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3/21)

3.

죽은 듯이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저를 맞이하는 천장과 장소는 그대로였다. 눈을 굴리다가 투명하고 가는 줄을 보고 따라 내려갔다. 손등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신나게 두드리던 남자가 해림의 기척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들었다. 콧잔등에 앉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해죽이는 얼굴이 낯익다.

“깼어? 안 뒈져서 다행이야. 난 또 혹시 몰라서 아이스박스 가져왔잖아. 장기 담으려고.”

닥터가 코를 훌쩍거리며 해림을 봤다가 핸드폰으로 도로 시선을 내렸다. 해림이 일어나려 하자 좀 더 누워 있으라고 한 손만 건성건성 흔들며 권했다.

“사장이 오라고 해서 시체 치우는 줄 알았어. 아, 걱정 마. 후장은 안 건드렸어. 거긴 사장이 직접 한다고 해서.”

해림이 못 들은 척 손등에 박힌 주삿바늘을 잡아 뜯었다. 선홍색 핏물이 시트와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의사가 벌떡 일어나 해림의 손목을 잡았다.

“반이나 남았는데 아깝게 왜 그래. 얌전히 누워 있어.”

뭐든 공으로 주어지는 게 싫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그 작태 또한. 해림이 팔목을 비틀어 빼고 비척거리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눈 감기 전에 봤던 종잇조각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해림이 비틀비틀 일어나자 의사가 부리나케 부축했다. 거칠거칠한 손이 닿자마자 피부 위로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해림이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의사를 밀쳤다. 지금은 누가 제 몸에 우연히 들러붙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쪽 쓰러지면 내가 손해 봐서 그래. 그냥 쉬지?”

“괜찮습니다.”

목이 형편없이 쉬어 있었다. 의사가 어휴,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였다.

“그럼 나중에 사장한테 꼭 이야기해 줘. 내가 원해서 나간 게 아니라, 형씨가 날 보냈다고. 괜한 오해 사서 내 내장 내 손으로 뽑기는 싫어.”

의사가 칭얼거리며 링거를 내렸다. 시종일관 코를 훌쩍훌쩍 들이마시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간다. 드디어 방해꾼 없이 홀로 남았다. 해림이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들어가는 것도 힘에 겨워 세면대를 짚고 섰다. 거울 속에서 낯선 사람이 해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평생을 봐 온 얼굴인데도, 다른 사람 쳐다보듯 눈동자가 생소했다. 속이 텅 빈 유리 눈알 같은.

「자기가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가끔 소름 돋아. 날 무슨 장식품처럼 보잖아.」

해림이 눈을 내리깔았다. 정신을 차릴 겸 찬물을 틀고 얼굴을 거푸 씻었다. 뺨이 아플 만큼 문지르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물기 어린 뺨에 잇자국과 상체에 남은 상처 같은 흔적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씹히고 빨리고 살점을 잘게 조각낼 것처럼 물린 자국들이.

“……하.”

해림의 입술이 비틀렸다. 한쪽만 볼살을 위로 밀며 올라갔다가 반대쪽도 따라 올라갔다. 하하, 하고 메마른 웃음이 꼬리를 물고 새어 나왔다. 배를 붙잡고, 목젖이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고 싶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다 웃겼다. 알몸으로 욕실에 서 있는 이 순간도, 몸에 빼곡하게 남은 흔적들도 죄다 우스웠다.

하나 웃음은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처럼 작게 새다가 어느 순간 뚝 멎었다. 해림이 도로 눈을 들었다. 지금까지 뭔가에 홀린 듯싶었다. 깨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래대로, 해야 했을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대기실은 오랜만이었다. 전에 갔던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는데도 다들 모여 있었다. 해림을 보고는 하나같이 눈을 달덩이처럼 휘둥그레 떴다. 구석에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웅크려 자던 시훈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형!”

이형은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시간이 됐는데도 대기실에 없으면 예약일 게 빤했다.

“형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원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살이 포동포동 오른 시훈도 쪼르르 달려와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일하려고.”

사장이 손수 제 분수를 알려 줬으니 그에 맞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단꿈이었다. 꿈에서 깰 만큼 통증은 차고 넘치게 느꼈다.

해림이 소파에 앉았다. 서 있으려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아직 몸이 성치는 않았다. 가늘게 숨을 뱉으며 힘든 기색을 숨겼다.

“형이 일을요?”

지원이 먼저 의문을 품었다. 시훈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할 기운도 없는 데다가, 제 입으로 미주알고주알 고하기도 싫었다.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고 밝히는 것도 퍽 민망한 일이었다.

해림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지원이 입가를 가리며 생각에 잠겼다. 시훈도 뭔가 몹시 궁금한지 해림 옆에 앉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가 뺨을 긁적이고는 씩 웃었다.

“형이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거예요. 빚도 금방 갚을 거고.”

나름의 덕담이었다. 지원은 말을 아끼며 해림의 어깨만 툭툭 두드렸다. 그나저나, 하며 시훈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조잘조잘 근황을 떠들었다. 무슨 내기가 오갔고, 어떤 손님이 무슨 짓을 저질렀고, 최근 채홍의 탈모 진행이 빨라졌다는 뭐 그런 잡다한 이야기들을.

한창 둘이 해림의 옆에서 수다의 장을 펼치는 와중에 대기실 문이 열렸다. 시훈이 먼저 흘긋 돌아봤다가 입가를 구기며 볼멘소리를 냈다. 해림도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천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천운이 성큼성큼 걸어와 해림의 어깨를 잡았다. 해림이 흠칫하며 어깨를 비틀었다. 다른 이의 손이 닿는 게 께름칙했다. 창백한 안색을 보고 천운이 얼른 손을 거뒀다.

“일하러.”

“그러니까 네가 왜 일을……. 아냐. 잠깐 나가자. 아직 시간 있으니까.”

천운이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지원과 시훈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봤다. 무슨 대화를 나누든 남들 다 듣게 나눌 주제는 아니었다. 해림이 선뜻 일어나 천운을 따라갔다.

천운이 복도를 돌아 비상계단 안으로 쏙 들어갔다. 누가 따라오는지 살펴보듯 목을 길게 빼 바깥을 확인하고 비상구 문을 닫았다. 비상구 마크가 뿜는 희미한 빛만 어둑한 계단을 밝혔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이야기하자. 혹시, 사장이 내쫓았어?”

나가라고 한 적은 없었다. 해림이 스스로 기어 나왔다.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내쳐지느니, 마음이든 몸이든 먼저 준비를 해 놓는 게 옳지 않을까. 언제 쫓겨나도 덜 아플 수 있게.

“저번에 여기서 나가자고 한 거, 방법이 뭐야?”

그 안에 운이 좋게 돈 많은 손님을 만나 빚을 갚고 나가면 좋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림이 물었다. 천운이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붕어 같은 표정으로 해림을 쳐다봤다. 해림이 천운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을 종용하자 후아, 숨을 몰아쉬고 입을 열었다.

“주워들은 게 있어. 당장은 아니고…… 조만간. 일이 좀 터질 거야.”

“무슨 일.”

“그건 말 못 해. 새어 나가면 난 정말 죽을 거거든. 하지만 방법은 확실해. 내가 널 책임지고 내보내 줄게.”

한연동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해림도 언젠가 탈출할 수 있으리라 꿈을 꿨더란다. 헛된 꿈이었다. 어떻게든 외출을 해서 경찰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후에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자며 케이를 따라갔다가 또 쓴맛을 봤다.

이번엔 믿을 수 있을까. 의심이 앞을 가로막았다. 한데 앞선 두 번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곳이든 주신도가 벽처럼 서서 막고 있는 답답함에 해림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천운이 해림을 흘긋거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옆구리에 손을 대고 물 끓는 주전자처럼 푸우우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짜고짜 해림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네가 날 백 퍼센트 믿지 않는 건 알아. 그래도 해림아, 넌 날 믿어야 해. 나만 널 여기서 구할 수 있으니까.”

천운의 눈에 기이한 빛이 번들거렸다. 손을 잡아 빼려고 해도 천운의 아귀힘이 한 수 위였다.

“난 여기 사장이 정말 싫거든. 그런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쓰레기한테 네가 괴롭힘당하는 걸 도저히 못 보겠어. 그래서 널 구하려는 거야.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천운이 빠르게 속삭였다. 해림이 고개를 뒤로 뺀 채 묵묵하게 쳐다보고만 있자 머쓱하게 손을 놓았다. 속사포처럼 쏘아 댄 말이 부끄러운지 하얀 비상구 등에 비친 낯빛이 불그죽죽하게 익었다.

“아니, 그렇다고 너한테 뭘 원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끝을 얼버무리며 천운이 시선을 피했다. 해림이 벌겋게 익은 손을 주머니에 넣어 감췄다. 저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순수한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길은 없어도, 현재로서는 천운만이 열쇠를 지니고 있었다.

“언제인지 확실하진 않고?”

“응. 나도 들어 봐야 해서. 하지만 걱정 마. 넌 내가 지킬게. 그리고……. 웬만하면, 힘들더라도 다른 손님 받지 말고 사장 옆에 붙어 있어. 그 새끼 끔찍하지만 그래도 다른 인간들 받는 것보다는 좀 나을 거야.”

과연 그럴까. 사방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해림의 입가가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천운에게 적나라하게 보였을 것이다.

“조금만 더 참아. 그 사람들한테 최대한 빨리하라고 나도 독촉할게.”

천운이 저만 믿으라며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해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비상구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보인 인영에 천운이 화들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팔짱을 낀 유리가 고개를 비틀어 천운을 올려다봤다. 눈빛이 곱지만은 않았다. 천운의 뒤에 선 해림을 보고는 잠깐 시선이 흔들렸다가 곧 차갑게 식었다.

“땡땡이 그만 까고 일 좀 해요. 그쪽 찾느라 다 뒤지고 다니는 거 짜증 나니까.”

천운이 거푸 허리를 숙여 죄송하다고 인사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해림도 따라가려는데, 유리가 앞을 막아섰다.

“정하 씨는 사장실로 가요. 대기실 말고.”

“그냥 대기실로 가는 게…….”

“따로 지시받은 사항 없어요. 올라가요.”

샛길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밀치고 가려면 못 갈 것도 없지만, 대기실에 간다 한들 얌전히 거기에 놔두지는 않을 성싶다. 굳이 복잡한 길 가지 말자며 해림이 비상구를 나왔다. 유리가 조용히 해림을 쳐다보다가 이내 등을 돌리고 앞장섰다.

사장실로 향하는 복도는 까마득하고, 평소 가볍게 열고 들어갔던 문은 오늘따라 고산처럼 높았다.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졌다. 해림이 멀찍이 뒤처지면 유리가 앞서가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왔다. 아예 해림의 등 뒤에 서서 게으른 노새 재촉하듯 등을 떠다밀었다.

노크도 문을 여는 것도 유리가 다 했다. 해림은 딸려 온 물건처럼 멀거니 서 있었다. 유리가 옆으로 비켜서며 해림에게 들어가라며 고갯짓을 했다.

해림을 방에 밀어 넣고 유리가 문을 닫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보다 작았다. 해림이 책상 쪽을 봤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찰나에도 신기하리만큼 주신도가 눈에 박혔다. 안경을 쓰고,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넥타이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앞섶을 풀어헤치고, 깨알 같은 글씨를 구분하듯 미간을 찌푸리고 서류를 보는 모습이 그림처럼 눈앞에 남아 있었다.

