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8/21)

3.

창고로 향하는 길인데도 주신도의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손을 주머니에 꽂고, 보폭은 넓되 고양잇과 짐승처럼 소리 없이 사뿐사뿐 걸었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나비 날개처럼 나풀나풀 흔들렸다. 목적지가 다른 곳이었다면 애인과 데이트하러 가는 길이라고 착각할 법한 걸음걸이였다.

“뭘 봐.”

고개는 정면을 향해 있으면서도 주신도가 용케 시선을 눈치채고 한 마디 쏘았다. 영수가 주신도의 옆얼굴을 흘끔거리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무뚝뚝하게 대꾸했지만 눈길은 자꾸만 주신도에게 꽂혔다. 평소와 똑같이 입꼬리만 벙긋하니 올린 표정이었는데, 그래도 긴 세월 함께 했다고 영수는 주신도의 얼굴에 미묘하게 일렁이는 봄바람을 알아챘다.

모르는 이들이야 주신도가 수다스럽고 순간의 감정을 못 이겨 번번이 일을 그르친다고, 경거망동해 그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주신도를 눈곱만큼도 모르는 이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영수가 볼 때 주신도만큼 감정을 잘 추스르는 이가 세상에 없었다.

속으로는 시뻘건 불처럼 화를 내도 상대 앞에서 히죽거리며 웃을 수 있는 이가 주신도였다. 분노하는 모습도 연출이고, 웃는 얼굴도 가면일 경우가 많았다.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오랜 세월 오른팔로 지낸 영수도 주신도가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짐작이 불가했다.

심해처럼 컴컴해 속과 감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주신도가, 요 근래에 사부작사부작 감정을 표출할 때가 있었다. 한 명과 얽히면 그랬다. 영수는 주신도의 뒤를 따라가며 저번에 장례식장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납치해 온 남자를 떠올렸다. 주신도는 그 남자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남자는 하얗고 잘생겼다. 올곧은 상이었다. 하나 영수가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물 같다 느껴졌다. 손을 대도 잡히지 않고 유령처럼 통과할 듯이 색이 옅었다. 존재감이 약한 건 또 아닌데, 보면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이 무심했다.

보통 이곳에 끌려오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울고 불거나 우울해하기 마련인데, 도련님―호칭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영수는 상사의 의견을 존중했다―은 그런 기미를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손님을 못 받아도 그러려니, 주신도에게 뺨을 후려 맞아도 그러려니, 도망치다 잡혀도 그러려니, 속이 답답하면 담배를 피우거나 운동만 주야장천 했다. 살려 달라는 애원은 목숨이 위태로울 때나 겨우 밖으로 꺼내는 성격인 성싶었다.

그런 도련님을 주신도는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얼굴이든 몸매든 목소리든 도련님이 비싸게 팔 물건 급인 건 영수도 알았지만, 주신도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띌 만큼 도련님을 특별 취급했다. 도련님이 가게에 있는 누구보다 용모가 뛰어나고 매력이 넘쳐서는 아니었다. 영수의 눈에는 도련님이나 다른 패거리들이나 비슷한 급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거의 처음부터였다. 공장에서 기절한 애들을 깨울 때 주신도는 발로 차거나 뺨을 때렸다. 그것도 귀찮다며 공구로 대가리를 후려 팰 때도 있었다. 어떻게 패든 빚 갚기 전에 죽지만 않으면 된다던 인간이, 도련님은 납치해 묶어 놨을지언정 드럼통을 렌치로 패며 소리로 깨웠다.

그때부터 이상했다.

반항하는 놈은 패든 지하에서 굴리든 협박을 하든 기를 팍 꺾어 놓는 양반이, 도련님은 손님 앞에서 미친 노래를 불러 재껴도 경고만 하고 내보냈다. 그뿐이랴, 실례를 저질러 얻어맞는 걸 보고는 일하다가 말고 갑자기 손님방으로 쳐들어갔다. 잘 달래서 보내나 싶었더니, 무슨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그 자리에서 목을 잘라 죽이려 들더라.

정말 죽이지는 않았겠으나 기세가 그랬다. 회원권 뺏고 접대부들을 죄다 지하로 보낸 데서 일단락 지을 줄 알았더니만 주신도는 보란 듯이 도련님만 쏙 빼 사장실에 가뒀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수는 정확히 몰랐다. 다만 다음 날 주신도가 영수를 불러.

「어제 지하에 보낸 둘, 오늘 꺼내 와.」

「이틀 아니었습니까.」

「뭘 이틀씩이나 돌려. 하루면 충분히 반성했을 거니까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놔.」

하고 명령했다. 주신도가 변덕이 아예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은 한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애지중지. 주신도가 도련님을 대하는 태도였다. 평범한 이들의 기준에서야 어긋나나 이 바닥 기준에서 주신도는 도련님을 불면 꺼질라, 쥐면 깨질라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처럼 다루고 있었다.

원래도 자기 물건을 끔찍이도 아끼는 이였지만 인간에게도 해당 사항이 생길 줄은 몰랐다. 도련님, 도련님 부르면서 그답지 않게 야살을 떨어 댈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느덧 공장이었다. 누구 묻을 일은 아니라 온 사람은 주신도와 영수 단둘이었다. 영수가 앞장서 공장 문을 열자 오물 냄새가 훅하고 끼쳤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었다. 지린내가 날 만도 했다.

기둥에 밧줄로 둘둘 묶인 이들이 영수를 보고 기겁했다. 종일 굶어 기운이 하나도 없을 텐데 발바닥으로 바닥을 긁는 몸부림은 나름 거칠었다. 화등잔만 하게 뜬 눈에 공포가 어렸다.

총 셋이었다. 약에 취한 도련님을 먹으려다 실패한 놈들이었다. 거의 성공이었지. 주신도가 1분만 늦었더라도 도련님은 저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을 터다.

원래도 질이 낮은 이들이었다. 거기서 노는 인간들 중에 윤리관이 멀쩡한 인간이 어디 있겠냐마는, 잡힌 셋은 특히나 악질이었다. 몰래 물뽕을 들여와 일반 손님이나 종업원에게도 손댄 적이 여러 번인 데다 영상을 찍어 돈을 받고 팔았다. 돈을 물 쓰듯이 쓰는 호구라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건만.

