵직한 손가락들 사이로 땀이 끈적하게 엉킨 머리카락이 잔디처럼 일어났다가 뒤로 밀렸다.
“도련님, 국내에서 예쁨받으면서 돈 버는 게 좋아, 아니면 고기 되는 게 더 좋아? 아, 우리 팀 닥터가 조금 많이 미친놈이라서 산 채로 배 가르는 걸 좋아하더라고. 어후, 나는 그거 어쩌다 한 번 봤는데 그 뒤로는 한참 동안 내장탕을 못 먹겠더라. 지금은 잘 먹어.”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 해림이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가 혜림의 내리깐 눈을 빤히 보다가 씨익 웃었다.
“……국내요.”
“잘 선택했어. 뒈져도 고향 땅에서 뒈지는 게 낫지. 객귀면 제삿밥도 못 먹고 그게 무슨 고생이야. 우리 도련님이 머리가 좋다더니만 선택도 훌륭하게 잘했네.”
속으로 욕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벼랑 끝에 밀어 놓고 아래로 떨어질래 아니면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에서 구를래, 선택지를 단 두 개만 주면 대부분 무얼 선택할까. 해림도 저세상 가느니 이승에서 구르는 걸 택할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럼 오늘 저녁부터 출근 가능하지? 안 그래도 한 놈이 배은망덕하게 튀어 가지고 빈자리를 메워야 해서. 우리 도련님, 푹 자고 꽃단장하고 이따 보자. 알겠지?”
남자가 해림의 파리한 뺨을 툭툭 쳤다. 남자의 손바닥이 치고 간 뺨 한쪽이 붉게 익었으나 해림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망연하게 앉아 저가 처한 상황을 곱씹었다. 당장 배가 열리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에서 내쳐져 빚과 매춘을 코앞에 둔 나락으로 떨어진 걸 불행하게 여겨야 하는지.
“얘들아, 뭐 하니. 우리 도련님이 예쁜 선택 했는데 마음 바뀌면 어쩌려고. 당장 계약서 안 가져오냐. 이 씨발 새끼들이 요새 궁둥이에 피둥피둥 살이 올랐나, 영 굼뜨네.”
남자가 장난처럼 말을 이었는데도 뒤에 선 장정들이 바짝 긴장했다. 한 명이 후다닥 움직여 남자에게 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남자가 봉투를 휘적휘적 열어 그 안에 든 종이 더미를 꺼냈다.
“응. 별거는 아니고, 내가 사람을 안 믿는다고 했잖아. 그래서 법 아래서 보호 좀 받을라고. 우리 도련님이 마음 바꾸면 내 가슴이 많이 아플 거라……. 이거는 우리 가게 계약서, 이거는 채무 이행서랑 요거는 신체 포기 각서, 권리 위임, 양도 각서하고 다른 것들도.”
남자가 수북한 종이 더미를 해림의 코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글자가 깨알만큼 작았다. 해림이 한 줄이라도 읽어 보려고 했으나 남자가 종이를 뒤로 빼며 팔랑팔랑 흔들었다.
“어차피 지장 찍을 건데 뭘 또 확인하려고 해. 우리 도련님도 참.”
남자가 뒤에 선 장정에게 턱짓하자 장정이 해림의 손목을 꽁꽁 묶은 줄을 풀어 줬다. 얼얼한 손목을 자연스레 털며 해림이 팔을 앞으로 돌렸다. 반항이나 도망은 꿈도 안 꿨다. 여기서 남자를 밀치고 튀어 봤자 금방 도로 잡혀 와 얻어맞기나 할 게 빤했다.
빚이든 계약이든 일단 여기를 어디 잘리는 곳 없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최우선이었다. 서류를 거부하면 아마 장기의 가격을 운운하며 다시금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겠지. 제가 다룰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한 대 얻어맞기 전에 순응하는 게 이로웠다. 해림은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뭐 찾아?”
해림이 두리번거리자 대번에 남자가 물었다. 펜도 인주도 안 주고 계약서에 뭘 찍으라는 건지. 설마 하며 해림이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응. 그거.”
“손가락을요?”
“우리 도련님 영화 많이 안 봤어? 요새 누가 이런 계약서에 사인하고 인주로 찍고 그래. 좀 더 강렬한 거 있잖아. 그래, 혈서 같은 거. 왜, 우리 도련님은 겁 많아서 손가락 깨무는 것도 함부로 못 하나.”
남자가 혀를 끌끌 차더니 해림의 손목을 잡았다. 해림이 퍼드득 놀라며 팔에 힘을 주고 잡아당겼다. 남자의 아귀힘만 못했다. 남자가 어허, 하고 짐짓 엄하게 꾸짖으며 해림의 엄지를 제 잇새에 끼웠다. 백열등이 비추는 이가, 특히 송곳니가 유독 크고 새하얬다.
“……윽!”
까득, 하고 살갗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얼얼한 통증에 어깨를 움츠리자 남자가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으, 비려.”
저가 깨물어 놓고는. 아까 눈물 닦아줄 때도 그랬지만 정상에서 비껴나도 한참을 비껴난 사람이었다.
남자가 종이를 해림의 앞에 대줬다. 엄지를 잡고 친절하게 (인) 자가 붙은 곳에 갖다 놨다. 신체 포기 각서라니. 지금이 무슨 팔십 년대도 아니고 저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리 없다. 해림이 마음 놓고 첫 번째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두 번째 서류도, 세 번째 서류도 남자가 친절을 발휘해 손수 엄지를 잡고 종이 위에 짓눌렀다. 상처가 종이에 눌릴 때마다 뜨끔한 통증이 일었다.
“자, 이걸로 우리 도련님의 믿음이 새싹만큼은 솟았고. 얘들아, 뭐 하니. 우리 도련님 오늘 데뷔하는데 모셔다가 목욕도 시키고 머리도 빗겨 줘라. 오늘 머리 올릴 거니까 구석구석 꼼꼼하게 잘 닦아.”
예, 형님. 하고 뒤에 있는 남자들이 허리를 숙였다. 남자가 렌치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뒤돌아섰다. 손에는 해림이 억지로 지장을 찍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
“뭐 하냐. 밤 될 때까지 도련님 두고 고사 지내게?”
남자의 재촉에 장정들이 허둥지둥 해림을 일으켰다. 어디로 끌려갈지 몰라 시퍼렇게 질린 해림을 남자가 흘끔 돌아봤다. 저를 끔찍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거늘, 장정들을 벗어날 길도 남자가 유일했다.
해림이 장정들의 손에 잡혀 간절하게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씩 웃었다. 덩치나 그간 했던 언행과 다르게 미소는 소년처럼 천진난만했다.
촛불처럼 타오른 희망은 남자가 고개를 돌리면서 훅 꺼졌다. 장정들이 팔에 힘을 주며 해림을 끌어당겼다. 남자는 끝끝내 파괴하러 온 자이지 구원자가 아니었다. 해림이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갔다.
* * *
매춘을 시킨다기에 어디 섬에나 보내지 않을까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랐다. 말 한마디만 붙여도 도륙할 듯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하게 만들고서 데려온 곳이 어느 이름 모를 건물이었다.
건물은 산속에 있었다. 한참 굽이굽이 굽은 도로를 지나, 커다란 철문을 열고 산길을 올라왔더니 이 건물이었다. 차는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주차하는 곳마다 긴 천이 늘어져 차 번호나 종류는 보이지 않았다.
덩치에게 어깨를 잡혀 차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한참 올라가다가 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해림이 침을 꿀꺽 삼키고 열리는 엘리베이터 틈을 쳐다봤다.
고급스러운 융단이 깔린 복도에 벽에는 제법 비싸 보이는 액자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려 있었다. 클림트의 ‘유디트’, 드가의 ‘머리를 빗질 받는 여인’ 등. 그림에 일관성이 없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여인의 속살이 드러난 것뿐.