“뭐 해. 앉아.”

주신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날 밤, 해림의 귀에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게 했던 그 일이 주신도에게는 그저 숨이나 한 번 쉬었던 일상인 양. 해림이 그 자리에 발붙이고 서 있자 주신도가 서류에서 눈을 뗐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안아서 모셔다 줘?”

정말 다가올 것처럼 서류를 내려놓기에 하는 수 없이 소파에 앉았다. 맨 처음 사장실에 들어와 불편한 공기를 버티던 그때와 같았다. 날카로운 침이 듬뿍 담긴 풍선이 사방에 가득 차 있는 성싶다. 손만 살짝 움직여도 펑 터져서 그 침을 해림의 머리 위로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서류가 부스럭거리며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숨소리도 잘 안 들렸다. 심장 박동이 귀를 막았다. 해림이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발끝을 바라봤다.

“대기실 갔다며?”

으, 하고 주신도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팔을 위로 쭉 뻗고 목뒤를 주무르다 안경을 벗었다. 해림 쪽으론 다가오지 않고 의자만 빙그르르 돌렸다.

“네.”

“왜, 드디어 몸 팔게?”

허공을 떠다니던 풍선 하나가 터졌다. 터지는 소리는 쿵쾅거리는 박동 소리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침은 비처럼 떨어져 가슴에 박혔다. 마주 잡은 두 손가락이 살갗을 파고들 듯 손마디 사이를 눌렀다. 그 부분만 하얗게 질렸다.

“……네.”

오, 하고 주신도가 의외라는 듯이 탄성을 뱉었다. 해림의 각오가 애기들이 다음 날이면 잊곤 하는 허무맹랑한 다짐이나 된다는 것처럼 가소롭다는 투였다.

“정신 차리랬더니 도련님이 해까닥 돌았나 봐. 생각은 기특한데 내가 정말, 도련님이 잘 알아듣게 말하지 않았어. 그 실력으로 손님 받았다가는 가게 망한다고. 이리 와. 쓸데없는 잡생각 하지 말고.”

주신도가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애교나 부려 보라고 손짓으로 말했다. 어제와 취급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부르면 꼬리 흔들고 가야 할 개 다루듯이 굴었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신도가 저를 취급하는 방향은 일정했다. 저에겐 때로는 폭풍 같고 때로는 춘풍 같던 일들이 그에겐 아무 가치도 없었다. 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감정이 들었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장난이고 재미고 흥미에 불과했다. 말 잘 들으면 젤리 하나 주고,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을 휘둘렀다. 마치 사육사와 훈련받는 동물처럼.

적어도 사람으로 대해 줄 줄 알았지. 남들이 저치는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한다고 했을 때도,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나쁜 면만 있겠냐며 순진하게 착각을 했다. 제 눈에 비친 모습들에 진심이 아주 조금이라도 묻어 있을 거라고. 그 착각이 아팠다. 아픔이 신체 구석구석을 짓눌렀다.

먼저 속이 뒤집혔다. 구역질이 났다. 입에 넣은 건 거의 없었는데도 식도를 타고 신물이 올라왔다. 머리도 터질 듯이 아팠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 숨쉬기가 어렵고 왼쪽 가슴은 담뱃불로 지지는 듯 뜨거웠다.

해림이 통증을 진정시키려고 몸을 웅크렸다. 미간을 구기고 아랫입술이 하얗게 탈색되도록 물며 참았다. 분노가 밑바닥에서 들끓었다. 그 위를 누른 감정을 뚫고 위로 솟구칠 만큼 거세게.

해림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심상치 않았다.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도 창백하고 가느다랬다. 의자가 삐걱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어느새 일어난 주신도가 책상을 건너 해림에게 다가왔다.

“정해림.”

“정하, 요.”

어깨에 닿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해림이 숨을 후우 내쉬고 허리를 곧게 폈다. 구겨졌던 미간도 판판하게 펴지고 통증에 떨리던 뺨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썹은 미미하게 흔들리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여기서 본명 부르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

“이제부터라도 빚 갚으려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다 보면 실력도 늘 거고.”

목소리가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흔들리지도 가늘게 흩어지지도 않았다.

“도련님, 돌았어?”

허공을 맴돌던 손이 바지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주신도가 삐딱하게 고개를 틀고 해림을 내려다봤다. 눈동자를 보고, 의미를 읽으려고 노력했던 행위들은 과거로 끝났다. 해림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제가 선을 넘은 거 같아서요.”

처음에는 선이 존재했다. 주신도는 대척점에 서 있는 부류라고 정의했다. 그 선을 넘어갈 일은 없을 거라 단언했다. 언제부터 그 선이 흐릿해졌더라.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얼기설기 칠한 선처럼, 두 사람이 수없이 밟고 문질러 옅어진 것처럼 희미했다. 그 선을 다시 그을 때였다. 두 번 다시 넘지 않을 선을.

“혹시 오늘 시킬 일 있으십니까. 없으면 대기실에 가 볼게요.”

앞으로도 그럴 거란 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으리라 믿었다. 주신도가 가 보라는 말은 안 하고 해림의 눈동자만 빤히 들여다봤다. 해림도 마주 봤다. 나진이 차갑게 던졌던 그 말이 주신도의 입술을 통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지 말라고.

주신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막이 산소를 빼앗았다. 뭐라도 떠들고 싶었다. 숨을 쉴 수 있게끔.

“아니면 사장님이 사실래요.”

천운의 말도 따지고 보면 맞았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이에서 굴러다니느니 얌전히 주신도만 받는 게 그나마 몸이 편할 길이었다. 당시엔 주신도에게 다시 몸을 파느니 차라리 혀 깨무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간 몸을 파는 일이 제 살을 깎아 먹는 일인 양 끔찍하게 여겼다. 다시 보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뭐가 어려울까. 주신도가 했던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껴안고 견디고 버티고, 입을 맞추고 빚을 갚고 감정을 죽이고. 주신도도 앞으로 있을 수많은 손님 중 하나처럼 여기면 된다고.

“하.”

해림의 발언이 우스웠는지 주신도가 가볍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책상 위에 있는 담뱃갑을 들어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해림에게 던지려다가 멈칫하며 제 손에 쥐었다. 틱틱거리며 부싯돌이 돌아갔다.

“뭐가 불만인데.”

“불만은 없.”

“―약속대로 그 씨발 새끼 목숨 붙여 줬잖아. 도련님이 애인하고 놀아나는 꼴을 보고도 참아 줬고 도련님 눈앞에서 그 새끼 목 잘라 보여 주지도 않았잖아. 그 새끼 손 잘라서 도련님 입 속에 처넣은 것도 아닌데 뭐가 성질나서 이 지랄을 떨어.”

천운의 목숨을 협박 삼아 저를 겁박하고 남창 취급했다. 뭐가 이렇게 저를 화나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가 명확한데도 주신도 앞에서 밝히고 싶지 않았다. 밝혀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절대로,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을 열지 말아야 했다.

“말해, 정해림. 뭘 숨기는지, 뭐가 널 뒤집어 놨는지.”

주신도가 부르는 이름 세 글자에 해림의 눈 끝이 움칠했다. 넘어가서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은 진심을 끄집어내면 또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속상했냐며 위로라도 해 주면,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거나 입을 맞추고 안아 주면 멍청하게도 덫에 제 발을 스스로 걸고 주저앉을 게 분명했다.

“그런 거 없어요. 볼일 없으시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몸을 틀다가 팔이 잡혔다. 찰나에 책상에 등이 닿았다. 덜컹거리며 위에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주울 생각도 안 하고, 주신도가 해림을 책상에 눕힌 채 그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얼굴이 음영이 드리워 무슨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담배 연기만 안개처럼 뿌옜다. 시선이 눈동자와 코끝과 입술에 닿았다. 입 맞출 것처럼 허리를 숙이기에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하, 하고 연기를 담은 한숨이 귀 옆에서 터졌다.

“……그래. 도련님이 왜 삐졌는지 모르겠는데, 장단은 맞춰 줄게. 오래는 못 맞춰 주니까 적당히 하고 끝내.”

잇새로 으득거리며 이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분노를 짓씹으며 숨을 삼키는 소리 또한. 해림이 무슨 마음으로 입을 열었는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태도였다. 몸 위를 누르는 무게가 진저리나게 미워 어깨를 잡아 밀려고 했다.

하나 어깨에 닿은 손은 차마 밀치지 못하고 가늘게 흔들렸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과 호흡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차갑게 식히고자 마음먹었던 속이 또다시 울렁였다. 멀미처럼 치미는 감정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까, 해림이 아래팔로 입술을 꾹 눌렀다.

* * *

유리가 아니꼬운 시선으로 휘적휘적 도망가는 천운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하나에서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었다. 혓바닥은 타고났는지 손님 구워삶은 솜씨는 일품이어도 같이 일하기엔 게으른 동료였다. 일 안 하고 뺀들거리는 인간이 얼마나 저를 귀찮게 하는지는 두말하면 입 아팠다.

게다가 천운은 정하와 자주 붙어 있었다. 둘이 무슨 작당 모의를 하든 저와 하등 상관없지만 연애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정하였다. 상사가 옆구리에 끼고 돌다 못해 제집 한 칸을 내어 준 애물단지였다. 괜히 일이 미묘하게 꼬여서 불똥이 튀기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둘의 전선에 이상이 없다면 이렇게 사서 걱정할 필요 없을 텐데. 요새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눈치 빠른 걸로 밑바닥부터 아득바득 기어올라 실장 명함까지 달았다. 보통은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적당하게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서 마무리 짓는데, 정하는 주신도가 옆구리에 끼고 살아서 파악이 좀 늦었다.

천운이 방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유리가 휴게소로 걸음을 틀었다. 정하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가 앉을 자리에 캔을 하나 올려놓고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했다. 유리가 정하의 앞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다른 애들 면담 신청은 받아 봤어도 정하와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불길했다. 상사에게 전해 받은 사항이 아무것도 없었다. 최소한 정하가 요새 좀 미쳐 가니까 잘 달래 주라는 둥의 고지도 없었다. 순전히 제 감과 눈치로 해결해야 했다.

“손님이요. 받으려고요.”

정하가 덤덤하게 밝혔다. 유리가 속으로 경악했다. 눈이 절로 동그랗게 커졌으나 그동안 익힌 노련한 기술로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얼굴에 당황이 드러나지 않도록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대기실은 출입 금지당해서요. 혹시 손님을 받는 다른 방법이 있나요. 예약 손님이라도 받고 싶은데.”

갈수록 가관이다. 유리가 숨을 골랐다. 보기가 여러 개 떠올랐는데 죄다 미쳤냐는 물음이었다.

“정하 씨,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냥. 이제 빚 갚으려고요.”

설마 사장이 버렸나. 그랬다면 바로 대기실로 보냈거나 지하로 던져 넣었겠지. 유리가 섣부른 추측을 지우고 해림을 쳐다봤다. 보통 사람이 눈을 보면 그 안에 숨은 감정이 찰나라도 떠오르지 않는가. 당연히 해림도 그럴 줄 알았다.

아니었다. 유리 같은 눈알이었다. 뭐든 반사시키는 유리 벽처럼 말갛고 투명했다. 원체 도자기 인형 같은 사람이라도 생각하긴 했어도, 이 정도로 벽이 두껍지는 않았다. 적어도 혈색은 돌고 인간답게 굴었더란다.

