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3권) (11/21)

1.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끝없이 올라갔다. 언제 합류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주신도와 인오 외에도 비슷한 정장을 입은 덩치들이 몇몇 더 붙었다. 인상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지 다들 험상궂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중 한 명은 얼굴이 익었는데, 자세히 보니 예전에 주신도와 외출했을 때 운전을 맡은 이였다.

과연 저가 끼어도 되는 자리인지 의문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대답해 줄 주신도를 흘긋 올려다봤으나 일견 평연한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뒤에 포진한 이들은 어디 전쟁터라도 나갈 듯이 하나같이 얼굴이 결연해 엘리베이터가 긴장으로 터져 나갈 성싶은데, 주신도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입매며 눈가에 긴장이 한 터럭도 배어 있지 않았다.

주신도가 해림의 시선을 눈치채고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럽게 ‘통역’ 하고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르르 몰려 내렸다. 유리 너머로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술집이었다. 테이블 아래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조명이 어둑한 바를 비추었다.

주신도의 등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배인으로 보이는 이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땅에 코에 닿을 듯이 허리를 굽히며 말을 거는데, 역시나 중국어라 해림은 알아듣지 못했다. 주신도가 고개를 까닥이고는 해림의 어깨에서 팔을 내렸다. 무게와 온기가 사라진 어깨를 해림이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지배인이 바를 가로질러 커다란 문 앞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자 바만큼이나 넓은 방이 드러났다. 이미 한 무리가 그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 이형을 구하려고 인오에게 변명 삼아 내뱉었던 이들이 아닐까 짐작이 갔다. 가운데 의자를 차지한 거구가 주신도를 보고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주신도도 빙긋 미소를 띠었다. 한연동에서, 해림을 두들겨 팼던 이사를 봤을 때와 똑같은 미소였다.

자리에 앉기 전에, 남자 몇몇이 몸수색을 하겠다며 손을 뻗었다. 해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목과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와 옆구리를 차례대로 더듬어 올라갔다. 주신도도 두 손을 들고 서서 검수를 받았다.

허리를 굽힌 남자가 주신도의 허벅지 위를 유독 집요하게 더듬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오른쪽 윤곽을 손에 쥐어 봤다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손을 뗐다.

“왜 자꾸 남의 자지를 잡고 지랄이야. 기분 좆같게.”

“형님 자지가 총 같은가 보죠.”

인오가 키득거렸다. 주신도는 입술은 웃되 내려다보는 눈초리는 몸수색하던 사람을 씹어 먹고 싶다는 듯이 매서웠다. 남자가 흡 숨을 삼키며 재빨리 수색을 마치고 뒤로 물러났다.

몸수색은 생각보다 이르게 끝났다. 인오가 테이블에서 의자를 잡아 뺐다. 주신도가 자연스레 착석했다. 해림이 무리에 섞여 서 있으려 했는데, 인오가 의자 두 개를 더 빼서 주신도 옆자리에 해림을 앉혔다.

“가만히 앉아 있어.”

인오가 해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통역을 맡으라 했으니, 위치 선정은 이게 최선일 수도 있다.

음식과 술이 테이블이 미어져라 깔렸다. 술이 오가고 말이 오갔으나, 해림은 그들이 주고받는 단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쩌다 영어라도 뱉으면 여기 온 목적을 하나라도 이룰진대, 죄다 중국어였다. 농담이 오가는 분위기면 주신도와 인오만 의례적인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주신도는 대화를 나누는 종종 음식을 해림의 앞자리로 밀었다. 저는 술 이외엔 손도 안 대면서. 이런 불편한 자리에서 빈속을 채울 주변머리는 없어 해림도 차로만 목을 축였다. 먹은 건 호텔에서 주워 먹는 주전부리가 전부인데도 허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네.]

드디어 들린 익숙한 언어에 해림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반대쪽에 앉은 거구가 해림을 보고 있었다. 두꺼비처럼 너부죽한 입술에 상체가 씨름 선수처럼 다부졌다. 주신도가 입을 열어 시선이 금방 떨어지기는 했어도, 타르처럼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은 눈길이 인오가 줬던 눈빛만큼이나 불쾌했다.

대화 내도록 해림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간간이 저에게 눈길이 닿았던 일 외에는 주신도와 인오와 상대방의 일방적인 대화였다. 물론 해림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상대가 손짓을 보내며 대화가 끝이 났다. 테이블에 잔뜩 쌓인 음식은 빈 그릇이 하나도 없었다. 주신도 쪽이나 저쪽이나 누구도 음식에는 손을 안 댔다는 증거다. 빈 술병만 테이블 구석에 하나둘 서 있었다.

종업원이 들어와 테이블을 깨끗하게 치웠다. 텅 빈 테이블에 까만 서류 가방이 올라왔다. 옆에 선 이가 번호를 누르고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 밀가루처럼 뽀얀 가루가 담긴 비닐 팩이 일렬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주신도가 그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뽑아 제 앞에 놓았다.

“데려와.”

옆에 선 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곧 추레한 차림에 비쩍 마른 중년 남자가 비척거리며 끌려왔다. 방 분위기에 위축된 듯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충혈된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지독한 냄새에 꾀죄죄한 몰골이 영락없이 노숙자였다.

남자가 침을 꼴깍 삼키며 테이블에 놓인 가루를 쳐다봤다.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개처럼 힘이 없더니, 비닐 팩을 발견하고는 주인 없는 돈다발이라도 본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주신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득달같이 테이블 앞으로 달려왔다. 주신도가 주머니칼로 비닐 팩에 칼집을 냈고, 터져 나온 가루에 남자가 코를 박았다.

흐읍, 하고 남자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코와 턱에 흰 가루가 밀가루 포대 속에 빠졌다 건진 듯이 묻었다. 광대 분장처럼 우스꽝스러운데도 방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남자의 눈이 몽롱하니 풀렸다. 팔다리도 휘청거리다가 테이블에 상체가 엎어졌다. 테이블에 처박힌 고개가 해림 쪽으로 틀어져 있으나 바라보는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동공은 확장되고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질질 새며 눈빛은 꿈속을 헤매듯 황홀감에 취해 있었다.

해림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칫하며 뒤로 물렸다. 고개를 돌리고 싶으나 그랬다가는 이 이상한 자리에서 저만 홀로 튈 터였다.

해림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테이블 밑에서 주신도가 손을 잡아 왔다. 안심하라는 듯 한 번 꽉 쥐고서 멀어졌다.

[우리는 치사하게 뭐 섞고 그러지 않아. 정품만 고집하거든. 이 바닥에서 신뢰 빼면 시체지. 주 사장이 누구보다 잘 알잖나.]

거구가 해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해림이 내용을 정리해 주신도에게 속삭였다. 주신도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치워.”

덩치 둘이 남자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질질 끌고 나갔다. 주신도는 가루를 손가락 끝에 찍어 검지와 엄지로 문지르고서 툭툭 털었다. 주신도가 삐딱하게 틀었던 고개를 바로 하자 상대편에서 재빨리 테이블에 널브러진 가루를 수습했다.

상대가 일어나 주신도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주신도가 그 손을 단단히 마주 쥐었다. 얼굴에는 처음과 다를 바 없는 화사한 미소가 떠 있었다. 일이 술술 잘 풀린 듯이.

거구는 인오의 손도 잡고 마지막으로 해림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저가 악수를 할 위치가 아닌데도, 분위기에 휩쓸려 해림이 얼떨결에 손을 마주 잡았다.

가볍게 잡고 말려는데, 큼지막한 손아귀가 해림의 손을 놓아주질 않았다. 해림의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서 손바닥 가운데를 검지로 슬그머니 긁었다. 그 희롱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 해림이 있는 힘껏 손을 잡아 뺐다.

상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해림을 제외하고는 축제 분위기였다. 겨우 손바닥 한 번 긁힌 걸로 잘 마무리된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기에 해림이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주신도는 방을 벗어나고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가면처럼 미소를 뒤집어쓰고 차에 올라탔다. 뒤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인오와 해림, 주신도만 남았다. 차가 유유하게 건물을 빠져나오고 나서, 주신도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열었다.

“……씨발.”

첫마디가 욕이었다. 해림이 창에 비친 주신도를 흘끔 바라봤다. 손바닥에 남은 불쾌감을 없애려고 쥐었다가 펴는데, 주신도가 대뜸 팔을 잡아당겼다.

“거기 물티슈 줘.”

인오가 물티슈를 뒤로 넘기자 뽁뽁 뽑아 해림의 손바닥을 벅벅 문질렀다. 통증이 느껴질 만큼 거친 손길이었다.

“그 씨발 돼지 새끼는 왜 남의 거에 함부로 손대고 지랄이야. 팔 잘리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도련님도 그래. 몸수색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돼지가 손잡는 건 왜 멍청하게 놔둬. 영어도 잘한다면서. 씨발 꺼지라고, 어디서 족발을 내미느냐고 욕을 쏴 줬어야 할 거 아니야.”

저를 생각해서 입 꾹 닫은 것도 모르고. 억울함을 느낀 해림이 손을 잡아 빼려 했다. 주신도가 손목을 콱 틀어쥐고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까지 꼼꼼하게 닦았다.

“고작 악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왜 그러세요, 형님.”

보다 못한 인오가 한마디 거들었다. 주신도가 물티슈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홱 던졌다. 창밖을 바라보며 또 욕을 한다.

“너, 일 처리 제대로 했어?”

“물론이죠. 빠짐없이 보고서 올렸잖아요.”

“그런데 팔 대 이? 저 씨발놈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어서 대가리가 안 돌아가나, 어디서 감히 좆같은 비율을 대고 지랄들이야. 어디서 유통업자 취급인데. 우리가 사러 왔지 배달하러 왔냐.”

“형님, 진정해요. 그래도 우리한테 판다는 게 어디야. 저놈들하고 거래 틀려고 다들 얼마나 개떼처럼 달라붙는지 알아요? 북한, 캄보디아, 심지어 남미에서 나는 것도 아시아에 뿌려지는 건 다 여기로 흘러들어 와요. 순도 높지, 본토 쪽 유통망도 탄탄하지, 잘만 하면 우리가 일본하고 연결하는 다리 역할도 할 수 있어요. 비율은 좆같아도 들어오는 돈은 쏠쏠하다구요. 미래를 봅시다.”

“우리 인오, 여기 오래 있더니 감 떨어졌구나. 너한테는 그리 보이디. 위험 부담은 우리가 갖고 저 새끼들은 우리가 굿판 벌이면 떡하고 돼지머리까지 싹 다 털어 먹으려는 거 아냐. 팔 대 이는 씨발, 좆같아서.”

주신도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리다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해림에게 자연스레 라이터를 건네고서 담배를 물고 고개를 기울였다. 익숙한 버릇대로 해림이 불을 켰다. 둥근 끝에 주홍색 불이 붙었다.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시라니까요.”

인오가 투덜거리며 창을 열었다. 주신도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한 손으로 쓸어 올리고 창에 팔을 걸쳤다.

“이참에 너도 확실히 알아 둬. 우리는 공급처가 필요한 거지 그 새끼들 한국 분점 세워 주자는 게 아니야. 그딴 식이면 품질이고 양이고 뭐고 거래 깨는 게 나아.”

“형님, 이 거래 틀려고 우리가 몇 년을 개고생했는데요. 조금 더 고려해 보는 건 어때요. 비율은 조정 가능할 테니까. 지금 와서 포기하기엔 공들인 게 너무 아쉽습니다. 그러지 말고…….”

전화가 울려 인오가 말을 끊었다. 스피커로 돌려 차에 상대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려 퍼졌다. 인오가 얼핏 굳은 얼굴로 주신도를 흘끔 바라봤다. 주신도가 괜찮다며 손을 휘저었다.

통화는 금방 끝났다. 해림은 알아듣지 못해 눈치껏 분위기를 살폈다.

“어떻게 할까요.”

“…….”

주신도가 말없이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담배 길이가 짧게 줄어들고, 창밖으로 꽁초를 휙 던진 후에야 주신도가 입을 열었다.

“차 돌려.”

무슨 말이 오갔던 걸까. 다시 돌아가서 그 거구를 보고 싶지는 않은데.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힐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신도 옆에 꾹 붙어 있으면 그래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해림이 애써 덤덤하게 여기며 창밖을 쳐다봤다.

예상과 달리 주신도는 해림을 차 안에 남겨 두고 인오와 단둘이 올라갔다. 영어를 통역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아니었나. 해림은 홀로 차 안에 남아 어두운 지하 주차장을 내다보며 주신도가 이제 오려나, 저제 오려나 오매불망 기다렸다.

밀림 한가운데 떨어트려도 상처 하나 없이 집에 돌아올 주신도인데, 방에서 본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 괜스레 마음이 바짝바짝 졸아들었다. 해림이 엄지 살을 잇새에 끼우고 잘근잘근 씹었다.

하얀 가루는 분명 마약이었다. 들이마시고는 곧 기절할 듯 몽롱하게 변한 남자가 그 증거였다. 비정상적으로 커진 새카만 동공, 뻘겋게 충혈된 흰자위, 거스러미가 잔뜩 올라온 푸르스름한 입술 등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위험한 곳이었다. 앞에서는 웃어도 한 마디만 삐끗하면 칼부림이 날지도 모를 분위기였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이 짙어졌다. 여기서 저가 올라간다 한들 상황을 개선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해림이 치미는 초조함을 꾹꾹 내리눌렀다.

한숨을 열 번 넘게 쉬고서, 해림이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그러다가 문득 가슴을 가득 메운 불안감에 의문을 품었다.

주신도였다. 저에게 빚을 지운 사람이었다. 몸을 팔라고, 남창이나 하라고 저를 납치한 인간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주신도가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게 저에게는 이득이었다.

주신도가 잘못되면.

저는 자유를 되찾는다.

해림이 깍지 낀 손으로 입을 꾹 눌렀다. 가슴이 철렁했다. 도달한 결론이 무서웠다. 상자 속에 넣고 다시는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을 만큼. 한데 동시에 명쾌한 사실이었다. 저와 주신도는 아직 그런 관계였다. 벗어난 적이 있나. 있다고 감히 말하기 어려웠다.

해림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관자놀이가 바늘로 쑤시듯 지끈거렸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나오는 증상 중 하나였다. 해림이 열다섯 번째 한숨을 쉬었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 해림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다가오는 인영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인오가 운전석 문을 열고 털썩 앉았다.

“사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형님이야 뒤풀이하러 갔지.”

“뒤풀이요?”

거래가 잘 성립되었단 말인가. 어쨌든 주신도는 무사한 듯싶었다. 해림이 내심 안도했다. 바로 내려오지 않은 무심함은 조금 섭섭했다. 검지로 엄지 지문 위를 문지르자, 얼마나 오래, 많이 씹어 댔는지 울룩불룩한 잇자국이 조각처럼 남아 있었다.

“어. 그 양반들이 술 마시고 노는 거 좋아해서. 예쁜 애들도 많고.”

인오의 설명에 해림의 입매가 움칫했다. 여자를 양쪽에 앉혀 놓고 방탕하게 노는 주신도가 눈앞에 본 장면처럼 그려졌다. 인오가 차에 시동을 걸며 해림을 룸미러로 흘긋 살폈다.

“이 건물에 있는 거 아닙니까.”

“자리 옮긴 지 오래야. 형님이 너 그쪽으로 데리고 오란다.”

인오가 룸미러로 해림과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목덜미에 스산한 기운이 스치게 하는 미소였다. 해림이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거북스럽다. 차라리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할 성싶었다.

차는 빌딩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호텔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접대부를 부를 만한 술집이 딸려 있나 아무리 고개를 빼고 살펴도 이렇다 할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뒤풀이라고…….”

