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금껏 손님을 받은 적이 없어 해림의 일과는 생각보다 일정했다. 네 시에 노덕구가 퇴근을 알리면 좀비처럼 방에 기어들어 가 씻고 잠에 빠진다. 오전 열 시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고요한 피트니스 룸에서 운동을 하고 도로 방으로 돌아와 씻는다. 점심시간에 맞춰 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하고 흡연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다시 들어간다. 책이라도 있으면 읽겠으나 읽을거리라고는 휴게소에 탑처럼 쌓아 놓은 잡지가 전부라 최근 취미에도 없는 잡지 삼매경으로 시간을 죽였다.
다들 부엉이처럼 야밤에 움직여 오전에는 빌딩 전체가 고요한 편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식당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혼자 조용히 밥을 먹었다. 예전 회사 분위기가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방임주의였기도 하고, 밥을 혼자 먹든 둘이 먹든 해림에게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도 다른 일이 없다면 평소와 다르지 않게 흘러갈 예정이었다. 해림은 편하게 옷을 입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역시나 고요했다. 주방장만 앉아서 쉬다가 해림을 보고 일어났다.
자판기 앞에 서서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했다. 입 안이 터졌으니 오래 씹는 음식은 힘들 테고, 죽이 있으면 주문할 텐데 메뉴에 없다. 그간 얼굴을 익힌 주방장에게 염치 불고 부탁하려고 해림이 식당 입구를 통과한 참이었다.
“형!”
이 시간에 듣기는 처음인 목소리라 해림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후드를 쓴 이형이 강아지처럼 머리카락을 펄럭이며 뛰어왔다. 이형의 질주는 해림의 품에 뛰어든 다음에야 멈췄다. 두 팔로 해림의 옆구리를 힘껏 껴안고 이형이 고개를 홱 들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난 형 죽은 줄 알았어요!”
어제 난리 피운 일이 금세 소문이 퍼진 듯했다. 얻어맞은 부위가 이형의 팔에 눌려 해림이 얼른 한 걸음 물러났다. 이형이 해림을 올려다봤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뺨이 왜 그래? 그 손님이 때렸어요?”
아침에 거울을 보니 꼴이 가관이긴 했다. 벌에 쏘인 듯이 한쪽 뺨이 퉁퉁 붓고 푸르스름한 게, 곧 있으면 불그죽죽한 피멍이 생길 성싶었다. 손님보다 주신도가 후려친 타격이 컸다. 주먹도 아니고 뺨 한 대 맞았다고 이 정도면, 작정하고 퍼부을 때는 어떨지 목덜미가 다 오싹했다. 최소한 사람 한 명은 죽지 않을까.
“일단 밥부터 먹자.”
위장이 슬슬 꾸르륵거리며 얼른 먹을 걸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여기서 해명하다가는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록 식당 입구에만 머물 기세라 해림이 발을 틀었다.
해림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이형이 졸졸 따라왔다. 이형은 자판기에서, 해림은 주방 근처로 가 주방장을 불렀다. 식칼보다 쇠 파이프가 어울릴 주방장이 험악한 인상을 불쑥 들이밀었다.
“입 안이 다쳐서 그러는데 죽도 가능합니까.”
남들은 한 번쯤 눈치를 본다는 주방장 앞에서 해림이 아무렇지 않게 주문을 넣었다. 주방장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해림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더니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마치고 이형이 자리 잡은 테이블로 돌아갔다.
“우와, 형. 안 무서워요? 전 저분 볼 때마다 손바닥에서 식은땀 나던데.”
“딱히.”
직접적인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무서울 사람은 없다. 이형이 가져온 물을 홀짝이다가 상처가 따끔해 해림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왜 죽었다고 생각했어?”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고 번개처럼 빠르다는 거야 익히 경험해 알았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악몽 같은 기억이 남의 입에 오락거리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이 손님 거시기에 토하고 사장이 직접 왔다면서요. 다 지하에 끌려갔다고 해서 형도 지하 간 줄 알았어요. 거기 가면 다들 죽는다 그래서, 형도 죽은 줄 알고…….”
이형의 말을 듣고 보니 의문이 생겼다. 왜 주신도는 저를 지하에 보내지 않았을까. 원흉은 저인데도. 같이 있던 다른 이들은 대기실에서 본 인원이 아니라, 다른 곳 소속이라 그랬을까.
“사장실에 끌려갔었어.”
이형이 두 손바닥으로 양 뺨을 누르며 절규하는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눈이 동그랗게 위아래로 벌어졌다.
“말도 안 돼! 형 지금 두 발로 걷잖아요! 숨도 쉬어! 아님 내가 드디어 미쳤나? 형, 살아 있죠?”
이형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사장실이 사실은 해림이 몰랐던 도살장이었다는 듯이. 살아서 들어가도 죽어야 나올 수 있는 장소라는 듯이 해림의 눈앞에 손을 휙휙 젓다가 무뚝뚝한 표정을 보고 검지로 턱을 톡 치기까지 했다. 감촉을 느끼고는 이형이 경악했다.
“살아 있어. 아직 안 죽었어.”
“……와. 난 내가 미쳐서 귀신 보는 줄 알았어요. 아니, 형 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어떻게 산 거야? 사장이 살려 줬어요? 형이 산 건 너무너무 다행인데 나 사장이 이해가 안 가요.”
저도 이해가 안 가는 문제였다. 희대의 미스터리로 뽑아도 될 만했다. 마침 주방장이 음식이 나왔다며 알려 줘 해림이 받으러 갔다. 곧이어 이형이 주문한 음식도 나와 식판을 나란히 두고 앉았다.
“사장실에 들어가면 원래는 어떻게 되는데?”
배가 고팠는지 이형이 볼이 불룩 솟도록 밥을 욱여넣었다. 해림이 묻자 힘겹게 꿀꺽 삼켰다.
“죽는 거죠. 거기 들어가서 좋은 꼴 본 인간을 본 적이 없어요. 다들 반 시체로 끌려 나오거나 넋 빠져서 나왔어요. 사실 우리는 계약했을 때 빼고는 안 들어갔는데……. 안 들어가는 게 가늘고 길게 살기 좋다고 그랬어. 실장 누나가.”
사장이 직접 연고를 발라 줬다고 밝히면 이형은 까무러칠 테다. 두 발로 걸어 나왔다는 사실에도 이렇게 놀라는데, 안 봐도 불 보듯 빤했다. 특별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오늘부터 사장실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 명복을 빈다며 곡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별일 없었어. 잘하라고 경고하고.”
“사장이 패지는 않았어요?”
해림이 대답 대신 뺨을 톡 쳤다. 이형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졌다.
“사장이 때렸는데 거기서 그쳤다고요?”
“응.”
“말도 안 돼.”
사장실에 갔다가 두 발로 멀쩡히 살아 나왔다고 할 때도 그렇게 놀라더니만.
“사장이 형 정말 마음에 들었나 봐.”
“마음에 들었으면 안 때리지 않았을까.”
“형이 살아 있잖아요. 저 예전에 사장이 사람 패는 거 본 적 있는데 그 사람 죽이는 줄 알았어요. 정말 개 패듯이 패더라고요 존나 무서웠어. 애들이 다 형 걱정했어요. 형 죽으면 어떡하냐고.”
“내기는 안 하고?”
도망친 이를 두고 언제 잡혀 와서 죽을지 생사를 두고 내기를 걸던 이들이었다. 해림의 생사도 이들에게는 좋은 놀거리였다. 설사 내기를 걸었다 하더라도 해림은 실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을 터였다. 이런 비정상적인 곳에선 윤리를 지키는 쪽이 찬양받을 존재였다. 그런 해림의 생각과 달리 이형이 크게 손을 휘저었다.
“아뇨! 안 했어요.”
“그래?”
“예. 우리가 원래 별거 아닌 거 걸고 내기 엄청 잘하거든요? 형도 보면 알겠지만 여기가 놀거리가 없어서. 근데 이상하게, 형 가지고는 애들이 내기를 잘 안 걸어요. 처음에나 그러다 말았지. 형은 아나 모르겠는데……. 주는 거 없이 좋아. 괜히 찾게 되고. 옆에 있으면 편하고. 형이 그냥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도 괜히 다 들어줘야 할 거 같고. 내기 거는 게 미안해져요.”
나진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을 편하게 한다고. 눈을 보고 있으면 뭐든 들어줘야 할 것 같다고. 그렇게 뭐든 줄 것처럼 사탕발림을 해 놓고 나중엔 감정 없는 목각 인형이라 욕하며 떠났다.
「처음에는 편하다고 생각했어. 물 같잖아, 너. 내가 화를 내든 뭘 하든 받아 주고. 그게 사람 편하게 하는 줄 알았지. 아니었어. 너는 깊은 물이야. 사람을 가라앉게 만들어. 편하지 않아. 이제는 숨이 막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물결도 일지 않아.」
해림은 뭐가 진실인지 몰랐다. 이들도 그저 일시적으로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 건 아닐는지.
“형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가 봐요. 예쁘고, 잘생기고. 채홍이 막아서 그렇지 형님이 손님 받기 시작하면 인기 엄청 많을걸요. 첫 번째 회장님이야 노래 잘하는 사람 좋아해서 형 내쫓은 거고.”
“동요가 어때서.”
“와, 아직까지 인정을 안 해요? 그거 이제 전설이 될걸요. 들어온 첫날 동요 부른 미친놈이라고.”
상황에 안 맞는 노래이긴 했다. 민망해했던 건 첫날뿐으로, 얼굴을 붉히기엔 이제 다소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해림이 뻔뻔스레 죽을 퍼먹었다.
“형이 노래는 거지 같아도 얼굴은 훌륭하니까 산 거지. ……아! 사장도 혹시 그거 때문에 형을 살려 둔 건가. 형이 상품 가치가 높아서.”
이형이 결론을 내렸다. 볼 때마다 가게 평판에 누를 끼쳤다느니 어쨌다느니 욕하기 바쁜 사장이 절 높게 평가할 리가. 해림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진짜요. 형은 잘만 하면 수십억 쉽게 벌 거니까. 전설을 새로 쓸 수도 있어요.”
“동요 부른 신입으로만 남으련다. 다른 전설은 사양할게.”
당장은 생존을 위해 이곳의 법칙을 따른다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탈출에 대한 의지가 살아 있었다. 해림이 눈을 내리깔며 속마음을 숨겼다.
해림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는지 이형이 낄낄대며 배를 잡았다. 고봉처럼 쌓였던 밥은 어느새 다 비웠다. 해림이 남은 죽을 천천히 먹는 동안 이형이 다른 주제를 꺼냈다. 잡지에서 본 시계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지금까지 번 돈으로는 턱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열심히 모아서 얼른 뜰 생각 않고.”
“몇 푼 벌어 봤자 그 빚 다 못 갚으니까요.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원하는 거 마음껏 지르려고요.”
눈동자에서 진한 체념과 허탈함이 묻어났다. 해림이 희망은 어디든 존재한다고 말하려다가, 절망이 가득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헛된 말이라 죽과 함께 삼켰다.
무거운 이야기가 싫은지 이형이 금세 생기발랄하게 다른 주제로 떠들었다. 철 지난 영화나 드라마 같은. 해림이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형이 풀어 놓는 주저리를 들어줬다. 적어도 겉보기엔 한가롭고 평화로운 낮이었다.
* * *
낮은 평화롭고 밤은 전쟁터라. 오지 않길 바란 밤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해림이 방에 뜬 알람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대기실이 아니라 사장실로 출근해야 했다. 괜히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고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심정으로만 말하자면, 차라리 복도에서 새벽 네 시까지 대기하고 있는 편이 마음은 편했다.
특별히 교육한다는 명목하에 무슨 고문을 할지 나름 예상은 해 봤다. 담배를 물면 담뱃불을 붙여 준다, 같은 기본 예의범절만 가르쳐 주면 좋으련만. 겨우 그런 걸 알려 주려고 부르지는 않을 터였다. 제 몸에 무슨 짓을 하려는지 벌써 공포 영화 한 편 홀로 본 듯이 등골이 오싹했다.
모른 척 대기실로 도망칠까. 그래 봤자 머리채 잡혀서 사장실로 끌려갈 테다. 죽어도 가야 한다면 제 발로 가는 게 덜 다치는 길이었다. 해림이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사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두어 번 하자 안에서 들어오란 허락이 떨어졌다. 해림이 내키지 않는 손길로 문을 열었다. 안경을 쓴 주신도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해림인 걸 보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도련님 왔어. 앉아.”
해림이 소파에 앉자 주신도가 서류를 정리하고 다가왔다. 해림의 맞은편에 앉아 손에 든 상자를 테이블에 놓았다.
“상자 열기 전에, 도련님. 노래 좀 불러 봐. 엄마가 섬 그늘에 부르지 말고.”
그 노래를 부르려고 했건만 아쉽게 됐다. 그 외에 떠오르는 곡도 거의 동요였다. 학교 종이 땡땡땡 울리는 노래나, 아기 염소가 푸른 동산을 뛰어노는 노래가. 잡혀 오기 전에 즐겨 듣던 노래가 대부분 가사 없는 재즈나 클래식이라 가사 있는 노래는 거의 몰랐다.
“아는 노래가 없습니다.”
“도련님, 대체 바깥에서 뭐 하고 살았어?”
평범하게 살았다. 회사를 다니고 운동을 하고 주말에는 집에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먹고. 파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소소한 모임은 간간이 갔다. 그도 활동적인 나진 덕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몸에서 곰팡이 핀다며 해림의 옷자락을 잡고 이곳저곳 많이도 끌고 다녔다.
돌이켜 보니 새삼 행복한 과거다. 해림이 묵묵히 과거를 곱씹고 있자 주신도가 주의를 상기시키듯 상자를 밀었다.
“받아.”
이것도 빚으로 올리려고. 해림이 망설이다가 주신도의 재촉에 마지못해 상자를 열었다.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MP3였다. 이제는 구하기도 힘든.
“거기 노래 넣어 놨으니까 싹 다 외워. 제목까지. 내가 말하면 바로 노래가 나올 수 있게. 내일까지야.”
