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권) (6/21)

1.

주신도가 길 건너 건물을 가리고 해림의 앞에 섰다. 머리 위로 까만 우산이 그늘처럼 드리웠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 우산을 써도 소용없었다. 주신도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게 뭐야. 모처럼 산 옷이 홀딱 젖었잖아. 우리 도련님이 미친년 기질이 있는 건 나도 아는데, 새 옷 입고 비 오는 날 뛰쳐나가면 어떡해. 신발도 엉망이고.”

“…….”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주신도가 해림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림이 어깨를 움칫하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주신도가 다시 혀를 찼다.

“도련님 발로 탈래?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

해림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주신도의 어깨 너머로 지구대를 바라봤다. 주신도가 해림의 머리에서 손을 내려 차갑게 식은 뺨을 어루만졌다. 엄지가 해림의 눈가를 느리게 스쳤다.

여기서 이를 악물고 뛴다 한들 안전하게 지구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주신도를 밀치고 비명을 지르며 뛰더라도 울타리 친 사냥터 안의 토끼 신세였다. 사냥꾼이 총을 쏘면 언제든 총알이 대가리를 꿰뚫을.

백 미터 남짓한 거리가 천 미터, 만 미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백날 뛰어도 닿지 않을 곳처럼.

내쉬는 숨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주신도가 해림의 하얗게 빛 바란 뺨을 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차 안이 빛없이 까맸다.

“…….”

「도련님은 선택권이 없다는 걸 왜 번번이 잊을까.」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다. 여기서 뛰더라도 주신도의 손에 잡혀 차에 처박힐 것이다. 주신도의 옆자리가 아니라 트렁크가 제 자리가 될지도 모르지. 트렁크에 시체로 실릴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결정은 빨랐다. 해림이 우리에 제 발로 들어가는 토끼처럼 마지못해 차 안에 몸을 실었다.

차 안 공기가 훈훈해서인지 미처 몰랐던 추위가 급습했다. 팔을 껴안고 부들부들 떠는 해림의 어깨 위로 툭 하고 재킷이 떨어졌다. 재킷에서 담배 향이 풍겼다. 해림을 쫓아오기 전 한 대 피우고 온 듯이 향이 짙었다.

주신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나갔냐고, 탈출을 꾀했냐는 질문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해림을 보다가 싱겁게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창에 비친 주신도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해림은 미처 보지 못했다.

해림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물며 창밖을 봤다. 희망의 등대 같던 하얀 빛이 빗속에 파묻히며 빠르게 멀어졌다.

* * *

어설픈 탈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혹여나 하고 가졌던 희망도 거세게 오던 빗줄기에 휩쓸린 것처럼 꺼졌다. 빗속을 오래 헤매서인지 몸이 버티지 못하고 열도 올랐다. 해림은 젖은 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습관처럼 샤워를 하고 물기도 제대로 닦지 못한 채 침대를 파고들었다.

까무룩 기절하듯이 잠들었다가 깼다. 숨이 거칠게 터지고 팔이며 다리에 기운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힘겨웠다. 입이 바짝 마르고 시야가 흐릿했다. 간신히 눈동자를 굴려 본 창문 밖으로 노을이 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며 군청색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있었다.

예전에 낯선 나라에서 적응한다고 고군분투하던 시절, 병원도 제대로 못 가고 앓았던 그날처럼 온몸의 근육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부친의 장례식부터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가 오늘에 이르러 폭탄처럼 뻥 터진 듯했다.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패는 두통도 일었다. 해림이 머리를 감싸 쥐고 한참을 웅크려 있었다.

“으…….”

통증이 숨 쉴 만큼 가라앉고서는 해림이 죽을 듯이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몽둥이로 때려죽인다고 해도 오늘은 출근이 불가했다. 병가라는 제도가 당연히 없을 걸 알지만 그래도 알리겠다며 해림이 발을 침대 아래로 끌어 내렸다. 상체를 세우자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웠다. 전화기가 있는 곳까지 가는 것도 힘에 부쳐 해림이 도로 침대에 눕고는 숨을 골랐다.

시간을 확인하고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실장의 번호를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여보세요, 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상 귀에서 이명이 끊이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는지 아니면 환청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제가…….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짧은 말을 전하는데도 기침을 몇 번이나 터트렸다. 하아, 하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실장은 해림의 말이 끝날 때까지 별 대답하지 않고 기다려 줬다.

“사장님께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도저히……, 거기까지 가기가 어려워서.”

실장에게서 알았어요, 하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손에서 수화기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로 들어 귀에 댔지만 뚜, 뚜 하는 매정한 신호음만 났다.

약을 부탁하지 못했는데. 이 정도 열이야 하루만 푹 자고 나면 나을 테니 굳이 다시 전화를 걸 필요는 없겠다. 해림이 꾸물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머리에서 열이 들들 끓다 보니 잠인지 아니면 기절인지 애매모호하게 눈이 감겼다. 눈을 떠도 안개가 낀 듯 흐릿하게 보이다가 까무룩 어두워졌다. 방이 새카만 어둠에 잠겼다가,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해 옆에 둔 물을 한 모금 마셨다가, 물통이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주울 힘이 없어 내버려 두고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꿈과 현실도 뒤섞였다. 나진이 이별을 고하던 그날이 꿈의 한 장면을 차지했다. 나진은 처음 보는 냉랭한 눈빛으로 해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닳고 닳아 쓸모없어진 목각 인형을 보듯 눈동자에 정이라고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오래 생각했어. 그리고 오래 참았어. 언젠가는 변할 거라고 기대했으니까. 아니었어. 너는 변하지 않아. 나 혼자 애타고 나 혼자 발버둥 쳤지. 정말 날 사랑하기는 했어?」

가끔 들었던 질문이었다. 대답은 항상 같았다. 사랑해. 사랑하지. 사랑이 무언지 해림은 그 정의를 정확히 모르면서 학습된 답을 내놨다.

나진을 보면 편했고 때로는 즐거웠다. 사랑의 종류가 하나가 아니라면, 기복과 고저 없이 안정감을 주는 것도 사랑의 일종이지 않을까.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이야기를 해림은 공감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남들보다 현저히 부족한 감성을 나진은 이해해 줬다. 적어도 이별을 고하기 며칠 전까지는, 이해한다는 듯이 행동했다.

「모두 내 착각이더라.」

나진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빛이 한 치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 희끄무레한 인영이 나타났다. 어깨가 잔뜩 굽고 비쩍 마른 남자였다. 이마와 뺨에 팬 고랑이 남자가 생전 겪었을 인생의 고난만큼 깊었다.

남자는 해림보다 키가 작았다. 저 체구가 한때는 아름드리나무처럼 크고 든든하다고 여겼더란다.

해림의 상상이 덧씌워졌는지 젊은 날의 부친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해림의 머리맡에 섰다. 기억은 미화되고 과장되는 법이라 부친의 덩치는 해림의 기억보다 훨씬 커다랬다. 얼굴은 유화물감을 덕지덕지 칠해 놓은 것처럼 눈코입이 뭉개졌다.

―아버지.

입을 열면 목구멍이 찢어질 듯이 따끔거렸다. 그래도 해림은 입을 벌렸다. 아들에게 태산 같은 짐을 지워 주고서 염치없이 단 한 번도 꿈에 나온 적이 없던 양반이었다. 저도 데려가려고 왔는지 환상인지는 몰라도 보인 김에 불러봤다.

―왜 그러셨어요.

가는 그날에도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겨 두고 떠난 인물이다. 저도 무정하다 소릴 듣지만 부친에 비하면 세상 다정한 편이었다. 왜 남들보다 무디게 태어났느냐고 누가 비난한다면, 가끔은 부친의 책임으로 돌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아파서 그럴까. 타지에서 홀로 아팠던 나날들에도 잘 느끼지 못했던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몸이 아픈 틈을 타 정신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를 서글픔이 메웠다.

―저한테 왜.

미안하다는, 마침표조차 찍지 못한 문장으로 용서를 받으려는 알량함이 미웠다. 그럼에도 마음 놓고 증오할 수가 없었다. 무책임해도 무슨 죄책감을 안고 떠났는지 얕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유서에는 망설인 흔적이 없었지만 부친의 손톱은 생에 마지막 힘으로 목줄을 긁은 듯이 흉하게 부러져 있었다.

눈을 깜박이자 뻑뻑한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눈가에 떨어질 듯 말 듯 그렁그렁 고였다가 콧대를 가로지르며 베개 위로 떨어졌다.

해림이 눈물을 털어 내고 인영을 쳐다봤다. 인영은 좀 전보다 얼굴선이 또렷했다. 이번에는 주신도였다. 원망할 사람들만 골라 나왔다.

―왜 날 납치했어.

그냥 그 자리에 놔둬 주지. 평생 옆에 들러붙어 괴롭히더라도 일상을 영위하게 놔두지. 이상한 곳에 끌고 와 미친 짓을 일삼고 괴롭혀 대고, 주신도는 무던하고 무감한 제 감정을 산 높이 끌어 올렸다가 계곡으로 내동댕이쳤다.

나진과 오랜 기간 교제를 하면서도 해림은 싸운 적이 드물었다. 대부분 나진의 일방적인 분노와 사과로 끝맺었다. 분노도 기쁨도 잔잔한 냇물처럼 흘러갔건만. 주신도는 거기에 돌을 던지고 비를 뿌렸다.

해림은 흔들리는 감정이 불편했다. 익숙하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평범하고 평탄한 삶만이 간절했다.

―날 그냥 놔줘.

손가락으로 입 속을 헤집은 일도, 생전 처음 같은 성별의 아랫도리를 입에 넣은 일도 잊으라면 잊을 수 있었다. 주신도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손끝과 발끝을 차갑게 식히는 기묘한 긴장감도 사라질 테고, 예전처럼 평화로운 삶을 되찾을 터였다. 무색무취 무미한.

―그러게 누가 그렇게 비 오는 날 미친년처럼 쏘다니래. 손이 참 많이 가, 우리 도련님.

환상이 실물처럼 말을 했다. 비죽거리는 어투가 생생했다.

―내가 왜 도련님이야.

항상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주신도가 왜 저를 도련님이라 부르는지. 호칭에 비아냥거림을 잔뜩 넣어서 비꼬듯이 부르는 게 분명하겠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의견을 듣고 싶었다.

―이렇게 픽픽 쓰러지니 도련님이지. 왜, 도련님이라는 호칭 싫어? 그럼 뭐라고 부를까.

―이름. 내 진짜 이름.

정하라는 가명 말고. 그런 가명은 싫었다. 그 이름을 들으면 싫어도 제 처지가 어떤지, 저가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해림이 투정을 부리듯 베개에 뺨을 문질렀다. 커다란 손이 내려왔다. 젖어서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이마에 닿았다. 열을 재듯 한참 닿아 있다가 뺨으로 내려왔다. 서늘한 손. 사막의 뙤약볕 아래 서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맞이한 듯 해림이 주신도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커다란 손이 꿈틀했다가 그대로 뺨에 붙었다.

눈앞의 주신도는 환상이 맞았다. 입에 들어왔던 손가락은 꼭 숯불에 달군 돌처럼 고통스럽고 뜨거웠다.

―정해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다정했다. 뺨을 매만지던 손도 점차 얼음이 녹듯 온도를 되찾았다. 해림은 제 손을 거두지 않았건만, 환상 속 주신도는 친절은 여기까지라며 손을 거뒀다. 멀어지는 손이 아쉬워 잡아 보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닥일 힘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떠들지 말고 그냥 쳐 자.

밉살맞은 주둥이는 환상이나 현실이나 매한가지였다. 원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꿈결 속 주신도나 현실이나 똑같다는 사실이 웃겼다. 해림이 싱겁게 피식 웃고는 눈을 감았다. 인영이 재처럼 흩어졌다. 재는 다시 뭉쳐 주신도와 닮은 비쩍 마른 어린 소년이 되었다가, 곧 까맣게 사라졌다.