액자를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문 앞이었다. 해림의 목욕부터 몸단장까지 옆에서 죄다 감시했던 장정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하는 허락에 장정이 문을 열었다.
널따란 방이었다. 복도는 화분에 액자에 바닥에 깐 융단까지 화려하게 장식했으면서 방의 첫인상은 삭막했다. 목이 긴 스탠드, 사람이 누워도 될 법한 소파와 나무 테이블, 방구석에는 서류철이 촘촘히 꽂힌 책장과 장식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해림의 시선이 방을 쭉 둘러보다가 책상 쪽에 고정했다. 의자에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경 너머로 해림을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미소 지은 얼굴과 그렇지 않은 표정의 괴리가 상당한 인간이었다.
“오, 우리 도련님 왔구나. 잠깐만. 나 서류 좀 끝내고. 금방 끝낼 거니까 거기 소파에 앉아 있어. 넌 나가 보고. 아, 도련님 잘 씻겼지? 구석구석.”
“네.”
구석구석이란 말을 듣고 해림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장정이 어디까지 다 씻으라고 일렀던 말이 떠오른 까닭이다. 비참함과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 해림의 낯빛이 시퍼레졌다가 시뻘게졌다.
장정이 나가고 해림과 남자 둘만 남았다. 해림은 남자 앞에 펼쳐진 종이 더미를 보다가 슬금슬금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이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고 싶으나 건물을 벗어나기도 전에 잡힐 게 빤했다. 도주는 신중하게, 기회를 노렸다가 단번에 해야 했다.
서류 작업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해림은 멀뚱히 앉아 욱신거리는 팔뚝을 주물렀다. 끌려오다가 부딪쳤는지 팔뚝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치료야, 장기를 내다 파느니 마느니 했던 인간들이 해 줄 리 없다.
이대로 할 일 없다며 보내 주면 좋으련만, 남자는 해림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며 일에 열중했다. 워낙 할 것 없이 심심해서 남자를 흘끗 쳐다봤다.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미간에 구김살이 가 있었다. 콧대가 높아서 안경은 그 자리에 줄곧 매달려 있고, 글자를 소리 내어 읽듯이 입술이 간간이 열렸다가 닫혔다.
“……우리 도련님은 남을 훔쳐보는 취미가 있나 봐. 우리 가게에 그런 방도 하나 있긴 한데. 그쪽으로 보내 줄까. 거울 방이야. 나도 들어가 봤는데 내 취향은 아니더라고. 남 떡 치는 거에 그다지 재미를 못 느껴서.”
고개 한 번 안 들고 시선은 용케도 눈치챘다. 남자가 놀리듯 뱉은 말에 해림이 후딱 고개를 바로 돌렸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15분가량이 흐르고 나서야 남자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큰 손아귀로 목뒤를 주물럭거리다가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의 아니게 우리 도련님을 기다리게 했네. 아니, 그냥 오늘이 처음이잖아. 일 시작하기 전에 도련님 격려하려고 불렀지. 술 좋아해?”
“적당히 마십니다.”
“주량은 세고? 양주는 몇 병 마셔?”
예전에 여자 친구와 내일은 없다며 부어라 마셔라 한 적이 있기는 한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희미했다. 주량은 몰라도 치사량은 짐작건대 한 병 남짓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술 안 좋아해도 이제부터 많이 마셔야 할 거야. 그래야 손님들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지. 떡은 쳐 봤고? 아, 이건 너무 당연한 건가. 도련님 나이에 떡 안 쳐 본 등신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고자 아니고서야.”
남자가 자문자답하고 피식거리며 장식장에서 양주 한 병을 꺼냈다. 유리잔 두 개를 손가락에 걸고 한 손에는 술병을 쥔 채 해림의 앞에 앉았다. 두 컵에 꼴꼴 소리가 나도록 양주를 따르고서 한 컵을 해림의 앞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도련님 아버지는 잘 모셨어. 요새 워낙 상조 회사들이 잘 되어 있어서. 화장도 무사히 끝내고 안치도 했지. 나중에 때가 되면 납골당 주소 줄게.”
부친의 장례식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끌려와 내심 걱정하던 차였다. 안도해야 하는지, 아니면 혈육도 아닌데 막무가내로 장례를 끝낸 거에 화를 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고심하다가 해림이 침묵을 택했다. 화를 내봤자 잠시나마 엿본 남자의 성격상 한 대 후려치기나 할 터, 입 다물고 있는 게 현명했다.
“도련님.”
남자가 안경을 벗어 한 손에 들었다.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서 해림과 시선을 맞추듯 허리를 숙였다. 움푹 굽힌 남자의 가슴 아래로 어둑한 음영이 드리웠다.
“이제부터 도련님은 여기 남창이야.”
남창. 알고 온 사실인데도 남의 입으로 다시 들으니 새삼스럽다. 제 잘못이라도 있으면 몰라, 부친이 혼자 만든 엄청난 짐짝이 갑작스레 제 등으로 옮겨 왔으니 억울함이 샘솟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하룻밤 만에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진 상실감과 갖가지 불쾌한 감정들이 아지랑이처럼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하나 해림을 사로잡을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해림은 살면서 저를 송두리째 뒤집을 만큼 강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저번에 거기가 너무 어두웠지. 계약서를 잘 못 본 거 같아서 다시 설명해 줄게. 도련님은 이제 가게에서 일하면서 손님이 원하면 그게 여자든 좆 달린 사내새끼든 대줘야 해. 물론 개별적으로 돈은 못 가져가. 그래도 도련님이 예쁘게 애교 떨면 미친놈들이 눈이 헤까닥 돌아 가지고는 나 몰래 도련님 후장에 수표를 찔러 줄 수도 있겠지.”
“…….”
“다 도련님 하기 나름이야. 좋은 사례 하나 이야기해 줄게. 우리 가게에 전설도 있어. 지희라고, 여자앤데 걔도 도련님처럼 아빠가 사업 망해서 팔려 온 애거든. 근데 얼마나 독한지 3년 만에 스폰 잡아서 빚 다 갚고 떴잖아. 지금은 애 둘 낳고 잘 살아. 가끔 연락하는데 애가 참 당차. 나보고 하루빨리 천벌 받아 뒈지라고 매일 저주 건다 그러더라고.”
남자의 웃음만 빈 공간에 요란했다. 해림은 가만히 앉아 무뚝뚝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하, 하고 웃음을 거두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도련님은 가명 뭐로 지을래. 가게에서 일하려면 가명 하나는 있어야지. 진짜 이름으로 일했다가 소문이 짜하게 퍼지면 안 되잖아.”
“그냥 본명으로 하겠습니다.”
딱히 생각나는 가명도 없을뿐더러 탈출하면 그만일 거, 굳이 귀찮게 이름을 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자가 손안에서 잔을 굴리며 해림을 빤히 쳐다봤다.
“도련님 마음대로 해도 상관은 없지만…… 정말 본명으로 갈 거야?”
“예.”
“도련님이 여기 생리를 정말 모르는구나. 도련님 룸싸롱 같은데 안 가 봤어? 애들이 본명 달고 나오디? 그러지 말고 정하, 라고 지어. 성은 필요 없고.”
“그럼 그걸로 하겠습니다.”
굳이 가명을 붙여 주겠다는 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해림이 무뚝뚝하게 받아들이자 남자가 기가 찬 듯이 웃었다.
“도련님 보면 볼수록 웃긴 사람이네. 체념한 거야 아니면 정신이 나간 거야. 남창 됐다고 해도 반응 없는 새끼는 호모 빼고는 처음 봐. 아니, 걔도 처음엔 덜덜 떨면서 울던데. 도련님은 사람이 좀 목석같아.”
남자가 전 애인인 나진과 비슷한 말을 했다. 목석. 나진도 종종 해림을 보고 불만 어린 목소리로 목석이라 불렀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인형 같다고. 얼굴만 도자기로 예쁘게 빚은.