지금은 뭔가 달랐다. 위태로웠다. 손님과 저 앞에선 까르륵거리며 웃다가 방에 들어가 날카로운 날붙이로 손목이나 목을 긁는 애들처럼 기운이 흐리멍덩했다. 셔츠가 가리는 몸 선도 전보다 가느다랗고 옷 밖으로 보이는 목덜미와 손목도 얄팍해졌다. 뺨도 조금은 야위었다.

“정하 씨가 손님은 무슨 손님이야. 노래도 못하고 손님 바지에다 토하면서. 그런 비위로는 들어가도 얻어맞기만 할걸요. 그냥 사장 옆에 붙어 있어요.”

“이제 배워서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말문이 막혔다. 대체 사장이 정하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궁금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사장하고 정하 씨, 그렇게 나쁜 사이는 아니었잖아.”

결국 못 참고 물었다. 원인을 알아서 달랠 방향을 정할 수 있노라며, 이건 오지랖이 아니라고 유리가 애써 정당화했다.

“없었어요.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는 사람이―”

“예약 손님도 받기 힘든가요?”

예약받았다가 황천길 가는 문을 제 손으로 열라고. 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실수 한 번으로 뒷산에 생매장당하긴 싫었다.

“그러지 마, 정하 씨.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요. 그냥 얌전히 사장 옆에 붙어 있으라고. 그게 정하 씨가 건강하게 오래 살길이라고. 사장 비위 맞추는 거 힘든 일인 건 나도 잘 알지, 왜 모르겠어. 하지만 그 덕에 더러운 꼴 안 보고 살잖아.”

“언제까지요.”

“응?”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언제까지 숨죽이고 살까요. 기약 없이 기다리느니, 실속 차려서 얼른 빚 갚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까지 해림과 대화한 중에 가장 긴 대답이었다. 차분하고 고요했다. 암담한 내용을 말하면서 눈빛도 덤덤했다. 유리가 음료로 목을 축이며 해림을 흘끔 올려다봤다. 꽉 다문 입술에서 이미 마음을 정한 고집이 느껴졌다.

곤란했다. 정하가 왜 갑자기 삐뚤게 나오는지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홍콩에서 돌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둘이 깨가 쏟아지지 않았나.

유리가 테이블을 도도독 두드리며 우연히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볼 일이 있어 사장실이 있는 복도를 통과하다가 우연히 살짝 열린 문틈으로 둘이 겹쳐진 꼴을 봤다. 못 볼 꼴 봤다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저가 알던 사장의 목소리가 아니라 혹시 다른 사람인가 하고 몰래 들여다봤다.

「나 봐야지. 왜 자꾸 고개를 돌려.」

「그만 해요. 입술 아파.」

「엄살이 왜 그렇게 심해. 조금 문 거 가지고.」

「조금이 아니, ……아, 정말. 왜 또 물어요.」

「말랑말랑해서.」

눈 가리고 들어도 빼도 박도 못 하게 연인들이 나눌 속삭임이었다. 두 눈에 들어온 광경은 더욱 놀라웠다. 주신도가 정하를 제 허벅지에 앉혀 두고 그 얼굴을 잡았다.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졌다가 쪽쪽거리며 얼굴이 다 녹도록 입맞춤을 퍼부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어떤지도 보였다.

유리는 그 눈빛이 무얼 담았는지 알았다. 종종 봤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황홀하고 찬란해서 오직 그뿐만이 안 보인다는 열렬한 시선, 추종하고 찬양하고 영혼까지 순순히 바칠 거라는 맹목적인 그 눈빛. 다른 한 단어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도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피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영수가 비웃었더란다. 유리도 저가 일을 하도 많이 해서 눈이 맛이 간 모양이라고, 비비적거리며 얼른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물러났다.

유리가 회상에서 깨어 눈앞의 정하를 마주했다. 그때 정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사장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못 이기겠다는 듯 받아들이면서도 은근하게 사장과 비슷한 색을 띤 눈빛이지 않았나.

제 기억이 드라마와 뒤섞여 현실을 왜곡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정하는 고된 촬영이 끝난 배우처럼 지치고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침대든 관이든 누워서 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에요. 하지만 정하 씨 마음은 잘 알았으니까 참고할게요.”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마음은 갸륵하나, 유리는 도와줄 수 없었다. 이해는 했다. 저 성격에 본인이 나서서 손님을 유혹하거나 멱살을 잡고 저를 사라며 윽박지를 수는 없었을 터다. 어떻게 해도 방법이 안 보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에게 달려온 거겠지.

하나 정하가 아무리 바짓자락 붙들고 사정해도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눈 딱 감고 손님 붙여 줬다가는 제 목이 달아났다. 유리가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났다.

“오늘 정하 씨가 한 말, 사장한테 보고하지는 않을게요.”

둘 사이에 황금 사과를 투척하고 싶지는 않다. 금은 이미 간 상태인데 아예 갈라지게 놔두고 싶지도 않았다. 마지막 오지랖이었다.

“상관없어요.”

한데 대답이 의외였다. 유리가 돌아봤다. 정하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었다. 눈 뜬 시체 같았다. 죽은 이에게 입술만 붉게 칠해 놓고 감은 눈꺼풀을 억지로 벌리면 저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듯한, 아니면 벌써 죽은.

“정말 상관없어요.”

정하가 일어났다. 원래 이렇게 호리호리했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들어 줘서 고맙다며 정하가 휴게실을 먼저 나갔다. 점점 작아지는 뒤태를 보며 유리가 생각에 잠겼다가 아, 작게 소리를 냈다. 그 눈이 왜 빛나지 않았는지, 왜 대화 내내 초점이 어긋난 느낌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벽 뒤에 숨었구나.

이 사람이 내게 진심이겠다 싶어 애정과 충성을 바치다가 결국 한 철 장난감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일이야 여기에서 일하며 안 본 날이 드물었다. 멀쩡하다가 폐인 되는 거 한순간이었다.

해림은 발버둥 치고 있었다. 코앞에 놓인 늪에 제 발로 빠지기 싫어서, 상처받기 싫어서. 안 될 걸 알면서도 어렵사리 부탁한 것도, 아마 버려지기 이전에 버릴 거라는 마음가짐에서 왔을 터였다. 그러면 덜 아플 거라고 착각하고.

결국 제 살 깎아 먹기였다. 울분과 분노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쏘는 일이었다. 그 참담한 마음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유리의 눈에는 그저 길 잃은 아이가 주변 어른 옷자락을 붙잡고 덜덜 떠는 모습으로 보였다. 짠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딱히 줄 수 없는.

“그러게, 내가 홀리지 않게 조심하라 그랬잖아.”

경고했을 때 새겨듣지 그랬어. 이미 악어한테 물려서 끌려 들어갔는데 뭘 어떻게 벗어나겠다고.

들어야 할 이는 이제 뒷모습도 안 보인다. 유리는 혀만 쯧쯧 차고 말았다.

* * *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며칠이 흘렀다. 주신도는 해림을 건들지 않았다. 사장실에서 몸을 겹친 게 마지막이었다. 바쁜 모양인지 사장실에 있는 시간보다 없는 시간이 길어 해림은 혼자 멀거니 앉아 있다가 주신도의 집으로 돌아왔다. 틈틈이 유리를 찾아가 손님을 받겠노라 말해 봤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예전처럼 귀가를 기다리는 일은 없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침실로 들어오는 일도 없었다. 해림은 생기 없는 화분처럼 집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살았다.

고개 든 마음을 죽이겠다고 다짐한 것 치고는 평화로웠다. 해림은 이 평화가 싫었다. 초조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절벽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피가 바싹바싹 말랐다. 손발이 꽁꽁 묶여 죽는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매사가 불안했다.

빗소리가 요란한 밤이었다. 고요해도 잠 못 이루는 요즘인데 시끄러운 소리가 얕게 남은 졸음마저 빼앗았다. 비 그림자가 어린 창문 너머로 꿈에서 봤던 부친이 비웃고 있는 성싶었다. 거 보라고,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고.

해림이 침대 구석에 앉아 무릎을 껴안았다. 시곗바늘은 잘도 돌아 새벽이었다. 휴일이라 집에만 박혀 있었더니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간 줄도 몰랐다.

자면 악몽이고 깨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속을 뒤집었다. 대체 원인이 뭔지 곰곰이 따져 보려 해도 불현듯 거대한 벽이 떡하니 튀어나와 사고의 진전을 막았다. 그 벽이 무언지 알아서 더욱 속이 아팠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꽉 감아 캄캄한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그려졌다. 아예 보지 않고 살면 눈앞에 어른거리는 낯짝도 언젠가 희미해질까. 무릎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멀리서 현관문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속도에 높낮이 없는 음이 들리고는 현관문이 열렸다. 소리만으로도 몸이 바짝 긴장했다. 해림이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살을 누르며 방문을 바라봤다. 며칠간 들어오지 않았으니 오늘도 마찬가지로 방치할 것이다. 타당한 추론인데도 매번 혹시나 하는 의심을 품었다.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지. 얼굴을 보면 뭐라고 해야지. 매일 일기처럼 정리한 말도 주신도 앞에선 나오지 않았다. 서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다가, 한 명이 먼저 고개를 돌리고 방에 들어가면 그날의 인사는 끝이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림은 문 앞에 누가 서 있음을 알았다. 문 아래로 그림자가 비치지도, 인기척이 나지 않았는데도. 감각이 모두 곤두서서 바깥에 서 있을 사람을 인지했다. 솜털마저 문을 향해 일어났다.

문고리가 돌아갔다.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다. 뭘 망설이는 걸까. 어차피 여기는 제 공간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기생충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뿐. 해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침대를 짚고, 어둠 속에서 문을 바라봤다.

문이 열렸다. 번개가 치지도, 인영의 등 뒤에서 빛이 쏟아지지도 않았는데 그 모습이 선명했다. 옅은 담배 냄새가 코 아래를 문지르며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존재는 입증됐다.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을 다 가리고 선 인영이 먼저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문가에 기댔다.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본다. 어둠에 얼굴이 묻혀 보이지 않음에도 시선은 눈에 잡힐 듯이 따끔하게 몸을 찔렀다.

“언제까지.”

적막에 숨이 막혀 해림이 입을 열기 바로 전에, 주신도가 입술을 뗐다. 낮고 또렷한 음성. 색으로 보자면 아주 짙게 칠한 검푸른 색이었다.

“언제까지 반항할 건데.”

반항. 해림이 하, 하고 웃음을 툭 터트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였다. 저절로 손가락이 굽어지며 시트가 안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고작 반항이었다.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이, 주신도에겐 고작.

“반항이요.”

“충분히 오래 봐주지 않았나. 이제 그만해.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우리 도련님 똑똑했잖아. 왜 자꾸 멍청하게 굴어.”

“아뇨.”

똑똑했다면 이런 마음을 품지도 않았을 거고, 싹이 트기 전에 여기를 박차고 나갔겠지. 저는 한없이 멍청했다. 세상 천치가 저보다 똑똑하다고 주장해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반항한 적 없어요. 이게 어떻게 반항입니까. 사장님이 알려 주신 대로 하려는 건데.”

“……하, 그래. 이참에 말해 봐. 대체 불만이 뭐야. 뭐가 불만이라 이 지랄 난리를 피우는지 도련님 입으로 말해. 들어 줄게.”

“불만 없어요.”

