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9/21)

4.

며칠만 지나면 이곳에 끌려온 지도 어언 6년째였다. 화려하게 보냈어야 할 이팔청춘을 한연동에 퍼부은 지가 벌써 6년이었다. 세월이 참, 돌아보면 쏜살같다.

유리가 흘러간 세월을 그리듯 심드렁하게 복도 끝 창밖을 응시하다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6주년을 맞이하든 어쨌든, 오늘은 주간 보고서를 제출하는 날이었다.

주간 보고서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는 했으나, 사실 별거 없었다. 한 주 동안 일어난 굵직한 사건 사고나 매출 추이 등을 표로 정리한 서류였다. 매출이 떨어지면 여느 사장이 그렇듯 주신도도 지랄을 떨어 대지만 다행히 유리가 실장 자리에 오른 후로는 꾸준히 상승세였다. 세상은 넓고 변태는 넘쳐 나는 데다가 한연동에서는 변태들을 위한 잔치가 매일이 모자라다 열렸으니, 갈퀴로 낙엽을 긁듯 돈을 긁어모으는 건 당연지사였다.

“사장님, 유리입니다.”

노크를 하면 보통 바로 들어와, 하고 말하는 인간인데 오늘따라 반응이 굼떴다. 심지어 한참 후에는 기다리라는 말도 했다. 유리가 손목시계를 흘긋 보고 문밖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보고서를 문 밑으로 휙 던지고 제 갈 길 가고 싶었다.

다음에 다시 올까요, 하는 욕 섞인 질문이 혀끝까지 올라왔을 무렵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유리가 실례한다며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원수 같은 사장은 책상에 앉아 있고, 다른 한 명은 소파에 있었다. 혹시 거사를 치르느라 저의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은 거라면 욕을 하고 싶은데. 유리가 눈동자에 욕을 담아 어떤 인물인지 얼굴이나 보자며 소파에 앉은 이의 뒤통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둥글둥글한 머리통이 돌아봤다. 정하였다. 뺨과 입술이 유독 붉고 눈가도 발그스레한 데다, 머리카락 끝이 촉촉하게 물들어 있다. 목과 귓바퀴도 붉게 익었고 입술 옆에는 희끄무레한 액체가 닦이다 말았다. 딱 봐도 뭔 짓거리를 하다 만, 혹은 끝낸 꼴이었다.

얼씨구.

정하가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서 유리도 같이 고개를 까닥였다. 빨리 보고나 마치고 이 자리를 떠나자. 유리가 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썩은 짚 더미처럼 풀썩 구겨지려는 얼굴 근육을 간신히 옆으로 잡아당겼다.

사장은 더했다. 한 발 뺐다고 아주 광고를 하는지 나른한 표정을 숨기질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다리를 느슨하게 벌린 채, 셔츠는 흐트러졌고 머리카락도 이마 위로 몇 가닥 흩어졌다.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으나 알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신 보고서입니다.”

어쩐지 공기 청정기가 미친 듯이 돌아가더라. 비릿한 밤꽃 냄새가 공기 중을 떠도는 성싶었다. 사장이 보고서를 훑는 동안 유리가 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가리고 정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하는 이런 꼴을 들킨 게 못내 부끄러운지 신문을 보는 척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사장이 정하를 유난히 끼고 돈다고 생각은 했으나 이런 육체관계를 가질 줄은 몰랐다. 어떻게 알았으랴. 주신도는 그간 여자하고만 밤을 보냈지,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긴 세월 이곳에 머물며 별의별 꼴을 다 봤다. 주신도에게 달려든 남자들도 상당수 목격했다. 뭐 그렇게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는지, 주신도에게 목을 매고 한 번만 자 달라며 매달리는 미친 인간들이 더러, 아니 종종, 아니 자주 있었다. 여자면 흔쾌히 받아 주었으나 남자면 죽지 않을 만큼 패더라.

「이런 씨발 더러운 새끼들이 어디서 달려들고 지랄이야.」

진저리를 치며 차별 발언을 할 때는 언제고. 정하는 사장실에 모셔두다 못해 짐까지 제집으로 옮기며 어화둥둥 예뻐했다. 사장과 하룻밤을 얻어 내고 승은이라도 입은 양 기세등등하던 여자들이 보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유리가 보기엔 하등 얽혀서는 안 될 인간 1위를 차지한 사장이 다른 이들에게는 매력 만점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하룻밤이라도 같이 보내면 다들 눈빛이 몽롱해져서는, 하루 종일 멍하니 정신을 못 차렸다. 주신도가 어떻게 넋을 빼먹는지 알고 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으나 그들의 몰골을 보니 밤새 얼마나 사람을 녹여 먹었는지 짐작은 갔다.

이 바닥이 몸뚱이로 빌어먹고 사는 곳이라 아무리 기술이 훌륭하다 한들 추종자가 될 정도는 아닌데. 하루는 너무 궁금해서 사장에게 목맨 직원을 잡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체 사장의 어느 점이 그리 사람을 미치게 만드냐고. 그랬더니 직원 왈.

「모르겠어요. 처음엔 잘생기고 몸 좋고 목소리 좋아서 좋아했는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요. 매일 욕하다가 한 번 칭찬해 주고 머리 쓰다듬어 주면 그게 그렇게 설렐 수가 없어요. 그거 한 번 더 받고 싶어서 일 열심히 하는 애들 되게 많아요.」

「성격이 지랄 같잖아.」

「그것도 매력이에요. 저런 사람이 자기 사람 생기면 간도 쓸개도 다 퍼 주는 거, 실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게 내가 됐으면 하는 거지.」

―라고 미친 답변을 주었다. 사장이 사람을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는 수밖에. 사장은 이런 데서 놀 게 아니라 연예인이나 교주를 했어야 했다.

다시 돌아와서, 정하가 사장의 집으로 옮겼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 경악을 설명할 마땅한 단어가 없었다. 내일 당장 종말이 온대도 올 게 왔구나 싶은데, 사장이 접대부 중 한 명을 제집에 앉혀 놨단 소리는 손님을 앞에 두고도 멍하니 넋을 놓을 만큼 충격이었다. 측근도 손꼽히는 몇 명만 출입이 가능한 장소가 아니던가.

뭐가 그렇게 예쁘기에. 대체 어느 구석이 주신도를 꾀었나 궁금해 유리가 고개를 틀며 해림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생기기는 감탄이 튀어나올 만큼 잘생겼다. 이목구비의 조화에 오차가 없었다. 신이 정하의 얼굴을 빚을 때 모든 집중력과 기술을 쏟아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외모란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에 좌지우지될 때가 많은데, 정하도 그랬다. 정하는 얼굴만 잘났다. 몸매도, 비율도 훌륭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유리의 눈에는 매력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다운 맛이 좀 있어야지, 정하는 그저 잘 빚어 놓은 도자기 인형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분노도 기쁨도 얼굴 위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모름지기 접대부란 손님한테 싹싹하고 애교도 많이 떨어야 예쁨받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정하는 낙제였다. 손님방에 들어가 벌여 댄 기상천외한 일들도 그렇고, 접대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외 보고할 일은?”

“없습니다.”

“어. 수고했어. 가 봐.”

평소에는 오타 하나라도 전부 잡아낼 듯이 꼼꼼하게 보던 양반이 오늘은 구렁이 담 넘듯 설렁설렁 보고 말았다. 손님이며 접대부들은 어떠냐 하며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이유가 빤했다. 저가 불청객이었다. 금세 몸이 달았는지 파일을 닫는 손길이 거칠었다.

반면 정하는 유리가 조금이라도 더 머물길 바라듯이 간간이 시선을 보냈다. 간절함이 깃들었다는 느낌은 저의 착각이겠지. 사실이더라도 받아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는 사장 아래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바닥이건 줄을 잘 서야 가늘고 길게 가지 않겠는가.

유리가 가볍게 목례하고 뒤돌아섰다. 사장이 웬일로 뒤따라왔다. 유리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닫히는 소리와 철컥, 하고 문 잠그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럼 그렇지.

어디 사장이 목적 없이 움직이든. 배웅이라도 해 주는 줄 알았더니만 사장 성격에 그럴 리가 있나. 신은 껍질 배분을 잘못했다. 사장에게 저런 외양을 줄 거면 성격도 맞춰 주던가. 사장의 성격과 심보는 비틀리고 꼬이다 못해 풀 수 없을 만큼 엉킨 넝쿨이었다. 끝이 뾰족하게 태어나 다른 이를 찌르고도 그 죄를 모를.

하필 그 가시넝쿨에 꽁꽁 얽힌 정하가 잠시 가여웠다. 이형을 걱정하는 오지랖을 보면, 사람이 둔감할 뿐 천성은 나쁘지는 않은 성싶건만. 어쩌다가 사장하고 엮여서는.

뭐, 불쌍하다고 해도 저가 도와줄 일이 있나.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적당히 방임하고 적당히 맞장구쳐 주고 살면 되었다. 달리 보면 그 성격을 가지고 지하에서 구르다가 장기 뽑히지 않은 게 어디냐 싶었다. 사장한테 예쁨이나 잔뜩 받고 한 몸 잘 간수하는 게 정하에게는 가장 안전하고 좋은 길일 수도 있다.

그렇다. 문 뒤에서 둘이 무슨 짓을 벌이든, 아니면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당하든 유리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유리는 문 안의 두 사람에게 관심을 끊은 듯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유리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살려 달라는 비명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유리가 사장실에 있는 동안 해림은 안절부절못하고 신문을 손아귀에 꾹 움켜쥐었다. 바지 안이, 엉덩이 사이가 질척거렸다. 은은한 꽃향기가 섬유 유연제 향처럼 해림의 바지에서 풀풀 흘러나왔다.

주신도의 손에 붙들려 한참 구음을 하고,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림이 눈앞의 허벅지를 다급하게 밀어도 주신도는 숨소리 하나 흔들리지 않고 유리에게 기다리라 명령했다.

그렇게 몇 분, 주신도는 여유롭게 해림의 입과 얼굴에 사정하고 흐트러진 바지춤을 정리했다. 해림의 구멍 안에 반강제로 집어넣은 로터는 그대로 둔 채. 진동을 멈춰 준 게 어디냐며 주신도가 장난스럽게 해림의 귓불을 입술로 물었다 떼고서 의자로 돌아갔다.

유리에게 저를 여기서 빠져나가게 도와 달라고 구조 신호를 열심히 보냈으나 유리는 다 튕겨 냈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제 신호가 약했던 건지는 모른다. 덕분에 해림은 도로 주신도와 사장실에 단둘이 남았다.