이렇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얌전히 앉아만 있자 남자가 비식거리며 손짓했다.
“이리 와. 가까이.”
해림이 엉거주춤 일어나 다가갔다. 남자가 해림을 흘긋 올려다봤다가 불시에 다리 사이를 덥석 움켜쥐었다. 헉, 하고 해림이 몸을 움츠리며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 손에 다 안 들어가는 손목에 힘줄과 근육이 단단하게 불거졌다.
아무리 무심하다 한들 기습 공격까지 덤덤하랴. 해림이 발끈했다. 여자라면 힘으로 제압하기라도 하지, 남자는 팔이 무슨 철로 만든 기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손으로 남자가 해림의 아랫도리를 잡고 놓질 않았다.
“이게 무슨, 이거 놔!”
“어쭈. 반말도 하네. 가만히 있어 봐. 물건을 내놓기 전에 최종 점검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라고 남의 자지 잡고 있는 게 기분 좋겠어? 사장이니까 좆같아도 어쩔 수 없이 해야지.”
참다못한 해림이 반항하자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아래가 쥐어짜지는 통증에 해림이 헉, 하고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굽혔다. 해림이 어느 정도 얌전해지자 남자는 시골집 할머니가 손주의 빈 불알 만지듯이 해림의 다리 사이를 주물럭거렸다.
“자지가 이렇게 작아서야. 사모님은 못 물겠네.”
성희롱도 가지가지였다. 세상에 아랫도리 작다는 소리 듣고 참을 수컷이 몇이나 될까. 해림도 울컥했다가 얼른 이성을 다잡았다. 평균 이상이라고 해명하는 것도 한심할 꼬락서니라 가슴을 부풀리며 깊은숨만 내쉬었다.
해림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가 심드렁한 얼굴로 손을 풀었다. 해림이 얼른 남자의 팔이 닿는 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창백했던 얼굴이며 목덜미며 수치심으로 얼룩덜룩 붉게 물들었다.
“사모님 못 물면 사장님이라도 물어야지. 잘해 봐.”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에 있는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올라오라고 해, 한마디에 역시나 예, 하는 짧은 대답이 따라왔다. 전화를 끊고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앉지 않고 술잔만 든 채 해림의 맞은편에 섰다. 해림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울 만큼 체격 차이가 났다.
“어차피 도련님은 날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되지만,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지. 난 알고 넌 모르면 불공평하잖아. 주신도. 주신도 사장님이야, 내가.”
“예.”
아래를 불시에 잡힌 충격이 가시지 않아 대답도 어려웠다. 간신히 쥐어짰는데도 주신도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미간을 구겼다.
“아니, 아무리 내가 도련님 이름을 안다고 해도 도련님도 소개해 줘야지. 내 소개만 받고 끝내면 나는 억울하지.”
“정해림입니다.”
“재미도 없고, 애교도 없고……. 도련님 돈 갚을 날이 멀다, 진짜. 내가 다 암담하네. 그리고 도련님이 어떻게 정해림이야. 정하지. 이제부터 도련님은 정하라는 이름을 가진 남창이라는 거 아직 인식 못 한 건 아니지? 일 고달프게 하지 말자.”
“……예.”
소개니 뭐니 결국엔 제가 설 자리가 어디인지 알려 주려는 수작이었다. 해림이 주먹을 꾹 쥐고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주신도가 순식간에 팔을 뻗어 해림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고개가 뒤로 훅 넘어갔다. 두피가 뜯겨 나가는 통증에 해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윽, 하는 신음이 절로 터져 나갔다. 주신도가 거친 손길과 달리 다정하게 이마를 맞댔다. 바로 코앞에 주신도의 얼굴이 놓였다.
“다시 묻자. 도련님 이름이 뭐라고?”
시선을 둘 곳이 없다. 해림이 눈을 깜박이고서는 주신도와 눈을 맞췄다. 새카만 동공과 그 주변에 가늘게 퍼진 실선들이 보일 만큼 가까웠다. 적색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를 쳐다보고서 해림이 입을 열었다.
“정하입니다.”
탈출을 하기 전까지는 그쪽이 원하는 장단에 맞춰 춤을 춰 주는 게 안전했다. 해림이 순순히 대답하자 주신도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그래. 정하야. 부디 예쁘게 굴어서 전설을 새로 쓰길 바라. 이건 진심이야. 정하가 돈 잘 벌어서 빨리 빚 갚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어.”
남자가 힘껏 쥐었던 머리카락을 손에서 놔주고서 쓱쓱 쓸어내렸다.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 놓을 것처럼 잡아당길 때는 언제고, 뒤통수도 동글동글하니 잘 생겼다고 감탄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주신도의 태도가 기가 찼다.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해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들어와, 하며 짧게 대꾸했다. 문이 열리고 긴 머리를 가진 여자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어, 왔어. 여기 신입. 인사해. 우리 가게 실장.”
여자가 일견 측은하게 해림을 쳐다봤다. 무섭도록 아름답게 생긴 여자였다. 화려한 원피스에 고운 화장이 잘 나가는 연예인 뺨을 치고도 남았다.
해림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여자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이며 맞인사했다. 주신도가 뿌듯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고는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우리 도련님이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모르는 게 많아. 실장이 잘 좀 알려 줘. 손님한테 폐 끼치게 하지 말고.”
“네, 사장님.”
“룰도 알려 주고. 내가 바빠서 규칙을 못 알려 줬네.”
주신도가 이제 가 보라며 손짓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안경을 쓰고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아 참, 하며 막 나가려는 해림을 잡았다.
“도련님. 대가리 굴리는 거 보여서 그러는데……. 혹시라도 탈출할 생각 있으면 그냥 접어. 그거 끝이 너무 안 좋아. 정말.”
나직한 경고였다. 해림은 대답을 삼키고 고개만 까닥였다.
방을 나와 문을 닫고 나서야, 주신도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맥이 막 풀리듯 긴장이 풀어졌다. 같은 구렁텅이라도 방보다 복도가 나았다.
“……없어요.”
사장실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유리가 말을 건넸다. 사장실에서 벌어진 일만 곱씹느라 유리의 말을 반 이상 놓쳤다.
“예?”
“여기 애들, 기구한 사연 없는 애들 없다고요. 그쪽이 무슨 사연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어차피 여기에 갇힌 거 기왕이면 열심히 해 봐요. 사장한테 지희 이야기 들었어요? 그 인간이 희망 준다고 지희 이야기 할 텐데.”
“예. 들었습니다.”
“그거 사실이에요. 애가 들어올 때부터 눈에 독기가 잔뜩 있었는데, 결국 돈 많은 회장님 하나 물어서 뜨지 뭐예요. 난 아직 5년째 이렇게 박혀 있는데. 이제는 나가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여기만이 답인 거 같고.”
“…….”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면 침묵이 가장 낫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하소연에 이러쿵저러쿵 위로를 해 줄 만큼 살가운 성격도 못 되어, 해림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여기는 ‘한연동’이에요. 다른 이름이 있긴 한데 다들 한연동이라고 부르니 그렇게 부르면 돼요. 보다시피 매춘이 주업이고요. 남자 여자 안 가려요. 보통 남들한테 추잡한 모습 들키면 곤란한 사람들이 많이 와요. 의원님이나 사장님이나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요. 나 저번에는 함기찬도 봤다니까. 실물은 키 작은 꼬맹이더만.”
여자가 핏 하고 코웃음 쳤다. 함기찬이라면 해외에서 오래 산 해림도 아는 유명 인사였다. 잉꼬부부 이미지에 드라마에서 굵직한 역할을 맡곤 하는 중년 배우였다.