설사 불만이 있어도 말 못 할 위치였다. 한낱 접대부가 사장에게 불만을 토로해서 뭐가 해결되겠는가.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주신도가 성큼 다가와 해림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흰 발꿈치가 허공으로 올라갔다.

주신도가 해림의 코앞에 얼굴을 디밀었다. 입술 사이로 희디흰 송곳니가 드러났다. 콧잔등이 일그러지고, 금방이라도 짐승같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토해 낼 듯이 목덜미가 단단하게 굳었다.

“이딴 식으로 좆같이 굴지 말고 말을 하라고. 뭐가 불만인지 말하라고 멍석도 깔아 줬잖아. 도련님 대가리에 무슨 생각이 박혔는지, 그 속에 뭘 삼켰는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잇새로 뱉던 말이 고함으로 끝을 맺었다. 코앞에서 요동치는 눈매를 보고도 해림의 얼굴엔 표정이 서리지 않았다. 주신도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 발끝을 바짝 세웠다. 목이 눌려 큭 소리는 나왔을망정 시선은 떼지 않았다.

“무슨 말이요?”

“어떤 말이든!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정해림.”

“……내 이름!”

멱살을 잡혀도 고요했던 해림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사납게 몰아치던 주신도도 주춤할 만큼 칼날같이 주시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창을 때리는 비바람보다 매몰찼다.

“부르지 마요. 여기서 본명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던 건 사장님 아닙니까. 제 이름 부르지 마세요. 정하 외에는 절대.”

“너…….”

“사장님이야말로 나한테 뭘 원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손님한테 몸 팔아서 빚 갚겠다잖아. 그럼 알았다고 보내 줄 것이지 왜 잡고 있어요. 왜.”

“미쳤어? 드디어 돌았어? 정신 차려.”

“제 정신 멀쩡해요. 미쳐서 손목 그을 일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죽어도 그쪽 빚은 다 갚고 알아서 죽을―”

우둘투둘한 손바닥이 해림의 입과 턱을 막으며 침대로 밀쳤다. 반항하느라 휘젓는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막고 그 위에 주신도가 올라탔다. 발버둥 쳐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뼈저리게 알았다. 해림이 주먹만 꽉 쥐며 주신도를 올려다봤다.

“죽는다고?”

“…….”

“누구 마음대로.”

입을 막았던 손이 목으로 내려왔다. 주신도가 제 손아귀에 가는 목을 쥐고서 지그시 힘을 줬다. 해림이 핏줄 돋은 손목을 두 손으로 쥐었다. 떼어 내려고 애를 써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숨을 헐떡이며 해림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손바닥으로 주신도의 팔을 턱턱 내려쳐도 철근 더미를 굵게 엮어 놓은 것처럼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며 아래팔에 손톱을 세웠다. 붉은 줄이 죽죽 가도록 긁어도 목을 조르는 힘은 그대로였다.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순간, 해림이 몸에서 힘을 탁 뺐다. 죽은 듯이 널브러져서 위를 올려다봤다. 어둠이 가리고 있어 어떤 눈으로 절 내려다보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지고 손발에도 감각이 희미했다. 고통을 못 이긴 눈물이 눈가에 고였다가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을 부러트릴 듯이 말아 쥐었던 손아귀가 느슨하게 폭을 넓혔다.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 정도라도 공기가 들어올 틈은 충분해 해림이 쿨럭, 기침을 쏟아 냈다. 가슴팍이 거푸 들썩거렸다.

목에서 맴돌던 손이 위로 올라와 양 뺨을 쥐었다. 어디로도 돌리지 못하게 단단하게 고정했다. 해림이 눈물이 어룽진 눈동자를 간신히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바깥에서 번개가 번쩍 내리꽂히고 천둥이 이어 울었다. 섬광이 비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콧대도, 굳어진 양 뺨과 입술마저 얼음처럼 차가운데 불그스름한 눈동자만 꼭 녹아서 흐르는 쇳물 같다.

그 조화가 이상했다. 그간의 모습이 모두 연극에서 맡은 배역이었던 것처럼, 한 꺼풀 벗어던진 지금이 꼭 본 모습인 것처럼.

“…….”

해림이 눈을 구겼다. 눈꼬리가 가늘게 접히고 입술이 벌어졌다. 새빨개진 해림의 입술에 주신도가 제 입술을 포갰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듯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입술을 깨물고 헤벌어진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해림이 팔을 휘두르려 해도 손목이 한 손에 잡혀 머리 위에 처박혔다. 온몸으로 내리누르고, 해림의 혓바닥과 목젖까지 다 뜯어 먹을 것처럼 게걸스레 입을 맞췄다. 고개를 저으려고 해도 막히고 이를 질끈 물려고 해도 뺨을 단단히 쥔 손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입맞춤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잡아먹고자 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상대를 죽이고 물고 뜯고 뼈째 발라먹겠다는 심보였다. 알면서도 깨질 것 같은 머리 한구석에 불이 붙었다. 분노와 다른 감각이 뒤섞여서 떼어 낼 수 없게 한데 뭉쳐 돌아다녔다. 등골이 오싹하고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한 손이 불에 탄 듯이 안으로 굽어졌다. 허벅지 안쪽도 불꽃이 옮겨붙은 것처럼 따끔하고 찌릿했다.

목이 졸렸을 때처럼 숨이 막혔다. 숨소리가, 헐떡거림이 곧 죽을 사람처럼 가팔랐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정말 숨이 끊어질 듯이 폐가 부풀었다.

창밖에 새하얀 빛이 한 번 더 내리꽂혔다. 거인이 숲에다 바윗돌을 내던진 듯이 쾅 하고 땅을 울리는 소리가 터지고, 해림이 죽을 때까지 붙어 있었을 성싶은 입술이 그제야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문질러지고 깨물린 입술에 핏방울이 점점이 올라왔다. 주신도의 입술에도 핏물이 묻어 있었다.

주신도는 그저 가만히 해림을 내려다봤다. 언제까지 숨을 고르나 관찰하듯이. 시선이 버거워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손목을 옥죄던 손이 떨어졌다. 몸을 짜부라트리던 무게도 멀어졌다. 해림을 침대 위에 팽개친 채 주신도가 일어났다. 머리를 쓸어 올렸고,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해림은 끝내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주신도는 잠깐 해림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몸을 돌리고 등을 보이고 문을 열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고, 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해림이 손을 들어 목을 더듬었다. 졸린 목이 아팠다. 침을 삼키자 목구멍이 부은 게 느껴졌다. 혓바닥과 입천장과 볼 안쪽과 혀 아래도 얼얼했다. 짐승에게 입부터 잡아먹히다가 간신히 목숨을 붙잡고 탈출한 듯이 온몸에 긴장이 한꺼번에 쑥 빠져나갔다.

죽을 뻔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주신도의 손에. 해림이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추웠다. 몸이 자꾸만 떨렸다. 한기가 드는데도 명치는 불이 아직 안 꺼진 듯이 뜨거웠다. 눈물이 솟은 눈가도 그만큼 욱신거리며 열이 올랐다.

“……왜 그랬어요.”

입 밖으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주신도를 앞에 두고는 못 뱉은 말이었다. 목이 아파서 기침을 몇 번 했다. 손에 잡히는 시트를 끌어당겨 입을 막았다.

“왜, 당신이.”

그렇게 적나라하게 제 착각을 부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선을 넘지 말라는 그 말 지킨답시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아주 좁은 우리를 주고 그 안에 가뒀다. 한낱 먼지나, 정이 떨어져 도로 한가운데 버릴 개나 고양이처럼 다루고 아프게 만들었다.

주신도가 미웠다. 미운 만큼 저도 미웠다. 이렇게까지 발을 깊이 들여놓은 저가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반응을 보려고 던져 준 간식을 덥석덥석 주워 먹고 키운 제 감정이 슬펐다. 어리석음의 대가가 이렇게나 고통스러웠다.

이제라도 제 자리 알아서 가겠다고 하면, 보내 주면, 아파도 체념하고 받아들일 건데 그건 또 아니라고 저를 뒤흔든다. 선을 지키라 했으면 주신도 역시 선을 넘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왜 멋대로 쳐들어오고 밟고 엉망으로 휘젓는지.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눌렀다. 식은 핏방울이 손가락에 붙었다. 입을 맞추고 저를 내려다보던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눈동자가 무슨 빛이었는지, 눈썹과 눈 끝이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아직도 눈앞에 선연히 남아 있었다.

왜 그런 눈이었을까. 왜 저가 더 아픈 듯이 내려다봤을까. 죽이려고 한 것도 본인이었으면서.

“……그럴 리 없지.”

착각은 한 번으로 족하다. 해림이 잔상을 떨치려고 애를 썼다. 비우면 비운 것 이상으로 차올랐다. 아픔과 주신도 둘만 남았다.

차라리 망설이지 말고 죽이지.

그럼 덜 아팠을 텐데.

주신도가 아주 조금, 백만분의 일만큼이라도 저가 느끼는 고통을 알았으면 싶었다. 타인이 이해 못 할 거라는 걸 아는데도, 간절하게.

휴게실에 들어가다가 이형이 멈칫했다. 창가 쪽에 해림이 앉아 있었다. 기척을 못 느낄 리가 없건만, 해림은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밖에 뭐가 있는 듯이, 아니면 귀가 먼 듯이.

이형은 도로 나가려다가 쭈뼛거리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 그래도 만나고 싶었다. 미친 짓을 벌이는 주기는 끝났고 다시금 그래도 정상인 행세를 하는 주기에 들어섰기에. 미안하다는 말이 목울대를 간질였다. 그런 막말을 내뱉을 의도는 없었다고, 당시에 저가 우울한 나머지 괜한 화풀이를 형에게 퍼부었던 걸 사과하고 싶노라고.

늦은 오후라 유리창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해림의 길어진 머리카락과 얼굴을 비추고 어깨 위로 떨어졌다. 지켜보던 이형이 눈살을 설핏 찌푸렸다.

분명 햇살 아래 서 있는데도, 해림은 햇볕에 들지 않는 창가에서 시들시들 말라가는 화분 같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목도 뼈가 불거졌고 목덜미도 전보다 야위었다. 눈가는 우묵해서 우울감이 묻어나고 가느다랗게 벌어진 입술은 금방이라도 앓는 소릴 낼 듯 아파 보였다.

첫날엔 이렇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할지언정 겁을 집어먹었거나 활력이 없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지옥에 끌려온 사람치고는 덤덤하고 차분해서 참 대담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더란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시든 풀 같아지다니.

“……형.”

이형이 어렵사리 목소리를 쥐어짰다. 해림이 돌아봤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떴다. 다들 무표정하다고 속을 알 수 없다고 욕을 해도 이형은 동의하지 않았다. 표현이 서툴고 남들보다 감정 동요가 얕은 사람일 뿐이다.

“몸은 괜찮아?”

어제 본 사람처럼 해림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괜히 호들갑 떨며 인사하는 것보다 훨씬 덜 부담스러웠다. 이형은 머뭇거리다가 자판기에서 캔 두 개를 빼서 해림의 앞에 앉았다. 해림의 옅은 미소는 어느덧 지워져 있었다.

“이거 마셔요.”

이형이 캔을 따서 해림의 앞에 놨다. 해림은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망고 주스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툭 튀어 나간 말투가 퉁명스럽다. 이렇게 물꼬를 트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형이 혀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래?”

