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1)

4.

충격을 추스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기 퇴근도 시켜 줬겠다, 해림은 눈치 보지 않고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겨울잠 자는 곰처럼 푹 잤다.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도 자고 일어나자 한낱 배고픔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하루 남짓한 시간을 통틀어 먹은 거라고는 샌드위치와 술 한 잔, 물 몇 모금, 올리브 한 알, 그리고 정액이 다였다.

비릿한 맛을 떠올리자 입맛이 훅 떨어졌다가, 허기는 그리 쉽게 달아나는 놈이 아니라 해림이 식당으로 향했다. 그간 밀린 피곤을 한 번에 씻어 낼 듯이 잠을 잤더니만 눈 뜬 시간이 느지막한 오전이었다.

식당이 여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 자판기에서 샌드위치를 누르고 부엌 쪽을 쳐다봤다. 보통 구석에 앉아 재료를 다듬거나 잠을 청하는 주방장이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비웠나 싶어 부엌 쪽을 기웃대다가, 낯선 소리를 듣고 해림이 딱딱하게 몸을 굽혔다.

헉헉거리는 신음이었다. 사람 드문 시간을 틈타 주방장이 홀로 자기 위안을 할 수도 있어―장소가 부엌인 건 심히 비위생적이었으나― 해림이 슬며시 뒷걸음질 쳤다. 주방장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건만, 신음 아래로 어디서 들었던 배경음이 깔렸다.

입에 버거운 걸 넣고 쪽쪽 빠는, 공기가 들어찼다가 펑 빠지는, 젖은 막대가 입 안을 왕복하는 질척한 소리. 주신도와 했던 행위를 적나라하게 상기시키는 소리에 해림의 뒷걸음질에 속도가 붙었다. 뒤를 안 보고 후진하는 바람에 의자에 쿵 부딪혔다.

빈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가 뇌성보다 컸다. 해림이 놀라서 흔들리는 의자를 잡고 황급히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장과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해림을 쳐다봤다. 남자의 벌어진 입술 새로 흰 액체가 주르륵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하던 일 계속하게 자리를 비워 주는 배려를 발휘할 때였다. 해림이 뒤돌아서려 하자 주방장에게 열심히 봉사하던 남자가 무릎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옆모습이 낯익다 싶더니만, 저번에 호되게 부딪히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진 인물이다.

“그럴 필요 없어. 다 끝났거든.”

주방장이 후다닥 바지를 추슬러 입었다. 이런 꼴을 들킨 게 못내 민망한지 험악한 얼굴이 시뻘겋다.

“그럼 이따가 한 병 챙겨 주는 거 잊지 말아요, 형.”

케이가 주방장의 볼에 과감하게 뽀뽀까지 하고 부엌을 빠져나왔다. 해림이 슬금슬금 케이를 피했다. 샌드위치는 포장해 가져가고자 주방장을 불렀건만, 주방장은 해림의 시선을 열심히 피하며 손을 닦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밥이나 같이 먹자. 어디 앉을래.”

“방에 들어가서 먹으려고.”

저번부터 계속 반말이기에 해림도 쉽게 말을 놨다. 주신도야, 빌어먹을 계급의 차이 때문에 존대를 쓰더라도, 저보다 어려 보이는 녀석에게 반말을 들어 먹고도 존대를 써 주고 싶지는 않았다.

“같이 먹자. 나도 배고픈데. 형, 나도 이 사람하고 같은 거 하나 만들어 주세요.”

제 말은 들은 척 안 하더니만, 케이의 말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주방장이 앞치마를 걸쳐 입었다. 해림이 거듭 거절하자.

“뭐야. 지금 내가 저 형 좀 빨아 줬다고 역겨워? 그쪽 호모포비아야? 호모포비아가 왜 여기 있어?”

라고 사람을 매도했다. 설령 해림이 남자끼리 배 맞추는 일에 관대한 인간이었더라도 남의 은밀한 성생활을 우연하게 본 일이 즐거울 리 없었다.

“앉아. 같이 먹는다고 안 죽어. 혼자 먹기 심심해서 그래.”

해림에게서 대답이 없자 케이가 실실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무시하라던 이형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한편, 끼니를 때우러 온 걸 아는 상황에서 굳이 자리를 피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못 이기는 척 해림이 케이 앞에 앉았다.

샌드위치가 곧 나왔다. 메뉴는 같건만 주방장이 케이에게 건넨 샌드위치는 내용물이 더 실하고 두툼했다. 봉사의 대가일 터라 부럽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케이는 샌드위치에는 손도 안 대고 탄산음료만 빨대로 쪽쪽 빨아 먹었다. 집요한 시선으로 해림을 쳐다보면서 케이가 불량한 학생처럼 삐딱한 자세로 앉았다.

“엄청 잘생겼네. 손님이 많이 따르겠어.”

“그다지.”

“왜. 얼굴만 봐도 좋아라 할 텐데. 채홍도 매일 집어넣어 줄 거고.”

노덕구와 사이가 좋지 않고, 방에 들어갔을 때는 사고만 쳤으며, 그 죄로 매일 밤 사장실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는 긴 이야기는 생략했다. 미주알고주알 고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쪽은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어.”

“어쩌다 보니.”

“그래? 난 아버지 빚 갚으라고 끌려왔어. 그 양반이 전국 도박장을 다 꿰고 다니는 인간이었거든. 나가 뒈졌으면 좋겠는데 명줄은 길어 가지고 결국 그 빚을 만들어 놓고 죽대. 아들 뒈지라고 고사를 지내는 인간이었지.”

해림이 샌드위치를 먹다가 멈칫했다. 똑같은 사연은 아니어도 둘 다 부친의 잘못으로 끌려온 건 같았다. 고작 이런 사실에 동병상련을 느끼지는 않으나, 케이에 대한 선입견에 아주 작은 금이 갔다. 적어도 제 발로 이런 곳을 찾아온 미친놈은 아니라고.

“그쪽도 말해 봐.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비슷해.”

“그쪽도 아버지가 개차반이었어?”

유서 한 장으로 용서를 빌고 무책임하게 떠났으니 욕을 해야 맞을까. 무뚝뚝한 양반이었어도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아니. 사업이 망해서.”

케이가 혀를 끌끌 찼다. 빨대를 질근질근 깨무는 얼굴에 동정이 서렸다. 남들이 보면 혀를 찰 상황은 맞았다. 다만 해림이 예상했던 것보다 여기 생활이 아주 최악이진 않았다. 당장 수술대에 누워 배가 갈리고 장기가 안 털린 게 어딜까.

해림이 그동안 살아오며 생각한 최악은 최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너무 약한 것들이었다. 고작해야 보고서가 잘못되었다고 혼나고,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지는 정도가 뭐가 대수랴.

어제 사장실에서는…… 최악에 가깝긴 했지만.

샌드위치에 치커리가 많이 들어갔는지 입맛이 썼다. 해림이 반쯤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놨다.

“열심히 해. 하다 보면 빚 다 갚는 날이 올 거야. 난 다 갚았거든.”

“어떻게?”

십억에 가까운 빚을 무슨 수로. 팔자 좋게 샌드위치를 먹는 지금도 빚은 끊임없이 쌓이고 있었다.

“지하에서 6개월 정도 굴렀어. 내가 가겠다고 했지.”

해림은 지하의 자자한 악명만 들었을 뿐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다들 질색하고 무서워하는 걸 봐서 산지옥임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곳에 제 발로 들어갔다고 하는 걸 보니, 역시나 정상에서는 살짝 비껴간 사람이었다.

“그렇게 보지 마. 나름 재미있었어. 안전하다는 조건만 붙으면 여기나 거기나 큰 차이는 없거든.”

“무슨 조건.”

“얼굴과 사지는 건들지 말 것. 약은 떨까지만.”

“떨?”

못 알아들어서 되물었더니 케이가 손가락으로 빨대를 잡고 홉 빨아들이는 시늉을 했다. 마약의 한 종류인 듯싶었다. 매춘에 마약에, 영화에서만 보던 거래들이 여기에선 현실이었다.

“그쪽도 빨리 빚 털고 싶으면 지하도 생각해 봐. 다른 애들이 뭘 몰라서 지하 하면 겁부터 먹는데, 그런 곳 아니야. 마음 비우면 돈 벌기 좋은 곳이지.”

색다른 관점이었다. 단기간에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말에는 혹하지만 정체불명의 약이나 다른 이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까지 들은 케이의 평판, 자신이 본 그의 모습도. 함부로 뛰어들었다가 더는 기어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이었다.

해림은 최악을 속단하지 않기로 했다. 본인이 믿은 최악보다 더 가혹한 현실이 이곳에선 분명 존재했다.

왜 빚을 다 갚고도 여기 남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케이에 대한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손을 털고 일어나려던 해림을 케이가 붙잡았다.

“근데 내가 요새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그쪽, 혹시 사장하고 친해?”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주신도는 저를 물건 취급하고, 저는 주신도를 미친놈 취급했다. 그런 사이를 친하다고 명한다면 세상의 모든 원수들은 사실 서로 죽고 못 사는 애인 사이였다.

“아니.”

“그럼 다행이고.”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몰라 해림이 쟁반을 들다 말고 케이를 내려다봤다. 케이가 고개를 젖혀 해림을 올려다보며 헤실거렸다. 굽은 눈꼬리와 헤벌쭉 늘어진 입술만 놓고 보면 순진무구한 천치 같았으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그 안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지 해림은 함부로 짐작하지 않았다.

“사장이 위험한 사람이잖아. 친하게 지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적당히 거리 두고 살아야지.”

봉변이야 이미 차고 넘치게 당하고 있다. 매번 기록을 경신하며 새로운 성추행을 해 대는데 이걸 봉변 말고 뭐라 부르랴. 어젯밤 일이 떠올라 해림이 입가를 닦는 척 손등으로 문질렀다. 거칠게 벅벅 문질러 아랫입술이 금세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왜 그래?”

케이가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의아하게 쳐다봤다. 해림이 대충 얼버무리며 뒤돌아섰다. 남에게 털어놔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였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줄 친분은 아직 없기에, 해림이 미련 없이 식당을 떠났다.

* * *

@@냥냥웅@@공금 갠소 

이대로 아프다고 꾀병을 부릴까. 아니면 못 들은 척 차라리 대기실에 갈까. 혹시 이형 대신 손님을 받았던 그날 같은 기적이 오늘은 일어나지 않을까.

출근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사장실에 가지 않을 수 있을지 오만가지 변명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빌딩에서 탈출해 경찰서로 향하는 거겠지마는, 그게 가능하랴. 해림이 부기가 빠져 원래 상태로 돌아간 팔뚝을 문질렀다. 운이 좋아 이곳을 나간다 하더라도 팔뚝에 넣었다는 위치 추적기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홀라당 잡혀 올 터였다.

해림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다가 지긋지긋한 알람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아직 입술에 남은 감촉이 사라지지도 않았건만 또 원수 같은 주신도를 보러 가야만 했다. 꾀병은 애초에 먹히지도 않을 거고, 탈출도 남들의 대타도 오늘은 발생하지 않을 거란 걸 해림은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눈물 줄줄 흘리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방문을 나섰다. 굼벵이 기어가듯 느리게 복도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올라가면서도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는지 모른다. 한숨에 무게가 실렸으면 엘리베이터 바닥이 지하로 푹 꺼지고도 남았다.

오늘은 또 무슨 놀라운 방법으로 저를 괴롭힐는지. 어제처럼 똑같은 일을 반복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대응책을 찾기가 어려웠다.

엘리베이터는 야속하게도 빠르게 올라가 결국 사장실이 있는 층에서 문을 열었다. 은은한 불빛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두컴컴해 보이고, 그 끝에 있는 사장실은 절대 열면 안 되는 저주받은 방처럼 보였다.