주신도가 휘유,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멀찍이 섰다. 한 놈이 겁을 상실하고 우리가 누군지 아냐고 쥐뿔도 모르는 소리는 지껄였다. 모르기는. 이곳에 들락거리는 이들 중 주신도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돈의 팔촌은 물론 집안의 숟가락 개수가 몇 개인지, 드나드는 쥐새끼들은 모두 몇 마리인지, 과장을 보태 아침 몇 시에 일어나 저녁 몇 시에 무슨 브랜드의 베개에 머리를 괴고 자는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반성하기엔 시간이 좀 짧지?”

“씨발, 내가 누군지 알고…….”

“본처 자식도 아닌데 뭐 신경 써야 합니까. 돈 더 내고 정당하게 놀지 그랬어요. 편법 써서 예쁜 거 싸게 먹으려고 하면 어떡해. 그러니 내가 화가 안 나.”

“저희 아무 잘못 없어요. 케이, 그래, 케이가 좋은 거 있다고 소개시켜 줘서 그랬어요. 보내 주세요.”

그나마 눈치 빠른 이가 부들부들 떨며 꼬리를 말았다. 안타까웠다. 주신도의 저울이 생과 사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영수는 대충 짐작이 갔다. 저쪽이 운이 지지리 안 좋았다. 케이가 중간 포주 역을 자처하며 가게에 있는 애들을 공급하던 거야 암묵적으로 눈감아 주던 일인데, 이번 상대가 하필이면 도련님이었다.

“그래도 우리 고객님들이 저희 가게를 예뻐해 주시고 무궁한 발전을 위해 투자한 공로를 인정해, 가는 길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에이, 손 안 댄다니까요. 안 패. 걱정 마.”

드디어 풀어 주는 줄 알고 묶여 있는 이들의 표정이 흐물흐물 풀렸다. 한 명을 욕을 했고 다른 둘을 훌쩍거리며 울었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목적지를 묻지 않은 게 그들의 패착이었다.

“다들 작대기 해 본 적 있으시죠. 저번에 보니까 와서 한두 번은 꼭 하드만.”

지하에서 노는 인간들 중 필로폰 투약을 안 해 본 이가 드물었다. 굳이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뒷짐 지고 선 영수만 속뜻을 알고 속으로 한숨지었다. 주신도가 손수 할 리는 없고. 중독자임을 감안해 치사량이 어느 정도인가 곰곰이 계산했다.

“그, 그건 왜.”

“말했잖아. 가는 길 편하게 모신다고.”

이들의 사인은 약물 과다 투약이었다. 난잡하게 놀아나던 부잣집 도련님들이 역시나 방탕하게 놀아나다가 투약 양을 잘못 가늠해 사망한다. 가게로서는 귀한 고객을 잃어 안타까운 일이나, 본인들의 잘못이니 애도를 표하는 것 외엔 달리 보상할 필요가 없다.

가는 길이 고문 없이 깔끔한 게 복 받은 건 줄 알아야 할 텐데. 잘 아는 표정들이 아니다. 주신도가 영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방 하나 내어 드려. 세팅 잘해 놓고.”

사건 현장 만들기야 이골이 났다. 영수가 끄덕이자 주신도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십니까? 케이는 어떻게 할까요.”

“걔가 왜. 그대로 내버려 둬. 목숨만 붙여 놓고. 걔는 계약 끝나서 죽이면 일 귀찮아져. ……아니다. 그냥 이참에 없앨까.”

“살리는 게 낫습니다. 걔는 바깥에 연락망이 많아서.”

“그래. 그럼 일주일만 더 굴려. 맞다. 너 여권 갱신했냐.”

“아니요, 아직.”

“얼른 해. 인오 왔다.”

영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비열한 인상만 떠올려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젊은 혈기가 들끓던 때는 주먹다짐도 몇 번 했다.

“저 그놈하고 사이 안 좋은 거 아시잖습니까. 떼놈 피 흐르는 것들 믿으면 안 됩니다.”

“같이 밥 먹은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애들처럼 그러냐. 이제 좀 좋아질 때도 되지 않았어.”

“그놈하고 친해질 일 평생 없습니다. 저는 여기 남아서 가게나 돌보겠습니다.”

“뭐, 그때 가서 두고 보고. 혹시 모르니 갱신해 두라고.”

“알겠습니다.”

출장도 중요한 일이지만 자리 비워 뒀다가 무슨 큰일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국내에 남을 적절한 변명거리를 궁리하며 영수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은 주신도가 손을 성의 없게 휘저으며 공장을 빠져나갔다. 남들을 죽이라 명한 사람치고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나비처럼 걸음걸음이 산뜻했다.

* * *

주신도는 지독했다. 단 한 번도 얕본 적 없는데 지금껏 얕본 기분이었다. 살이 오르다가 만 해림의 아랫도리를 손에 쥐고 흔들다가, 그래도 뱉어 내질 못하니 기어이 구멍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아랫도리만 굵직할 것이지 손가락까지 똑같이 굵어서 두 개만 들어가도 아직 덜 나은 구멍이 저릿저릿했다.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안 해도 된다고 해림이 애원해도 주신도는 담금질을 하듯이 손가락 두 개로 속살을 휘저었다. 들쑤시고 검지와 중지 사이를 벌리며 속살을 달구고,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엉덩잇살이 둥글게 솟을 때까지 괴롭혔다. 손가락 끝이 어느 지점을 짓눌러서 해림이 시트를 손에 말아 쥐고는 결국 짙은 신음을 토했다. 덜 굳은 아랫도리에서도 멀건 물이 후드득 튀어나왔다.

허벅지 안쪽은 어떻고. 주신도가 하도 들쑤셔 대서 살이 벌겋게 올라왔다. 깜박 잠들었다가 눈 뜬 지금도 얼얼하고 쓰라렸다. 같이 희롱당한 젖꼭지나 터질 듯이 쥐어졌던 엉덩잇살도 우릿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제대로 안 받은 게 어디냐. 손가락 말고 다른 게 들어왔으면 지금 이렇게 눈을 뜨지도 못했을 터였다. 눈을 떠도 저승이었겠지. 해림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위안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두 번 봤다고 천장이 익숙했다. 아직도 주신도의 집 안이었다. 좀 쉬어서 그런지 몸 상태가 전보다 조금은 나아,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해림이 이불을 둘러매고 방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주신도가 자는 곳인지 베개며 이불에서 은근히 주신도의 향이 배어나 왔다. 해림이 제 몸을 덮은 이불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벌게진 얼굴을 홱 들었다. 드레스룸을 찾는다고 일어나 놓고는, 잘하는 짓이다.