주신도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가왔다. 해림이 시계를 흘긋 쳐다봤다. 아직 퇴근 시간은 멀고 멀었다. 최근 손가락 하나 안 댄다고 좋아했더니만, 바쁜 일이 끝났는지 주신도는 원래의 패턴을 되찾았다.

목이 아직 아팠다. 구음으로 한 번 사정했으니 다시 시키지는 않을 테고. 남은 건 로터밖에 없다. 저가 빼려 해도 주신도의 손가락이 워낙 깊은 곳까지 들어와 넣은 터라 쉽게 빠지질 않았다.

해림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잡힐 걸 알아도 본능적으로 엉덩이가 뒤로 빠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질척거리는 오일이 바지를 적셨다. 살갗이 미끈거리며 부딪치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도련님. 도련님이 하도 난리 쳐서 잠깐 멈춰 준 거잖아. 나야 실장이 보든 말든 상관없는데, 도련님이 워낙 부끄러움이 많아 가지고. 다 우리 예쁜 도련님 생각해서 해 준 건데 그게 무슨 태도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겨서 애교도 부리고 그래야지 왜 그렇게 뒤로 빼. 좋은 말 할 때 이리 와.”

주신도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나다 보니 소파의 끝이었다. 이대로 냅다 사장실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훗날에 닥칠 보복이 두려웠다. 해림은 적극적으로 다가가거나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물쭈물 머물러 있었다. 주신도가 쯧, 혀를 차고 소파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해림의 몸 위로 드리웠다. 해림이 그림자를 피할 듯 상체를 젖혔다가 뒤로 훌렁 넘어갔다. 주신도가 재빨리 팔을 잡았기에 망정이지 꼴사납게 나동그라질 뻔했다.

주신도가 손에 힘을 주며 당겨 해림의 몸이 이번엔 주신도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푹신한 소파가 침대처럼 출렁이며 둘을 지탱했다. 해림의 뺨이 주신도의 가슴에 닿는 묘한 자세였다.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가 귓가에 여과 없이 들어왔다. 쿵, 쿵 울려 대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해림의 귓가에도 덩달아 고동 소리만 들어찼다.

잡힌 팔이 뜨겁다. 벗어나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셔츠 자락이 막고 있음에도 뺨에 맨살이 닿은 듯 달아올랐다.

“우리 아까 다 못하지 않았어.”

고동 소리에 낮은 목소리가 섞였다. 해림이 시선을 들었다. 마주친 눈빛이 진득했다. 손가락을 대면 붉은 물이 흠뻑 배어 나올 듯이 미묘하게 번들거렸다.

“나만 좋으면 쓰나. 그럼 도련님이 억울해서 안 되지. 도련님도 싸야지.”

“안 억울해요. 전 괜찮습―”

“괜찮기는. 어디 봐 봐.”

주신도가 해림의 바지춤을 붙들었다. 해림도 옷을 붙들며 사수했다. 허무한 반항이었다. 벨트와 단추가 헐거운 옷고름처럼 스르륵 풀어졌다. 지퍼 열리는 소리가 귓구멍을 간질이고,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붙들려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아직 풀이 덜 죽은 아랫도리가 까만 드로즈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해림이 옷을 끌어 올리려고 하자 주신도의 손등에 힘줄이 곤두섰다. 빼앗기기 싫은 인형을 입에 문 개처럼 옷자락을 찢을 듯이 움켜쥐고 해림의 흰 엉덩이가 보이도록 홀라당 벗겨 냈다. 바지와 속옷이 매끈한 허벅지 중간에 휘감겼다. 속옷 아래 감춘 아랫도리도 결국 바깥 공기에 닿았다.

“비켜요, 읏.”

주신도를 밀치려고 해림이 몸을 일으켰다. 바로 제압당했다. 주신도가 해림의 상체를 짓누르고 애기 다루듯 두 다리를 높게 들어 허벅지에 걸린 바지와 속옷을 벗겨 냈다. 옷가지를 바닥에 홱 던지고 한쪽 다리를 놔줬다. 다른 다리는 여전히 주신도의 어깨 위에 놓였다.

“내가 왜.”

묘한 자세였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에 주신도가 있었다. 허벅지 뒤에 붙은 주신도의 허벅지 앞쪽이 단단하게 불거졌다.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바짝 들러붙어서, 주신도가 해림을 제압하느라 아랫배를 꾹 누르던 손바닥을 서서히 위로 미끄러트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못 박인 손바닥이 옴폭 파인 배꼽을 지나 셔츠 자락을 밀고 아래로 들어갔다.

갈비뼈를 덧그리던 손바닥이 고동이 요동치는 가슴에 닿았다. 손아귀를 오므려 매끈한 가슴에서 살집을 그러쥐다가, 가뜩하게 잡히는 게 없자 신경질적으로 검지를 세웠다. 뭉툭한 손톱 끝에 볼똑 선 젖꼭지가 긁혔다.

“아!”

얇은 셔츠 아래서 손의 윤곽이 꿈틀거렸다. 해림의 고개가 소파 팔걸이 뒤로 훌쩍 넘어갔다. 긴 목선에서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매끄럽게 꿀렁거렸다. 소리가 튀어나오는 입을 아래팔로 가렸으나 한발 늦었다. 셔츠 아래 숨은 손가락이 팥알만 한 젖꼭지라도 가지고 놀겠다며 톡 튀어나온 살점을 검지와 엄지로 비볐다가 으깨고 분홍빛 도는 유륜 안으로 숨게 꾹 힘주어 눌렀다. 해림이 허벅지를 오므리며 주신도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은 주신도의 몸체처럼 해림이 비틀어도 끄떡없이 그 자리에 남아 꼭지를 희롱했다.

“하지, 마요. 그만.”

겨우 가슴에 달린 조그만 살덩이가 뭐라고. 신경이 죄다 거기에 몰려 있는지 거칠거칠한 손가락 사이에 짓눌릴 때마다 허리가 움찔거리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자연스레 안에 든 로터가 속살에 꽉 끼어 점막을 자극했다. 살이 오르다 만 기둥이 점점 힘을 얻었다. 해림이 셔츠 자락을 잡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젖만 만져도 서? 이제 보니 도련님, 순 변태였네.”

주신도가 히죽거리며 젖꼭지에서 손을 뗐다. 드디어 놓아주나 싶어 한숨 돌리려는데, 손이 살 위를 더듬으며 내려와 아랫도리 그 아래로 향했다. 해림이 손으로 소파를 짚고 상체를 벌떡 세우려 했으나 이번에도 실패였다. 손가락이 아직도 젖어 있는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엉덩이를 쪼개 벌리고 엄지로 구멍 위를 문질렀다. 구멍이 옴찔거리며 손가락이 못 들어오게 방해할 듯이 오므라들었다. 어깨와 목덜미에 소름이 돋게 하는 촉감이 싫어 해림이 버둥거렸다. 그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주신도가 눈가에 구김살을 만들며 가느다란 옆구리를 콱 움켜쥐었다. 살이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울룩불룩 솟게끔.

“잠깐만요, 잠깐……!”

해림이 뭐라고 외친들 주신도의 귀에 닿을까. 주신도가 해림을 엎어진 거북이 바로 잡듯 홀딱 뒤집고 아랫배에 팔을 넣어 끌어 올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해림은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라, 하는 사이에 일이 끝났다. 주신도가 흰 궁둥이에 벌건 손자국이 남도록 주물럭거리다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휘갈겼다. 엉덩잇살이 푸르르 떨리다가 벌겋게 익었다. 해림이 힉, 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소파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우리 도련님은 참 사람 귀찮게 해. 그냥 얌전히 협조하면 안 될까? 어차피 할 거.”

내용은 부탁이고 어조는 협박이었다. 잇새로 협조를 짓씹어 내는 말투가 어찌 정중한 부탁으로 들리랴.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해림의 귀에 꽂히고, 탄력 있는 엉덩잇살 사이에 허벅지 뒤로 느꼈던 윤곽이 뜨겁게 맞붙었다. 오일이 남아 미끄덩한 둔덕 사이를 오가다가 로터가 누글누글 풀어 놓은 구멍에 선단이 닿았다.

“힘 빼고. 도련님 다쳐.”

아직은 안 됐다. 안에 로터가 남아 있었다. 해림이 불현듯 깨닫고 앞으로 도망가려고 몸을 뺐다. 엉덩이만 흔들며 재촉한 꼴이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가슴이 소파에 닿았다.

“아직 안에 로터가……, 아!”

“그게 뭐.”

되묻는 목소리에 손끝만 스쳐도 터질 듯한 흥분이 넘실거렸다. 엉덩잇살을 아주 터트릴 듯이 손아귀에 힘도 들어갔다. 성날 대로 성난 선단이 오밀조밀 주름이 진 아랫구멍을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해림이 고개를 흔들어도 대가리는 쉼 없이 기어들어 왔다. 기어이 머리와 그 아래 둘레가 굵직한 목도 욱여넣고 주신도가 하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치켜든 턱 아래로 목울대와 굳건한 선이 불끈 도드라졌다.

해림이 숨을 멈추고 손에 닿는 뭐든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서 달달 떨리는 다른 손으로 아랫배를 쥐었다. 입은 벙긋거리기만 했다. 물 밖으로 튀어 오른 물고기처럼 입을 벌려도 숨은 쉬지 못했다.

아팠다. 그리고 오싹했다. 날개뼈가 위로 솟았다가 내려오고 입술은 헤벌어져 턱 아래로 침이 떨어질 성싶다. 뜨거운 손바닥이 벌겋게 부푼 엉덩이를 어루만질 때마다 아랫구멍이 절로 다물어지며 안에 든 걸 씹어 먹을 듯이 조였다.

미끈한 오일에 힘입어 기둥이 조금씩 안으로 쳐들어왔다. 해림이 무릎걸음으로 피하려고 애를 써도 배 속이 홧홧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워 몸통만 꿈틀거리며 소파에 비벼 댔다.

“흐읏, 하으으……, 윽!”

드디어 닿았다. 선단이 기어코 로터가 있는 곳까지 기어올라 왔다. 해림이 아랫배를 붙들고 버들버들 떨었다. 안쪽 길이 확 조여들었다. 이대로 다 들어오면 로터가 어디까지 가서 박힐까. 상상하니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무서웠다.

주름진 내벽을 비집고서 기둥이 슬금슬금 자리를 차지했다. 그만큼 로터도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깨의 떨림이 등허리로 내려왔다. 허벅지와 종아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미처 참지 못한 감각에 입술 새로 꽉 막힌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발, 그만…….”

그 신음에 울먹임이 섞인 건 해림의 의지가 아니었다. 공포가 몸을 지배했다.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홉떴던 눈가가 흐무러지더니 눈물이 어룽어룽 어렸다.