해림이 속으로 생존, 생존을 되풀이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먹었다. 심호흡도 몇 번 곁들이자 술렁이던 가슴이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주신도가 무얼 들이밀어도 표정 관리는 될 만큼 냉정을 되찾고서 해림이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하는 허락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건만, 헛된 꿈이었다. 주신도는 어김없이 사장실 안에 있었다.

문 앞에서 심호흡한 보람이 있었다. 주신도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긴장이 확 몰려들거나 심장이 불안하게 뛰지 않았다. 해림이 동요 없이 멀뚱하니 서 있자 주신도가 입 끝을 시원스레 끌어 올렸다.

“또 거기 서 있네. 왜 매일 도망갈 것처럼 문에 가까이 서 있어. 앉아. 줄 거 있어.”

소파에서 당했던 일이 떠올라 앉기가 무척이나 꺼려졌다. 내색하지 않고 해림이 소파에 앉았다. 일을 당한 자리 반대편이었다.

주신도가 책상 서랍을 열어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포장지가 알록달록 화려한 데다 상자 위에는 붉은색 리본까지 달렸다. 어린애 생일선물로 줄 법한 그 상자를 주신도가 해림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선물. 풀어 봐.”

“빚에 올리는 거 아닙니까.”

“나를 뭘로 보고. 선물이라니까. 도련님이 세상 속고만 살았나.”

설령 선의만 담은 선물이라고 해도 내키지 않는다. 이대로 영원히 상자에 봉인해 두고픈 해림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신도가 기대에 차서 눈동자를 번쩍번쩍 빛내며 얼른 열어 보라고 재촉했다. 상석에 앉아 상체를 해림에게 갖다 댈 것처럼 굽히고서. 해림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주신도가 아예 상자를 들어 해림의 품에 안겼다. 덜그럭거리며 안에 든 물품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다.

“어서.”

뭐가 튀어나와도 놀라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해림이 상자를 열었다. 부슬부슬한 종이 둥지 위에 새끼손가락보다 짧고 뭉툭한 타원형 플라스틱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립스틱처럼 생겼으나 주신도가 미쳤다고 립스틱을 줄 리도 없고, 크기도 그보다는 작았다. 혹시 뚜껑을 따면 그 안에 다른 선물이 있나 싶어 해림이 분홍색 플라스틱 윗부분을 잡아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뭐야, 안 놀라?”

“이게 뭡니까.”

“정말 몰라?”

주신도가 손수 준비했으니 정체가 뭐든 해림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닐 터였다. 해림이 고개를 젓자 주신도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은 순진한 거야,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거야. 로터 처음 봐? 정말 몰라서 그래?”

“몰라서요.”

“실망이야.”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 받은 애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주신도가 주머니에서 같은 분홍색 막대를 꺼냈다. 툭 튀어나온 막대를 누르자 종이 둥지 위에서 타원형 덩어리가 몸을 부르르 떨며 자기의 쓰임새를 주장했다.

그제야 해림이 선물의 정체를 눈치챘다. 뽀얀 얼굴이 바로 해쓱하니 핏기가 쑥 빠졌다. 설마 저 극악한 놈으로 제 몸을 고문하지는 않겠지, 희망을 가지고 싶으나 이곳에서 희망이란 항상 무참하게 박살 나는 가녀린 존재였다.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른 주신도가 해림의 파리한 낯짝을 보고 입매를 삐뚜름히 비틀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가 오늘따라 유독 번쩍이고 눈빛도 천진난만하게 빛나는 꼴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저걸 가지고 어떻게 놀지 해림의 눈에도 선하게 보였다.

“모른다면서.”

모르고 싶었다.

“잘 아는 눈친데.”

“모릅니다.”

“내가 해 줘? 하, 정말 사장으로 살기 힘들…….”

“싫어요.”

“도련님 말대꾸 참 잘해. 싫은 게 어디 있어. 사장이 하라면 하라는 거지. 까라면 까야 하는 거 몰라.”

진동이 멎었다. 주신도가 상자를 해림 쪽으로 밀었다. 죽은 쥐 사체라도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듯이 해림이 질색했다. 구석에 얌전히 누워 있는 로터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가 왜…….”

“도련님. 내가 도련님을 위해서 얼마나 양보하는지 입 아프게 말해야 알아? 도련님이 손님하고 떡 치는데 유혈 사태라도 나 봐. 손님이 얼마나 당황할 거야. 물론 피 보는 게 취향인 미친 인간도 가끔은 있지만, 다 지하에서 놀지 여기는 없거든.”

“그거하고 이거는 상관이.”

“상관이 왜 없어. 기분 상한 손님이 환불이라도 해 달라고 난리 치면 어떡해. 저번에 임 이사 기억 안 나? 내가 환불 소리 나오기 전에 처리해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보상금도 내놓으라고 길길이 날뛰었을 걸, 그 개 같은 성격에.”

저에게 폭력을 행사했어도 어쩌면 도와주겠다고 온 건 아닐까 했더니만, 역시 착각이었다. 돈 잃을까 봐 부리나케 달려와서 먼저 차단한 것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익숙하게 해 주려는 거잖아. 이런 배려, 다른 새끼들한테는 해 준 적 없어. 도련님한테만 해 주는 거지.”

“왜요.”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내버려 두라는 말은 못 하고 해림이 이유를 물었다. 주신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잘 닦아 놓으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어서.”

주신도가 저를 물건 취급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해림이 다른 이유로 입술을 사리물었다. 임기응변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여기에 끌려와서는 생전 처음 겪는 일만 맞닥뜨리다 보니 어떻게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쉽게 생각해.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잖아.”

해림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주신도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옆으로 다가왔다. 해림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친한 듯이 어깨동무를 하고서, 손으로 하얗게 질린 뺨을 쓰다듬었다. 해림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퍼뜩 놀라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대번에 주신도가 해림의 목을 틀어잡았다.

큿, 하고 해림이 신음해도 주신도는 새를 움켜쥔 듯이 목을 쥔 채 놓지 않았다. 엄지에 닿는 살결을 가만가만히 매만지며, 일견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신도가 정면을 바라봤다. 장식장에 비친 주신도와 해림의 표정이 극과 극이었다. 해림이 불그죽죽해진 얼굴로 장식장 유리를 쳐다봤다.

“도련님, 이게 다 장난 같지.”

유리를 통해 시선이 마주쳤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침을 모아 꿀꺽 삼켰다. 주신도의 손가락 사이로 울대가 꿀렁 흔들렸다.

“말 잘 들으면 장난일 거야. 반항하면 귀찮아질 거고.”

유리에 비쳐 흐릿한데도 계속 쳐다보고 있기가 어렵다. 해림이 진 듯이 눈을 내리깔자 주신도의 손가락이 목에서 떨어졌다. 해림이 작게 기침을 하며 목을 매만졌다. 주신도가 항상 철없는 애처럼 굴어서 그랬을까, 저 손이 언제든 제 숨통을 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순응, 아니면 복종. 여기에서 해림이 선택할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 이뿐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하나 무턱대고 주신도의 말을 따르기엔 울컥함이 뒤따랐다. 저에게 이득이 될 게 하나라도 제 손에 떨어졌으면 했다.

“할게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내가 뭘 들어줘야 해?”

“사장님은 친절하시니까요.”

주신도가 매번 주장하던 개소리를 끄집어내며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주신도가 미소를 지우고 해림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작게 실소했다. 가늘어진 눈매에 비웃음이 가득 담겨도 해림은 꿋꿋하게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주신도 하고 보낸 시간이 헛된 건 아니었는지, 눈빛만 봐도 얼추 저를 죽이려는지 봐주려는지 보였다.

“우리 도련님은 참 건방져. 근데 밉지가 않아. 타고난 재주가 용해, 아주.”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며 주신도가 해림을 응시했다. 손가락이 스치는 부분은 뺨인데 목덜미에 솜털이 곤두섰다. 보송보송한 인형 털을 쓰다듬듯이 해림의 뺨을 매만지다가, 주신도가 방긋 웃었다.

“도련님이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다 들어준다고는 약속 못 하겠고……, 대신 도련님. 나하고 내기하자.”

대기실 아이들이 그렇게 내기를 좋아하더니만. 윗물부터 비롯된 전통이었다. 무슨 내기를 걸지 몰라 해림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주신도가 뺨에서 손을 뗐다.

“도련님 산책 좋아해?”

뜬금없이 산책을 입에 올리는 저의를 모르겠다. 해림이 떨떠름하게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도련님이 이기면, 차 타고 멀리 나가서 오랜만에 도시 공기 좀 쐬고 오고, 만약 내가 이기면…….”

주신도가 말꼬리를 흐렸다. 눈매 폭을 좁히고 입꼬리는 초승달처럼 기울어졌다. 시선이 해림의 허벅지 사이에서 배꼽으로, 배꼽에서 가슴과 목울대로, 턱에서 눈동자로 느리게 선을 그리며 올라왔다. 마주친 눈빛이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권하는 뱀처럼 간사했다.

“그건 그때 가서 정할게. 어때. 도련님한테 남는 장사 아니야?”

“요구는 확실히 정하고 진행하면 안 됩니까.”

“지금 당장은 원하는 게 없어서. 할 거야, 말 거야. 나 정말 도련님 많이 생각해서 이런 제의 하는 거야. 어차피 할 거지만 하나라도 얻고 싶어서 이런 앙탈을 떤 거 아니야? 이래 봬도 나 되게 바쁜 사람이거든.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말고 빨리 정해.”

“무슨 내기를 할지도 아직 안 정했잖아요.”

“도련님 순진한 척 잘하네. 뭐긴 뭐겠어. 이거 후장에 넣고 버티는 거지. 30분.”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내기였다. 이런 내기에 응해야 하는 제 처지가 눈물 나게 불쌍했다. 세상에 어느 비극을 끌어다 모아도 지금 제 처지보다야 나았다.

자기 연민은 채 1분도 안 되어 끝났다. 해림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상자를 손에 쥐었다. 겨우 이까짓 일에 반항하다가 주신도의 손에 목이 졸려 죽느니, 차라리 눈 딱 감고 버텨 내기에서 이기는 게 더 나은 길이었다. 생존이 우선이라고 그토록 속으로 부르짖지 않았나. 이 정도 일은 작은 수모일 뿐 인생이 뒤흔들릴 만큼 큰일이 아니다.

“응? 어디 가게.”

해림이 상자를 들고 일어나자 주신도가 올려다봤다. 설마 이곳에서 저걸 넣으라고는 할 리 없고.

“화장실이요.”

“화장실을 왜 가? 그냥 여기서 해.”

“사장님 계시잖아요.”

“그럼 그걸 손님 앞에서 해야지, 혼자 하면 손님은 그 긴 시간 뭐 하라고.”

술이나 처마시지 남의 구멍에 뭘 집어넣는 미친 광경은 왜 구경하려는 건데. 해림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해림이 눈으로 욕하자 주신도가 상자 안에 든 로터를 홀랑 빼앗았다.

“그리고 내가 안 보이는 데서 하면 도련님이 이걸 넣었는지 아니면 안 넣고 넣은 척하는 건지 모르잖아. 우리 도련님이 좀 응큼해야지.”

“거짓말 안 합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우리 도련님, 안 그래도 세 치 혀 잘 놀리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해.”

“그건, 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수치심이 포함된다는 걸 주신도가 알아줬으면 했다. 해림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주신도가 책상으로 척척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책상 위에 올린 붉은색 원통이 무언지는 해림도 알았다.

“안 되겠네. 이리 와.”

주신도가 수술을 앞둔 의사처럼 하얀 라텍스 장갑을 손에 끼우고서 해림을 불렀다. 해림의 낯짝이 더는 창백해지지 못할 만큼 희끗하게 질렸다. 빛나는 조명 아래 장갑을 낀 주신도는 흡사 마취 없이 환자의 생살을 가르는 미친 의사였다. 해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도련님 발로 올래, 내가 갈까. 단, 나한테 잡히면 내기고 뭐고 없어. 시간도 늘어날 거고.”