기웃거려서는 도저히 방 구조를 알 수가 없어 직접 문들을 열었다. 여러 번 문을 연 끝에 드레스룸을 발견했다. 비슷한 검은 정장이 옷장에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편한 반소매 티셔츠와 바지는 서랍 안에 있었다. 검은 티와 바지를 꺼내 염치 불고 빌려 입었다. 사이즈가 워낙 커다래 티셔츠 끝자락은 무릎 위에서 달랑달랑 흔들리고 바지는 허리가 커서 골반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바지의 끈을 있는 대로 조여도 줄줄 흘러내렸다.

알몸에 이불 두르고 복도를 걷는 것보다야 낫다. 해림이 얼른 방을 빠져나왔다. 벽 뒤에 숨어 혹시 주신도가 있나 살피고서 거실을 가로질렀다. 여기 있다가 주신도에게 달랑 잡혀 또 침대에 처박히는 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나서 걸음이 빨라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도 초조해서 해림이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제 방이 있는 층에 다다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에 주신도가 무슨 지랄을 펼칠지는 모르나 당장은 좁고 아늑한 제 방이 절실했다.

“어, 형.”

품에 과자를 한 아름 껴안은 시훈이 해림을 불렀다. 이미 한가득 안은 걸로 모자라 자판기에서 다른 버튼을 누르려고 준비 중이었다. 살 뺀다던 포부는 어디 갔는지, 안 보는 사이에 볼살이 더 통통하게 올랐다.

“어디 갔다 오세요? 옷은 그게 뭐고.”

시훈이 해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시선이 닿았다. 해림이 한 손으로 엉거주춤 바지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 머쓱하니 옷깃을 끌어 올렸다. 그래도 옷이 워낙 커 쇄골과 어깨의 반 이상이 눈에 띄었다. 흰 살결 위에 울긋불긋한 순흔이 유독 도드라졌다.

“와, 형, 손님 받았어요? 누군데 그렇게 자근자근 씹어 놨어요. 대박.”

“그냥.”

사장이라고는 말 못 하고 해림이 얼버무렸다. 시훈이 큰 관심은 없는 듯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새 버튼을 눌렀다. 시훈이 허리를 굽혀 주워 든 봉투가 눈에 익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더라고요. 원래 없었는데. 안 그래도 젤리 먹고 싶었는데 잘 됐죠.”

주신도가 언젠가 입에 넣었던 복숭아 젤리였다.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떠오르느니만 못한 기억들이었다. 해림이 얼굴에 열이 오르기 전에 복숭아가 그려진 포장지에서 눈을 뗐다.

“이형이는?”

문득 떠올라 물었다. 귓바퀴에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피어싱을 모두 빼고서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있던 이형이. 시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걔 오늘 반 죽어 있을걸요. 개차반 왔거든요. 이형이 단골.”

얼마나 진상이면 시훈의 입에서도 개차반이란 소리가 나올까. 과연 무사하기는 한 건지 걱정이 들었다. 해림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지자 시훈이 걱정 말라며 한소리 덧붙였다.

“죽이지는 않으니까 괜찮아요. 뭐, 침대에서는 개 같이 구는 거 같지만. 예전에 그 손님 처음 받고는 이형이 왼쪽 귀가 다 찢어졌었어요. 피어싱 한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잡아당기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아직도 좀 무서워하던데. 이름이 뭐라더라, 인……. 뭐였는데.”

피어싱을 다 뺀 이유가. 해림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시훈은 미처 해림의 어두워진 표정을 못 보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한참 후에야 아, 하며 해맑게 웃었다.

“인오. 인오라고 했어요. 혹시 나도 나중에 예약 들어올까 봐 피하려고 외우고 있었어.”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라 해림이 머릿속을 더듬었다. 주신도가 나지막하고 싸늘하게 인오야, 하고 불렀던 기억이 있었다. 제 턱을 잡고 예의 없이 휘둘러댄 인물이었다. 주신도를 형님이라고 부르던.

갑자기 눈앞에 뭔가가 야구공처럼 휙 날아와 해림이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다. 손아귀에 과자 봉투가 쏙 휘감겼다. 복숭아 젤리였다.

“형, 어차피 이형이 보러 갈 거죠. 그거 전해 줘요. 불쌍한 놈……. 케이 빼고 우리 중 걔가 제일 인기 많은데, 잘 보면 좋은 거 같지도 않아요. 형이 가서 위로해 줘요. 내가 가면 왜 왔냐고 지랄할 거니까.”

시훈이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해림이 잡기도 전에 가 보겠노라 손을 젓고는 휘적휘적 복도를 빠져나갔다. 레일 위에서는 그렇게 나무늘보처럼 걷더니만, 복도 코너를 도는 몸짓은 물 만난 거북이보다 빨랐다.

졸지에 심부름이 생겼다. 해림이 손에 든 젤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아귀에 쥐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던 하늘에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지금쯤이면 자거나 슬슬 일어나서 준비하지 않을까.

해림이 제 방으로 들어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형의 방문을 두어 번 두드려도 안에서 별소리가 없다. 혹시 아직도 손님과 다른 방에 있을지도 몰랐다.

시훈이 준 젤리는 문 앞에다 놓고 가자고 해림이 막 허리를 굽혔을 때였다. 안에서 철컥하며 고리를 푸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이형인 줄 알고 조금 환해졌던 해림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낯익은 이였다. 처진 눈에 제법 잘생겼지만 나무에 칭칭 감긴 갈색 뱀처럼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 이가 아랫도리에 수건만 둘둘 만 채로 나왔다. 시큼한 땀 냄새와 정체가 분명한 비릿한 냄새에 해림이 입술을 꾹 맞물었다.

인오가 해림을 보고 벽에 어깨를 기대며 비식 웃었다. 반대로 해림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슬쩍 물러났다. 인오를 올려다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덤덤하게 마주 봤다.