“그렇게 아파?”

주신도가 짐짓 다정하게 물었다. 아픈 건 둘째치고 무서웠다. 감각은 짜릿하고 야해도 혹시나 장기가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커다래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빳빳하게 부풀어 아랫배에 닿아 있던 기둥이 시들시들 축 처진 게 그 증거였다.

해림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엉덩이를 움켜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기둥도 느릿느릿 빠져나왔다. 주신도가 움칫거리는 해림을 잡고 천장이 보이게끔 눕히고서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도련님은 겁도 많고, 눈물도 많고. 이거 무서워서 놀리지도 못하겠네.”

엄지가 붉어진 눈가에 닿았다. 눈물이 방울져서 굵직한 엄지 위에 진주알처럼 맺혔다. 반대쪽도 똑같이 닦아 주고 주신도가 해림의 팔을 손수 잡아 제 목에 둘렀다.

“내가 좀 착해? 우리 도련님이 아프다면 봐줘야지. 망가지면 큰일이잖아.”

귓가에 입술을 대고 달래듯 조곤조곤 속삭이며 주신도가 엉덩이를 손에 쥐었다. 긴장을 풀라고 부드럽게 매만지다가 해림의 허벅지 안쪽에 손을 넣어 벌리고 도톰하게 부푼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해림이 움찔하며 팔에 힘을 주자 껴안기 편하도록 친절하게 상체를 굽혔다.

무언가를 몸속에 집어넣는 느낌은 아직도 생소했다. 오래도록 경험해도 쉽사리 익숙해질 감각이 아니었다. 미끈한 내벽을 손가락이 훑으며 올라가고, 검지와 중지가 벌어지며 길을 넓히고, 더 깊숙한 곳까지 올라간 로터를 잡으려고 마디까지 쑤셔 넣는 그 행위에 해림은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신도가 저를 구해 줄 구명줄이나 된다는 듯이 바짝 매달렸다. 탄탄한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손끝이 점막을 문지를 때마다 흐느끼듯 숨을 뱉었다.

“거의 다 됐어.”

귓불에 습한 입김이 닿았다. 손가락이, 로터가 굴곡을 긁으며 느리터분하게 빠져나왔다. 힘껏 참고 있던 숨이 달게 터졌다. 해림이 할딱이며 팔을 풀었다. 괴로움이 사라지고 나니 민망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주신도가 로터를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 해림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몸이 뒤로 훌떡 넘어갔다. 아래에 맞붙은 주신도의 고간은 여전히 불붙은 듯 뜨겁고 단단하고 커다랬다. 해림이 아래를 흘긋 봤다가 주신도를 올려다봤다. 주신도의 상체가 더는 제 몸을 누르지 못하게 아래팔을 구부려 막았다.

“봐준다고 하셨잖아요.”

이대로 퇴근시켜 준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주신도가 피식 웃더니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삐져나온 혓바닥이 뱀 혀처럼 붉은색이었다. 눈은 가소로운 것 본다는 듯이 가늘어지고 아래는 더욱 바투 붙었다.

“어. 로터 빼고 내 자지만 박는다는 이야기였지. 한 번 봐줬으면 됐지, 두 번이나 봐 달라고. 도련님, 앙탈은 거기까지만.”

해림이 뭐라고 반박할 새도 없이 허벅지 사이가 홱 벌어졌다. 오금이 위로 눌려 그 사이가 훤히도 드러났다. 직각으로 무섭게 솟은 기둥이 아랫도리 아래로 사라지는 광경이 두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구멍이 열리는 지끈한 감각이 뒷덜미를 후려쳤다. 소파 팔걸이에 닿았던 해림의 동그란 머리통이 다시금 뒤로 젖혀졌다. 달궈진 속살이 기둥에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봐주는 거 없이 칼로 살코기를 푹 찌르듯이 단번에 쑤셔 박았다.

“―악!”

비명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주신도가 숨이 막혀 딱딱하게 경직된 해림의 몸을 붙들고 아래로 주르륵 끌어 내렸다. 해림이 팔을 위로 뻗고서 소파 팔걸이를 쥐었다. 소용없었다. 손톱이 갈퀴처럼 서서 소파를 긁었다. 안 그래도 틈 없는 곳이 손톱도 못 비집을 만큼 살이 맞붙었다. 허윽, 하고 해림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소파에 뺨을 비비며 부들부들 떨었다.

손가락이나 로터도 주신도가 들어오기 편하게 만들기엔 부족했다. 좁은 길목이 억지로 꿰뚫리고 벌어졌다. 몸에서 그나마 살집이 통통한 엉덩이 사이에 거웃 너머 살갗이 닿을 만큼 깊게도 처박았다. 뭉툭한 살덩이 끝이 바로 굴곡진 부분에 닿았다. 셔츠 자락이 위로 올라가 드러난 허여멀끔한 뱃가죽에 야트막한 윤곽이 솟았다.

눈을 떠도 새하얬다가 새카매져서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배 속을 한 대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이 얼얼했다. 등골에 식은땀이 삐죽거리며 솟아올랐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음낭이 쪼그라들며 기둥이 부풀었다. 통증과 쾌감이 종이 한 장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었다.

“작작 조여. 잘라먹게. 로터는 싫다면서 자지는 넣고 다닐 셈이야.”

주신도가 질 낮게 떠드는 소리도 귀에 안 들렸다.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처음에 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약 기운에 파묻혀 뭐가 뭔지도 모르게 지나갔었다.

맨정신은 달랐다. 맞붙은 피부의 열기와 벌어졌다가 오므라드는 점막과, 속살에 마찰열이 일다 못해 태울 듯이 부딪치는 기둥과 선단이 닿은 물컹한 벽까지 낱낱이 느껴졌다.

주신도가 몸을 뒤로 물렸다. 해림이 얼른 주신도의 팔을 잡았다. 고개를 마구 저으며 제발 살살,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해림의 눈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주신도가 물렸던 몸을 쾅 들이받았다. 비명이 다시 한번 해림의 목구멍에서 솟구쳤다.

“누가 지나가다 들어오면 어쩌려고. 이거 물어.”

주신도가 흐트러진 셔츠를 위로 끌어다가 해림의 입에 물렸다. 셔츠가 위로 올라가며 열을 띠어 불그죽죽하게 물든 가슴이 드러났다. 으깨질 듯 꼬집힌 젖꼭지가 다른 쪽보다 붉게 부풀었다.

주신도의 아래턱에 실금이 갔다. 잇새로도 으득거리며 들짐승이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답답한지 셔츠 앞을 손으로 잡아 뜯어 숨통을 확보하고 주신도가 그 덩치로 해림을 내리눌렀다. 푹푹 들이박는 허리 짓에 소파가 끽끽거리며 마룻바닥을 긁었다.

“읍, 흐읍, 윽, 흐으……, 아, 제발. 제발.”

해림의 입에서 셔츠 자락이 흘러내렸다. 입술도 옷자락도 흠뻑 젖었다.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한 번 박힐 때마다 해림이 어쩔 줄을 모르고 주신도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발가락 끝이 곱아들었다가 사이사이에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활짝 벌어졌다.

가슴이 짓눌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아 입만 헤벌어졌다. 전류가 배 속을 휘저었다. 손닿은 적 없는 겨드랑이 안쪽과 허벅지 안쪽, 배꼽 아래에도 불꽃이 팍팍 튀었다. 시들할 땐 언제고, 도로 단단하게 선 아랫도리에서 투명한 물이 고였다가 파르르 떨리며 뱃가죽 위로 진득하게 떨어져 내렸다.

위로 죽죽 밀려 올라가다가 해림의 고개가 팔걸이 뒤로 젖혀졌다. 주신도의 손이 따라왔다. 굵은 엄지가 해림의 입술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혓바닥과 뒤엉켰다가 목구멍 깊숙이 처박힐 듯이 굴기에 해림이 못 들어오게끔 입술을 오므리며 젖 문 애처럼 쭙쭙 빨았다. 아래서 찌걱거리며 드나드는 몸짓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야하네, 도련님. 잘하고 있어.”

“흡, 우, 후으, 으응…….”

칭찬이 달고 간지러웠다. 입술이 귀 아래에 붙어 쪽쪽 소릴 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곧은 목선을 머금고 혓바닥으로 길게 핥았다. 감촉이 간지러워 해림이 고개를 비틀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 아래에서 예고 없이 빠져나갔다가 단숨에 퍽 밀고 들어온 둔통과 충격에 입이 벌어졌다. 손가락이 흠뻑 젖은 채 빠져나갔다.

주신도가 해림이 더는 위로 밀려 나가지 못하게 등을 껴안고서 성난 듯이 몰아쳤다. 해림이 끅끅거리며 곧 죽을 것처럼 흔들려도 봐주지 않았다. 한 번 봐준 걸로 족하다는 말을 온몸으로 표출하듯 해림을 잡고 흔들었다. 해림이 발버둥 치다가 바짝 몸을 굳혀도 쑤석거리는 허리 짓은 끝나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요! 나, 지금……, 하윽, 흐으……, 아, 어디까지 들어, 가, 깊……, 아!”

해림의 엉덩이에 담뿍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둥글게 휘어지며 솟았다. 손 한 번 대지 않았는데도 빳빳하게 선 기둥에서 흰 물이 터져 나오며 해림의 배와 가슴을 물들였다. 일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해림을 제 몸에 욱여넣을 듯 껴안은 주신도도 멈칫했다. 상체를 세웠는데, 복근이 울룩불룩한 아랫배에 희끄무레한 정액이 묻었다. 해림의 배꼽과 주신도의 아랫배와 터럭에 투명한 풀처럼 엉겨 붙었다.

해림이 숨을 할딱이며 늘어졌다. 여운이 다음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찾아와 어깨와 목이 움츠러들었다. 이대로 끝내면 좋겠건만, 골반 위를 움켜잡은 손아귀는 아직 기세가 흉흉했다. 힘이 축 빠진 해림을 잡고서 인형이라도 되는 듯이 쥐고 흔들었다.

주신도의 팔뚝에 둥그런 근육이 서고 그 위로 핏줄과 힘줄이 넝쿨처럼 타고 올라갔다. 아래 깔린 곡선 좋은 몸을 잡고 뒤로 뺐다가 있는 힘껏 잡아 끌어 내렸다. 부딪친 살갗에서 오일이 철벅거리며 튀었다. 꾹 누르고 비비적거리자 해림이 몸서리를 쳤다. 쾌감이 끝이 나야 하는데 그 이상이라 여운이고 뭐고 없었다. 이러다가는 몸의 물이란 물이 다 쥐어짜여 말라 죽을까 봐, 해림이 도망칠 듯 주신도의 어깨를 쥐었다가 소파 등받이를 잡고 몸을 비틀었다.