이제는 돈 넣으면 노래 나오는 주크박스 취급이다. 사장실로 오는 길에 예상했던 오만가지 끔찍한 행위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총 몇 곡을…….”
“100개. 도련님 외국에서 살았으니 영어도 잘할 거 아니야. 내가 팝송도 넣었어.”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얼굴이었다. 해림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손바닥만 한 기계를 내려다봤다. 액정에 첫 번째 곡의 제목이 둥둥 떠갔다. 생판 존재조차 몰랐던 노래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도 됩니까.”
“지금 출근해 놓고 가긴 어딜 가. 여기 얌전히 붙어서 노래 들으면서 공부해. 이따 두 시간 후에 중간 점검할 거야.”
겨우 노래 연습 하나 시키려고 어젯밤에 그리 으름장을 놨나. 그간 한 걱정이 무색하고 허탈하다. 한쪽으로는 안도감 또한 느끼며 해림이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오랜만에 듣는 음률이 고막을 두드렸다. 좋아하는 장르는 아닐지라도 모처럼 들리는 선율에 해림의 입가가 느슨하게 늘어졌다.
이런 교육이라면 백날 못 받으랴. 해림이 딱딱하게 뭉친 어깨에서 긴장을 풀고 가사에 시선을 고정했다. 노래를 암기하기에 두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노래에만 집중하면 좋겠으나 주신도가 옆에 있어 몰입이 어려웠다. 해림은 노랫말을 보다가 주신도 쪽을 힐끗거렸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안경알을 번뜩이며 서류를 읽는 주신도는, 이상한 나라의 사악한 포주보다 과로에 지친 회사원처럼 얼핏 평범하게 보였다. 물론 조각칼로 세밀하게 다듬었다 해도 믿을 외모와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으로 미루어 보면 회사원이라는 인상이 단번에 지워지기는 하지만.
흘긋거리던 시선이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지면, 주신도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뭘 보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해림은 재빨리 안 본 척 액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킨 게 민망해 액정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무렵, 코끝에 익숙한 향이 스쳤다. 달착지근한 담배 냄새였다. 주신도가 라이터를 내려놓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저보고 담배를 맛있게 피운다더니, 주신도는 담배를 권장하는 광고가 따로 없었다. 해림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한창 담배 한 대가 고픈 시간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우리 도련님, 자꾸만 그렇게 앙큼하게 쳐다볼 거야.”
다 큰 성인한테 못 붙이는 말이 없다. 해림이 미간을 구기려다가 앓느니 죽지 하며 고개를 틀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달큼한 담배 향이 콧속을 찌르고 담배 끝에서 주홍색으로 타오르는 불빛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한 대 줄까?”
음악을 듣고 있는데도 담배를 권하는 말은 귀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해림이 머뭇거리다가 귀에서 이어폰을 잡아 뺐다. 준다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노래 한 곡 부르면 줄게.”
그럼 그렇지. 저 인간이 단순한 담배 한 대도 거저 줄 리 없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중간 점검할 때 됐어. 잘 부르면 한 대 허락할게.”
주신도가 목뒤를 주무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해림이 안타깝게 쳐다봤다. 저럴 시간에 한 모금이라도 더 빨아서 타들어 가는 부분을 아껴야 할 것 아닌가. 자원 낭비였다.
“‘P.D.A’. 그거 불러.”
“가사 보고 불러도 됩니까.”
“도련님 이과 출신이야? 얼마 빚졌는지는 한 번 듣고 외우더니 노래는 왜 못 외워.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잖아.”
주신도는 한 마디로 만 냥의 빚을 지는 사람이었다. 빈정거리지 않으면 비아냥거렸다. 인격도 혓바닥도 가시투성이였다.
“아직 다 못 외웠습니다.”
겨우 두 시간 줘 놓고. 해림이답지 않게 투덜거리자 주신도가 비식거리며 담배를 물었다.
“우리 도련님을 내가 어디까지 봐줘야 할까. 그래도 귀여우니 이번엔 봐줄게. ……뭐 해. 안 부르고.”
담배를 위해서라며 해림이 목록을 뒤적여 노래를 찾았다. 하필이면 어려운 노래였다. 목을 큼큼 가다듬었더니 주신도가 일어나 미니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저 주는 줄 알고 해림이 쳐다보자, 주신도가 뚜껑을 따서 자신이 홀랑 마셨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거야. 어서.”
담배도 물도 노래를 불러야 준다는 말이었다. 저가 무슨 카나리아도 아니고. 해림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노래를 재생했다.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입을 벙긋거렸다. 주신도와 쥐꼬리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사랑 노래였다. 어디서든 입을 맞추고 사랑을 과시하고 싶다는.
주신도는 아예 해림의 앞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노래를 감상했다. 해림의 얼굴에 둥그런 구멍을 뚫을 듯이 응시하면서. 해림은 그 눈을 마주 보기 민망해 액정에 떠오르는 가사만 쳐다봤다.
한 번 듣고 넘긴 노래를 똑같이 따라 할 리가. 가사는 읽어도 음은 몇 번이나 놓치고 틀렸다. 설상가상으로 중간 간주도 한참 후에 나오는 노래였다. 주신도가 알고서 저를 엿 먹이려고 이런 노래를 선택했다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들었다.
적당한 곳에서 끊으면 계속해, 라며 종용하고, 음이 틀려서 멈칫하면 대번에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칼날을 앞두고 억지로 목소리를 뽑아내듯이 해림이 어설프게 노래를 끝마쳤다.
“목소리는 나쁘지 않네.”
목소리에 관한 칭찬은 다른 사람에게도 많이 들었다. 나진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얼굴이나, 후에는 목소리에 반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적이 있었다. 직장에서도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은 수없이 들어서 해림이 무심하게 넘겼다.
주신도가 해림에게 물병을 건넸다. 안 그래도 목마른 참이라 해림이 냉큼 물병을 받았다. 평생 노래를 부르는 일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해림에게는 버티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고작 노래 한 곡 부른 건데도 목구멍이 사막처럼 바짝 메말라서 해림이 꼴깍거리며 물을 삼켰다.
“하지만 담배는 못 줘.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두 시간 후에 다시 확인할 거야. 그때도 이 모양이면 오늘 퇴근은 없어.”
해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담배 한 대만 피웠으면 다른 소원이 없겠거늘. 치사해도 완장을 찬 사람은 주신도이니 따라야 했다.
“다음 곡은 미리 정해 주시면 안 됩니까. 연습해 놓을게요.”
“도저히 오늘 내로 다 못 외우겠어?”
“……예.”
자존심 상해 인정하긴 싫지만 몇 시간 내로 100개나 되는 곡을 전부 외우는 건 아무리 암기에 강한 해림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주신도가 흠, 소릴 내며 뺨을 문질렀다. 손바닥에 가려진 입술 끝이 올라갔는지 지평선처럼 일자인지, 아니면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목록 열다섯 번째. 한 시간.”
해림이 얼른 목록을 확인했다. 우연인지 노린 건지 이번 노래도 사랑 타령이었다. ‘Warm on a cold night’이란 노래를 손가락 끝으로 꾹 누르며 해림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퇴근을 향한 길이 멀고도 험난했다.
* * *
귀에 이어폰을 꽂고 트레드밀의 속도를 올렸다. 보폭 넓게 걷다가 이윽고 레일의 속도에 맞춰 뛰었다. 귀에서는 어제 주신도 앞에서 가사를 틀린 음악이 무한 반복으로 흘러나왔다.
「우리 도련님 바보 맞네. 그 구절 가사 다 틀렸어. 다시.」
그깟 단어 하나 틀린 거, 그걸 꼬투리로 잡고 주신도는 담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수 뽑는 오디션에 내보내는 것도 아닌데 이리 저를 괴롭히는 건 저에게 쌓인 게 많거나 천성이 악독하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주신도에게 켜켜이 쌓인 분노를 풀 길은 운동뿐이라 해림이 이를 악물고 레일 위를 뛰었다. 오늘은 기필코 가사를 틀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울창하고 푸르기 그지없는 숲을 보며 뛰다가, 유리에 비친 다른 이를 보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무늘보처럼 안으로 들어오던 시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입도 쩍 벌리고 귀신 본 듯이 손가락으로 해림을 가리켰다.
“형, 살아 있었어요? 세상에!”
이형도 그렇고, 아무래도 다른 이들에게 해림은 죽은 자인 모양이었다. 시훈이 쪼르르 달려와 해림의 트레드밀 옆에 폴짝 올라갔다. 후드를 내리자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이형이가 형 살았다고 울긴 했는데 저 안 믿었거든요. 걔는 슬슬 미칠 때가 돼서. 근데 이렇게 눈으로 볼 줄은 몰랐네. 아니, 살아 있는데 왜 대기실에는 계속 안 와요?”
“사장실에서 일해서.”
시훈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갑자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면서 숫자를 세다가 대뜸 물었다.
“형이 여기에 언제 왔죠?”
오래 지나지는 않았다. 대충 계산해서 말하자 시훈이 씩 웃었다.
“내기는 내가 이겼네요. 애들한테 돈 받아 내야지.”
“무슨 돈?”
“형 아다 따이는 거요. 사장한테 따였을 줄은. 어라. 사장은 남자 질색하는데 이상하다.”
텃세를 부리며 신입을 골리려고 짓궂은 농담을 한 줄 알았더니. 워낙 기본적인 예의나 도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저런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화를 내기에는 시훈이 너무 어린 탓도 있었다. 해림이 덤덤하게 정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서류 정리 도와주고 있어.”
차마 사장실에서 아이돌 연습생처럼 노래 연습이나 죽으라고 하고 있다고 밝힐 수는 없었다. 제일 무난한 사무 일을 변명으로 삼았다. 그래요, 하고 끝에 물음표를 붙이듯 말꼬리를 끌어 올리는 시훈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림의 옆얼굴을 주시했다. 이형과 달리 의심이 많은 편이었다.
“넌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원래 안 오지 않았어?”
“아, 살이 좀 쪄서요. 어제 손님이 뱃살 쪘다고 비웃고 돈도 적게 주잖아요. 에잇, 나도 복근 만들 거야.”
시훈이 목에 건 수건을 손잡이에 걸고 버튼을 눌렀다. 한데 뛰지는 않고 느림보처럼 설렁설렁 걷기만 한다. 속도가 굼벵이 구르는 것보다 느렸다. 5분도 안 되어 지쳤는지 트레드밀에 상체를 기대고 발만 느릿느릿 옮겼다.
“형, 케이 돌아왔다는 거 들었어요?”
케이라면 저번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손님한테 얻어터졌다고, 빚을 다 갚고도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해림이 아니,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직 대기실엔 안 왔는데 본 애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사장은 왜 걜 데리고 있는지 몰라. 그렇게 싫어하면서.”
돈 되는 물건이면 일단 쥐고 있는 게 주신도의 습성 아닐까. 안 지는 며칠 안 됐지만 대충 어떤 인간인지는 보였다. 케이라는 사람도 아마 돈이 되니까 데리고 있는 거겠지. 주신도는 일단 돈이 되면 그게 송장이라도 손에 쥐고 있을 인간이었다.
“케이 그 미친놈이요, 사장한테 홀딱 반해 가지고 졸졸 쫓아다녔거든요. 하루는 애가 간을 방에다가 두고 왔는지 갑자기 돌아 가지고 사장한테 뽀뽀하더라고요. 우리 다 경악했는데, 사장이 씩 웃더니 걔 머리채 잡아다가 직접 지하에 처넣었어요.”
그런 인간이 남의 아랫도리는 잘만 만져 댔다. 경멸하듯 눈가를 구기고 바로 손을 닦기는 했어도. 해림이 열 오른 귓불을 검지와 엄지 사이로 문질렀다. 치욕과 수치가 뒤섞인 기억이었다.
“운동했더니 배고프다. 형, 뭐 먹으러 갈래요.”
몇 분도 채우지 않고 시훈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아직 배가 고프지는 않아 해림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시훈이 빠르게 레일에서 내려왔다. 그 행동이 흡사 물속에 들어간 거북이처럼 전광석화였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형, 힘내요. 사장하고 둘이 있는 건 좆같아도 손님 받는 것보단 낫겠죠. ……아냐, 난 손님이 차라리 나아. 사장 무서워. 피 냄새나.”
개장수를 발견한 개처럼 시훈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조금만 수틀리면 지하로 보내 버리겠다느니 장기를 팔아 버리겠다느니 협박을 일삼는 덩치 큰 성인 남자라 작고 어린 시훈에게는 무서울 법도 했다.
시훈이 후드를 뒤집어쓰고서 나가고 도로 해림 홀로 남았다. 해림은 방에 들어가서 쉴까 하다가, 주신도를 떠올리자 밥을 덩어리째 삼킨 듯이 속이 답답해 녹색 시작 버튼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레일이 다시금 위잉거리며 돌아갔다.
* * *
변성기를 지나기 전에도 해림의 목소리는 낮고 조곤조곤한 편이었다. 목울대가 튀어나오고 나서는, 담배를 입에 대고 나서는 울림이 동굴에 퍼지는 메아리처럼 깊어지고 허스키하게 가라앉았다. 노래를 기교 있게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고, 음을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정도였다.
그간 주신도의 평가는 짜디짰다. 그딴 식으로 부르느니 차라리 지하에 가서 스트립쇼를 하라는 둥, 고자에다가 자지도 못 빨고 노래도 못 하는데 과연 도련님이 잘하는 게 하나라도 있냐는 둥, 지금 그게 사람 들으라고 하는 거냐는 둥, 사람 멱 따는 소리가 도련님 노래한답시고 내는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둥, 해림이 오디션에 참가한 지망생이었으면 눈물을 찔찔 짜다가 가수의 꿈을 포기했을 독설이었다.
주신도 덕분에 생전 해 보지 않은 경험이란 경험은 다 해 보고 있었다. 오기도 생겼다. 해림은 심지어 샤워를 하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옷을 입을 때도, 양말을 신을 때도, 레일 위를 달리고 아령을 들 때도 머릿속에 노래를 재생했다. 어떻게든 주신도의 입에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박수를 끄집어내고야 말리라는 집념이 원동력이었다.