“그래서 항상 입을 조심해야 해요. 발설하면 그때는 사장한테 반 죽고 손해 배상이니 어쨌느니 빚을 늘리거든. 아, 사장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그 인간 기분은 웬만하면 거스르지 마요. 얘가 생긴 건 저렇게 생겨서 아주 미친놈이야. 웃다가도 정색하고 전기톱 들고 날뛸 새끼라니까. 홱 돌면 사람 죽이는 건 일도 아닐걸요.”
나라님도 없으면 욕한다고, 여자가 쌍시옷을 들어간 욕을 섞으며 사장을 욕했다. 해림이 파악한 인간상과 얼추 들어맞았다.
주신도는 혼자 떠들고 혼자 웃고, 조곤조곤 달래는 어조로 사람을 협박하는 데 능통한 인간이었다. 푼수 같은 겉모습 뒤로 피 냄새가 진득하게 풍기는 위험한 유형이었다. 그 안에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 속을 직접 까 보지 않고는 짐작조차 못 할 일이었다.
“그리고 도망갈 생각일랑 사장 말대로 접어요. 잡혀 올 때 팔뚝 아프지 않았어요? 거기에 위치 추적기 넣어 놨을걸. 사람을 아주 개 취급하지.”
팔뚝이 아팠던 이유가. 해림이 팔뚝을 손으로 감싸자 여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거 없애겠다고 팔뚝 연 애들 많아요. 그래도 잡아 오더라. 인간의 탈을 쓴 개새끼인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래로 한 칸 내려가자 호텔의 비좁은 복도처럼 방이 죽 늘어져 있었다. 복도를 가면서도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장이 되게 웃긴 사람이에요. 우리들 다 물건 취급하면서 방은 또 혼자 쓰게 해 줘. 밥도 잘 주고 심지어 저쪽 구석엔 피트니스 방도 있어요. 애들이 원해서 해 준다면서 사흘에 한 번씩 요가 선생님도 불렀어. 그것도 다 빚으로 올려 놓긴 하지만. 확실히 미친놈 맞죠?”
“미친놈 맞네요.”
처음으로 맞장구를 쳤다. 도망치지 못하게 팔에다가 위치추적기를 박아 놓고 협박으로 매춘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으면서 감옥은 호화롭게 꾸며 놓다니.
“그것 때문에 사장이 좋은 놈이라고 착각하고 여기에 머물겠다는 미친 애들도 있어요. 무슨 사이비 교주와 신도들도 아니고. 그쪽……. 아, 이름이 뭐랬죠?”
“정하입니다.”
해림이라고 밝힐 뻔했다. 여자가 해림의 속내를 알아챈 듯한 쪽 입꼬리만 비죽이 올렸다.
“그래요. 난 유리예요. 만나지 않는 게 나았을 테지만 이왕 만난 거 잘 지내봐요.”
유리가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세웠다. 카드를 대자 기계음이 나고 문이 열렸다. 방은 비즈니스호텔처럼 단출하면서도 깔끔했다. 책상, 소파, 테이블, 침대, 옷장, 그리고 욕실까지. 당분간 지내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정하 씨는 부디 사장한테 홀리지 않길 바라. 미친놈이 사람 꾀는 기술이 대단해서 가끔은 차라리 걔한테 접대하라고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 넋 놓고 있다가는 어느새 먹혀요. 그렇게 여기에 발목 잡힌 애들 많이 봤어.”
“그럴 일 없습니다.”
사람을 납치, 감금하고 매춘시키는 남자가 무슨 매력이 있다고. 해림이 같은 성별을 좋아하는 성향이었어도 주신도는 사절했을 터였다. 그런 위험한 인물과 얽히고 싶은 마음은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평범하고 조용히 흘러가야 할 인생을 가파른 절벽으로 굴러 떨어트리는 어리석은 짓을 왜 사서 하랴.
“……정하 씨, 되게 무뚝뚝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참 걱정이 앞서네. 하여튼 한 시간은 쉬어요. 배고프면 6층으로 가시고요. 주방장한테 부탁하면 언제든 요기할 거리는 해 줘요. 이따 전화 울리면 5층으로 내려오고. 여기.”
유리가 해림에게 검은색 가죽 팔찌를 건넸다. 가운데에 숫자가 적힌 타원형의 은색 금속이 시계 머리처럼 달려 있었다.
“이거 잃어버리지 말아요. 통행증이거든. 식당에 가더라도 이거 찍고 먹어야 해서. 방 열쇠도 되고요. 어딜 들어가든 이게 필요할 거야. 찍고 움직여야 하니까.”
해림이 팔찌를 족쇄라도 되는 듯이 내려다봤다. 유리가 직접 팔찌를 해림의 손목에 채웠다. 번쩍이는 은색이 흡사 수갑 같았다.
유리가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방에 해림 홀로 남았다. 해림은 무감하게 방을 둘러보다가 잘 정돈된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겨우 하룻밤 새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기절한 걸 제외하면 잠도 못 잤다. 근 이틀에 가까운 시간을 꼬박 지새웠다. 자기를 더 굴리면 과부하를 일으킬 거라며 뇌가 파업을 선언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해림이 천장을 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모든 일이 현실감이 없었다. 부친의 죽음과 장례식, 장례식에서 만난 기이한 남자 주신도. 빚의 존재를 알고 납치를 당하고 폐공장 같은 곳에서 협박을 당하고, 엄지를 물어뜯기고 피로 지장을 찍고, 덩치들에게 끌려가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또 주신도를 봤다. 이제부터 너는 정하라는 이름을 가진 남창이라며 이마에 낙인을 찍듯 알려 주고 내려보냈다.
어디로 도망가 도움을 요청할 5분도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계획된 덫에 발목이 단단히 걸린 듯했다. 해림은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려다가 지끈거리며 열이 오르는 팔뚝을 붙잡았다.
팔 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열이 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덤덤하게 지나가고는 했는데. 인생이 하룻밤 사이에 거꾸로 뒤집히니 매사를 관조하듯 흘리는 해림도 파도에 휩쓸린 듯이 정신이 없었다.
일단 한숨 자고 보자. 잠이 부족해서 뇌가 일하길 멈춘 걸 거야. 자고 일어나서 밥을 먹고, 당분과 탄수화물을 충족한 뇌가 깨어나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
해림이 느리게 끔벅거리던 눈을 완전히 닫았다. 피곤에 지친 몸이 나락으로 까무룩 가라앉았다.
「정말 괜찮아?」
나진이 물었다. 해림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끄덕였다. 처음에는 뭐가 괜찮냐고 묻는지 몰라서 파악하느라 반응이 느렸다. 나진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해림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머님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조금 더 있다 가지. 아버님도 서운하실 테고.」
모친이 소천하셨다. 오랜 지병이 끝끝내 모친의 생명을 거뒀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해림이 어렸을 적에도 그리 건강치 못한 모친이었다. 언제 하늘로 돌아가도 어색하지 않을 모친은, 다른 이들의 예상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버텼다.
부친은 무교지만 모친이 몇 년 전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장례식은 모친의 종교 방식으로 치렀다. 엄숙하고 진중하고 어두운, 곡소리가 없는 깔끔한 장례였다. 해림은 묵념하면서도 내심 죽기 전에 종교를 갖는다면 기독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순전히 고요한 장례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회사 일이 바빠.」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애도는 장례 때 충분히 했다. 눈물도 흘렸고 상실에 빠진 부친도 위로했다. 아들로서의 역할은 빠짐없이 다한 셈이라고, 적어도 해림은 생각했다.
하나 나진은 미묘하게 표정이 달랐다. 저를 보는 눈빛이 마치 다른 생명체 보듯 하기도 하고, 질린 듯한 기색도 얼핏 떠올랐다가 사그라졌다. 너무 냉정하게 떠나는가 싶어 해림이 뺨을 긁적였다. 나진이 염불처럼 외던 무심하단 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성싶었다.