“우리 어디서 봤지?”

“이형이 어디 있습니까.”

인오의 얄따란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솟았다. 눈빛도 날이 섰다. 주먹에도 힘이 들어가 푸른 핏줄이 솟았다. 마디가 뭉툭하니 주먹질에 능한 손이었다.

“아하……. 네가 사장 좀 등에 업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손님 보면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몰라? 이거 좆같네.”

기선 제압이었다. 그깟 인사 하나로 큰 분란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해림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인오의 팔짱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저거 지금 그쪽 볼 상황이 아닌데. 왜.”

심히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귀를 다 찢어 놨다는 소리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해림이 흘끗 눈을 돌리며 방을 살피려 했다. 인오의 상체가 가려 침대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들어와서 같이 놀든가. 놀 거면 들어오고.”

인오의 검지 끝이 턱에 닿았다. 턱선을 타고 올라와 뺨을 쓰다듬는다. 투박하게 생긴 독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얼굴을 타고 오르듯 소름이 끼쳤다.

“괜찮습니다.”

해림이 고개를 틀어 인오의 손가락을 피했다. 인오가 어정쩡하게 허공에 손을 들고 있다가 내렸다. 입가가 조롱하듯 비틀렸다.

“뭐가 그렇게 도도해. 어차피 돈 받고 몸 파는 새끼들이.”

인오의 목소리 뒤로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다. 해림이 인오의 옆구리 사이로 방안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잘 보이지는 않았다. 간신히 침대 끝에서 하얀 발만 발견했다.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렇게 거만 떨다가 형님 죽으면 너도 같이 묻힌다. 순장 몰라? 조심해야지. 줄 잘 서는 게 세상의 지혜야. 잘 생각해.”

“―사실 사장님이.”

해림이 급하게 숨을 삼켰다. 침을 삼키고 침착하게 인오의 눈을 마주 봤다.

“아까 사장님이 부르셨습니다. 사장실로 오라고요. 아직 이형이 방에 있을 거라고, 가 보라고 했습니다.”

“이 새끼 봐라. 문 열자마자 저 새끼만 죽으라고 찾았으면서 그걸 믿으라고.”

“이형이 걱정돼서 전달이 늦었습니다. 그쪽 애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하셨어요. 못 믿겠으면 전화해 보세요.”

그날 들었던 아무 말이나 덧붙여 이유를 만들었다. 일단 인오를 방에서 내보내고 이형의 상태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후일은 후에 가서 수습하리라. 주신도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나, 눈앞에 이형이 신경 쓰여 뒷전으로 미뤘다.

인오가 가만히 해림의 눈을 들여다봤다. 거짓인지 진실일지 캐낼 것처럼. 해림이 담담하게 눈길을 받아쳤다.

“…….”

인오가 몸을 돌리며 말 없는 대치가 끝났다. 해림이 보든 말든 문을 연 채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셔츠를 대충 걸치고서는 해림의 어깨를 턱 소리 나게 밀쳤다.

“사실이어야 할 거야. 목 잘리고 싶지 않으면.”

죽일 거란 협박을 여기 와서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설령 나중에 한 대 얻어맞든, 정말 죽이려고 달려들든 그때 가서 두고 볼 일이었다.

인오가 이를 뿌득 갈며 방에서 나왔다.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 해림이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이형아.”

침대로 달려갔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나신이 안쓰러울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공을 향해 뜬 눈이 초점이 없이 멍했다. 동공이 구슬처럼 커다랬고 헤벌어진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렀다. 몸을 파드득 떨다가 입가에서 멀건 침을 흘리기도 했다.

해림이 이형의 팔꿈치 안쪽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주삿바늘 자국은 없었다. 대신 테이블에 흰 가루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하에서 맡아 본 꽃향기가 방 안에서 흐릿하게나마 풍겼다.

해림이 이형을 이불로 덮고 창문부터 열었다. 바람이 안으로 훅 밀려 들어오며 커튼이 나부꼈다. 병원에 데려가고 싶건만 그건 불가능하고. 해림이 전화기부터 들었다. 실장의 번호를 누르자 바로 연결되었다.

“이형이가 이상합니다. 약을 한 거 같아요.”

―……곧 갈게요. 애 깨어 있어요?

“아뇨.”

―기다려요.

전화를 끊고 해림이 침대 옆에 앉았다. 이불에 쌓인 이형은 정말 죽은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코 아래 검지를 대고 간질이는 날숨을 느낀 후에야 안도했다. 아직은 죽지 않았다. 아직은.

“미안.”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올 걸 그랬지. 피어싱을 다 뺐다고 했을 때 어떤 손님이냐고, 피할 방법은 없는지 같이 궁리할 걸 그랬지. 해림이 이불 속에 손을 넣어 이형의 손을 쥐었다. 손도 차가웠다. 그 손을 두 손으로 쥐고 해림이 기도하듯 이마에 갖다 댔다.

“미안해.”

@@냥냥웅@@공금 갠소 

* * *

인오가 언제 올지 몰라 불안했는데, 다행히 실장이 먼저 왔다. 이형의 눈꺼풀을 들어 상태를 확인하고, 테이블에 널브러진 가루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작대기는 안 놨네.”

“작대기요?”

“뽕 녹인 거요. 보통 주사로 놓는데 착하게 다른 것만 했어요. 뽕 맞으면 중독이 심해서 많이 곤란하거든. 이 정도면…… 한동안 머리는 아파도 죽진 않을 거예요. 쉬면 나을 거야.”

실장이 무심하게 테이블에 흩어진 가루를 모아 휴지에 싸맸다. 목숨에 지장이 없다니 한시름 덜기는 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편치가 않다. 하마터면 죽지 않았을지, 쓸데없는 노파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노는 일은 종종 있어요. 정하 씨도 매번 놀라지 말아요. 이런 거 모르고 그 손님 받은 거 아니니까.”

“실장님은 알았습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이형이를 괴롭힐 거라고.”

“남 돈 버는 일이 그럼 쉽겠어요, 그럼. 좋은 손님만 있지 않은 건 정하 씨도 알잖아.”

“그래도.”

“그 손님 정하 씨가 받을 거 아니면 오지랖 좀 그만 피워요.”