* * *

오한이 겹친 몸살을 앓아도 타고난 체력 덕인지 하룻밤만 꼬박 자고 나면 다음 날엔 씻은 듯이 낫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해림은 비교적 멀끔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침대에 쓰러졌을 때와 달리 방 안이 환했다.

눈을 굴리다가 낯선 링거를 발견했다. 투명한 액이 줄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선을 쭉 따라 시선을 내리자 팔꿈치 안쪽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가 보였다.

“일어났어요?”

눈이 소리가 난 쪽으로 굴러갔다. 긴 머리를 한데 질끈 묶은 유리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침대로 다가왔다. 팔짱을 끼고서 링거의 남은 액을 살폈다.

“정하 씨 죽는 줄 알고 링거 좀 놨어요. 약은 줘도 못 먹을 상태더라고. 아니,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신나게 놀고 오지는 못할망정.”

입을 벌렸다가 기침만 거푸 뱉었다. 해림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유리가 재빨리 부축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서 해림이 반창고와 바늘을 손으로 떼어 냈다. 링거의 액이 거의 떨어져 굳이 바늘을 살 속에 꽂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왜, 조금 더 하고 있지. 아직 남았는데.”

“괜찮습니다. 이제 다 나았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푹 쉬고 난 다음 날처럼 몸이 가뿐했다. 축축한 시트와 땀이 끈적끈적하게 밴 몸과 옷만이 조금 찜찜했다. 허기도 진 데다 먹고 싶은 음식도 생각나는 걸 보니 몸살은 물러난 성싶다.

“몇 시예요?”

“오후 두 시. 하루 꼬박 잔 거 알아요? 애들 다 걱정하더라. 이형이 특히 정하 씨 걱정 많이 했어요. 지 일도 바쁘면서 새벽에 정하 씨 괜찮냐고 나한테 연락하더라니까.”

테이블 위에는 이형에게 선물로 줄 모자가 종이봉투에 담겨 있었다. 주신도가 대신 고른 옷들은 상자에 담겨 문 근처에 놓여 있었다.

“젤리……. 못 사 왔어요. 미안합니다.”

도망친다고 뛰쳐나와 무얼 살 겨를이 없었다. 편의점을 봤다 해도 과연 젤리를 사러 들어갔을까. 아니라는 대답이 쉽게 나왔다. 빗속을 뛰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젤리는 머리에서 까맣게 지워진 채로.

막상 돌아와서 유리를 보자 이형의 선물은 달랑달랑 들고 오고 유리의 선물은 사 오지 못한 게 미안했다. 해림이 덤덤하게 사과하자 유리가 손을 저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정하 씨야 이제 언제 나갈지 몰라도 나는 자주 나가거든요. 그나저나 정하 씨, 사장을 어떻게 구워삶았어요?”

사장을 실질적으로 용광로에다 구워 삶고 싶은 순간은 많았다. 유리가 의미하는 바는 달랐기에 해림이 무슨 개소리냐고 적나라하게 미간을 구겼다.

“정하 씨가 출근 안 했는데도 사장이 아무 말 안 했잖아? 한 달 안 됐는데 외출시켜 주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 삐쩍 곯아서 손님 받으면 뼈 부러질 거라고 영양제도 놔 주고. 사장이 돈 거야, 아니면 정하 씨가 구미호야. 아니, 사장은 원래 돌았으니까 정하 씨 기술이 훌륭한 거네.”

“무슨 기술이요.”

말에 뾰족한 가시가 돋았다. 이 바닥이 아무리 막장이라지만 사장실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보답으로 외출을 받았다고 밝히기는 곧 죽어도 싫었다. 유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긴 뭐야. 사람 꼬시는 기술이지. 사장 꼬시려고 얼마나 많은 애들이 달려들었는데. 그 인간이 좆질은 해도 특별히 예뻐하는 애는 없었거든.”

뺨을 후려치고 머리를 잡아다가 억지로 구음을 시키는 게 아끼는 사람을 다루는 행위인가. 상식 안에서는, 미운 사람에게도 그렇게 안 한다.

“별로 예뻐하는 건.”

“그만 인정해. 사장이 정하 씨처럼 사정 많이 봐준 사람이 없어. 다른 애들이 정하 씨처럼 굴었으면 지금쯤 장기 따이고 시체는 숲 어디에 묻혔을걸. 운이 좋아, 정하 씨.”

유리가 옷걸이에 걸린 링거를 거뒀다. 해림이 내팽개친 바늘과 줄도 품에 안고서 방을 나가려다가, 참, 하며 돌아봤다.

“오늘부터 다시 출근인 거 알지. 사장실이야.”

사형 선고처럼 못을 박고 유리가 방을 나갔다. 해림이 인사한다고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침대 위로 털썩 널브러졌다. 사장실로 출근하라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

해림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유리의 말을 곱씹었다. 주신도가 저에게는 유난히 잘해 준다는 미친 발언이었다. 정상인―유리가 비정상이라는 건 아니나 그래도 평범하게 살았던 이―의 기준으로 주신도는 경찰에 고소하고도 남을 짓거리를 저에게 저질렀다. 물리적인 폭력에 성폭력까지.

하나 비상식적인 선에서 볼 때는 양상이 약간 달랐다. 유리의 말마따나 손님의 방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순간, 순전히 ‘한연동’ 기준으로 저는 지하에 갇히든 장기를 털리든 벌을 받아야 했다.

주신도는 둘 중 어느 벌도 주지 않았다. 사장실에 불러 특별 교육을 운운하며 죽으라고 노래만 시켰다. 손가락을 빨게 하고 수치스럽게 만들었으나 풍문으로 들은 지하에 비하면 그건 벌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뿐이랴. 보답이라며 외출도 시켜 줬다. 선심 써서 개 목에 목줄 달고 끌고 나간 산책과 비슷했으나 결과만 따지자면 외출이었다. 한 달이 지나야 외출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대기실 패거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빚으로 올렸다 해도 좋은 식당에 데려갔고, 비싼 옷가게에서 옷을 골라 줬다. 새 옷을 입히고 영화관에서 팝콘과 음료수를 안겨 주고 영화도 보여 줬다. 중간에 탈출하려고 했는데도 사지 멀쩡히 제 방에다 갖다 놓은 데다가 심지어 영양제까지 놔 줬다.

비상식의 범위 내에서 주신도는 친절했다.

왜.

왜긴 왜야. 잘 팔라고 그러지. 더 예쁘게 다듬어서 비싼 값에 팔라고.

주신도의 목소리가 화답했다. 아직 상식인의 구역에 발을 걸친 해림은 주신도의 비상식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왜 그런 말을 해서.

싫지만 이해가 갔다. 해림은 모순적이게도 저가 이 바닥에 떨어진 다른 사람들보다 더럽게 운이 좋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유리가 해림의 속 깊은 곳에 깔린 의문을 표면으로 끌어냈다 뿐이지, 알고는 있었다.

열에 들떠 본 환영처럼 주신도의 얼굴이 천장에 두둥실 떠올랐다. 잘생긴 그 얼굴이 해림은 미웠다. 미움이란 감정도 생소했다.

―정해림.

불공평하게 목소리는 또 좋아서.

“…….”

이윽고 해림이 몸을 일으켰다. 위와 뇌가 당분과 탄수화물을 내놓으라고 난리였다. 머릿속에 주신도가 꽉 찬 탓도 배가 고파서라며, 해림이 샤워실로 비치적비치적 걸어갔다.

* * *

하루 앓았다고 사람 몰골이 시체처럼 푹 썩었다. 눈 아래는 가무잡잡하니 움푹 팼고 입술은 흰 거스러미가 버짐처럼 뒤덮었다. 열꽃이 피었는지 목덜미도 누가 달라붙어 빤 양 울긋불긋 화려했다. 샤워를 하고, 빈 위장에 밥을 밀어 넣고, 가볍게 운동을 하고 방으로 돌아와 한 번 더 몸을 씻고 난 후에야 그나마 사람 행색을 띠었다.

해 질 녘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하고 물으니 이형이가 대번에 형, 하고 제 이름도 밝히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림이 얼른 문을 열었다.

이형이 해림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가슴에 파묻혀 이마를 비비더니 곧 고개를 들고 울멍울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팠다면서요!”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

이형이 품에서 떨어져 나와 해림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손을 뻗어 가슴과 옆구리를 더듬거렸다. 해림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남의 손길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하루 새에 살이 쑥 내렸네. 얼마나 아팠던 거야. 시훈이 이 새끼가 또 형 죽네 마네 하고 내기 걸어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요.”

패거리들 내기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해림이 덤덤하게 이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얼마 걸었어?”

“……천만 원이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이형이 못내 부끄러운지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버럭 외쳤다.

“형 살았다는데 걸었어요!”

“그래. 잘했어.”

안 그래도 이형의 방에 찾아갈까 말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됐다. 해림이 옆으로 비켜서며 이형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내 줄 차 한 잔이 없이 아쉽기는 하나, 대신 선물이 있기에 방주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았다.

“선물.”

“선물이요?”

가방을 받아 든 이형이 어리둥절해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가방 안을 뒤적여 모자를 꺼내더니 입이 헤벌쭉 벌어지고 눈에 무지개가 떴다. 장난감 선물 받은 강아지처럼 껑충껑충 뛰더니 혀어엉, 하고 길게도 늘여 부른다.

“선물은 생각도 못 했는데……. 고마워요, 형. 형밖에 없다. 형 덕에 산다, 내가.”

모자를 푹 눌러쓰며 잘 어울리냐고 자랑도 한다. 겉으로는 표정 변화가 일지 않았으나 해림은 속으로 흐뭇해했다. 선물 하나에 이렇게 즐거워할 줄이야. 힘들더라도 젤리도 사 올 걸 그랬다.

거기까지 떠올리고는 해림이 끙, 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여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정을 붙이는 자신을 발견한 탓이었다.

“나도 다음에 돈 받으면 형한테 선물 사 줄게요.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모아서 빚 갚는 데 써. 사모님도 그렇고 큰돈 주시던데 모으면 충분히 갚을 수 있을 거야.”

해맑기만 하던 이형의 얼굴이 씁쓸하게 물들었다. 현실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표정일는지도 몰랐다. 이형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해림은 못 본 척 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출근 시간이었다.

“들어가. 늦지 말고.”

“예, 형. 모자 고마워요.”

멋쩍은 입매를 보자 괜히 오지랖 넓게 충고를 했나 후회가 됐다. 남이라고 선 그으면 아예 간섭조차 안 할 텐데, 이형을 그나마 편한 동생이라 여겼더니 쓸데없는 소리가 나갔다.

“미안. 내가 한 말 크게 신경 쓰지 마.”

나가는 이형의 등 뒤에 대고 바로 사과를 건넸다. 이형이 헤실헤실 웃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여기서 나 생각해 주는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 갈게요. 형, 몸조심하시고요.”

“응. 너도.”

선물 주고 잔소리도 덤으로 얹었다. 하잘것없는 선물과 알량한 잔소리를 교환한 셈이다. 앞으론 이러지 말아야지, 하며 해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옷장을 열었다. 주신도가 억지로 안겨 준 옷은 쳐다보지도 않고 평소처럼 흰 셔츠와 정장을 꺼냈다.

오늘은 미친 사장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나. 걱정 반 체념 반을 가지고 해림이 사장실에 도착했다. 들어오라고 허락을 내리는 목소리가 꿈결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비슷했다. 정해림, 하고 부르던. 귓가 바로 옆에서 들리듯이 뚜렷했던 그 목소리와.

해림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신도가 고개를 틀었다. 왔어, 도련님 같은 흔한 인사는 하지 않고 빤한 시선으로 해림의 위아래를 훑었다. 신발까지 확인하고서는 주신도의 미간이 폭삭 구겨졌다.

“산 옷들은 언제 입으려고 아껴. 나중에 염할 때 입으려고?”

말본새하고는. 해림이 주신도의 사나운 눈초리에도 밀리지 않게 뒷짐을 지고 섰다.

“일하는 시간이라서요.”