「그래도. 휴가 받았잖아. 아버님이 진정될 때까지만 있다 가자.」
아직 한 주 남짓 휴가 기간이 남아 있었다. 머물려면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림은 떠나길 원했다. 감정을 추스르는 건 각자의 몫이었다. 해림은 해림의 감정을, 부친은 부친의 감정을 추스르면 될 일이었다.
「너도 알잖아. 지금 바쁜 시기야. 휴가 내는 것도 눈치 보였는데 뭉그적거리다가 다음 계약 때 잘리면 어떡해.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지.」
냉정하게 들리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거기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유학 가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편입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옆에서 지켜본 나진이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애인이지만 정말……. 자기는 가끔 너무 차가워. 감정이 없는 건지, 둔한 건지, 아니면…… 느리게 오는 건지.」
묘한 여운이 남는 혼잣말이었다. 해림은 나진을 묵묵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캐리어에 짐을 넣었다. 나진이라면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스스 흩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완벽한 이해는 타인이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해림이 눈을 떴다. 잠들기 전 눈을 뜨면 익숙한 호텔 천장이길 바랐는데 역시나 헛된 바람이었다. 눈감기 전 봤던 무늬 없는 천장이 해림을 비웃듯이 내려다봤다.
깊게 잠들었으나 깨기 전에 꾼 꿈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 기분이 찝찝했다. 모친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귀국했던 때였다. 그때는 제 앞길만 보느라 바빠 나진이 했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다음에 나진을 만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몰라서 미안했노라 말하리라. 만날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해림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벨 소리는 아직도 시끄러웠다.
“여보세요.”
―정하 씨, 준비했어요? 20분 뒤에 5층으로 내려와요. 일할 시간이야.
낭랑한 목소리가 현실을 일깨웠다. 꿈에서 들은 나진의 목소리와도 비슷했다. 해림이 한 박자 느리게 예,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와서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 무턱대고 안 내려간다면. 아마 장정들이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내려갈지도 모르겠다.
해림이 옷을 훌훌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나진이 나온 꿈을 악몽처럼 느꼈는지, 아니면 방의 온도가 높았는지 머리카락도 목덜미도 땀이 흥건했다.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머리도 수건으로 대충 말렸다. 늦잠 잤을 때는 5분 만에도 준비를 마치고 나온지라 남은 시간이 넉넉했다. 해림이 주변을 둘러볼 겸 느릿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는 아래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다. 유리가 해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머리도 안 말리고 나왔어요? 향수는?”
“없습니다.”
“정말 신입이네. 뭐, 선택 못 받으면 정하 씨 손해니까.”
선택, 이란 말에 해림의 입가가 움찔했다. 한국에 계약 차 들리면 그쪽 영업 사원들이 항상 권하던 코스였다. 가서 노래방에서 놀고 오자고, 아가씨들이나 ‘초이스’ 하자고, 어디에 새로 여자가 들어왔는데 물이 좋다고.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해림이 됐다고 거부하면 이런 희귀종은 처음 봤다는 표정을 짓다가, 나중에 뒤에서는 혼자 고고한 척한다며 욕을 했다.
고르는 입장도 싫어 진저리를 쳤는데 반대 입장에 처하다니. 상황이 우습다. 해림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유리를 따라갔다.
“여기는 대기실이에요. 여자 대기실은 저쪽이고 남자는 여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면서 미친 사장이 나눠 놨잖아. 눈 맞으면 튈 생각만 한다고.”
유교 사상을 따르면서 매춘으로 돈을 번다. 사장은 알면 알수록 미친 사람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시간 되면 애들 따라가요. 많이 선택받을수록 빚을 갚는 거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 봐요. 여기서 좀 알려지면 예약도 들어오고 할 거야. 정하 씨는 얼굴은 예쁜데 성격이 무뚝뚝해서 좀 걱정이긴 하지만.”
“예.”
아무리 잡고 있다 한들 말도 안 되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잡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당히 장단 맞춰 주다가 기회를 틈타 여기를 나가 법적 절차를 밟고서 빚에서 자유로워지리라. 빚이고 뭐고 다 버리고서 외국으로 도망치는 방법도 있었다.
유리가 방으로 들어가 보라며 손짓하며 등을 돌렸다. 버릇처럼 노크를 두어 번 하고 해림이 문을 열었다.
대기실에 있던 이들이 일시에 해림을 주시했다. 소파에 반쯤 누워 게임기를 두드리는 남자부터 거울을 보고 있던 남자, 옷을 추스르던 남자와 구석 매트에 누워 잠을 자던 남자도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해림을 쳐다봤다.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해림이 무덤덤하게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런 시선들이야, 동양인 없는 서양인들 무리 사이에서 많이 받아 봤다.
“안녕하세요.”
“신입이에요? 태훈이 그 새끼 토꼈다더니 사장이 용케도 신입을 데려왔네.”
소파에 누워 있던 남자가 씩 웃으며 일어났다.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이 인상 깊었다.
“이름이 뭐예요?”
“정하입니다.”
“어, 이름 잘 지었네요. 나는 이형, 쟤는 지원이고 주하, 마지막으로 저기서 퍼 자는 놈은 시훈인데 뭐,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어요.”
해림도 속으로 동의했다. 나가면 끝날 인연들을 굳이 기억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나저나 그쪽, 태훈이 대타면 그쪽도 호모예요?”
“아닙니다.”
“와 잘 됐다. 안 그래도 우리 내기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쪽도 할래요?”
“무슨 내기요.”
“후장이 언제 뚫리나.”
정면을 응시하던 해림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이형이 장난기 어린 얼굴이 씩 웃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대자로 뻗어 자는 시훈을 발로 툭툭 찼다. 시훈이 아이 씨발, 욕을 하며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신입 아다래.”
벽을 보고 몸을 말았던 시훈이 거북이처럼 느리게 고개를 꺾었다. 졸음에 눌려 실처럼 가느다랗던 눈매가 휘둥그레 벌어졌다. 크게 뜬 눈으로 시훈이 해림을 관찰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상품 보듯이 훑고서 입을 열었다.
“3일.”
“나는 일주일.”
어이가 없었다. 해림이 쳐다봐도 내기를 거는 이들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요. 우리도 다 겪은 일이거든. 나는 얼마 만이었더라. 아다라고 돈 존나 많이 준 것만 기억나네.”
이형이 과거를 더듬듯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쳐다봤다. 악의적인 내기를 걸고서 악의가 아니라니. 해림을 테이블 가운데 묶어 놓고 돈을 거는 악당들처럼 여기저기서 며칠입네 떠들어 댔다. 해림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저 없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저도 걸겠습니다.”
“그쪽도?”
“평생 그런 일은 안 겪는다는 데.”
해림을 제외한 나머지가 서로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다가 이윽고 푸하하, 풍선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해림이 무감하게 쳐다봐도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쪽 상황 파악이 덜 됐구나. 다른 놈들한테 잡혔으면 내가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는데, 여기 사장한테 잡혔으면 아니에요. 살고 싶으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장이 원하는 대로 굴러 줘야 해. 사장이 놓아주기 전에는 도망은 꿈도 꾸지 말고. 태훈이 새끼한테도 그렇게 강조했는데, 그 머저리가 결국.”
“그놈은 언젠가 일 치를 거 같았어. 눈 데굴데굴 굴리면서 잔머리나 쥐어짜는 게. 미리 명복이나 빌어야지. 넌 며칠 보냐?”
시훈이 두 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켜며 두 번째 내기를 제안했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 만에 잡힐 거라며 한마디씩 보탰다.
“그쪽이 이해해요. 애들이 놀 게 없다 보니 내기에 환장을 했어. 그쪽도 걸래요?”
“아뇨.”