“30번.”
노래방에 가면 번호를 누르듯이 주신도가 서류를 보며 번호를 말했다. 그나마 자신 있는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가사가 선명했다. 해림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입을 벌렸다. 이미 몇 곡을 불러 목이 아팠지만 죄다 독설만 들어 해림도 독이 오른 상태였다.
뻑뻑한 눈을 감고 해림이 입을 벌렸다. 물 한 모금만 삼키고 했으면 원이 없겠건만 생수병은 주신도의 옆에 있다. 물 한 잔 마시고 하면 안 되냐 물었더니 역시나 주신도는 노래를 잘 불러야 마실 가치가 있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하루는 해림이 직접 생수를 들고 왔다. 사장실에 입성하는 순간 빼앗겼다. 어디서 허락도 없이 물을 마시려고 하냐고, 제 허락 없이는 안 된다며 악독하게 굴었다.
어찌 되었건, 방의 주인은 주신도라 시키는 대로 칼칼한 목을 쥐어짜며 해림이 노래를 불렀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애절한 노래였다. 눈을 감고 부르다가 영 반응이 없기에 해림이 주신도 쪽을 흘끔 바라봤다.
주신도가 서류를 내려놓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체 눈을 감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단단한 턱선과 우뚝하고 굵은 콧대 선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검은 물감처럼 이마에서 목울대까지 길게 이어진 선이 굵고 진했다.
해림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노래가 끝났다. 가사도 음정도 다 맞았다. 1절을 끝내고 해림이 주신도를 쳐다봤다. 어느새 눈을 뜬 주신도가 입술 끝을 씩 끌어 올렸다. 눈을 감았을 때는 바늘로 찌를 틈도 없어 보이더니, 입가에 미소가 뜨자 못된 장난을 일삼는 짓궂은 소년처럼 보였다.
“도련님, 그간 연습 많이 했나 봐. 이제 좀 들을 만하네.”
드디어 물 한 잔을 허락받을 수 있을까. 내친김에 담배 한 대도 같이 허락받길 바랐다. 해림의 눈동자가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거렸다. 물과 담배를 향한 절실한 바람이 고동색 눈동자에 가득 차올랐다.
주신도가 해림의 바람을 알아챈 듯이 생수를 들고 일어났다. 해림의 시선은 주신도가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내리 생수에만 꽂혔다. 생수가 위로 올라가면 해림의 시선도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따라 내려왔다.
“그렇게 목이 말라?”
“예.”
한 시간 내내 물 한 방울 안 주고 노래만 하는 고문을 받았으니 당연히 목이 마를 만도 한 데다, 원래 사람이란 못 하게 하면 더욱 간절해지지 않나. 주신도가 친절하게 생수 뚜껑을 땄다. 해림이 손을 뻗었다. 주신도가 해죽 웃고는 해림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입 벌려.”
“제가 알아서 마시겠습니다.”
“내 물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건데. 도련님한테 주는 양도 내가 정해.”
물 한 병 가지고 치사하게. 울컥하는 속마음을 욕으로 치환해 뱉고 싶었으나 애써 참았다. 욕 뱉어서 괜히 퇴근하는 시간까지 물 한 모금 못 얻어 마시면 저만 손해였다.
쥐인 턱이 아릿했다. 해림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물이 들어올 만큼 입을 벌렸다. 딱딱한 플라스틱 생수병의 끄트머리가 아랫입술에 닿았다. 미지근한 물이 혓바닥에 닿았다가 입 안에 찰랑찰랑 차올랐다. 딱 한 모금 삼킬 양이었다.
해림이 입을 다물고 물을 삼켰다. 완전히 해갈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자연스레 입이 벌어졌다. 조르듯이 저도 모르게 눈앞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얼른 더 달라는 해림의 신호를 보고도 주신도는 키득거리며 생수병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기만 했다. 생수병 안에서 흔들리는 맑은 물이 갈증을 유발했다.
“이거 봐. 우리 도련님이 또 노력도 안 하고 그냥 가져가려고 하지. 내가 저번에 뭐라고 했어.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알려 줬잖아.”
해림이 옷자락에서 손을 뗐다. 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해림이 입을 쓱 닦았다. 아직 목은 말랐다. 미친 듯이 뛰고 난 것처럼 가슴도 쿵쾅거리며 뛰었다. 이게 다 주신도 탓이었다. 감칠맛만 보여 주고 생수병을 거둔 탓에.
“노래 한 곡 더 부를까요.”
“그거 말고. 입 벌린 김에 우리 도련님 상처 나았나 좀 보자. 입 더 벌려 봐.”
“상처 보여 주면 물 주세요.”
볼 안쪽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 우둘투둘한 감촉만 혀끝에 닿았다. 해림의 한쪽 볼에 부풀었다가 푹 꺼졌다.
“이야, 도련님. 한 번 가르쳐 주니까 바로 응용하네. 근데 그딴 거 걸고 달려들지는 마. 없어 보이잖아. 상대가 안달 내는 걸 걸고 해야지. 나만 줄 수 있는 걸로.”
지금 저에게 주신도를 미치게 할 무언가가 있을 리 없다. 이것 외엔 걸 게 없어 해림이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주신도의 시선을 받아쳤다. 주신도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구부러졌다.
“입 벌리라고.”
해림이 말없이 물병을 쳐다봤다. 물을 줘야 입을 벌리겠다는 나름의 의지 표명이었다. 주신도가 힘을 써 입을 억지로 벌릴 수도 있으나, 버틸 때까지 버텨 보리라 마음먹었다.
주신도가 노크하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손가락에 꾹 눌렸다가 도로 도톰하게 솟았다. 해림이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손가락이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와 이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고집은.”
서 있는 주신도와 제 사이가 너무 가깝다. 해림이 슬금슬금 멀어지려고 하자 뒤통수를 붙들고 잡아당겼다. 아, 하고 작게 탄식이 튀어나와 입술 사이에 틈새가 생겼다. 주신도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엄지를 밀어 넣었다.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는 해림의 뺨을 단단하게 움켜잡았다.
“노래는 이제 됐고. 자지 빠는 연습은 좀 했어? 노래만 시켰다고 순진하게 노래만 부르고 있으면 안 되지. 이거 자지라고 생각하고 빨아 봐. 잘 빨면 물 줄게. 담배도.”
욱, 하고 해림이 헛구역질을 했다. 깨물려고 이를 세우자 주신도가 손 전체를 처넣을 듯이 엄지를 밀어 넣고 상처가 났던 부위를 눌렀다. 안쪽 볼살이 뚫릴 듯한 통증이 일어 해림이 혀끝으로 주신도의 손가락을 밀었다. 당연히 밀리지 않았다.
눈물 어린 눈으로 쳐다봐도 주신도는 끄떡없었다. 여유롭게 내려다보며 해림의 혓바닥을 희롱하듯 가지고 놀았다. 입천장을 엄지의 지문 부분으로 간질이고 앞니 뒤쪽도 부드럽게 문질렀다. 해림이 움찔하며 허벅다리를 모았다.
입 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해림이 본능적으로 입 안을 좁히며 침을 삼켰다. 입천장과 혓바닥이 엄지를 감싸며 목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갈 듯이 빨아들였다.
“어서.”
목이 말랐다. 애도 탔다. 자존심 세운다며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건만 이미 손가락은 입 안으로 들어와 제집인 양 뛰어놀고 있다. 뱉어 내려야 낼 수도 없었다.
“뭐 해, 도련님. 목 안 말라? 물 준다니까. 이거 전부.”
저가 지금 당장 원하는 건 주신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주신도의 말마따나 손가락만 잘 빨면 물도 담배도 원하는 건 다 얻어 낼 수 있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다른 손에 들린 생수병을 보고 이내 마음을 정했다. 꼿꼿하게 세웠던 오기를 죽이고 두 손으로 주신도의 손목을 잡았다.
엄지가 나가고 검지와 중지가 들어왔다. 손끝부터 첫 번째 마디, 두 번째 마디와 손등의 마디까지 넣으려는 듯 깊게. 혓바닥을 쓸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가 정말 성기 대용이라도 되는 듯이 다시 들어왔다. 숨결이 점차 가빠졌다.
한 손으로는 해림의 입 속을 농락하면서, 주신도가 다른 손으로 담뱃갑을 빼 들었다. 익숙하게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였다. 해림이 숨에 차 헐떡거리면서도 주신도의 입술에 걸린 흰 담배를 부럽다는 듯이 올려다봤다.
“도련님, 더 잘 빨아야지. 정성스레. 이러다 내가 졸면 물도 담배도 다 날아가.”
이제 약지도 들어왔다. 입 안에서 뛰어노는 손가락이 세 개였다. 혓바닥과 뒤엉켰다가 나갔다가, 입천장을 긁고 말랑거리는 혓바닥 아래도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고 문질렀다.
헐떡거림이 새어 나갔다. 사포처럼 까칠한 손가락 세 개가 혓바닥을 휘감으면 이상하리만큼 등골이 오싹하고 귀 끝이 뜨거웠다. 발가락이 절로 안으로 곱고 허벅지도 동그랗게 근육이 올라왔다. 아랫배에 후끈한 열기가 휘몰아쳐서 해림이 눈살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하필이면 주신도의 손가락이 윗니와 아랫니 사이로 들어왔다. 입 안에 침이 흥건해 해림이 입술을 다물었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지고 입 안의 점막이 손가락들을 비틀어 짜듯 달라붙었다. 물처럼 고인 미적지근한 침이 목구멍 너머로 꿀꺽 넘어갔다.
윽, 하고 주신도가 낮게 신음했다. 피 날 정도는 아니라도 잇자국은 남을 정도였다. 해림이 눈을 흘끗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입 속을 휘젓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판판한 손바닥이 해림의 턱을 바로 움켜쥐었다. 젖은 손가락이 볼살을 눌러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해림의 얼굴을 다 가릴 듯이 움켜쥔 손에 푸른 핏줄과 단단한 힘줄이 뒤엉켜 일어났다.
“…….”
해림의 고개가 주신도의 손에 밀려 뒤로 넘어갔다. 자연스레 시선이 부딪쳤다.
“…….”
주신도는 지금껏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썹 사이는 누가 금을 내놓은 듯이 깊게 팼고, 입술은 일그러져 그 안에 숨겼던 송곳니가 자연스레 드러났다. 이를 악물어 아래턱에는 금이 갔고 그 위로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엔 뭔가에 쫓기듯이 절박하고 초조한 빛이 스몄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목뒤의 솜털은 물론 몸뚱이에 난 솜털이란 솜털은 전부 곤두섰다. 공포가 제일 먼저 떠올라 다리를 얼렸다. 다른 이들이 주신도를 보고 무섭다고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저 협박이나 일삼으며 사람을 괴롭히는 깡패 나부랭이라는 평가가 단숨에 사라졌다.
지금 주신도는 사람이라기보다 흡사 짐승처럼 보였다. 이를 잔뜩 드러내고 이걸 먹을까 말까 간을 보는. 숨 한 번 잘못 쉬어도 상아 같은 송곳니로 목덜미를 뚫고 말. 해림이 숨을 멈추고 주신도를 쳐다봤다. 사로잡힌 듯이 눈도 함부로 깜박할 수 없었다.
무섭다.
차라리 주신도가 전처럼 아무 말이나 떠들었으면 좋겠다. 어떤 개소리라도 좋았다.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는 긴장에 손가락 끝까지 힘을 주고 있느니 주신도의 열없는 수다를 들어 주는 게 편했다. 사람 말을 하면 그래도 짐승이라는 착각은 사라지고 사람이라는 안도감이 들 테니.
회색 어린 담뱃재가 길어졌다. 해림의 뺨을 누르던 손가락이 입술 위로 올라갔다.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듯 입술을 눌렀다. 적갈색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해림이 입을 벌렸다. 잔뜩 혹사당한 혓바닥과 입천장이 속살답게 붉디붉었다. 흠뻑 젖어서, 뭐가 들어와도 녹일 듯이 뜨거웠다.
시선을 견디기 버거웠다. 해림이 먼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다가 주신도의 허벅지가 두툼하게 부푼 걸 발견하고 도로 눈을 들었다.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잘못 본 거길 바라며 해림이 고개를 숙여 다시 확인하려 했다.
“도련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면 내가.”
주신도가 말을 끝내기 전에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핸드폰 벨이었다. 주신도가 담배 연기를 뱉고서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웠다. 왜, 하고 짧게 묻는 목소리에 짜증이 묻었다.
주신도가 시선을 여전히 해림에게 꽂고서는 젖지 않은 손으로 해림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찝찝할 텐데도 주신도가 아무렇지 않게 해림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잘 익은 갈대밭처럼 흐트러졌다.
“귀찮게. 알았어.”
통화는 길지 않았다. 해림이 멍하니 올려다보자 주신도가 해림의 뺨을 손등으로 툭 쳤다. 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벌어진 해림의 입술 새에 끼우고 검지로 턱을 올려 닫았다.
“잘했어. 물하고 담배는 상으로 줄게. 다음에도 이렇게 잘하자, 도련님.”
주신도가 해림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고 사장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해림의 어깨가 허물어지듯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꼿꼿하게 폈던 허리도 무너졌다.
해림이 입술에 꽂힌 필터를 질근 깨물고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가득 차올랐던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담배를 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정말 무섭기만 했나.
해림이 숨을 들이켜며 연기도 같이 들이마셨다. 저가 피우는 담배와 브랜드가 다른데도 혀에 닿는 맛이 달콤했다. 폐부를 가득 채운 긴장을 빼듯 해림이 숨을 내쉬었다.
“미쳐 가나.”
새로운 담배 맛에 중독되기 전에 해림이 재떨이에 담배 대가리를 눌렀다. 마지막으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허공에서 느릿느릿 춤을 추다가 해림의 손짓에 흩어졌다.
* * *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저쪽 숲에서 몇 년 묵었는지 모를 낙엽과 먼지가 바람에 휩쓸려 바닥을 긁으며 뼛조각처럼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폐공장 지붕에 달린 조명은 무늬만 조명일 뿐 속은 해골처럼 텅 비어 있었다.