“어. 술집이 여기 위층에 있어.”

라운지라면 위층에 있기야 하겠지만.

주신도가 다른 이들과 시시덕거리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어린애처럼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주신도를 걱정하느라 불안에 떨던 시간을 내심 아까워하며 해림이 차에서 내렸다.

인오가 앞장섰다. 로비를 통과해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데, 인오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인오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버튼을 눌렀다. 벨이 멎고 화면에 통신사 로고가 떴다가 까맣게 죽었다.

“전화 안 받으십니까.”

“별걸 다 궁금해하네.”

인오가 실실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차 안에서 홀로 기다리며 느꼈던 기이한 불안감이 수그렸던 머리를 들었다. 불길한 감이 목덜미를 긁었다. 해림이 인오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인오가 눈동자만 옆으로 느리게 돌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형님만큼 잘생기긴 했지, 내가. 아까 말한 건 진심이니까 꼴리면 언제든 연락해. 나도 형님이 아끼는 거 좀 먹어 보자. 얼마나 맛있나.”

인오가 야비한 목소리로 느물거렸다. 괜한 착각인가. 그러기엔 손끝 발끝을 바짝 긴장시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불길한 예감이 발목을 잡아챘다. 앞으로 가지 말라고 어깨도 내리눌렀다. 밝은 복도가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괴물처럼 보였다. 그간 한연동에서 쌓인 다사다난한 경험이 해림에게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난잡한 현장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까.

“뭐 해?”

그런 단순한 이유라면 좋을 텐데.

인오가 해림에게 손을 뻗었다. 해림이 아직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넣을 듯한 걸음 물러났다. 인오가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형님이 방에 있는데 어딜 가려고.”

“사장님이 방에 계신다고요.”

“그럼.”

반신반의하면서 해림이 질질 끌려갔다. 손을 뿌리치려 해도 인오가 손아귀에 힘을 주며 해림의 팔뚝을 비틀어 짰다. 해림이 이것 좀 놓으라고 해도 인오는 앞만 보고 걸었다.

방문 앞에선 거부감이 더 심해졌다. 해림이 가까스로 인오의 팔을 뿌리쳤다. 저릿저릿한 팔뚝을 문지르며 인오를 똑바로 쳐다봤다.

“사장님한테 제가 직접 전화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방 안에 있다니까 왜 이렇게 지랄이야. 나 못 믿어?”

믿을 수 있을 리가. 해림이 입을 꾹 다물자 인오가 하, 하며 코웃음을 쳤다. 고개를 수그린 채 못 말리는 애 보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눈동자만 위로 들었다.

“눈치는 좀 있네.”

해림의 예감이 맞았다. 뭐가 되었든 안에 들어가서 저에게 좋을 일이 없었다. 해림이 도망치려 하자 인오가 냅다 멱살을 잡고 벽에 쿵 소리가 나도록 밀쳤다. 해림의 발끝이 간신히 바닥에 닿도록 밀어 올리고 코앞에서 이를 드러냈다.

“너,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돼? 형님이 널 왜 구태여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생각해. 통역? 순진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해림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인오의 손을 움켜잡았다. 억세게 잡은 손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단단하게 지탱한 인오의 다리도 해림을 잡아 놓는 데 한몫했다.

숨이 막혀 얼굴이 벌게진 이 상황보다, 해림은 그다음에 인오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그게 더 두려웠다. 귀를 막고 싶었다.

“너 팔려고 데려온 거야. 저쪽 씨발놈이 너 같이 곱게 생긴 것들 후장 빠는데 환장해서. 남창이면 남창답게 고분고분 다리 벌리고 대 주면 될 것이지 어디서 안 된다니 어쨌다느니 반항이야. 형님이 널 존나 예뻐한 건 아는데, 쓸 땐 써야지.”

“이거 놓, 윽!”

소리를 지르면 다른 방에 있는 누구라도 도와주지 않을까, 입을 벌렸으나 인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해림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씁쓰름하고 시큼한 맛이 손수건에 배어 있었다. 두 번째 손수건이 코를 막았다.

“솔직히 말해 줘? 형님이 허락했어. 너 팔고 오라고. 그래야 우리한테 유리하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안 간다고 지랄할 거니까 자기가 오라고 했다 말하라고. 그러니 눈 딱 감고 즐기고 와.”

온몸에 힘을 주고 반항하던 해림이 우뚝 굳었다. 주신도의 허락이 있었다는 그 말이 해림을 조종하던 실을 뚝 끊은 듯싶었다. 흔들리는 해림의 눈동자를 보고 인오가 밝게 웃었다.

바닥을 긁던 다리가 서서히 느려졌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인오의 팔을 후려치던 주먹에도 힘이 빠졌다. 해림의 눈이 졸음과 사투를 벌이듯이 느릿느릿 끔뻑이다가 이윽고 깊게 감겼다.

잠들면 안 돼. 정신 차려. 일어나.

머릿속 목소리가 맹렬하게 외쳤다. 해림이 명령을 따라 묵직한 눈꺼풀을 들었다. 팔다리가 남의 것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목도 아프고 머리도 핑핑 돌았다. 해림이 눈을 깜박이며 엄지발가락을 움직였다. 다행히 몸뚱이가 아직 뇌의 명령을 따르기는 했다.

사방이 밝았다. 해림이 눈동자를 굴리며 어디인지 확인했다.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등 뒤가 푹신한 걸 보아하니 침대 위에 있는 듯싶었다. 한쪽 팔이 저려 고개를 돌리니, 침대 머리와 연결된 끈이 보였다. 팔목을 잡아당겨도 끈은 풀어지지 않았다.

쓰러지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바로 떠올랐다. 인오가 호텔로 저를 데려왔고, 가지 않겠노라 말을 했고, 손수건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고, 그리고 이렇게 침대 위에 묶였다. 하나 저가 처한 상황보다는 인오가 떠들어 댄 말이 더욱 뇌리에 생생하게 남았다.

주신도가 저를 팔았다. 왜 데려왔는지 인오가 이유는 충분히 설명해줬다. 남창 하나가 필요했다고, 상대가 남자를 좋아해서 데려왔다고.

“하…….”

해림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감상도 한편으로 피어났다.

주신도에게 뭘 기대했던 걸까. 뭘 그렇게 걱정하고 생각했지. 이런 결말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건 항상 염두에 두지 않았나. 왜 기대감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무럭무럭 자라서 이렇게 큰 실망감을 안겨 주지. 주신도가 뭐라고. 한연동에서 줄기차게 봤던 그 모습,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속이 꽉 막혔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고 욕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멱살을 잡고 흔들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속을 태우는 불길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인오의 발언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애초에 주신도는 저를 남창으로 데려왔고, 적당히 쓰일 곳이 있어 넘겼을 뿐이다.

앞머리를 내리고 소년처럼 씩 웃던 그 얼굴, 커피를 마시고 쓰다며 찌푸려지던 눈썹, 분명 제 취향이 아닐 텐데도 군말 없이 딤섬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뺨, 바람결에 날렸던 머리카락, 제 어깨에 닿았던 온기와 야경의 빛을 다 머금었던 눈동자, 세상의 모든 게 궁금한 아이처럼 쏟아 내던 질문들, 그리고.

해림이 눈을 감았다 떴다. 눈물이 눈꼬리에 맺혀 있다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마음이란 게 눈에 보이면 좋을 텐데. 눈에 보이질 않으니 얼마나 많은 양이 저쪽으로 흘러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에 잡히는 거라면 흘러가는 게 보이는 즉시 죄다 잡아 제 통 안에 욱여넣었을 것을.

인기척이 느껴졌다. 해림이 침대를 짚고 상체를 세웠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눈이 익었다. 해림에게 악수를 청하고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었던 남자였다. 주신도 못지않은 거구에 칼끝처럼 날카로운 눈매 끝이, 웬만한 사람은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릴 생김새였다.

[좋은 걸 준다더니. 주 사장이 아주 멍청이는 아니네.]

남자가 손목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해림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몸에 얼추 힘이 돌아왔다.

원망이든 실망이든 복수든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어떻게든 이 방을 벗어나 대사관에 가고, 더 나아가 한연동에서, 주신도에게서 벗어나리라. 해림이 끈을 손에 말아 쥐고 팔뚝에 근육을 세웠다. 질겨서 바로 끊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봐도 참 예쁜 얼굴이야. 그 새끼는 어디서 이런 걸 잘도 주워 와서.]

남자가 해림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다가왔다. 허벅지 굵기의 잉어와 일그러진 한야의 낯짝이 어깨와 팔뚝, 등허리와 가슴을 휘감고 있었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문신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잘못 안 거야. 여기 올 계획은 없었어. 날 그냥 보내 줘. 다른 사람을 찾아.]

해림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남자가 푸하하, 하고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뚝 멈추고는 침대 위에 올라왔다.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해림 위에 올라타, 끈을 잡아당기느라 분주한 손을 내리눌렀다. 거대한 그림자가 해림의 상체 위로 드리웠다. 해림의 낯빛이 흡사 백지장처럼 희게 물들었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데, 그쪽이 널 보낸 거 맞아. 비율 올려 줘서 고맙다고 선물 보낸다더니 그게 너였어.]

[아니야.]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아끼는 거 같더니, 별거 아니었군.]

가슴에 날카롭고 가는 침이 푹 박힌 통증이 일었다. 해림이 멈칫한 틈을 타 남자가 해림의 바지에 손을 댔다. 해림이 버둥거렸다.

[하지 마!]

소용없었다. 더 반항하라고 으르렁거리며 해림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이렇게 버둥거리는 게 더 귀엽다고 우는 애 취급하며 남자의 손아귀가 이곳저곳을 잡고 쓸고 눌렀다. 가슴을 턱턱 짓누르는 무게에 해림이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귀 아래서 흩어지는 숨결이 역겨웠다. 해림이 고개를 돌려 입에 닿는 살갗을 이로 물어뜯었다. 악, 소리와 함께 남자가 귀를 움켜쥐었다. 핏물이 해림의 뺨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해림의 입술과 턱도 핏물이 흥건하게 묻었다.

남자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귀를 감싼 채 상체를 들었다. 눈 아래 어둑한 그늘이 깔린 와중에 눈빛만 서늘하게 번쩍였다. 팔뚝을 휘감은 문신이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잔상을 남기며 내려왔다.

짝, 하는 매서운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해림의 뺨이 돌아가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연달아 한 대 더 내려치자 해림의 입술이 터지며 굵은 핏줄기가 턱을 가르고 시트 위에 점을 찍었다.

겨우 두 대에 귀가 벙벙하고 기계음 같은 이명이 들렸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했다. 해림이 잠시 얌전해지자 남자가 퉤, 하고 희게 질린 얼굴 위에 침을 뱉었다. 핏자국 남은 뺨에 거품 어린 침이 걸쭉하게도 들러붙었다.

[잘하면 예뻐해 줄 텐데 왜 등신처럼 이를 세워. 손톱 세우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해야지. 네 주인이 그런 건 안 알려 줬나.]

해림이 묶인 팔을 제 쪽으로 당겼다. 여전히 끈은 풀리지 않았다. 남자가 붉어진 해림의 뺨을 어루만지고는 쯧 혀를 찼다. 마음에 안 드는 투였다.

[선물 한번 받기 힘들군.]

바지가 골반에 간당간당하게 걸쳐졌다. 있는 힘을 다 쥐어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으나 해림을 깔고 앉은 이의 무게가 집채만 한 바윗돌이었다. 해림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검지 마디로 톡톡 두드리듯 소리가 가벼웠다. 해림의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끌어 내리려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해림은 룸서비스라는 말만 알아들었다. 몇 마디가 오가고서는 남자가 해림의 아픈 뺨을 툭툭 치고 일어났다.

[너희 사장이 즐거운 밤 보내라고 보냈다는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남자가 제 몸에서 비켜서자마자 해림이 손목 끈을 이로 물었다. 입을 벌리는 것조차 지끈거렸으나 손 놓고 남자가 오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손으로는 질기게도 안 끊기던 끈이 이로 끈질기게 물어뜯으니 조금씩 찢어졌다.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해림이 안간힘을 썼다. 달랑거리는 천을 기어이 이로 끊고서 해림이 옷을 추슬러 입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각진 캡을 푹 눌러쓴 벨보이가 카트 뒤에 서 있었다. 찰나, 카트가 남자를 밀며 앞으로 돌진했다. 급작스러운 기습에 남자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는 이때였다. 해림이 침대에서 뛰어내렸다가, 벨보이가 모자를 벗는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주신도가 입술을 뒤틀어 송곳니를 드러내고는 카트 아래 쓰러진 남자를 쳐다봤다. 시선이 칼이었으면 난도질을 수백 번은 했다.

“어디서, 씨발.”

남자도 해림만큼이나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를 으득 소리 나게 물고 카트를 밀었다. 팔뚝과 이마에 힘줄이 곤두서자 남자를 깔고 있는 카트가 덜커덩거렸다.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해림이 옆에 있는 장식품 두 팔로 껴안았다. 제 상체만 한 크기에 무게도 상당해 잠깐 휘청거렸으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남자가 쓰러진 곳까지 뛰어가듯 다가가 품에 든 장식품을 그대로 내리꽂았다. 묵직한 화병이 남자의 이마를 후려치며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남자가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을 해까닥 뒤집었다. 짙은 핏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카펫 위에 고였다.

해림이 씨근덕거리며 숨을 뿜다가 카트를 잡고 휘청거렸다. 주신도가 손을 뻗기에 허공에서 있는 힘을 다해 뿌리쳤다. 화병이 하나 더 있으면 주신도의 머리 위에서도 떨어트리고 싶었다.

“나 팔았어요?”

팔았다 해도 해림은 할 말이 없었다. 주신도가 저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해림은 망설이지 않았다. 알고 싶었다. 주신도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속에서 터지는 울분을 그나마 가라앉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예상한 답이든 아니든, 복잡한 머리를 단숨에 깔끔하게 만들 정답이 필요했다.

주신도가 한 대 맞은 듯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눈도 헤벌어진 입술만큼이나 커다랗게 벌어졌다. 처음 보는 표정임에도 놀랍지 않았다. 짜증만 일었다.

“나 팔았냐고.”

주신도 입장에서야, 남창 하나 보낸 거 대수롭지 않았겠지만 해림에겐 아니었다. 해림이 짓씹듯 묻자 주신도가 상황에 맞지 않게 하하, 경쾌하게 웃었다.

“내가 도련님을 팔았으면 이렇게 안 왔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줬다가 그냥 회수하러 온 걸 수도 있는데.”

“지금은 뭘 말해도 안 믿을 거잖아. 도련님, 내가 지금 좀 급해. 복도 CCTV 잡는 거 최대 15분밖에 안 돼. 그사이에 세팅 마쳐야 하니까 저리 가 있어. 자초지종은 나중에 따지고.”

정말 다급한지 주신도가 카트를 밀치고 문밖으로 나갔다. 허리를 굽히더니 손아귀에 뭐를 휘감고 질질 끌고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었다.

두 명을 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주신도가 방문을 닫았다. 허리를 펴고서 후, 숨을 몰아쉬고는 해림을 봤다.

“도련님, 지금부터는 보기 좀 힘들 테니까 눈 감고 있어.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 뜨지 마.”

웃음기 하나 없는 명령이었다. 언젠가 앉으라던 명령에 저도 모르게 반응했던 것처럼 해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질질 끌리는 소리, 테이블이 카펫 위로 넘어지는 둔탁한 소리, 소음기를 장착한 총을 쏘는 듯 공기가 펑 터지는 소리―해림은 어깨를 움칠했으나 다행히 눈을 뜨지는 않았다―가 연이어 들렸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실눈이라도 뜨려고 하면 주신도가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감고 있으라고. 나 도련님 눈알 뽑기는 싫어. 그거 기분 더럽거든.”