저를 건 유치한 내기야 욱하는 기분에 달려들었다지만 남의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는 부담스러웠다. 해림이 고개를 젓자 김빠졌다는 듯이 다들 고개를 돌리고서 저승사자처럼 태훈이란 사람의 죽을 날짜를 논했다. 가장 긴 건 2주였고, 가장 짧은 건 3일이었다.
“그 새끼 튄 지가 지금 5일 째니까 슬슬 잡힐 때 됐어.”
“걔가 얼마나 철저한 놈인데. 탈출하기 직전까지 우리한테 입 한 번 벙긋 안 한 놈이야. 난 2주 본다.”
“뒈지기 전에 내 돈은 갚고 죽었으면.”
각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와중에 벽에 걸려 있는 기계에 빛이 들어왔다. 딩동, 하는 경쾌한 알람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이야, 일해야 하는 시간이다. 자, 즐겁게 노동하러 갑시다. 오늘은 어떤 씨발놈들이 갑질을 하려나.”
시훈이 노래처럼 혼잣말을 흥얼거렸다. 널브러진 사람들도 저마다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확인하고 비틀어진 옷자락을 바르게 탁탁 펴고서 해림을 스쳐 지나갔다. 맨 마지막으로 나가는 이형이 아직도 제자리에 서 있는 해림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꼴로 선택받긴 글렀지만, 그래도 와서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살펴봐요. 도움이 될 거야.”
이대로 그들을 따라가는 척 건물을 나갈 수 있다면 좋겠건만. 해림이 아직도 얼얼한 감이 남은 팔뚝을 손으로 감싸고서 가슴이 들썩이도록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뭉그적거리다가 일행들을 놓칠라, 해림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이형의 뒷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방을 나섰다.
대기실에서 본 이들 외에도 멀끔하게 꾸민 이들이 복도에 늘어서 있었다. 다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준 듯했으나 외모만 보고 따지자면 대기실 패거리만 못 했다. 이렇게 비교하니 대기실 패거리의 미모가 새삼 와 닿았다. 분위기는 달라도 다들 연예인 제의는 넘치게 받아 봤을 얼굴들이었다.
해림이 줄 맨 끝에 서서 앞에 선 사람들을 흘끗 바라봤다. 그들이 누군지 궁금함 반, 알아 봤자 뭣하냐는 냉소가 반이었다. 해림의 속내를 알아챈 듯이 앞에 선 이형이 손등으로 제 옆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우리는 사노비고 저쪽은 솔거 노비예요. 돈 많은 양반들 물 수 있다고 소문나서 몰려든 애들인데, 별거 없어요. 머릿수 채우기용.”
말인즉, 대기실 인원은 노예고 저쪽은 프리랜서라는 뜻이었다. 해림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알았다는 말을 대신했다.
바짝 마르고 키가 작은, 입매가 옹졸해 어딘지 모르게 쥐와 닮은 인상을 가진 남자가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을 훑었다. 남자가 손으로 짚은 호스트들이 죄다 구십 도로 허리를 굽히며 ‘감사합니다!’를 외쳐 댔다. 방에 누가 들어갈지 고르는 최종 결정권이 저 사람의 손에 달린 성싶었다.
남자는 느릿느릿 줄 앞을 배회하다가 해림의 앞에 딱 멈춰 섰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물건 상태를 확인하듯 해림을 샅샅이 뜯어봤다. 이마며 눈썹이며 콧대와 입술과 턱을 보고 아랫도리까지 지그시 살폈다.
설마 이 인간도 예고도 없이 제 아랫도리를 덥석 쥐는 건 아닐까. 해림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등 뒤가 벽이라 물러나봤자 그 자리였다.
“신입이지?”
“예.”
“들어가.”
차마 감사하다는 인사는 나오지 않았다. 고개만 꾸벅이자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며 옆에 있는 이형에게도 턱짓했다. 이형이 해림의 몫까지 인사하려는 듯이 목청껏 감사하다고 외쳤다.
“다음엔 인사 제대로 해요. 채홍이 삐지면 리스트에서 다 빼거든요. 방에 안 넣어 줘.”
“채홍이?”
“채홍사. 저 인간 별명이에요. 대놓고 부르면 지랄하니까 없을 때 몰래 불러요.”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누가 지었는지 찰떡같이 어울렸다. 앞에 뭐가 펼쳐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땅딸막한 아저씨에게 붙은 별명이 웃겨 해림이 작게 피식 웃었다. 이형이 해림 옆에 바짝 붙어 가다가 우연히 미소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웃으니까 인상이 다르네. 그쪽 자주 웃어야겠어요. 표정 굳히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더 잘생겼네.”
이형의 호들갑에 작게나마 어렸던 미소가 해림의 입매에서 삽시간에 지워졌다. 도로 무덤덤하게 돌아온 해림을 보고 이형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그래요. 뭐, 일이나 하러 갑시다.”
일. 그 단어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다른 이들이 한껏 멋을 부린 공작이라면, 저는 물웅덩이에 빠졌다가 건져진 참새 꼴이라 당연히 선택은 피해갈 것이다. 어떤 분위기인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여겨보자며 해림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대기실만큼이나 넓었다. 전체적으로 붉은빛이 도는 방이었다. 소파며 벽지며 테이블이며 죄다 은은한 붉은 색이었다. 방의 중앙을 차지한 커다란 테이블에는 이미 아기 욕조 크기의 얼음통과 양주가 꼬치처럼 꽂혀 있었다.
그중 가장 상석에 손님이 앉아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자였다. 척 봐도 온몸에서 돈 냄새가 풍기는 우아한 중년 여성이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흐릿한 담배 연기가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채홍에게 간택 받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 일렬로 섰다. 다들 어떻게든 여자의 눈에 들어 보겠다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뒷짐을 졌다.
“회장님께 인사드립니다!”
맨 앞에 선 이가 면접장에 들어선 면접자처럼 외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들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 해림만 때를 놓쳐 한 박자 느리게 허리를 굽혔다. 여자의 매서운 눈빛이 해림에게 꽂혔다.
“저 버릇없는 건 뭐야?”
“아, 이 친구가 오늘 들어온 신입이…….”
유리컵이 안에 든 술을 흩뿌리며 홱 하니 날아왔다. 아슬아슬하게 이형을 비껴가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가 터지며 유리 파편들이 발치로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너한테 물었어? 어디서 허락도 없이 주둥이를 놀려.”
대신 답해 주려던 이형이 입을 합 다물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해림이 이형의 뒤통수를 보고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까지 숙이고 들어가야 할지 가늠하듯 여자를 살폈다.
“이름.”
“정하입니다.”
“목소리는 마음에 들어. 노래도 잘 불러?”
“잘 못 부릅니다.”
“불러 봐. 아무거나.”
기분이 좋으면 흥얼거리기는 해도 마이크를 잡고 부르거나 나서서 부르지는 않았다. 즐겨 부르는 노래도 딱히 없는 데다 가사가 있는 노래는 듣지도 않았다.
어서, 하고 재촉하는 소리에 해림이 어쩔 수 없다며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불렀다. 전 국민이 아는 동요였다. 엄마가 섬 그늘에, 라고 시작하는 노래로 기본 교육을 이수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았다.
해림이 노래하자 옆에서 풉, 큭, 하며 애써 웃음을 참는 소리가 터졌다. 해림이 꿋꿋하게 1절을 끝내고 입을 다물었다. 다들 어깨를 떨며 우는 듯 웃는 상황에서도 해림은 당당했다.
“나가.”
노래를 끝내자마자 재고할 여지도 없다는 듯 여자가 명령했다. 지명될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해림이 덤덤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에는 여전히 남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채홍에게 뽑히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대로 몰래 빠져나가 탈출할 구멍이 있나 찾아보고 싶은데, 구석 의자에 앉아 손톱을 깎던 채홍이 해림을 발견하고서 흘겨봤다.
“어딜 튀려고. 저 끝에 서 있어.”