“웃기지 말고 갈아입고 와. 알몸으로 교육받기 싫으면.”

까탈스럽기도 하지. 그래도 주신도와 1초라도 덜 있을 수 있다는 장점에 해림이 옳다구나 사장실을 나왔다. 계단을 이용하여 최대한 시간을 끌며 방에 돌아왔다.

당시는 정신이 없어 주신도가 무슨 옷을 골랐는지도 몰랐다. 편한 반소매 티셔츠에 후드 등 파스텔 계열의 편한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브랜드 로고가 박힌 운동화에 이형에게 줬던 선물과 비슷하게 생긴 모자도 들어 있었다.

취향 참 특이하다며 비웃던 주신도가 떠올라 해림이 저도 모르게 핏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1초도 안 되어 정색했다.

주신도의 개소리에 웃음을 터트리다니, 슬슬 미쳐 가는 게 틀림없었다.

연미색이 도는 맨투맨 티셔츠와 검은색 면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주신도가 놀리려 넣었을 모자도 선심 써 써 줄까 하다가 참았다. 주신도와 저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었다.

내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단으로 시간을 소비하며 느릿느릿 올라갔다. 사장실에 들어서자 주신도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해림을 쳐다봤다. 엄지와 검지로 턱을 느리게 문지르며 신상품을 훑는 가게 주인처럼 날카롭게도 훑었다.

곧, 시원스레 뻗은 눈매가 흡족하게 굽어졌다. 눈웃음은 해림의 실소처럼 1초도 채 머무르지 않고 사라졌다.

“오늘 좀 쌀쌀한데.”

어차피 실내에만 있을 거라 얇게 입고 왔다. 해림이 평소처럼 소파에 앉으려 몸을 틀었건만, 주신도가 의자에서 일어나 포즈가 엉거주춤하니 굳었다. 주신도가 시계를 흘끗 내려다보고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손에 쥐었다.

“나가지.”

“예?”

“그 나이에 벌써 가는 귀먹었어. 나가자고.”

“외출은 엊그제 하지 않았습니까.”

“산책 몰라. 산책.”

야밤에 뜬금없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꿍꿍이가 뭔지 몰라 멀뚱히 서 있자, 주신도가 대뜸 해림의 목덜미를 잡았다.

“생각해 보니까, 개도 산책을 시키는데 내가 그동안 우리 도련님한테 너무 무심했던 거 같아서. 아무리 있을 거 다 있더라도 사람이 실내에만 갇혀 살면 좀 미치더라고. 우리 도련님이 미치면 안 되지.”

그간 건물을 나가려는 시도를 안 해 본 게 아니었다. 어느 틈으로 새도 번번이 덩치에게 들켜 원래 자리로 돌아가던 실패만이 이어졌었다. 치미는 답답함은 레일 위를 뛰거나 창 너머로 숲을 보는 걸로 달랬다. 완전히 달래지지는 않았고, 언제나 미미한 우울은 잔잔하게 남아 있었다.

좋은 기회다. 같이 가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없는 셈 치면 된다. 해림이 못 이기는 척 주신도의 손에 잡혀 줬다. 주신도가 보폭 넓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해림이 미처 몰랐던 쪽문을 나오자 긴 숲길이 이어졌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은은한 조명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꽃처럼 땅에 박혀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빛이 있음에도 길 건너 숲은 어두컴컴했다.

이곳이 주신도와 함께 걷는 숲길만 아니라면 제법 훌륭한 산책로라고 칭찬할 만하거늘. 같이 걷는 사람이 불러일으킨 효과인지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공포 영화에 삽입된 효과음 같고, 시커먼 숲에 깔린 특유의 음산함이 한여름 밤 습기처럼 피부에 달라붙었다.

어디서 유령이 튀어나와도 자연스러울 으스스한 분위기에도 해림은 주신도와 거리를 두고 걸었다. 주신도가 앞에, 해림이 한 걸음 떨어진 뒤에 있었다.

주신도가 한참을 조용히 가다가 뒤돌아봤다. 해림이 움칫했다. 갑자기 정체 모를 것이 튀어나오더라도 주신도보다는 덜 무서울 거라는 타당한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 이리 와.”

주신도가 사회적 거리 두기를 무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주신도와 저 사이에 광년으로도 메워지지 않을 거리를 두고 싶었다. 머뭇거리는 해림을 보고 주신도가 낮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능숙하게 한 개비를 튕겨 물고는 해림에게 라이터를 툭 던졌다. 얼떨결에 해림이 한 손으로 라이터를 받았다.

“뭐 해?”

주신도가 담배를 까닥이며 해림을 불렀다. 하는 수 없이 해림이 주신도에게 다가가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붉게 솟은 불꽃이 담배 끝을 인두처럼 달궜다. 주신도가 볼이 홀쭉 들어가게끔 흠뻑 빨아들이고 옅은 연기를 입술 새로 느리게 내뱉었다.

“길이 어둡잖아. 내가 이래 봬도 겁이 많아요. 갑자기 귀신이나 멧돼지 같은 게 달려들면 우리 도련님이 날 보호해 줘야 하는데, 왜 그렇게 멀찍이 서 있어. 날 그냥 죽게 놔둘 거야? 설마, 도련님이 나를?”

속눈썹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주신도가 지껄였다. 지랄도 가지가지였다. 멧돼지가 튀어나와도 주신도의 덩치를 보고 이건 아니라며 돌아갈 텐데 어디서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주신도도 제 거짓말이 다소 허황된 걸 아는지 낄낄댔다.

주신도의 팔이 자연스레 해림의 어깨에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눈치 줬을 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옆에서 걸을 걸 그랬다. 바깥 공기는 분위기와 달리 상쾌하고 좋건만, 바짝 붙은 주신도가 계속 신경 쓰였다. 짙은 담배 냄새와 연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도.

주신도가 필터만 남은 담배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마지막 연기가 어두운 숲길에 물안개처럼 흩어졌다.

“도련님, 영어 잘해?”

해외에서 체류한 기간이 길어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고 잘한다고 냅다 고개를 끄덕이기엔 왜인지 부끄럽다.

“어느 정도 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데. 구체적으로.”

“의사소통은 가능한 정도.”

날씨가 싸늘하다더니 목덜미에 닿는 바람이 차갑기는 하다. 반대로 어깨에 턱 하니 올라간 주신도의 팔은 찜통에서 갓 빼낸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주신도의 팔을 목도리처럼 두르고서, 해림이 괜히 두 손으로 팔뚝을 슬금슬금 문질렀다. 얇은 옷감 속으로 찬 기운이 밀려 들어와 으슬으슬 추웠다. 아직 몸이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엣취, 하고 재채기 소리가 기어코 터져 나왔다. 주신도가 제 팔 아래 갇힌 해림을 내려다봤다. 어깨를 움츠리고 코를 훌쩍이는 꼴을 보고는 못마땅한 듯 혀를 쯧쯧 찬다.

“오늘 춥다니까. 우리 도련님은 정말 사장 말을 지나가던 개 짖는 소리로 알아요.”

뭘 껴입고 올 시간도 안 주고 바로 산책길로 끌고 나왔으면서 타박이었다. 해림의 무뚝뚝한 얼굴에서 모양 좋은 눈썹만 살짝 찌푸려졌다. 나름의 불만 표시였다.

“몸도 다 안 나았으면서 무슨 배짱이야.”

주신도가 팔을 거뒀다. 무거운 데다가 주신도와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해서 어깨에 팔이 올라간 게 싫었는데, 막상 떨어져 나가니 그 온기가 아쉬웠다. 훤하게 드러난 살갗에 오돌토돌하게 소름이 돋았다.

에취, 하고 기침이 또 터졌다. 주신도가 한심한 인간 보듯이 보며 재킷을 벗었다. 해림의 어깨 위에 품이 넓은 재킷이 툭 떨어졌다. 해림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저도 모르게 어깨에 올라간 옷을 바닥에 내팽개칠 뻔했다.

“이걸 왜 주세요.”

“덮고 있어. 괜히 버티다가 골골거리지 말고. 도련님이 아프면 내가 하루에 얼마를 손해 보는지 알아?”

어김없이 돈 타령이었다. 해림이 재킷을 손에 쥐고 주신도에게 내밀었다. 주신도가 기가 찬 듯이 실소했다.

“이틀 앓은 걸로 부족해? 얌전히 덮어.”

주신도가 재킷을 뺏어 이번엔 해림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웠다. 순간 앞이 안 보여 해림이 옷자락을 쥐고 어깨로 끄집어 내렸다. 흰 셔츠를 입은 주신도가 어느새 앞서 걷고 있었다. 너른 등판을 감싼 옷깃이 잔주름 없이 팽팽했다.

왜, 라는 질문이 다시금 머리를 들었다. 주신도는 대체 어떤 이유로 저에게 친절을 베푸는가. 고문을 일삼다가도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를 베푼다. 순전히 제멋대로였다. 범인인 해림은 주신도의 속을 한 치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도 그놈의 도련님을 찾으며 돈 얘기나 늘어놓겠지. 해림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교육은 언제까지 합니까.”

주신도가 운운하는 특별 교육에 관해서였다. 노래를 하고 손가락을 빨고 구음을 하고. 이런 것들이 정말 손님을 맞는 데 필요한 덕목인지 해림은 몰랐다. 주신도만 알았다.

주신도가 그 자리에 멈춰서 돌아봤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해림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뜯어볼 것처럼 골똘히도 쳐다봤다. 한일자로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 끝이, 한참 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왜, 손님 받을 준비 됐어?”

굳이 대답하자면 ‘모르겠다’였다. 주신도의 곁에서 불편한 시간을 버티느니, 노덕구의 눈총과 손님의 비위를 맞추는 게 정신 건강에는 더 이로울 거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앞으로도 주신도가 고문을 하려고 들면 또 그런 생각이 들겠지.

하나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지라, 임 이사 같은 손님을 만나면 주신도가 신사였다며 과거가 좋았다고 후회를 할지도 몰랐다. 손님이냐 주신도냐, 둘 중 어느 것도 택하고 싶지 않았다.

꼭, 하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주신도가 다가왔다. 담뱃갑을 살짝 흔들어 해림의 입술 앞에서 한 개비를 꺼냈다. 해림이 처음 담배를 배우는 사람처럼 어설프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하고 라이터 뚜껑이 열리며 맑은 쇳소리가 났다.

“도련님은 아직 안 돼. 그 상태로 손님 받으면 우리 가게 망해요. 여기가 예의범절 많이 따지는 동네라, 도련님처럼 손님 비위 못 맞춰 주면 욕 엄청 먹어. 욕만 먹나, 저번처럼 두들겨 맞지. 하나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멍청이들이 많은데, 다른 놈들도 도련님처럼 품질 떨어진다고 여기면 어떡해. 비싼 돈 주고 들어왔는데 썩은 사과만 판다고 소문나면, 난 뭐 먹고 살라고.”

담배 끝이 타들어 갔다. 한 모금도 들이켜지 못했다. 회색 재가 길어졌다.

“그래도 도련님이 마음 고쳐먹은 거 같아서 기특하네.”

큰 손이 해림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손은 찬기를 지울 만큼 따뜻했다. 해림의 속은 반대로 액체 질소가 쑥 가라앉은 것처럼 차게 식었다. 웃는 낯짝이, 덤덤하게 대답하는 주신도가 해림의 속을 긁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스친 듯이 속이 쓰라렸다. 이유는 몰랐다.

무슨 대답을 원했지. 사람 취급을 원했나.

답지 않게 베푸는 친절도, 따뜻하게 쓰다듬는 행위도, 외출과 산책을 시켜 주는 일도 아끼는 물건을 손질하는 애정과 다름없는 것을.

주신도가 손을 내려 해림이 덮고 있는 재킷을 여몄다. 품이 낙낙한 재킷이 망토처럼 해림의 상체를 가렸다. 재킷의 소매를 끌어당겨 장난스럽게 엮어 놓고는,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목 안 말라? 거의 왔는데,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가.”