주신도는 미처 다 못 피운 담배를 입에 물고 어두컴컴한 길을 걸었다. 볼이 홀쭉해질 때마다 담배 끝을 벌겋게 태우는 빛만이 음침한 길목에서 껌벅였다가 사라졌다.
갈색 녹이 잔뜩 묻은 공장 문 앞에 도착해서야 주신도는 입에 문 담배를 바닥에 툭 던졌다. 구둣발로 길이가 짧은 꽁초를 짓이기고 문을 열었다.
긴 복도 천장에 침침한 조명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천장 구석에는 거미줄과 먼지가 한데 엉켜 좀먹은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흔적이 역력한 천장과 달리 바닥은 뿌연 먼지 위에 발자국이 어지러이 남아 있었다.
주신도가 복도를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천장에서 아래로 대롱대롱 매달린 백열등이 좁은 방을 비추었다. 나무 팔렛트가 천장이 닿을 듯이 쌓인 네모난 방, 백열등 아래에 남자 한 명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이미 수 차례의 고문이 지나간 듯이 온몸이 피투성이에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 있었다. 역한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가 남자를 중심으로 방에 가득했다.
주신도가 등장하자 남자를 둘러쌌던 장정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다들 주먹에 피가 튀어 있거나 피 묻은 연장을 들고 뒷짐을 졌다. 주신도가 혀를 차며 널찍한 보폭으로 걸어갔다. 주신도가 의자 앞에 서자 피범벅인 남자가 쿨럭하고 피와 누런 치아 조각을 뱉어 내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주신도가 시선을 맞추듯이 남자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주신도는 빙긋 웃었건만,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발작이 일어난 듯이 덜덜 떨었다. 이미 젖은 바지춤이 새로 젖으며 발목에 노란 물이 흘렀다.
“와, 이게 누구야. 너희는 내가 오기 전에 애를 이렇게 패면 어떡해. 얼굴이 하도 부어서 누군지 분간이 안 가잖아.”
“차진우 맞습니다.”
의자 옆에 선 영수가 입을 열었다. 셔츠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 그래. 진우. 우리 애들 셋이나 죽이고 감히 약 들고 튄 진우 말이지? 몇 킬로였더라. 십이었나?”
“예.”
“꽤 무거웠을 텐데 잘도 들고 튀었네. 약이야 뭐 이미 넘겼을 테니 됐고. 돈은?”
“다 썼답니다.”
“뭐로?”
“모친 병원비로요.”
“눈물 나는 이유네.”
주신도가 안쓰러운 듯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남자는 퉁퉁 부어 앞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든 주신도의 눈길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변명을 해도 좀 똑똑해야 그럴싸한 변명을 해. 진우야, 어쩌냐. 5년 전에 돌아가신 김숙인 여사가 이걸 들으면 얼마나 슬퍼할 거야. 아들이 살라고 이미 돌아가신 자기를 팔았다는 걸 알면. 노인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지팡이 들고 혼내면 어쩌려고.”
주신도가 손을 내밀자 영수가 팔뚝만 한 손도끼를 건네줬다. 다른 이들의 손에 들린 연장과 달리 아직 피가 묻지 않았다. 은색으로 번쩍이는 도끼날을 보고 남자가 핏물을 튀기며 비명을 내질렀다.
“혀, 형님!”
이가 반은 빠져 새는 음성으로 남자가 다급하게 주신도를 불렀다. 주신도가 짐짓 자비로운 척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의 부은 얼굴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돈, 돈 갚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쇼,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거 네 장기 다 뽑아 팔아도 못 갚아.”
“갚겠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절대 이런 일 벌이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제 어머니를 걸고 맹세합니다. 절대로, 다시는. 제발, 형님.”
“모친은 왜 자꾸 찾아. 곧 뵈러 간다고 미리 인사드리게? 진우 너, 왼손잡이였지?”
피투성이인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남자가 거의 울부짖으며 잘못했다고 외쳤다. 영수가 설핏 미간을 찌푸리고서 남자의 입에 뻘겋게 물든 천을 쑤셔 넣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내가 널 함부로 죽이겠니, 진우야. 애가 생긴 거랑 다르게 겁이 많아요. 오늘은 그냥 죗값만 치르자. 너도 알잖아. 나 착한 거. 오른팔 하나만 가져갈게. 다 너 생각해서 그런 거야. 왼팔도 아니고.”
남자가 입 막힌 소리를 지르며 손톱을 세워 의자를 박박 긁었다. 부푼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에 핏줄이 시뻘겋게 곤두섰다. 도끼 손잡이를 손아귀에 단단히 틀어쥔 주신도가 깜박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맞다. 근데 지금 닥터가 일이 바빠서 못 왔어. 지혈할 사람이 없네. 미안. 내가 그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가벼운 농담처럼 뱉어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남자가 겁에 질려 후들후들 떨었다. 달달 떨리는 손톱이 의자 손잡이를 득득 긁으며 지나갔다. 짐승 발톱이 갈퀸 듯 길게 팬 자국이 손잡이에 빼곡하게 남았다.
“효준이하고 건호, 희윤이한테 인사 전해 줘라. 네가 등에 칼 꽂은 애들이라 네 인사를 받을지는 모르겠다만.”
도끼가 백열등 아래서 번쩍 빛을 발했다. 팔렛트에 일렁이는 시커먼 그림자에서 검은 팔이 위로 불쑥 올라갔다가 작두처럼 내리꽂혔다. 뼈와 살이 잘려 나가는 둔탁한 소음과 목 막힌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핏물도 비명처럼 솟구쳐 벽에 어린 까만 그림자 위를 시뻘겋게 뒤덮었다.
턱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신도가 짧게 욕을 하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닦아도 비리고 끈적거리는 핏물은 타르처럼 달라붙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손수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총을 준비 안 할 건 뭐냐. 나무꾼도 아니고 도끼가 뭐야, 촌스럽게. 이거 봐. 피 다 튀었잖아. 나 비린 거 싫어하는 거 깜박했어? 눈치 좀 기르자, 응?”
“왜 끈으로 안 하시고요.”
“오래 걸려.”
“맨손으로 목 분지르는 거 형님 특기잖습니까.”
“귀찮아.”
좀 전만 해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남자는 미동도 없이 축 늘어졌다. 도끼는 팔이 아닌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뒤처리 잘하고. 영수야, 저 도끼날 무뎌졌어. 이제 버려야겠더라.”
“예.”
“너도 새끼가 참, 타이밍이…….”
비린내가 싫은지 주신도가 바로 담배를 빼 물었다. 영수가 재빨리 다가와 불을 붙이며 “예?” 하고 되물었다. 주신도가 됐다고, 저거나 얼른 치우라고 손짓했다.
“내가 돌았지.”
흐릿한 중얼거림에 영수가 돌아봤다. 신경 쓸 거 없다며 주신도가 몸을 돌렸다. 입에 문 담배는 몇 모금 빨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벌겋게 고인 핏물 위에 담배가 떨어졌다. 뜨겁던 회색 재가 미지근한 핏물에 젖어 금세 차게 식었다.
* * *
처음 주신도의 손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는 그저 그런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같은 일을 두 번 겪고 나니 출근할 시간이 다가오는 게 달갑지 않았다. 원래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거리낌과 불편함도 섞었다. 주크박스로 취급했을 때가 호시절이었다.
해림이 물끄러미 거울을 보다가 입술을 문질렀다. 주신도의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가 그 안으로 들어왔더란다. 두꺼운 나무토막 같은 손가락으로 혀를 문지르고 키스하듯 입천장을 훑었다.
“하.”
미쳐 가는 모양이었다. 해림이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일어났다. 노래 연습이나 더 시키면 좋을 텐데, 어제 주신도가 보여 준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주크박스 취급은 얼추 끝난 성싶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예상이 가능하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지, 주신도는 어떤 상상이든 부수는 참신한 인재라 짐작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해림이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문을 열었다. 저쪽에서 똑같이 문 열리는 소리가 나 해림이 돌아봤다. 이형이 해림을 발견하고 손을 높이 들었다.
“정하 형.”
다른 때였다면 오랜만에 주인 본 듯이 맹렬하게 질주해서 품에 달려들 텐데, 무슨 일인지 이형이 비척비척 걸어왔다. 한 걸음 걷고 벽에 어깨를 툭 치고, 한 걸음 걷고 쿨럭거리며 가슴을 붙잡고 기침을 쏟아 냈다. 저렇게 비실대다가 복도에 고꾸라질라, 해림이 먼저 달려갔다.
“괜찮아?”
해림이 다가오자 이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에 두 팔을 걸고 매달렸다. 가까이서 보니 상태가 더욱 좋지 않다. 온몸이 후끈후끈하고 얼굴은 술 취한 것처럼 벌겠다. 눈빛도 흐리멍덩 맛이 갔고 이마에는 땀이 미끈하게 배어 나왔다.
“감기 걸린 거 같아요. 어제, 창문 열고 잤는데.”
주변이 숲이라 새벽에 창문을 열면 서늘한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을 둘러매고 자도 춥다 소리 나오는 날씨에 창문을 열고 잤으니, 최소가 몸살이고 감기도 당연한 결과다.
“오늘은 쉬지 그래.”
“안 돼요. 오늘 예약 잡혀 있어서 가야 해.”
투명한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이형이 눈을 부릅떴다. 이런 꼴로는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문 앞에서 내쫓길 판이었다. 잠자리는커녕 손님에게 감기나 옮기고 사장에게 혼쭐만 날 터였다.
“오늘은 쉬어.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못 해. 실장님한테 약 가져다 달라고 말해 놓을게.”
이형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해림을 올려다봤다. 눈물을 왈칵 쏟을 듯이 눈시울이 붉었다. 이내 훌쩍거리며 이형이 해림을 와락 껴안았다. 이형이 등을 토닥이자 서러운 듯이 흐어엉, 하고 목 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사실 나 너무 아파, 형. 힘들어. 죽을 거 같아.”
어린 것이 이런 곳에 끌려와 원치 않게 몸을 파는 것도 서러운데 거기다 아프기까지 하니 그 속이 오죽할까. 이해 못 하는바 아니었다. 해림이 위로하듯 이형의 등을 도닥거렸다. 해림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이형이 꺽꺽거리며 울었다.
우는 거야 그럴 수 있다지만, 혹시 오가는 사람에게 이형의 약한 모습을 들킬세라 해림이 이형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걷기 힘든지 비틀거리는 이형을 거의 안다시피 하며 간신히 방에 들어왔다.
방은 흡사 돼지우리였다. 선반 위엔 돌돌 말린 속옷과 셔츠와 뒤집힌 양말이, 바닥에는 벗고 내팽개친 바지와 벨트와 젖은 수건이 한데 엉켜 굴러다녔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곳을 헤치며 해림이 이형을 침대에 눕혔다. 이형이 쌕쌕 숨을 쉬며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형……, 사장이 나 죽이면 어떡하죠. 나 이런 적 없는데. 대타는 뛰었어도.”
“괜찮을 거야. 잠깐만. 실장한테 전화 좀 할게.”
속옷 아래 숨은 전화기를 찾아 실장의 방 번호를 눌렀다. 출근 시간이라 받을까 걱정했더니만, 통화음이 두어 번 울리고 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실장님. 정하입니다. 이형이가 오늘 너무 아파서요. 약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해열제하고 몸살감기약이요.”
―어머, 오늘이요? 곤란한데……. 일단 약은 가지고 올라갈게요. 이형이 많이 아프대요?
“예.”
적당히 대답한 해림이 전화를 끊고 돌아보자 이형이 훌쩍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해림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침대 옆에 올려두고 이형의 목 근처까지 덮어 줬다. 그 사이에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이형의 두 눈두덩이 퉁퉁 부었다.
“형, 왜 이렇게 친절해요. 여기서 형처럼 친절한 놈은 아무도 없어요. 지원이나 시훈이 이 새끼들도, 뒤로는 내가 언제 죽나 내기 걸고 있을걸.”
“안 그래. 너 지금 아파서 안 좋은 생각 드는 거야. 실장님이 약 가져오면 먹고 쉬어.”
해림은 오지랖이 넓은 편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 공감하는 경우도 적었다. 남들이 힘들어한다고 해도 보통 표면적인 위로를 하고 끝낼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달랐다. 계속 답지도 않은 오지랖을 부렸다. 지하로 끌려간 이들을 구하려고 미친 짓을 하고, 아프다고 우는 이형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왜 그런지는 해림 본인도 몰랐다. 그저 마음이 쓰였다. 저가 외면하면 그대로 세상을 떠날 듯이 아슬아슬한 사람들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상념을 뚫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실장이 손에 약이 든 봉투를 들고 내밀었다. 해림이 비켜서자 안으로 들어와 이형을 살폈다. 이형이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실장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꼴이, 귀가 축 처진 강아지처럼 풀이 푹 죽었다.
“너는 왜 하필 오늘……. 후. 약 가져왔으니까 우선 먹어. 그 꼬락서니로는 일하긴 글렀네.”
“죄송합니다.”
이형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해림이 봉투에서 약을 꺼내 주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좀 전보다 숨소리가 거칠고 상태도 나빠졌다.
“병원 보내면 안 됩니까.”
이러다가는 이 방에서 송장 치우는 건 아닐까 겁나 해림이 실장을 보고 물었다. 실장이 팔짱을 끼고서 잔뜩 기죽은 이형을 내려다봤다.
“어디 잘린 곳도 없는데 무슨 병원이에요. 약 먹고, 그때도 안 나으면 닥터 불러줄게.”
“아니에요! 약만 먹어도 충분해요.”
이형이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아마도 실장이 언급한 닥터가 장기 밀매에 앞장서는 그 인물인 듯싶었다. 이형이 사색이 되어 얼른 약을 꼴깍꼴깍 삼켰다.
“오늘 예약 취소되는 거, 위약금 무는 것도 알지?”
“……네.”
실장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형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울먹임이 섞인 대답에도 실장은 냉랭했다.