하며 협박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 10분은 넘었다. 다 됐어, 하는 소리에 해림이 눈을 떴다. 눈 감기 전과 정황이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거친 몸싸움이 일어난 듯이 방 안이 엉망이었다. 싸움의 주체는 뭘로 봐도 머리와 가슴에 총알구멍이 난 남자와 경호원들이었다. 남자 주변에 산산이 흩어진 파편들도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신도는 수건으로 총을 꼼꼼히 닦고 벽에 기대 쓰러진 경호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총에 지문이 남도록 장갑 낀 손으로 경호원의 손을 총 위에 꾹 눌렀다. 시체의 머리 방향까지 세심하게 조절하고 나서야 주신도가 굽혔던 무릎을 폈다. 각도를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여 살피고서 해림을 돌아봤다.

안색 하나 달라지지 않은 주신도와 달리 해림의 낯빛은 창백했다. 살인의 현장이었다. 그것도 범죄를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우는 파렴치한 장면이었다.

지하의 끔찍한 단면도 봤으나 이처럼 피비린내가 생생하게 끼치는 곳은 처음이다. 구역질이 치밀어 해림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뒷걸음질 치는 해림을 주신도가 잡아챘다. 뜨끈한 손으로 두 뺨을 감싸 쥐고 저를 보게 했다. 얻어맞은 뺨에서 밀려오는 통증과 뜨거운 손바닥이 해림의 정신을 제자리로 끌고 왔다. 가늘게 흔들리던 동공이 주신도를 담고는 약간이나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죽을 새끼들이었어. 도련님이 놀랄 필요 없어. 이제 5분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움직이는 대로만 따라와. 알겠어?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여.”

“…….”

“어서.”

해림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도가 재빨리 해림에게 옷을 주워 입히고 카트의 흰 천을 걷었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공간이 거기에 있었다. 들어가라는 턱짓에 해림이 몸을 구기며 카트에 올라탔다.

주신도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느라 어떻게 계단을 어떻게 내려오고 어떤 경로로 호텔을 나왔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주신도가 벨보이를 가장하느라 입었던 붉은 색 재킷과 모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다.

정처 없이 끌려다니다 보니 습하고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강가였다. 호텔에서 멀어질 만큼 멀어지고, 강가를 걷는 사람이 드물어질 때쯤 주신도가 걸음을 세웠다.

주신도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거침없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주신도가 상대가 뭐라 말할 새도 주지 않고 떠들었다. 대화라고 할 것도 없었다. 주신도가 일방적으로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치고서는 미련 한 점 없이 핸드폰을 어둑한 강에 냅다 집어 던졌다.

“끝.”

주신도가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해림이 망연하게 쳐다봤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서 머리가 정리를 거부했다. 뺨이 얼얼하고 아픈 걸 보아 호텔 침대에 누워 남자에게 얻어맞았던 것까지는 현실인 듯싶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

주신도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침착했다. 주신도가 히죽 웃었다가 해림의 부푼 뺨을 보고는 입술을 굳혔다.

“그 씨발 새끼가.”

주신도가 해림의 뺨을 감싸 쥐었다. 닿는 것도 아플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해림이 고개를 비틀며 피했다.

“사장님이 날 그 사람한테 팔았다고 했어요. 거래 성립시키려고.”

“개소리야.”

“정말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도련님을 팔았으면 거기 안 갔어. 거래도 안 깼고. 수거도 내일 아침에 했겠지. 말했잖아. 도련님은 통역시키려고 데려온 거라고.”

침대에 묶여 배신감으로 치를 떨던 감정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해림이 의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자, 주신도가 정말이라며 얼핏 억울함까지 내비쳤다.

“그럼, 누가.”

“인오 그 새끼가 드디어 돌아서. ……그나저나 도련님,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성격 있더라. 내가 이번에 제대로 감탄했어. 그 새끼 머리 위에 화병을 내리꽂는데, 이야……. 도련님, 야구나 럭비 해 본 적 있어? 폼이 아주 메이저리그 선수던데.”

주신도가 담배를 입에 물고 예의 발랄한 태도로 떠들었다. 아직 호텔 방에 매여 있던 정신이 주신도의 낮은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해림이 겸연쩍게 이마를 문질렀다.

“조금 전 통화요. 무슨 내용이었어요?”

화제를 돌릴 겸 물었다. 주신도가 씩 웃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해림에게도 권했다. 해림이 사양하지 않고 담배 끝을 물었다. 화구에서 불길이 일렁였고, 그 속에서 두 담배 끝이 맞붙었다. 이마를 댈 듯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는 주신도가 시선을 멀리 던졌다.

“별거 아니고. 그냥, 명나라 황제가 뒈졌다고.”

해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원래 굴은 하나만 파 두면 안 돼. 최소한 두세 개지. 들어갈 구멍 만들면 빠져나올 데도 만들어 둬야 해.”

여전히 모르겠다.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해림의 표정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는지 주신도가 키득거렸다.

“저 새끼들은 너무 오래 해 먹었어. 상부상조하고 살아야 하는데 독식이 길었지. 불만 품고 뒤엎을 기회 노리는 놈들이 많았는데, 내가 거기에 살짝 보탠 거뿐이야. 이제 걔네들 전쟁 치르느라 정신없을걸. 설마, 친절하게 대가리까지 따 줬는데 빈집 안 밟을까.”

이제야 대충 이해가 갔다. 주신도는 라이벌인 조직에게 상대 우두머리가 죽었음을 알리고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옛 나라가 허물어지면 새 나라의 수장이 깃발을 꽂는 역사가 항상 되풀이되지 않던가.

희끗한 담배 연기가 허공을 갈랐다. 주신도가 손가락 마디 하나 길이로 짧아진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끝으로 짓눌렀다. 해림을 돌아보는 표정이 짐짝을 벗어던진 나귀처럼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원래는 내일모레 귀국 예정인데, 일이 이렇게 틀어졌네. 오늘 새벽에 움직여야 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아직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을 다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이마 정 가운데 시뻘겋게 구멍이 뚫린 남자나, 시체처럼, 혹은 이미 시체로 누워 있던 경호원들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한데 참 이상도 하지, 모든 기억들이 잔인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해림이 담배꽁초를 버리며 강가로 시선을 돌렸다. 도심의 불빛이 일렁이는 강물을 보니 이대로 떠나보내기엔 미련이 남는다. 아무래도 미친 인간 옆에 있다 보니 같이 미쳐 가는가 보라고, 해림이 피식 웃었다.

“배고파요.”

수많은 일을 겪고도 겨우 떠오른 게 음식이라니. 해림 본인도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럴까. 지금이라면 입에 안 맞았던 망고 주스마저 기쁘게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 먹으러 가야지.”

주신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해림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아직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기에 그랬노라고, 해림이 묵직하게 휘감긴 체온에 몸을 맡겼다.

* * *

@@냥냥웅@@공금 갠소 

마지막 검은색 캐리어가 트렁크에 실렸다. 탁, 문 닫는 소리가 경쾌했다. 유리가 푹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고개를 돌렸다. 희연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에 걸고서 다소곳이 손을 모았다.

“정말 끝이네.”

희연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언제 봐도 어여쁜 인물이었다. 화장기 없는 뽀얀 뺨이 복사꽃처럼 곱다. 무거운 부채와 짐에서 벗어나 이런 화사한 표정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왔을 때만 하더라도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모르더니만, 몇 년도 안 되어 희연은 두 번째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마음이 쓰이는 이였기에 유리가 진심으로 축하했다.

“잘 됐어. 다시는 이 바닥에 발 들일 생각하지 마. 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말고.”

제 잘못으로 끌려온 애들이야 다시 돌아올 확률이 높다지만, 희연 같은 경우는 아니었다. 희연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수그렸다.

“언니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내가 해 준 게 뭐 있다고. 어서 가. 기다리겠다.”

저라면 인사고 나발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텐데, 희연은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았는지 머뭇거리며 자꾸만 빌딩을 돌아봤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게 유리의 눈에 빤히 보였다. 얼른 가라고 등을 떠다밀까 하다가, 어차피 마지막인 거, 못 이기는 척 물어봤다.

“왜. 누구 찾아.”

“아……, 사장님이요. 안 나오시네요.”

미련이 절절 끓는 목소리였다. 둘이 밤을 보낸 거야 익히 알았어도, 한연동을 떠나는 날까지 찾을 줄은 몰랐다. 유리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그 원수 같은 얼굴 봐서 뭐 하게.”

희연의 뺨이 붉어졌다. 누가 보면 첫사랑이라도 그리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여기엔 주신도를 추종하는 미친 인간들이 종종, 아니 자주 보였다.

“마지막이니까, 그 핑계로 작별 키스라도 받으려고 했죠.”

“그딴 걸 왜 받아.”

유리의 이목구비가 손아귀에 말려들어 간 종이컵처럼 사정없이 구겨졌다. 희연은 주신도와 입 맞추는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운 듯이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다 하셔도 키스는 싫어하셨거든요.”

쥐꼬리만 한 목소리라도 유리의 귀에는 들렸다. 사장의 잠자리 취향 따위 눈곱만큼도 알고 싶지 않다. 우연히 봤더라도 눈과 뇌를 씻든 어쨌든 기억에서 삭제해야 옳았다. 유리가 진심으로 질색하며 소름 돋은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희연이 배시시 웃었다.

“저는요, 언니. 사장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드라마 찍니? 그런 악인이 행복하면 어떡하니. 죗값 받아야지.”

“정말로요.”

용서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이며 원수의 행복을 빌어 주는 일이 참된 도리라고 누구는 떠들지만, 유리는 평범하디 평범한 범인이기에 그 정도 경지에 이를 수 없었다. 주신도의 행복을 빌다니, 지나가는 고양이와 강아지의 부귀영화, 무병장수는 기도해도 상사의 행복은 빌기 싫었다.

첫 번째 전설을 쓴 지희는 가끔 전화를 걸어 빨리 뒈지라고 저주를 건다던데, 주신도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이들은 왜 저렇게 대책 없이 착한 건지. 유리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저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다, 속으로 한탄하듯 욕도 했다.

사모님, 하고 대기하던 기사가 희연을 불렀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이제 밝은 미래를 향해 한발 내디딜 시간이었다. 희연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차에 올라탔다.

유리는 차 뒤꽁무니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 등을 돌렸다. 희미하게 남은 아쉬움과 의미 모를 착잡함은 애써 지웠다. 한연동에서 이별은 축복이지, 슬퍼할 일이 아니었다.

* * * @@냥냥웅@@공금 갠소 

해가 부쩍 짧아졌다. 예전이었다면 노을빛이 선명했을 시간이거늘, 바깥은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알리며 군청색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스름했던 빛도 어느새 사장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하나처럼 포개진 몸도 어둠에 잠겼다가 스탠드 불빛이 켜지고 나서야 드러났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가 고요한 사장실을 메웠다.

“도련님. 나 봐 봐. 응? 얼굴 돌리지 말고.”

해림이 가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비트는데, 거친 손이 뺨을 감싸고 제자리로 돌려놨다. 저를 잠시나마 거부했던 태도를 응징하듯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고 그 안으로 또 파고들었다.

홍콩에서 돌아온 이래로 내내 이 모양이었다. 하도 입을 맞춰 대서 입술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물고 빨고 씹어 대는 까닭에 뭐를 바르지 않았는데도 입술이 내리 발갛고 통통했다.

그만 좀 하라고 해림이 밀어도 주신도는 빨판 달린 낙지처럼 찰싹 들러붙었다. 처음으로 입을 맞춰 본 아이도 아니면서 흠뻑 빠져서는, 해림의 입술만 보면 배고픈 애가 젖에 매달리듯 달려드는 것이다. 말리는 게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해림도 아주 싫지만은 않아 오냐오냐 받아 주고 있었다.

하나 해도 정도가 있지.

주신도는 아예 해림을 제 허벅지 위에 애처럼 앉혀 놓고 입술을 먹었다. 먹는다는 말 외에는 달리 마땅한 표현이 없었다. 키스나 입맞춤이라고 정의하기엔 그 행동이 무척이나 포악했다.

볼이 훌쭉 패게끔 빨아들였다가 해림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지면 뺨과 눈과 목 옆에 입술을 댔다. 살갗을 녹여 먹을 듯이 입술로 오물거리고, 눈이 마주치면 어금니를 뿌득 갈아 살점을 뜯어 먹을 준비를 하고서 다시금 달려들었다.

맹수가 따로 없었다. 해림이 부드럽게 조절하려고 해도 뒷머리가 움켜잡히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숨이 막혀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면, 그때야 숨통 좀 트여 주겠다고 살짝 입술을 뗐다.

“코로 숨 쉬라고. 왜 이렇게 못해. 섹스도 못 하고, 키스도 못 하고. 다 못해. 도련님은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

툴툴거리면서도 주신도가 말하는 틈틈이 해림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문질렀다. 해림이 숨을 깔딱거리며 주신도의 허벅지 위에서 도망치려고 움찔거렸다. 아까부터 깔고 앉은 허벅지 한쪽이 아까부터 두툼하게 불거져서는, 방석 아래 딱딱한 목침을 둔 듯 불편했다.

꼬무락거리는 해림을 주신도가 단단히 끌어안았다. 뭉근하게 비벼지는 아랫도리에 해림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눈앞에 있는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서 주신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만해요.”

“뭘 그만해. 빨리 나 봐. 고개 들고.”

잠에서 깨자마자,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바탕 뒹굴었는데도 열은 잔불처럼 몸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젖처럼 빨린 혓바닥도 젖꼭지도 잇자국이 남았을 엉덩잇살도, 붉게 순흔이 남았을 모든 곳이 아릿한데도 주신도와 눈이 마주치면 재에 붙은 불덩이가 도로 열을 뿜었다. 더는 힘이 안 들어가야 정상이거늘 허벅지 안쪽이 긴장한 듯 바짝바짝 조여들었다.

그래도 안 된다. 더 했다가는 요단강 너머에서 조상이 이리 건너오라며 손짓할지도 모른다. 묘하게 들뜨는 분위기가 무서워 해림이 발끝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들었다. 옆구리를 조몰락거리던 손아귀가 살짝 벌어진 틈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해림이 읏, 작게 신음하며 도로 앉았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도련님이 좋아한대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큰맘 먹고 해 주는 거잖아. 그러니까 입 좀 벌려 봐. 혀도 내밀고. 좋아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소극적이면 어떡해. 더 해 달라고 조르고 덤비고 그래야지.”

“그것도 적당히 해야죠. 그만. 입술 아파요.”

해림이 진심을 담아 호소했다. 주신도가 불만스레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림의 입술을 살폈다. 통통하게 부푼 입술 언저리에 붉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주신도가 입술로 상처를 덮고 핏물을 날름날름 핥았다.

말랑말랑한 혓바닥이 고양이 털 핥듯이 싹싹 핥아 대 까진 부분이 따끔거렸다. 더 붙어 있으면 덧날까 봐 해림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몸통도 같이 돌리느라 팔꿈치가 옆에 있던 책상을 우연히 툭 쳤다. 그 탓인지 책상 위에 세워둔 패드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어둑했던 시야에 갑자기 밝은 빛이 쏟아져 해림이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빛에 익숙해지고는 패드에 뜬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홍콩이라는 단어가 해림을 사로잡았다. 뺨을 쪽쪽거리는 주신도를 손바닥으로 밀며 패드를 잡았다.

“이 기사…….”