채홍이 해림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세워 뒀다. 몰래 도망치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해림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복도는 숨소리나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발걸음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다시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채홍에게 밉보였는지 아니면 꼴이 말이 아니라서 그런지, 다른 손님이 와도 해림은 번번이 선택에서 제외됐다.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다가 채홍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 깨어나길 반복했다.
길었던 줄도 어느새 짧아지고, 복도에 남은 건 해림을 비롯한 몇과 채홍뿐이었다. 다들 피곤이 그렁그렁 녹은 동태 눈을 하고서 벽에 기대어 있거나 복도에 앉아 있었다. 채홍은 아예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다.
댕, 하고 묵직한 종소리가 연이어 네 번 울렸다. 채홍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아직 복도에 여남은 이들의 머릿수를 세고서는 턱에 질질 샌 침을 닦았다.
“이제 그만 다들 해산. 오늘 영업 끝났어.”
첫날은 그렇게 소득도 배운 점도 없이 끝났다. 다들 비척거리며 복도를 벗어났다. 이형이 솔거 노비라고 표현한 이들은 가는 길이 달랐다. 해림이 모른 척 그쪽으로 발길을 틀자, 채홍 곁에 있던 덩치들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해림의 어깨를 턱 잡았다.
“그쪽이 아닙니다.”
위치 추적기 믿고 돌아다니게 놔두는 줄 알았더니만, 감시가 있긴 했었다. 해림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자연스레 덩치를 올려다봤다.
“흡연실이 어딥니까.”
“반대쪽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있습니다.”
실내 흡연은 불가하오니 바깥으로 나가서 흡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멘트를 기대했으나 덩치가 무참하게 희망을 깨부수고 흡연실을 알려 줬다. 해림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담배 피울 생각은 없었는데 미로같이 꼬인 복도를 걷다 보니 현실이 무겁고 속이 답답해 흡연 욕구가 치밀었다. 덩치가 알려 준 대로 발을 틀자 구석에 흡연실로 보이는 유리문이 나왔다. 은색 긴 원통 모양의 재떨이가 이리 오라며 해림을 유혹했다.
해 봤자 복도 구석에 환풍기 하나 딸린 골방 같은 곳일 거라 예상했거늘, 어느 번듯한 회사에 비치된 흡연실처럼 인테리어가 깔끔했다. 한쪽 벽은 탈취 식물로 장식하고 구석에는 공기 청정기까지 있었다.
보면 볼수록 우스운 곳이었다. 매춘 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근무도 주 5일이라고 누가 와서 말해 주면 일만 최악일 뿐 번듯한 회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
빚에 팔려 와서는 별 미친 생각을 다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겹쳐서 미쳤는지, 잠을 못 자서 돌았는지.
해림이 짜증스러운 손길로 담배를 빼 물고 창가 근처에 앉았다. 손잡이를 비틀어 밀자 창문이 열리며 좁은 틈이 생겼다. 혹시나 도망갈 수 있을까 고개를 길게 빼고 살폈다. 머리통도 못 빠져나가게 틈이 좁은 데다가 높이가 까마득했다. 안간힘을 써 빠져나가더라도 떨어지면 최소 골절이었다.
해림이 주머니를 뒤지며 라이터를 찾았다. 급히 나온다고 담배만 덜렁덜렁 들고나왔다. 필터를 질근질근 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놓고 간 라이터라도 운 좋게 발견하길 바랐다.
“없네.”
바닥에 굴러다니는 꽁초 하나 없이 방이 깔끔했다. 해림이 오기 전에 누가 와서 청소라도 해 놓고 간 듯싶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해림이 바깥을 쳐다봤다. 서늘한 새벽바람이 해림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은 그때 열렸다. 라이터를 빌릴 사람이 생겨 해림이 미미한 미소를 띠며 돌아봤다. 얼굴을 보자마자 손톱만큼 휘었던 입매가 도로 일자로 변했다.
“싹싹하게 인사는 못 할망정 어디서 똥 씹은 표정이야. 사장님에 대한 애정이 그거밖에 안 돼? 도련님 성질이 못됐다.”
주신도였다. 해림이 고개만 까닥하고 일어났다. 담배는 필터가 젖어 살릴 수가 없었다. 가는 길에 재떨이에 버리려는데, 주신도가 문지기처럼 유리문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앉아.”
방정맞은 기색도, 항상 입가에 은은하게 어렸던 미소도 없었다. 짧고 굵은 명령이었다. 해림이 의자에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잘 훈련된 개처럼 저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해림이 머리에 물음표를 몇 개씩 띄우며 눈만 깜박이는데 주신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해림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고 톡 쳐서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새에 물었다.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도 나왔다. 해림이 어른거리는 불꽃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빌려줘?”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도는 원수라도 라이터는 죄가 없었다. 달라고 손을 뻗었더니 주신도가 라이터를 손아귀에 쥐고서는 가만히 쳐다만 봤다. 준다고 했으면서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도련님은 정말 갈 길이 멀구나. 담배 물어.”
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답지 않은 반항심이 삐죽 들었다. 라이터를 달라고 하려다가 죽으라는 명령도 아니고 못 들어 줄 것도 아니라 해림이 얌전히 담배를 물었다. 그제야 라이터 불꽃이 해림의 담배 끝을 발갛게 태웠다. 볼우물이 홀쭉 패게 연기를 들이마시고 음미하자 실타래가 들어앉은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담배 맛있게 피우네, 도련님. 몇 살 때부터 피웠어?”
“스물둘이요.”
“끊어 봐. 그거 몸에 좋지도 않은데 왜 계속 피워. 나중에 도련님이 빚 다 못 갚으면 그 폐도 떼서 팔아야 하지 않겠어. 깨끗한 폐가 좋은 값을 받아.”
장기를 내다 팔겠다는 말에 진심이 담겨서 잠깐 소름이 돋으려다 말았다. 저를 납치하고 감금한 인간과 이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대꾸도 쉽게 나갔다.
“그쪽도 피우잖습니까.”
“사장님이라고 불러야지. 우리 도련님이 이렇게 버릇이 없어서 어떡해. 그리고 나는 괜찮아. 장기 팔 일이 없어서.”
주신도가 키들거리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홀쭉해진 뺨 위로 단단한 광대뼈가 불거졌다. 적색이 도는 갈색 눈동자의 윗부분이 눈꺼풀에 가려지며 얼굴에 묘한 분위기가 어렸다. 끌어 올린 입꼬리는 덜 여문 소년처럼 장난기가 가득한데 눈매와 눈썹과 콧대는 장성한 사내처럼 야릇하다. 이목구비의 조합이 어찌 보면 괴상하기까지 했다.
“도련님. 빚 갚을 생각 없어?”
주신도의 물음에 해림의 어깨가 움찔했다. 딴 세상에 빠져 있다가 갓 건져 올린 사람처럼 놀랐다. 해림의 시선이 주신도의 입술에 꽂혀 있다가 올라왔다. 주신도가 고개를 틀며 연기를 멀리 뱉어 냈다.
“나 아까 웃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잖아. 도련님 미쳤어? 노래 불러 보라니까 엄마가 섬 그늘에 가서 굴 따러 갔다는 노래가 왜 나와. 여긴 예쁨받아야 하는 곳이지 개그하는 데가 아니에요. 개그는 빚 다 갚고 하자. 응?”
노래 부를 때는 하늘 아래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했건만 주신도의 입으로 다시 들으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 해림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으로는 턱을 가리며 붉어진 낯짝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사장이 일 돌아가는 걸 모르면 안 되지. 벽에도 귀가 있고 천장에도 눈이 있지 않겠어. 아 참, 도련님. 오늘부로 이천만 원 추가야.”
“왜요.”
십억에 가까운 빚도 있는데 거기에 이천이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지랴. 무슨 억지를 부려 빚을 얹었는지 남 일 묻듯이 해림이 물었다. 주신도가 창문 밖으로 담뱃재를 툭 털었다.