해림은 제 몸이 종이처럼 훌쭉해졌는데도 남 일 듣듯이 넘겼다. 눈동자는 이형을 향해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초점이 흐릿했다. 이형이 캔을 따서 홀짝거렸다. 액상 과당을 삼켜 보지만 해림이 살이 내린 게 제 탓인 양 입맛이 씁쓰름하다.

잘 지냈냐고, 저번에는 미안했다고, 도와줘서 고맙다고 얼른 잘못을 털어 버리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데, 입은 주인 명령을 지지리 안 따르고 감정은 울컥하니 못된 말만 혀끝에 넘실거렸다. 이형이 터지려는 속을 막으려고 음료를 콸콸 들이부었다. 그런데도 소용없었다.

“아니, 형. 사장 집에 들어앉았으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꼴이 이게 뭐예요.”

주둥이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사과를 먼저 해야 하는데 뚱딴지같은 말들만 튀어 나갔다.

“이건 무슨 뼈다귀만 남았잖아. 사장이 밥 안 줘요? 사람이 왜 그래. 나 미안해서 죽으라고 그래요?”

화살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속사포처럼 쏟아 내자 해림이 캔에서 시선을 거두고 이형을 바라봤다. 가판에 널린 생선 눈깔처럼 힘없는 눈동자를 보자 더욱 열불이 치솟았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좀 털어놓고 그래요. 속으로 삼키지만 말고. 그러니까 썩어 가지. 내가, 정말 죽고 싶어서 손목 긋고 그러기는 해도 그나마 정신이 말짱할 땐 유리 누나 잡고라도 털어놓고 그래요. 형도 좀, 사람이, 좀.”

이형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음료를 마저 마셨다. 홀딱 비운 캔을 내려놓고 입술을 꾹 맞물었다가 뗐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딴 말을 떠들려고 해림 앞에 앉은 게 아니었다. 이형이 손등으로 눈을 비벼 눈물을 거두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형.”

“네가 뭐가 미안해.”

“사과부터 해야 했는데, 내가 또 이러네. 저번에……, 형은 나 구해 줬는데. 나는 씨발 형한테 좆같은 말이나 하고. 고맙다는 말도 못 했어요. 미안하단 말도.”

“괜찮아.”

이형이 고해 성사 하듯이 바닥만 보고 줄줄 읊다가 고개를 들었다. 용기를 다해 사과를 해도 해림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무슨 말을 걸어도 튕겨 나오는 벽과도 같았다.

설마 이대로 관계를 끊으려는 건 아닐까, 이형이 겁을 집어먹고 해림을 쳐다봤다. 형, 하고 뱉으려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낯익었다. 평소와 다름없는데도 거울에서 본 듯이 익숙했다. 이형이 목울대를 꿀꺽 넘기며 입을 뗐다. 며칠 전에 저도 저런 표정을 지었다. 더는 살고 싶지 않아서 날붙이를 찾았고, 손목을 그어도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깊은 우울이 찾아올 때, 더는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여길 때 거울 속의 자신은 저런 눈으로 건너편을 봤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말해 줘요. 형, 지금 정상 아니잖아.”

“정상이야.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없는 사람은 그런 얼굴 안 해요. 내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어떻게든 해림의 입에서 속내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저런 게 속에 고여 있으면 썩은 물이 되어 사람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이형은 알았다. 해림은 영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그저 말없이 이형을 응시했다. 어쩐지 지켜보는 이형의 속이 더 울렁거렸다. 눈가가 뜨뜻했다. 무슨 감정이 해림의 눈 아래에서 일렁이는지 알아서 그랬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차라리 실컷 울든가. 아님 사장한테 말해요. 사장이 형 엄청 예뻐하잖아. 소원 하나는 들어주겠지.”

“이형아.”

뭐라고 퍼부어도 인형처럼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던 해림이 사장 소리에는 반응했다. 이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들을 준비가 되었다며 상체를 해림 쪽으로 기울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봐주는 것도 곧 끝나겠지.”

“뭐가요, 형.”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무슨 말일까. 두서없이 내뱉은 말이 어떤 의미가 무언지 이형은 짐작할 수 없었다. 해림을 다그쳐서라도 들을까 하다가, 오히려 안으로 더 파고들어 버릴까 바라만 봤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붉어진 이형의 눈시울과 달리 해림의 눈가는 삭막하고 메말랐다. 딱딱한 벽이 눈물을 가로막은 것처럼.

“나는 형이……, 형은 나처럼 안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 얼굴도 안 했으면 좋겠어.”

진심이었다. 이형은 해림이 저만큼 아픈 걸 바라지 않았다. 그런 고통을 느끼는 건 저만으로도 충분했다. 뜨거운 눈가를 손등으로 훑고는 이형이 해림을 바라봤다. 해림의 시선은 어느새 이형을 비껴가 창밖 너머 숲에 닿아 있었다.

느지막이 그래, 하고 해림이 대답했다. 공허한 목소리였다.

* * *

영수가 뒷짐을 지고 시선을 내렸다. 주신도가 다른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항상 미묘하게 긴장이 어리는 시간임에도, 오늘은 제 실수가 들킬까 봐 신경이 쓰이기보다 왜인지 다른 데에 눈이 갔다.

주신도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손에 건 담배를 입에 갖다 대는 행동도, 간간이 구겨지는 미간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한데 같이 지내 온 세월 무시 못 한다고, 주신도의 주변에 떠도는 남다른 기류를 영수가 기민하게 읽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닙니다.”

“싱겁기는.”

건네는 말도, 시선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채는 일도 평소와 같았다. 영수는 딴 곳에 시선을 두고 주신도를 흘끔흘끔 훔쳐봤다. 그러다가 발치에 놓인 커다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희고 각진 상자가 무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홍콩에서 돌아오자마자 전국에 용한 한의원을 그렇게 수소문하더니만. 결국 보약 한 채 지어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본인이 마실 건 당연히 아닐 테다. 주신도는 영수가 지금까지 봐 온 누구보다도 체력이 뛰어났다. 사흘 밤낮을 새고도 멀쩡하게 나흘을 더 샐 인간이 주신도였다.

아니다. 주신도가 마실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체력이야 대련을 붙어 본 게 오래전이라 최근엔 어떨지 몰랐다. 가만히 보니 눈가도 며칠간 잠을 설친 사람처럼 좀 가뭇가뭇하고, 광대뼈도 다른 날보다 불거져 보인다.

“구 사장, 뭐 좀 나왔냐.”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영수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주신도가 빤히 쳐다봤다.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답을 떠올렸다.

“아직 이렇다 할 사항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한운 주류 쪽에서 리베이트를 받았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고요. 지하에 눈독 들이는 것 같습니다. 취향이, 좀.”

“그거 미끼 삼아서 더 파봐. 파서 먼지 안 떨어지는 새끼는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해중이는.”

영수가 눈을 내리깔았다. 인오에게 붙여 놓은 끄나풀이었다.

“죽었습니다.”

눈치 빠르고 잘 처신하는 아이라 붙여 놨더니, 인오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처리했다. 손가락을 친절히 택배로 부쳐 보낸 여유에 영수가 울분을 터트렸다. 잡히면 곱게는 안 죽인다며 저가 직접 나서려고까지 했다.

“장례는.”

“조용히 치렀습니다.”

“걔 아버지가 요양 병원에 있을 거야. 위로금 조로 병원비 넉넉하게 넣어. 부고 소식은 알리지 말고. 간병인 한 명 붙이고.”

“예.”

“인오한테는 셋 더 붙여. 따로 움직이게 장소랑 시간 나눠서.”

처음 인오에게 감시를 붙이라 전달받았을 때는 이럴 거면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보고를 받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인오가 몰래 양다리를 걸친 조직이 한둘이 아니었다. 홍콩에서 머물렀던 놈이 국내에 쥐새끼처럼 들어와 장난질을 친 약을 사방에 뿌린 데다, 정보도 야금야금 팔아먹었다. 뒤를 밟아 추적 조사하는 중이었다.

인오를 살려 놓은 건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독한 놈이라 무슨 고문을 퍼붓는다 해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을 터. 단번에 죽여 저지르고 다닌 일을 덮기보다, 풀어 놓고 무슨 진탕을 치고 다녔는지 알아보고 수거하고 해결하는 게 더 나은 방향이었다.

주신도가 파일을 닫으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담배를 건 손가락으로 머리를 누르는데, 다시 보니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볼일은 끝나서 나가면 그만이거늘, 되먹지도 않은 걱정에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피곤해 보이십니다.”

주신도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하, 하고 웃기까지 한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고 영수가 잠깐 후회했다.

주신도는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며 타박하지 않고, 대신 책상을 토독, 토독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입가를 가리고 정면을 주시하기에 가 보겠다고 인사할 적당한 때를 놓쳤다.

“왜 그럴까 궁금하긴 해.”

꼬리와 머리를 떼고 몸통만 던졌다. 주신도가 궁금해하는 정체가 뭔지 아리송했다.

“뭐가 말입니까.”

“봐줄 만큼 봐주고, 같이 놀아 난 씨발놈도 살려 줬는데 왜 지랄일까. 왜 모르지.”

주신도가 담배를 비벼 끄고 손깍지를 꼈다. 눈앞에 카운슬러라도 있는 듯이 눈을 진지하게 떴다.

“어떻게 생각해. 도련님 대가리에는 대체 뭐가 든 걸까.”

뇌가 들었겠지. 갈라 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른다. 이야기를 섞어 본 적도 없었다.

고민의 주체가 방에 들려다 놓은 애첩이었다. 주신도가 저보다 어리다는 걸 실감한 적이 거의 없건만 지금은 확실히 느꼈다. 어린 조카가 처음 사귄 여자 친구가 대체 왜 삐졌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어른으로서 조언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알아서 깨달으라고 놔둬야 하는지 잠깐 갈등했다.

“이해가 안 가.”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책상 앞에 도련님이 있다는 양 눈을 가늘게 뜬다. 영수가 묵묵하게 주신도를 바라보며 얼마 전에 스치듯이 봤던 도련님을 떠올렸다. 홍콩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왔어도 볼이 발그레하고 혈색이 돌던 사람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척해져서 곧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주신도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본인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지만 뺨과 두툼한 손가락이 전보다 야윈 게 영수의 눈엔 보였다.

둘 사이에 뭔가 일이 터졌나 보지.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 양반이라,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떠든 걸 주워듣고는 뭐가 고민인지 짐작할 따름이었다.

“싸우셨습니까?”

“아니.”

다툼 없이 사이에 금이 갈 일은 흔치 않다. 둘 중 한 명은 분명 잘못을 저질렀으리라.

“말 안 들어서 좀 혼내긴 했는데.”

“그 일로 도련님이 상처받았을 수도 있겠네요.”

“겨우 그런 걸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된다며 주신도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혼냈는지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물어도 주신도가 나불댈 거 같지 않은 데다가, 혼내는 과정이 보통의 꾸중과 많이 다를 거란 건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았다.

“잘 달래 주십쇼. 보약도 좀 먹이고요.”

겨우 선물 하나에 마른 몸에 다시 살이 오르지는 않을 테지만. 몸보다 마음의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주신도가 오지랖 넓은 노인네 잔소리 듣듯 눈살을 구기며 손을 설렁설렁 저었다. 나가 보라는 손짓에 영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았다가, 한 번 부린 오지랖, 두 번은 못 부리겠냐며 슬쩍 돌아섰다.