해림이 멍하니 주신도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퍼뜩 깨어나며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언제 도착했는지, 푸른 유리로 뒤덮인 건물이 코앞이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항상 말하잖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들어가 보면 알아.”

외관은 멀끔한데 안으로 들어가기는 영 꺼림칙했다. 해림이 발에 힘을 주고 버티자 주신도가 만만치 않은 힘으로 해림을 끌어당겼다. 물리적으로는 주신도를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어 해림이 질질 끌려갔다.

건물 앞에 서 있던 덩치 둘이 주신도를 보자마자 이마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서 오십쇼, 형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형님. 깡패들이 나누는 흔한 인사였다.

“어. 목말라서 잠깐 들렀어. 들어간다. 수고해.”

덩치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했다. 허리를 숙인 채 눈만 흘끔 들며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해림을 봤다. 해림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팔목이 주신도에게 단단히 잡혀 있어 자세가 어정쩡했다.

주신도가 문 앞에 걸린 바구니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팔찌를 들어 수갑처럼 해림의 손목에 채웠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물어도 주신도는 커튼처럼 길게 드리운 천만 열며 문 안으로 해림을 끌고 들어갔다.

“그거 없으면 도련님 큰일 나.”

양면에 거울이 설치된 미로 같은 복도였다. 쿵, 쿵 거리며 클럽에서 들릴 법한 소음이 벽을 망치처럼 두드렸다. 초록색 파란색 조명이 정신없이 뒤섞인 복도를 주신도가 익숙한 듯 쭉쭉 빠져나갔다. 주신도의 손에 잡혀 이리저리 길을 꺾어 가다 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도련님. 오늘은 우리 그냥 산책하는 거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어.”

엘리베이터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숫자 앞에 알파벳 B가 붙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한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정 무서우면 내 옆구리에 잘 붙어 있고.”

숫자 4에 다다라 문이 열렸다. 이대로 닫힘 버튼을 누르고 다시 올라가 제 방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뒤에 서서 어깨를 단단히 잡고 앞으로 밀었다.

어두컴컴한 홀에 붉고 푸르스름한 조명이 번갈아 떨어졌다. 귀청을 먹먹하게 만드는 노래는 끈적이고 느릿느릿하며 그 사이사이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찢어질 듯 높은 신음이 배경처럼 깔렸다.

홀의 가운데는 커다란 스테이지였다. 조명이 떨어지는 스테이지에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남녀가 천장과 이어진 기둥을 쥐고 녹아내릴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냥 난잡하게 놀아나는 스트립 클럽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스테이지 아래가 가관이었다. 소파며 바닥이며 구석에 놓여 있는 널따란 침대나 심지어는 벽에도 여럿이 뒤엉켜 있었다.

“너무 좋아하지는 말고.”

난교의 현장은 처음 봤다. 도저히 눈 뜨고 볼 광경이 아니었다. 해림이 재빨리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주신도가 해림의 팔목을 잡았다.

“아직 제대로 못 봤는데 어딜 가게.”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주신도가 해림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서 계단을 내려왔다. 위에 있을 때보다 신음이 적나라하게 들렸다. 해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발치만 보면 걸으면 살색의 향연을 좀 피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눈은 피해도 귀는 열려서 질퍽거리며 살 부딪치는 소리와 정신 나간 신음은 잘 들렸다.

누군가 해림의 발목을 덥석 쥐었다. 해림이 진저리를 치며 발을 털자 욕설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다른 이는 해림의 손목을 잡았다가 팔찌를 보고 멀어졌다. 떨쳐도 한 걸음을 채 못 가 사람들이 좀비처럼 다시 달라붙었다. 어쩔 수 없이 해림이 주신도의 옆구리에 바짝 몸을 붙였다.

주신도에게도 붙는 손길이 여럿이었다. 알몸인 여자가, 남자가 놀고 가라며 엉겨 붙었다. 손끝만 닿아도 주신도가 얼굴에서 표정을 싹 지우고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쳐다봤다. 주신도를 껴안으려던 희고 가는 팔이 눈길이 닿기 무섭게 뿔뿔이 흩어졌다.

홀을 가로질러 다른 계단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초록색 불빛이 올라왔다. 입구보다, 홀보다 더욱 불길한 색이었다. 해림이 어두침침한 아래를 내려다보고 주신도를 쳐다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 가면 안 되겠냐고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려가.”

해림이 계단 난간을 잡았다. 주신도가 발로 등을 걷어차기 전에 내려가긴 해야 했다. 아래서는 또 무슨 끔찍한 꼴을 볼지. 해림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수록 지옥문에 가까워지는 심정이었다. 해림이 마지막 계단을 앞두고 망설이자 뒤에서 주신도가 해림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계단의 마지막까지 내려왔다.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 너머에서 손을 뻗어 문에 매달린 번호키를 눌렀다. 굳세게 닫혀 있던 철문이 무거운 기계음을 내며 뒤로 밀렸다.

차마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문 안은 위와 같은 홀이 아니었다. 긴 복도에 안이 훤히 보이는 방들이 옆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차마 그 방을 들여다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슬쩍 열린 방 문틈으로 다 죽어 가는 흐느낌과 신음이,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가는 문은 저기 끝에 있어.”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를 쥐고, 친절하게 검지 끝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주신도가 벽처럼 버티고 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가로지르자며 해림이 한 발을 뻗었다. 옆은 보지 않으려 했건만 주신도가 해림의 머리와 턱을 잡아다가 억지로 돌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런 재밌는 거 안 보고 가면 섭섭하지. 도련님이 하도 겁먹어서 위에서 술도 안 마시고 그냥 내려왔잖아. 저거라도 보고 가.”

해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뭐든 보지 않는 게 이로울 거라는 걸 알았다.

“눈 떠. 눈꺼풀 뜯기 전에.”

손끝이 눈두덩 위를 가볍게 눌렀다. 협박이 먹혔다. 해림이 뜨고 싶지 않은 눈을 억지로 떴다. 유리 너머로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보였다.

위층은 난잡하기는 해도 합법적이었다. 밤꽃 냄새와 방향제 냄새, 술 냄새는 진동했을지언정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래는 아니었다. 한 명이 묶여 있었다. 목에 빨간색으로 빛나는 목걸이를 찼다. 가면을 쓴 여러 명이 그 한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남자의 한쪽 팔은 팔꿈치 아래가 없었다. 팔뚝도, 다리 한쪽도 도끼로 잘렸다가 아문 듯이 뭉툭했다.

노예처럼 꽁꽁 묶인 남자의 뒤에서 누군가 허리를 흔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자의 머리 쪽에도 알몸인 사람이 막고 섰다. 하나 남은 손에도, 꽉 묶인 몸통의 겨드랑이와 오금과 심지어 팔다리가 잘린 단면에도 짙은 색의 살덩이가 뱀장어처럼 쑤시고 돌아다녔다.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해림이 뒷걸음질 치다가 주신도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 몸을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가 주신도가 건 다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다음 방이 눈에 들어왔다.

「대신 팔 하나 다리 하나 날아갈 거고, 눈알도 하나는 버려야 할 거고.」

그 안에서 여러 명에게 둘러싸인 이는 한쪽 눈이 없었다. 그 사람의 머리를 쥐고, 눈알이 있어야 할 곳에 다른 걸 넣었다. 인형 다리처럼 벌어진 다리 사이에는 둘이 붙어 있었다. 뼈와 근육 대신 짚을 채운 것처럼 사람이 힘없이 흔들렸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참을 수가 없었다. 해림이 입을 막았다. 목구멍에 뜨끈한 기운이 왈칵 솟았다. 결국 바닥을 짚고 쏟아 냈다. 먼지 한 톨 없이 번들거리는 타일 위로 토사물이 흩어졌다.

“비위가 이렇게 약해서야.”

주신도가 혀를 차며 해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오기 전에 먹었던 걸 모조리 게워 내도 속이 불편했다. 방에서는 이제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건만, 노예처럼 묶인 이들이 토해 내는 비명과 울음이 귀에 맴도는 성싶었다.

“나가고 싶어요.”

“다 봤어?”

“당장. 빨리.”

주신도의 손을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건만, 다리가 제 의지를 벗어나 후들거렸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더니 무릎이 불시에 푹 꺾였다.

주신도가 참, 가지가지 한다고 중얼거리며 해림을 번쩍 품에 안았다. 처음엔 버둥거리던 해림도 양옆에 펼쳐진 방을 보고는 주신도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방을 외면했다. 여기로 끌고 온 이인데도, 지금 이곳에서 저를 빼낼 사람 역시 주신도뿐이었다.

어떻게 홀을 벗어나고 어떻게 건물을 나왔는지 해림은 몰랐다. 주신도의 품에만 애처럼 파묻혀 있었다. 싸늘한 바깥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서야 미끄러지듯 주신도의 품에서 벗어났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눈앞에 본 광경이 방금 꾼 악몽처럼 선명했다.

“감상이 어때.”

언제 가져왔는지, 주신도가 차가운 캔을 해림의 뺨에 댔다. 캔을 받지도 못하자 주신도가 뚜껑을 친히 따서 건넸다. 해림은 그것조차 입에 대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저게 지하였다. 다들 입 모아 끔찍하다고 떠들던 곳이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지옥이었다. B급 스너프 필름이었다. 거길 가느니 차라리 장기를 팔겠다고 외쳤던 지원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저한테 왜 보여 줬어요.”

“산책하다 보니.”

“거짓말.”

“맞아. 도련님이 계속 딴생각 품어서 그랬어. 그러기에 왜 뽈뽈거리고 돌아다녀. 사람 불안하게.”

“계속…….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요.”

“빚 다 갚을 때까진 있어야지. 돈 안 갚고 튀면 쓰나.”

하데스가 떠올랐다. 저승의 사신들이 떠올랐다. 지옥을 관장하는 악마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미 죽어 영혼인 이들을 괴롭히지, 적어도 산 사람을 괴롭히진 않았다.

“사장님 정말 나쁜 사람 맞네요.”

“굳이 도련님이 말 안 해도 잘 알아. 근데 그거 되게 상대적인 개념인 거 알아? 내가 도련님한테는 쓰레기 맞는데, 적어도 저기서 노는 애들한테는 아니거든.”

범죄자의 뻔뻔한 논리였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해림이 음료수로 입을 헹구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직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는 마찬가지나, 적어도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은 있었다.

“그래서, 산책은 어땠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거 다행이네.”

서로 생각하는 산책의 의미가 아마도 다른 성싶었다. 해림은 굳이 꼬집어 정정하지 않았다.

주신도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제 입에 건 담배를 해림의 입술 새로 옮겼다. 해림이 멍하니 담배를 물었다. 주신도가 담배 끝에 불을 붙였고, 해림이 본능적으로 깊게 빨아들였다. 흰 연기가 기도를 훑고 내려가며 거세게 쿵쾅거리는 심장에 닿았다. 아무리 연기를 들이마셔도 터질 듯한 박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해림이 후우, 하고 입술을 가늘게 떨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허공을 헤매는 연기에 지하에서 본 장면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지길 바랐다.

* * *

주신도의 의도는 명확했고, 성공을 거뒀다. 지하를 엿본 이후로는 탈출에 대한 열망이 훅 식었다. 저가 가진 상식으로, 다소 안이하게 상황을 해석하던 해림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탈출이란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지하에서 본 끔찍한 장면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희망을 꺾었다.

체념과 수긍이 뒤따랐다. 탈출하면 그만이라고 외면했던 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손에 익었다. 익숙해지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비정상적인 일도 일상으로 편입시킨다. 싫다고 거부하는 건 처음 몇 번만으로, 싫든 좋든 횟수를 거듭할수록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처음에는 분명 반항했을 이형과 그 패거리들이 지금은 비정상적인 일로 내기를 걸고 시시덕거리듯이.