홍콩 거대 마약 범죄 조직의 몰락, 이라는 굵은 글씨가 상단에 박혀 있었다. 해림이 빠르게 기사를 훑어 내렸다. 홍콩을 거점으로 삼은 거대 마약 밀매 조직이 신흥 조직과 전쟁을 치르다가 상당수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 피해가 극심해 당국에서 수사에 착수했다는 이야기였다.

해림이 기사를 다 훑고 주신도를 쳐다봤다. 주신도가 해림의 손에서 패드를 빼앗아 책상에 도로 올려놨다.

“저거, 저번에 본 그 사람들 이야기예요?”

“잘 알면서 뭘 또 물어. 뭐, 나 아니어도 망했을 곳이긴 했어. 나는 거기에 아주 작은 성냥 하나만 던졌을 뿐이지. 불을 켤지 말지 결정하는 건 그놈들 몫이었고.”

주신도가 거드름을 피우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툭 던진 성냥치고는 일으킨 불길이 산불에 버금갔다. 게다가 한 조직의 머리를 쳐 낸 일이 작은 성냥 또한 아니지 않나. 주신도는 저가 벌인 일을 과소평가했다.

“어느 조직이든 오래 묵으면 적이 생기더라고. 그러게 누가 방심하래.”

더 자세히 캐묻고 싶건만, 주신도가 말문을 막을 것처럼 입술을 들이밀었다. 해림이 손바닥으로 다가오는 입술을 턱하고 막았다.

주신도의 눈동자가 대번에 험악한 빛을 띠었다. 코앞에서 먹을 걸 빼앗긴 짐승처럼 어금니를 맞물어 턱선이 선명하게 두드러졌다. 해림이 머뭇거리며 손바닥을 떼자 그제야 단단하게 올라붙은 턱이 누그러졌다.

하여간 성격하고는. 해림이 입술을 내어 주고는 머리로는 아까 본 기사를 떠올렸다. 그간 주신도가 관심을 온통 빼앗은 통에 호텔에서 봤던 장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살인하는 순간은 아니더라도 공기를 가르던 총소리와 머리에 바람구멍이 난 시체는 쉽게 잊힐 장면이 아니었다. 물론 상대가 저를 해하려 했고, 저도 나서서 화병으로 후려치기는 했어도 목숨을 끊어 놓고자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후에 일어난 일이 문제였다. 넓게 보면 저 역시 살인에 일조했음에도 어떤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악몽도 꾸지 않았고 살인을 저지른 주신도와 심지어 입맞춤까지 나눴다.

등골이 섬뜩했다. 다른 누구보다 해림은 저 자신이 제일 무서웠다. 그동안 사회가 만들어 준 도덕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그 테두리가 어느 기점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휑하니 뚫린 벽 너머에서 주신도가 손을 까닥이며 웃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리 건너오라고, 더는 거기에 머물 자격이 없다고.

목덜미에 퍼붓는 입맞춤이 깊어졌다. 열병에 시달려 반점이 오른 것처럼 얼룩덜룩한 목덜미에 새로운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해림의 충격을 잡아다 멀리 던질 듯이, 굳은살이 잔뜩 박인 커다란 손이 셔츠 안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손가락이 판판한 가슴을 더듬다가 붓기가 덜 빠진 젖꼭지를 거친 엄지로 문질렀다.

“……읏, 사장님.”

“조금만.”

“조금만으로 안 끝내잖아요…….”

“우리 도련님이 이제야 뭘 좀 아네.”

귓불을 무는 입술에 해림이 질끈 눈을 감았다. 고막에 닿은 숨결이, 정해림, 하고 언제 먹었던 젤리처럼 입 속이 아리도록 달게 부르는 목소리가 더 깊이 생각하고자 노력하는 이성을 꽁꽁 묶었다.

목덜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입술이 결국 열꽃을 피워 냈다. 해림이 몸을 내맡기듯 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팔이 멋대로 주신도의 목덜미를 둘러 안았다. 입술이 턱선을 더듬다가 아래턱에, 그리고 입술에 닿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 * *

홍콩 거래가 틀어졌다. 소식은 새벽에 들었다. 자다가 불이 난 듯 전화가 오기에 받았더니 저 이야기였다.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던 잠이 단숨에 사라질 만큼 놀라웠다. 거기에 돈과 노력과 시간을 퍼부은 게 얼마인데, 그게 날아가다니.

영수는 부랴부랴 일어나 자초지종을 캐묻고는 정말, 아주 오랜만에 충격다운 충격을 받았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대충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왜 거래가 깨졌는지 감을 잡았다.

다른 인간이 일을 저질렀으면 말을 안 해, 사장이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꿈에서도 상상 못 할 일이었다. 그러게 그놈의 도련님을 왜 옆구리에 끼고 가냐고 원망을 반쯤 하다가, 사장이라면 애초에 거래가 틀어졌을 경우도 대비를 했겠다 싶어서 마음을 놓았다.

그게 한 조직을 괴멸할 방법이란 건 나중에 알았지만.

이이제이라. 방법은 단순해도 효과는 훌륭했다.

각설, 누구를 패거나 조지는 건 사실 영수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가끔 기분이 아주 더러울 때면 폭력이 무엇보다 좋은 해결책이 되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영수는 일방적인 폭력보다 대련이나 샌드백을 선호했다. 주신도 외에는 누구도 영수의 그런 면모를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과 체구에 겁을 집어먹고 멋대로 상상할 뿐.

그런 영수도 이번에는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노래만 나오면 스텝을 밟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앞서가는 주신도는, 눈썹도 입술도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은 일자였다.

인오는 홍콩에서 그 난리를 쳐 놓고 제 발로 기어들어 왔다. 당당하게 정문을 두드리고 찾아와 조직원들의 손에 잡혀 창고로 끌려갔다. 일이 틀어진 제일 큰 이유야 사장이지만, 사장의 말을 안 듣고 빌미를 제공한 건 인오였다.

안 그래도 영수와 인오는 개와 원숭이 같은 사이였다. 서로를 만나면 영수는 으르렁거리고 인오는 비아냥거리며 영수의 화를 돋웠다. 중간에 주신도가 없었더라면 이미 둘 중 하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터였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같은 인물과 드디어 끝을 고할 때가 왔다. 인오를 조질 생각에 영수가 흥얼거리며 아끼던 연장까지 고이 품고 창고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창고 가운데 인오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한솥밥을 먹은 지 오래인 데다가 서열도 높고, 홍콩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라 조직원들 누구도 인오를 후려 패 놓지는 않았다. 피범벅된 놈보다 말짱한 놈이 오래 버틸 수 있어서 영수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괴롭힐 시간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었다.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는 주신도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섰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놈이 구둣발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고생깨나 한 듯이 눈 밑이 퀭하고 기생오라비처럼 깔끔하게 올리고 다니던 머리도 봉두난발이었다.

“형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오의 고개가 돌아갔다. 퍼억, 퍼억 하고 뼈와 살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창고에 쩌렁쩌렁했다. 주먹으로 얻어맞아 두 번째에는 입 밖으로 치아 조각과 핏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바닥에 고정해 둔 의자가 덜커덩거리며 흔들거렸다. 영수가 의자 뒤에 서 있는 이에게 턱짓했다. 눈치 빠른 이가 의자를 잡고 바닥에 내리눌렀다. 표정에 긴장이 역력했다.

“인오야.”

인오가 기침을 터트렸다. 얼굴은 겨우 몇 대에 엉망이 됐다. 콧대도 부러진 듯 퉁퉁 붓고 양쪽 콧구멍에서 굵다란 핏줄기가 줄줄 쏟아졌다. 저 때릴 부분은 남겨 놓지. 영수가 아쉬움을 담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널 예뻐한 건 선을 잘 지켜서야. 네 성격이 지랄 같아도 선 넘은 적은 없어서. 너 분수 잘 알았잖아. 오냐오냐해 줬더니 왜 해까닥 돌아서 지랄이야. 내 거, 건들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니. 그게 그렇게 알아듣기 어려워?”

주신도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다 맞는 말이었다. 과한 욕심 내지 말고, 분수를 지켜야 칼 안 맞고 오래 버티는 법이었다. 영수가 새겨듣자고 고개를 주억이는데, 정작 당사자인 인오는 뭐가 그리 웃기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형님, 형님. 나,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 우리 똑똑한 인오가.”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말로 매를 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대 더 얻어맞았다. 옆에서 보면 분명 장난처럼 가볍게 팔을 휘두르는데 맞는 사람은 족족 돼지 멱따듯 시끄럽게 비명을 터트렸다. 곰이 장난으로 앞발을 휘둘렀는데 아름드리나무는 반으로 우지끈 부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인오는 그렇게 맞고도 아직 정신을 덜 차렸는지 시뻘겋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주신도를 올려다보는 두 눈에 안광과 핏줄이 형형했다.

“형님 나, 거기 보스 얼굴 보는 데만 2년 걸렸어요. 형님도 알잖아. 그 새끼 거래 틀 때 얼굴 안 보여 주는 거. 난 그거 해냈어. 형님한테 그 새끼 면상 보여 주려고, 신뢰 쌓을라고 내가 별 지랄을 다했다고. 내장 빼는 일도 토하면서 다했는데, 근데 씨발 이런 나를 그깟 남창 하나 팔았다고 죽이게요? 예? 형님, 도셨어요?”

영수가 움찔했다. 죽음을 앞두고는 이성을 상실했는지 인오가 마구잡이로 말을 뱉었다.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이들이 어깨를 바짝 굳혔다. 영수가 품에서 조용히 잭나이프를 꺼냈다.

“그거 하나 바치면 비율이 얼마나 올라가는지 형님도 같이 들었잖아요. 우리 그동안 잠도 못 자고 노력했잖아. 형님도 나도! 심지어 영수 저 새끼도! 그거 하나 뚫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깟 남창 새끼 하나로 그거 다 무너뜨리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라고 씨발!”

인오가 악을 썼다. 주신도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뭘 달라는지 의도가 명백했다. 영수가 손에 든 나이프를 주신도에게 넘겼다.

“나! 형님 밑에서 목숨 걸고 일한 새끼예요. 여기, 씨발 여기, 여기! 다 형님 구하다가 생긴 흉터라고. 칼 맞고 총 맞고 뒈질 뻔하고! 이런 나를 죽인다고! 겨우 그딴 거 하나 때문에! 형님 씨발 돈 거 아냐? 뇌가 어떻게 된 거 아니고서는 형님이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요.”

“…….”

“제발 정신 좀 차려요, 형님. 형님 지금 꼴이 어떤지 알아요? 사내새끼 후장 빨다가 미쳐 돌아 버린 거 같아. 내가 알던 형님은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그건 영수도 반 정도는 동의했다. 도련님이 주신도를 망쳐 놨다. 여전히 무서운 인간이지만 예전보다는 덜 잔혹하고 사람이 물러졌다. 전이라면 인오는 주신도의 눈에 띈 순간 죽었다. 이렇게 앞뒤 없이 떠드는 말을 잠자코 들어 주는 일조차 주신도가 유해졌다는 증거였다.

더는 듣기 싫은지 주신도가 인오의 입에 나이프를 처넣었다. 뒤에서 영수가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나이프인데, 저가 맛보기 전에 남의 손에서 먼저 피를 묻히게 생겼다.

“왜. 더 말해 봐. 잘 듣고 있는데 왜 말을 안 해.”

주신도가 무딘 칼등으로 인오의 뺨 안쪽을 눌렀다. 입술이 찢어질 듯 너부죽이 벌어졌다. 여기서 칼날만 반 바퀴 휙 돌리면 주둥이도 뺨도 길게 찢길 것이다.

인오가 숨을 씨근덕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벌겋게 퉁퉁 부은 얼굴에 식은땀이 어렸다. 공포로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인오가 독기 오른 뱀 새끼처럼 대가리를 바짝 들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흡사 들이받기 이전의 황소처럼 거세다.

“…….”

대치가 길지는 않았다. 주신도가 흥미가 떨어진 듯 피범벅인 주둥이에서 나이프를 빼냈다. 인오가 고개를 돌리고 퉤 하며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정신 차리세요, 형님. 형님한테 이런 직언 하는 새끼 나 외에 또 있을 거 같아요? 영수 저 새끼? 지 목숨이 더 귀해서 절대 말 안 하지.”

지 목숨이 경각인 것도 모르고 인오가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영수가 울컥해서 한 발 나섰다. 주신도가 손을 들었다. 오지 말라는 신호에 영수가 울분을 삼켰다.

“난 형님한테 미안한 거 하나도 없어요. 다 형님을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한 거야. 다시 돌아간대도 똑같이 할 거야.”

인오가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말하는 내내 주신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혓바닥이 잘려도 바른말을 고하고 죽겠다는 충신처럼 눈을 부라리며 씩씩댔다.

주신도가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잠깐 다른 쪽을 보다가 인오를 쳐다봤다. 인오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독기가 가득했다. 주신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손을 뻗어 까치집이 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우리 예쁜 인오가 조직 생각한다고 큰맘 먹고 일을 저질렀는데, 내가 눈이 돌아가서 그걸 몰라줬네. 그 마음 좀 더 일찍 알아줄걸. 얼마나 섭섭했을까.”

누그러진 말투에 뒤에 서 있는 조직원들의 어깨가 눈에 띄게 풀렸다. 반면 영수는 뒷짐 진 손이 허옇게 질리도록 마주 잡았다. 인오도 같은 걸 느꼈는지 아직 덜 부푼 얼굴 반쪽에서 핏기가 쑥 빠져나갔다. 금세 창호지처럼 허여멀건 해져서, 눈을 홉뜨느라 핏발 선 흰자가 위아래로 보였다.

“형님, 형님.”

아까의 패기는 어디 갔는지, 주신도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주신도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정수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던 손이 이마를 훑고 아래로 내려갔다. 두꺼운 엄지가 퉁퉁 부은 눈두덩에 닿았다. 고인 핏물을 닦아 줄 듯이 굵은 엄지가 실선 같은 틈새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래도 인오야, 이번 건은 도를 넘었어.”

엄지가 부은 눈두덩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모습을 감췄다. 인오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 창고의 지붕도 뚫고 올라갈 듯 날카로웠다. 인오가 반항하지 못하게 다른 손으로 억세게 머리카락을 쥐고는, 한참 후에 주신도가 손가락을 빼냈다. 시커먼 체액이 엄지를 물들이고 손가락 끝과 눈두덩 사이에 거미줄처럼 길게도 이어졌다.

“적당히 했어야지.”

인오가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헐떡이는 숨소리와 고통에 겨운 신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한쪽 눈은 눈물을, 다른 쪽 눈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문 얼굴이 괴기스러웠다. 주신도가 구부정하게 구부린 허리를 펴고 나서야 영수는 꽉 마주 쥐었던 손을 풀었다.

“독방에 가둬.”

장승처럼 굳었던 이들이 주신도의 명령에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창고가 떠나가도록 예, 하고 대답했다. 의자에 묶인 인오가 제 분을 못 이기고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이라며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주신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나갔다. 영수는 비명과 욕설을 섞어 창고가 무너져라 소리를 질러대는 인오를 한 번 흘긋 보고 주신도를 따라나섰다.

철문 너머로 고래고래 외쳐 대던 비명이 서서히 멀어졌다. 악다구니 가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 주신도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영수가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주신도가 손수건을 꺼내 검붉은 액체로 범벅이 된 엄지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피범벅이 된 손수건은 바닥에 버렸다.

“왜 살려 두십니까.”

예전이었다면 말장난 치며 조금 가지고 놀다가 바로 멱을 따 버렸을 텐데. 아무리 주신도를 위해 일을 저질렀다 한들 의견 한 번 묻지도 않은 데다 하필이면 아끼는 걸 건드렸으니. 그 자리에서 목을 댕강 베었더라도 영수는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주신도가 인오를 안 죽이고 그대로 놔둔 게 놀라웠다.