커질 대로 커진 기둥에서 즙이라도 짜낼 것처럼 속살이 들러붙었다. 다가오는 끝을 알리듯 흉터 가득한 손등에 힘줄이 곤두섰다. 주신도의 관자놀이와 목에도 푸른 핏대가 바짝 일어났다. 해림의 가슴에 제 반신을 겹치고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한 몸처럼 붙은 상체가 잘게 떨리고, 참고 참다가 끝에서야 터진 신음이 해림의 귓속을 유영했다.

오일로 범벅된 속살에 미지근하고 걸쭉한 액이 길게도 쏟아졌다. 해림이 숨을 할딱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다. 눈앞도 가물거렸다. 그럼에도 아직 해림의 상체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주신도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질컥거리는 속살을 음미하듯 아랫도리를 비비적거렸다.

다 토해 냈으면 좀 죽을 것이지, 여태 단단하고 뜨끈한 놈이 이 차전을 준비하듯 무른 속살에 열기를 남기며 돌아다녔다. 그놈이 방향을 바꿔 예민한 점막을 문지르고 찌를 때마다 해림이 움찔거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주신도의 입술도 해림의 몸 여기저기에 도장을 찍고 돌아다녔다. 귓불과 목덜미에, 쇄골 위에, 젖꼭지를 입술 새에 물었을 때는 해림이 없는 힘을 쥐어짜 주신도의 어깨를 잡았다. 밀치지는 못했다. 그 정도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없는 가슴살을 그러모으고 작은 유두에서 젖이라도 뽑아낼 것처럼 부끄러운 소리가 나도록 빨고, 혓바닥으로 벌겋게 익은 유륜을 개처럼 핥고 혀끝으로 장난치듯 아래에서 위로 튕긴다. 혀로 휘감았다가 흡입하듯 빨면 노곤해서 잠이 쏟아지려다가도 눈이 떠졌다.

전희 같은 후희였다. 해림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개를 가누며 주신도를 내려다봤다. 좀 비키라고 밀고 싶은데, 몸 위를 차지한 주신도는 영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가슴에서 혀를 떼고 어깨에 입을 맞추다가, 해림의 질렸다는 시선을 알아챈 듯이 상체를 설핏 들었다. 해림이 꼬물거리며 다리를 뒤로 물리다 내려다보는 주신도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흣.”

해림의 눈가가 구겨졌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랫구멍에서 여유작작하게 돌아다니던 놈이 급작스레 성난 듯 몸을 부풀렸다. 부은 구멍을 쓸고 나갔다가 푹 박혀 오는 놈이 처음인 척 속살을 짓무르게도 눌렀다. 받아 내는 해림만 죽어났다.

그만 좀 하라고 거부해도 작정하고 달려드는 주신도를 이길 수 있을 리가. 해림이 주신도의 팔등에 바락바락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며 등골을 오르내리는 감각을 버텼다. 시간은 길지 않았다. 도련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해림이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사장실에서 나눈 정사가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제집에 들어앉힐 때만 하더라도 손가락 하나 안 대더니, 이제는 어디서든 눈만 마주치면 주신도가 먼저 달려들었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거나 귓불을 물고 해림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가슴과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꼬집고 비틀고, 더 나아가 바지춤에도 손을 넣어 음낭과 기둥을 제 것처럼 주물럭거렸다. 허벅지 안쪽은 보들보들해서 감촉이 좋다며 자기 전에도 만지고 갔다.

「도련님은 불알이 왜 이렇게 말랑말랑해? 색도 옅고.」

불알이 그럼 말랑말랑하지, 딱딱하면 그거 병 아닌가. 주신도도 감촉은 해림의 몸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해림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주신도는 음낭에 땀띠가 나도록 손아귀에 쥐고서 쪼물거리며 가지고 놀았다. 해림이 말리면 열에 인심 써서 한 세 번은 들어줬다. 나머지 일곱 번은 보통 다음 날 아침, 아니면 오후에 눈을 뜨는 걸로 끝을 맺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따져 봐도 무용지물이었다. 급류에 휩쓸리면 어느 순간 원래 있던 곳에서 멀어지듯이, 주신도에게 박자를 맞추다 보니 몸을 섞는 행위가 자연스러워졌다. 남자와 잔다는 충격은 수그러든 지 오래였다.

주신도와 보내는 밤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눈이 마주쳐서, 손끝이 스쳐서,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달려들어 구미호처럼 사람을 이리저리 홀려 댔다. 거부감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처음만큼 강렬하지 않았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야했다. 살면서 그런 쾌락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쾌락보다는 고통이라고 정의해도 맞을 감각이었다. 배 안쪽을 직접적으로 짓뭉개는 폭력적인 행위인데도 뇌가 흐물흐물 녹아 곤죽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마약에 중독되는 이들이 느끼는 쾌감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본인이 망가져도 모를 중독이란 게.

주신도와 몸을 섞으면 해림은 가끔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머리가 흔들려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발생하는 문제였다. 저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지진이 일어난 듯 뒤흔들리고 쩍쩍 갈라지며 균열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그 아래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금 간 땅에서 알지도 못하는 뭔가가 솟아올라 저를 덮치거나. 불안과 초조, 미묘한 일렁거림이 발아래에서 무거운 물안개처럼 일렁거렸다.

이러나저러나 주신도는 정신이든 육체든 제 건강에 일조할 인간이 아니었다. 떼어 버려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길이 열릴 텐데. 점점 평범한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잡생각이 무게라도 지닌 듯 목 위가 묵직했다. 해림이 목을 느릿느릿 돌리고 레일 위로 올라갔다. 머리를 비우기에 운동만 한 게 없었다. 요새 주신도에게 시달리며 체력의 한계도 여실히 느끼고 있던 차였다. 어디 가도 픽픽 쓰러지는 약체는 아니었건만, 주신도와 밤을 보내면 그 다음 날 늦은 시간까지 골골거릴 만큼 약해졌다.

주신도의 체력이 괴물에 가깝다는 사실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해림이 시작 버튼을 눌렀다. 피트니스 룸엔 역시나 뛰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저번에 실장에게 얼핏 들으니 종종 보이는 덩치들은 운동하는 방이 따로 있다고 했다. 접대부들과 부딪치면 눈 맞아서 도망칠 궁리나 한다나 뭐라나. 하여튼 주신도는 이상한 데서 철저했다.

레일 위에서 땀이 흠뻑 나도록 뛰었더니 머릿속이 전보다 말끔히 개었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문제들이 널브러진 상자처럼 여기저기 산재해 있으나 잠시 미뤄 두었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굳이 껴안고 두통이 일게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목이 말라 자판기 앞에 섰다가, 저쪽에서 혀어어엉, 하고 길게 부르는 고함을 듣고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한 마리 대형견처럼 돌진하던 이형이 한 걸음 남짓한 곳에서 몸을 날려 해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해림이 뒤로 휘청거리다가 이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훌렁 넘어갔다.

“헉, 형! 미안해요.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뒤통수는 얼얼해도 건강해진 이형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희다 못해 푸르스름하던 발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해림이 괜찮다며 이형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입가가 느슨하게 늘어지며 미소 비스름한 형태가 해림의 입술에 드리웠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형이 쫄래쫄래 따라와 해림의 맞은편에 앉았다. 턱에 꽃받침을 하고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나름 힘든 일을 겪었는데도 여전히 아이처럼 해맑았다.

“잘 지냈어?”

“예. 유리 누나가 이야기해 줬어요. 형이 저 살려 주셨다면서요.”

생명의 은인이라며 이형이 추켜세웠다. 해림이 고개를 저었다. 저가 한 거라고는 구차한 핑계를 대며 손님을 내쫓고 실장을 부른 일밖에 없었다.

“에이, 맞아요. 형 아니었으면 그날 죽었을지도 몰라요. 감사 인사하려고 찾아갔는데 방 옮겼대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어디로 옮겼어요? 다들 물어봐도 모른대.”

주신도네 집으로 옮겼다고 밝히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소문이 짜하게 퍼질 터였다. 구설수는 이미 충분히 겪었다. 해림이 그냥 다른 층으로 옮겼다고 얼버무렸다.

“다른 애들은 잘 지내고?”

이형이 캐묻기 전에 해림이 말을 돌렸다. 전하고픈 소식이 많았는지 이형이 눈을 번쩍번쩍 빛냈다.

“엄청 잘 지내죠. 시훈이는 살쪘다고 손님들한테 계속 퇴짜 맞아서 고민이 많아요. 지원이는 돈 아낀다고 하더니 빚 좀 많이 갚았다 그러더라고요. 희망이 보인다고.”

“좋은 소식이네.”

시훈이 운동하고 먹는 걸 보면 살이 찔 법도 했다. 과자 봉지들을 팔에 산더미처럼 안고 가는 게,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성싶었다.

“그보다 형, 여기에 장난 아닌 놈 한 명 들어왔어요. 빚에 팔려 온 건 아니고 어디 다른 데서 굴러먹다가 온 거 같은데, 손님들이 다 그 인간만 찾아요. 아 씨, 나도 눈앞에서 손님 한 명 빼앗겼다니까요.”

이형이 제비처럼 조잘대다가 씩씩거렸다. 당한 일이 꽤나 억울한지 주먹을 꽉 쥐고 세모꼴로 눈을 치뜨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래 봤자 털 부풀린 참새 꼴이라 해림이 속으로 웃었다. 겉으로는 그러느냐고 맞장구치면서. 귀엽다는 말로 열심히 분노하는 이형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좀 많이 미친놈인가 봐요. 여기 계약하겠다는 말도 돌더라고요. 사장하고 이야기가 됐는지……. 케이 안 보여서 좋아했더니 역시나. 어디든 또라이 없는 곳이 없다던데, 헌 또라이 가고 새 또라이가 왔어요.”

그중 가장 미친놈이 주신도 아닐까. 주신도가 버티고 있는 한, 누가 새로 들어오든 미친놈의 왕좌는 난공불락이었다.

해림이 캔을 만지작거리며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이형의 얼굴이 바닥에 떨어진 찐빵처럼 폭삭 일그러졌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해림의 고개도 돌아갔다. 복도 멀리서 키가 큰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다리가 길고 어깨도 널따라니, 멀리서 봐도 형태가 뚜렷했다.

“이 시간에 저 인간이 여기 왜 있어?”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이형의 입가가 불에 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미소와 구김살 그 중간이었다. 남자가 자판기 앞에 섰다가, 해림 어깨 너머로 이형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해맑은 남자를 보고 이형이 어정쩡하게 웃었다.