실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시선을 돌리며 후우, 하고 묵직한 한숨도 쉰다. 해림도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오지랖. 실장의 말이 맞았다.

“여긴 됐으니까 정하 씨는 사장한테나 가 봐요. 출근 시간 됐잖아. 정하 씨 안 오면 사장이 나한테 지랄하니까 빨리 가요.”

실장이 해림의 등을 떠다밀었다. 숲은 어느새 어둑어둑 물들었다. 시곗바늘도 휙휙 돌아가 출근 시간에 가까웠다. 멍하니 눈을 뜨고 있던 이형도 실장이 오고 나서는 깊게 잠이 들었다.

해림이 이불을 끌어 올려 이형을 덮어 주고 다독였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바닥에 내팽개친 젤리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발걸음이 무거워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실장 말대로 이 이상의 걱정은 오지랖이었다.

* * *

“도련님, 깜찍한 짓을 했더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주신도가 한 소리 했다. 해림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시선은 줄곧 서류에만 박혀 있었다. 골머리가 썩는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주신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으으, 하며 긴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다음에야 해림을 봤다.

“갑자기 인오가 찾아와서 깜짝 놀랐거든. 도련님이 그랬다며.”

남자를 어떻게든 이형의 방에서 내보내려고 주신도를 팔았다. 각오는 했다. 주신도 성격에 어디서 감히 멋대로 저를 핑계 삼느냐고 길길이 날뛰거나,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며 저를 괴롭히겠지. 해림이 앞으로 겪을 오만가지 고생을 떠올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이형이가 위험해 보여서요. 그 사람이 약을 썼어요.”

“들어 보니까 죽을 정도도 아니고, 다치지도 않았던데. 즐겁게 놀라고 약 좀 쓴 정도야. 살았으면 됐지. 걔를 우리 도련님이 왜 그렇게 신경 써.”

문틈으로 얼핏 보였던 창백한 발, 파랗게 질린 피부가 영안실에서 봤던 부친의 주검을 떠올리게 했다. 혹시나 정말 죽지는 않았는지 심장이 철렁했다. 어쩌다가 이형에게 이리 많은 정을 주었는지. 해림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정이라는 게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 언제 얼마큼 갔는지 해림은 짐작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이형이 신경 쓰였나 파고드느라 대답이 느렸다. 해림이 머뭇거리자 눈가를 꾹꾹 누르던 주신도가 대번에 송곳니를 드러냈다.

“뭐야. 나 모르는 사이에 배라도 맞췄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고가 왜 그리 튀는지 이해할 수가 없건만 주신도의 머릿속에는 이미 해림과 이형이 배가 맞아 탈출을 계획하고 있다는 시나리오가 돌아갔는지 표정이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해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근데 왜 신경 써? 뒈지든 살든 사장인 내가 신경 써야지, 도련님이 왜?”

“친한 동생이어서요.”

“이야,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사교성이 훌륭한지 몰랐네. 씨발, 그 사교성은 손님들한테나 발휘하지 여기 애들한테 발휘해서 얻다 쓰게.”

“방이 가깝다 보니 오며 가며 친해졌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자주 마주쳐서 친해졌다고, 사이를 곡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림이 덧붙였다. 주신도가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가 기가 찬 듯이 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는 당연히 해림에게 던졌다. 해림이 허공에서 라이터를 받아들고 덤덤하게 주신도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아까 인오가 재밌는 말을 하더라. 이형이 하고 놀고 있는데 도련님이 와서 사장이 찾는다고 했다고. 그쪽 애들 이야기를 할 거라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림이 속내가 드러날까 봐 무서운 듯이 손을 뒤로 돌리며 뒷짐을 졌다. 담배를 입술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옮기던 주신도가 은근슬쩍 팔을 뻗어 해림의 허리를 감쌌다. 해림이 피하려 하자 그놈의 씁, 소리를 내고 기어이 해림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이 나이 먹고 누구 허벅지에 앉을 줄이야. 해림이 발끝에 힘을 주며 엉거주춤 버텼다. 주신도가 허리에 팔을 휘감고서 그대로 끌어 내렸다. 엉덩이에 딱딱한 허벅지가 닿았다. 근육이 단단한 게 꼭 뜨뜻한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댄 듯하다.

“그냥 일어나 있으면…….”

“근데 말이야, 난 걔를 부른 적이 없거든. 도련님한테 그쪽 애들에 관해서 언급한 적도 없고. 결론이 나오지. 우리 발칙한 도련님이 감히 날 판 거야. 친한 친구 구하겠다고.”

주신도가 유난히 ‘친구’를 강조했다. 해림이 입을 다물었다. 벌 받는 학생처럼 허벅지 위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주신도가 워낙 가까이 붙어 있어, 그 얼굴 보기 부담스러워 숙인 점도 있었다.

“내가 우리 도련님 도와준다고 바쁜 시간 쪼개서 인오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잔뜩 했어. 아주, 아주 바쁜 시간이었는데.”

저를 허벅지에 앉히고서 떠들 시간은 있고. 속에서 솟구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해림은 주먹 쥔 손가락만 꼬물거리며 입술을 맞물었다.

“사람이 공짜만 바라면 안 돼. 그거 몸에 정말 안 좋다. 해로워. 우리 도련님 공짜만 밝히다가 대머리 되면 어떡해. 뭐, 도련님 아버지 보니까 나이 들어도 머리 벗겨질 일은 없을 텐데,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잖아.”

담뱃재가 해림의 손등 위로 추락할 듯이 길어졌다. 주신도가 마지막 연기를 길게 뱉고는 재떨이 위에 담배 대가리를 짓눌렀다. 두 팔로 해림의 허리를 감싸고 손에 깍지를 꼈다. 해림이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어깨에는 턱도 괴었다.

해림이 어깨를 비틀자 그를 가둔 팔이 살아 있는 넝쿨처럼 폭을 좁혔다. 주신도의 굵직한 팔에 비하면 한 줌 거리처럼 가는 허리였다. 해림이 똬리 속에 갇힌 듯이 옴짝달싹 못 하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주신도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뭘…… 하면 됩니까.”

목소리가 설핏 떨렸다. 침을 꼴깍 삼키며 마른 목을 축였다. 허리에 닿은 팔이 달군 숯처럼 마냥 뜨거웠다. 턱이 닿은 어깨도, 숨결이 훑고 가는 목덜미도.