손에 문고리가 잡혔다. 이대로 돌리고 튀어 나가면 당장은 화를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 도망가고 언제까지 마음을 놓으랴. 어디에 숨든 여기서는 주신도의 손바닥 위였다.

포기는 빨랐다. 해림이 굼뜨게 걸음을 옮겼다. 나무늘보도 해림보다는 빠르게 달릴 성싶었다.

“바지 벗어.”

해림이 바지춤 위에서 손을 꾸물거렸다. 주신도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가 한숨을 쉬며 해림의 바지를 잡았다. 순식간에 벨트가 풀어지고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아래로 쑥 내려갔다. 해림이 재빨리 셔츠 자락을 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화장실도 아니고, 주신도 앞에서 휑한 아랫도리를 보여 주기가 여간 수치스럽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벌건 촛농에 담갔다 뺀 듯이 익었다.

다른 이들보다 약간 더 높은 체온을 가진 손바닥이 엉덩이에 닿았다. 매끄러운 고무 질감이 어색해 해림의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보조개가 옴폭 팬 살을 주신도가 잘 부풀어 오른 빵 반죽 쥐듯이 움켜쥐었다가 손을 놓았다.

“긴장 풀어.”

차라리 빨리 넣고 끝내기만을 바라며 해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철썩, 하고 곤장을 내리치는 소리가 터졌다. 엉덩이가 화끈하고 얼얼했다. 해림이 흑, 하고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커다란 주신도의 손이 해림의 엉덩이를 갈기고 무심하게 내려갔다. 해림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려고 입을 뻐끔거렸다. 주신도와 눈이 마주치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빛이 얼음 위에 붙은 불처럼 뜨겁고도 서늘했다.

“긴장 풀라고.”

목소리가 바닥을 긁듯이 낮았다. 거리가 훅 가까워져서 그런지 눈동자 색도 보다 선명했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선에서 두근, 하고 맥이 뛰었다. 쿵쾅거리며 발뒤꿈치로 마루를 밟는 소리가 가슴에서 고막까지 이어졌다.

젤에서 복숭아 향이 났다. 주신도의 손바닥과 분홍색 로터가 불그스름한 젤로 뒤덮였다. 더는 볼 수가 없어 차라리 현실을 외면하고자 해림이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니 다른 감각이 살아서 날뛰었다. 코에 달라붙는 복숭아 향이 아찔하게 달았다. 엉덩이에 닿은 주신도의 손은 달군 쇳덩이처럼 뜨거워서, 긴장을 풀라던 명령도 까먹고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젖은 손이 둥글고 탐스럽게 솟은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갈라진 틈으로 젖은 로터를 들이밀었다.

해림의 허벅지 안쪽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도 봉긋하게 솟아올라 손가락을 막았다. 주신도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동아줄처럼 쥔 옷자락을 해림의 손에서 빼앗아 입에 물렸다. 졸지에 판판한 배와 가슴이 아랫도리처럼 휑하니 바깥으로 드러났다.

주신도가 해림의 허리에 팔을 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판판한 가슴팍에 입술이 닿기 무섭게, 잇새에 분홍빛이 도는 젖꼭지를 끼우고서 질근 씹었다. 애기 손톱처럼 둥글고 작은 젖꼭지가 흰 잇새에서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아!”

해림의 입에서 셔츠 자락이 떨어졌다. 주신도의 머리 위였다. 몸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가 맥이 풀리듯 탁 풀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신도가 로터를 밀어 넣었다. 로터가 미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문 구멍을 열고서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주신도의 손가락도 로터를 따라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흐윽……!”

물컹하고 차가운 젤이 좁은 통로를 가득 메웠다. 이물감과 미미한 통증에 해림의 상체가 앞으로 굽어졌다. 두 손으로는 주신도의 어깨를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로터가 주신도의 검지 길이만큼 깊게 들어왔다. 길이 확 좁아 들며 주신도의 손가락을 쥐어짜듯이 오물거렸다. 점막이 젖은 손가락에 잔뜩 달라붙었다. 생소한 감각에 해림이 크게 움찔했다.

손가락이 천천히 점막을 문지르며 빠져나갔다. 안이 긁히자 해림의 뺨에 돋은 솜털이 바짝 몸을 세웠다. 아랫입술도, 주신도의 어깨를 틀어쥔 손가락도 바르르 떨렸다.

주신도가 해림이 막 볼일을 마친 애라도 되는 듯이 속옷과 바지를 다시 올려 주고 야무지게 벨트까지 채웠다. 해림이 주신도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며 손등의 관절이 하얗게 도드라지게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살면서 이렇게 강렬한 치욕을 당해본 적이 없건만, 여기에선 매번 새롭게 기록을 갱신했다.

“지금부터 30분이야.”ㄴㄴㅇ

주신도가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손목시계를 흘긋 확인했다. 30분. 길다면 길지만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해림이 어금니가 얼얼하도록 이를 꽉 깨물었다. 기필코 내기에서 이겨 외출 승인을 받아 탈출의 발판으로 삼고 말리라.

 ㄴㄴㅇ 

이물감이 불편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니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넣는 과정이 인격을 짓밟는 행위에 가깝기는 했으나 큰 고통을 수반하지 않았고, 잘만 버티면 외출도 가능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해림이 무던하게 넘겼다.

가만히 있기에는 심심해 테이블 위를 보는데, 매번 왔으면서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신문이나 잡지가 눈에 띄었다. 경제, 시사를 중점으로 다루는 주간 잡지와 정치색이 극과 극인 신문 등, 매사에 껄렁거리기 바쁜 주신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읽을거리들이었다.

설마 이걸 다 읽는 건 아닐 테고. 장식용으로 놓았나 싶어 해림이 손을 뻗었다. 몸을 굽히자 안에 들어간 놈이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뿜었다. 발가락이 절로 비틀리는 야릇한 감각에 읏, 하고 해림이 작게 신음했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마.”

서류에 눈을 박고 있던 주신도가 대번에 해림을 나무랐다. 원흉이 저딴 말을 하니 부아가 치미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해림이 주신도를 무시하고 잡지를 손에 쥐었다. 최근 일자가 잡지 구석에 찍혀 있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활자라 몸의 불편함도 잊고 빠져들었다. 폭락하는 세계 경제에서 살길을 도모하려면 무얼 해야 하는지 흥미진진하게도 써 놨다. 기본금이 수억은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말하는지라 해림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판타지였다.

“……힉!”

잡지에 코를 박고 있다가 해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홱 들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잡힌 잡지가 합죽선처럼 구겨졌다.

지이잉, 거리는 아주 작은 진동 소리가 해림의 목소리를 뒤따랐다.

아까 봤던 그 진동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추리까지 가지 않아도 알았다. 해림이 주신도를 노려봤다. 서류만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해림의 시선은 용케 알고 주신도가 슬쩍 시선을 들었다.

“왜.”

“이거, 하지 마세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주 약한 진동인데도,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이물감이 속살을 타고 올라왔다. 얇은 기타 줄을 손가락으로 그었다가 뗀 듯이 가벼운 흔들림이었으나 받아들이는 해림에겐 아니었다. 낯선 감각이 신경을 야금야금 좀먹었다.

“그럼 거저먹는 줄 알았어? 아직 10분도 안 됐어, 도련님. 겨우 1단계에서 벌써 이러면 어떡해.”

“진동, 넣는다는 이야기는 없었.”

“아니 그럼 로터를 그냥 넣고만 있으면 무슨 재미야? 도련님도 이참에 좀 배워 둬. 이거 버튼을 누르면…….”

“―흐윽!”

진동 소리가 바깥으로 크게 새어 나갈 만큼 커졌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소파 아래에서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고 있다고 알 터였다. 해림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상체를 굽혔다. 허벅지를 옹송그려도 속살을 뒤흔드는 진동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너무 좋아하는데. 이거 이겨도 져도 내 손해 아니야.”

“그만, 좀!”

해림이 새되게 외치고 나서야 진동이 멎었다. 흐으, 하고 숨을 몰아쉰 해림이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고 소파의 끄트머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짧은 새에 눈가가 발갛게 익고 입술도 딸깃물 머금은 듯이 핏기가 올랐다. 입술 사이로는 색색거리며 평소보다 들뜬 숨결이 터져 나왔다.

별거 아니라고, 고작 30분만 참으면 된다고 저를 달랬거늘, 이런 걸 30분이나 참으라니. 오히려 노덕구에게 매달려 손님방에 들어가는 게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 내가 아까 말했나? 30분간 싸지 않고 버티면 된다고. 로터가 중간에 빠져도 도련님이 지는 거야.”

그런 적 없다. 내기는 주어지는 보상 외엔 다 모호했다. 결국 주신도가 원하는 대로 이런 수모를 겪었을 테지만, 내기를 걸며 해림이 원해서 달려든 것처럼 그림이 바뀌었다. 죄다 주신도의 수작이었다.

“어디 잘 버텨 봐, 도련님. 지금 하는 거 보니 뭐, 30분 기다릴 것도 없이 내가 이기겠는데.”

그 말이 해림의 오기에 불을 붙였다. 해림이 얄팍한 배를 들쑥날쑥이며 숨을 골랐다. 어떻게든 참아내 주신도에게서 외출 승인을 받고, 이곳에서 영영 도망칠 희망만 구명줄처럼 품었다.

해림이 아무 말 않고 잡지에 시선을 박자 주신도도 이내 서류를 쳐다봤다. 약한 진동 소리와 간간이 해림이 숨을 흡 들이켜는 소리만 사무실 공기에 섞여 떠돌았다. 어쩌다 해림이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기라도 하면, 주신도가 보던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거슬리는 소리 내지 말라고 타박했다.

“내가 도련님을 예쁘게 봐주는 건 맞는데, 일하면서 사내 새끼 신음 듣기는 좆같으니까 그 입 다물어.”

“그럼, 이거, 빼고, 후……. 사장님이 진, 걸로…….”

주신도가 코웃음 치며 버튼을 눌렀다. 벌처럼 진동이 세졌다가 잦아들었다. 해림이 이를 악물고서 치미는 감각을 참았다.

“재갈 물려 줘?”

길게 말 섞으면 해림만 손해 보는 말재간이었다. 해림이 입술에 주름이 사라지도록 앙다물고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10분이 지나자 강도의 세기가 한 칸 올라갔다. 해림이 이를 갈며 노려봐도 주신도는 뭐 어쩔 거냐는 뻔뻔한 눈빛으로 시선을 받아쳤다.

글자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낱말과 동사가 따로 놀았다. 해림이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어떻게든 잡지에 집중을 해 보려 했으나, 속살을 흔드는 진동이 집중력을 빼앗았다.

“후우, 하…….”

주신도의 개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최대한 신음을 억눌렀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20분째 들어서자 진동이 한 번 더 높아지며 속살이 저릿했다. 빠질 듯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이대로 지기 싫어 힘을 주면 진동을 타고 로터가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죽을 맛이었다. 점막이 하도 흔들리다 보니 이물감은 사라지고 다른 감각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간질거리다가 말았건만, 이제는 손이 안 닿는 등의 한복판을 깃털로 끊임없이 간질이듯이 괴로웠다. 배는 쉴 새 없이 움찔거리고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랫도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바지춤을 밀고 올라왔다. 빳빳하게 서서 끄트머리는 축축하게 젖었다. 속옷이 젖어 드는 불쾌한 촉각이 생생했다.

“이제 10분 남았어. 조금만 더 잘 참아 봐. 힘내, 도련님.”

10분이나.