“이형 씨 아닙니까. 저번에 뵙고 오늘 또 뵙네요.”

“아, 예…….”

“저 이번에 이 가게하고 계약했어요. 다들 계약하기 힘들다고 말렸는데 사장님이 좋게 봐줘서. 방도 받았어요. 좋던데요.”

이형의 만면에 말도 섞기 싫은 티가 역력한데도 남자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해림과 이형의 테이블에 자리 잡는 행동이, 저 정도 붙임성이면 이 가게에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남자가 손에 가득 든 캔을 이형의 앞에 하나, 해림의 앞에 하나 놓았다.

이형을 보고 해죽거리던 남자가 이번엔 해림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남자의 입가에 가득했던 능글맞은 미소가 순간 사라졌다가, 해림이 의아함을 느끼기 전에 도로 살아났다.

“이야. 여기 얼굴 보고 뽑는다더니. 진짜 잘생기셨네요. 근데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내가 이런 얼굴을 잊을 리가 없는데……. 어디서 봤더라.”

본 적 없다. 적어도 해림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거기에서 잃어버린 과거의 단서라도 찾을 듯이. 이형이 별 꼬락서니를 다 본다는 듯 입가를 구기고 눈으로만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우리 분명 만난 적 있을 거예요. 낯이 되게 익어.”

“형이 워낙 잘생겨서 길 가다 스쳐 지나기만 해도 기억에 남을 걸요. 전에 보기는 무슨.”

“그건 맞는 말이네요. 정말 잘생겼어요, 그쪽. 이름이?”

“정하요.”

해림 대신 이형이 대답했다. 둘 사이에 남자가 끼어드는 게 정말 싫은 듯 내뱉는 말마다 퉁명스러웠다.

“그거 말고 본명이요.”

“이 바닥에서 본명 밝히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기본도 모르나.”

“―맞아. 도련님 본명을 그쪽이 왜 물어.”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셋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언제 왔는지,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았건만 주신도가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이형과 남자는 대화를 나누느라, 해림은 남자를 어디서 본 적이 있나 기억을 뒤져 보느라 주신도가 가까이 다가온 걸 까마득히 몰랐다.

텅, 하고 자판기에서 음료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주신도가 허리를 굽혀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고깝다고 이마며 볼에 덕지덕지 써 붙였던 이형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리하게 질렸다.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질 만큼 발딱 일어나 두 팔을 몸통에 착 붙이고서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해림과 남자도 일어났다. 주신도가 해림의 옆에 서더니 당연한 듯이 어깨에 두꺼운 팔을 걸쳤다.

“본명이 뭐가 중요해. 어차피 불리지도 않을 거. 쓸데없는 거에 관심 갖지 말고 본인 일이나 잘하지 그래. 받은 선금 이상은 해야지.”

어깨를 내리누르는 팔의 무게가 상당하다. 해림이 주신도의 팔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대번에 도로 올라왔다. 이번엔 끌어 내리지 못하도록 손으로 해림의 팔뚝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윽 소리가 튀어 나갈 만큼 아귀힘이 강했다.

“걱정 마십쇼, 사장님. 그 이상 벌 자신 있습니다. 그나저나 사장님하고 정하 씨, 친해 보이시네요.”

“어. 많이 친해.”

해림을 꼼짝 못 하게 잡고서 주신도가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해림의 머리 위에 주신도의 머리가 닿았다. 겉으로만 보면 알콩달콩한 두 마리의 앵무새처럼 붙어 있었다. 해림이 꿈틀거려도 주신도가 놔주지 않았다.

눈치만 흘끔흘끔 보고 있던 이형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해림의 어깨에 단단히 걸린 팔을 보고, 해림의 묵묵한 표정을 보고 주신도의 아무렇지 않은 입매와 아래턱을 보다가 해림과 눈이 마주치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눈을 부리부리 홉뜨며 소리 없이 물었다. 해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주신도가 옆머리로 해림의 정수리를 콱콱 짓눌렀다.

“그러니까 나하고 매우, 존나 친한 직원한테 어디서 봤다는 개수작 떨지 말고. 내가 아까 이야기 안 했나. 가게에선 연애 금지야. 애들이 어쩌다 눈이라도 맞으면 손님한테 못 대 주겠다고 그렇게 지랄들을 떨더라고. 정절은, 씨발.”

아하하, 하고 남자가 애매하게 웃었다. 주신도도 마주 웃었다. 눈도 입도 부드럽게 휘었으나 전체적으로 비웃음에 가까웠다.

“아, 하나 더. 그쪽 수준 미달인데 구 사장이 하도 넣으라고 지랄해서 뽑아 준 거니까 분수 잊지 마. 은혜도 잊지 말고 구 사장한테 잘 박아 줘. ……아, 잘 말해 달라고. 이것 참, 요새 늙었나, 혀가 자꾸 꼬여.”

주신도가 말실수인 척 정정했다. 거기에 있는 누구도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가 묵묵히 주신도의 말을 듣다가 싱긋 웃었다.

“네. 사장님이 실망할 일 없게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무난한 답변이었다. 주신도의 개소리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다니, 남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주신도의 시선이 잠시 딴 곳에 가 있는 동안 해림에게 눈까지 찡긋해 보이는 만행도 저질렀다. 남자의 느끼한 행각에 닭살이 돋을 찰나,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를 틀어쥐고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 테니 일들 열심히 하고. 이형아, 너 이번 주 간당간당하더라.”

아직도 해림의 어깨에 붙어 있는 손을 보고 이형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표정이 굳었다. 쥐꼬리처럼 말려들어 가는 목소리로 예, 힘없이 대답하고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 위태로워 위로라도 해 주고 싶건만, 주신도의 팔이 밧줄인 양 어깨를 꽁꽁 싸매고 있어 제대로 뒤돌아보지도 못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주신도의 팔은 해림의 어깨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해림이 이것 좀 놓아 달라고 어깨를 비틀어서야 주신도가 선심 쓰듯 놔줬다.

얼얼한 팔뚝을 매만지다가 뺨이 따끔따끔해 옆을 돌아봤다. 주신도가 해림을 내려다보다가 정면으로 고개를 홱 하니 돌렸다. 꽉 다문 입매가 불만을 품은 듯한 일자로 곧다.

“도련님은 뭐 저런 개소리를 일일이 받아 주고 있어.”

“무슨 개소리요.”

“어디서 봤다느니, 잘생겼다느니. 칭찬 한두 번 들어? 내가 해 주는 칭찬으로는 모자라? 그리고 어디서 봤다는 소리에 눈은 왜 그렇게 깜박여? 진짜 저 새끼하고 본 적 있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역시나 생트집이었다. 눈이 건조해서 깜박인 게 아양이라도 되는 듯이 주신도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해림이 적당히 귓등으로 넘겨들었다.

“정작 손님 받으라고 할 때는 목석처럼 앉아만 있지 않았나. 도련님, 얼굴 가려? 저 새끼가 반반하게 생겨서 그래? 잘생기긴 씨발, 대가리에 구멍 뚫려서 실실 웃는 게 어디가 잘생겼어. 우리 도련님 눈이 그렇게 낮은지는 몰랐는데.”

남자는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다소 느끼한 면이 있기는 해도 손님들에게는 잘 먹힐 상이었다. 하나 외모만 두고 보면 주신도가 훨씬 뛰어났다. 해림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주신도보다 잘생긴 인간을 단연코 본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얼굴만 따져 봤을 때 이야기였다. 평가 항목에 성격이 들어가면 주신도의 순위는 바닥을 찍다 못해 지하를 파고 들어갔다. 신도 무심하시지. 어쩌다가 저런 껍질에 개차반인 성격을 주입해서는. 달리 보면 신은 공평했다.

“……사장님이 더.”

아직도 꿍얼거리며 불만을 표출하는 주신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해림이 입을 열었다. 반은 충동이었고.

“내가 더, 뭐.”

“더 잘생기셨어요.”

반은 그러니 지랄은 그쯤 하라는 마음을 담았다. 객관적인 사실이었고, 잘생겼다는 칭찬이야 평생 밥 먹은 횟수보다 많이 들었을 테니 새삼스럽지도 않겠건만, 주신도는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사람처럼 입을 헤벌리고 해림을 쳐다봤다. 도톰한 입술이 씰룩거리며 위로 올라갔다가 안으로 말려들어 가며 꿀렁꿀렁 요동을 쳤다.

“……하, 아직 도련님 눈이 완전히 맛 간 건 아니네. 나 우리 도련님 눈이 고장 난 줄 알고 걱정했잖아. 닥터 불러야 하는 줄 알고. ……그치. 내가 좀 잘생겼어. 어, 좀 많이 잘생기긴 했지. 자랑은 아닌데, 아는 누님이 예전부터 배우 하라고 자주 꼬시고 그랬어. 그래도 날 너무 좋아하지는 말고. 아니 뭐, 사람 마음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이어지는 말은 귀담아들을 종류가 아니었다. 해림이 소리 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눈에 담으며 주신도가 떠드는 대로 내버려 뒀다.

집에 들어와서도 주절거리는 소리는 이어졌다. 해림이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소파에 털썩 앉은 주신도가 뭐가 불만인지 불퉁한 목소리로 해림을 불렀다.

“어디 가? 빨리 앉아.”

방에 들어가면 끝까지 쫓아와 멱살 잡고 끌어낼 거라는 의도가 다분한 명령이었다. 마지못해 옆에 앉자, 해림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주신도가 소파에 철퍼덕 누웠다. 해림의 의사는 코딱지만큼도 반영하지 않았다. 뒤통수를 두어 번 꾹꾹 눌러 자리를 잡고는 팔걸이에 편하게 다리를 걸었다. 길이가 워낙 길어 소파 바깥으로 발이 길게도 빠져나갔다.

“왜 집에 얌전히 안 있고 돌아다녔어.”

“답답해서요. 운동하러 나갔어요.”

“집에서 운동하면 되잖아. 있을 거 여기 다 있는데.”

여기 온 후로 거실과 부엌, 방과 욕실만 오간 터라 다른 방에는 뭐가 있는지 몰랐다. 남의 집 방을 허락도 없이 마구 열어 보는 일도 해림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못 봤어요.”

주신도가 쯧, 혀를 찼다.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한심함이 가득 녹았다.

“집 옮긴 지가 언젠데 아직도 어디에 뭐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사람이 그렇게 둔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도련님 같은 사람이 어디 가서 홀딱 사기당해 뒤통수 맞고 길바닥에 나앉아서 찔찔 울기 딱 좋아. 이거 뭐, 딴 놈들한테 팔려 갔으면 진작 통나무감이었어. 나였으니 망정이지.”