구음이나 혹은. 약에 취해 정신없었던 밤이 떠올라 해림의 귓불이 서서히 붉게 익었다. 구음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상은 아직 힘들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주신도가 그 이상을 요구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해림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방 옮겨.”

온갖 예측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요구가 영 생뚱맞았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해림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신도의 눈동자가 코앞이었다. 허벅지에 걸터앉은 터라 해림이 내려다봤다. 항상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곤 했건만. 붉은색이 오묘하게 감도는 눈동자와, 새까만 동공이 수축했다가 커지는 짧은 순간이 머릿속에 콱 들어박혔다.

해림이 재빨리 고개를 틀었다. 방의 온도가 땀이 날 만큼 후끈했다. 아직 초가을인데도 히터를 강하게 튼 듯이.

“어디로요?”

“어디겠어. 도련님 머리 안 돌아가?”

짐작은 했으나 설마 거기일까 싶어서 일부러 되물은 것도 모르고 주신도가 해림을 구박했다.

“짐은 오늘 옮겨. 어차피 내 집에 방 많으니까 도련님이 원하는 방 아무거나 골라서 쓰고.”

“꼭 그래야 합니까.”

집이 넓어 잘만 하면 주신도와 하루 종일 마주치지 않고서도 살 수 있다지만. 한 집에서 숨을 쉰다는 생각만으로도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듯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좀 억울해서. 우리 사교성 좋은 도련님이 옆방 친구하고는 그렇게 친해질 동안, 사장인 나하고는 아직도 데면데면한 게 말이나 돼? 나 그래도 우리 도련님 머리 올려 준 첫 서방이잖아. 친해지려면 나하고 친해져야지, 영양가도 쓸모도 없는 그거하고 친해져 봤자 뭐 해.”

서방이란 단어가 매우 거슬렸지만 지적해 봤자 무엇하랴. 하나 가슴을 들썩이게 만드는 한숨은 숨길 길이 없었다. 거절해 봤자 무슨 핑계를 대서든 저를 방으로 끌고 갈 테고.

하긴, 이곳에 들어와 제 의견이 받아들여진 적이 있기는 하든. 해림이 쉽게 포기했다. 부딪쳐도 깨지지 않는 바위라면 굳이 들이받을 필요가 없었다. 주신도는 해림의 침묵이 허락인 줄 용케 알고 더 강요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도련님. 그쪽 애들 이야기는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두 분 대화 듣고요.”

“어디까지 들었는데.”

“그쪽 애들, 거기까지만요.”

“그것만 가지고 핑계를 만들어서 인오를 보냈다고.”

뭐가 그렇게 웃긴지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서 큭큭거렸다. 어깨가 거푸 들썩이며 해림의 허리를 감싼 팔뚝도 가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간지러워 해림이 몸을 비틀면, 자연스레 팔뚝의 사이도 좁아졌다.

“도련님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네. 재밌어.”

남 말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사람으로는 주신도를 따라잡을 이가 없었다. 재밌지는 않았다. 매사 어떤 반응이 튀어나올지 몰라 해림을 불안케 했다.

불안. 해림은 막 떠오른 단어를 곰곰이 곱씹었다. 지금껏 남의 어떤 태도가 절 불안하게 했는지를. 기억력이 나쁜 탓인지, 다른 이들의 행동에 큰 불안을 느낀 적은 딱히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나진이 보였을지도 모르는 이별의 징후조차 해림은 까맣게 몰랐다. 연락이 줄어든 것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쌀쌀맞아진 것도 이별을 선고받은 후에야 아, 그랬구나 깨달았더란다.

“뭘 그렇게 생각해.”

입술에 말랑한 게 닿아 해림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말캉한 감촉이 주신도의 입술인 줄 알고 뒤로 넘어갈 듯이 놀랐다. 다행히 몸짓은 어깨만 흠칫하는 정도만 표출됐다.

“아.”

주신도가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주신도의 입술 모양을 따라 해림의 입술도 벙긋 벌어졌다. 입 속으로 젤리 한 알이 굴러들어 왔다. 저번과 같은 복숭아 맛이었다.

“도련님이 좋아하는 거.”

젤리를 좋아했었나. 가끔 단 게 당길 때가 더러 있긴 했으나, 젤리를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았다. 배를 채울 일 아니면 오히려 입에 잘 안 대는 편이었다.

한데 주신도가 먹여 주는 젤리는 이상하게도 달고 맛있었다. 과일 향이 상큼한 데다 이 사이에서 말캉말캉 눌리는 촉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해림이 작아진 젤리 덩어리를 삼키자 주신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젤리 한 알을 입술 새로 밀어 넣었다.

“잘 먹네.”

남의 허벅지에 다소곳이 앉아 새처럼 얌전하게 젤리를 받아먹는 행위가 해림은 썩 달갑지 않았다. 어색했다. 다 큰 어른이 하기에는, 그것도 주신도와 저가 나눌 행위로는 무척이나 부적절했다.

하나 정작 목줄을 쥔 주신도는 해림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림을 통나무 같은 허벅지에 올려두고 새에게 간식 주듯 젤리를 먹였다. 해림이 오물거릴 때마다 이따금 넋을 잃은 듯이 입술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젤리 한 봉지가 다 비워질 때까지 해림은 주신도의 허벅지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매우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짐은 해림이 손대기도 전에 주신도의 집으로 옮겨졌다. 사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주신도가 뭐하러 가냐며, 짐은 이미 다 옮겨 놨다고 해림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해림의 옷가지들과 몇 안 되는 소지품들은 주신도의 말마따나 현관 앞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주신도의 침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으려 했으나, 손을 쓸 틈도 없이 주신도가 앞서서 해림의 짐을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침실과 욕실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 방이었다.

다른 방으로 가면 안 되느냐 물어도.

「도련님 코 안 골던데? 다른 데 어디. 그냥 거기 있어.」

하며 해림의 소망을 원천 봉쇄했다. 없는 코골이를 쥐어짜면 보내 줄까, 잠시 헛된 희망을 품었다.

주신도의 반협박에 못 이겨 해림의 방은 주신도의 침실 옆으로 정해졌다. 예전보다 넓은 침대와 훌륭한 채광까지, 표면적으로 보면 방은 훨씬 좋았다.