사장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랬다. 거부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도 어느새 받아들이는 일이 됐다. 해림은 시간이 되면 사장실에 갔고, 무릎을 꿇고 앉아 주신도의 아랫도리를 입에 넣고, 혹사당하고, 말 잘 듣는 개한테 간식이 주어지듯 요깃거리를 포상으로 받았다. 정액을 삼키고 물로 입을 헹구고 음식을 넣는 일련의 행위가 일상에 자리 잡았다. 끔찍하다는 감상도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여위어갈수록 점점 흐릿해졌다.

「왜 아직도 못 해.」

주신도는 악마가 와도 저놈보다는 저가 낫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갈 인물이었다. 고문에 능통하고, 고문의 단계를 슬금슬금 올리는 일도 구렁이 담 넘듯이 이뤄 냈다. 어린애 어르듯 달래다가도 해림이 끝까지 피하면 특유의 짧고 딱 부러지는 어조로 겁박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그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이란. 다른 이들보다 월등하게 커다란 아랫도리마저도 폭력적인데 주신도는 그걸 해림의 목구멍 끝까지 밀어 넣었다. 미세 플라스틱보다도 작은 양심으로, 흔들지는 않았다.

아니, 흔들어야 그나마 나은 걸까. 식도로 들어왔건만 부피와 두께가 남달라 기도까지 막혔다. 목덜미부터 얼굴 전체가 벌겋다 못해 터질 듯이 물들고, 이마에도 굵은 핏대가 서고, 해림의 손가락이 생존을 위해 주신도의 허벅지를 벅벅 긁다가 아래로 맥없이 툭 떨어질 때쯤에야 허리를 뒤로 물렸다.

해림의 기술이 일취월장한 건 어디까지나 살기 위해서였다. 목구멍이 막혀서 추한 꼴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혀를 내밀게 되었고, 기둥을 핥아 올렸으며, 아래팔이 떨어져라 기둥을 잡고 흔들었다. 머리는 저절로 자위 기구처럼 흔들고 심지어는 그 아래 달린 불알까지 혓바닥으로 핥아 올렸다.

「늘질 않아서 큰일이네.」

얼굴과 입술에 묻은 정액을 손수 닦아 주며 주신도는 항상 박하게 평가했다. 앞에서 뭐라고 떠들든, 해림은 빠질 성싶은 턱을 문지르며 주신도가 자비로운 척 내려 준 물을 마셨다.

비참해야 맞을진대 비참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은 해야 할 일로 취급했다. 밥을 먹거나 몸을 씻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손님에게 몸을 팔 거, 주신도에게 대신 주는 것뿐이다. 정확히는 주신도에게 목구멍과 혓바닥과 손을 내어 주는 거라고.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아무리 매사에 덤덤한 해림이라도 심각한 우울의 늪에 빠졌을는지 모른다.

“그걸 왜.”

해림이 파리하게 질려서 테이블에 올라온 상자를 내려다봤다. 평소와 똑같을 거라고 체념하고 방에 들어왔건만, 오늘은 달랐다. 고문이 하나 더 추가됐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이미 겪어 본 바이나 고문의 결합은 달랐다. 하나만으로도 견디기 어렵거늘 주신도는 악마 뺨치는 인간답게 두 개를 합쳤다. 해림의 온몸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싫어요. 제발. 나 못 해.”

최근에는 주신도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주고는 있으나, 이건 아니었다. 해림이 질색하며 도리질을 쳐도 주신도는 당연히 들어주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겁이 나는 매끈한 장갑을 끼고 해림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손님 받겠다던 자신감 어디 갔어. 이 정도면 매너 좋은 손님이야. ……도련님, 어디 가.”

구음까지는 하겠지만 로터를 넣고 아랫도리를 빨라는 미친 짓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해림이 허옇게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주신도가 험상궂게 눈썹 사이를 구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해림이 문을 열고 도망치려 하자 주신도가 한걸음에 다가와 해림의 뒷덜미를 잡았다. 싫다고 버둥거리는 해림을 질질 끌고 소파에다 내동댕이치고서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 사이에 가뒀다. 해림이 보기 드물게 입술까지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도련님 후장에 자지를 박는대? 로터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야. 처음도 아니잖아. 쌀 만큼 좋아했으면서 왜 이렇게 빼는데.”

“그럼 사장님이나 박고 싸세요. 전 싫습니다.”

“이야, 우리 도련님 말하는 꼬라지 봐라. 고 주둥아리가 참 예뻐서 깨물어 주고 싶네. 잔말 말고 바지 벗어.”

“호모 싫다면서 왜 거기에 손가락 넣으려는 건데요. 사장님 호모 아니라며.”

“내가 나 좋자고 도련님 후장에다 손가락 박아? 자지를 못 빨면 후장이라도 개발해 놔야 할 거 아니야. 목석같이 누워 있는 놈이나 아프다며 우는 새끼를 누가 좋아해. 도련님, 계속 징징거릴래?”

주신도가 해림의 바지춤을 잡았다. 해림이 주신도의 손등을 떼어 내려고 잡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둘 중 하나만 할게요. 둘 다 하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 많아.”

옥신각신 끝에 주신도가 막무가내로 벨트를 풀었다. 양손에 해림의 바지를 나눠 쥐더니 팔뚝에 힘줄과 핏줄이 불끈 돋았다. 찌이익, 소리를 내며 단추는 어디론가 튕겨져 나가고 지퍼 아래의 질긴 면이 하늘하늘한 창호지처럼 너덜너덜 찢어졌다.

“미쳤…….”

옛말에 미친놈이 힘은 장사라더니 주신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괴력을 보고 넋이 나간 틈을 타 주신도가 해림의 속옷까지 끌어 내리고 아랫도리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해림이 헉, 숨을 토해 내고서는 허리를 구부렸다. 두 손으로 주신도의 팔목을 잡았지만 벌주듯 움켜쥔 손을 뗄 수는 없었다.

“어서 정해. 어떻게 할래.”

“윽, 싫…….”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해림이 주신도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해림의 입에서 결국 할게요, 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쥐어짜려는 듯 손목에 단단한 관절이 불거졌다. 쥐어 짜이는 통증이 심해져 해림이 눈물을 글썽글썽 매달았다.

“할, 게요. 하면 되잖아.”

거짓말처럼 손이 떨어져 나갔다. 진작 그러지 그랬느냐며 주신도가 로터와 젤을 가져왔다. 안 보면 덜 끔찍하지 않을까, 해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젤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주신도의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더욱 잘 들려 공포심만 부풀었다.

처음에 로터를 넣었을 때처럼, 주신도가 해림을 일으켜 세우고 엉덩이를 잡았다. 질척거리는 손바닥이 탄탄한 엉덩이를 조막만 한 가슴처럼 주물럭거리다가 쪼개듯이 벌렸다. 힘 빼라는 명령에 해림이 주신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흐윽.”

그때나 지금이나 기분이 더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지근하고 둥근 물체가 손가락을 타고 깊숙한 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손가락의 이물감이 불쾌해 엉덩이가 봉긋하게 솟도록 힘이 들어갔고, 대번에 주신도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쳤다. 훅 밀려오는 얼얼한 통증에 해림이 숨을 흡, 참았다.

“내기할까, 도련님. 내가 먼저 싸면 도련님이 이기는 거고, 도련님이 먼저 싸면 내가 이기는 걸로.”

“……뭘 걸 건데요.”

목소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주신도가 글쎄, 하며 뜸을 들이다가 해림이 바닥에 꿇어앉도록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간 익숙해진 자세였다. 해림의 손을 끌어 올려 제 바지춤에 올려놓고는, 주신도가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오천 깎아 줄게.”

“만 원?”

“그럼 오천 원이겠어. 도련님, 나랑 지금 장난해?”

저번에 손님과 하루를 보냈을 때도 주신도가 제안한 만큼은 못 받았다. 돈 따위에 몸 팔지 않겠다고 도덕심 세워 봤자 저만 손해일 이상한 세계다. 어차피 등 떠밀려 할 거라면 굴욕적이어도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해림이 꾸물거리자 주신도가 앞머리가 위로 흩날리게끔 한숨을 뿜으며 바지춤을 열었다. 해림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들고서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눈동자에 가득했던 거부감은 잔잔하게 식고, 어떻게든 내기에서 이기겠다는 투지가 그 자리를 메웠다.

시도는 좋았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간 주신도의 아랫도리에 매달려 갖은 고생을 했더니만 싫어도 실력이 늘었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이러다 자겠다고 하품하던 주신도가 새로 보여 주는 반응이 그 근거였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아프게 움켜쥐거나, 저도 모르게 신음이 터졌는지 입술을 물고 참거나, 무딘 끝에 혀끝을 대면 손에 잡힌 기둥이 살이 꽉 찬 잉어처럼 단단하게 부풀었다.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곧이라도 터질 성싶어 해림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승기가 보였다. 그렇게 내기의 승자가 되는 줄 알았더니만.

전세는 주신도가 스위치를 누르면서 역전되었다. 그전까지는 지금까지 했던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 어떻게든 쥐어짜려고 노력했으나, 안에서 부르르 몸을 떨어 대는 로터 때문에 집중력이 흩어졌다. 허벅지가 오므라들었고, 가랑이 안쪽이 옴찔옴찔 떨렸다. 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지 주신도는 치사하기 짝이 없게 처음부터 제일 높은 단계를 눌렀다.

“흐으……, 으, 읍. 후…….”

손에 쥐고 기둥의 끄트머리에 혀를 댔다가도 진동이 속살을 뒤흔들면 해림이 입을 다물고 바르르 떨었다. 둥근 끝에 매달린 투명한 물방울을 혀로 문지르는 행위도 하반신이 떨려 간신히 해냈다. 어떻게든 이기려고 해림도 열심히 기둥을 문질렀으나 헛손질만 거푸 이어지는 걸로 모자라 번번이 멈추기만 여러 번이었다.

“이래서는 못 이겨, 도련님. 좀 더 분발해야지. 입 벌리고. 그렇지.”

해림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신도의 정강이를 붙들고 잡아당겼다가 손에 말아 쥐었다가 하며 등골을 오싹하게 물들인 감각을 참았다. 아래는 꼿꼿하게 서서 옷깃을 밀어 올린 지 오래다. 손도 안 닿았건만 그 끝에 작은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하…….”

주신도가 해림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들고 입 안에 기둥을 밀어 넣었다. 끝부분만 삼켜도 입술 끝이 찢어질 듯이 벌어졌고, 슬쩍 빼자 벌건 혀끝이 딸려 나왔다. 주신도가 키득거리며 장난치듯이 해림의 입에 넣었다가 빼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해림이 주신도의 옷을 바짝 움켜쥐었을 적에 혓바닥을 누르며 목구멍 깊숙이 침범했다.

“―!”

갑자기 숨이 막혀 해림의 온몸에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자연스레 안쪽이 좁아졌고, 속살에 짓눌린 로터가 더욱 커다랗게 몸을 떨었다. 해림의 홉 뜬 눈동자에 눈물이 밀물처럼 차오르더니 소낙비처럼 뺨을 가르며 떨어졌다.

해림의 낯빛이 차츰 붉어졌다. 목덜미부터 붉은색이 차오르다가 뺨과 이마까지 뒤덮었다. 주신도의 허벅지를 미는 손바닥에 힘이 들어가고 틈 없는 입 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에 다급함이 묻었다. 허벅지를 퍽퍽 치며 밀어도 주신도는 여유롭게 해림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오히려 가까이 끌어당겨 거웃이 코끝에 닿게 했다.

구둣발이 해림의 아랫도리에 살짝 닿았다. 흐리멍덩하던 해림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빛이 돌았다. 뒤통수를 쥔 손에서 힘을 빼고 몸을 뒤로 물리며 구둣발로 아래를 툭 건드리자, 해림의 상체가 주신도의 허벅지 쪽으로 허물어졌다. 입에 기둥을 그대로 담은 채 해림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

눈도 질끈 감았다. 정액이 포물선을 그리며 주신도의 정강이 위로 튀었다. 진동 소리는 멎지 않았다. 해림의 허벅다리도 파르르 떨리더니 미처 못 뱉어 낸 정액을 주르륵 터트렸다.