집 구조 한번 몰랐다고 주신도가 해림을 세상 물정 모르는 천치 취급했다. 잔소리 폭격이 다시금 쏟아졌다. 해림이 듣는 둥 마는 둥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담았다. 새파랗게 식었던 이형의 낯빛이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뭐가 아슬아슬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그동안 주신도에게 잡혀 있는 터라 이곳이 매춘으로 돈을 버는 곳임을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고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은 열심히 빚을 갚아 나가는 동안 저는 무얼 하고 있는지, 주신도와 보낸 밤에 값을 매겨 빚을 줄여야 하는지, 문득 궁금했다. 해림이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질문이 선뜻 입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목울대 언저리만 빙빙 맴돌았다. 주신도에게 지금까지 보낸 밤의 화대를 달라고 주장하는 꼴 아닌가. 망설여질 만했다.

갑자기 앞머리가 잡아당겨져 해림의 고개도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뽑히는 따끔한 통증에 해림이 눈살을 슬쩍 구기며 아, 하고 작게 신음을 뱉었다. 해림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주신도가 앞머리에서 손을 뗐다.

“또 딴생각하지. 남이 신경 써서 조언을 해 주면 귀담아들어야지 왜 집중을 못 해.”

골난 아이처럼 입술이 부루퉁했다. 여기 와서 지금껏 몰랐던 주신도의 다른 면면을 참 많이도 본다. 실실 웃거나 정색할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표정이 다채로웠다. 가늘어진 눈매나 금붕어처럼 툭 튀어나온 아랫입술이나, 판판해진 뺨과 좁아진 눈썹 사이가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그간 주신도가 건드려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 단단한 벽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제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발을 쿵쿵 구르는 고집만 센 못된 소년 같았다.

미간에 오밀조밀 잡힌 주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고 싶다. 무슨 반응을 보여 줄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어디서 함부로 손을 대냐고 화를 낼지,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눈을 감을지, 그도 아니면 간간이 보여 줬던 풋내 어린 미소를 또 보여 줄지.

이런 충동이 해림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겪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주신도를 보고 있노라면 속이 슬그머니 울렁거리고, 차를 타고 끝없이 구불거리는 산길을 달리는 듯 가벼운 멀미가 일었다. 차라리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해 주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을 텐데.

“그냥 좀. 피곤해서요.”

“도련님 몸보신 좀 해야겠네. 걸핏하면 골골거리고. 우리 저번에 갔던 그 식당 갈까. 누님한테 흑염소 한 마리 잡아 달라고 하면 잡아 줄 텐데. 아님 보약 먹을래?”

“좀 쉬면 나을 거예요.”

왜 주신도는 저에게 비정상적인 친절을 보이는 걸까.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쇠사슬 고리처럼 줄줄이 엮여 머릿속에 닻을 내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이게 과연 옳은 길일까. 주신도와의 관계는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채권자와 채무자에 육체관계가 섞였다고 결론 내리면 그만일까. 그보다 더 깊은,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 새싹을 틔우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이미 뿌리까지.

그럴 리 없다. 해림이 주먹을 꾹 쥐며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이야 주신도가 무슨 이유에선지 저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다지만, 그도 얼마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장 내일 손님을 받으라며 변덕을 부릴 수도 있고, 길게는 일주일, 더 나아가 한 달쯤은 주신도의 곁에 머물 수도 있겠다.

다만, 주신도의 관심이 떨어지면 줄 끊긴 연처럼 이곳을 부유할 터였다. 다른 이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며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오가고 손님을 받고 몸을 팔겠지. 이형에게 그러했듯 어느 날에는 매출이 잘 나오지 않았다며 주신도가 경고를 할 수도 있겠다. 진열해 놓은 물건 보듯, 무심하고 매정하게 바라보면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건만 차가운 눈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유 모를 통증이 가슴 한구석을 지끈하게 건드렸다. 심장 주변의 근육과 살갗이 억센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 지그시 눌리는 둔통이었다.

낯선 통증이다. 원인은 알 듯 말 듯 했다. 해림은 눈을 설핏 찌푸리고 가슴을 장악한 통증이 가시기만을 기다렸다. 주신도의 뒷머리가 허벅지를 꾹 누르고 있는 탓인지, 통증은 제법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 * *

“아, 좀, 아읏, 살살……. 하…… 윽.”

침대 다리가 부서질 듯이 삐걱거렸다. 억누른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연이어 터지다가 어느 순간 뚝 멎었다. 찰나의 정적이 지나고 전보다는 한결 가라앉았으나 여전히 헐떡이는 소리가 침대 위를 떠돌았다. 한 몸처럼 깊게 포개진 몸뚱이들이 남은 격정을 맛보듯 미동 없이 붙어 있다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몸이 먼저 흰 몸 위를 느릿느릿 유영했다.

해림의 허벅지 안쪽이 이따금씩 바르르 떨렸다. 베개를 쥔 손에서도 아직 힘이 풀리지 않았다. 여운 따위는 느낄 새 없이 주신도가 아랫도리를 뭉근하게 움직였다. 흠뻑 젖은 안쪽이 식지 않게 재를 뒤섞는 부지깽이처럼 오가며, 입술로 발갛게 익은 목덜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해림이 움찔거리며 피하려 해도 등 위를 짓누른 무게가 상당해 벗어나지 못했다.

“무거워요.”

주신도는 해림의 불평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저 좋을 대로 몸을 비볐다. 해림이 그만하라고 한 세 번은 밀고 나서야 주신도가 옆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물고 빨고 박아 댔으면서 뭔 아쉬움이 남았는지 해림을 껴안고 도드라진 날개 뼈 위에 이를 세워 잘근거렸다. 힘없이 널브러진 해림의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우고, 손으로는 발개진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음낭이 아닌 게 어디냐. 해림이 주신도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말릴 힘도 부족했다.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렀는지 세기도 지쳤다. 사정만이 절정이라 이름 붙이기도 뭣한 정사라 더욱 그러했다.

몸이 얼얼하고 아프고 나른했다. 주신도는 침대에서 사람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결투처럼 달려들었다. 해림을 꿰뚫고 뒤흔들고 쑤셔 대고. 졌다고, 그만하라고 백기를 들어도 제 마음에 찰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끝을 냈다. 주신도는 흉포한 곰이나 며칠 굶은 범이었다. 한 번 상대하고 나면 온몸에서 진이 쭉 빠져 손끝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늘 경기는 여기까지였는지 주신도는 입술만 오물거리며 해림의 살결에 자국을 남길 뿐 그 이상의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더 달려들 때면 손으로 해림의 아랫도리를 주물럭거리든가, 정액으로 뒤범벅된 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든가, 퉁퉁 부은 젖꼭지를 꼬집든가 하며 나름의 신호를 보냈다. 주신도 입장에서야, 그 행동들은 신호보다 버릇에 가까웠지만.

여하간 해림은 아주 조금 마음을 놓았다. 몸이 매트리스 아래로 끌려 내려갈 듯이 노곤했다. 목덜미를 새처럼 쪼다가 진득하게 붙어서 살갗을 머금는 입술도 졸음을 부채질했다.

최근 들어 잠자리가 끝나고도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빨리 몸을 씻고 자고 싶은데, 주신도는 해림의 등 뒤에 스티커처럼 철썩 붙어서 미처 도장을 찍지 못한 살갗 위에 입술 자국이나 잇자국을 남겼다. 간지럽고 가끔은 아파 몸을 비틀면, 팔뚝에 힘을 줘 해림을 바특하게 끌어안고 문신을 새기듯이 깊게도 빨아들이고 잘근잘근 씹었다. 결국 해림의 입에서 통증 어린 신음이 튀어나오게끔.

반항을 하면 일이 길어진다. 그간 온몸으로 체득한 교훈이었다. 주신도는 시체처럼 널브러진 해림은 잘 건들지 않았다. 죽은 척하면 툭툭 쳐 보다가 흥미를 잃는 짐승과도 같았다.

이번에도 해림은 현명하게 같은 방법을 택했다. 굳이 척하지 않더라도, 눈앞이 가물가물하니 곧이라도 잠에 빠질 성싶었다. 귀에 닿은 질문이 아니라면 거의 잠들 뻔했다.

“도련님, 홍콩 가 봤어?”

홍콩이란 단어에 해림이 닫힌 눈꺼풀을 들었다. 질문이 야한 의미를 내포한 듯 들리는 이유가 비단 행위가 끝나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른하게 가라앉은 주신도의 목소리가 불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었다.

“홍콩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명성이야 많이 들었어도 가 본 적은 없었다.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어쩌다 나진과 함께 가더라도 주거지에서 멀리 떠나본 적은 없었다.

“아뇨.”

“그래? 잘됐네. 거기 볼 게 제법 있거든. 음식도 먹을 만하고. 에그 타르트가 괜찮아. 딤섬은 비린내 나서 영 싫던데, 잘 먹는 사람은 또 잘 먹더라고.”

왜 갑자기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지 그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어 해림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해림의 목뒤에 입술을 대고 살을 녹여 먹을 듯 야금야금 빨아 대던 주신도도 시선을 들었다.

“어차피 도련님 여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 점은 걱정 말고.”

“우리, 어디 가요?”

‘우리’라는 단어가 제 입으로 뱉어 놓고도 어딘지 모르게 낯간지러웠다. 해림이 재빨리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마에서 정수리를, 뒤통수를, 그리고 귓바퀴 뒤를 간질이다가, 아직도 열이 뜨끈하게 남아 있는 팔로 해림의 몸통을 껴안았다. 등과 엉덩이와 오금 뒤에 뜨끈뜨끈한 몸통이 들러붙었다.

“응. 같이 갈 거야.”

순수하게 놀러 가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캐물으려면 캐물을 수야 있으나, 고단한 몸이 그만 자라고 외쳐 대는 통에 많은 질문들이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 눈꺼풀이 만근이었다.

보통 볼일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를 벗어나고는 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주신도는 해림의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불편해야 맞거늘, 등에 닿은 온기가 어쩐 일인지 이불처럼 포근했다.

몸도 씻어야 하고, 주신도도 벗어나야 하고, 여행은 무슨 이야긴지 물어봐야 하건만 몸이 마음처럼 따라 주질 않았다. 배를 느릿느릿 쓰다듬는 손도 졸린 아이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처럼 온화했다. 해림은 질문을 뱉을 듯 입술만 벌렸다 오므렸다 반복하다가 결국 한 마디도 못 뱉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해림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새어 나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배 위를 슬근슬근 쓰다듬던 손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입술 위를 맴돌았다. 닿을까 말까 망설이듯 머뭇거리다가, 결국 검지 끝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얕게 패도록 눌렀다.