다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좁더라도 예전 방이 마음이 편했다. 주신도가 문 건너 있는 방이라니, 잠이나 제대로 이룰 수 있을는지 모른다.

첫날은 당연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장 문이 열리고 주신도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올 듯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새벽 내내 몸을 뒤척이다가 아침 해가 쨍쨍하게 밝아오는 그때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둘째 날도 잠이 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문을 잠그고 잠자리에 들었더니 어디 집주인 허락도 없이 문을 잠그느냐고 호통치는 주신도가 꿈에 나와 해림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렇게 악몽과 선잠에 시달리며 나흘과 사흘이 지났다. 걱정이 무색하게 주신도는 해림의 방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집에서는 거의 못 봤고 사장실에서도 잠깐 머물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워낙 신출귀몰해서 대체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냐는 물음이 해림의 목울대에서 맴돌기도 했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떼를 쓰고 저를 제집에 데려다 놓았는지. 바깥에서 주워 온 화분 취급하려면 굳이 데려올 필요가 있었을까. 의구심은 솟되 대답해 줄 이가 없으니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집이 텅 비었다. 간간이 백색 소음만 들릴 뿐 조용했다. 안 그래도 넓은 집에 저 혼자니 벌판에 홀로 남겨진 듯이 적적하다. 주신도와 단둘이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정말 그럴까.

질문이 순간 머리를 들었다가 사라졌다. 답을 궁리하기 전에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해림이 머리를 휘휘 저어 괜한 생각을 털어 내고 욕실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고단함을 씻어 버리고 방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놓인 시계가 새벽 다섯 시를 향해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간 긴장의 끈을 못 놓아 잠을 설쳐서 그런지 급격한 피곤이 몰려왔다. 주신도가 저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데 굳이 이 긴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오늘 밤에도 주신도는 오지 않을 터였다. 나름 합당한 결론을 내린 해림이 머리를 대충 말리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뜨거운 물에 녹은 몸이 노곤했다. 잡지에서 봤던 값비싼 수입 매트리스가 물처럼 해림의 몸을 빨아들이고, 보드라운 깃털이 가득한 폭신한 베개가 목과 뒤통수를 포근하게 받쳤다. 가슴까지 올라온 도톰한 이불도 오늘은 기필코 해림을 잠재우겠노라 다짐한 듯이 안락했다.

침구의 총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해림이 누운 지 채 10분도 못 견디고 금세 잠에 빠졌다. 시계의 초침은 방 주인이 잠들든 말든 무심하게도 철컥, 철컥 소리를 내며 잘도 움직였다.

작은 바늘이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숲은 여태 어두웠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는 시간도 늦어졌다. 아직은 달이 하늘을 차지한 때에, 해림의 방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어둠을 틈타 들어온 곰 같은 인영이 발걸음 소리를 줄이고 저벅저벅 침대로 다가왔다. 바닥을 쿵, 쿵 울리는 소리를 낼 법한 덩치임에도 걸음걸음이 나긋나긋하고 고양잇과 짐승처럼 발걸음 소리가 없었다.

해림은 이불에 꽁꽁 싸매져 애기처럼 얼굴만 위로 쏙 내밀고서 웅크리고 있었다. 손끝이 이불 위로 게 집게처럼 올라와 턱에 닿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스미는 어둑하고 희미한 빛이 해림의 볼과 코끝과 손가락 끝을 검정에 가까운 남색으로 물들였다.

인영은 멀거니 서서 고개를 삐딱하니 틀고 해림을 내려다봤다. 가만히, 석상처럼 우뚝 서서 보다가 조심스레 팔을 내렸다. 새벽빛이 닿은 손끝이 해림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이마에 닿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었다가, 혹시나 깰라 손끝이 바로 떨어져 나갔다.

인영은 그 후에도 오랜 시간 서 있었다. 이따금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면서. 해림을 깨울 듯이 손을 뻗었다가도, 입술 앞에서 멈칫하며 팔을 뒤로 뺐다.

바깥을 물들인 어둠에 군청색이 끼어들고, 해림이 뒤척일 때가 되어서야 인영이 등을 돌렸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는 해림을 잠에서 건져 올릴 만큼 크지 않았다. 인영도 조용히 방에서 사라졌다. 새벽빛이 찾아온 방에 고요와 해림만이 남았다.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놀랍게도 한연동은 월요일이 전체 휴무였다. 그간 사장실에 불려 가느라 쉬는 날이 있는지조차 몰라 놓친 휴일이 얼마던가. 꽤나 억울했다.

주신도는 나름 사장이라고 월요일에도 출근을 했더란다. 출근할 때마다 해림을 열쇠고리처럼 달고 갔는데 오늘은 깨우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하여 웬일인가, 드디어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해 주는가 눈곱만큼 기특해하며 거실로 나왔다. 주신도가 없다는 전제하에 산뜻하게 나왔건만.

“일어났어? 안 그래도 깨울까 했는데. 도련님, 이리 와. 영화 보자.”

하고 주신도가 짐짓 해맑게 해림을 불렀다. 열 명도 거뜬히 앉을 넓은 소파를 차지하고서. 거실의 유리창은 블라인드가 어둡게 가렸고 테이블에는 고소한 기름내를 폴폴 풍기는 팝콘 한 그릇과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화면도 한눈에 다 안 들어올 만큼 커다래 작은 영화관이 따로 없었다.

비 오던 그 밤 영화관의 악몽이 떠올라 해림이 머뭇거렸다. 주신도가 친절하게 다가와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한 뼘 남짓한 거리에 주신도가 앉았다. 해림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한 뼘이 한 자(尺)가 되도록 멀어졌다. 주신도는 어느 순간 멀어진 해림을 흘긋 보고는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요새 세상이 좋아져서. 영화관까지 굳이 안 가도 집에서도 볼 수 있더라고. 저번에 우리 이거 다 못 봤잖아.”

대체 무슨 속내로 저에게 이 영화를 다시 보여 주는 건지. 해림이 주신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해림의 시선이 꽂히거나 말거나, 주신도는 팝콘만 냠냠 맛있게도 주워 먹으며 TV를 바라봤다. 쿵, 쾅 하고 액션 영화 특유의 굉음이 질 좋은 스피커를 두드리며 시끄럽게 터져 나왔다.