해림의 머리카락을 쥐고서 주신도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혓바닥이 입술 밖으로 딸려 나왔다. 동굴처럼 벌어진 입 안이 잔뜩 짓눌려 평소보다 새빨갛다.

퉁, 하고 튀어나온 기둥을 손에 쥐고서 주신도가 이를 악물었다. 손등에 관절이 도드라지고 목덜미에도 핏대가 솟았다. 턱, 턱 하고 손아귀에 살갗이 비벼지는 질척한 소음이 나면서 벌겋게 살이 달은 끄트머리가 해림의 뺨과 눈 아래에 닿았다.

해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움찔거리는 해림의 눈가 위로 탁한 흰 물이 쏟아졌다. 길게 호선을 그리며 해림의 까만 머리 위에 떨어지고 그 아래로 흘러 속눈썹과 입술에도 묻었다.

후우, 하고 주신도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해림의 턱을 잡아 억지로 입을 벌리고 못 뱉은 나머지를 혓바닥 위에 토해 냈다. 흰 액체가 빨간 혓바닥에 엉겨 붙는 모습이 자못 자극적이었다.

턱을 닫아 주자 해림이 간신히 한쪽 눈을 뜨고 주신도를 원망스레 쳐다봤다. 주신도가 눈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훑자 고개를 옆으로 틀며 목울대를 움직인다. 꿀꺽 삼키고서는 해림이 주신도를 올려다봤다.

“잘했어.”

언제나 같은 칭찬이었다. 해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도 진동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 같은 기세는 잃었어도 아랫도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찔끔찔끔 물을 뱉어 내고 있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팔뚝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해림이 비틀거리다가 주신도의 품에 안기듯이 쓰러졌다. 닿는 게 싫어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퍽 밀었으나 주신도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해림을 품에 가두듯 껴안고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이거 빼야지. 아무리 좋아도 박고서 살 순 없잖아.”

좋아한 적 없다. 항의는 신음에 막혔다. 해림이 신음이 새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벌이 날갯짓하듯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엉덩이가 봉긋봉긋 솟았다. 주신도의 솥뚜껑만 한 손바닥에 엉덩이를 철썩 얻어맞고 나서야 힘이 빠졌다.

주름을 살살 긁던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진동이 눅진눅진하게 녹인 점막을 지문으로 슥 문지르며 로터가 박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가슴을 밀려다가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로터가 주신도의 손가락을 피해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안달을 냈고, 손가락은 반대로 로터를 잡으려고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안 잡히네.”

손가락이 빠져나가서 해림이 잠시 숨을 돌릴 찰나, 손가락 두 개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굵기가 꼭 두꺼운 나무 기둥 같아 해림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주신도의 가슴팍에 쿵 하며 이마를 박았다.

“하으, 빨리, 차라리, 빨리, 읏……!”

“응, 알았어, 도련님. 빨리 빼 줄게. 너무 그렇게 조이지 마.”

좁은 구멍은 손가락을 무느라 빠듯하게 벌어졌고, 예민하게 달아오른 속살은 로터보다 훨씬 커다란 손가락을 휘감고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했다. 로터를 잡기 위함인지 다른 의도인지, 검지와 중지가 서로 엇갈리며 폭 좁은 안쪽을 넓혔다. 해림이 흠칫거리며 허벅지를 맞붙였다. 식지 않은 열기가 다시금 배꼽 아래를 슬근슬근 긁었다.

손가락이 뒤로 빠져나갔다가 도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디까지 다 들여놓을 듯이 푹 소리가 나도록 박았다. 해림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아랫배에 힘이 바짝 들어가더니 기둥에 투실투실하게 살이 올랐다.

“잡았다.”

힘차게 진동하며 그 자리에 머물려고 발악하는 로터가 주신도의 손가락 끝에 걸렸다. 해림은 망연자실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기둥의 끄트머리를 가린 얇은 셔츠가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젖었다.

“아윽……!”

주신도의 손가락이 로터를 단단히 잡고서 아래로 엉금엉금 끄집어냈다. 로터가 끝까지 진동하며 젖은 점막을 흔들어 대는 데다가, 주신도의 딱딱한 손가락이 내벽을 훑으며 빠져나가 배꼽 아래는 이제 간질거림을 너머 뜨끈한 기운이 팍 치밀어 올랐다. 아랫도리가 조금만 더 자극을 주면 기세 좋게 뿜어 낼 듯이 대가리를 까닥거렸다.

이를 하도 악물어 턱이 우릿했다. 눈앞도 핑글핑글 돌았다. 저절로 아랫도리에 손이 내려갈 듯 이성이 희미했다. 귀신에 씐 듯이 시야가 희끄무레하고, 물방울이 아래로 투두둑 떨어지면 맑아졌다가 다시 흐릿해졌다.

“흐으, 빨리. 좀. 어떻게 좀, 아…….”

“다 됐어.”

손가락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마지막까지 로터가 속살의 끝부분을 자극하는 바람에 다리에서 힘이 풀려 소파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주신도가 빼낸 로터를 해림의 옆자리에 휙 내던졌다. 마지막 반항처럼 부르르 몸을 떨던 로터가 순식간에 멈췄다. 주신도가 젖은 맨손으로 스위치를 누르고 어깨를 으쓱했다.

“전원 끄고 빼면 될걸. 내가 요새 잠을 통 못 자서 그런지 좀 깜박깜박해. 도련님이 이해해.”

주신도의 뻔뻔한 변명에도 해림은 대꾸하지 못했다. 넋을 잃었다. 제 몸뚱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눈앞에 선명하게 증거가 남아 해림을 괴롭혔다. 저번처럼 목숨이 경각이라, 번식 본능의 일환으로 사정을 했다고 변명도 못 했다.

끊임없이 이는 진동과 혓바닥을 오가는 살덩이가 아랫배에 쾌감을 일으켰다. 손가락이 몸 안으로 들어와 헤집을 때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발가락의 말초신경까지 잔뜩 긴장의 날을 세웠다.

고문이 아니었던가. 낯설고 불쾌하기만 했던 감각이 쾌감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수컷이란 게 원래 무슨 자극이든 자극만 주어지면 발딱발딱 세우고 싼다지만, 이런 극악한 조건에서도 제 몸이 반응할지 몰랐다.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우리 도련님이. 누가 보면 내가 도련님 후장에 자지 박은 줄 알겠어요. 오해 안 받으려면 정신 차리셔야지.”

비죽거려도 해림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주신도가 담배를 물며 해림의 머리카락을 쥐고 뒤로 넘겼다. 해림의 고개가 힘없이 딸려 왔다. 마주친 눈동자가 초점 없이 멍했다. 사정의 여운으로 뺨이 발그스레하고 정신적인 충격으로 눈빛이 몽롱했다.

그렇게 심하게 굴지도 않았는데 하여간 약해서 탈이다. 주신도가 연기에 한숨을 담아 길게 내쉬고, 책상 서랍에서 손바닥만 한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해림의 옆에 앉아 봉투를 열고 제 손톱만 한 분홍색 덩어리를 꺼냈다. 속이 비치는 투명한 분홍색에 하트 모양의 젤리였다.

“이거 먹고 싶었다며.”

구음이 끝나면 항상 보상을 주듯, 이번에도 주신도가 해림의 입 안에 젤리를 쏙 집어넣었다. 멍하니 정면만 바라보던 해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기가 도는 눈을 보고 주신도가 젤리를 연달아 해림의 입에 욱여넣었다.

“그만하세요.”

입에 젤리가 가득 찬 해림이 웅얼거렸다. 주신도가 사악하게 웃고는 그제야 저도 젤리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방금 전까지 악마도 울고 갈 고문을 행했으면서, 친한 친구처럼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젤리를 나눠 먹는 상황이 해림은 퍽이나 우습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림이 어느덧 이성을 다잡고 혀 위에서 슬슬 녹는 젤리를 우물거렸다. 말캉말캉한 젤리를 물자 복숭아 향 시럽이 톡 터져 나왔다. 인공적인 향이 입천장과 혓바닥에 들러붙은 정액의 씁쓸한 풀 맛과 비린내를 지웠다.

충격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계속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액상 과당이 자꾸만 멍해지려는 뇌에 제정신을 불어넣었다.

해림이 소매를 늘려 뺨을 닦았다. 말라붙은 정액이 하얀 가루로 변해 후드득 떨어졌다. 눈꺼풀에도 입술에도 묻어 소매로 아무리 문질러 봤자 소용없었다.

일단은 이 방에서 나가는 게 급선무다. 해림이 바지를 끌어 올렸다. 엉덩이 사이도 허벅지도 질척거렸으나 여기서 씻을 것도 아니고, 복도를 바지를 벗은 채 활보할 수도 없어서 젖은 그대로 속옷과 바지를 껴입었다.

“가려고?”

해림이 옷을 갖춰 입는 걸 빤히 지켜보며 주신도가 물었다. 한쪽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서. 껌처럼 젤리를 질겅질겅 씹는 포즈가 동네 양아치처럼 껄렁껄렁했다.

“일 끝났으니까요.”

일이라는 표현은 싫지만 달리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주신도가 표정을 지우고 해림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기는 어떻게 할래. 도련님이 졌는데. 이거 보여?”

주신도의 종아리에 희끗하니 적나라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반투명하게 말라붙어 주신도가 손으로 툭툭 치자 바닥으로 바스스 쏟아졌다. 해림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하얬던 귓불이 불그스름 물들었다.

“지금 당장 도련님한테 원하는 건 없어. 언젠가 생기면 그때 알려 줄게.”

주신도가 손을 털고서 일어났다. 해림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주신도가 그대로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손을 뻗어 해림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렸다.

“가서 쉬어. 도련님 말대로 오늘 일은 끝났으니까. 내일 출근하는 거 잊지 말고.”

손가락을 뒤로 넘겨 해림의 뒤통수를 잡고서 주신도가 고개를 숙였다. 우뚝한 코끝이 이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닿았다. 가벼운 숨결이 머리카락 아래를 비집고 스쳐 지나갔다.

해림이 멈칫했다가 주신도의 가슴을 밀치고 소파 등받이에 걸어 둔 겉옷을 집어 들었다. 주신도가 젤리 가져가라며 부르는 걸 무시하고 도망치듯이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쾅, 하고 문이 부서지라 세게 닫고는 혜림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의 뛰듯이 엘리베이터에 도착해 버튼을 마구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리기 무섭게 해림이 쥐구멍에 숨듯 뛰어들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얼음처럼 단단하게 굳었던 눈썹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힘이 빠진 듯이 해림이 벽에 등을 기댔다가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사정 후의 나른함도, 사장실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도 이유가 아니었다.

“…….”

내려가는 숫자를 보다가 해림이 손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주신도가 헝클어 놓은 머리카락이 새 둥지처럼 부스스하게 솟아 있었다. 기분 탓인지 손에 닿은 머리카락이 아직도 숨결이 남은 듯 뜨뜻미지근했다.

입술이…….

해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볼살이 뭉그러지도록 거칠게 문지르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팔 아래로 드러난 얼굴이 영산홍 꽃잎처럼 불긋하게 피어 있었다.

머리카락에 입술이 닿았다. 주신도가 잘 가라 인사하듯이 머리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꾹 눌리고 떼어지던 감촉,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던 손가락과 가볍던 날숨. 역겨워서 소름이 돋아도 모자랄 판에 얼굴이 뜨겁게 익었다. 주신도의 뻔뻔한 작태에 울화가 치밀어서 그런 거라고, 갑자기 더워지는 이유가 분노 외에 뭐가 있겠냐며 해림이 이상 증세를 진단 내렸다.

“정신 차려.”

해림이 짝 소리가 나도록 뺨을 후려쳤다. 화끈한 통증도 찬물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아픈 뺨을 문지르며 해림이 무릎을 세웠다. 팔을 무릎에 대고 그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주신도는 잉크였다. 맹물 같은 해림의 세상에 기어이 한 방울 떨어지고만. 퍼지지 않게 막으려고 해도 속한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소용없었다.