주신도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걸었다. 희게 새어 나온 연기가 한숨만큼 묵직했다. 부푼 볼이 안으로 꺼지고 입술 사이에 도로 담배가 걸렸다.

“충심이 갸륵해서.”

“충심이요?”

인오가 주신도에게 얼마나 충성을 다 바치는지 영수도 옆에서 봐서 알고 있었다. 눈 뜨자마자 엄마 오리 본 새끼 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면서 형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타령과 고백을 수시로 일삼질 않나,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네가 형님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형님이 제일 믿고 좋아하는 건 저라고 으스대질 않나, 주신도가 죽을 고비를 겪을 때마다 제 몸을 날려 구한 게 총 세 번이나 됐다. 그래서인지 인오가 자잘한 잘못을 벌이거나 가게에 있는 애들에게 상해를 입혀도 적당한 선에서 봐주고는 했는데.

“닥터 불러서 치료하고 내보내.”

“저대로 내보내면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이 지낸 세월이 아무리 길다 해도 영수는 인오가 싫었다. 정이 안 갔다. 구렁이처럼 능글맞은 성격도, 저보다 약자를 괴롭히는 가학적 성향도, 주신도를 추종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인물은 싹을 밟지 않으면 어느 순간 홱 변해 날카로운 칼날로 돌아올 수도 있음이었다.

“목숨 귀한 줄 알면 다신 얼씬도 안 하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수의 귀에는 인오가 직언 운운하며 떠든 소리가 죄다 개소리로 들렸다. 지 목숨 보전하려고 충신인 척 가증을 떨어 댄 것이었다. 성격도 이상하게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제 목숨 붙여 줘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울며 다시는 안 올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주신도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한 번 더 눈에 띄면 그땐 네 맘대로 해.”

혹자는 그간 돈독하게 쌓아온 우애에 마음이 흔들려서 그런 거 아니냐고 짐작할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지켜본 주신도는 그리 맹탕이 아니었다. 영수는 주신도가 상사로서, 동고동락한 전우로서는 좋았으나 다 떼어 놓고 인격으로만 볼 때는 아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제 배에 칼을 꽂을 인물로 봤다. 배신하거나 명령에 반기를 든다는 전제하에.

“내보내기 전에 잘 달래 주고.”

저놈이 달랜다고 달래질 인물인가. 마음 같아서는 주신도의 명령을 어기고 이 산 어딘가에 산 채로 파묻어 버리고 싶었다.

영수가 영 마음에 안 차는 듯 고개를 딴 쪽으로 틀며 알겠다고 답했다. 아마 세 번이나 제 목숨을 구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 거겠지. 상벌은 확실히 하는 성격이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영수가 끓는 속을 다독였다. 죽이고픈 마음이 굴뚝같더라도 주신도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괜히 제멋대로 나댔다간 저 역시 눈알 하나 없는 애꾸눈으로 평생을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작지만 아담한 집이었다. 넓게 난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사시사철 집을 따스하게 달궜다. 아무리 오래 잤더라도 창 아래 놓은 소파에 드러누우면 낮잠이 솔솔 쏟아지고는 했다.

해림은 책을 가슴팍에 놓고 눈을 감았다. 사붓사붓한 발걸음 소리가 근처로 다가왔다. 해림이 자려다 말고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손에 머그컵을 든 나진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자려고?」

「응.」

일요일 오후였다. 월요일부터 펼쳐질 전쟁을 대비하려면 주말에는 힘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나진이 호로록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셨다. 갓 뽑은 커피 향이 마음에 들었다.

「너는 이 꼴을 보고도 잠이 와?」

청소는 어제 했으니 오늘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해림이 가물가물한 눈을 뜨며 거실을 둘러봤다.

「이 꼴을 보고도 잠이 오냐고.」

눈에 익은 거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커피 향이 사라지고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화려한 방에 해림이 누워 있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얼른 몸을 일으켰다. 팔이 뒤로 끌려갔다. 팔목이 아파 돌아보니 두꺼운 천이 손목을 칭칭 감고 있었다.

나진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눈앞에 쓰러진 시체가 있었다. 가슴과 이마 가운데 총알이 관통해 피가 질질 흐르는 시체가 거실을 장식하는 장식품처럼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헐벗은 상체에 문신이 새겨진 남자가 해림이 몸을 일으키자 잠에서 깬 듯이 눈을 떴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박제된 짐승처럼 눈알에 빛이 없었다. 해림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벽에 기대어 있던 정장 입은 시체들이 천천히 굽힌 몸을 폈다. 해림이 안간힘을 쓰며 침대 헤드에 꽁꽁 묶인 끈을 잡아당겼다.

바닥이 쑥 꺼졌다.

해림이 숨을 들이켰다. 물속에서 오래 숨을 참다가 물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이 거칠었다. 얼른 두 손을 살폈다. 손목을 꽁꽁 묶었던 줄이 사라졌다.

화려한 방은 지워지고 사방에 안개가 자욱했다. 해림이 두리번거렸다. 발에 밟히는 바닥에서 철퍽철퍽 소리가 났다. 물이 자박자박 깔린 곳이었다.

공기가 서늘해 양팔을 감싸며 걸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가 출구인지 두꺼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거기 누구 없어요!」

소리 질러도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다. 다리가 아팠다. 해림이 더는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지 망연자실해 있는데, 저쪽에서 거뭇한 인영이 보였다.

안개가 서서히 가셨다. 인영이 작은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둥글게 만 등허리와 왜소한 어깨, 푹 눌러쓴 벙거지 모자가 왜인지 모르게 익숙했다.

해림이 다가갔다. 길쭉한 대나무 낚싯대가 물안개 일렁이는 컴컴한 저수지에 드리워져 있었다. 낚싯대 끝에 매달린 찌가 물결 없는 저수지 위에 동동 떠 있었다.

남자는 해림의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슬쩍 본 옆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해림이 큼큼 헛기침하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해림이 어르신, 하고 한 번 더 불렀다. 찌가 물 안으로 퐁 들어갔다.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해림이 멈칫했다. 부친이었다.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늙고 노쇠한 부친이 해림을 흘끗 보고 도로 정면을 바라봤다.

「좋아 보이는구나.」

해림이 가만히 부친을 내려다봤다. 부친은 찌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찌가 움직이는데도 저수지는 잔물결 한 번 일지 않았다.

「애비가 죽었는데도 좋아 보이다니.」

부친이 낚싯대를 거둬들이고 자리를 뜰 듯이 주변을 정리했다. 해림이 부친의 어깨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부친이 고개를 들었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낯빛이 영안실에서 본 그대로 파리했다. 목에 굵게 남은 밧줄 자국 역시 추레한 옷깃 너머에 아직 박혀 있었다.

「애비 죽인 놈과 흘레붙으니 좋으냐.」

해림이 움찔했다. 말이 칼과도 같았다. 해림을 말로 푹 찌른 줄도 모르고 부친이 혀를 쯧쯧 찼다. 돌아서서 멀어지는 그 작은 등을 해림이 멀거니 응시했다.

「못난 놈.」

안개가 인영의 등을 먹었다. 쫓아가고 싶건만 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해림이 고개를 숙였다. 풀이 우거진 바닥에 물이 점점 차올랐다. 낚싯대를 드리웠을 때는 잔잔했던 저수지에 풍랑이 일었다. 시커먼 물이 해림의 발치를 적시고 종아리와 허벅지까지 금세 불어났다.

벗어나려고 했으나 발목을 잡아챈 무언가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물이 가슴까지, 목까지, 입술 아래까지 만조처럼 올라왔다. 도와 달라고 소리칠 시간도 없었다. 물이 해림의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헉!”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을 부풀려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해림이 손에 들어온 아무거나 움켜쥐었다. 뜨겁고 단단한 게 손아귀에 바특하게 잡혔다. 물속에서 잡은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거기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정신 차려.”

낮은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데도 가쁜 숨은 가라앉질 않았다. 해림이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누군가 제 발목을 억세게 쥐고 수면 아래로 담갔다가 수면 위로 내치길 쉼 없이 반복하는 듯했다. 갈비뼈마저 뻐근했다.

손에 잡은 것만 비틀어 쥐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잡혀 고개가 뒤로 훌렁 넘어갔다. 입술에 무언가 거세게 부딪쳤다. 물에서 갓 구해 낸 사람에게 공기를 건네듯 입술을 포개고서, 훅 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미적지근한 숨결이 꽉 막힌 목구멍 너머로 밀려 들어왔다.

해림이 본능적으로 앞을 가로막은 방해물을 손으로 밀쳤다. 숨통이 한꺼번에 트인 탓에 기침이 거푸 터졌다. 뜨거운 체온을 품은 손바닥이 등을 남은 기침을 다 뱉어 내라는 듯이 토닥토닥 두드렸다.

“정해림.”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해림이 시선을 들었다. 숨이 막혔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야 눈이 제 역할을 했다. 어렴풋한 빛 아래서 주신도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악몽 꿨어?”

악몽. 맞다. 꿈이었다. 아주 끔찍했다. 깨기 전에 들었던 비난이 여태 귓가에 생생했다. 해림이 벅찬 호흡을 정리했다.

“우리 도련님은 평소엔 무덤덤하면서 왜 이렇게 악몽에 잘 시달릴까. 저번에도 그러더니. 끙끙대기는 왜 또 그렇게 끙끙대. 도련님이 개야?”

말은 얄밉게 해도 손은 해림을 진정시키려는 듯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해림도 손을 내치지 않았다. 땀이 나서 옷과 살갗이 축축한데도 온기가 필요했다. 익숙한 체향과 저를 진정시킬 일정하고 튼튼한 고동이.

주신도가 손을 뻗어 해림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팔을 등 뒤로 뻗어 해림이 인형인 양 제 품에 구겨 넣고, 긴 다리로 해림의 허벅지를 휘감아 어디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사방을 에워쌌다.

해림이 힘없이 품에 빨려 들어갔다. 악몽에 시달리느라 진이 쏙 빠진 데다가, 귀에 닿는 박동 소리가 여남은 떨림을 가라앉혔다. 해림이 눈을 감고 눈앞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꿈을 꿔서 그래.”

꿈에서 작고한 부친을 봤다. 그가 입에 담기 상스러운 말로 해림을 비난했다. 당신이 살인을 저지른 현장을 보고, 그 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해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신도도 재촉하지 않았다. 우는 아이 어르듯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고, 축축한 목뒤를, 잠옷 속으로 손을 넣어 딱딱하게 굳은 날개 뼈를 주물렀다. 희롱할 의도가 없는 담백한 손길이었다.

펄떡거리던 심장이 맞닿은 고동과 비슷하게 속도를 낮췄다. 얼추 평정을 되찾고 나서 해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어둑했다. 유리창 밖으로 섬광이 번쩍 빛나고는 우르릉하며 천둥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창을 때리는 빗줄기가 꿈에서 해림을 덮쳤던 물처럼 사나웠다.

“비 와요?”

눈으로 봤으면서도 괜히 물었다. 주신도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몇 시예요?”

“아직 아홉 시밖에 안 됐어. 더 자.”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해림이 다시 잠을 청할 겸 눈을 감았으나 졸리지 않았다. 악몽이 저를 덮칠까 두려웠다. 결국 눈을 뜨고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구김살이 간 시트가 발끝에 엉켰다.

커다란 발이 해림의 발등을 눌렀다. 볼록한 복사뼈와 발의 옆선을, 발바닥과 발가락에 버석한 촉감을 가지고 부딪쳤다. 이불 밖으로 삐져 나가 차갑게 식은 발등에 서서히 열이 돋았다. 해림의 귓불도 덩달아 붉어졌다.

번개가 번쩍 내리꽂히고, 천둥이 뒤따라 울었다. 빗물이 숲을 흔드는 소리가 폭풍처럼 거센데도 침대 위에서는 이슬비처럼 잔잔하게 들렸다. 먹구름이 두껍게 드리운 하늘도 다른 때와 달리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왜 안 자. 자라니까.”

“잠이 안 와요.”

주신도가 흠, 소릴 내며 정수리에 턱을 갖다 댔다. 해림의 머리를 아래로 꾹꾹 누르다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소리에 턱을 뗐다.

“무슨 꿈을 꿨는데. 말 안 할 거야?”

“그게, 좀.”

“복권 살 꿈이라 그래? 맞아. 그런 꿈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효과 없다더라.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식은땀 흘리고 숨을 못 쉬는 모습을 코앞에서 봤으면서 주신도가 모른 척 너스레를 떨었다. 해림도 굳이 해명하지 않고 그 품에 몸을 묻었다.

가슴에 귀가 바짝 닿았다. 두근거리는 고동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머릿속을 맴돌던 비난을 지우는 소리였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느낀 암담함도 느릿느릿 녹았다.

「애비 죽인 놈과,」

해림이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주신도가 왜 그러냐며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고 시선을 맞춘다. 해림은 그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흘레붙으니 좋으냐.」

직접적인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어도, 부친이 생을 마감하는데 일조한 사람이었다. 섬뜩해서 등골이 차게 식었다. 악몽의 여파인지 주신도의 품에 안긴 이 자세가 가시밭 위에 누운 듯 불편했다.

“그만 일어날게요.”

해림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 있다가는 따스한 체온에 마음이 약해져 무슨 악몽을 꾸었는지 털어놓을 성싶었다. 주신도가 악몽의 내용을 아는 건 원치 않았다.

누운 자세 그대로 주신도가 해림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검붉은 눈동자만 유독 또렷했다. 해림이 뭘 숨기려는지 캐낼 듯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따라 일어났다.

“커피?”

따스한 커피 한 잔이면 으슬으슬한 몸을 녹일 수 있겠지. 해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소곤거리듯 작게 말했다. 주신도가 잘도 알아듣고 해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시에 뒤통수를 잡아당겨 이마에 입술을 문지르고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씻고 나와.”

문밖으로 나가는 주신도의 등을 보고, 해림이 머쓱하게 이마를 문질렀다. 발가락과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시선은 내리깔리고 눈 아래와 뺨은 복숭앗빛으로 발그레 익었다.

이보다 더한 접촉을 수없이 했는데도, 별거 아닌 입맞춤에 가슴이 종잡을 수 없이 뛰었다. 해림이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기분을 떨쳐 내고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샤워기 아래 서서 뜨거운 물로 악몽의 잔재를 녹이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갓 내린 은은한 커피 향이 침실에도 흘러들어왔다. 홀린 듯이 향을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메이커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내고, 테이블에는 노릇노릇 익은 토스트, 잼이 놓여 있었다.

“뭐 해. 앉아.”

“…….”

언제 봐도 외양은 정말 흠잡을 곳이 없다. 손에 컵 두 개를 들었을 뿐인데 한 장의 화보였다. 해림이 넋을 놓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자리에 앉았다. 주신도가 테이블에 컵을 내려놨다.

해림이 제 앞에 놓인 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커피에서 희뿌연 김이 물안개처럼 일렁였다. 컵을 감싸 쥐자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물들였다. 해림이 한 모금 삼키고서야 주신도가 제 몫의 커피에 입을 댔다.

“저번에 커피, 잘 안 드신다고.”

해림의 커피를 빼앗아 마시고는 뭐 이딴 걸 마시느냐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내둘렀더란다. 문득 이전 기억이 떠올라 입 밖으로 꺼냈다가 말끝을 흐리는데, 주신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해림에게 제 컵을 내밀었다. 직접 마셔 보라는 뜻인 거 같아서 해림이 주신도가 준 컵을 손에 쥐었다. 홀짝 마시고는 눈썹 사이에 작은 길이 났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커피의 쓴맛을 시럽으로 지우려고 퍼부었는지 인공적인 단맛이 말도 못 했다. 생긴 건 설탕 한 알 용납 못 하게 생겨서, 입맛과 생김새가 참 많이도 달랐다.