진동 소리가 커졌다. 처음에는 모기의 날갯짓처럼 희미하더니만 이제는 방 어디에 서 있어도 들릴 만큼 커다랬다. 그만큼 자극도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주신도의 시선이 저에게 박혀 있는 것조차도 해림은 몰랐다. 부끄러움도 날아갔다. 해림이 무릎을 세워 다리를 끌어모으고 두 팔로 껴안았다. 발이 모로 틀어지며 서로 얽혔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진동 소리 아래로 해림의 신음이 흩어졌다. 옷이 가렸음에도 젖꼭지가 무릎에 스치기라도 하면 누가 꼬집기라도 한 듯이 아팠다. 좀 전에 주신도가 장난처럼 깨문 젖꼭지는 흡입기에 쪽쪽 빨린 듯이 셔츠를 밀고 톡 튀어나왔다.

“하으, 읍, 흐읍. 흣…….”

허벅지를 맞대고 꼬물거리자 바짝 서서 바지에 아프게 짓눌리는 기둥이 좋다고 물방울을 토해 냈다. 작은 감각에도 사정에 이를 만큼 몸이 달아올랐다. 불알은 쪼그라들고 기둥만 퉁퉁하게 살이 쪄서, 어서 미지근한 물을 오줌처럼 뱉어 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3분.”

눈앞이 핑핑 돌았다. 싸고 싶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손가락만 쓱 대도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겠거늘 이성이 뒷일을 생각하라고 손목을 붙들었다.

징징거리는 진동이 고막을 핥는 듯하고, 이제는 피부에 닿는 모든 것, 심지어 옷깃마저 사정을 부추겼다. 해림이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쥐어뜯으며 젖 빨던 인내심까지 모조리 끌어모았다.

더는 못 참겠어서 등받이에 슬쩍 아랫도리를 들이밀었을 때가 되어서야 뚝, 하고 진동이 멎었다. 해림의 은근한 허리 짓이 그 자리에서 뚝 멎었다. 조금만 더 하면 해방될 수 있었는데, 짙은 아쉬움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문을 계속 받으면 미친다는데 그런 경지에 다다른 게 아닐까. 아쉽다니. 아니다. 뇌가 잠시 다른 음란한 영혼에게 지배당한 게 분명했다.

“어디 결과 좀 확인해 볼까. 이리 와, 도련님.”

해림이 아래를 몰래 내려다봤다. 위로 솟은 바지춤이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로터는 여전히 좁은 속살 속에서 존재감을 뿜어 내고 있고, 다리는 빌어먹게도 힘이 없었다. 태평하게 걸어가서 이 끔찍한 내기의 승자는 자신이며, 주신도는 패배했다고 비웃어 주고 싶건만 꼴을 보아하니 비웃음은 제 몫이었다.

해림이 뭉그적거리자 주신도가 그놈의 희고 매끄러운 장갑을 착용하고서 해림에게 다가왔다. 해림이 속으로 애국가를 제창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주신도가 해림의 팔을 잡아당겼다. 열심히 웅크렸던 다리가 헤벌어지며 아직 식지 않은 아랫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주신도가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벗겨 줘야 해?”

“안 했습니다.”

“뭘 안 해.”

“……사정이요.”

“도련님은 내가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을까.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못 믿는다고.”

“진짜예요.”

제발 믿어 달라고 진심을 담아 올려다봐도 주신도는 너 같으면 믿겠냐고 입술과 눈 아래를 비틀며 내려다봤다. 어차피 안 믿을 거, 아랫도리가 식을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벌자며 해림이 주신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정말……. 거짓말 아닙니다.”

주신도가 고개를 비틀고 요놈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이런 짓을 저지르나 쳐다보다가, 곧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고는 해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고작 한 손으로 해림이 작은 고양이나 된 듯이 번쩍 들어 올려 일으켜 세우고서, 비틀거리는 해림의 바지춤을 잡았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속옷까지 한 번에 잡혀 훅 내려갔다. 해림이 옷자락을 끌어 내려 가리려 했지만 같은 짓이 두 번은 안 통한다며 주신도가 손목을 잡았다. 그 탓에 발갛고 꼿꼿하게 선 아랫도리가 주신도의 시선 아래 가릴 것 없이 노출됐다. 젖꼭지와 색이 같은 기둥 끝에 투명한 물방울이 매달려 있다가 거미줄처럼 길게 끈을 남기며 주르륵 떨어졌다.

“아하.”

해림의 얼굴과 목덜미가 빨간 물을 줄줄 흐를 듯이 달아올랐다. 주신도에게서 벗어나려고 팔에 힘을 줬지만 소용없었다. 주신도가 신기한 거라도 본 사람처럼 해림의 아랫도리를 보고, 한 손으로 엉덩이를 쥐었다.

“싸지는 않았네. 고생했어, 도련님. 도련님이 내기에서 이겼어. 외출 허락해 줄게.”

승리감에 취할 겨를도 없었다. 민감하게 떨리는 속살 안으로 주신도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질척거리는 점막을 장갑 낀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로터가 자리 잡은 곳까지 달팽이처럼 기어 올라갔다. 해림이 몸을 비틀자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워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는.

“도와주잖아. 협조하자.”

하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 같잖은 소리를 지껄였다. 해림이 숨을 흡 들이마시며 눈에 보이는 옷깃을 붙들었다. 가까스로 멎었던 간질거림을 손가락이 다시금 불러왔다. 몸이 옴찔옴찔 마구잡이로 떨렸다.

“손가락, 그만, 빼 주세요. 싫어…….”

“왜, 이거 평생 이렇게 박고 있으려고? 그렇게 좋았어? 해 보니 신세계야?”

저 딴에는 농담이라고 하는 말이 밉살맞기 짝이 없다. 해림이 짜증을 대신해 주신도의 셔츠에 잔뜩 주름을 만들었다. 손아귀에 옷을 말아 쥐고는 찢을 듯이 당겼다.

해림이 옷을 틀어쥐어도 주신도는 멈추지 않았다. 로터에 손끝이 닿았으면서도 일부러 더 깊게 넣을 것처럼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아직 제대로 터트리지 않은 아랫도리가 왜 다시 자극을 주냐며 성을 냈다. 해림도 원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빠득 가는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고 나서야 주신도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렸다.

“진짜, 하지 말라고, 내가 씨발 몇 번을, ……흐읍.”

말 사이에 욕이 섞여 나갔다. 해림의 입술 바로 옆에 주신도의 귀가 있었다. 쌍시옷이 들어간 욕을 듣고도 주신도가 키득거렸다.

“도련님이 그런 욕도 할 줄 알았어? 곱게만 큰 줄 알았더니.”

손가락이 젖은 점막을 훑으며 들어갔던 것만큼이나 감질나게 아래로 내려왔다. 로터가 빠져나오기 일보 직전에, 고의인지 실수인지 아리송하게 주신도의 손가락이 내벽의 한 군데를 강하게 눌렀다.

헉, 하고 해림이 숨을 들이마셨다. 쩍 벌어진 눈앞으로 번개가 번쩍 내려쳤다. 흰 섬광이 시야를 가로지르더니 몸이 부르르 떨리고 등골과 배꼽에 쾌락이 오르내렸다.

“흐으.”

셔츠가 가린 앞에서 흰 액체가 오래 참았던 만큼 걸쭉하게 터져 나왔다. 위로 쏘아 올린 물줄기처럼 호선을 그렸다가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주신도의 까만 바지 위에 점점이 묻었다. 그거로도 모자란 지 로터가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올 때에 맞춰 미처 기둥 밖으로 흐르지 못한 정액이 오줌 줄기처럼 쪼르륵 흘러내렸다.

“이거 봐. 우리 도련님이 이렇게 버릇이 없어요. 누가 허락도 안 했는데 마음대로 싸래. 내기 끝났다고 이렇게 매너 없이 굴면 어떡해. 진짜 손님이었으면 도련님, 버릇없다고 갈비뼈 세 개는 부러졌어.”

주신도가 뭐라 떠드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정을 했음에도 기둥은 쉽게 죽지 않았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다리에 힘이 일순간 빠져나갔다. 땅이 쑥 꺼지듯 무릎이 꺾였다. 주신도가 손목을 놔주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으로 고꾸라질까 봐 눈앞에 보이는 검은 벽을 잡았는데, 눈을 끔벅거리고 보니 희끗한 자국이 묻은 주신도의 허벅지였다.

이마가 닿을 듯이 가까운 오른쪽 허벅지가 생수통을 넣은 것처럼 두툼하다. 해림이 가쁜 숨을 고르며 일어나려 했다. 갑작스러운 사정이 어지럼증을 일으켜 몸을 쉽게 가눌 수가 없었다. 얼굴은 열병 앓는 사람처럼 발갛고, 헐렁한 셔츠 틈으로 드러난 가슴은 가파르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혼자만 색이 산열매처럼 빨갛게 익은 젖꼭지가 주신도의 시야에 걸렸다가 셔츠 안으로 숨었다.

“…….”

장갑을 벗어 던진 맨손이 어느새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 땀에 젖어 얼기설기 엉킨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질하고는, 해림의 뒷머리를 가볍게 잡아챘다. 힘에 밀려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도련님 좋은 일만 했어. 사정도 시켜 줘, 외출도 허락해. 우리 도련님만 좋고 끝내면 내가 좀 억울하지. 내가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올려다본 주신도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두툼한 입매가 비열하게도 비틀어졌다. 아직도 할딱이는 해림을 내려다보고서 주신도가 벨트를 풀었다. 철컥거리며 벨트 풀리는 소리에 해림의 발갛게 익은 낯빛이 삽시간에 희게 죽었다.

“충분히 친절하게 대해 줬지? 이제 도련님이 친절하게 굴어 봐.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도련님도 잘 알잖아. 입 벌려.”

아직 숨이 가팔라 헤벌어진 입술 새로 뱀 대가리 같은 살덩이가 밀고 들어왔다. 반항 못 하게 뒷머리가 단단하게 잡혀 해림이 속수무책으로 입을 열었다. 정액이 튀어 희게 말라붙은 주신도의 허벅다리를 붙잡고 해림이 찡그리듯 눈을 감았다.

외출과 탈출을 위해 무얼 못하랴. 자존심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 * *

수모로 점철된 길이긴 했어도 결국 외출을 따냈다. 해림이 침대에 엎어져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곱씹다가 외출을 떠올리고 몸을 뒤집었다. 천장을 봐도 어젯밤에 본 주신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해림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콱 짓눌렀다.

「목구멍 더 벌려. 옳지. 조금 더 들어갈 거야.」

목 졸린 사람처럼 시뻘건 얼굴을 봤는데도 주신도는 자비 없이 기둥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까끌까끌한 거웃이 입술에 닿을 만큼 다 집어넣고서 석고를 굳히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살려고 허벅지를 벅벅 긁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손목만 잡히고 뒷머리는 더욱 거세게 휘어 잡혔다.

이대로 숨 막혀 죽겠구나, 눈물과 침이 펑펑 쏟아지고 머리가 졸도를 앞둔 듯이 어질어질 돌 무렵에야 주신도가 몸을 뒤로 물렸다. 바닥을 짚고서 거칠게 쿨럭거리며 물 위로 튀어나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다물리지 않는 입에서 멀건 침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위장이 뒤집힌 듯이 구역질도 치밀었다.

「고개 들어.」

명령해 놓고 주신도가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짐승이 목을 긁는 소리에 가까운 신음이 귀에 들리는 동시에 억지로 들린 얼굴 위로 하얗고 풋내가 진한 액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머리를 거머쥔 손아귀 힘이 워낙 거세 고스란히 맞았다. 비리고 점성 짙은 액체가 이마에서 눈썹으로, 속눈썹을 적시고 붉은 뺨과 입술, 숨을 들이마시느라 벌어진 입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주신도는 두어 발 뱉고도 여태 단단한 놈으로 해림의 입술을 문질렀다. 도톰한 입술이 정액으로 번질번질해지게끔.