“형님, 좋아하는 사람한테 상처받으면 배로 아픕니다.”

도련님을 위해서라기보다 주신도를 위해 던진 말이었다. 늦게 깨달아서 신파를 찍느니 얼른 알아차리라고 밥숟가락을 코앞에 디밀었다.

주신도가 패드를 보다가 멈칫했다. 영수를 돌아보는 눈빛이 오묘했다.

“……좋아해? 정해림이 나를?”

“그럴 수도 있죠.”

푸핫, 하고 주신도가 날카롭게 웃었다. 너털너털 새어 나온 웃음을 느리게 거두며 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리고서 누구를 비웃는데, 저인지 본인인지, 아니면 이 자리에 없는 도련님인지 주체가 모호했다.

“그럴 리가.”

“…….”

“그럴 리가 없지.”

뒷말은 들으라기보다 주신도 본인에게 던지는 혼잣말 같았다. 영수도 더는 해 줄 말이 없었다. 한 번 더 인사하고 얌전히 문을 열고 나왔다.

의문이 들었다. 왜 주신도는 도련님이 자길 좋아한다고 짐작하지 않을까. 그렇게 물고 빨고 안고 난리를 피웠으면서. 집에다 들여앉혔으면, 상대가 그걸 받아들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도 남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제삼자인 저가 봐도 둘 사이는 끈적거리는 걸 넘어 꿀과 설탕 범벅이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아니면 본인도 자각 못 하고 마음 가는 대로 도련님을 대했던가. 무슨 짓을 해도 상대가 절 좋아할 리 없으니, 애초에 제 마음이 무언지 확인하는 것도 상대의 마음 얻기도 포기하고 저 좋을 대로 굴었던 걸까. 애정도, 분노도 일방적으로.

“……힘들겠네.”

영락없는 애다. 상대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고 자기감정만 주장하는 철없는 방식이었다. 좋아하는 아이의 관심 한 번 끌어 보려고 못된 짓을 일삼는 아이와 같았다.

주신도식 애정은 받느니 못한 고집과 아집과 폭력과 절절함이었다. 사람을 쥐었다가 폈다가 놨다가 굴렸다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그걸 오롯이 받아 내니 어디 정신이 온건히 남아 있겠는가. 도련님이 무심해서 지금껏 그나마 제정신 유지하고 살았을 터였다.

피곤해하는 걸 보면 주신도 본인도 맘고생깨나 하는 성싶은데. 옆에서 떠다 먹여 줘도 모르니 제 감정을 자각할 일은 요원해 보인다.

“…….”

공사 구분은 철저히 하는 양반이니 일에 차질을 빚지는 않을 거고. 더 파고드는 것도 귀찮다. 영수는 사장실에서 나눈 대화를 훌훌 털어 버리고 제게 주어진 일에 집중했다. 잡념을 없애는 데는 역시 일만 한 게 없었다.

* * *

소파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사방에 어스름이 가라앉은 저녁이었다. 해림이 힘 하나 없이 눈만 껌벅거리다가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상체를 세웠다.

유리가 막 신발을 벗다가 해림과 눈이 마주치고는 어정쩡하게 웃었다. 이 집에 유리가 찾아온 건 처음이라 해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하 씨, 몸은 좀 괜찮아?”

안 괜찮을 것도 없다. 먹는 양은 현저히 줄었지만 곡기를 끊은 정도도 아니고, 잠도 평소보다 오래, 많이 잤다. 가끔은 새벽에 눈 감았다가 다음 날 새벽에 눈 뜬 적도 있었다.

“네. 여긴 어쩐 일로.”

자다가 일어난 탓인지 목이 잠겼다. 해림이 큼큼 헛기침을 하고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다리를 내렸다. 굽힌 무릎을 펴자 어지럼이 몰려와 몸이 휘청거렸다. 유리가 다급히 달려왔다.

“정하 씨, 괜찮아? 몸 안 좋으면 의사 부를까요?”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운 걸로 요란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가 으휴, 한숨을 쉬며 건너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손에 쥔 하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요새 정하 씨 얼굴 안 보여서. 잘 사나 하고 들러 봤어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일은 며칠 전에 터졌다. 주신도와 한 공간에 있기 싫어 휴게실에서 조금만 있다 간다는 게, 깜박 잠이 들어 새벽 늦게 눈을 떴다. 눈 뜨자마자 코앞에 우뚝 서 있는 주신도를 봤다. 살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해림을 질질 끌고 집에 데려갔다.

그 뒤로 외출을 금지당했다. 출근도 없었다. 나가려고 해도 무슨 장치를 해 놨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주신도가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걸 보면 방법이 있기는 한데.

“살 많이 빠졌네. 요새 잘 안 먹나 봐.”

유리가 해림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해림이 소매를 잡아끌어 내리며 뼈가 불거진 손목을 감췄다. 거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안쓰러울 만큼 살이 빠졌다. 모로 봐도 목에 칼을 채운 죄인처럼 밥 한 숟갈 제대로 못 넘긴 몰골이었다. 그 외모 어디 안 가 살이 쑥 내려도 가련하고 안쓰러워 눈길 한 번 더 간다지만.

유리의 추측이 맞았다. 목숨 연명할 만큼 먹기는 해도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한두 숟갈 뜨면 속이 메슥거리고 멀미가 올라왔다. 토할 거 같아 기껏 직원이 갖다준 음식을 남기기 일쑤였다.

하루는 주신도가 직접 갖다준 적도 있었다. 침대에 고치처럼 웅크리고 누워 자던 해림을 억지로 깨워 먹이려 들었다. 침대 맡에 앉아 마치 간호하듯이 한 숟갈 떠다미는 작태가 어찌나 밉던지.

「입 벌려.」

「알아서 먹을게요.」

「입 벌리라고.」

안 먹으면 사약 붓듯이 쏟아 넣을 기세기에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열 숟갈을 채 못 넘기고 죄다 게워 냈다. 발치에 토사물이 튀는데도 주신도는 아무 질책도 하지 않았다. 해림의 입가를 닦아 주고, 침대에 뉘이고 말없이 트레이를 치웠다. 눈을 떴을 때는 머리 위에 링거가 걸려 있었다.

사람 참 헷갈리게 잘했다. 속지 말자고 마음을 다졌다. 더는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딴 적선 같은 친절에.

“이거 받아요.”

유리가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해림이 흰 상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직접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 줬다. 상자 가득 진갈색 포가 담겨 있었다.

“이건 왜.”

“……저번에 보니까 정하 씨 몸이 안 좋아 보여서. 먹고 힘 좀 내라고.”

“저 이런 거 안 마셔도 돼요.”

“거절하지 마요. 무안해지잖아.”

“정말 괜찮은데.”

“그러지 말고. 나 있는 데서 한 포 마셔요. 데워 줄게.”

유리가 상자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어디가 부엌이냐고 묻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상자가 무거워 보이기도 하고, 저가 집주인은 아니더라도 손님이 온 이상 차 한 잔은 대접하자 싶어 해림이 뒤따라갔다. 유리는 이미 부엌에 도착해 진갈색 액체를 컵에 옮겨 담고 있었다. 해림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유리가 한탄처럼 내뱉은 혼잣말에 멈칫했다.

“직접 주면 되지, 이런 걸 왜 나한테. 어휴…….”

차 한잔하겠냐는 물음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해림이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소파로 돌아와 소리 없이 앉았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땡 하며 기계가 완료를 알렸다. 유리가 김이 일렁이는 잔을 들고 돌아왔다. 쓴 냄새가 났다.

“이거 마셔요.”

속이 울렁거렸다. 주신도가 숟갈을 들고 저를 쳐다봤을 때처럼. 이번엔 화대를 선불로 주나 싶어서.

“뭐해요. 팔 떨어지겠다.”

유리가 재촉했다. 해림이 손을 뻗어 컵을 잡았다.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 온기도 주신도만큼이나 미웠다.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배수구에 흘려 버리고 싶었다.

“정하 씨가 그걸 마셔야 내가 마음 놓고 가지.”

해림이 눈을 내리깔았다. 진흙색 액체에 제 모습이 비쳤다. 그 모습조차도 꼴 보기 싫어 눈을 감고 컵에 입을 댔다. 독약 삼키듯 단번에 삼켰다. 다 비우고 컵을 내려놓자 유리가 방긋 웃었다.

“매일 세 번 데워 마시는 거 잊지 말고. 고기든 밀가루든 괜찮은데 술하고는 상극이라고 하더라고요.”

“네.”

“정하 씨. 이형이한테도 이야기했지만……, 살면서 어디 좋고 행복한 일만 있겠어요. 어려운 일도 있고 그런 거지. 그래도 시간 흐르면 다 나아져. 다들 적응하고 살더라고. 조금만 더 버텨 봐요.”

의례적인 위로였다.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들. 견디다 보면, 참다 보면 언젠가 나아질 거라며 기약 없는 희망을 약속하는 말들.

“나아지는 날이 올까요.”

누구라도 잡고 묻고 싶었다. 정말 괜찮아지는 날이 오느냐고. 그런 날이 온다는 확신만 있으면 참겠다고, 버티겠다고. 하나 확답은 없었다.

“당연하죠. 앞으로 더 나아질 거니까 사는 거 아니겠어요. 사람이 희망 없이 어떻게 살아.”

유리가 어린애 달래듯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미소 지었다. 해림은 마주 웃지 않았다. 입술 끝을 똑같이 끌어 올리는 일조차 힘에 겨웠다.

“그럼 가 볼게요. 팍팍 먹고 살 좀 쪄요. 사람이 왜 이렇게 안쓰럽게 살이 빠졌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던 모습과 달리 유리가 미련 없이 일어났다. 해림이 배웅하겠다며 현관까지 졸졸 따라갔다. 카드 키를 문에 대자 기계음이 나고 문이 열렸다. 저도 따라 나가고 싶었다. 나가 봤자 멀리 못 가고 머리채 잡혀 끌려오겠지만.

유리 씨, 하고 해림이 불렀다. 유리가 돌아봤다.

“……약 잘 마실게요. 고마워요.”

하고 싶은 말은 삼키고 열없는 인사만 했다. 유리의 입가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은 찰나에 사라지고 유리가 가면 같은 미소를 뒤집어썼다. 해림에게 우리 사이에 뭐 이런 걸로 고마워하느냐며, 몸이나 빨리 나으라고 다독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해림이 알면서도 괜히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철컥 소리만 나고 열리지 않았다.

“……우욱.”

해림이 입을 틀어막았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입이 너무나도 썼다. 약의 쓴맛이 혓바닥을 녹인 듯이 아팠다. 식도가 쓰리고 신물이 위로 올라왔다.

이러다가 현관에다 게워 낼까 봐 해림이 급히 욕실로 뛰어갔다. 변기를 붙들고 입을 열었다. 방금 마신 쓴 보약이 입 밖으로 주르륵 쏟아졌다. 쓰고 시큼한 맛, 역겨운 냄새가 입에 가득했다. 그마저도 토기를 일으켰다.

어제 몇 숟갈 강제로 먹은 음식까지 토해 내고 해림이 변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는 어지럽고 위장은 사포로 문지른 듯 쓰라렸다. 배를 잡고 웅크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세면대를 붙들고 몸을 세웠다.

거울 안에서 초라한 몰골의 남자가 해림을 바라봤다. 해쓱한 뺨과 가뭇가뭇한 눈가가 죽음이 지척인 듯 어둡다. 낯빛 어디에서도 삶에 대한 갈구나 희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희망이라.