“왜. 맛없어?”

“너무 달아요.”

“시럽 세 번밖에 안 넣었는데.”

한 번만 넣어도 해림의 입맛엔 달았다. 주신도가 장난을 성공시킨 애처럼 낄낄댔다. 해림이 끈적거리는 입술을 문지르고는 단 커피를 멀찍이 밀었다.

“잠 깰 때는 단 게 최고야.”

주신도가 해림의 입술이 닿은 곳에 아무렇지 않게 제 입술을 댔다. 잠기운은 완전히 달아났는데, 머리는 덜 깬 듯이 멍했다. 주신도의 말마따나 설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커피에 시럽을 넣기는 싫고. 해림이 차선책으로 잼을 선택했다. 토스트를 손에 쥐고 기계적으로 잼을 발랐다. 그조차도 너무 많이 바르면 제 한계치 이상으로 달까 봐 얇게 펴 발랐다.

“줘 봐.”

해림이 미적미적 잼을 바르는 꼴을 보고 있다가 주신도가 손을 뻗었다. 잼을 바르다 만 빵을 건네니 큰 손으로 나머지 구역에 잼을 석석 발라 해림에게 도로 건넸다. 해림이 토스트를 받아들고 구석을 베어 물었다. 입맛을 왕창 버렸던 커피보다는 덜 달아 먹을 만했다.

“우유 줄까.”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해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신도가 흔쾌히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왔다. 지금껏 생수나 맥주, 주전부리나 좀 봤지 우유가 있는 건 못 봤다. 해림의 몫만 따라 넘기고 우유는 도로 냉장고로 직행했다.

“사장님은 안 드세요?”

“그 비린 걸 왜 먹어.”

해림이 눈을 두어 번 빠르게 깜박였다. 주신도의 입맛이야 처음 들은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워낙 빨리 스쳐 가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고개만 숙였다. 헐렁한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자국이 눈에 보이는 성싶었다.

저기에 우유가 튄 적이 있었나.

착각이겠지. 잼에 든 설탕만으로는 뇌를 깨우기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비린 거에도 종류가 많잖아요. 어떤 거 싫어하세요.”

“우유, 회 같은 거. 도련님은?”

“저는 단 거 먹는 게 힘들어요.”

“젤리는 좋아하잖아.”

그야, 비리고 쓴 정액보다야 젤리 맛이 나아서 그랬다. 매번 구음하고 보상처럼 젤리를 주지 않았나. 해림의 귀 끝이 금세 붉어졌다. 감추려고 일부러 입을 크게 벌려 토스트를 물었다.

불현듯 주신도가 손을 뻗었다. 해림이 움칫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손은 끝까지 다가와 해림의 입술을 훑었다. 엄지에 희묽은 액체가 묻었다. 좀 전에 우유를 들이켜고서 입술 주변에 남은 자국이었다.

“하여튼 칠칠맞아.”

해림이 소매를 늘려 입술을 문질렀다. 주신도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토스트는 반만 먹고 내려놨다. 달았다. 한데 단 게 혓바닥인지 아니면 꽂히는 시선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해림이 손에 잡히는 아무 컵이나 들어 입을 축였다. 우유였다.

“왜…….”

“뭐.”

“왜 자꾸 보세요.”

“보면 안 돼?”

“사장님도 얼른 드세요.”

“생각 없어.”

해림이 잼을 뚝뚝 흐르게 바른 토스트라도 되는 듯이 주신도가 눈으로 뜯어 먹었다. 빵이었으면 이미 부스러기만 남았을 터였다. 꽂히는 시선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해림이 애꿎은 컵만 입에 갖다 댔다.

테이블이 덜컹 흔들렸다. 주신도가 턱을 괴었던 손을 내리며 테이블 위를 짚었다. 상체가 굽어지고 고개가 틀어졌다. 해림이 갑자기 달려든 주신도를 피하느라 무심결에 컵을 놓쳤다. 탕, 하고 컵이 까만 식탁 위에 부딪히며 우유가 쏟아졌다.

쪽 하고 가볍게 닿았던 입술이 곧 진하게 맞물렸다. 해림의 입술 둘레에 아직 덜 닦인 흰 우유를 머금고 입술 안쪽까지 파고들었다가 떨어졌다. 멀어지지는 않았다. 곧은 시선이 해림의 젖은 입술을 주시했다. 한 번 더 물고 싶다는 듯이, 아직 맛을 덜 봤다는 듯이. 해림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바짝 기대고서 거리를 두었다.

“저 우유 마셨어요.”

“알아. 비려.”

싫어하는 맛을 굳이 보려는 이유가 대체 뭔지. 해림이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작은 일에도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손가락과 발가락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손마디와 손끝도, 손등도 도홧빛이었다.

식탁 위에 흥건하게 고였던 우유가 아래로 투두둑 떨어졌다. 해림의 복사뼈를 스치고 헐렁한 바짓단을 물들였다. 그걸 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턱이 잡혀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들렸다. 입술이 물렸고, 주신도가 조금 전보다 깊게 입을 맞췄다.

“근데 달아.”

천둥이 쳤다. 빗소리도 숲을 죄다 휩쓸어 갈 듯이 어지러웠다. 한데 귓속은 쿵, 쿵 거리며 심장 뛰는 소리만 가득했다. 사방에서 북을 두드렸다. 가죽이 찢어져도 모를 만큼 거세게.

해림의 눈 아래가 붉게 달아올랐다. 호흡도 달떴다. 부끄럽고 수줍었다. 감정이 자꾸만 조용한 표면에 물보라를 일으켰다. 꿈속에서 본 저수지가 저를 덮쳤을 때처럼, 가쁜 숨이 터졌다.

세 번째로 입술이 닿았다. 악몽처럼 숨이 막혔다.

입맞춤으로 끝날 거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착각은 우둘투둘한 손바닥이 상의 안을 파고들자 증기처럼 증발했다.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꼬집어 부풀게 만들고, 찌릿한 통증에 겨워 신음을 뱉으면 왜 그러느냐고 혼을 내듯 입술을 깨물었다.

옷이 허물처럼 벗겨졌다. 맨 어깨와 목덜미에도 입술이 닿았다. 달아, 라고 간간이 뱉는 말이 귀에 닿으면 해림이 미모사 잎사귀처럼 움츠러들었었다. 주신도를 밀치지도, 그렇다고 껴안지도 못하고 옷자락만 쥐었다 놓았다. 그만, 이라고 버릇처럼 속삭였지만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어느새 천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주신도가 알몸인 해림을 훌쩍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해림이 셰프가 정성 들여 장식한 음식이라도 되는 듯이 사이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이 입술이나 손만큼이나 뜨겁다. 해림이 꼬물거리며 허벅지를 모았다. 눈에서 입술로, 목으로, 쇄골로, 가슴과 젖꼭지와 그 아래로 내려가는 눈길이 순진한 이를 희롱하듯 열에 들떠 있었다. 불꽃이 시선이 닿는 곳마다 톡톡 튀어 옮겨붙는 듯했다.

“다리 벌려.”

“…….”

해림이 머뭇거렸다. 무릎에 손이 올라왔다.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꽉 모으고 있는 다리를 주신도가 억지로 잡아 벌렸다. 해림의 쇄골 위가 벌건 색으로 달아올랐다. 정사가 처음도 아니고, 못 볼 꼴마저 다 보여 준 사이인데도 옷을 갖춰 입은 사람 앞에서 비밀스러운 곳을 보이려니 낯이 뜨거웠다.

“가만있어.”

해림이 다리를 오므리려 해도 주신도가 힘으로 막았다. 아예 허리를 다리 사이에 밀어 넣고서 해림이 깔고 앉은 자리 옆을 손으로 짚었다. 하필이면 우유가 적시고 간 곳이라 주신도의 손바닥이 흠뻑 젖어 들었다.

입맞춤과 손길만으로, 시선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발긋하고 통통하게 익었다. 주신도가 몸으로 아래를 지그시 누르자 엉덩잇살이 도도록하게 솟았다. 해림의 귓가도 분홍빛에서 앵두빛으로 변한 아랫도리처럼 불긋해졌다.

주신도는 아예 해림의 발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술에 잔뜩 취해 나른해진 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취할 자세였다. 살짝만 움직여도 바닥으로 추락할 듯이 자세가 아슬아슬하다. 해림이 재빨리 발을 내리려고 했으나 주신도가 막았다.

젖은 손이 배꼽을 덧그렸다가 그 아래를 더듬었다. 얼마나 바짝 섰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배에서 천천히 선을 따라 올라갔다. 기둥의 끄트머리에 투명한 방울이 올라왔다. 주신도가 히죽거리며 검지로 그 끝을 툭 건드렸다.

“누가 벌써 이렇게 되래.”

해림이 다리를 홱 오므리려 했다. 주신도의 손이 무릎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리가 허무하게 벌어졌다. 손가락 끝이 그림을 그리듯 기둥을 타고 내려와 음낭을 스쳤다.

“―아!”

손에서 우유가 뚝뚝 떨어졌다. 회음부를 적신 손가락이 더 아래를 파고들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손가락이 꽉 다물린 구멍을 비집고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툭 불거진 날개 뼈와 물길처럼 움푹 파인 등골이 움칫거렸다.

“겨우 하난데 왜 이래.”

“아, 읏……, 커요. 사장님은 손가락도……. 흑.”

말하기 무섭게 다른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찌걱거리며 점막이 젖어 드는 소리가 났다. 좁은 구멍이 벌어지고, 그걸로 모자라 안도 넓히겠다고 주신도의 검지와 중지가 사이를 넓혔다. 해림이 눈앞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바르르 떨었다.

손가락이 세 개나 들어와 안을 푹, 푹 쑤셔 댔다. 하얀 액이 누가 이미 안에다 질펀하게 싸지른 것처럼 밖으로 흘러나왔다. 손마디가 들어올 정도로 깊게 넣으면 해림이 입술을 앙 물었다가도 참지 못하고 비음을 터트렸다. 뾰족하게 선 혀끝이 귓구멍을 파고들고, 둥근 귀는 잇새에서 구깃구깃 접히다가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가락 세 개가 안에서 뛰어놀다 바깥으로 나갔다. 해림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두 눈에 담기는 죽을 듯이 부끄러워 일부러 주신도를 더 세게 껴안았다.

주신도가 해림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제 어깨에서 떼어 냈다. 해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흡사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줘 해림의 고개를 아래로 숙이게 해 놓고, 다른 손으로는 자꾸만 오므라드는 다리를 벌렸다.

“도련님 눈으로 직접 봐 봐. 되게 잘 삼키거든. 구멍은 좁은데.”

“싫어요. 아, 하지 마. 이거 놓고.”

“보라니까.”

“아……!”

언제 그렇게 몸을 부풀렸는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둥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더럭 겁이 났다. 이미 몇 번이나 몸을 섞었다지만 빛 아래서, 그것도 진입을 앞두고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구음 때도 차라리 보지 말자며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물지 않았던가. 얼기설기 얽힌 핏줄이며 색깔과 크기가 다른 사람의 몸에 집어넣으면 안 될 무기였다.

무딘 대가리가 흰 우유 묻은 주름에 닿았다. 해림의 엉덩이가 봉긋하게 솟으며 구멍이 입을 닫았다. 차마 볼 용기도 안 나 해림이 눈을 꾹 감았다.

“눈 떠.”

냉정하고, 동시에 열에 들뜬 목소리였다. 명령에 눈꺼풀이 제멋대로 열렸다. 해림이 눈 뜨기만을 기다린 듯 대가리가 구멍을 쿡쿡 찌르다가 비집고 들어갔다.

해림이 입을 벌렸다. 숨이 턱 막혔다. 커다래진 눈에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대가리를 눈곱만큼 먹었을 뿐인데도 몸이 찌릿했다. 위태롭게 식탁 모서리를 딛고 있는 발이 아래로 미끄러질 듯했다. 해림이 발가락을 안으로 모으며 손으로 주신도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

꾸물거리는 구멍에 붉더란 대가리가 쑥 미끄러져 들어갔다. 해림이 아랫배를 버들버들 떨었다. 손가락 네 개는 넣어야 그나마 들어올 때 수월한데, 주신도는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해림이 고통을 참으며 찡그리는 표정을 보고 싶은 건지 두세 개로만 풀어 주고 박았다.

대가리에 이어 그 아래 두툼한 모가지가 들어왔다. 해림이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었다. 구멍으로 기둥이 사라지는 모습이, 좁은 곳이 강제로 벌어지는 지끈한 통감과 열감이 외설적이었다. 아픈데도 야해서, 다음에 올 감각이 무언지 알아서 아랫도리가 기대감에 부풀었다.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아니다. 차라리 빨리 넣어서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느리게 들어와 숨 쉴 틈을 주는 것과, 빨리 들어와 애타는 기분을 없애는 것 중 어느 게 더 나은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머릿속을 태웠다. 뇌가 열에 녹았는지 몸이 통제에서 벗어나 여기저기가 멋대로 굴었다.

첫 번째가 구멍이었다. 안에 들어온 걸 마구 물었다. 더 밀고 들어오도록 길을 내줬다가도, 변덕을 부려 물어뜯을 듯이 달라붙었다. 그러면 주신도의 관자놀이에도 살색 힘줄이 서고 아랫배에도 푸르스름한 핏줄이 일었다.

해림의 머리카락을 쥐었던 손이 이번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엉덩잇살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올 만큼 세게 쥐고는 끌어당겨 해림의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해림이 팔꿈치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했다.

“아, 아!”

아직 바깥에 남아 있던 기둥이 한꺼번에 푹 박혔다. 해림의 목선이 길게 드러났다. 번개가 번쩍 내려쳤는데, 섬광이 바깥에서 터졌는지 아니면 제 눈앞에서만 터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랫배에서 뻣뻣하게 서 있던 기둥에서 정액이 주르륵 새어 나왔다.

“내가 말했지. 잘 먹는다고.”

막힌 건 배 속인데 숨이 막혔다. 해림이 숨통을 열려고 입을 벌렸다. 주신도가 해림의 등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해림이 버둥거렸다. 더 들어갔다가는 감당할 수 없다며 식탁의 반대편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주신도가 혀를 차고서 해림의 다리를 끌어 내렸다. 안에 기둥이 든 채로 몸이 돌아갔다. 점막이 사정없이 비틀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해림의 눈이 뒤집힐 듯 커다랗게 벌어졌다. 헤벌어진 입에서는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나오지 못했다. 온몸을 덜덜 떨며 미친 사람처럼 도리질을 쳤다.

“안 돼. 안, 싫어요. 흐읏, 아, 정말…… 그만해. ……읏.”

쾌락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수용이 가능하다. 그 이상이면 고통인지 쾌락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이성이 마비되는 순간들만 몸뚱이에 남는다.

“넣기만 했는데 뭘 그만해. 우리 예쁜 도련님은 말을 참 못되게 해. 버릇을 잘못 들였나.”

테이블에 배를 깐 자세였다. 해림이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손을 뒤로 뻗었다. 주신도의 허벅지 옆을 잡고 밀려고 애를 썼다. 주신도가 혀를 차며 손을 들었다. 철썩, 살 갈기는 소리가 터지고 해림의 엉덩이가 새빨갛게 익었다. 해림이 온몸을 크게 떨고는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이 좋아해서 해 주는 건데 못된 말 하면 안 되지. 솔직하게 말해. 더 해 달라고 졸라. 더 박아 달라고. 자지가 좋아서 미칠 거 같다고.”