해림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길게 한숨을 뿜어냈다. 그간 듣지 않으려 노력했던 속내가 사방을 에워싸고 저 좀 보라며 고함을 쳐 댔다. 평온한 일상에 파란이 불어 닥쳤다고, 이제는 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저주에 가까운 소리를 퍼부었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상황을 마주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해림이 펄떡거리며 귀에 소리가 닿을 만큼 요란하게 뛰는 가슴을 손아귀로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반질거리는 바닥 표면에 비친 제 얼굴이, 불그레 달아오른 두 뺨과 일그러진 눈매가 다른 이처럼 낯설었다.

해림이 습관처럼 눈을 감았다. 사방이 까맣게 물들어도 심장이 거칠게 뛰어 대는 소리는 귓가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 * *

흡연실에 이형과 마주쳤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능숙하게 담배를 물고 연기를 뱉는다. 해림이 문을 열자 이형이 깜짝 놀라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었다.

“형, 왔어요?”

“어. 담배 피우는 줄 몰랐는데.”

“가끔 피워요. 자주 피우진 않고, 종종 생각나면.”

이형에게선 담배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형이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반 이상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버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평소와 달리 깔끔했다. 항상 주렁주렁 매달았던 피어싱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귀걸이 안 했네.”

해림이 이형의 옆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최근 피우는 개수가 늘었다. 레일 위를 미친 듯이 뛰고 운동을 하며 몸을 혹사시켜도 복잡한 속이 잘 가라앉지 않았다. 피곤에 젖어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았다가도, 주신도가 떠오르면, 주신도의 면상을 보면 내면에 금세 흙탕물이 일었다.

주신도는 연못 바닥을 휘젓고 다니는 못된 물고기였다. 그 커다랗고 꺼먼 몸통과 지느러미와 꼬리를 흔들며 가라앉은 흙을 물 위로 끌어 올리고, 맑고 투명해야 하는 연못물을 뿌옇게 흐리고 다니는.

“하면 안 돼요.”

“응?”

“아……. 그게.”

이형이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피어싱 이야기였다. 주신도를 떠올리느라 이야기의 흐름을 놓쳤다. 해림이 담배 끝을 가볍게 씹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이형이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사리물었다. 눈가가 가볍게 구겨졌다. 밝히기 싫은 모양이라고, 해림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오늘 그 새끼 오거든요.”

“그 새끼가 누군데.”

“있어요. 씨발 새끼. 귀걸이 하면 귓불 다 찢어 놓는다고 해서.”

성격이 개차반인 손님 중 한 명인 성싶었다. 손님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줄줄이 사탕처럼 주신도가 떠올랐다. 속을 풀려고 담배를 물었건만, 더 답답해져 연기를 빨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금세 한 개비가 동이 났다.

이형은 해림이 담배를 다 피워도 흡연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멍하니 의자에 앉아 울창한 숲을 바라봤다. 가끔씩 엿보이는 우울함이 오늘따라 처진 눈 끝에 진하게 묻었다.

“태훈이요. 형 들어오기 전에 튀었는데 지금은 잡혀 왔겠죠. 저기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 몰라.”

“글쎄. 의외로 어디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순간 지하가 떠올라 뒷골이 섬뜩했다. 해림이 눈을 가만히 내리깔며 내색을 숨겼다.

“그럴 리는 없어요. 사장이 얼마나 지독한데. 금성으로 도망쳐도 우주선 타고 직접 가서 잡아 올걸요.”

우주복을 입은 주신도라도 상상했는지 이형이 작게 키득거렸다. 해림도 슬며시 따라 웃다가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숲은 누군가의 말대로 시체를 묻어도 발견되기 힘들게끔 나무가 빼곡했다.

“태훈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탈출했대?”

처음에는 당연히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허무맹랑한 망상에 취해 있던 때였다. 지하를 보고 난 후에는 탈출하자는 의지가 가는 나뭇가지처럼 뚝 꺾였다. 전설이나 신화를 물어보듯 해림이 물었다.

“모르죠. 땅굴을 파고 갔는지 어쨌는지.”

“너희한테 같이 가자는 말은 안 했어?”

“우리 중에 누가 발설할 줄 알고요. 형, 여기 애들 서로 아무도 안 믿는다니까요. 아, 나는 형 믿어요.”

이형이 히죽거리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믿음의 표시였다. 해림의 양심에 가책을 일으키는 몸짓이었다. 시도는 한 번이었고 실패로 끝났으나 해림은 이형을 여기에 두고 탈출을 꿈꿨다. 제 코가 석 자라며 나중을 기약했지만 이기적인 행동이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태훈이 그 자식, 탈출하기 전에 유독 케이하고 친하게 지냈어요. 원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케이라면.”

“예. 걔요. 형도 한번 봤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첫 만남보다 두 번째 만남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당당하게 주방에서 나오던 자신만만한 얼굴은 쉬이 잊힐 종류가 아니었다.

“걔가 도왔을 수도 있죠.”

“그걸 사장이 몰랐을 리가.”

“케이가 벌어다 주는 돈이 장난 아니라 그냥 눈감아 준 걸 수도 있고요. 케이는 예약 손님이 분 단위로 줄을 서거든요. 하루에 몇 탕인가 뛸 때도 있고. 저번에 지원이가 그러던데, 걔는 한 번에 세 명, 네 명도 받는대요.”

이형이 팔뚝을 벅벅 비비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방에서도 그렇고, 사람이 심히 개방적인가 보라고 해림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보다 태훈이 탈출하기 전에 친하게 지냈다는 대목에 관심이 갔다.

“탈출하기 전에 특별한 행동은 없었고?”

“딱히요. 그냥 똑같이 손님 받고, 떠들고 그러던데. ……왜요, 형. 아직도 탈출 생각해요?”

탈출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날 밤 봤던 광경이 선명하게 기억에 박혀 있었다. 묶여서 고문을 받던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닌 저가 될 수도 있음이었다. 그 뭉툭한 팔과 다리가, 눈알이 없던 시커먼 빈 눈두덩이.

하나 희망은 가지를 꺾어도 뿌리는 굳건하게 남아 있었다. 주신도 옆에선 비정상이 정상의 영역을 잡아먹었다. 머리카락에 입술이 닿은 일 가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저를 해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신도가 만든 세계는 평온한 해림의 세계를 좀먹고 뒤흔들고 균열을 만들었다. 갈라진 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해림은 두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가능성만 보인다면.

지하에 처박힐 거란 두려움보다, 주신도의 옆에 붙어 있다가 이상해질 자신이 더 두려웠다.

이형이 고개를 돌렸다. 해림의 꿍꿍이가 무언지 캐낼 듯이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해림의 얼굴을 살폈다. 해림이 말없이 시선을 피하자 이형도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에 비친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여기가 오래 머물기 좆같긴 하죠. 그래도 형, 나는 형이 쓸데없는 짓은 안 했으면 좋겠어. 형 죽는 거 보기 싫거든요.”

“왜 죽는다고 생각해. 소문만 들었지 태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눈으로 봐야지만 아나요. 저수지에 누가 빠져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경고문만 보고도 알잖아요. 저 물에 누구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는 걸.”

숲에 시체가 있다는 경고문이라도 붙은 듯이 이형이 가라앉은 눈으로 바깥을 쳐다봤다. 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오며 가을빛으로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숲이 저수지 물결처럼 흔들렸다.

“먼저 가 볼게요, 형. 형이 여기 싫어하는 거 이해는 해요. 정신 나간 새끼 빼고는 여기 좋아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형, 굳이 저수지에 몸 던져서 뛰어들 필요 있나요. 죽고 나서 깨달아 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형이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났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뭐라고 위로가 될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은데, 말재주라고는 쥐뿔도 없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끝내 이형이 흡연실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해림은 입술만 붕어처럼 뻐끔거리다 말았다.

* * *

그날 오후 느지막이 케이의 방을 찾았다. 다른 이들과 멀리 떨어진 방이었다. 몇 번 두드리자 누구야, 하는 신경질적인 대꾸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샤워 가운을 입은 케이가 해림을 올려다보고는 의외라는 듯이 잔뜩 찌푸린 표정을 풀었다.

“그쪽이 댓바람부터 웬일이야?”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케이가 문에 비스듬히 기댔다. 작은 바늘이 한 바퀴만 더 돌아도 해 질 녘이건만 케이에게는 아직 이른 새벽인듯싶었다. 잠에서 갓 깼는지 눈가에 졸음이 그득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해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누가 고양이처럼 휙 뛰쳐나왔다. 덩치가 커다라니 짧게 깎은 머리가 빌딩을 지키던 이들 중 한 명인가 보았다. 쿵쿵거리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케이가 여유롭게 손을 살랑거렸다. 덩치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케이가 해림을 돌아봤다.

“뭔데.”

“태훈.”

“걔가 뭐.”

“그쪽이 도와줬다는데.”

케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팔짱을 꼈다. 해림을 경계하듯 눈썹이 뾰족하게 솟았다.

“그런 이야길 복도에서 당당하게 떠들다니, 간 존나 크네. 들어와. 들어와서 이야기해.”

케이가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줬다. 해림이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섰다. 케이가 복도를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그건 누구한테 들었어?”

“소문으로.”

“소문이 퍼졌으면 사장이 날 가만히 뒀을 거 같아? 누군데.”

“손님.”

하, 하며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발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 그래. 알았어. 근데 그건 왜.”

“어떻게 나갔는지 궁금해서.”

“탈출하고 싶어?”

지하에서 봤던 광경이 떠올라 그렇다는 말이 목울대에 턱 하고 걸렸다. 해림이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케이가 여우처럼 눈을 접으며 샐샐 웃었다.

“수수료만 주면 연결은 해 줄 수 있어. 지하 가 봤어?”

“어.”

“그 꼴을 보고도 탈출을 하고 싶다고?”

지하에 갇힌 이들에게 제 얼굴을 대입해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서웠다. 해림이 아닌 누구든 그 꼴을 보면 탈출의 첫 자음도 떠올리기 싫어할 게 자명했다. 하나 해림은 용기를 냈다. 여기에서 머물면 머물수록 평생에 걸쳐 견고하게 쌓아왔던 제 세계가 부서지고 무너질 걸 알았다.

그 전에 도망쳐야 했다.

“응.”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 브로커가 거기 자주 오거든. 안 그래도 오늘 온다던데 한번 만나 볼래?”

“장소 변경 가능해?”

“가능하다고 봐? 여기서 CCTV 없는 곳이 어디 있는데. 사장실밖에 더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지하 외에는 불가능하단 소리였다. 난교가 펼쳐진 곳이라면 어떻게든 안 본 척 넘길 수 있으나 그 아래층이 문제였다.

“지하 몇 층에서?”

“2층.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거기서 몇 개월 있었던 거 같아? 네가 보기에 내가 팔다리 잘린 등신으로 보여? 멀쩡하게 잘 살아 있잖아. 다들 병신처럼 지하라는 말만 들어도 겁을 먹어서는.”

케이가 신랄하게 비웃었다.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해림이 케이가 썩은 동아줄인지 성한 놈인지 가늠하듯 쳐다봤다. 다른 탈출 통로가 보이면 당연히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현재로서는 케이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뒤에서 불길이 시뻘겋게 혀를 날름거리는데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건널 여유가 어디 있으랴. 사람이 코너에 몰리면 이성도 원래 자리를 본능에게 내어 주고 상황에서 등을 돌리는 법이다. 케이는 지탱하는 끈이 아슬아슬한 다리였다. 건너다 무너질 수도, 운이 좋게 건널 수도 있는. 해림에겐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가서 몸을 파는 것도 아니고, 브로커만 만나는데 케이 말대로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갈등은 찰나였다. 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가 눈꼬리를 가늘게 접고 실실거렸다.

“참, 그쪽 사장하고 별로 안 친하다고 그랬잖아. 내가 목격담을 좀 들었는데.”

“무슨 목격담.”

“매일 사장실로 출근한다고. 안에서 뭘 하길래?”

“서류 작업.”