“숙박비와 식비는 받아야지. 우리가 자선 단체도 아니고 땅 파서 돈 버나. 이천이면 싸게 준 거야. 좋은 호텔도 하루에 기천이 넘는데 여기는 피트니스 있고 삼시 세끼 제공하고, 원하면 요가도 할 수 있잖아. 이렇게 저렴하게 복지 챙겨 주는 회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주신도의 목소리에서 뿌듯함이 넘실거렸다. 해림이 말을 삼가고 담배를 물었다. 할 말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내뱉어 봤자 본전도 못 찾을 것들이었다.
“그 요가 선생 괜찮아. 인도도 다녀왔대. 나도 따라 해 보려고 했는데 영 유연성이 안 따라 줘서. 도련님은 해 봐. 유연성이 좋으면 떡 치는 맛이 남달라. 아, 도련님 말고 손님이.”
“그냥 밖에서 살면 안 됩니까. 출퇴근할게요.”
웬만하면 참으려 했지만 개소리를 더는 듣고 있기 괴로워 해림이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겼다. 답은 바로 돌아왔다.
“에헤이,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도련님은 이제 빚 다 갚을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가.”
씨알도 안 먹혔다. 담배 맛이 뚝 떨어졌다. 담배는 반 절 이상 탔다. 해림이 주신도를 따라 재를 창문 밖 허공에 날렸다.
“그래도 그거 하루치 아니고 월세니까 부담 갖지 마. 한 달 뒤에 못 갚으면 복리로 붙으니까 부지런히 일하고. 도련님이 오늘 간택 받았으면 그 정도야 쉽게 벌었을 텐데, 아쉽네. 그 손님이 되게 큰 손이거든. 좀, 취향이 과격해서 그렇지.”
“몸 파는 거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담배 끊으라니까. 폐 건강해지게.”
“그거 말고는…….”
주신도가 난간에 담배 끝을 짓눌렀다. 검은 재 자국을 동그랗게 남기며 주신도가 해림의 눈동자를 꿰뚫을 듯이 쳐다봤다. 잘 숨겼다고 여긴 속내를 갈고리로 긁어낼 듯 집요하게.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웃다가도 정색하며 전기톱을 들고 날뛸 인간이라. 실장이 왜 그런 정의를 내렸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찰나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불거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렁였다.
“아이고, 내가 또 우리 순진한 도련님 겁먹게 했네. 내가 좀 성질이 더럽지? 괜찮아. 도망 안 가고 순하게 굴면 도련님한테 나쁘게 굴지는 않을 거야. 응, 그래. 겁먹지 말고. 긴장 풀고.”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빙긋 웃었다. 등 뒤에 칼을 숨기고서 앞으로는 사탕을 내미는 나쁜 어른이었다. 해림이 제 어깨를 주물럭거리는 주신도의 손을 흘끗 바라봤다.
제 손보다 어림잡아 두 배는 큰 손이었다.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두꺼운 데다 노리끼리한 굳은살이 배겨 있었고, 손등은 핏줄과 흉터와 관절과 힘줄이 갈라진 땅을 가로지르는 물줄기처럼 어지러웠다. 모르긴 몰라도 저런 손바닥에 한 대 맞으면 그게 아름드리 통나무라도 단번에 두 쪽으로 부러지지 않을까.
주신도가 일어났다. 다리 길이도, 그 끝에 달린 발 크기도 남달랐다. 해림은 내리깐 눈을 섣불리 들지 못했다. 대신 주신도가 허리를 굽혔다. 귓바퀴에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주신도가 입술을 벌렸다. 습한 입김이 귓바퀴 뒷부분을 느리게 핥고 지나갔다.
“잘 자, 도련님.”
입술은 닿지 않았지만 장난스럽게 쪽 소리는 냈다. 해림의 뒤통수 아래 제비 꼬리가 쭈뼛 곤두섰다. 주신도가 아무렇지 않게 해림의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가져갔다.
주신도는 차분하게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버리고, 유리문을 열고서 나갔다. 해림은 흡연실에 홀로 남아 가만히 유리문을 바라봤다. 주신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해림이 맥이 탁 풀린 듯이 팔을 늘어트리며 허공을 봤다. 후우, 하고 길게 내뱉는 숨이 담배 연기도 아니건만 공기를 물들일 듯이 매캐했다.
* * *
밤에 영업하는 특성상 건물은 낮이 되면 잠에 빠졌다. 간간이 복도를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나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외에는 고요한 축이었다.
해림은 계속 지명을 받지 못했다. 채홍―엄연히 노덕구라는 이름이 있지만 아무도 본명을 부르지 않았다―은 통나무처럼 뻣뻣한 해림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지 손님이 와도 해림은 본체만체 지나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복도에 멀거니 서서 대기하게만 했다.
주신도에게 내장 떼어 내다 팔 거라 협박을 받았더라도, 해림은 탈출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런 비상식이 넘쳐 나는 곳에서 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암만 타고난 성정이 무디더라도 억울한 상황까지 얌전히 받아들이는 성격도 아니었다.
혹시 외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방 곳곳을 살펴봤다. 전화기는 내선만 가능했고 인터넷은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이 불가했다.
창문은 환기용이라 폭이 좁고 넘어가더라도 그대로 낙하해 죽을 높이였다. 운이 좋아 나무에 부딪혀 충격을 완화하더라도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숲을 길도 모른 채 통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복도 여기저기를 헤매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덩치들이 옆에 와 있었다. 어딜 가는 길이냐고, 그쪽이 아니라며 친절하게 길잡이를 자처하는데, 씨름 선수 체구를 가진 이들을 제치고 튈 능력은 없었다.
혹여 외부에서 온 호스트들에게 핸드폰을 빌려 연락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핸드폰을 빌려줄 수 있느냐 물어봤지만 들어오는 길에 죄다 수거해 갔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래저래 막다른 길만 있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노크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묻자 택배 왔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택배 기사면 감금당한 상황이라고 바깥에 알려 달라 부탁하려고 해림이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 희망은 문을 연 즉시 산산조각 났다. 택배 기사는 무슨, 저번에 친절을 십분 발휘해 해림을 방 앞까지 안내해 준 덩치가 제 상체를 다 가리는 상자를 안고 있었다.
“택배라고…….”
“예.”
덩치가 상자를 방에 놓고 문을 닫았다. 상자와 해림만 덩그러니 남았다. 위에 정하라고 검은 펜으로 쓱쓱 갈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이름이나 어찌 되었든 저에게 온 물품이 맞았다. 해림이 테이프를 뜯고서 상자를 열었다. 옷과 속옷, 양말 등 기본 물품이었다.
“아.”
어제였던가. 유리가 종이 한 장을 작성하라며 줬다. 신체 사이즈 등 기본 사항이었는데, 왜냐고 물으니 웃으며.
「계속 그 옷만 입고 다닐 거면 작성하지 마시고요.」
라고 한 마디 쏘기에 군말 없이 작성했다. 아마 이를 위한 조사였던 듯싶다.
상자 안에 있는 물품들을 모두 꺼내자 맨 아래에 종이 한 장이 깔려 있었다. 뭐지 싶어 들어 보니 표에 목록과 가격이 적혀 있다. 청구서였다.
“하…….”
감금에 강매에 협박에. 깡패가 맞긴 하구나. 해림이 종이 하단에 적힌 금액은 보지도 않고 상자에 다시 처박았다. 물품들도 다 같이 처박고 싶으나 끌려온 이래로 노숙자 모양 매일 같은 옷에 같은 속옷이었다. 덜 마른 속옷을 입고 나가는 일도 고역이었다.
돌려보낸다 한들 이미 쌓인 빚을 깎아 내리는 데 도움이 될까. 감금의 대가라고 생각하자. 해림이 입술 아래로 긴 숨을 뽑아내며 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