“아냐, 정말. 아, 파. 아……!”

같은 자리를 한 대 더 얻어맞았다. 한쪽 엉덩잇살만 붉게 물들었다. 손자국이 남은 살집을 손에 가뜩하게 쥐고 주신도가 물소리가 철퍽 터지게 박았다. 부정도 그만하라는 애원도 신음에 묻혔다.

테이블이 끽끽거리며 흔들렸다. 해림의 목덜미와 날개 뼈 부근마저 붉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자꾸만 무릎이 굽어졌다. 주신도가 가는 허리를 단단하게 쥐고서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풀썩 쓰려지려던 몸이 억센 손아귀에 잡혀서 헝겊 인형처럼 흔들렸다. 온몸에 불긋불긋 단풍이 폈다.

테이블에 흥건했던 우유가 해림이 앞으로 밀릴 때마다 고간과 허벅지를 적시고 줄줄 흘러내렸다. 두 발끝은 땅에 디뎠으나 주신도가 푹 치고 들어오면 한 발이 못 견디겠다는 듯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윽, 읍, 흐읍. 하, 아……, 응!”

어떻게든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데, 주신도가 두 팔을 뒤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입이 벌어졌다. 점막을 헤집고 벌려 대는 몸짓이, 해림을 테이블에 처박는 몸짓이 밧줄처럼 목을 졸랐다. 속살을 다 찢어 놓을 듯이 날뛰는 기둥이, 그 끝이 더 부풀어 벽에 닿았다.

벌건 자국이 남은 엉덩잇살에 보조개가 팼다. 아랫배가 안으로 홀쭉하게 들어가 깊게도 처박힌 기둥의 윤곽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해림의 눈가에 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전보다 색이 옅고 묽은 정액이 아래에서 주르륵 쏟아졌다.

“나, 지금, 가고 있잖아. 하지 마, 잠깐만. 좀 멈춰. 제발……, 흐윽, 하지……!”

열렬한 애원에도 주신도는 상체를 숙여 해림의 등만 짓눌렀다. 결합이 더 깊어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평소에는 닿았다가도 뒤로 빼주고는 했던 곳에 선단이 닿았다.

절정의 여운이 다 가시기도 전에 주신도가 물렁한 속 벽을 꾹꾹 눌렀다. 빠져나갔다가 도로 들어와 누르고, 더 빠져나갔다가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해림이 버르르 떨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요의가 아랫배를 점령했다. 주신도가 손을 배 아래로 뻗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에 힘줄을 세우고 손톱으로 긁었다.

결국 아랫도리가 손에 잡혔다. 해림이 울음을 터트렸다. 손가락 끝이 선단을 문지르고 타들어 갈 것 같은 표피를 잡아당겼다. 안을 쑤셔 대는 기둥도 해림을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 떨어트렸다. 숨이 막혔다.

“아…… 으…….”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정액과 다른 투명한 물줄기가 해림의 아랫도리 끝에서 터져 나왔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사정했을 때보다 지독한 쾌감이 배를 꿰뚫었다. 소변처럼 터진 물줄기가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흰 우유와 정액 위에 후드득 흩어졌다.

전과 다르게 속살이 기둥을 으깰 듯이 달라붙었다. 주신도가 이를 악물었다. 턱과 목에 자연스레 핏대가 솟았다. 정액이 좁아진 속살에 왈칵왈칵 쏟아졌다. 해림이 움칠거렸다. 점막에 정액이 닿자 아직 붓기가 덜 빠진 아랫도리에서 투명한 애액이 질금질금 흘러나왔다.

몸이 통제를 벗어나 움찔거렸다. 푸른 기 도는 까만 눈동자도 초점이 없이 멍했다. 방금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거 같은데, 주신도에게 그만하라고 그토록 애원했는데, 화를 내야 하는데 등등의 생각도 조각나서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입은 항의는커녕 숨을 깔딱거리느라 바빴다.

주신도가 결합을 풀지 않고 해림의 등 위에 제 상체를 눌렀다. 개가 흘레붙는 자세였다.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고 짓씹어 자국을 만들고 해림의 귓바퀴 위에서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흐릿한 시야에 창밖의 풍경이 들어왔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가 창틈으로 스미어 제 발치를 적실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비가 창문에 그려 낸 일그러진 얼룩이 꼭 사람과 닮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 인영이 혀를 쯧쯧 차다가 빗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현실인지, 아니면 악몽의 연장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지치고 피곤했다. 비를 피할 우산 아래 몸을 숨기듯이 해림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 위를 주신도가 이불처럼 덮고 껴안았다.

* * *

며칠간 폭우가 쏟아지더니 드디어 날이 개었다. 먹구름이 물러나고 청명한 하늘이 얼굴을 드러냈다. 한결 싸늘해진 공기가 마른 나뭇가지 사이를 휘휘 쓸고 돌아다녔다. 그때마다 가지들이 덜그럭거리며 메마른 뼈다귀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주신도를 따라 사장실로 출근하는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가끔 심부름을 시키거나, 영어로 된 서류를 해석하라고 내미는 것 외엔 업무라 부를 만한 일이 없었다. 바쁘면 그마저도 시키지 않았다. 장식품처럼 소파에 앉혀 두거나 베개로 사용하거나, 그도 아니면…….

해림이 머쓱한 손길로 입가를 쓸었다. 이제 익숙하다 못해 덤덤해질 시기가 됐는데도 특정 기억이 떠오르면 그렇게 뺨이 뜨거워졌다. 심부름 잘하고 오면 상을 주겠다던 그 말도 같이 떠올라 해림이 잠시 걸음을 세웠다.

숨을 고르고 해림이 손에 든 서류를 옆구리에 단단히 끼웠다. 유리에게 건넬 서류였다. 보통은 주신도가 직접 불러 줬으나 오늘은 일이 바쁘다고 해림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해서 유리에게 연락을 하고 그쪽으로 가고 있는 길이었다.

휴게소에 앉아 음료를 홀짝이는데 유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눈동자에 왜 네가 그 서류를 가져왔느냐는 물음표가 빼곡했다. 해림이 모른 척 서류를 건넸다.

“아까 말씀드린 서류요.”

“좀 전에 못 물었는데, 사장은 뭐 하고 정하 씨가 이걸 전달해요?”

“바쁜가 봐요.”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는지는 해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유리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서 봉투를 열었다. 서류를 눈으로 훑고는 푸우, 하고 기관차가 증기 뽑듯 한숨도 내쉬었다.

“저번에 시킨 일도 다 안 끝났는데 또 일이 생겼네요. 정말, 사람 쥐어짜는 데 뭐 있어.”

“일이 많아요?”

“예. 많아요. 아주 많아서 가끔 미칠 거 같다니까. 이거 처리하면 휴가 달라고 졸라 보게요. 정하 씨가 좀 도와줘요. 내가 말하면 쥐뿔 안 들어도 정하 씨가 말하면 들어줄 거야.”

“그럴 리가요.”

주신도가 제 말이라고 냉큼 들어주는 장면은 상상이 안 갔다. 도와 달라면야 못 할 것도 없지만, 가망성이 낮았다. 유리가 아쉬운 듯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푸푸 숨을 뱉었다.

“나 정하 씨 핑계 대고 조금만 쉬다 갈래. 가면 또 일해야 하거든요.”

해림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사장실에 주신도도 없을뿐더러,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힘내라는 의미로 유리에게 건넸다. 유리가 의자에 털썩 앉아 경쾌하게 캔 뚜껑을 열었다.

조용한 휴식은 채 5분을 가지 못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었다. 유리가 으, 하며 질색했다.

“쉬는 꼴을 못 보지.”

유리가 캔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에 마뜩잖은 기색이 가득했다. 심드렁하게 받았다가,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이형이가?”

해림이 귀를 쫑긋 세웠다. 최근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하지 않았더니 이형을 못 본 지도 꽤 오래 지났다. 유리가 심각하게 알았어,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에 해림도 따라 일어섰다.

“이형이한테 무슨 일 있나요?”

“자세히는 나도 가 봐야 알아요. 일어날게요.”

“저도 같이 가요.”

표정을 보아하니 예삿일은 아니었다. 유리는 해림이 쫓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걸음이 평소답지 않게 뛰듯이 빨랐다. 해림도 유리의 뒤에 바짝 붙었다.

이형의 방 앞에 시훈과 지원이 서 있었다. 시훈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떡하느냐는 말만 연발하고 있고, 웬만한 일에 침착하게 대응하던 지원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유리와 해림을 번갈아 보며 시훈이 코를 훌쩍였다.

“어떡해요, 누나. 이형이 죽으면 어떡해.”

유리가 문부터 두드렸다. 주먹으로 쾅쾅쾅 세게 쳐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깊이 잠들었더라도 이 정도 소음이면 눈을 뜰 텐데. 유리가 입술을 물고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마스터키인지 대자마자 틱 소리가 나며 잠금이 해제됐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해림의 눈썹을 슬쩍 구겼다. 코끝에 약한 피비린내가 스쳤다. 해림이 신발도 벗지 않고 단숨에 욕실로 뛰어갔다.

김으로 가득 찬 샤워실에 이형이 앉아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팔목에서 핏물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벌건 핏줄기가 물줄기와 섞여 수챗구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갔다.

“이형아!”

해림이 드물게 소리를 높이며 이형의 어깨를 잡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은 뜨거운데 손에 닿은 이형의 몸은 미적지근했다. 이형의 피부와 낯짝도 창백하고 희멀겠다. 해림이 피가 쏟아지는 팔목부터 잡았다. 뒤에서 시훈이 흐어엉 하고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정신 차려. 이형아. 정신 좀 차려 봐.”

유리가 해림의 옆에 앉아 이형의 목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상처가 안 난 손목도 손으로 짚어 맥이 뛰는지 확인하고 일어나 샤워기를 껐다.

“지원아, 가서 침대 정리 좀 해 놔. 애 눕히게.”

어디론가 바쁘게 전화를 걸며 유리가 명령했다. 그나마 정신이 있는 지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을 나갔다.

“여기 이형이 방이에요. 저번에도 와 봐서 알잖아. 애 손목 그었으니까 당장 뛰어와요.”

시훈이 훌쩍거리며 울어 상대방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유리가 신경질적으로 수화음을 높였다. 상대방 목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걔 또 그래? 아이 씨발, 진짜. 귀찮게.

“빨리. 수혈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팩도 챙겨 오고.”

―잠깐만. 나 지금 딸 치는 중이라 이거 끝내고.

사람이 죽어 가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말에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해림이 전화를 빼앗아 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대신 옷을 벗어 이로 천을 찢고 상처 부위를 동여맸다. 얼마나 꽉꽉 묶었는지 이형의 손이 다른 부분보다 허옇게 질렸다.

“사장한테 보고하기 전에 당장 뛰어와.”

유리의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남자가 쳇, 혀를 차고 전화를 끊었다.

해림이 이형의 오금과 등을 받치고 안아 들었다. 피가 덜 새도록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방은 쓰레기 소굴이었다. 지원이 정리해 놓아 그나마 침대엔 공간이 있었다. 해림이 조심스레 이형을 눕혔다. 널브러진 옷가지 중 아무거나 하나 주워 물기를 닦아 주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해림이 하고 싶은 질문을 유리가 대신했다. 시훈은 이형의 머리맡에 달라붙어 훌쩍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원 역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눈시울이 붉기는 매한가지였다.

“저번에 이형이한테 뭐 빌린 게 있어서 갚으려고 문을 두드렸어요. 근데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더라고요. 자나 싶어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이형이, 저번부터 죽고 싶다는 말은 계속했었어요. 근데 여기서 안 죽고 싶은 새끼들이 어디 있어요. 그냥……. 그냥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시훈이 말을 이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두덩에 또 눈물이 고였다. 해림이 아랫입술 주변이 하얘지도록 깨물었다. 상처를 천으로 감쌀 때 하얗고 가느다란 실선들이 무심결에 눈에 들어왔다. 어떤 상처로 생겼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흉터들. 항상 시계로 가리고 있어서 몰랐다.

노크 소리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르고 들어왔다. 유리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뿔테 안경을 쓴 마른 남자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해죽거렸다.

“나 왔어요. ……뭐야. 분위기 왜 이렇게 우중충해. 벌써 죽었어? 나 헛걸음했어?”

방정맞은 목소리였다. 해림이 옆으로 비켜섰다. 남자가 해림을 위아래로 훑고는 묘하게 웃었다.

“이야, 형씨 처음 보는데 몸매랑 얼굴이 장난이 아니네. 근데 떡 치고 왔다고 광고해? 나는 유리가 불러서 딸도 다 못 치고 왔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애나 살펴요. 근태 보고 다 할 거야.”

유리의 싸늘한 협박에 남자가 툴툴거리며 이형의 침대 맡에 섰다. 해림이 뒤로 물러났다. 지원은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낯빛이 허옇게 질려서 최대한 멀찍이 서 있고, 시훈은 어디선가 구김살 덜 간 셔츠를 가져와 해림에게 건넸다.

“형, 이거 입어요.”

옷을 주면서도 시훈의 눈길이 목덜미와 가슴과 배를 찍고 돌아다녔다. 대체 어딜 보나 싶어 해림이 고개를 숙였다. 붉은 자국과 잇자국이 사방팔방에 강아지 발자국처럼 찍혀 있었다. 얼른 셔츠를 받아들고 팔을 꿰어 넣었다.

“수혈은 안 해도 되겠네. 이놈은 왜 성공도 못 할 거 매번 저지르고 지랄이야? 학습 능력이 없나.”

“주둥이 좀 조용히 못 해요? 나불댈 시간에 빨리 한 땀이라도 더 꿰매요.”

은색 바늘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이형이 움칫거렸다. 시훈이 저가 더 아픈 듯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해림도 주먹을 꽉 쥐고 바늘이 움직이는 양을 바라봤다. 흰 장갑을 낀 손이 떨림 없이 바느질을 끝마쳤다.

“진정제 두고 갈 테니까 눈 뜨면 먹으라고 해요. 허튼짓 좀 그만하라고 하고. 우울증 약 필요하면 줄 테니 오라 그래.”

남자가 나가자 지원이 살았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훈은 침대 아래 앉아 이형의 멀쩡한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고, 유리는 미처 닫지 못한 창문을 닫았다.

이형은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보다가 모든 걸 외면하고 싶은 사람처럼 도로 눈을 감았다. 시훈이 옆에서 괜찮으냐고 물어도, 지원이 그런 짓 좀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퍼부어도 침묵만 고수했다.

“내가 차마 희망 가지란 말은 못 하겠어. 그래도 굳이 젊은 날에 목숨 끊을 필요 있니. 조금 더 살아 보면 좀 행복한 날도 있겠지.”

유리가 이형을 내려다보며 한 소리 했다. 어찌 보면 틀에 박힌 조언이고, 달리 보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위안이었다. 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시훈도 눈물을 닦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 너 죽으면……, 내기할 때 재미없어. 호구 없어지잖아.”

침울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한 농담이었다. 지원만 장단 맞춰 웃었다. 광대가 와서 재주를 넘어도 바뀌지 않을 분위기에 시훈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저 가 볼게요.”

유리도 따라 일어났다. 파하는 분위기인데도 해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에 형용하기 힘든 바람이 불었다. 스산하고 차갑고 메마른 바람이었다.

“정하 씨, 안 가요?”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유리가 침대에 누워있는 이형을 흘긋 보고 방을 나섰다. 지원과 시훈이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나갔다. 방에 해림과 이형 둘만 남았다. 이형은 잠든 듯이,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든 저와 전혀 상관없다는 양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손을 뻗어 이형의 코 아래 검지를 갖다 댔다. 스치는 숨결이 이형의 목숨이 아직 몸에 붙어 있음을 알려 줬다.