「잘 어울리네.」

주신도가 고대로 해림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구부렸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해림의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 주고는 말없이 한참을 쳐다봤다. 사정의 여운도, 만족스러운 미소도 뭣도 없는 싸늘한 무표정이었다. 가늘게 접힌 눈매 사이로 붉은색 도는 눈동자가 빛없이 음험했다.

「……수고했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 외출하면 뭐 하고 싶은지 생각해 두고.」

주신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으로 돌아갔다.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며 해림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해림이 멍하니 초점을 잃었다가 딸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일어났다. 인사할 정신머리도 없어서,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복도에서 누굴 스쳤는지도. 기계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와 양치질을 세 번 연이어 하고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페이드아웃처럼 잠에 빠졌다.

“…….”

해림이 얼굴에서 손을 떼며 목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턱 바로 아래에서 목울대까지 내려왔다.

어디까지 들어왔더라.

주신도는 어떻게 하면 사람이 괴로울지 잘 아는 인간이었다. 고문을 통해 상대방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일이 직업이었으면 주신도는 단연 세계에서 알아주는 권위자였으리라. 세계의 모든 첩보 기관이 주신도에게 고문 기술을 전수받으려고 줄을 섰겠지. 아니면 반대로 주신도가 그쪽에서 고문 기술을 익힌 걸지도 모른다.

Deep Throat.

야한 동영상에서 몇 번 봤다. 그런 고문을 저가 당할 줄은 몰랐다. 입이 벌어지고 딱딱하게 굳은 살덩어리가 들어오고, 혓바닥과 입 속을 누르며 목젖과 그 안쪽까지 눌렸다.

그 자리에서 토하지 않은 게 용했다. 목구멍이 한 대 거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부어 있는 감촉에 해림이 으, 하며 목에서 손가락을 뗐다. 회상도 그만뒀다. 더 떠올려 봤자 건설적인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정신 차리자.”

어제는 경황이 없어 외출하면 뭣부터 해야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해림이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뜨끈한 물 아래 섰다. 어제의 기억을 지우듯 오래도록 물을 맞자 긴장으로 딱딱하게 뭉친 근육이 누글누글 풀렸다. 뇌도 같이 풀리는지, 물안개 낀 듯 몽롱했던 머리가 다시금 굴러갔다.

탈출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사실 없었다. 틈을 노려 경찰서로 뛰어가면, 상식이 통하는 곳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리라 믿었다. 주신도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해림은 언제든 뛸 수 있게 편한 운동화에 가벼운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복도에서 해림의 시선이 이형의 방 쪽으로 향했다. 데려갈까. 기왕이면 이형도 이 수렁에서 구해 내고 싶었다. 저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힘들다고 눈물짓던 얼굴이 선연했다.

처음에는 그저 예전에 키웠던 개와 닮았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잘 대해 줬는데. 저도 사람이긴 했는지 정이 솟았다. 어차피 나갈 곳, 아무에게도 정 붙이지 않으려 했건만. 여기에서 이형만이 유일하게 평범한 관계를 만든 사이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

머지않아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이성이 말렸다. 애초에 주신도가 허락할 것 같지도 않았고, 성공일지 실패일지 아무도 모르는 판국에 이형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실패하면 임 이사 방에서 봤던 그 사람들처럼 주신도가 이형을 지하로 보낼 수도 있었다. 저야 제 탓이니 감당하겠으나 이형은 저를 믿고 나와 무슨 봉변인가. 그러느니 저 홀로 나가 성공하고 그 후를 기약해도 늦지 않는다.

출근보다 이른 시간이라 복도는 한산했다. 간간이 방 너머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다들 출근 준비 중인 듯했다. 사장이 허락했으니 들켜도 상관없는 일일진대, 해림은 괜히 발소리를 죽이고서 복도를 걸었다.

약속 장소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외출을 할 때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감시할 사람을 한 명 붙여 내보내지 않을까. 위치 추적기를 넣어 놨으니 어디로 튀든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해림을 도시 한복판에 내려놓을 수도 있다. 희망을 양껏 부풀리며 해림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인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하며 입을 가리다가 옆으로 비키며 자리를 내어 줬다.

“정하 씨, 오랜만이에요. 어디 가요?”

“예.”

“어디?”

해림이 살갑지 않아도 유리는 사근사근 웃으며 대했다. 세상의 온갖 진상들에게 이골이 났는데 해림의 무뚝뚝한 태도야, 애교에도 못 미쳤다. 하나 해림의 대답에는 유리도 미소를 까먹고 입을 헤벌렸다.

“외출이요.”

놀랄 노 자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봐도 해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유리가 뭐라도 대답해 보라고 열렬히 바라보는 걸 해림은 알면서 외면했다. 굳이, 주신도의 아랫도리를 쪽쪽 빨고 봉사한 대가로 얻어 냈다고 밝힐 필요야 없었다.

“정하 씨, 여기 온 지 아직 한 달도 안 되지 않았어요?”

“예.”

“근데 사장이 허락해 줘?”

“어쩌다 보니.”

“세상에. 사장이야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긴 한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유리가 실눈을 뜨고서 해림을 쳐다봤다. 해림의 어느 구석이 사장에게서 외출 허락을 받아 냈나 찾아낼 것처럼 집요하게. 해림이 묵묵하게 엘리베이터 상단을 올려다봤다. 불편한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뭐, 이왕 허락받은 거 재미있게 놀고 와요. 좋겠다. 나는 사장이 일을 하도 많이 줘서 눌려 죽겠는데……. 정하 씨, 오는 길에 젤리 좀 사다 줘요. 여기 자판기에는 젤리가 없더라고.”

해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유리가 먼저 내렸다. 6층에 있는 과자 자판기에는 유리 말대로 젤리가 없었다. 사 들고 돌아올 일은 없길 바라서 해림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가 좋은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인연은 여기까지였으면 했다.

긴장을 주먹 안에 감추고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아직 손님이 올 시간이 아니라서 그럴 가능성이 컸다.

저쪽에서 검은 차 한 대가 해림 쪽으로 다가왔다. 끼이익 하며 주차장 바닥을 긁는 바퀴 소리가 날카로웠다. 차는 해림이 서 있는 근처에 멈췄다. 감시가 붙을 건 예상한 바라 해림이 실망하지 않고 차 쪽으로 다가갔다. 검게 선팅된 유리창이 아래로 느릿느릿 내려갔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주신도였다. 차에 타고 있는 주신도를 보자 희망과 기대로 상기되어 있던 해림의 얼굴이 폭삭 내려앉았다. 실망이 어찌나 큰지 웬만한 일로는 표정에 변화가 없는 해림이 눈썹과 뺨과 입술과 눈빛에 낙담을 드리웠다.

감시를 붙이면 도망갈 기회나 잡지, 주신도라니. 혹이 붙어도 종양 급이 붙었다.

“뭘 그렇게 기뻐해. 어서 타.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해림이 표정을 썩힌 채 서 있자 주신도가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뱅 돌아 주신도의 옆자리에 탔다. 운전석에 앉은 이가 룸미러로 해림을 흘끗 쳐다봤다.

“출발해.”

탈출의 기회이자 첫 외출이라 설렘이 이루 말할 수 없었거늘. 해림이 창에 이마를 기댔다. 우울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와 창문에 희끗한 자국을 남겼다.

차는 지하 주차장을 유유하게 빠져나온 후 굽이굽이 굽은 산길을 내려왔다.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는 길은 주변이 죄다 숲이었다. 언젠가 누가 산에서 해골이 발견될 거라며 키득거렸는데, 이 정도 규모에 빽빽한 나무들을 보니 시체를 묻어도 하늘의 뜻이 없으면 발견되기 어려울 성싶었다.

멀미가 날 만큼 굽이진 길을 내려왔더니 산을 빙 둘러 높다란 철조망이 보였다. 고압 전기가 흐른다는 경고문과 사유지라는 표시판이 같이 붙어 있었다. 정문은 경비실의 확인이 떨어져야 열렸다.

해림은 내려오는 길과 정문을 눈여겨보았다. 여차하면 맨몸으로라도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서. 고압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과 오면서 봤던 CCTV들을 피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나 알아 둬서 손해 볼 건 없었다.

차는 빛 없는 들판을 지나 천천히 도시에 진입했다. 밤에 접어든 시간이라 가로등의 주홍빛이 방울처럼 땅 위로 주렁주렁 떨어졌다. 도로를 지나가는 차와 키가 높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한연동에서 멀어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도시였다. 창 어딜 봐도 숲만 보이는 숨 막히는 건물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삐죽삐죽 높게 솟은 빌딩들을 보자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해림이 공기를 들이마실 것처럼 가슴을 부풀렸다. 옆에서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좋아?”

“예.”

“그래. 뭐 할지 생각은 해 뒀고?”

탈출. 주신도가 옆에 있어 쉽지는 않지만 틈이 보이면 바로 경찰서로 뛰어가려고 마음먹었다. 밝힐 수야 없었다.

“아직.”

“그럼 일단 밥부터 먹지.”

주신도 얼굴을 마주 보고 밥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랴. 산해진미를 가져다 놔도 입에서는 정액 맛만 날 텐데.

날 것에 가까운 냄새와 비릿한 그 맛이 떠올라 해림의 이맛살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보호하듯이 손으로 목을 가렸다.

“사장님은 다른 일 없으십니까.”

어서 빨리 꺼져 줬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서 물었다. 어디 구석에 내려 줘도 좋으니 따로 움직이기만 하면 행복할 성싶어서. 주신도가 손에 쥔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해림의 희망을 무참히 부쉈다.

“아니. 도련님 따라 나온 건데.”

“왜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주신도의 눈길은 여전히 얇은 태블릿에 박혀 있었다. 검지로 화면을 끌어 올리며 주신도가 무심히 대답했다.

“몇 번 말해. 내가 사람을 못 믿는다고.”

해림은 물론 해림을 감시하는 사람도 못 믿는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김이 푸시시 빠졌다. 희망이 바늘구멍 난 풍선처럼 저 멀리 날아갔다. 해림이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서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늘이 해림의 기분을 알듯이 커튼처럼 먹구름을 길게도 드리웠다. 침울한 공기가 곧이라도 빗방울을 뚝뚝 떨어트릴 듯하다. 해림이 창문을 내리려고 버튼을 꾹꾹 눌렀지만 당연하게도 내려가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데도 내려서 만끽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라. 순간이라도 잡아 보려고 유리창에 손을 댔다. 환영처럼 풍경이 손가락 사이를 무정하게 휘휘 지나갔다.

경찰서 앞에 내려 달라는 말이 목구멍에 먹구름처럼 차오를 무렵, 차는 도시의 도로를 달려 어느 한옥 앞에 섰다. 해림은 자포자기하고서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었다. 주신도가 차에서 내려 해림이 앉은 자리 쪽으로 다가와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안 내리고 뭐 해.”

예. 내리라면 내려야죠. 속엣말과 달리 해림은 얌전히 차에서 내렸다. 발바닥 아래서 자갈이 덜그럭거리며 부딪쳤다. 해림이 내려 차 문을 닫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 둘만 남겨 놓고 공터를 빠져나갔다.

“저 사람은요?”

“알아서 먹겠지.”

왜 가냐는 질문에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밥 먹자고 하더니 기어이 단둘이 식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해림이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주신도의 뒤를 터덜터덜 따라갔다. 생전 처음 보는 남처럼 멀찍이 떨어져서는.

“이리 와.”

주신도가 개 부르듯 불렀다. 손짓하는 정성도 안 보였다. 해림이 코뚜레 뚫린 소처럼 마냥 발을 질질 끌었다. 근처에 다가가자 주신도의 팔이 해림의 어깨 위에 턱 하니 올라왔다. 그 무게가 천근의 추였다.