더는 오지랖 부리기 싫은데. 곧이라도 죽을 듯이 낯빛이 푸르죽죽한 이형을 보자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다쳐서 숨만 깔딱거리는 토끼 놔두고 돌아서는 듯이 찝찝했다. 반쯤 충동에 휩싸여 해림이 실장을 불렀다.
“제가 대신 들어가도 됩니까.”
나머지 반은 합리화였다. 이형은 이곳에 끌려와 멋도 모르는 저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고 친절하게 대해 준 이였다. 첫날 들어간 방에서 저를 대신해 변명해 주겠다고 유리컵으로 얻어맞을 뻔도 했다. 빚 갚은 셈 치자며 해림이 덤덤하게 둘을 쳐다봤다. 이형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가 해림의 옷자락을 잡았고, 실장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정하 씨, 요새 매일 사장실로 출근하지 않아요?”
“사장…… 님도 이해하겠죠. 위약금 무는 것보단 나을 테니.”
“내가 들은 소문이 있는데. 위약금이 문제가 아니라 가게 평판 떨어지면 어쩌려고.”
고자에다, 남의 아랫도리에 코 박았다가 토했다는 소문이 짜하게도 났다. 해림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고 허공에 발길질할 민망한 기억이긴 하나, 주신도 손에서는 벌떡벌떡 잘만 세웠다. 하물며 크고 길쭉한 손가락도 두 번이나 잘도 빨지 않았나.
실장이 고양이 같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의심을 담아 쳐다봤다. 해림이 무심하게 눈빛을 받아쳤다. 아래에서 이형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 무리하지 마세요. 위약금 그거 얼마 안 돼서 괜찮아요.”
“얼만데.”
“그게…….”
말 못 하는 가격이 적을 리 없다. 해림이 이형의 손등을 쥐고 떼어 냈다. 어깨를 눌러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사장…… 님에겐 실장님이 전해 주세요. 이형이 대신 제가 들어갔다고.”
사장 끝에 ‘님’이라는 호칭 붙이는 게 어색하고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놈이라고 부르고 싶으나 실장 앞에서는 안 될 말이다. 실장이야 누가 보든 사장이라고 말을 놓고는 하지만. 해림이 자꾸만 튀어 나가려는 욕설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밀어 넣으며 애써 ‘사장님’ 소리를 입에 담았다.
“뭐, 정하 씨가 그렇게 원하면. 알았어요. 재주껏 한번 해 봐요. 오명도 씻고.”
실장이 잘못돼도 저가 죽겠냐며 흔쾌히 허락했다. 실장이 나가고 이형이 도로 벌떡 일어났다. 열에 들떠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이형을 말렸다.
“형, 그냥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유리 누나한테 안 하겠다고 말해요. 아니, 이상한 손님은 아닌데, 형 저번처럼…….”
“그때는 상태가 안 좋았다니까.”
이미 하겠다고 달려들었는데 무를 수 있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은 치러야 했다. 그래도, 하며 불안해하는 이형을 안심시키려고 해림이 씩 웃었다. 이형이 멈칫하더니 입까지 헤벌리고 해림을 올려다봤다.
“걱정 말고 넌 쉬어. 빨리 낫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네, 형.”
어쩐지 더 붉어진 얼굴로 이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말을 듣는다고, 착하다며 해림이 이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형이 손끝까지 빨개져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슬쩍 드러난 이마 끝부분마저 분홍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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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막상 대신하겠다고 달려들기는 했으나 실상 자신은 없었다. 손님의 성별도 몰랐다. 여자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남자면, 저번과 같은 사태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돌이킬 수 있으랴. 해림이 정신을 차릴 겸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거울 안을 들여다봤다. 나른한 인상의 남자가 해림을 마주 봤다.
탈출하기 전까지는 큰 사고 내지 말자. 그깟 몸 한 번 굴리는 거, 사지 잘리는 것보다, 장기 적출당하는 것보다, 남들이 떠드는 지하라는 곳에 가서 여러 명의 노리개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기합을 넣고 이형이 알려 준 방으로 향했다. 예약을 잡으면 가게 위층에 있는 방에서 바로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급하게 듣는 바람에 손님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방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고서야 이형이게 건네받은 키를 문에 댔다. 짧은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해림이 침을 삼키고서 문고리를 돌렸다.
“어머.”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손 위로 드러난 눈매와 콧대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아, 하고 해림이 작게 탄식했다. 두 번째로 만난 회장이었다. 해림의 오명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제일 큰 원흉이야 자극적인 손길에도 반응 없던 아랫도리지만.
“우리 귀여운 이형이는 어디 가고 고자가 왔대?”
뒤에서 삐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다른 손님이면 모른 척하기나 하지, 눈앞의 회장이면 말이 달랐다. 이대로 몸을 돌려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해림이 일단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이형이는 오늘 몸이 심하게 아파 오지 못했습니다. 해서 제가 대신 회장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간 복도에서 대기하며 옆에서 주워들은 말을 적절히 섞어 인사했다. 회장이 흠, 하고 목을 울리고는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당장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회장은 상석에, 해림은 그 옆에 앉았다. 회장이 턱 끝으로 양주를 가리켰다.
“마음에 들지는 않은데, 집에 가서 원수 같은 인간 얼굴 마주 보고 있느니 고자라도 잘생긴 얼굴 보는 게 낫지.”
한 잔 건네자 회장이 받아들고서 해림을 빤히 쳐다봤다. 술을 홀짝이고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감탄했다.
“정말, 얼굴은 아까울 정도로 잘생겼다니까.”
“그날은……. 워낙 긴장해서 실수했습니다.”
부끄러워도 할 말은 해야겠노라며 해림이 조곤조곤 해명했다. 아침에도 그렇고 남의 손에서는 멀쩡했던 놈이 하필 회장 손에만 죽어 가지고는.
“고자가 아니라고?”
“예.”
“또 확인하기 귀찮아. 그리고 상관도 없어. 이형이면 모를까, 오늘 다른 사람하고는 하기 싫네. 말동무나 해 줘.”
뜻밖의 행운이었다. 해림이 내색하지 않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근데 자기는 말재주도 없었지? 큰일이네. 어쩌면 좋아.”
남을 웃게 하거나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는 회장 말대로 없었다. 어떻게 해야 쫓겨나지 않을까, 해림이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회장의 손등을 바라봤다. 주름 하나 없이 고운 손등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반지가 불빛을 받고 반짝였다.
재주는 없어도 그간 사장에게 불려가 반강제적으로 키운 기술은 있었다. 해림이 조심스레 회장의 손을 잡았다. 눈을 감고 회장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가락을 입에 넣는 건 조심스러워 눈을 뜨고 회장을 바라봤다. 회장이 더 해 보라는 듯 술을 홀짝이며 내려다봤다. 고개를 까닥하지 않아도 허락임을 알았다.
회장의 손끝에 입 맞추고 해림이 입을 벌렸다. 새붉은 혀끝이 손가락에 닿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를 느리터분하게 핥고 올라가는 행위, 그 안에 숨은 은밀한 의도를 회장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 한 번 더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회장이 피식 웃고는 어디 해 보라는 듯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해림이 천천히 일어나 회장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듯 손등에 다시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회장이 고개를 까닥여 허락을 내린 후에 해림이 일어났다. 손으로는 여전히 회장의 손을 잡고,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 * *
노크 소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담배 필터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던 주신도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이유 없이 기분이 더러운 찰나에 누군지 잘 되었다 싶었다. 아주 작신작신 밟아 줄 거라며 이까지 드러내고 웃는데, 들어온 인물을 보자마자 입꼬리가 삐죽 내려갔다.
“누님이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웬일이요.”
회장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주신도가 뭐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소파의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꼬고서 주신도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담배 놓고 왔어. 한 대 줘.”
“얼씨구.”
불만을 표하면서도 주신도가 얌전히 회장에게 다가가 담뱃갑을 건넸다. 회장이 담배를 입에 물자 친절하게 불도 붙여 줬다. 회장이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며 뜸을 들였다.
“왜 왔냐니까.”
“우리가 꼭 이유 있어야 보는 사이인가?”
“없이 보는 사이는 아니지.”
“주 사장도 참 정 없게. 커피나 한잔 내려 줘. 따뜻하게. 믹스 말고. 시럽 없이.”
“여기가 카페로 보여요, 누님? 나가서 사 드세요.”
“까칠하기는.”
퉁명스러운 주신도를 다섯 살배기 애처럼 다루며 회장이 담배를 껐다. 주신도도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회장을 들여다봤다. 남들이 보면 흠칫하고 뒤로 물러날 매서운 눈빛인데도 회장은 끄떡없었다.
“본론이 뭐냐니까. 피곤하니까 얼른 끝내고 나가요. 나도 쉬게.”
“주 사장, 성격 급해.”
“누님이 느긋한 거야. 빨리.”
주신도가 소파에 털썩 앉아서는 안경을 벗고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눌렀다.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회장을 본다. 쳐다보는 눈가에 피곤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귀찮으니 썩 꺼지라는 말이겠지. 회장이 나이 차 많이 나는 막냇동생 보듯이 빙그레 웃었다. 속이 투명하게 다 비쳤다.
“정하, 연예인 시킬 생각 없어?”
주신도가 아주 잠시 멈칫했다. 다른 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주신도의 이상 행동을 귀신같이 잡아낸 회장의 눈 끝이 묘하게 휘었다.
“누님. 예전에 누님 말에 홀려서 한 놈 보냈다가 비용만 날려 먹고 애는 나가리된 거 기억 안 나요? 그 손해 메우려고 내가 골이 다 아팠어.”
“어머, 주 사장도 참. 내가 조금만 더 버텨 보라고 했는데 주 사장이 초 친 거잖아.”
예전에 끼가 보이는 아이 한 명을 데려가 데뷔시켜 놨더니, 뜰 때까지 결국 못 기다리고 돈을 돌려받아야 한다며 한창 물오르던 애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나름 예뻐하던 아이라 속은 상했으나, 본인이 자초해 마약이며 스캔들에 휩싸인지라 구해 주지는 않았다.
그 마약이 주신도의 가게에 풀린 거였고, 스캔들도 주신도와 연관 있는 사람과 난 거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처신을 잘못한 아이의 죄가 컸다.
“사실 그런 것도 있어. 애들이 머리 굵어지면 지가 잘난 줄 알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더라고. 나 그거 못 두고 봐.”
누가 모를까 봐. 그 후로는 뒤처리 귀찮아서라도 주신도의 가게에서는 인물을 건져 낸 적은 없었다. 이형이만 해도 귀여워만 했지 데뷔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정하는 좀 달라. 애가 끼는 없는데, 괜찮아. 그때보다 훨씬 빨리 뜰 거야. 목소리도 좋고. 연기야 시키면 늘 거고.”
“얼굴만 예쁘다고 다 뜨나.”
“아닌 건 주 사장이 더 잘 알잖아. 내 안목 못 믿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안 돼.”
주신도가 칼 같이 거절했다. 회장이 요구하면 그게 설령 무리한 부탁이라도 웬만하면 들어 주고는 했었다. 회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봐도 주신도는 수그리기는커녕 묵묵하게 그 시선을 다 받아 냈다.
“왜? 뜨기만 하면 빚 갚는 거, 그거 일도 아니야. 원금에 이자까지 한 번에 갚을 텐데 뭐가 아쉬워서 잡고 있어.”
“뜬다는 보장이 없어.”
“내가 책임지고 띄워 줄게.”
“예전에 성공했으면 우리 도련님도 보내 줄 텐데. 누님이 한 번 실패해서 믿음이 안 가네. 누님, 내 신조 몰라요?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해.”
“걔는 네가……!”
계속 이어지는 거절에 회장이 발끈했다. 곧 후, 심호흡을 길게 하고 이성을 되찾기는 했으나 주신도를 보는 눈빛은 곱지 않았다. 주신도가 얄밉게 왜, 뭐 하며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뜬다고 해도 안 보내.”
“왜.”
“그건 내 거야. 내 거 내 마음대로 다룬다는데 누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천하의 주신도가 돈 냄새를 못 맡았을 리가 없는데. 회장도 알아챈 낌새를 주신도가 모를 리 없다. 돈에 관해서는 개보다 후각이 발달한 주신도다. 정하를 연예계로 돌리면 이곳에 처박아 두는 것보다 훨씬 큰 이득을 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떡하니 들건만,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몰랐다.
“누님. 누님 마음이 하룻밤 사이에 바뀔 만큼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맛있어?”
흥, 하고 회장이 코웃음을 치며 옷깃을 여몄다. 주신도의 시선이 회장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짙은 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옅은 붉은 반점이 어렴풋이 비친 성싶다.
“응. 맛 좋더라. 혀 잘 쓰던데.”
“…….”
주신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건이 좋다고 평가를 받으면 흡족해해야 주신도 다운 행동 아닌가. 알 듯 말 듯 아리송해 회장이 입가를 가리며 주신도의 등을 가만히 주시했다. 뒤통수를 열어서 무슨 꿍꿍이가 그 속에 들어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면 참 좋으련만.
주신도가 장식장에서 양주를 꺼내 들었다. 권하는 말 한마디 없이 컵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로 꼴깍꼴깍 들이부었다. 울렁이는 목울대가 사납다. 회장이 턱을 가만히 문지르며 주신도를 뜯어봤다. 직업병인지 사람을 보면 제일 먼저 상품성을 따졌다.
상품성만 따지자면 정하보다는 주신도 쪽이 훨씬 뛰어났다. 얼굴에 몸매에, 동양과 서양의 조화가 기가 막혔다. 들판처럼 너른 등판에 어깨와 팔뚝과 긴 다리에 탄탄한 엉덩이, 종마를 연상케 하는 허벅지에 발과 손 크기도 동양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커다랗고 두툼한 체구인데,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히 뻗어 있으면서도 동양인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에 눈두덩은 움푹 파여 묘하게 야한 기운이 돌았다.