입술에 뭐가 달라붙은 게 귀찮은지 해림이 으응, 작게 소릴 내며 몸을 뒤척였다. 손이 앉을 곳을 잃고 허공에 머쓱하게 떠 있다가 도로 배에 안착했다. 도닥이는 손길이 다시금 이어졌다.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은 없더니, 검고 굵은 먹구름이 하나둘 모여들다가 기어이 굵은 빗방울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물방울이 창을 긁어내리며 삭막한 숲을 적셨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숲은 푸른 잎사귀보다 앙상하게 헐벗은 나뭇가지가 많이 보였다. 아직 여남은 낙엽들도 비바람에 흔들리다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바람결에 물결처럼 흔들리는 숲을 바라보며, 해림은 목이 긴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잠시나마 주신도의 집에서 벗어나 숨을 돌리고 싶어 오랜만에 흡연실에 찾아왔다. 어느새 길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해림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테이블에서 집어 온 매끈한 지포 라이터가 손에 잡혔다.

주신도는 제집이라고 자랑이라도 할 셈인지 해림을 앞에 두고 서슴없이 담배를 피워 대면서, 정작 해림에게는 한 대도 권하지 않았다. 해림이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에헤이, 어딜 가. 그냥 여기 있어.」 하며 해림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다고 담배를 허용해 주지도 않았다. 해림이 언제 담배 한 대를 줄는지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도련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지. 지금도 몸이 약한데 담배 피우다가 요절하면 어떡할 거야. 절대 안 돼. 오늘부터 당장 끊어.」라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며 지는 해림 앞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안 보면 담배 생각도 덜 나겠지, 방으로 도망치려 해도 주신도가 긴 팔로 해림을 꽁꽁 감싸고서 보내 주지 않았다.

“…….”

그 당시엔 얄미워서 뺨을 찰싹찰싹 후려쳐 주고 싶었는데, 되돌아보니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뻔뻔한 태도가 애 같고 은근히 귀엽다.

해림이 피식 웃었다가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갓 떠오른 감상이 저답지 않았다는 건 둘째치고, 그 덩치에 다른 누구도 아닌, 이형이나 패거리처럼 아양과 애교를 탑재한 이들이 아닌, 주신도라는 게 충격이었다. 주신도가 손바닥만 한 강아지도 아니건만 귀엽다는 감상이 가당키나 한가.

금세 속이 답답해져 해림이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아무리 바퀴를 돌려도 칙칙거리며 불똥만 튀기고 정작 푸른 불꽃은 솟지 않았다.

왜 여기 올 때마다 라이터가 말썽인지. 오랜만에 니코틴 좀 섭취하나 했더니, 운도 지지리 안 따라 줬다.

해림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었다. 집으로 바로 돌아가 라이터를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똑똑.”

누가 입으로 내는 노크 소리에 창밖을 멀거니 쳐다보던 해림의 고개가 돌아갔다. 유리문을 열고 고개만 빠끔 들이민 남자가 해림을 보고는 잇몸을 다 드러낼 듯 환하게 웃었다.

“또 만났네요.”

저번에 이형이 신나게 욕해 대던 그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초승달처럼 굽은 눈매나 상시 미소가 달려 있는 입매 등, 인상은 일견 너그러웠다. 마침 라이터가 필요했던 터라 해림이 거부감 없이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다.

“라이터 좀 빌려도 됩니까.”

남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와서 줄 줄 알았더니, 남자는 해림과 의자 두어 개를 사이에 두고 앉아 긴 선반 위에 라이터를 놓고 옆으로 쓱 밀었다. 주는 방법은 어색해도 가까이 안 오니 마음은 덜 불편하다. 해림이 고맙다며 눈인사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랜만에 폐부를 감싸는 담배 향이 언젠가 먹었던 젤리만큼이나 달큼했다. 아무래도 금연은 머나먼 훗날에나 이루어질 성싶다.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해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볼에 닿는 시선이 살을 뚫을 듯이 날카로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가, 해림이 쳐다보자, 남자가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가면처럼 미소를 뒤집어썼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다고 내가 저번에 말했죠.”

그거 주신도가 개수작이라고 했는데. 혹시 정말 만난 적이 있나 싶어 해림도 남자를 들여다봤다. 눈썹부터 턱 끝까지 모조리 뜯어봐도 본 기억이 없다.

“혹시 광서 고등학교 몰라요? 우리 같은 학교 나왔는데.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십 대 시절을 보냈으니 어쩌다 우연처럼 동창 한 명쯤은 만날 수도 있었다. 우연한 만남의 장소가 여기라는 게 놀라울 뿐. 해림이 눈만 깜박이며 남자를 쳐다봤다. 저는 일절 모르겠건만 남자는 자신을 알아봤다는 점도 놀랍다.

“이쪽 보지 말고. 여기도 카메라 있어서 사장이 볼 수도 있으니까.”

뒤에 붙은 설명에 해림이 재빨리 고개를 틀었다. 남자도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해림을 모른 척했다.

남자는 담배 태우는 일이 목적이라는 듯 이후로 해림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해림도 마찬가지로 창밖을 봤다. 간간이 유리에 비치는 남자를 흘긋거렸으나, 역시나 기억엔 없다. 해림의 시선을 알아채고서 남자가 담배를 문 입술 끝만 씩 끌어 올렸다.

“혹시 이민혁이라고 기억나? 너하고 같은 반이었는데, 나랑 같은 신문부였거든. 걔하고 어울려 다니다가 너도 봤고.”

그 또한 모르는 인물이었다. 남들은 고등학교 시절이 추억이라고 하지만, 해림에게는 딱히 되돌아가고픈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학업에 열중하느라 바빴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친한 이들은 한둘이었고, 그마저도 유학을 가며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 과거에 누군가 저를 기억한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왔어? 해외 나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너는?”

동창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말을 놓을 근거가 되었다. 남자가 키득거렸다.

“말하자면 긴데. 너부터 이야기해 봐. 그럼 알려 줄게.”

“빚 갚으러.”

부친 장례식을 치르던 그 날 주신도에게 납치당하듯 끌려왔다는 긴 이야기를 네 글자로 요약해서 알려 줬다. 남자가 이해한다는 듯 아랫입술을 넙죽하게 늘어트리고 고개를 주억였다.

“다들 그러더라고. 빚 갚으러 왔다고. 네가 뭐 도박이나 이런 거 할 애는 아닌 거 같은데…….”

어림짐작했는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동창이라 했으니, 해림이 모르는 또 다른 인물이 안 좋은 소식을 전해 줬을 수도 있겠다.

해림이 씁쓸한 맛을 가시게 할 겸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한숨처럼 뱉은 연기가 빗줄기 쏟아지는 바깥으로 구불구불 흘러나갔다.

“너하고 여기 사장하고 어떤 관계인지 몰라서 자세히는 이야기 못 하겠는데. 알려 주라. 둘이 어떤 사이야.”

“채무자와 채권자.”

“그 이상은 아니고?”

“어.”

현재 같은 집에서 살고, 몸도 섞긴 하지만 고지할 의무는 없다. 해림이 딱 잘라 끊었다.

“너는 어쩌다 여기 들어왔어? 저번에 보니까 네가 나서서 계약했다며.”

해림이 주제를 돌렸다. 남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입에 걸린 비틀린 미소와 달리 유리에 비친 눈동자엔 기이한 빛이 번졌다.

“……사장 말이야. 내가 정말 간신히 알아냈거든. 여기까지 알아내는데 목숨 여러 번 잃을 뻔했어.”

남자가 말을 끊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뱉는다. 해림이 듣고 있으니 계속하라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본명도 계약하면서 알았어. 그만큼 안 알려진 사람이거든, 여기 사장이. 근데 모든 곳에 다 있지. 클럽부터 시작해서 마약에, 매춘에, 도박에, 정치에. 돈 되는 건 방위 산업 빼고 다 걸쳐 있다니까. 무기 밀매는 또 몰라. 하고 있을지도.”

주신도가 불법적인 일에 문어발을 걸쳤다는 건 해림도 짐작하던 바였다. 남의 입으로 들으니 그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귀엽다는 감상은 역시나, 주신도와 어울리지 않았다.

“원래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여기 아니면 사장 실물을 볼 수가 없어서 결국 왔어. 그랬는데 너도 보고. 세상 참 좁네.”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자란 직업이 퍼뜩 떠올랐다. 묻지 않아도 남자의 직업이 눈에 선히 보였다.

“그래서, 넌 언제 나갈래? 난 어차피 3개월 단기 계약이라 그때까지만 얌전히 있으면 되는데.”

주신도가 손님을 받게 내버려 두질 않아 빚은 그 위에 이자가 더께처럼 쌓였다. 어떻게 될는지는 해림도 몰랐다. 저번에 이형에게 그랬듯이, 주신도가 차가운 눈길로 저를 쳐다보며 할당치를 못 벌었다고 한소리 하는 상상이 직접 본 듯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글쎄.”

“혹시…….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원하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

“왜?”

해림이라고 탈출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처음은 산책으로 끝이 났고, 두 번째는 약을 먹고 끝이 났다. 둘 다 결과가 최악이었다. 게다가 잘못 걸렸다가는 지하에 대롱대롱 매달릴 인형이 저와 눈앞의 동창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분명 호의겠으나, 해림은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라니. 여기서 평생 썩을 수는 없잖아. 빚이 한두 푼은 아닐 거고. 일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여기 왔는지 대충은 알 거 같아. 네 발로 찾아오진 않았겠지.”

담배가 다 타들어 갔다. 해림이 미련이 남은 듯 담배 끝을 내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같은 시간에 여기 매일 올 거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알려 줘. 도와줄게.”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남자는 해림이 문을 열 때도 돌아보지 않았다. 창에 비친 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는, 남자가 찡긋하며 인사 대신 윙크를 보냈다.

“고마워.”

도움을 청하는 날이 올지는 몰라도 저를 신경 써 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해림이 스쳐 지나가듯 인사하고 흡연실을 나왔다. 그나마 아군에 가까운 인물이 등장했건만, 마음은 누가 손을 깊숙이 넣어 휘저은 듯이 어수선했다.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까맣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해림이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 * *

주신도는 업무량이 넘쳐 나도 비서를 따로 두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일들도 웬만해서는 제 손으로 처리하고는 했다. 이렇게 기술이 발달한 세상에 스케줄 관리를 사람에게 맡겨서 무엇 하느냐고 기계로 대체했다. 남들을 못 믿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홀로 일하는 게 익숙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아랫사람에게는 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없었다’ 과거형이었다. 영수는 빽빽한 글자들을 보다가 눈을 꾹꾹 눌렀다. 예전에는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해도 뭘 그런 걸 하냐고, 본인이 하겠다고 말리던 주신도가 요새는 영수에게 하나둘 일을 미뤘다. 못 할 일은 아니나, 나름 굵직하게 가게 운영에 힘쓰던 영수에게는 아주 약간 귀찮은 일들이었다. ‘혼자서도 잘해요’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과거의 주신도가 문득 그리워졌다.