“여기 맛 괜찮아. 여기 누님이 젊었을 적부터 손맛이 끝내줘서 우리 회사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가게를 턱 내 버렸지 뭐야. 납치하려다가 말았어. 내가 좀 착해야지.”

“……예.”

“도련님, 인상 좀 펴. 우리 도련님 좋으라고 내가 귀중한 시간까지 빼서 이렇게 나왔는데 왜 이렇게 죽상이야. 웃어.”

주신도만 없으면 세상 천치처럼 상 난 곳에서도 웃어 줄 수 있다. 눈치가 없는 건지, 빠른 건지. 해림이 억지로 입술 끝만 끌어 올렸다. 입꼬리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자꾸만 아래로 쳐졌다. 차라리 팔 부러지도록 아령을 드는 게 덜 힘들 일이었다.

주신도가 고개를 기울여 해림의 억지 미소를 보고 마주 웃었다. 해림은 비극을, 주신도는 희극을 본 얼굴이었다. 감정 표현이 드문 해림이 온몸으로 난색을 표해도 주신도는 신난 걸음으로 한옥 안으로 들어섰다.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깔끔했다. 도시적인 맛보다 오래된 사찰에서 느낄 법한 고즈넉한 맛이 강했다. 석등에 놓은 등불에서 은은한 빛이 쏟아져 정원을 비추었다. 작은 물레방아가 돌돌 구르며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흐르는 노랫소리와 어우러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주신도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다가왔다. 주신도도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여인을 껴안았다.

“오랜만이에요, 주 사장님. 요새 왜 이렇게 두문불출하셨어요.”

“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서요. 누님은 여전하네. 하나도 안 늙었어. 애기들은 다 잘 있고?”

“그럼요. 요번에 큰 애가 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어미로서 해 준 것도 별로 없는데 잘 해냈지 뭐예요.”

“훌륭한 엄마 밑에서 훌륭하게 큰 거지, 별거 있나. 내가 일에 파묻혀 사느라 누님한테 소홀했네. 늦었지만 선물 하나 보낼게요. 옛 주소 그대로지?”

“아휴, 선물은 무슨. 괜찮아요. 이렇게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네.”

여인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얼굴은 고와도 손등은 까무잡잡하니 잔주름이 많았다. 이곳의 주인이 아닐까. 정체를 짐작하는데 여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인이 눈과 입술로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분은 누구셔요? 사장님만큼 잘생긴 사람은 내가 또 처음 보네.”

“우리 직원.”

“세상에, 직원도 데려오고 별일이셔.”

“내가 좀 좋은 사장인가. 누님도 새삼스레 왜 그렇게 놀라요.”

좋은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해림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재빨리 내리기는 했으나 여인이 용케 보고 소녀처럼 까르륵 웃었다.

“두 분 시장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요. 얼른 들어가요. 오늘 제주도에서 다금바리 좋은 거 들어왔는데, 역시 주 사장님 먹을 복이 많아. 제가 서비스 팍팍 넣어 줄게요.”

“저야 누님만 믿죠. 그 솜씨 어디 가나.”

주신도가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장기 밀매를 일삼고 사람을 사고파는 포주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멀끔한 인상과 언행이었다. 주인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누가 주신도를 범죄자라 볼까. 젊은 나이에 성공한 잘생긴 사업가 그 자체였다.

이럴 때가 아니다. 해림이 주신도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재빨리 안을 살폈다. 이따가 화장실을 핑계 삼아 나와 전화라도 한 통 걸려고 미로처럼 꺾인 길을 눈에 익혔다. 주인이 주신도와 친한 걸로 봐서 저가 도와 달라고 매달린다 한들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없으리라.

한복을 입은 다른 여인이 둘에게 방을 안내했다. 다른 방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창호지를 덧댄 문을 열자 정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방이 펼쳐졌다. 상 아래가 움푹 파여 있었다.

주신도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해림이 떨떠름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문이 닫혔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것도 빚에 올라갑니까.”

문득 이만한 식당이면 가격도 만만치 않을 거란 생각에 해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신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주신도가 직원에게 무료로 무언가를 줄 리가 없다. 선물이랍시고 품에 안긴 건 고문 도구였으니 논외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다 일해서 갚아야 하는 빚이지.”

“그럼 저는 안 먹겠습니다. 나갈게요.”

해림이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자 주신도가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검지에 턱을 기댔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주신도가 시선 역시 삐딱하니 불량하게 해림을 바라봤다.

“도련님은 선택권이 없다는 걸 왜 번번이 잊을까. 우리 도련님은 정말 똑똑해 보이다가도 어떨 때 보면 참 멍청해. 붕어 대가린가. 잘 까먹고.”

힐난하는 어조에 해림이 울컥해서 돌아봤다. 미소는 짓고 있어도 눈동자는 싸늘했다. 차갑게 직시하는 시선에 해림이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긁어 부스럼 만들기는 싫었다.

“일부러 맛있는 곳 골라서 왔더니 왜 그래, 사람 슬프게.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마. 내가 마음이 여려서 도련님이 말 안 들으면 가슴이 아파.”

주신도가 진심처럼 눈썹을 팔(八)자로 구기고서 가련한 척 굴었다. 배우였으면 대성했을 인간이 왜 범죄의 길로 들어서서는. 해림은 감흥 없이 주신도의 과장된 연기를 구경했다. 연기는 훌륭해도 관객인 해림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주신도의 원맨쇼를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하나 해림이 하품을 하기 직전에 음식이 나왔다. 튼튼한 상다리가 뚝 부러지도록 가짓수가 많았다. 서비스를 주겠다던 주인의 호언장담이 헛말은 아니었다.

주신도를 앞에 두니 있던 입맛도 달아나 해림이 젓가락을 깨작깨작 움직였다. 정갈한 상차림에 육해공을 망라한 음식이 양반도 체면을 내던지고 비렁뱅이처럼 달려들 맛인데도, 해림의 입 안은 사포로 문지른 듯 껄끄럽기만 했다.

“왜 그렇게 못 먹어. 음식 다 식게.”

주신도가 가까이 있는 육전을 한 젓가락 가득 집어 해림의 앞 접시에 올려놨다. 노란 계란옷을 입은 육전에서 고기의 짭짜름한 향이 풀풀 풍겼다. 입에 침은 고이나 주신도가 준 거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아니면 도련님. 다른 거 먹고 싶어서 그래? 우리 도련님 입맛 참 특이해.”

해림이 육전을 내려다보다가 무슨 소리냐며 주신도를 바라봤다. 주신도가 씩 웃고는 발끝으로 해림의 발목을 더듬었다. 해림이 식겁해서 다리를 뒤로 빼도 기어코 쫓아와 발목의 복사뼈를 건들고 그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갔다.

“좆물이 그렇게 맛있었어?”

입맛이 뚝 떨어졌다. 젓가락을 주신도의 두 눈동자에 꽂고 싶은 충동을 해림이 간신히 참아 냈다.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건만 가만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주신도의 시선이 발목에 매인 덫 같다. 당장 저가 준 육전을 입에 넣지 않으면 그 입에 다른 고깃덩이를 물려줄 성 쳐다본다.

하필이면 입식처럼 상 아래가 파인 곳이라 주신도가 원하기만 하면 해림은 그 아래로 기어가 저번처럼 아랫도리에 얼굴을 박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밥 먹다가 누가 그런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벌이겠냐마는, 언제나 일상의 상식을 파괴하는 주신도에게 평범한 반응과 행동을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해림이 보는 주신도는 자기가 식사를 하는 동안 해림에게 능히 아랫도리를 물릴 인물이었다.

해림이 육전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저가 고기를 먹은 양 주신도의 입가가 만족스레 풀어졌다. 영 넘어가지 않는 고깃덩이를 잘게 부수어 힘겹게 꿀꺽 삼키고서 해림이 물로 입을 헹궜다.

“잠깐 화장실 좀.”

“어. 나가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틀면 있어. 헤매지 말고. 빨리 와. 곧 음식 나오니까.”

의외로 주신도가 선선히 보내 줬다. 나가서 전화 한 통을 부탁하고, 납치당했다고 알린 후 경찰이 오면 안전하게 탈출하자, 가 해림의 야무진 계획이었다. 물론 구멍이 숭숭 난 듯이 허술한 계획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해림의 두근거리는 가슴은 문을 열자마자 차갑게 식었다. 언제 왔는지, 소리소문없이 정장을 입은 덩치 한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해림이 나갈 기미가 보이자 뒷짐을 풀고 따라올 자세를 취했다.

해림이 뒤돌아봤다. 주신도가 빙그레 미소 짓고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우리 도련님이 길 잃을까 봐. 저 친구가 여기 지리를 잘 알거든.”

“따라오지 않아도.”

“말할 여유 있는 거 보니 급하진 않나 봐. 다시 와서 않을래? 도련님 좋아하는 것도 먹고.”

“다녀오겠습니다.”

개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해림이 신발을 신었다. 덩치가 졸졸 따라왔다. 설마하니 화장실 안쪽까지 따라올까 싶었건만, 양심은 있는지 입구를 지켰다.

화장실 창문은 비쩍 마른 아이나 간신히 지나갈 만큼 폭이 비좁았다. 천장의 타일을 열어 환풍기로 탈출하는 일은 영화에서나 가능했지, 현실에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 안에서는 도망칠 구석이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가게 이곳저곳 헤매며 덩치를 따돌릴 수도 없고. 해림이 하는 수 없이 나오지 않는 오줌 방울을 쥐어짜고서 물을 내렸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내친김에 세수도 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마주 보고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틈이 보여야 어떻게든 기회를 잡는데, 틈은커녕 균열도 안 보였다. 어디를 비집어야 주신도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앞날이 캄캄했다.

해림이 뺨을 짝짝 때리며 정신을 차렸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해림의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다른 손님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던 덩치가 뒷짐을 풀고 해림의 뒤를 쫓아갔다.

기왕 빚으로 올라가는 거, 마음을 바꿔 돈 아깝지 않게 먹으려 했건만. 주인장이 자랑하던 다금바리의 쫄깃한 식감도, 배를 아주 터지게 만들 듯 줄줄이 나오는 음식의 향연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뭣 좀 집으려면 주신도가 먼저 집어서 해림의 앞 접시에 놔 줬다. 괜찮다고 거부하면 분위기를 무겁게 잡고는 어서 먹으라고 닦달했다.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풀 쪼가리만 먹어서 무슨 힘이 나. 이거 먹어. 사람이 고기를 먹어야지.」

「제가,」

씁, 하고 주신도가 혼을 내고서 해림의 앞에 수북하게 고기를 쌓았다. 저번에는 성 고문이더니 이번에는 음식을 가지고 고문했다. 왜 이렇게 챙겨 주냐고 물어도 내 물건 내가 챙긴다는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대답이 듣지도 않았건만 귀에 쟁쟁해 묻지 않았다. 입에 올리느니 못한 질문이었다.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쑥 빠졌다. 진절머리 나는 곳이었건만 지금은 사방이 막힌 한연동으로 돌아가 익숙한 침대에 몸을 눕히고 쉬고 싶었다. 해림이 눈가를 꾹꾹 누르자 주신도가 흘끔 보고는 작게 실소했다.

“도련님 운동 열심히 하지 않았어? 매일 토끼처럼 뛰더니만. 그 체력은 모아 뒀다 얻다 쓰려고.”

탈출하는 데 쓰려고 운동했다. 주신도의 놀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지쳐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굴욕과 수모를 무릅쓰고 움켜쥔 절호의 기회 아니던가.

해림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어딜 갈 거냐는 질문에도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거기는 왜?”

“옷 좀 보려고요.”