해림이 비식거렸다. 희망이 클수록 낙담도 크다. 희망은 사람을 살게 하지만 꺾이는 순간 나락으로 내몬다. 그런 부질없는 가능성을 믿고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집도 물건도 아니라는 생각에 웬만해서는 건든 적이 없었다. 해림이 장식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유리문을 열었다. 장식장을 가득 채운 술병 중 손에 닿는 아무거나 하나 꺼냈다. 라벨지에 적힌 도수가 사람을 골로 보낼 만큼 높지만 상관없었다.

쓰린 속에 술이 독과 같다는 걸 알고는 있으나 오늘은 안 마시고 배길 수가 없었다. 아까 마신 약보다 술이 덜 쓸 터였다.

소파에 앉아 양주를 병째 들고 들이켰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며 빈 위장에 술이 고이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마시다가 쓰러져서 다시는 눈 뜨지 않아도 좋았다. 술김에 용기를 내어 이형처럼 손목을 그어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주신도만 안 볼 수 있으면, 그 면상만 눈앞에서 치울 수 있다면 뭔들 못할까.

해림이 술을 들이붓다가 소파 등받이에 등을 파묻었다. 하, 하고 뱉은 날숨에 술 냄새가 가득했다. 쓰디쓴 약 냄새보다는 나았다.

취기가 빨리 올랐으면 좋겠다. 취하면 용감해진다고, 결단을 내릴 용기도 샘솟을지 몰랐다.

하루하루가 고문이었다. 주신도와 마주치는 게 괴로웠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흔들렸다. 유리가 말했듯, 되먹지 못한 희망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당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이전처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입을 맞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끔찍했다. 저가 멍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은 벗어나야지, 내일은 어떻게든 여길 나가야지, 하루만 더 있다가 사라져야지. 핑계 일색이었다. 주신도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어리석은 자신이 꾀를 냈다.

이제는 힘들다. 놀아나기 지쳤다. 유리를 통해 보낸 화대 같은 보약 한 첩에 정처 없이 나부끼는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다 놓고 싶었다. 주신도도, 그리고 저 자신도.

잠이 들락 말락 했다. 졸음이 또 눈꺼풀을 눌렀다. 잠에 빠지면 그나마 주신도를 보는 시간이 줄어서 몸이 최선이라며 수면을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과거가 가물가물한 시야 앞에 드리웠다.

언제 한번 소파에서 잠이 들었던 때였다. 몸이 붕 뜨는 느낌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래로 축 처지려는 고개를 애써 들고 누가 절 옮기나 봤었다.

인물은 뻔했다. 눈이 마주칠까, 얼른 도로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귀에 닿은 가슴에서 두근, 두근 고동 소리가 들렸다.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진동. 진저리 치며 떨어져야 함을 알았으나 나른하고 따스하단 이유로 그냥 품에 안겨 있었다.

침대에 내려놓는 손길이 얇은 유리 다루듯이 조심스러웠다.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한참을 바라보다 발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

회상에서 깨어나자 사방이 추웠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집 어딘가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와 살갗을 찌른 듯싶었다. 술을 더 마셔서 열을 올리려고 해림이 술병을 잡았다.

두 모금째에 인기척을 느꼈다. 유리는 아니었다. 누군지 알아 해림이 술병을 내려놓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대로 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리며 소파에 철퍼덕 무너졌다.

후, 하고 한숨 소리가 짙게 터졌다. 주신도가 척척 걸어와 해림의 손에서 술병을 뺏었다. 반항할 새도 없이 뺏어 가고 해림의 맞은편에 앉았다. 해림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밑바닥에 남은 술을 모조리 제 입에 부어 넣었다.

“술 마시지 말라고 유리가 말 안 했어?”

“했어요.”

“근데 왜 마셔.”

“마시고 싶어서요.”

“안 돼.”

해림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장식장으로 비척비척 걸어가 다른 술을 꺼냈다. 방에 들어가 혼자 마시는 게 낫겠다며 걸음을 옮기는데, 주신도에게 또 빼앗겼다. 하, 하고 해림이 날카롭게 비소를 터트렸다.

“줘요.”

“안 돼. 차라리 그냥 자.”

술병이 장식장에 도로 들어갔다.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얇은 종잇조각처럼 해림이 흐느적거리며 끌려가다가 다리에 힘을 줬다. 그래 봤자 주신도에게는 턱도 없었다. 팔꿈치를 한 번 휙 굽혔을 뿐인데 해림과 주신도 사이가 훅 줄어들었다.

“약이요. 사장님이 보낸 거죠.”

“…….”

“사장님은 참…….”

해림이 비식거리며 코웃음을 삼켰다. 술의 힘이 강하긴 했다. 마음속으로 삼켰던 말이 물 흐르듯 흘러나왔다.

“사장님은 참, 화대를 다양한 방법으로 주시네요.”

걸음이 멎었다. 주신도가 앞만 보다가 천천히 해림을 돌아봤다. 무슨 표정을 지어도 무섭지 않았다. 용기가 솟으면 제 목숨도 끊겠다고 다짐한 마당인데 저승사자가 온다고 한들 무서울까.

해림이 조용히 시선을 받아치자 주신도가 다른 쪽을 보고 실소를 지었다. 혀끝이 마른 윗입술을 훑고 입술 안으로 사라지는 짧은 순간이, 뱀이 먹이 냄새를 맡고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과 닮았다.

“우리 도련님이 화대를 참 좋아하네. 이렇게 돈 밝힐 줄 알았으면 진작 손님 받게 해 줄 걸 그랬다. 그치.”

“저도 몰랐는데 사장님 덕에 알았어요. 고마워요.”

“감사 인사도 하고. 내가 남창 하나는 잘 키웠어. 지금까지 키워 본 적이 없어서 호모 키우는 데도 재능이 있는 줄 몰랐지, 씨발.”

손목이 풀렸다. 대신 멱살을 잡고 주신도가 해림을 소파로 끌고 갔다. 짐짝 던지듯이 해림을 소파 위에 쓰러트리고 장식장에서 새 술병을 가져왔다. 테이블에 쾅 소리가 나도록 술병을 내려놓고서 해림의 반대편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았다.

“도련님이 그렇게 원한다는데, 내가 애들 다 불러서라도 우리 도련님 몸 팔게 해 줄게. 근데 그 전에 나부터 꼴리게 만들어야지. 하나도 안 꼴리는데 애들한테 팔기는 내가 좀 미안하잖아. 맨정신엔 자지가 안 설 거니까 서비스로 약도 좀 풀어야 할 건데, 손해 보는 장사 안 하려면 도련님이 알아서 애들 자지를 세워야 할 거 아니야.”

해림이 소파를 손바닥으로 딛고 상체를 세웠다. 주신도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며 해림을 쳐다봤다.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눈동자만 섬뜩하게 타올랐다. 목을 조르던 그 새벽, 섬광이 어렸던 눈빛과 같았다.

“해 봐. 벗어. 우리 예쁜 도련님이 손님 자지를 어떻게 세우나 구경 좀 해 보자.”

화대 운운했을 때 각오한 바였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지 않나. 해림이 셔츠 첫 단추를 잡았다. 주신도가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히고 술병 주둥이를 입술에 갖다 댔다. 시선은 시종일관 해림에게 꽂혀 있었다. 손짓과 몸짓, 손가락의 흔들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들여다봤다.

“아, 깜박할 뻔했네. 선금을 안 놨어, 내가.”

주신도가 지갑을 꺼내 흰 수표 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해림의 손가락이 흠칫했다. 돈과 술, 그리고 손님을 앞뒀다. 주신도가 아닌 손님을.

눈빛이 잘 갈린 화살촉처럼 온몸을 찔렀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첫 단추가 풀어졌다. 쇄골이 마른 거죽 위로 도드라졌다. 두 번째 단추가 열리자 희게 질린 속살이 드러났다. 시선이 쇄골과 그 아래 가슴에 닿았다.

“젖은 안 보여 줘?”

해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살을 보이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 수치심과 모멸감이 살갗을 거꾸로 기어 올라왔다.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아래로 내리깔고 셔츠 자락을 벌렸다. 옅은 분홍색이 감도는 유두가 셔츠 밖으로 드러났다.

주신도가 테이블에 놓은 수표 중 하나를 해림의 앞으로 밀었다. 계속해,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송곳처럼 귀를 후벼 팠다. 술을 마셔 발갛게 열이 올랐던 뺨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해림이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잡았다. 세 개, 네 개 풀고 쭉 내려가 배꼽도 보였다. 이제 마지막 단추 하나만 남았다.

손길이 멈췄다. 해림이 머뭇거렸다. 겨우 단추 하나인데 풀 수가 없었다. 명치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추웠다. 알몸으로 눈보라 치는 얼음 벌판에 내쳐진 기분이었다. 실내 온도도, 남은 술기운도 불처럼 뜨겁거늘.

주신도가 해림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손에 수표를 쥐고 해림의 젖꼭지를 쿡 찌르며 밀어 넣었다. 가슴을 스친 흰 종이들이 아래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다음.”

나긋한 귓속말. 입 맞출 것처럼 입술이 지척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제 입술을 누르고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비가 오던 강가, 조명이 눈이 멀게끔 빛났던 그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술은 닿지 않고 멀어졌다. 냉정하게 다물렸다. 주신도가 술병을 들고 고개를 까닥하며 해림을 재촉했다.

해림이 마지막 단추를 잡았다. 세로로 길게 난 구멍에서 단추를 밀어내고 벗으려 했다. 손이 헛나갔다. 추워서 그랬다. 손이 떨리는 이유도, 아랫입술이 울리는 것도 모두 추위 탓이었다.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돈을 받았으니 벗어야 하는데, 거기까지는 차마 가지 못했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직 주홍빛으로 불타는 담뱃재를 눈가에 흩뿌린 듯이. 열기를 식히려고 몸이 눈 위로 물방울을 올려 보냈다.

“아…….”

시야가 흐릿했다. 둥근 물방울이 뺨을 가로지르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눈앞이 맑아졌다가 다시금 어룽졌다.

가슴이 미어졌다. 좋아한다는 단순한 감정만으로는 이렇게 아플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짙고 잔혹했다. 아, 하고 해림이 또 한 번 탄식을 뱉었다. 이건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온전히 증오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얕은 감정으로는 사람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그 외의 감정이었다. 이름은 알았다. 그간은 붙일 수 없었다. 붙이면 안 된다고 저를 설득했다. 설득도 이제 소용이 없었다.

주신도를 사랑한다.

이런 건 경험해 본 적이 없어 깨닫는 게 느렸다. 안온하고 편안하던 게 사랑이 아니었나. 사람을 바닥으로 내치고 땅을 파고 산 채로 묻는 감각이 사랑인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게, 만인이 그토록 노래하고 떠들던 그 감정인가.

이럴 거면 차라리 모르고 살 때가 좋았다. 욕을 들어도 무감하게 살 때가 행복했다. 저를 지탱하던 땅과 하늘이 뒤집혔다. 비참이 얇은 쇠로 만든 그물이 되어 온몸을 옥죄였다.