가장 매력적인 곳은 아무래도 눈동자였다. 붉은색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는 멸종 직전에 처한 짐승만큼이나 희귀했다. 코앞에서 총구를 들이밀어도 여유롭게 웃을 담대한 회장도 주신도의 시선을 받으면 가끔 목덜미가 서늘하게 식고는 했다.
주신도가 사고파는 게 가능한 물건이었으면 가장 먼저 탐냈을 터. 바깥에 내놓으면 이만한 물건이 없다고 다들 앞다퉈서 웃돈을 얹어 가져갔을 상품이었다. 원래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갖기 힘들거나 위험한 물건일수록 깊은 매력을 느끼지 않는가.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어차피 주 사장도 정하한테 돈 받아 내려고 데리고 있는 거 아니야. 주 사장 돈 냄새 잘 맡는 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같은 생각이면서 왜 고집일까.”
회장이 달래듯 마무리를 지으며 일어났다. 주신도는 속이 빤히 보이게 행동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패를 감췄다. 다루기 쉬운 듯이 굴다가 끝에 가서는 뒤통수를 후려칠 수도 있음이다.
오늘은 이쯤 해서 그만하자며 회장이 한발 물러났다. 주신도가 한 손에 술병을 든 채로 회장을 쳐다봤다.
“다음엔 커피 한잔은 줘. 이게 뭐니, 손님 대접이.”
“사무실에선 손님 대접 안 합니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요청하고 들어오세요. 누님이니까 받아 주지 딴 놈이었으면 이미 죽고도 남았소.”
“협박 귀엽다, 얘.”
끝까지 주신도를 애 취급하며 회장이 까르르 웃었다. 주신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남은 양주를 들이마셨다. 회장이 인사해도 설렁설렁 받아 주고는 얼른 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회장이 옷깃을 살랑살랑 휘저으며 사장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 * *
햇살이 눈을 아프게 찔렀다. 해림이 이불 안으로 꾸물꾸물 몸을 숨기다가 그 안으로도 기어코 파고드는 햇빛에 백기를 들며 눈을 떴다. 무심결에 옆자리로 손을 뻗었는데, 새벽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던 이는 없고 싸늘한 한기만 맴돈다. 그제야 깊은 새벽에 회장이 간다며 일어났던 게 떠올랐다. 배웅까지 해 놓고 까맣게 잊을 줄이야.
해림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테이블에 붉은 립스틱 자국이 남은 쪽지와 수표 몇 장이 남아 있었다. 액수는 해림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고작 하룻밤에 이 정도라니, 회장의 재력이 새삼 와 닿았다.
“……음.”
첫 화대였다. 화대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어젯밤 해림은 회장과 끝까지 가지 않았다. 진한 접촉은 있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회장이 먼저 적정한 선에서 해림을 밀었다. 그저 온기와 이야기를 들어 줄 귀가 필요했다며 해림을 귀와 입이 달린 베개 삼아 누웠다.
「자기는 사람 편하게 하는데 뭐가 있나 봐. 나 불면증이 좀 심한데, 오늘은 졸리네.」
해림은 회장이 원하는 대로 맞춰 줬다. 팔베개를 내주었고, 등 뒤에서 회장을 껴안았다.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회장이 원하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회장이 완전히 잠에 빠진 걸 확인하고서야 해림도 눈을 감았다.
싱거운 하룻밤에 이런 큰돈이라. 과연 받아도 되나 싶으나 이 돈은 제 몫이 아니라 아파서 누워있는 이형의 몫이었다. 저가 한 거라고는 회장의 밤이 외롭지 않게 곰 인형처럼 지켜 준 것 외엔 없으니 받기도 민망했다.
밤새 회장에게 팔베개를 해 줬던 탓인지 팔이 뻐근했다. 해림이 팔을 주무르며 샤워기를 틀었다. 향수 냄새가 옮은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와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이 빨라 비상구를 통해 숙소가 있는 층에 도달한 참이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다가 사람을 미처 못 보고 쿵 소리 나게 부딪쳤다. 저쪽에서 워낙 빠른 걸음으로 거의 달려오다시피 한 점도 있었고, 해림도 이 시간에서는 사람이 드물어 방심한 탓도 있었다.
으억 소리를 내며 저쪽이 나뒹굴었다. 해림도 알싸한 코를 붙들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코끝이 똑 떨어져 나갈 듯이 얼얼했다.
“아……, 씨발. 뭐야.”
욕이 나올 만큼 아프기는 했다. 해림도 드물게 울컥할 만큼 무례한 반응이었다. 하나 일어나서 대거리해 봤자 싸움밖에 더 되겠냐며 참고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해림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옷을 툭툭 털며 해림의 손을 쳐다봤다. 아래로 축 처진 눈꼬리에 눈꺼풀이 눈동자를 삼 분의 일쯤 가려 안 좋게 말하면 어수룩하고, 좋게 말하면 순하고 졸린 인상이었다. 눈 아래에 찍힌 선명한 눈물점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나른한 분위기를 폴폴 풍기면서도 잘생긴 이가, 해림의 손을 보고는 소년처럼 씩 웃었다.
“못 보던 얼굴이네.”
해림의 손을 잡고 남자가 일어났다. 목을 좌우로 뚜둑 소리가 나게 비틀며 몸을 풀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름이?”
“정하입니다.”
“어, 그래. 만나서 반갑다는 말은 못 하겠다. 여기가 인연 닿아서 좋을 곳이 아니잖아.”
남자는 꼬박꼬박 반말이었다. 외견상으로는 저보다 한참 어려 보이건만. 아마 이형과 비슷한 나이대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럼 난 바빠서 가 볼게. 사과는 됐어.”
남자가 해림의 어깨를 토닥이며 비상구 문을 열었다. 해림이 남자의 손길이 묻은 어깨를 먼지 털 듯 툭툭 털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통성명도 없이 반말을 찍찍 갈기는 버릇없는 인간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다음에 얽히는 일 없길 바라건만, 기이하게도 언젠가 재회할 거란 느낌이 들었다.
기분 나쁜 일을 곱씹어 안 그래도 안 좋은 기분을 바닥으로 떨어트릴 필요가 있나. 해림이 시큰한 코를 문지르며 이형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잠깐만요, 하고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목소리로 이형이 대답했다. 안에서 쿵쾅거리며 뭐가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나고서야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뒤에서 이형이 해맑게 웃었다. 양쪽 뺨이 푹 패여 해쓱해지긴 했어도 다행히 시체 꼴은 면했다.
“좀 괜찮아?”
“네. 형, 들어와요. 방이 아직 엉망이긴 한데 그래도.”
“아니야. 나도 피곤해서 쉬려고. 이거 전해 주려고 왔어.”
주머니에서 회장이 두고 간 수표를 꺼냈다. 이형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이건 형이 받아야죠.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받아요. 회장님이, 좀. 과격해서 형도 힘들었을 텐데.”
회장도 주신도와 비슷한 부류인지 해림의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라 요청하기는 했어도, 누워 있는 동안 과격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파서 대타를 뛰었다고는 해도, 원래 이형에게 갈 돈을 저가 가로챈 듯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림이 괜찮다며 가지라고 건네도 수표에 부정이라도 탔는지 이형이 한사코 거절했다.
“형이 가지라니까요. 저야 위약금 안 문 것만 해도 얼만데. 옷도 좀 사 입고. 보면 매일 기본 셔츠야.”
이형이 걸치는 옷은 거의 다 이름만 들어도 견적이 나오는 명품이었다. 하룻밤 화대가 이만큼이니, 비싼 옷을 사는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알겠다.
하는 수 없이 수표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형이 해림의 등을 보며 아쉬운 듯 어깨를 쪼그리며 들어와도 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마침 퍼뜩 떠오른 게 있어 해림이 아 참, 하며 이형을 돌아봤다.
“혹시 여기에 좀 졸린 거처럼 생긴 사람 있어? 왼쪽 눈 아래에 눈물점 있고. 머리는 약간 곱슬거리고.”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솔거 노비는 아니었다. 대기실에서는 본 적이 없어 혹시 새로 들어왔나 싶었다가, 저에게 새로운 얼굴 운운했으니 먼저 이곳에 들어온 인물이라 짐작했다.
“형, 케이 만났어요? 언제?”
“아까 오는 길에 부딪혔어.”
“그 새끼가 형한테 뭐라고 욕하지는 않았고요?”
욕을 듣긴 했으나 직접적으로 퍼붓지는 않았으니 문제 소지는 없다. 해림이 고개를 저어도 이형은 순한 눈꼬리에 힘을 팍 주었다.
“웬만하면 얽히지 말아요. 뭐라고 해도 그냥 개가 짖는구나 하고 넘기고. 질이 안 좋아요.”
“왜. 성격이 어떤데.”
“뒤에서 수작부리는 새끼예요, 그거. 지가 상대하기 싫은 손님들한테 우리 밀어 넣고, 새끼 포주 노릇하고, 수수료 떼어 가고. 형이 당할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질이 안 좋은 인간이었다. 사람이야 직접 겪어 봐야 됨됨이를 판단할 수 있다지만, 바깥에서 만날 때의 일이었다. 여기에선 지나가는 가랑잎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야 생존에 유리했다.
“형, 어제 사장실에 안 간 거……. 괜찮아요? 실장님이 이야기는 전했다는데.”
“괜찮겠지.”
사장실에 불러 그 고생을 시킨 이유도 사실 손님을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지금쯤 손수 가르친 보람이 있다며 뿌듯해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굳이 사장실에 오지 말고 바로 손님 예약을 받으라 할지도 모르지.
지금껏 들었던 어투로 떠올리자면, ‘우리 도련님이 드디어 성공했네. 내가 힘써서 가르친 보람이 있어. 역시 사장한테 직접 교육받으니 이렇게 성공하잖아’ 이런 개소리를 떠들지 않을까 싶었다.
사장을 떠올리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손님을 받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다시 복도로 돌아가 노덕구의 간택을 기다려야 할까. 해림의 눈썹 아래에 그늘이 드리웠다. 이러나저러나 심신의 안정을 위한 선택지가 없었다.
“너무 오래 잡고 있었다. 형,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쉬세요. 저는 이제 다 나았어요.”
해림의 얼굴에서 고단함을 읽은 이형이 코를 훌쩍이며 애써 웃었다. 한 일주일 푹 쉬라고, 병가라도 받으라고 하고 싶지만 이런 곳에 그런 제도가 존재할 리가. 해림이 이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돌아섰다. 문 닫히는 소리는 해림이 팔찌를 제 방문 도어록에 갖다 댈 때까지 나지 않았다.
해림이 슬쩍 돌아보자 이형이 팔을 마구 흔들며 잘 자라 환하게 인사했다. 해림이 귀여운 꼬마 보듯 웃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와 별반 다름없이 정돈된 침대가 오늘따라 안락해 보인다. 해림이 비척비척 다가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형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으나 손가락 까닥할 힘도 없이 지쳤다. 밤새 긴장하느라 회장이 뒤척거리기만 해도 눈을 뜬 데다, 잠들라 치다가도 퍼뜩 놀란 듯이 깨고,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만 노닐다가 일어났다.
더는 졸음을 버티기 힘들다. 코앞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려도 아는 척 안 하련다.
해림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다가 이내 졌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발갛게 익은 코 아래서 새어 나왔다.
끔찍한 벨 소리에 해림이 반짝 눈을 떴다. 베개로 머리를 눌러도 알람처럼 끊이지 않는 벨이 뒤통수를 두들겨 팼다. 결국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꾸물꾸물 움직였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릎을 질질 끌며 가서 전화를 받았다.
―정하 씨 일어났어요? 사장이, 정하 씨 오늘 바로 사장실로 올라오라고 해서요.
“사장실이요.”
―네.
자다 일어나서인지 목이 칼칼하니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해림이 더듬거리며 미니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손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참을 헛손질하다가 뚜껑을 땄다.
“저 어제 성공했는데.”
그동안 손님을 받게 하려고 저를 그토록 괴롭히지 않았던가. 방에서 손만 잡고 잤든, 수다로 밤을 새웠든, 좌우간 하룻밤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직접 쓰진 않았지만 아랫도리의 건재함도 확인했으니 더는 사장실에 불려갈 이유가 없었다.
실장 입에서 그래요, 알았어요, 등의 희망적인 대답이 나오길 바라며 생수병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생수의 반을 홀딱 비우고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쯤 수화기 너머로 말이 넘어왔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여기서는 사장 말이 곧 법이라니까. 정하 씨 아직 적응이 덜 됐나 봐. 하여튼 난 전달했어. 시간 맞춰서 올라가요.
실장이 제 말만 딱따구리처럼 퍼붓고 새침하게 전화를 끊었다. 해림이 여보세요, 되물어도 수화기에선 신호음만 났다.
아아아, 하고 해림의 입에서 고달픈 탄식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놈의 사장은 언제쯤 저를 내버려 둘 건지. 악독한 상사에게 머리채 잡혀서 끌려가는 일개 신입의 심정이 이러할까. 오늘은 무얼 꼬투리 잡고 괴롭힐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다고 무작정 안 가겠다고 버틸 수도 없고. 싫어도 몸의 안위를 생각해 따를 수밖에 없다.
출근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해림이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편두통을 가라앉힐 겸 뜨뜻한 물로 몸을 지지고 재빨리 샤워를 마쳤다. 머리를 말릴 시간은 부족해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제거하고 옷을 갖춰 입었다.
준비를 마치는 데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실 문 앞에 도착하는 시간은 그보다 빨랐다. 익숙한 문을 앞에 두고 해림이 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은 어떤 고난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술렁이는 마음은 가다듬으며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하고 허락을 내리는 주신도의 목소리가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낮았다.
해림이 머쓱하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신도는 오늘도 서류 삼매경이었다. 해림이 보던 매일 밤 시작은 저런 모습이었다. 안경을 쓰고 책상에 앉아 다른 회사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종이 더미와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안경을 벗고 공갈과 협박을 일삼는 주신도와, 서류에 파묻힌 주신도는 쌍둥이처럼 같고도 달랐다.