가고자 한 곳이 옷가게가 주르륵 늘어선 대로변이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서는 도망치기가 훨씬 용의할 거라는 예상으로 제안했거늘, 하늘도 무심하시지 해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창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한두 방울 굵직하게 떨어지다가 채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빈 드럼통 때리듯이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암울하던 하늘이 기어코 일을 냈다. 하필이면 이때에. 적어도 대로변에 도착해 내릴 때까지만 이라도 기다리지. 해림이 이마를 유리창에 대고서 비 내리는 바깥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해림의 꿍꿍이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주신도가 얄밉게 낄낄댔다. 저 주둥이를 한 대 후려갈기면 속이 시원해질 텐데. 유리창에 비친 주신도의 옆모습만 빗줄기처럼 빤히 쳐다봤다. 눈빛이 주먹이었으면 퍽퍽 팰 수 있게끔 강렬하게.

“어쩔 수 없네. 다른 곳으로 틀어야지. 임서야, 유리가 자주 간다는 거기 가자. 우리 도련님 꼬까옷 맞추러 가야지.”

물건 취급을 넘어 애 취급이다. 사람 취급을 하니 좋아해야 하나. 해림은 주신도의 주접을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주신도가 사라지니 차라리 속은 편했다.

차는 빗줄기를 뚫고 달리다 어느 건물 앞에서 멈췄다. 해림이 가고팠던 대로변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득시글거릴 몰에 가자고 할 걸 그랬나. 해림이 속으로 후회했다.

주신도가 내리기 전에 운전석에 앉은 임서가 부리나케 내려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냈다. 검고 커다란 우산을 머리 위에 드리우고 나서 문을 열었다. 이런 대접이 익숙한지 주신도가 내렸다가, 검은 우산을 건네받고 빙 돌아 해림이 있는 쪽 차 문을 열었다.

“옷 본다며, 도련님.”

이런 매너는 쓸데없고 부담스럽다. 해림이 떨떠름하게 올려다보자 주신도가 팔을 잡고 끌어냈다. 해림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팔뚝을 움켜쥐고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주신도의 품에 안기듯이 몸이 구겨졌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맞고 들어가려고? 민폐 끼치는 건 우리 가게서 하는 지랄로 충분해. 여기에 도련님이 다 젖은 채로 들어가서 바닥을 더럽히면 내가 유리 보기가 민망하잖아. 유리가 여기 단골이거든.”

핑계는 좋다. 주신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해림이 어깨를 비틀었다. 굵직한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 듯이 갈퀴처럼 구부러졌다. 살갗이 짓눌리는 둔탁한 통증에 해림의 눈가가 구겨졌다. 읏, 하고 신음도 터졌다.

아주 잠깐 시선이 부딪쳤다. 지극히 무표정했다. 해림의 반항이 어디까지 갈는지 궁금한 사람처럼 주신도가 가만히, 조용히 지켜봤다.

정색하는 주신도는 인정하기 싫지만 무섭다. 해림이 어깨에서 힘을 쭉 뺐다. 주신도가 아프게 팔뚝을 쥔 걸 사과하듯이 손바닥으로 슬슬 쓸어내렸다.

결국 천하에 둘도 없는 막역지우처럼 어깨를 얼싸안고 가게 안에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밖과 달리 안은 빛이 환했다. 일렬로 늘어선 옷들에 구두와 심지어 접시, 수저와 액자 등 통일되지 않은 물품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주신도가 들어서자 옷을 정리하던 이가 식당의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짧은 머리에 여우처럼 가는 눈이 인상적이었다. 여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웬일이야. 실장님도 아니고 사장님이 직접 오시다니. 무슨 바람이 불었대?”

“우리 직원 옷 좀 사 주려고.”

사장이 제 물건 자랑하듯이 해림의 어깨를 바특하게 끌어안았다. 뺨이 돌덩이 같은 어깨에 짓눌려 볼살이 한쪽으로 밀리고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해림이 간신히 주신도의 팔에서 벗어나 얼얼한 뺨을 쓱쓱 문질렀다.

“사장님, 이제 연예인도 키워요? 미리 사인 받아 놔야겠다.”

“우리 도련님이 좀 쓸데없이 예쁘긴 하지. 그래도 데뷔시킬 생각은 없어서. 사인 받아 봤자 쓸모없을걸.”

“이렇게 잘생겼는데 아쉬워서 어째. 사장님은 욕심이 많네요. 잘생긴 거 혼자만 보려고 하고. 예쁘고 좋은 건 다 같이 공유해야 하는 거 몰라요?”

“내가 욕심이 많다고 이 사장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주신도의 실없는 대답에 여자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거렸다. 해림은 둘의 영양가 없는 대화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가게를 쓱 둘러봤다. 벽에 걸린 로고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실장이 보라며 주고 간 카탈로그에 박힌 로고와 똑같았다.

“사장님을 다른 손님들처럼 모실 수는 없죠. 이리 오세요. 제가 안내할게요.”

여자의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던 직원이 조심스레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커피와 주스를 각각 시키고 해림이 주신도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래 봤자 2인용 소파라 떨어진 거리는 한 뼘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옷은 대부분 주문 가능할 텐데. 뭐가 부족해서 옷을 사고 싶다고 한 걸까, 우리 도련님이.”

“그냥, 편하게 입을 옷이 필요해서요.”

대부분이 정장이라 운동할 때도, 잠깐 한숨 돌리러 흡연실을 찾을 때도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았다. 이런 곳보다는 평범한 시장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는 티셔츠에 편한 바지가 필요했건만. 카탈로그에 올라온 가격대가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만큼 높았다.

해림이 어릴 적부터 여유가 없던 건 아니었다. 부친의 사업이 호황을 누릴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하나 부잣집 도련님 생활은 대학교에 입학한 부로 끝이 났다. 집안 사정과 관계없이 성인이 되었으니 알아서 살라던 부친의 명에 따라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했다.

남들은 곱게 살았다 하지만, 스무 살 이후로는 안 해 본 일이 드물었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막노동을 했다가 다리가 부러져 조금 쉬운 일을 찾아다녔다. 과외도 했고, 심지어는 모델 일도 종종 했다. 천성과 상반된 일인지 카메라 앞에만 서면 뻣뻣한 나무토막이 따로 없었다. 일 자체는 다른 것보다 쉬웠으나 시간이 흘러도 어색함이 사라지질 않아 몇 번 못하고 그만 두었다.

유학길에 올라서는 가난한 고학생이 무언지 온몸으로 체험했고, 말 못 하는 외국인 노동자 취급당하며 밤과 낮이 무색하도록 일을 했다. 간간이 힘에 부칠 때는 부친에게 손을 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치밀었으나, 매정하게 쫓아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하고 싶지 않아 참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간신히 영주권을 따고 자리를 잡았거늘, 앞으로는 평탄 그 자체인 삶만 저를 기다릴 줄 알았거늘. 한국에서 부친이 남긴 빚과 주신도에게 발목 잡힐 줄은 그 누가 알았으랴.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해림이 과거를 헤매는 동안 옷이 줄줄이 걸린 행거가 방에 들어왔다. 신발과 팔찌, 모자 등은 덤이었다. 화려한 홀로그램이 박힌 야구 모자를 보고 해림이 이형을 떠올랐다. 저번에 방에 들어갔을 때 저것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모자를 봤다.

“고객님은 피부가 워낙 하얗고 밝아서 화려한 무늬나 색깔도 잘 어울릴 거예요. 이거랑 이건 어떤가요. 이번에 저희가 새로 발굴한 디자이너인데…….”

여자가 디자이너의 수상 경력을 자랑하듯 늘어놨다. 물이 빠져 희끗한 청바지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들어간 셔츠였다. 어디에다 갖다 놔도 단번에 눈에 띄게끔 무늬와 색이 화려했다.

“도련님은 원색 안 어울려. 그 옆에 거.”

해림이 거절하기 전에 주신도가 선수를 쳤다. 여자가 장갑 낀 손으로 옆에 걸린 옷을 들었다. 은은한 노란색에 솜털이 보슬보슬한 스웨터였다.

“그래. 그거.”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 나이에 노란색 스웨터를 입을 생각은 없었다. 주신도는 해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걸 봤음에도 못 본 척했다.

“저걸로 해. 잘 어울리겠는데. 입어 봐.”

주신도가 언제 제 의견을 존중해 주기는 했던가. 해림이 포기하고 여자가 건넨 스웨터를 들었다. 방 한구석에 있는 탈의실에 들어가려 했더니 주신도가 팔을 뻗어 막았다.

“뭘 볼 게 있다고 숨어서 갈아입어. 그냥 여기서 입어.”

남들 있는 곳에서 옷을 훌렁훌렁 까는 취미는 없다. 괜찮다며 저쪽에서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는데도 주신도는 막무가내였다. 해림의 옷자락을 잡고 휙 뒤집어 깠다. 뭐 하는 짓이냐고 외쳐도 끝끝내 머리에서 옷을 빼냈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 속살이 그대로 다 드러났다. 안의 공기는 훈훈했으나 갑작스레 벗겨져 등골이 오싹했다. 팔뚝에도 자잘하게 소름이 돋았다.

주신도를 제외한 나머지가 예의 차 얼른 고개를 돌렸다. 주신도만 눈을 가늘게 뜨고 품평하듯 해림의 상체를 위아래로 훑었다. 운동하다가도 더우면 웃통을 까도 남부끄러울 거 없는 성별이라지만, 실내에서, 그것도 주신도 앞에서 맨몸을 까려니 여간 수치스럽지가 않았다.

목덜미에 머물던 시선이 뱀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쇄골과 가슴과 아랫배에 닿았다가 배꼽을 찍고 가슴으로 도로 올라와 젖꼭지를 찔렀다. 시선이 쪼그만 유두를 간질였다. 해림이 한 손으로 다른 팔뚝을 잡으며 시선을 차단했다.

“입어.”

해림이 군말 않고 스웨터를 받았다. 억지로 옷을 벗겨 짜증이 치밀기는 하나 주신도에게는 섣불리 화를 낼 수 없었다. 왜 주신도 옆에 있으면 이렇게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가파르게 롤러코스터를 타는지. 생소한 감정을 추스르며 얼른 맨살이나 감추자고 해림이 옷에 머리를 넣었다. 후다닥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입고 옷자락을 내렸다.

스웨터라 까끌까끌할 줄 알았더니, 안감이 부들부들하니 촉감이 좋았다. 품이 넉넉하고 따뜻한 게, 개나리 같은 노란색만 아니었다면 큰맘 먹고 살 만했다.

“사장님, 안목 훌륭하시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잘 어울려요.”

여자가 눈짓을 보내자 직원이 전신 거울을 해림 쪽으로 틀었다. 자세히 들여다봐도 뭘 입든 거울 안의 자신은 큰 변화 없이 똑같았다. 잘 어울린다는 말은 매상을 올리려는 아부성 발언이 틀림없었다.

주신도가 고개를 비틀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끄덕이며 손짓했다. 스웨터가 걸렸던 옷걸이에 빨간 스티커가 붙었다. 해림이 원래 입었던 상의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이대로 입고 가.”

다 빚 장부에 올릴 거면서 당사자의 의견은 당최 왜 고려를 하지 않는 걸까. 어차피 상식이 통할 거란 희망은 버린 지 오래지만, 빚 위에 원치도 않게 또 다른 빚이 낙엽처럼 쌓이는 걸 보고 있자니 무겁게 한숨이 다 나왔다. 이번 생에는 빚 다 못 갚을 거라며 이형이 하루살이처럼 살던 이유가 있었다.

주신도는 저가 해림이라도 된 듯이 옷을 고르는데 열을 올렸다. 바지에 운동화에 편한 티셔츠까지, 스티커가 붙는 옷걸이가 늘어날수록 해림의 눈썹 아래는 우중충하게 꺼지고 여자의 눈동자는 조명처럼 빛이 났다.