해림이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었다. 주신도의 아랫도리에 매일같이 입을 댄다는 사실은 추호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사장이 너한테 서류 작업을 맡길 리가. 요게 거짓말을 살살 하네.”

역시나 믿지 않았다. 그간 주신도와 지내며 그 뻔뻔스러움이 옮았는지 해림은 케이의 날 선 대꾸에도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약속은 몇 시에 가능해?”

해림이 바로 주제를 돌렸다. 케이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흥미가 식은 듯 손톱 아래를 긁으며 대꾸했다.

“두 시. 걔가 그때쯤 올 거야.”

큰 이변이 없는 한 사장실에서 나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해림이 약속 장소를 물으려는데, 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입장료가 좀 비싸. 가드한테 대 줄 거 아니면 넉넉하게 챙겨 와.”

케이가 다시 한번 하품을 하더니 장소만 대충 던져 주고 나가라는 듯이 문을 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말은 섞었다지만,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시선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필요하면 납죽 엎드려 하나라도 얻어 내야 살기 편할 텐데. 그런 넉살은 없어 해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방을 나왔다. 불행하게도 출근 시간이 코앞이었다.

주신도가 평소에 일찍 끝내 주기는 하나, 혹시 다른 꼬투리를 잡고 붙들고 앉아 있을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아 약간 불안했다. 해림이 초조해서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고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해림 이전에 손님이 와 있었다.

소파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이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에 아래로 처진 눈이 어딘지 모르게 케이와 닮은꼴이었다.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 잘생긴 얼굴이나, 케이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지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가 봐.”

해림이 들어가자 주신도가 책상 위에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다른 때라면 손님이 오래오래 머물길 바랐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끝마치고 나가는 게 목표였다.

“아, 형님. 오랜만에 왔는데 동생한테 술 한잔 안 주고 보냅니까. 서운하게.”

“저기서 아무거나 골라가. 징그럽게 징징거리지 말고.”

“내가 그쪽 애들 상대하느라 좆 빠지게 구르고 왔는데 이러기예요. 형님도 알잖아, 걔네들 무식한 거. 나 이번에 형님이 하란 일 하면서 여러 번 뒈질 뻔했어요.”

“내가 너한테 떼어 주는 할당이 얼마인데 그거 하날 못 해. 받아먹는 만큼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주신도가 싸늘하게 굴자 남자가 투덜거리며 장식장 문을 열었다. 안쪽에 있는 술을 골라 손에 쥐더니 해림을 쳐다보고 질 낮게 흐흐거리며 웃었다. 낌새가 좋지 않아 해림이 뒤로 물러났건만, 남자가 대번에 해림의 턱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 봤다. 해림을 훑는 눈빛이 불온하게 번들거렸다. 히야, 하고 아이처럼 감탄도 터트렸다.

“형님. 어디서 이런 예쁜 건 가져왔어요. 나 오늘 이거 가지고 놀면 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파랗게 빛을 품은 날붙이가 쏜 살처럼 홱 하니 날아왔다. 직선으로 해림과 남자 사이를 가로지른 날붙이가 벽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다트처럼 깊이 꽂혀 몸통을 파르르 떨었다. 남자가 해림의 턱에서 재빨리 손을 뗐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날붙이는 벽이 아닌 남자의 손목에 꽂혀 있을 터였다. 형님! 하고 남자가 항의하듯 외쳤다.

“인오야.”

주신도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슬쩍 비틀었다. 눈을 한 번 내리깔았다가 느리게 들어 올리며 남자를 보고 가만히 웃었다.

“적당히.”

남자가 소리를 질러 터질 듯이 일렁이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게 식었다. 남자가 경고라도 먹은 듯이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맞물었다. 약 몇 초의 짧은 정적이 지나고, 남자가 바람 빼듯 싱겁게 웃고는 돌아섰다.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어도 웃음은 웃음 같지 않았다.

“아, 씨발. 더럽고 치사해서 안 먹는다. 형님, 이게 씨발 뭐라고, 이거 하날 못 줘서 타지에서 개고생한 동생을 이렇게 서운케 해요.”

“바깥에 처먹을 거 널렸어. 나가.”

“오랜만에 한국 땅 밟았는데 거참, 서러워서 살 수가 없네. 내가 이거 언젠가 꼭 보상받는다. 꼭 보상받고 말 거라고.”

남자가 끝까지 구시렁거리며 술병을 들고 나갔다. 문이 부서지지 않는 게 용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남자가 나가기 무섭게 주신도가 해림을 돌아봤다. 눈썹 사이에 굵은 주름이 몇 개나 새겨졌다.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주신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도련님, 저런 게 취향이었어?”

“예?”

뜬구름 잡는 소리라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해림이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주신도가 구겨진 미간을 펴지 않은 채 일어났다. 해림이 무심결에 뒤로 물러나자 주신도의 입술 새로 이가 드러났다. 남들보다 큼지막한 송곳니가 당장이라도 해림의 목덜미에 구멍을 뚫을 듯이 예리하다. 목줄 안 한 도사견이 코앞에 있는 듯 식은땀이 다 났다.

물러나다 보니 등 뒤가 벽이었다, 머리 위로 주신도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드리웠다. 손이 다가왔다. 그대로 내려칠 줄 알고 해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열병을 앓았던 그 밤처럼 뜨거운 손아귀가 턱을 잡았다. 좀 전에 남자가 그랬듯이 똑같이 양옆으로 돌렸다.

“도련님은 이런 거 좋아해? 저 새끼가 만지는 걸 왜 가만히 놔둬. ……아니, 가만히 놔둔 건 잘했어. 손님한테는 그렇게 해야지. 그런데 저 새끼는 손님이 아니잖아. 왜, 저걸 손님으로 받고 싶어서 그래?”

횡설수설이었다. 입에서 술 냄새도 안 나는데 취객처럼 뱉는 말이 어지러웠다. 해림은 차분하게 주신도의 말을 뜯어서 생각하다가 맨 마지막 질문에만 답을 했다.

“아니요.”

“뭐가 아니야.”

“손님으로 받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를 손님으로 받는 것도 심적으로 힘겨운데 하물며 남자야. 해림이 남자의 손이 닿았던 턱을 닦듯이 손등으로 문질렀다. 졸지에 주신도의 손이 닿은 곳을 닦는 셈이 됐다.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래. 내가 도련님 교육시켰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좋은 교육 받고서 겨우 저딴 걸 받아서야 쓰나. 좀 더 좋은 손님 받아야지. 매너 좋고, 돈 많은 애로. 도련님을 더 예뻐할 괜찮은 놈으로.”

이러나저러나 몸 팔아 돈 벌어 오란 소리였다. 해림이 팔을 비틀어 주신도의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빼냈다. 빨리 일이나 처리하고 가고 싶건만, 오늘따라 주신도가 영 협조를 안 해 줬다. 평소라면 이리 오라며 소파에 앉히거나 제 발아래 무릎 꿇리기 바빴을 텐데. 해림이 의아하게 쳐다봐도 주신도는 딴 곳만 응시하며 딴청이었다.

“사장님?”

무작정 무릎을 꿇고 주신도의 바지춤을 풀어헤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해림이 조심스레 주신도를 불렀다. 주신도가 입가를 가리고 생각에 잠겼다가 해림을 돌아봤다.

“도련님. 영어 잘한댔지.”

“조금 하는 정도…….”

“그거면 됐어. 오늘은 들어가 봐. 딴 데로 새지 말고. 누가 사탕 준다고 해도 쫓아가지 말고, 돈 준다고 해도 덥석 물지 말고. 그 나이 먹고도 어디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서는. 비 오는 날 길바닥을 뛰어다니질 않나.”

마치 오늘 새벽에 해림이 어디로 갈지 아는 사람처럼 주신도가 떠들었다. 해림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두드리기까지 했다. 일 없이 바로 보내 주는 거야 환영할진대, 뭔가에 사로잡힌 듯이 멍한 주신도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 있어요?”

그 탓일까. 쓸데없는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 질문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데. 내뱉고는 곧장 후회했다.

주신도의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웃는다고 하기엔 눈가가 찌푸려져 있고, 찌푸렸다고 하기엔 입술 끝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눈동자의 붉은 색채도 다른 때보다 짙다. 머리 위에 형광등이 주신도의 눈 속에 들어간 듯이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왜. 궁금해?”

“아뇨.”

“물어봤잖아.”

“그냥요.”

“정말, 도련님은…….”

주신도가 예고도 없이 불쑥 팔을 들어 해림이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주신도도 같이 움칫했다가 곧 엄지로 해림의 입술 끝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엄지가 닿은 부분이 따끔거렸다. 아까 밥 먹을 때도 쓰라리더니. 씻을 때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아마 상처가 난 성싶다.

“여기가 엉망이라. 물론 우리 예쁜 도련님 교육시키려면 마음 좀 강하게 먹고 그래야 하는데, 사람이 양심이 있지. 이런 입에다 어떻게 박아. 자지에 피 묻는 것도 달갑지 않고.”

할 때마다 목구멍 깊숙이 쑤셔 박아 숨통을 막아 놓고 그 가슴에도 양심이 존재한단다. 하마터면 대놓고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도련님도 참, 그렇게 많이 시켰는데도 매번 입이 찢어지면 어떡해. 적시고 하면 덜 다칠 거 아니야. 요령껏 해야지.”

그간 거의 매일 구음을 하다시피 했더니 입술 끝의 상처가 나을 날이 없었다. 제 게 무식하게 큰 데다 우악스럽게 굴어서 미안하다며 사과는 안 하고, 되레 익숙해지지 않는다며 주신도가 해림을 나무랐다.

“연고 바르고 가.”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을 잡고 질질 끌어당겼다. 해림이 못 이기는 척 끌려갔다. 주신도가 책상에 구급상자를 올려놓고 연고를 꺼내고, 흰 연고를 검지 위에 짜고, 그걸 제 입술 옆에 문지르는 과정을 지켜봤다.

기묘한 자상함. 비정상 속의 친절. 혹은 병 주고 약 주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작은 행위들이, 이상한 세상에서는 참으로 크게 다가왔다.

저가 한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 왜 주신도가 하게 내버려 둔 걸까. 어차피 흠집 난 물건 위에 페인트를 칠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걸 알면서.

연고가 입술 끝에서 입술 안으로 넘어왔다. 주신도가 하도 문질러 투명하게 변한 연고의 맛이 혀에 닿았다. 입맛이 씁쓸한 건 그 탓이었다.

인사를 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별일 없이 지나갔으니 기뻐야 맞는 일이었다. 해림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바라며 번쩍거리는 문을 쳐다봤다. 엘리베이터가 거울처럼 해림의 얼굴을 비추었다.

“…….”

해림이 무심결에 주신도의 손가락이 문지른 입술 끝을 더듬었다. 매끄러운 연고가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사장실에서 나왔는데도 입맛은 여전히 연고 맛이 맴도는 듯 씁쓰름했다.

텁텁한 입맛을 녹일 젤리나 사탕이 고팠다. 구음이 끝나면 보상처럼 주어지고는 했던.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내는 알림음에 해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또 미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보상이라니. 다섯 살은 훌쩍 넘긴 이 나이에 젤리나 사탕 따위가 아쉬워 다행을 다행이라 여기지 않다니.

보상이라고 여긴 점도 어이없고, 그깟 걸 원하는 점도 무섭다. 정해림을 구성하는 이성과 무감이 안개처럼 흐려진 듯하다. 이 세상에 속해 있는 한 미친 생각은 별 하나를 다 부술 커다란 나무처럼 깊게 뿌리를 내리고 그 무성한 가지를 펼치리라. 폭력보다, 빚보다, 주신도가 점점 다르게 보이는 자신이 해림은 제일 두려웠다.

“그럴 리 없어.”

해림이 물기 없는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손등으로 연고가 묻은 곳을 벅벅 지우고 심호흡을 반복해도 쿵쾅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질 않았다. 주신도의 손끝이 아직도 문지르고 있는 양, 입술도 입술 끝도 타들어 갈 듯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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