해림이 멀뚱히 서 있자 주신도가 안경을 벗었다. 서막의 알림이었다. 해림이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다른 날과 같은 모습인데도 하루 안 봤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는지 눈빛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눈동자는 붉은빛이 더욱 짙어졌고 푼수처럼 헤벌쭉하니 가면처럼 쓰고 다니는 미소도 없다.
“앉아. 뭘 그렇게 서 있어. 설 기운은 남았나 본데 거기서 그렇게 힘 낭비하지 말고.”
주신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방을 뛰쳐나갈 것처럼 문에 등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해림이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소파에 다가갔다. 항상 앉는 지정 자리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도망칠 수도 없으면서,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게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댔다.
“어제 누님하고 좋은 시간 보냈다면서. 누님이 와서 자랑하더라. 잘했어, 도련님.”
이제껏 봐 온 주신도 성격에 겨우 칭찬이나 하고자 저를 불러낸 건 분명 아닐 터였다. 해림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주신도의 시선이 찌르는 뺨 한쪽이 따끔거려 손바닥으로 슬쩍 문질렀다.
“원래 다른 놈이 들어가기로 한 거, 우리 도련님이 대신 들어간 거라며. 그놈이 아파서. 저번에도 봤지만 우리 도련님, 배려심이 참 남달라.”
주신도가 안경다리 끄트머리를 잇새로 물고는 눈매 폭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주신도의 시선을 열심히 피하는 해림을 쳐다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의자를 밀며 일어나 장식장에서 술병과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주신도가 소파의 상석에 앉아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세밀한 무늬가 새겨진 투명한 유리잔에 호박색 술을 따르고는 한 잔을 해림 앞으로 밀었다.
“갑자기 웬 술을.”
“응? 축하주지. 드디어 우리 도련님이 이 바닥에 첫발을 내디디고 손님한테 칭찬도 받았는데 사장으로서 당연히 기쁘지 않겠어. 한 잔 받아.”
주신도가 능청스레 술을 권했다. 빈속이라 술을 붓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해림이 꾸르륵 울까 말까 망설이는 배를 만지작거리자, 그걸 주신도가 귀신같이 잡아냈다.
“도련님, 아무것도 안 먹었어? 진작 말하지. 내가 또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니잖아. 먹고 싶은 거 없어?”
“괜찮습니다.”
여기서 내보내 주면 알아서 먹겠다고 해도 들을 턱이 있나. 해림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주신도가 가소롭다는 듯이 낄낄대며 테이블에 놓인 내선 전화 버튼을 눌렀다.
“적당한 안줏거리하고, 요기할 것 좀 들고 와.”
‘요기할 거’라는 대목에서 주신도가 해림을 흘끗 바라봤다. 이런 친절을 굳이 베풀 필요는 없건만. 본인이 이렇게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강조라도 할 요량인지 주신도는 전화를 끊고서 우쭐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듣고 싶다고 온몸으로 표출해대기에 해림이 떡 하나 던져 주는 심정으로 옛다 하고 던졌다.
“감사합니다.”
“그치. 나처럼 우리 직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지. 세상에 이런 사장이 어디 있어. 없어. 우리 도련님 복 받은 거 알아야 해.”
주신도가 술을 홀짝이며 눈 끝을 가늘게 접었다. 주책없이 떠드는 모습은 평소와 똑같은데 왜 이다지도 손가락 끝에 긴장이 어릴까. 미묘하게 껄끄러운 기운이 해림의 목덜미를 찬 손가락으로 훑고 지나간 듯했다.
졸려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맹수 옆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놓인 사육사가 되면 이런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예상하지만 믿을 수는 없는, 언제 이놈이 마음을 바꿔 배고프다며 제 목을 댕강 물어뜯을지 몰라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가시방석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은 시간이 천년처럼 흘러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는 속으로 살았다, 하는 탄성이 절로 터졌다.
해림이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속으로는 만세를 부르며 열린 문을 쳐다봤다. 주방장에서 보조 역할을 하는 이가 쟁반 가득 음식을 들고 왔다.
보조가 허리를 직각으로 접어 인사하고는 테이블에 음식을 잔뜩 내려놨다. 치즈에 마른안주에 과일 등등, 상다리 부서지게도 가져왔다. 요기할 거리로는 속이 꽉 찬 샌드위치가 나왔다.
보조가 샌드위치를 주신도의 앞에 내려놨다. 주신도가 샌드위치 그릇을 해림의 앞으로 옮겼다. 빵 사이로 삐져나온 붉고 싱싱한 토마토와 노란 치즈, 얇게 저민 분홍색 햄과 두툼한 양상추가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웠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샌드위치의 향이 콧속에 스미어 위장으로 내려갔다. 그간 숨죽여 소리를 참았던 위장이 빨리 음식을 먹으라고 꾸르륵거리며 요란하게 울었다.
주인이 긴장을 했으면 위장도 눈치껏 따라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지, 야속한 장기가 주인의 상황은 저와 상관없다며 또 꾸물꾸물 움직였다. 연이어 꾸르륵거리며 울어 대는 통에 해림의 귓바퀴가 삐져나온 토마토만큼이나 붉게 익었다.
푸하핫, 하고 주신도가 웃음을 터트려 해림의 귀 끝만 점령하던 핏기가 얼굴까지 내려왔다. 해림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에 눈코입은 가려져도 그 밖에 붉게 익은 곳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게 배고팠으면 말을 하지. 내가 사람 굶기는 못된 새끼는 아닌데. 어서 먹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아.”
뒤에 붙은 말이 의미심장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위장이 우는 걸 방치해 놀림거리가 되느니 얼른 한 입이라도 먹어 배를 채우는 게 이득이었다. 해림이 냉큼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사장한테 진상한다고 정성을 들였는지 그간 식당에서 먹었던 여타 음식보다 풍미가 훌륭했다.
배고픔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마파람에 게 눈이 쏙 들어가듯이 샌드위치를 해치웠다. 칠칠치 못하게 입가에 소스와 빵 부스러기를 묻히면서. 휴지로 닦고 싶었으나 주변에 휴지가 없었다. 해림이 두리번거리자 주신도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도련님이 배가 고프긴 했나 봐. 이렇게 다 묻히고 먹고. 그렇게 맛있어? 뭘 줘도 맛있게 잘 먹긴 하겠네.”
해림이 고개를 뒤로 물려도 손이 끝까지 쫓아왔다. 더 빼면 뒤통수를 부여잡고 입술에서 피가 터지도록 문지를 성싶어 해림이 잠자코 있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입가와 입술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고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애초에 손수건을 빌려줬으면 되지 않나. 굳이 손으로 닦은 저의를 모르겠다.
“술.”
주신도가 손에 술잔을 들었다. 목이 마르는데 마실 건 술뿐이라. 물을 달라고 할까 하다가, 담배 한 개비, 생수 한 병에도 조건을 다는 주신도가 이번엔 무슨 조건을 달지 몰라 해림이 얌전히 술잔을 들었다. 주신도가 들고 있는 유리잔을 제 유리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챙, 하고 맑은소리가 났다.
“우리 도련님 머리 올린 거 축하해. 앞으로도 어제처럼 열심히 일해. 빚 갚아야지.”
주신도가 먼저 술잔을 비웠다. 해림도 질세라 유리잔에 입술을 대고 술을 들이부었다. 술이 혀에 닿기 무섭게 목구멍 너머로 넘겼으나 눈썹과 미간과 이마는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도수였다.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심해졌다. 해림이 염치 불고 물을 부탁하려고 주신도를 쳐다봤다. 주신도는 그 긴 다리를 꼬고서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기대있었다. 축하한다며 인사를 건넸을 때 지었던 미소는 없고, 관찰하는 시선으로 해림을 마주 봤다.
“혹시, 물 있습니까.”
엄지로 턱을 받치고, 검지와 중지로 뺨 옆면을 느리게 문지르던 주신도가 빙긋 웃었다. 입술 새로 혀끝이 빠져나와 아랫입술을 슬쩍 핥고 안으로 사라졌다.
“술로는 부족해?”
“목이 말라서.”
보내 주든가, 물을 주든가 둘 중 하나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해림이 냉장고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저 안에 생수가 든 걸 알지만, 방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꺼내 올 수 있었다.
주신도가 착하게 일어나 생수를 가져왔다. 이대로 건네주면, 그래도 주신도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차지하고 갈증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천금 만금을 뜯어내는, 최악에다 반인륜적인 장사치는 아닐 거라고 좋은 평가를 매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신도가 그럴 리가. 해림이 기다려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위로 들고 쳐다봐도 달라는 생수는 안 주고 제 손에만 들고 있었다. 해림이 생수와 주신도의 번드르르한 낯짝을 번갈아 쳐다봐도 그랬다.
“우리 도련님이 혀를 그렇게 잘 쓴다고 누님이 칭찬 많이 하더라. 까다로운 누님인데 대체 어떻게 만족시켰나 내가 참 궁금해서.”
주신도가 생수를 든 채 해림에게 다가왔다. 차가운 생수 표면을 해림의 뺨에 대었다 떼며 약을 올렸다. 해림이 달라고 손을 뻗자 생수를 자신이 앉았던 소파에 툭 던졌다. 해림의 고개가 생수를 따라 돌아갔다. 주신도의 손끝이 해림의 턱을 잡고 바로 돌렸다.
“말로만 들으면 어떻게 알아? 직접 확인해 봐야지. 사람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 돼. 뭐든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음이 가지.”
딱딱한 손가락 끝이 턱을 타고 올라와 입술에 닿았다. 물을 줄 때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손가락을 핥으란 이야긴가 싶었다. 미친놈의 사고를 범인이 어떻게 따라잡으랴. 차라리 빨리 해치우고 물 한 잔 얻어 낼 심산으로 해림이 눈을 감았다. 주신도의 손목을 잡고서 입을 벌리며 손가락 끝에 혀를 댔다. 처음에야 어색하고 싫었지, 이제는 거부감이 제법 줄었다.
“언제까지 손가락만 빨려고. 손님 받아도 밤새 손가락만 빨고 말 거야? 그러면 손님이 아이, 예쁘다 하면서 돈 주겠어, 도련님.”
“예?”
“정말 요령 없다, 우리 도련님. 자지도 빨아야죠. 애처럼 손가락만 빤다고 돈을 버나. 아니, 누님한테도 손가락만 빨아 줬어? 아니잖아. 혀가 닳도록 핥아 줬다며. 누님이 푹 빠지게. 이제 남자 손님도 받아야 할 거 아냐.”
설마.
자신이 이해한 의미가 틀리기만을 바라며 해림이 주신도를 올려다봤다. 주신도가 푸, 하고 숨을 내쉬고서 해림의 손을 직접 잡아다가 제 바지춤에 올려다 놨다.
“손님이 바지 벗고 달려들기 전에 우리 도련님이 먼저 애교를 떨어야지. 사장님 자지가 정말 큽니다, 감탄도 좀 하고. 뭐 해. 안 내리고.”
“사장님, 이건 좀.”
해림이 다리가 수십 달린 벌레라도 만진 듯이 질색하며 손을 떼어 냈다. 주신도가 남자라면 끔찍해한다던 그 말에 희망을 품고 올려다보면서. 해림을 내려다보는 주신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번처럼 토하면 안 돼, 도련님. 청소하는 거 힘들잖아. 토하면 전부 다 도련님이 주워 먹게 할 거야. 알겠지?”
철컥하고 벨트 푸는 소리에 해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소파 뒤를 짚으며 물러나려고 해도 등받이가 막았다. 까만 속옷 위에 비친 윤곽이 믿기지 않아 해림이 입까지 쩍 벌리며 쳐다봤다. 주신도가 부끄럼 한 올 어리지 않은 표정으로 속옷을 끌어 내렸다. 부슬부슬한 거웃 아래로 살덩이가 쑥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못 해요.”
“못 하긴 뭘 못 해.”
남자의 아랫도리를 입에 넣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번에 허벅지에 드러난 적나라한 크기가 설마 성기는 아니겠지, 주머니에 뭔가를 넣었겠지 싶었는데.
“입 찢어져요.”
입이 아니라 목구멍도 찢어지겠다. 뭐 저딴 걸 사람이 달고 있어. 주신도가 아무리 인간보다 짐승에 가까운 이미지지만 아랫도리 크기까지 짐승일 건 없지 않은가. 사색이 된 해림이 발바닥을 소파 끝에 딛고 손으로 등받이를 잡으며 일어나려 했다. 주신도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며 해림의 뒤통수를 움켜잡았다.
“감탄이 참신하긴 하네. 걱정 마. 안 찢어지게 살살 할게. 도련님도 알잖아.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겠어. 다 우리 도련님 돈 많이 벌라고, 빚 빨리 갚고 자유로워지라고 이 한 몸 희생해서 도와주는 거지. 나도 사내새끼 주둥이에 자지 박는 마음이 그리 좋지는 않아요.”
“그럼 하지 말, ―흡.”
해림이 주신도의 손목을 잡고 떼어 내려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주신도가 한 손으로 아랫도리를 잡고 해림의 입에 둥근, 아직 힘이 덜 들어가 말랑말랑한 끄트머리를 문질렀다. 해림이 입을 다물고 도리질을 치려고 해도, 주신도의 아귀힘이 워낙 강해 아랫도리에 얼굴을 문지르는 꼴만 연출했다.
“왜 자꾸 피곤하게 굴어. 말 잘 들어야지. 응?”
꽉 다물린 입술에 문지르자 둥근 끄트머리가 점점 크기를 부풀리며 단단해졌다. 해림의 굳건한 반항에 주신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더니 뒤통수에서 손을 놓고 해림의 코를 틀어막았다.
다리는 주신도의 다리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고, 코도 막혀 어쩔 수 없이 입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굵다란 살덩이가 들어왔다.
해림이 다급히 주신도의 허벅지를 밀었다. 기둥 끝이 혓바닥을 긁는 기분이 이상했다. 매끄럽고 단단한, 온도가 높은 팔뚝만 한 민달팽이가 몸통에 바짝 힘을 주고서 입 안으로 쳐들어온 성싶었다.