주신도가 옆에서 열심히 인형 놀이에 열중할 무렵, 해림은 앞에 놓인 까만 볼캡을 눈에 담았다. 이형의 방에서 봤던 스타일과 비슷했다.

이형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형, 형, 하고 강아지처럼 꼬리치던 이형을 떠올리자 양심이 따끔했다.

제 코가 석 자라며 알리지 않고 나왔건만.

“그 모자는 도련님하고 안 어울리는데.”

무심결에 모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해림이 테이블에 모자를 도로 내려놨다. 그래도 눈길을 거두지는 않았다.

“사고 싶어?”

해림이 고개를 들고 스티커가 줄줄이 붙은 옷을 쳐다봤다. 이미 쌓인 빚, 그 위에 모자 하나 얹힌다고 무너지랴.

“네.”

“입맛도 그렇고, 우리 도련님은 취향이 참 특이해.”

주신도가 뭐라 하든 해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모자를 받고 좋아할 이형을 생각하자 내내 침울하던 기분이 눈곱만큼 나아졌다. 이형이 해맑게 웃는 상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해림은 본인이 눈물 나게 우스웠다. 탈출할 거라고 각오하고 왔으면서 다시 돌아가서 할 일에 왜 목을 매는 건지. 퍽이나 모순이었다.

해림의 쇼핑이라기보다 주신도의 쇼핑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맞았다. 주신도가 가게의 매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스티커가 얼마나 붙었는지 해림은 보지도 못한 채 가게를 나왔다. 여자는 큰손을 만난 게 무척이나 기쁜지 현관까지 쫓아 나와서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살펴 가세요. 다음에 또 오시구요. 실장님에게 안부도 부탁드려요, 사장님. 그쪽 옆에 계신 분도 꼭 다시 오시구요.”

인사에도 콧노래가 섞였다. 팡, 하고 우산이 펼쳐지는 소리에 인사의 끄트머리가 묻혔다. 왔던 때와 똑같이 주신도의 손아귀에 어깨를 붙들려 차까지 끌려왔다.

“이제 뭐 할래, 도련님.”

탈출하거나 아니면 지옥에 돌아가 쉬거나. 둘 중 하나만 하고 싶었다. 탈출하자던 의지는 심지가 다 타들어 간 양초처럼 희미해졌다. 어딜 가든 주신도나 주신도의 심복이 따라붙는데 이걸 무슨 수로 따돌리랴.

“돌아갈게요.”

“오랜만에 나왔는데 바로 들어가면 아쉽잖아. 하나라도 더하지? 도련님이 앞으로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주신도가 속을 박박 긁었다. 하마터면 당장 저를 차에서 내려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할 뻔했다. 부탁에는 분명 씨발이라는 욕도 섞였을 테다. 원망과 바람을 동시에 담은 말을 해림이 애써 삼켰다.

“예전 집에 가 보고 싶어요.”

“도련님 집, 이제 없어.”

“예?”

“경매에 넘어간 지 오래야.”

아직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처분은 빨랐다. 부친의 장례식 때 30분이 멀다 하고 찾아온 빚쟁이들의 수가 상당했으니, 재산이라고 부를 건 이미 다 다른 쪽에 넘어갔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다. 아마 해림이 가지고 추억할 유품 하나 남지 않았으리라. 가 봤자 속 쓰릴 일이었다.

“다른 건?”

“없습니다. 젤리 하나만 살게요.”

“우리 도련님이 참 욕심이 없어요. 나온 김에 화끈하게 놀고 가야지. 다른 놈들은 외출하면 내일이 없도록 놀던데 도련님은 왜 그렇게 얌전해. 양갓집 규슈도 아니고.”

놀림에 화가 치밀지 않는 걸 보니 저도 주신도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나 보다. 해림이 무덤덤하게 창밖을 쳐다봤다. 빗줄기가 워낙 거세어 창에 물줄기가 나부끼는 커튼처럼 흘러내렸다.

“그럼 영화관이나 가든가. 안 그래도 이번에 보고 싶은 영화가 개봉했거든.”

“저는 차에 있겠습니다.”

“도련님이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어. 내가 너무 서글퍼요. 인생 헛살았어. 사장으로서 직원한테 뼈 빠지게 잘해 주면 뭘 하나. 돌아오는 거 하나 없고, 뼛골 빼먹기만 하고, 영화 그까짓 것도 같이 안 봐 주고, 혼자 보라며 매몰차게 거절하고……. 인생 참 쓰다, 그치?”

신세 타령이 판소리처럼 이어졌다. 라디오처럼 한 귀로 흘리기엔 주신도가 바로 옆에 있었다. 사람 귀에 폭력적으로 꽂히는 발성과 또박또박한 발음 또한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갈게요. 갈 테니까 그만하세요.”

어떨 때는 협박하고 가끔은 사람을 달달 볶아 결국 본인이 원하는 걸 쟁취하고야 만다. 주신도의 특기이자 특성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귀찮은 일 만들지 않고 넘어가는 해림의 성향과 정반대였다. 우는 애 떡 하나 주는 심정으로 해림이 이를 갈며 수락했다.

“진작 그러지 그랬어.”

주신도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임서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차를 부드럽게 몰았다. 안내를 시작합니다, 하는 낭랑한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고요해진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심야 시간에 들어선 영화관은 한산하다 못해 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직원도 없었다. 팝콘부터 티켓까지 죄다 기계 몫이었다. 주신도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지 해림을 옆구리에 끼고 영화관을 휘저었다. 능숙하게 가장 빨리 상영하는 영화 티켓을 끊고 팝콘과 음료수를 사서 해림의 품에 안겼다.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던 수족도 쉬라며 내쳐 영화관 전체에 전세 낸 듯이 주신도와 해림 단둘이었다. 해림은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들어서서도, 광고를 보면서도 해림은 언짢은 기색을 풀지 못했다.

주신도는 해림의 기분이 바닥을 찍든 말든 관심 한 번 안 줬다. 본인이 즐거우면 만사 괜찮다는 듯 신나게 자리에 앉았다. 해림을 팝콘과 음료수 거치대로 쓰려고 가져왔는지, 계속 손을 뻗어 해림의 품에 안긴 팝콘을 냠냠 맛있게도 주워 먹었다.

“골내서 뭐 하게. 아.”

하, 하고 해림이 헛웃음을 짓는 순간을 노려 주신도가 팝콘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하고 끈적거리는 캐러멜 팝콘이 혀 위에서 굴러다녔다. 해림이 뭐 씹은 얼굴로 팝콘을 삼켰다. 주신도가 미쳤는지 음료수도 손수 들어 빨대를 해림의 입술 새에 끼웠다. 정말 제멋대로였다.

주신도의 고문이 끝나려면 얼른 영화가 상영되는 수밖에 없다. 해림이 광고가 지나가기만을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렸다. 이윽고 영화관의 조명이 죄다 꺼지고 어둠 속에 갇혔다. 앞에 있는 커다란 화면만이 빛을 뿜었다.

쾅 하고 문 닫히는 소음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액션 영화인지 도로 한복판을 매끈하게 잘 빠진 스포츠카가 가로질렀다. 차 안에는 피를 철철 흘리는 인물이 총을 쥐고 창밖으로 빵빵 쏴 대고, 차 뒤에는 검은 차들이 사냥하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흔한 액션 영화의 도입부였다. 해림은 영화에 호불호가 강하지 않아 장르가 무어든 가리지 않고 잘 보는 편이었다.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 곧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영화의 중반부쯤 왔을까. 초반에는 팝콘을 주워 먹느라 자주 오가던 주신도의 손이 언제부터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팝콘 통이 텅텅 빈 것도 아니었다.

툭, 하고 어깨에 묵직한 게 닿는 느낌에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주신도의 머리였다. 주신도가 눈을 고이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스크린에서 껌벅거리는 빛이 주신도의 길고 빼곡한 속눈썹에 드리웠다. 짙고 굵직한 눈썹과 가파른 콧대, 요리조리 못난 구석을 찾으려고 해 봐도 미남은 미남이었다. 콧대에 남은 작은 흉터도 흠이 되지 못했다.

각설, 주신도의 잘나디잘난 미모는 해림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술품을 보듯 감탄은 해도 겉껍질 속에 숨겨진 간사한 인성을 잘 아는지라 마냥 세월아 네월아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해림이 조심히 주신도의 머리를 잡아 반대편으로 넘기고 음료수와 팝콘을 내려놨다. 아직 깨지 않았다. 혹시나 몰라 주신도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었다. 콰쾅, 하고 영화에서 건물을 폭발시키는 굉음이 터졌는데도 주신도는 몽중이었다.

하늘이 내린 기회다. 해림이 주신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일어났다. 발걸음 소리를 내도 영화 소리에 묻힐 텐데 그것조차 믿을 수 없어 숨소리도 죽였다. 주신도는 해림이 의자에서 완전히 일어나 한 칸 물러날 때까지 깨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를 잡고 슬금슬금 멀어지다가 비상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서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주신도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쿵쾅 뛰었다.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뛰어 대는 통에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해림이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식당에서처럼 방심했다가 다른 덩치에게 잡힐 수도 있었다. 일부러 매표소가 있는 곳이 아닌, 비상계단 쪽으로 발을 틀었다.

계단은 소리가 나도 상관없었다. 두세 칸씩 뛰어 내려왔다. 영화관은 건물의 꼭대기였는데 내려오는 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은 성싶다. 해림이 헐떡거리며 1층을 빠져나왔다.

비는 여전히 한 치 앞도 안 보이게끔 쏟아졌다. 택시를 잡아 경찰서에 가야 하건만, 영화관이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지나가는 차 한 대도 안 보였다. 사람이라도 있으면 핸드폰이라도 빌릴 것을, 운수도 더럽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길목에 없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한다. 대로변에 나가면 한 명쯤은 있겠지. 해림이 망설이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주신도가 신고 가라며 준 새하얀 새 운동화에 고동색 흙탕물이 잔뜩 튀었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기세로 비가 쏟아져 삽시간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 스웨터가 무겁게 가라앉아 피부 위로 들러붙고 다리도 만근이 달린 듯이 묵직했다. 해림이 종아리를 채찍질하며 뛰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고작 몸뚱이가 무겁다고 포기해서야 쓰겠는가.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철퍽거리며 더러운 물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한 시간은 족히 뛰고도 남을 체력이건만, 시야를 가리는 비의 장막이 해림을 방해하고 기력을 앗아가는 요소였다. 해림이 있는 힘을 다 쥐어짜며 간신히 대로변에 도착했다.

“―!”

드디어 찾았다. 하늘이 저를 아주 내다 버리지는 않았다. 도로 건너편에서 백 미터 떨어진 곳에 하얀빛을 발하는 지구대가 있었다. 저기만 들어가면 일단은 희망을 가져도 된다. 해림이 헐떡이면서도 헤벌쭉 웃고는 길을 건너려 했다.

그리고 때마침, 저쪽에서 차 한 대가 일정한 속도로 달려왔다. 지금 건너면 해림을 치기 딱 좋은 속도였다. 한시가 급해 해림이 무작정 길을 가로지르려는데, 차가 속도를 올리더니 해림의 시야에서 지구대를 가리며 멈춰 섰다. 불길한 예감이 해림의 뒷덜미를 스쳤다. 심장은 이제 빗소리보다 큰 소리를 내며 해림의 가슴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차 문이 열렸다. 누가 내릴지는 해림도 알았다. 검은 우산을 펼쳐 들고 주신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산 아래 감춰진 고개가 삐딱했다.

이렇게 어두운데. 빗줄기가 가로등 불마저 살라 먹었는데 주신도의 눈동자는 왜 이다지도 잘 보일까.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가 해림의 목줄을 죄듯이 선명했다.

<데스 오어 파라다이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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