요새는 사람이 나사가 빠진 듯이 칠렐레팔렐레해 가지고는. 과거의 영광은 어따 팔아먹었나 싶었다. 영수는 사납던 형님의 과거를 떠올리며 먼 산을 바라봤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지하에서의 일이었다. 원초적 본능을 다 끄집어내는 곳이라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운 인간들이 많았는데, 그날도 본능을 못 이기고 사고를 쳤다. 약을 처먹은 손님이 직원 중 한 놈의 얼굴 가죽을 죄다 긁고 뜯어 놓은 것이다.

다른 직원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손님들은 볼거리 생겼다고 깔깔대거나 구석에 숨어 있지, 범인은 낄낄대며 애 얼굴을 잡아 뜯고 있지, 피는 바닥에 물웅덩이처럼 퍼졌지, 난장도 그런 난장이 없었다. 보통 아랫것들을 보내 조용히 일을 해결하는데, 때마침 그 자리에 주신도가 있었다. 약을 조달하는데 작은 문제가 생겨서 들렀었나, 그랬더란다.

덩치들이 말려도 주신도가 척척 여유롭게 걸어가 고삐 풀린 미친개처럼 거품 물고 날뛰는 범인을 단번에 제압했다. 목뒤를 내리누르는 손짓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지, 조직원들도 다들 혀를 내두르며 그 와중에도 감탄을 터트렸다.

주신도가 목을 잡아 눌러도 손님은 약에 취해 앞뒤 분간 못 하고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바람에 주신도의 뺨에 길게 상처가 났다. 손톱으로 긁힌 얕은 상처임에도 제 볼에서 난 피를 보고는 불그스름한 눈동자도 같이 맛이 가더라.

「드릴 가져와.」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으려는 조직원의 옆구리를 푹 치고 눈빛으로 입 닥치고서 가져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전동 드릴을 가져다 바치자 주신도가 웃으며 차가운 쇳덩이 끝을 남자의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사람 패는 재미를 여기서 보시면 어떡합니까. 돈 더 내시고 아래층으로 가셨어야지.」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에는 옷을 쑤셔 넣고, 발로는 짐승 다루듯 목을 짓밟은 채 드릴을 돌렸다. 아무리 입을 막아도 비명은 터져 나왔고, 발아래 깔린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고, 구경하던 이들도 주신도의 상식을 뛰어넘는 폭력에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흰자가 위로 해까닥 돌아간 후에야 주신도가 드릴을 거뒀다. 남자는 시체처럼 늘어져 조직원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손님들조차 웃지 못하고 벌벌 떨며 주신도를 미친 짐승 보듯이 볼 때였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 주신도가 뺨과 턱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 털어 내며 드릴을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 드릴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토록 클 수가 없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주신도가 아무렇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 손을 꼼꼼하게 닦았다. 평범한 어투로 피가 잘 안 지워진다며 욕도 했다.

손을 얼추 닦아 내고서는 손수건을 버리며 좌중을 돌아봤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손님을 마주하는 특유의 접대성 미소가 무지개처럼 피었다.

「아이고, 재미있게 노시는데 제가 방해를 했네요. 이걸 어쩜 좋담. 저분은 너무 취해 가지고 조금 조치를 취한 거고요. 손님들은 아직 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아직 새벽도 안 됐어요.」

아무도 주신도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얼굴 뜯는 일은 즐겁게 봐도 사장이 직접 나서서 손님의 대가리에 드릴 뚫는 장면은 좋게 봐 줄 수가 없었다. 그 머리가 제 머리가 될 수 있어서 다들 공포가 앞선 듯이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를 망친 죄가 있으니 갚아야지. 사장이 되어서 우리 손님들 겁주면 쓰나. ……얘들아. 오늘 손님들 즐겁게 놀다 가시게 있는 거 다 풀어라. 응, 어제 들어온 거 있지. 그것도 풀고 부엌에도 전해. 오늘 다 공짜라고.」

주신도의 명령을 제일 먼저 알아들은 사람은 영수였다. 그가 재빨리 조직원들에게 창고에 보관한 약들을 최대한 많이 가져오라 일렀다. 투약량 이상 넣어 죽든 말든 공개 처형―다행히 목숨은 보전했다지만― 장면을 무마시키는 게 먼저였다.

가게에서 가장 비싼 양주와 샴페인과 약을 무한대로 뿌렸다. 바닥에 설탕처럼 뿌려진 가루를 흡입하고 가끔은 주사를 맞으며 손님들은 드릴 장면을 문제 삼지 않았다. 약에 취해서 저들이 본 게 헛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터였다. 그날 허공에 뿌린 돈만 억 소리가 났다.

그런 적이 있었는데. 지금 주신도는 꿀에 절인 살구처럼 몰랑몰랑해서, 드릴을 쥐여 줘도 이게 뭐냐며 바닥에 내팽개칠 듯하다. 본성이 어디 가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그랬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유리가 눈 밑이 퀭하게 물든 영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리도 요새 들어 눈 아래가 까무잡잡하니, 과로에 시달리는 사람의 몰골이 영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번에는 안 가요?”

“예.”

저번엔 영수가 싫다고 뻗대도 가드 한 명은 의례상 필요하다며 기어이 옆구리에 끼고 출장을 갔더란다. 이번엔 두고 가서 천만다행이었다. 비록 다른 때라면 본인이 처리했을 일을 영수에게 넘기고 가긴 했어도. 그나마 어느 정도 손에 익은 일이라 우왕좌왕하지는 않았다.

“정하 씨는 끌고 갔다면서요.”

불쌍하다는 듯 유리가 쯧쯧 혀를 찼다. 그 성질머리를 바로 옆에 붙어서 감당해야 한다니, 란 의미가 다분히 내포된 행동이었다. 유리가 건넨 서류를 눈에 담다가 영수가 느리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으으, 하는 앓는 소리가 절로 터졌다.

도련님이라 불리는 말간 청년은, 암암리에 주신도가 들인 애첩이라고 조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짜하게 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만 찾던 양반이 뭐에 눈이 뒤집혀서 남자를 만나냐고, 들키면 적어도 전치 3주 나오게 얻어터질 소리 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제 명대로 살고 가려면 입단속 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면서도 영수는 속으로 동의했다. 뭐가 아쉬워서 남자를 끼고 노냐는 그 말에.

도련님이 주신도의 눈에 띄려고 지랄발광을 하고 역겨운 애교를 떨어 대는 인간이었으면 영수는 계속 그 생각을 유지하려 했다. 아니었다. 입장이 반대였다. 도련님이 희생자였고 주신도가 제 배 채우려고 목덜미를 물고 온 먹이였다.

놔뒀으면 그 잘난 얼굴로 어떻게든 괜찮은 손님 물어서 빚 털고 나갔을 인물이었다. 여기 오래 있다 보니 빠져나갈 상(相)들이 대체로 보이는데, 도련님이 딱 돈 많은 손님들 구미에 맞는 얼굴이었다. 잘만 하면 무난했을 그 인생에 주신도가 거하게 태클을 걸며 들어온 것이다.

“사장은 대체 정하 씨하고 뭘 하고 싶은 건지. 영수 씨 눈엔 어떻게 보여요?”

“글쎄요.”

“그러지 말고. 제일 가까이서 보는 사람이잖아, 영수 씨가.”

놀랄 일은 몇 번 있었다. 주신도는 영수가 보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련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도련님이 영수를 발견하고 움찔하니, 가만히 있으라며 은근한 콧소리―애교라는 단어가 퍼뜩 떠올랐으나 매우 불경한 생각이라 얼른 지웠다―를 섞어 압박했다. 보다 못한 영수가 바깥으로 나가 있겠다고 먼저 청한 적도 있었다.

영수가 사장실 밖으로 나가기 전, 슬쩍 주신도를 쳐다봤었다. 주신도는 누운 채 서류를 들고 보느라 영수에게는 잘 가라는 손짓만 설렁설렁 보냈다.

그때 표정이 어땠더라.

평소와 같은 이목구비인데도 묘하게 달랐다. 숨 쉴 수 있는 깊고 잔잔한 물속에 머리끝까지 빠진 사람처럼 나른하고 느슨했다. 매 순간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고 보이지 않는 벽을 두르고 살던 양반이 그때는 꼭.

편안해 보였다.

“왜 내 눈엔 그게 다 수작으로 보일까……. 꼭 사랑에 빠져서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사람 같고.”

유리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 사랑에 빠지다니, 주신도의 잔인한 면모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이 바닥에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유리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워 영수가 핏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사장님이요?”

“영수 씨, 사람 일 그거 모르는 거예요. 목석이라고 알았던 인간이 내일은 둘도 없는 로맨티시스트가 될 수도 있고, 감정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눈뜰 수도 있는 거지.”

유리가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툴툴거렸다. 최근 드라마에 빠졌다고 하더니 현실과 혼동을 일으킨 듯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형님하고 너무 안 어울려요.”

“……그건 그래. 그 사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거든요.”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누구든, 주신도를 옆에서 본 인물이라면, 그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끓이며 달려들었는지, 주신도가 그 정성을 어떻게 무시했는지 본 사람이면 당연히 나올 반응이었다.

“근데……. 정말 모를 일이죠.”

유리가 미련이 남은 듯 덧붙였다. 억측일 수도 있다. 주신도가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하나 찾은 거 가지고 사랑이니 뭐니. 낯간지러운 단어라 주신도에게 갖다 붙이기도 민망했다.

“정하 씨만 안 됐어요. 어쩌다 걸려도 사장한테 걸렸대.”

“그 덕에 다른 손님 안 받고 편하게 사니까, 그쪽한텐 더 좋은 일 아닐까요.”

주신도가 놔뒀으면 여기를 뜨기 전까지 손님들 사이에서 사정없이 굴렀을 테니 달리 보면 방패가 생긴 셈이었다. 방패보다는 사방이 막힌 감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도련님에게 주신도는, 굳이 표현하자면 양날의 검이었다. 이리 잡아도 피를 보고 저리 잡아도 상처가 난다. 도련님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이야기였다.

“실장님, 여기 이거 오류 났어요.”

“어머, 어디요?”

눈으로 서류를 훑다가 영수가 종이 구석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유리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싹 달려들었다. 사장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었다. 둘이 홍콩에서 데이트를 하건 일을 하건, 저에게 중요한 건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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