이대로 깨물어 버리면 안 될까. 살덩이를 물어뜯고서 여기서 도망치면 안 될까. 강한 충동에 해림이 시선을 들었다. 주신도가 눈썹 사이를 찌푸린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더란 눈동자는 열이 올라 더욱 붉어 보이고, 눈가와 뺨도 야릇하게 상기됐다. 저번에 한 번 엿본 초조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주신도가 해림을 쳐다봤다.
「넋 놓고 있다가는 어느새 먹힌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오르기 무섭게 기둥이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입이 한껏 벌어졌다. 혓바닥이 아래로 눌리고 입천장에도 기둥에 얽힌 울퉁불퉁한 핏줄이 닿았다. 갓 씻고 나온 살냄새에 시원스러운 바디샴푸 향이 섞여 있었다.
“후……. 도련님, 이는 세우지 마. 다 뽑기 전에.”
현실적인 협박에 물어뜯을 기회를 놓쳤다. 주신도의 허벅지를 밀던 해림의 손바닥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주신도가 해림의 손을 잡아 기둥의 아래쪽을 쥐여 주고서 두 손으로 머리통을 잡았다.
“혀를 그렇게 잘 쓴다며.”
기둥이 아랫입술을 쓸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며 혓바닥을 희롱하고, 해림의 입술이 오므라들려면 넓히며 들어와 입천장과 여린 볼 안쪽을 헤집었다. 손에 잡힌 부분이 바깥에 남아 있는데도, 입 안에 들어온 부분만으로도 혀뿌리가 눌렸다.
벌어진 턱이 얼얼하고 입 안도 지끈거렸다. 꽉 찬 틈새를 비집고 침이 볼썽사납게 뚝뚝 떨어졌다. 눈이 제멋대로 찌푸려지며 눈물이 그 아래 고였다.
“흡.”
손에 잡힌 부분이 부풀며 혀를 누르는 대가리도 커다랗게 몸집을 키웠다. 입술 양옆이 찢어질 듯 얼얼해 해림이 고개를 뒤로 뺐다. 물러난 만큼 주신도가 다가왔다. 해림의 뒤통수를 단단히 쥐고서 앞으로 잡아당겼다. 땅을 기는 뱀처럼 기둥이 천천히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해림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목대에서 핏줄이 곤두서고 턱은 빠질 듯이 아래로 내려왔다. 구렁이 같은 기둥이 숨통을 막아서, 해림이 참지 못하고 주신도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퍽퍽 쳤다. 그래도 주신도가 놔주질 않아 기어코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허벅지를 때리던 손바닥에서 힘이 빠지며 손가락이 바지를 긁을 듯이 구부러졌다. 손도 팔도 버들버들 떨리고 있었다.
안으로 깊게 들어온 기둥이 목구멍을 틀어막고서 나가지 않았다. 해림의 속눈썹이 다시금 위아래로 흠뻑 젖어 들었다가 뺨을 타고 알알이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허벅지를 빠드득 긁어내리던 손끝도 점점 느려졌다.
주신도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순식간에 입이 뻥 뚫리고 공기가 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해림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 냈다. 고개를 숙이려는데, 주신도의 손아귀가 해림의 뒤통수를 거세게 움켜잡았다. 아직 덜 끝났다는 듯이 주신도가 다른 손으로는 제 기둥을 잡고 해림의 뺨에 그 끝을 슬근거렸다.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기둥이 발갛게 상기된 뺨을 뭉그러트렸다.
“우리 도련님, 진짜 못한다. 코로 숨 쉬는 것도 모르고.”
해림의 뺨 옆에서 주신도가 손을 흔들었다. 손에 잡힌 기둥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얽히며 팽팽하게 부푸는 순간이 코앞에서 보였다. 제 입에서는 그렇게 다 찢어 놓을 듯 난폭하던 놈이, 주신도의 손안에서는 마치 수면 바로 아래서 유유하게 헤엄치는 씨알 굵은 물고기처럼 얌전했다.
“입 벌려.”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해림을 단단히 쥐어 고개를 들게 하고는 주신도가 명령했다. 헐떡임이 가라앉지 않아 입은 명령을 내리기 이전에도 벌어진 상태였다. 한껏 거칠게 흔들리던 손등이 생선 대가리처럼 굵은 귀두 아래서 멈췄다. 대가리 아래 모가지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해림이 질끈 눈을 감았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주신도의 손에 아프도록 뒷머리가 잡혀 실패했다. 농익은 대가리가 아랫입술에 닿았고, 공기를 들이마시느라 벌어진 입술 안으로 진득한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혓바닥 위에, 그 아래에, 입에 한가득 담기게 한 발 뽑아 놓고는 두 번째는 해림의 뺨 위에 쏟아 냈다. 여남은 정액은 해림의 입술 위에 립글로스처럼 발랐다.
“목마르다며. 마실 거 줬잖아. 삼켜.”
해림이 방금 먹었던 샌드위치를 게워 낼 듯이 목에 핏대를 세우자, 주신도가 얼른 해림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비릿하고 미끈거리는, 쓴 풀을 짓이겨다가 물풀을 섞은 질감이 입을 가득 채웠다.
뱉을 수 없다면, 입에 담고 구역질을 일으키느니 삼키는 게 낫다. 해림이 헛구역질을 참으며 커다란 알약 삼키듯이 목울대를 넘겼다. 덩어리진 정액이 목구멍을 가르며 넘어가는 끔찍한 감각에 눈살이 절로 구겨졌다. 할 수만 있다면 주신도의 아랫도리에 대고서 임 이사에게 그랬듯이 죄다 토해 내고만 싶었다.
목울대가 울렁이고 나서야 주신도가 해림의 입에서 손바닥을 떼었다. 해림이 입을 벌리고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코며 입이며 할 거 없이 점막이란 점막엔 모두 정액 특유의 비린 냄새와 맛이 묻었다. 숨을 내쉬든 마시든 냄새와 미끈거리는 촉감이 혓바닥과 콧구멍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후, 하고 주신도가 나른하게 숨을 몰아쉬고는 해림의 뒤통수를 놔줬다. 풀어헤친 바지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소파에 던진 생수를 들고서 해림의 양 볼을 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줘 억지로 입을 벌리고, 아직 희묽은 정액이 번지르르하게 묻은 입술에 생수의 주둥이를 댔다.
정액이 가득 채웠던 입 안에 투명한 물이 차올랐다. 입 밖으로 흘릴세라 입을 다물고 물을 삼켰다. 정액이 휘저은 입 속과 목구멍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갈증을 채우기에는 부족해 해림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기어이 입술의 양 끝이 찢어졌는지 입술을 벌릴 때마다 따끔했다. 주신도가 기특하다는 듯이 해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생수병을 기울였다.
“존나 못해 놓고 바라는 건 많아요, 우리 도련님.”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인지 머리가 멍했다. 해림이 물을 꼴깍꼴깍 삼키다가 다리 사이에 턱 들어온 발을 느끼고 움칫하며 내려다봤다. 주신도의 구둣발이 해림의 허벅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가운데를 힘주어 꾹 눌렀다.
“흐윽……!”
언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주신도의 구두 아래 깔린 아랫도리가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숨 막혀서 죽기 일보 직전에 살인 충동과 입 안이 찢길 듯한 통증만 느꼈건만 몸뚱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주신도의 아랫도리를 입에 넣었던 충격은 삽시간에 사그라지고, 거기에 반응해 벌떡 선 제 기둥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을 선사했다.
해림이 주신도의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해도 무게를 실으며 누르는 통에 손에서 금세 힘이 빠져나갔다. 이대로 개미처럼 짓눌려 납작하게 짜부라지는 건 아닐지, 통증과 등줄기에 오르내리는 오싹함에 허벅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만, 발 치워.”
급한 마음에 존대도 집어치웠다. 주신도가 나직하게 웃으며 구둣발을 살짝 떼었다가 다시 뭉갰다. 죽이 끓는 솥을 휘젓는 주걱처럼 뭉근하고 느리게.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 미지근한 쾌감이 닿았다.
미친 거다.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두개골 안에 누가 물리적으로 손을 넣고 휘젓지 않은 이상 이런 반응이 나올 수는 없다.
“역시.”
해림이 허벅지를 모으고서 주신도를 올려다봤다. 호소가 먹혀들었는지 주신도가 드디어 발을 뗐다. 내려다보는 얼굴에서 입매만 사악한 모양으로 휘었다.
“도련님은 호모가 맞아.”
그럴 리가 없다. 길진 않았지만 짧지도 않은 제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어지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외침이 혀뿌리까지 올라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림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주신도가 물러났다. 욕을 장전한 해림의 입 안으로 올리브 한 알을 밀어 넣고 원천 봉쇄시켰다. 짭짤하고 기름진 올리브가 혀 위를 굴러다니며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정액 맛을 지웠다.
“뭐 해, 도련님. 안 나가고. 한 번 더 빨아 주려고? 너무 못해서 감흥 없는데.”
주신도가 심드렁한 낯빛으로 해림을 축객했다. 머리카락을 붙들고 어딜 도망가냐며 아랫도리를 들이밀었던 좀 전의 우악스러운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해림이 기가 차서 하, 하고 허탈에 가까운 소리를 터트렸다. 주신도가 책상 의자에 앉아 안경을 손에 들고 쳐다봤다. 반쯤 감긴 눈과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나른한 기색을 부추겼다.
“도련님이 정 하고 싶어서 매달린다면야, 마음 약한 내가 들어는 줄게. 이번엔 책상 밑에서 해 볼래? 이리 와.”
해림은 웬만해서는 욕을 하지 않으나 이런 상황에서 욕을 참을 만큼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다만 욕을 했다가 저에게 올지도 모를 불이익을 떠올리고 참을 인으로 속마음에 쓰인 모든 욕을 지웠다.
“됐습니다.”
끝까지 존댓말을 잃지 않는 제 이성이 어쩌면 철옹성보다 탄탄할는지도 모른다. 주신도 쪽은 보지도 않고 해림이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끈적거리는 성싶은 입술을 거칠게 북북 문지르고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씩씩거리며 제 방에 돌아와 해림이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뜨거웠다. 숨을 들이켜려고 입을 벌렸다가 뭐가 그 틈을 벌리고 들어올까 봐 얼른 다물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엉망으로 흩트리고서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이불이 발에 걸려 힘껏 걷어차자 얇은 천이 나풀나풀거리며 허공으로 솟았다가 해림을 덮었다.
해림이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에 힘을 주고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질러도 북받친 감정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느껴야 할 감정은 분노와 역겨움이었다. 임 이사의 아랫도리에 토사물을 걸쭉하게 쏟아 냈던 것처럼, 주신도의 끔찍한 행태에도 똑같이 구역질이 올라와야 맞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봉오리처럼 둥근 끝이 입술을 비집고 안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평생 입에 넣어 볼 일 없다 여겼던 남의 살덩이가 제 혓바닥을 긁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성은 잘 작용했다.
한데 대체 언제부터 아래가 욱신거리고 등골을 훑는 듯이 야한 기분이 들었을까. 해림이 베개를 껴안고 다리를 웅크렸다. 미쳤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숨이 막혀 뇌에 피가 닿지 않은 순간, 발칙한 아랫도리가 고통 혹은 범죄를 일으키고 싶은 충동과 쾌감을 헷갈린 건 아닐까, 주신도를 향해 들었던 살심을 새롭게 주어진 자극으로 착각하고는. 그동안 감각에 무디게 살았으니 불현듯 치민 강렬한 감정에 일시적으로 흔들린 걸 수도 있다.
해림이 무심결에 입술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입술에 맨 처음 닿았던 살덩이가 혀처럼 말캉하면서도 뜨거웠다. 젤리처럼 누르는 대로 뭉개지다가 어느 순간 단단해졌다. 입 안으로 들어오고서는 좋아서 침을 질질 흘리는 것처럼 짭짤한 물방울을 뚝뚝 흘려 댔다. 목이 말라서 그거라도 마시려고 꼴깍거리며 목구멍을 조였고, 그럴 때마다 손에 닿은 허벅지가 입 안에 들어온 기둥만큼이나 단단하게 근육이 불거져서는…….
“……씨발.”
주신도 앞에선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참았던 욕이 기어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조신하게 모은 허벅지 안쪽이 후끈거리고 바지춤이 둥글게 일어섰다. 이래서야 주신도에게 호모라고 욕을 얻어먹어도 할 말이 없다.
아니다. 해림이 고개를 저으며 역사에서 타당성을 찾았다. 죄수의 목에 줄을 걸어 교수형에 처하거나 화살이 급소를 꿰뚫어 즉사하는 찰나, 당사자가 사정을 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한 번이라도 더 제 유전자를 이 세상에 남기려던 수컷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저자는 평했더란다.
숨통이 틀어 막혀 저승길에 한 발을 내디딘 상태였으니 저도 그들과 비슷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발기는 주신도와 한 행위에서 성적 자극을 느껴서가 아니라, 목숨이 경각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비극적인 사태에 불과했다.
그리 생각하니 복잡해서 뻥 터지기 직전이었던 머리가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해림이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어차피 이 비정상적인 곳에 머무는 이상 한 번쯤은 겪을 일이었다. 앞으로 어떤 다른 비정상적인 일을 겪는다고 해도 움츠러들거나 기죽지 말자고 해림이 자신을 다독였다. 원래 인생이라는 게 원하는 일만 연속으로 일어나는 꽃밭은 아니지 않은가. 싫은 일도 끔찍한 일도 때때로 발생한다.
평범한 삶. 기복 없는 돌멩이 같은 삶. 누가 발로 차지만 않으면 그 자리에서 평생 있는 듯 없는 듯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모래로 돌아갈 삶을 원했건만. 분수에 맞지 않았는지, 땅에 박힌 돌멩이를 빼내고 굴려 대는 폭풍우가 천지를 뒤흔들 듯이 거셌다. 이곳은 고인 물처럼 잔잔하던 해림을 흔들어 댔다.
나진에게는 들입다 욕을 얻어먹었던 무덤덤한 성격이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도 충격도 그로 인한 짜증도 해 질 녘 꽃처럼 고개를 꺾었다. 해림은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로 일어났다. 홀가분하지는 않지만, 하루를 살아갈 힘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