해림이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담배가 필요했다. 지금 당장 입에 물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면 메슥거리는 속이 가라앉을 성싶었다. 문을 열자마자 맡았던 쇠 비린내가 아직도 코끝에 달라붙어 있었다.

저 역시 서투른 위로라도 하고 싶었다. 힘들지만 그래도 모든 건 끝이 있다고, 언젠가 빚을 털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단어도 문장도 이형에겐 닿지 않을 걸 알았다. 유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 심지어 해림마저도 이형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 낙담과 절망을.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끝을 내는 방법이 죽음밖에 없다는 막막한 결론을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다들 조금씩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이형에게 멍청하다고 욕하지 않았다.

해림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눈이 뻑뻑했다. 시훈처럼 대놓고 울거나 지원처럼 눈시울을 붉히거나, 유리처럼 한숨을 쉬는 일반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반응이라고는 멍하니 이형을 바라보거나, 눈썹 사이를 찌푸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해림이 이윽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방이 이형의 속마음을 대신해서 보여 주듯 지저분했다. 이런 방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려다 가도 다시 하강 곡선을 탈 터였다.

해림이 허리를 숙여 주섬주섬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웠다. 먼지를 탁탁 털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변을 정리했다. 옷이 사라진 바닥에 쓰레기와 먼지와 부스러기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이형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휴지통을 옆구리에 끼고 쓰레기를 주웠다.

“……형.”

작은 목소리에 해림이 숙였던 허리를 바로 했다. 이형이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해림이 들고 있던 걸 얼른 내려놓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냥 거기 있어요.”

해림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형이 간신히 등을 벽에 기댔다. 팔다리를 늘어트린 모습이 바느질을 얼기설기한 낡고 해진 솜 인형 같았다.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고는 이형이 눈을 들었다. 팔을 걷어붙인 해림을 보고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날 왜 살렸어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말이 지나갔다. 어느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어떤 말도 이형에게 위안이 되지 않을 걸 알았다.

누구를 완벽히 이해하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왜, 왜 살렸어. 그냥 죽게 놔뒀어야지.”

원망이 짙게 묻어났다. 울음기도. 해림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옆에 앉아 울지 말라고 어깨라도 다독이거나 그럴싸한 조언이라도 해 줄 텐데. 그럴 말재주가 해림에겐 없었다.

“나, 형이 제일 미운 거 알아요?”

이형이 거푸 피식거리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붕대로 칭칭 감긴 손목을 보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흰자가 불그죽죽 물들었다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내가 형 걱정한 건 알아요? 형이 사장하고 같이 산다는 건 꿈에도 몰랐어. 형이 사장한테 몸 대 주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형이 어디서 죽은 건 아닐까 사람들한테 매일 물어보고 다녔어요. 차라리 속 시원하게 어디 갔다고, 잘 살고 있다고 말이나 해 주지.”

기를 쓰고 숨긴 사실은 아니나 자랑할 거리 또한 아니었다. 하나 언젠가 퍼질 이야기였다. 해림이 이형을 마주 봤다. 제 표정이 어떨지 해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딱딱한 석고 가면이 얼굴에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안도했어. 형이 안전하게 잘 살고 있다는 거니까. 근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까 다음엔 화가 나더라. 나는 형을 엄청 걱정했거든. 형이, 사장하고 하하호호 하는 것도 모르고 나는! 병신처럼! 형을 걱정하고 다녔다고!”

이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먹을 꽉 쥐느라 흰 붕대 위로 붉은 핏물이 번졌다. 해림이 이형의 팔목을 잡으려 손을 뻗자 허공에서 철썩 소리가 나도록 뿌리쳤다. 해림의 팔목 아래에 금세 벌건 자국이 남았다.

“건들지 마요. 여기서 형이 제일 싫어. 나 속이고 좋았어요? 나는 형 믿었는데. 적어도 속 다 털어놓을 사람으로…… 유일하게 믿었는데.”

“그만해. 손목에서 피 나.”

“이럴 거면 왜 나한테 잘해 줬어요?”

“이형아.”

“왜……, 형만 행복해요?”

“…….”

“왜 형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 이 좆같은 곳에서.”

이형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해림이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쥐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초승달 모양으로 새겨졌다. 손톱도 하얗게 질렸다. 망할 놈의 입은 이 상황에서조차 꿀 먹은 양 열리지 않았다.

“내 방에서 나가요.”

이형이 얼굴을 가렸다. 붕대에 번진 피를 보고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나가라 했으니 더는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다.

문을 열고 나왔다가 시훈과 마주쳤다. 품에 과자 더미가 들려 있었다. 위로 차원에서 한 아름 사 온 성싶었다. 해림의 눈치를 흘긋흘긋 보다가 이내 머쓱하게 웃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좀 들었어요, 형.”

담배를 가져왔나. 해림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돛대가 남아 있었다. 이 길로 흡연실에 가서 태우면 조금 속이 나아질까. 과연 한 대로 속이 다 풀릴까.

“쟤는 형을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다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은 아니었으니까. 부럽고 질투 나서 배 아픈 거죠, 뭐. 자기는 손님 받으면서 구르는 동안 형님은 좋은 데서 편하게 먹고 잤으니.”

“…….”

“그래도 형, 쟤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나쁜 애는 아니에요. 그냥 좀. 형도 알잖아요. 여기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요. 우리 중에서 제일 오래 버틴 애가 쟤라서 아마 더 그럴 거예요.”

시훈이 문을 두드리려다 멈칫하고는 과자를 문 앞에 우르르 내려놨다. 바쁘게 뒤돌아 가다가 해림을 돌아봤다.

“난 형 안 미워해요. 한 명이라도 편하게 살면 좋은 거죠. 그러니까 형, 사장님한테 저 좀 잘 말해 주세요. 이번 달에 간당간당하거든요. 도와주면 제가 나중에 한턱 쏠게요.”

부탁에는 베갯머리송사가 최고 아니겠냐며 시훈이 엄지까지 추켜들고 총총 걸어갔다. 그 말이 안 그래도 엉망진창인 해림의 심정에 무거운 돌을 던진 줄도 모르고.

해림은 방을 한 번 돌아보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힌 담뱃갑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한 대로는 부족했다. 입맛은 벌써 담배 한 갑을 제자리에서 죄다 피운 양 텁텁했다.

주신도는 저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사장실에 오지 않았다. 해림 홀로 사무실의 불을 끄고 집으로 올라갔다.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텅 빈 집에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이제는 일상에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일이 오늘따라 무게감을 가지고 해림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씻고 나와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거실로 나왔다. 컴컴한 거실에서 TV만 켰다. 딱히 보고 싶은 건 없어 리모컨을 틱틱 누르다가 아무 영화 채널에 고정했다. 철 지난 영화가 흘러나왔다. 언젠가 주신도와 나란히 앉아 봤던 화려한 액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잔잔한 영화였다.

음악은 은은했고 나누는 대사도 조용했다. 이국적인 유럽의 풍경과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비둘기,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남녀가 소곤거리며 나누는 이야기가 누워서 양을 세는 것만큼이나 지루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찍은 게 분명한 영화를 보고도 해림은 졸리지 않았다.

같은 장면과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붉게 번지던 피. 담배는 끝내 한 대만 피웠다. 그거로는 속을 다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사포로 문지르기 전의 나무토막처럼 뾰족하고 거친 잔재가 속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손깍지를 끼고서 엄지로 목뒤를 꾹꾹 눌렀다. 눈을 감고 두통을 없애는 데 집중하려고 해도 이형의 목소리가 귀 옆에서 울리면 통증이 다시금 올라왔다.

사방이 막힌 벽이다. 무력함을 통렬하게 깨닫는 이 상황이 괴롭다. 해림의 미간에 잔주름이 잡혔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해림이 고개를 들었다. 소파 뒤편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은 소리 없이 다니면서. 왜 저가 들어왔는데 바로 돌아보지 않느냐고 시위라도 하는 듯한 발걸음 소리였다. 바로 반응하고 싶지는 않아 뭉그적거렸다.

턱 아래로 손이 쓱 미끄러져 들어왔다. 고개가 소파 등받이 뒤로 넘어갔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입술에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 반항 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깊은 입맞춤이 쏟아졌다.

“왜 안 자고 있어. 나 온 거 알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이마에도 눈꺼풀과 뺨에도 인사처럼 입술이 쪼고 떨어졌다. 이형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유일한 원인이었다면 해림도 주신도의 기척을 느끼고 일어났을 터였다.

“오셨어요.”

평범한 인사. 내색하고 싶지 않아 해림이 구겨진 미간을 억지로 폈다. 주신도와 눈이 마주치자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문장이 되어 목구멍을 채웠다. 대부분 주신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빤히 보이는 말들이었다.

이형이가 자살 시도를 했어요. 많이 괴롭다고. 시훈이는 이번 달에 아슬아슬하다고 봐 달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해림이 말을 삼키듯 침을 꼴깍 삼켰다. 주신도의 손가락이 꿀렁이는 목울대를 따라 느릿느릿 움직였다.

“심부름은 잘했고?”

“네.”

“실장이 뭐래.”

“일이 많다고 힘들다던데요.”

“그거 엄살 부리는 거야. 뭐만 주면 징징거려.”

주신도가 셔츠 단추를 하나 풀며 소파 등받이를 훌쩍 넘어왔다. 해림의 허벅지를 아주 당연하게 베고서 TV를 흘끔 쳐다봤다. 저딴 졸린 영화를 왜 보냐고, 하여튼 취향 특이하다고 구시렁거리며 다른 채널로 돌렸다. 새벽에 하는 프로가 거기서 거기인지라 주신도도 곧 적당한 프로 찾기를 포기하고 리모컨을 구석으로 던졌다.

“도련님은 별일 없었어?”

분명 유리에게 보고를 받았을 텐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빤히 알면서 성격 한번 의뭉스러웠다.

“참. 심부름 잘하면 상 준댔지. 뭐 해 줄까.”

채널은 지루한 영화로 돌아가 있었다. 주신도의 시선은 TV에 가 있되 손은 해림의 상의 안으로 들어왔다. 보송보송한 옆구리를 쓸고 그 위로 올라가 가슴을 조몰락거렸다. 없는 살을 끌어모아 그러쥐었다가 엄지로 유두를 으깨는데, 그 상이 뭔지는 몰라도 해림보다 주신도에게 좋을 것이 분명했다.

읏, 하고 해림이 작게 신음했다. 손이 꼭 생명을 가진 촉수처럼 살갗 위를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옷 위로 손등을 잡자 반항하듯 꿈틀거렸다. 더는 유두를 괴롭히지 못하게 힘주어 잡았다.

“제 말 들어 주실 거예요?”

“이거 놓으면.”

해림이 손등에서 손을 뗐다. 족쇄에서 풀린 손가락이 볼똑 선 유두를 문지르고 손가락 사이에서 꾹 누르며 장난질을 했다. 해림이 손끝을 움칠대며 참았다.

“이형이가 자살 시도를 했어요.”

“그래서?”

놀라지도,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뉴스에서 지나가는 한 줄 듣는 듯이 무심했다.

“이형이……, 빚 얼마나 남았나요.”

물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남의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서 얻다 써먹으려고. 자살 시도한 이형이 불쌍해 그 빚을 제 빚 위에 얹기라도 하려고. 해림은 자선 사업가도, 적선을 베푸는 보살도 아니었다.

가슴을 지분거리던 손이 멈칫했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옷 밖으로 스르륵 빠져나가더니 이윽고 주신도가 상체를 일으켰다. TV에서 쏟아지는 빛이 돌아선 등을 비추었다. 색색으로 변하는 빛 탓인지 오늘따라 그 뒷모습이 단단한 벽처럼 견고해 보였다.

“그건 왜.”

“상 주신다고 하셔서요. 이형이……, 한 달만이라도 조금 쉬게 해 주시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도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게. 한 달이 안 되면 단 일주일만이라도 부채에서 자유롭기를 바랐다.

저가 생각해도 과한 부탁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외쳤다. 시훈의 말마따나 제 부탁이라면 주신도가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희망이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모든 게 다 빠져나가도 희망은 남았던 것처럼, 해림도 아슬아슬한 그 끈을 잡았다.

푸핫, 하고 주신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혼자 재밌는 거라도 잔뜩 본 사람처럼 호탕하게 웃다가, 웃음기가 가득 남은 얼굴로 해림을 돌아봤다.

“도련님. 도련님이 그딴 일에 왜 신경을 써.”

“저는.”

“우리 예쁜 도련님이 마음 씀씀이가 곱다는 거야 내가 잘 알지. 아주 착해서 여기서 벗어나겠다고 손목 그은 등신 새끼한테 한 달 휴가나 달라고 하고.”

아이고, 말꼬리를 한숨처럼 길게 늘이며 주신도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근데 도련님, 우리 선 넘지는 말자.”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팔뚝에 힘을 줘 해림을 끌어당기고 아주 친근한 사이처럼 얼굴을 마주 붙였다. 다정하고 따스한 접촉에도 해림은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바짝 쥐었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기분은.

“그 새끼가 알아서 뒈지든 내가 그 새끼를 죽이든 도련님이 의견 낼 일이 아니야.”

해림의 자리가 어디인지 주신도가 친절하게 선으로 그어 줬다. 뺨에 닿는 뺨이나 관자놀이에 닿는 입술은 살가워도 말속에 숨은 의미는 서늘한 칼이었다.

“……그럼, 상 주기로 한 건.”

“내가 지금 도련님한테 벌 안 준 걸로 끝났지. 사람이 참, 잘해 주면 분수를 모르고 계속 기어올라. 우리 도련님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손가락이 뺨을 스쳤다. 턱이 잡혔고 고개가 돌아갔다. 마주친 눈빛이 섬뜩했다. 웃음기도 언제 떠 있었냐는 양 완벽하게 지워졌다.

“도련님. 오늘은 봐줄게. 하지만 그 입에서 한 번 더 다른 새끼 이름 나오면 내가 좀, 화가 많이 날 거야. 그런 영양가 없는 새끼들한테 관심 꺼. 도련님은 손목 그은 그 새끼처럼 아주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두 번 말 할 필요 없겠지.”

“…….”

턱에서 손이 떨어졌다. 손자국이 남은 듯이 얼얼했다. 해림이 눈을 꾹 감고서 울컥울컥 치미는 감정을 삭였다. 어두운 시야에 물에 휩쓸려 휘몰아치던 핏물이 어른거렸다.

사람이 죽을 뻔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고 목숨을 끊으려 했다. 방법은 다르나 해림은 이형의 눈동자에서 죽은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봤다. 부친은 성공했고 이형은 실패했다는 사실만이 달랐다.

주신도가 일어났다. 해림이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저가 눈앞에서 손목을 그어도 초승달 모양으로 굽어질 덤덤한 눈동자. 네 위치는 딱 거기라고 지정해 준 밉고 증오스러운 입술. 샤워기 아래 널브러진 이형은 제 미래일 수도 있었다.

다정하게 쓰다듬던 손길이 남이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베푸는 얕은 관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거늘. 뻑뻑하게 마른 눈이 뜨거워졌다. 이름 모를 것이 자꾸만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이형의 손목을 보고 느꼈던 감정보다 더욱 짙고 맹렬했다.

이런 사람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새삼스레 깨달았을 뿐이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그동안 단꿈에 취해 외면하고 있었다. 저가 디딘 바닥이 불타는 곳이었음을, 주신도가 눈을 가려 준 덕에 하나도 보지 않았음을.

행복한가.

시훈의 추측에 해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 입 다물고 있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정말 답을 알 수 없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