왜 입을 맞췄지. 왜 소중한 것 대하듯이 안아 주고 재워 주고 속삭였지. 악몽을 꾸면 춘몽으로 바꿔 주고 달콤한 것들을 먹이고 너 역시 달콤하다고 그런 눈으로 봤지. 그러지 말지. 하나도 하지 말지. 그런 행동들을 보고 싹이 안 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메마르고 죽어 있어야 할 땅을 갈아서 씨와 물을 주고 어떻게든 싹을 틔워 내고서, 그러고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저 쓰다 버릴 일회용품이나 마찬가지였단 사실이.

그간 다지고 억눌렀던 단단한 땅이 무너져 내렸다. 금 간 곳에서 뜨거운 물처럼 감정이 솟구쳤다. 마음속에서 터진 걸로 모자라 눈동자 아래에도 차올랐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늘게 벌어진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손은 단추를 쥐었다가 풀어지고, 속눈썹은 후들후들 떨리며 눈물방울을 매달았다가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관 안에 갇혀 눈물만 짓는 산 사람처럼 해림이 소리 없이 울었다.

주신도의 손에서 술병이 떨어졌다. 푹신한 카펫 위에서 병이 옆으로 쓰러져 남은 술을 꼴꼴 뱉어 냈다. 한 대 얻어맞은 양, 주신도가 멍하니 해림을 쳐다봤다. 눈썹은 굳고 입술은 벌어졌다.

“……정해림.”

이름이 아픔을 불러일으킨 듯이 해림의 눈가에서 눈물이 줄기로 떨어져 내렸다. 입술은 벙긋거리나 소리를 잃었고, 말문도 닫혔다. 주신도가 다른 곳을 보고 이마를 문지르다가 일어났다. 어디로 가든 제 옆만 아니었으면 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곁에 다가왔다.

“울지 마.”

서툰 한 마디에 파도가 요동쳤다. 미웠고 사랑스러웠다. 뒤에 붙은 감정이 참담하고 무서웠다. 잡아먹힐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잡아먹혔다.

“제발, 좀.”

주먹을 쥐었다 펴고, 자잘한 흉터가 문신처럼 남은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가 가라앉았다. 겁먹은 아이처럼 섣불리 손도 못 뻗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숨만 거듭 쉬다가, 마침내 주신도가 해림을 품에 끌어안았다. 겨우 쥐어짠 방법이 이거뿐이라는 듯이. 해림이 움칫했다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밀쳐야 하는데 몸이 품 안에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살이 닿은 곳에서 타고 넘어오는 온기를 놓칠 수가 없었다. 체온을 다시 끌어 올리기엔 부족한지 마음 깊숙한 곳은 아직도 차디찼다.

“울지 마.”

다정한 다독임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품이 흠뻑 젖어 들었다.

ㄴㄴㅇ 

* * *

한 명이 더 당했다. 솜씨가 뛰어난 놈들만 골라 보냈는데 얼마나 치사한 수법을 썼는지 애가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귀 한쪽만 돌아왔다. 기록이 남을 문자나 전화보다는 면 대 면으로 보고하는 게 나아 영수가 사장실을 찾았다.

“들어와.”

영수가 문을 벌컥 열었다. 펼쳐진 장면에 눈살과 콧잔등을 찌푸렸다.

너구리 굴이 따로 없었다. 공기 청정기가 온몸을 불살라도 이 정도 담배 연기는 답이 없었다. 재떨이는 가득 찼고 담배 한 갑을 앉은 자리에서 다 피웠는지 구겨진 담뱃갑이 소파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걸로 모자라 한 대를 더 물고 주신도가 영수를 쳐다봤다.

면도도 안 했는지 턱수염도 뾰족뾰족하고 다른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한 병만 비운 게 아닌지 두어 병이 발치에 널브러져 있다.

사장실에 잘못 들어온 약쟁이인 줄 알았다. 눈을 비비고 보니 제 상사가 맞다. 어디서 실연당하고 온 꼴로 담배와 술을 옆구리에 끼고 폐인 행세를 하는 게,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꼴이라 넋 놓고 쳐다봤다.

“괜찮으십니까.”

영수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최근 주신도를 보고 매번 하는 질문이었다. 주신도가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담배 연기가 궤적에 따라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선호가 당했습니다.”

“시체는.”

“귀만 돌아왔습니다.”

“보관해 둬. 나중에 시신 찾으면 같이 안치하게.”

나뒹구는 술병 개수에 비해 혀는 멀쩡했다. 눈빛도 조금 흐릿하긴 해도 완전히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예전에 대작했을 때, 다들 죽어 나갔던 술판에서도 주신도는 홀로 살아남았다.????

“남은 두 명은.”

“아직 들키지 않았습니다. 인오도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고요. 최근 유성 파 관할 구역에서 돌아다닌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아, 걔네. 걔네들이 요새 우리 가게에 슬금슬금 들어오는 애들 아니야. 간 본다고.”

고등학교도 졸업 안 한 젖비린내 나는 애들을 끌어모아 급성장한 신흥 조직이었다. 미성년자는 법망을 피해 가는 걸 악용했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건만, 그쪽은 어린애들을 마음대로 쓰고 버렸다.

“오늘 칠까?”

“……예?”

이렇게 갑자기, 아무 준비도 없이. 급작스러운 결정에 영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신도가 담배를 끄고 손뼉을 짝 소리 나게 부딪쳤다.

“안 그래도 한번 손볼까 했는데, 오늘이 좋겠다. 오늘 가자.”

“이렇게 갑자기요.”

“우리가 언제 경고장 날리고 쳤냐. 옛날부터 족치는 건 급습이 제일 잘 먹혔어. 애들 모아.”

주신도가 마음을 정한 듯이 일어났다. 잠깐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려 영수가 손을 뻗었다. 주신도가 괜찮다며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목을 좌우로 느리게 꺾어 몸을 풀고는 앞장섰다.

상사가 명령하면 극지에 가서도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다. 영수가 토 달지 않고 주신도의 등 뒤를 졸졸 따라갔다.

“도끼 준비할까요.”

“겁만 줄 건데 뭘 도끼를 챙겨. 애들한테 파이프나 줘. 내 것도 하나 챙기고.”

답답증을 풀 곳을 찾는 것처럼 보이는 건 제 억측일까. 영수가 네, 하고 대답하며 주신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언제 봐도 넓고 든든하던 등과 어깨가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풀 죽은 듯 축 처져 보였다.

파이프 쥐여 주면 달라지겠지. 의기소침이란 단어 자체가 주신도와 어울리지도 않는 데다, 손에 뭐 하나 던져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날아다니는 양반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다를 일 없을 것이다. 영수가 노파심을 거두고 부지런히 집합 문자를 날렸다.

모로 봐도 속풀이가 맞다.

영수가 피 묻은 주먹을 털며 주신도를 흘끔 바라봤다. 아직도 목줄 풀린 미친개처럼 날뛰고 있었다. 어쩐지 애들을 적게 데려오더니만, 자기가 주먹질하고 싶어서 그런 게 분명했다.

반항이 만만치 않았으나, 고삐 풀린 주신도 앞에서야 굶은 사냥개 앞에 병아리들이었다. 다른 때면 어린애 때려서 뭐 하느냐고 점잖은 척 뒤로 뺐을 텐데 이번엔 아니었다. 앞을 가로막는 게 죄다 적이고 부숴야 할 벽이라는 양 파이프를 휘둘렀다. 파이프가 휘어져 못 쓰게 되자 휙 던져 버리고 그때부터는 아주 제대로 날아다녔다.

저런 눈 돌아간 상태는 오랜만에 봤다. 예전에는 자주 봤는데, 도련님을 들여앉히면서 사라진 모습이었다. 덕분에 영수도 마음 놓고 몸을 풀었다.

본진은 아니더라도 상대 파가 운영하는 큰 가게 중 하나였다. 관리자가 이게 무슨 예의냐며, 깡패라도 지켜야 할 규칙은 있는 거 아니냐며 개소리를 나불거렸다. 주신도가 콧바람만 흥 뀌고서 소파에 발을 척 하니 걸쳤다.

“우리 형님이 너흴 가만히 둘 거 같아? 이런 개새끼들이…….”

후덜덜 떨면서 말은 잘했다. 영수가 어깨에 짊어진 덩치 한 명을 바닥에 내던졌다. 쿵 소리를 내며 덩치가 바닥에 떨어져 꿈틀댔다. 반죽처럼 뭉개진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이 바닥에 지킬 규칙이 어딨답니까. 웃긴 소리도 잘하셔. 그러지 말고, 우리 이제라도 대화하면서 풀어 봅시다. 걱정 마요. 난 여기 먹을 생각은 좆도 없거든. 줘도 안 먹어. 이 쓰레기 같은 걸 왜 먹어, 배탈 나게.”

“그, 그럼 왜.”

“별건 아니고.”

주신도가 주변을 환기시키듯 손뼉을 부딪쳤다. 짝 소리에 관리자의 어깨가 움칫하며 위로 솟았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주신도를 올려다보는데, 눈에 뭐 이런 백팔십도로 돌은 놈이 다 있느냐고 적나라하게 쓰여 있었다.

“거기 애들이 자꾸만 우리 집에 발자국을 찍고 가더라고요. 에이, 놀고 가는 거야 상관없지. 돈만 쓰고 가면 누가 뭐라 해? 근데, 우리 가게 이사님이 자꾸만 나 붙잡고 울잖아. 애들이 좀 과격하게 논다고.”

클럽에서 주신도 소유가 아닌 약을 유통시키려고 들질 않나, 지배인을 협박하고 몰래 영상을 촬영해 팔아먹질 않나. 소소한 폭력 시비에 경찰들 시선을 끌 일을 자꾸만 벌여 관리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주신도를 붙들고 징징거렸다.

다른 일에 비하면 새 발에 피도 안 되는 자잘한 일들이지만 꼬투리 잡기엔 좋았다. 어차피 주신도에게 중요한 건 속을 풀게 해 줄 폭력이었지, 다른 게 아니었다.

“우리 이사님이 마음이 여려서 그쪽 애들한테 싫은 소리를 못 해요. 그러니까 애들 관리 좀 알아서 잘하라고. 어린 것들한테 좋은 거 가르쳐 줘야지, 그 나이에 벌써 썩은 것만 가르치면 어떡해. 어른이 그러면 쓰나.”

주신도가 빙글빙글 웃어 가며 말을 배배 꼬았다. 눈치가 제법 빠른 모양인지 관리자가 입을 딱 다물고 고개만 거푸 끄덕였다. 간혹 눈치가 쥐뿔도 없는 애들은 웃는 얼굴을 만만하게 보고 덤벼들기도 하는데, 그런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말이 통하니 좋네. 그럼 알아들은 걸로 하고 나는 이만 갈게요. 우리 이사님 우는 소리 좀 그만 듣자. 응?”

주신도가 관리자의 뺨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구석에 바짝 붙어 덜덜 떨던 관리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주신도를 보던 눈동자가 다른 쪽으로 힐끔 돌아갔다. 뒤에서 지키고 서 있던 영수가 관리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까 내팽개친 덩치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번쩍하며 빛을 반사한 나이프가 손에 잡혀 있었다. 주신도의 등을 노려보는 눈에서 광기가 희번덕거렸다. 생각할 틈도 없이 영수가 몸을 날렸다. 한발 늦었다. 칼을 뻗는 손이 더욱 빨랐다.

“―형님!”

영수가 뒤늦게 외쳤다. 주신도가 상체를 돌렸다. 칼날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고, 옷과 피부 찢어지는 소리가 종이 찢어지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터졌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