“내가 언제 잠들었더라. 앞부분은 봤는데. 도련님, 기억나?”

“아뇨. 저도 잘.”

“티켓값 아깝게 중간에 뛰쳐나갔으니 그렇지. 그게 무슨 낭비야. 오늘은 튀지 말고 끝까지 봐. 아, 해.”

주신도가 팝콘을 한 움큼 쥐어다가 해림의 입 안에 욱여넣었다. 같이 사이좋게 앉아서 영화 볼 사이는 아닌데. 해림이 뭐라 하든 주신도는 이미 영화 삼매경이었다. 다시 방 안에 들어가 쉬는 게 나을까 싶다가, 이 정도 소음이면 제 방도 조용하지는 않겠다 싶어서 그냥 주신도 옆에 앉았다.

내심 영화의 결말이 궁금하기도 했다. 입에 반 억지로 넣은 팝콘도 버터 향이 진하니 맛이 좋았다. 결코 주신도의 청을 들어주고 싶어서 소파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고, 해림이 스스로에게 강조했다.

“이 감독이 전작은 쫄딱 망했거든. 이번 거는 평이 좋더라고.”

감독이 이를 갈고 만들었는지 영화 초반부부터 쉴 새 없이 몰아치기는 했다. 다시 봐도 흥미진진했다. 주인공이 어쩌다가 저렇게 돌아 버린 건지 계속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신도가 옆에 있다는 불편함도 어느새 잊고 해림이 영화에 몰입했다. 가끔 주신도가 입에 팝콘을 넣어 줄 때 몰입에서 헤어 나오긴 했지만, 젤리를 먹여 줬을 때처럼 오물거리며 도로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의 중반부쯤 이르렀을 때 허벅지에 묵직한 무게가 닿았다. 영화관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했다. 그때는 어깨였고 지금은 허벅지였다. 해림이 고개를 숙이자, 허벅지에 당당하게 뒤통수를 괸 주신도가 팔짱을 끼며 올려다봤다.

“뭐. 영화 안 봐?”

“무거워요.”

“나 머리 작은 편인데. 우리 도련님 허벅지가 그렇게 약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얄밉게 제 말만 다다다 쏟고서 주신도가 고개를 돌렸다. 해림이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자 무릎에 손이 올라왔다. 두툼한 손아귀였다. 뜨끈한 체온이 옷깃 너머로 스몄다. 주신도의 눈길은 줄곧 영화에 꽂혀 있었으나, 손아귀는 해림이 움직이면 관절과 뼈를 고대로 부술 듯이 무릎에 철썩 붙어 있었다.

해림이 엉거주춤 뗀 엉덩이를 도로 소파에 붙였다. 무릎에서 손이 떨어져 나갔다. 손바닥이 칭찬하듯 해림의 허벅지를 도닥도닥 두드렸다. 해림이 한숨을 숨기며 시선을 옮겼다.

감독은 미래에서 끌고 온 제작비까지 이번 영화에 퍼부었는지 화려한 엠블럼과 매끈한 몸체를 가진 차들이 화염에 휩싸여 터지고 강가에 처박히는 장면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주인공은 적들을 향해 총알을 난사하는 소리로 가득한 배경음은 해림이 도입부를 듣는 순간 꺼 버리는 종류였다. 재미와 별개로 정말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는 시끄러운 영화였다.

중반부를 넘어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건만, 해림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슬슬 허벅지가 저렸다. 작은 고양이가 앉아도 시간이 흐르면 저린 게 허벅지인데, 거기에 주신도의 머리가 떡하니 올라가 있으니 피가 통할 리가. 허벅지의 핏줄과 근육이 주신도의 머리 좀 어떻게 치워 보라고 아우성을 쳐 댔다.

해림이 주신도를 내려다봤다. 눈이 굳게 감겨 있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볼 것처럼 굴더니만 결국. 저런 소음 속에서도 잠을 청하다니 그 신경이 쇠심줄인 건 인정했다. 해림이 주신도의 눈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깊이 잠들었는지 깨지 않았다.

손을 떼자 화면에서 터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빛이 주신도의 얼굴이 위로 쏟아졌다. 파란 빛깔과 붉은 빛깔, 주홍빛과 흰빛과 오후의 햇살 같은 미색이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머리를 끌어 내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편안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 매끄러워 보이는 뺨과 빛이 드리운 눈꺼풀, 속눈썹, 콧대와 코끝, 두툼한 입술과 약간은 아래로 처진 입꼬리. 누가 달려들어도 그대로 당할 듯이 무방비했다.

실실 웃어도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갈 성싶던 주신도가, 아무리 잠들었대도 제 허벅지 위에서 저리 풀린 표정을 보여 주다니.

“…….”

손가락이 허공에서 오므라들었다. 사방이 시끄러운데도 머릿속에 순간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쿵, 쿵 거리는 소리가 영화가 터트리는 폭탄인지 아니면 제 가슴에서 뛰는 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제 허벅지를 괴고 자는 이가 누구인지 빤히 알면서. 저에게 무슨 짓을 벌였고, 무엇을 총괄하는지, 겉꺼풀 속에 얼마나 파탄 난 인격이 들어 있는지 눈물겹도록 당해 봐서 알면서.

경험과 이성이 외치는 호소가 영화의 굉음에 묻혔다. 해림의 귀에는 심장 뛰는 소리만 요란했다. 느리고 정확한 고동이 손목에도, 목덜미와 허벅지 안쪽과 주신도의 머리가 누르는 허벅지 위에도 물줄기처럼 뻗어나갔다.

차마 주신도의 머리를 소파 위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해림이 허공에 어정쩡히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어차피 영화도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허벅지에 뭣 좀 올려놓고 조금 더 버틴다 한들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영화에 시선을 옮길 찰나, 주신도가 몸을 뒤틀며 해림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었다. 해림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혹시 움칫해서 주신도가 깼을까 봐 해림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주신도는 여전히 눈을 꾹 감은 채 숨소리까지 새근새근 내쉬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후, 하고 해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후반부에 들어서도 영화는 여전히 치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있었다. 하나 오색찬란한 화려한 액션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해림은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