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릎을 모으고 앉아 TV 화면을 멍하니 쳐다봤다. 뉴스에서는 앵커가 건조 주의보가 발효됐다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읊고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가지는 바람에 휘둘려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고, 타는 듯한 저녁놀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맑은 날이었다. 한데 선명하게 대조되는 색깔에도 어딘지 모르게 숲의 분위기는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해림이 발가락을 꼬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귀 끝이 붉어졌다가 하얘졌다가 도로 발개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뺨으로 무릎을 눌리고 문을 쳐다봤다.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럴 시간이었다. 주신도는 돌아오더라도 새벽 늦게 올 터였다.
얼마 전 일이 떠올라 해림의 뺨이 불그레 물들었다. 이 나이에 애처럼 철없이 울었다. 모친이 소천하고 나서 처음 있던 일이었다. 간간이, 주신도와 밤을 보낼 때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생리적인 측면에서였다.
이번엔 아니었다. 서럽고 비통해서 울었다. 주위에서 하도 무뚝뚝하고 인형 같다고 세뇌에 가까운 소리를 해 대서 저도 그런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감정은 딱딱하게 굳은 표면 아래 숨어 있었다. 빙산이 일각만 보여 주고 거대한 덩어리는 바닷속에 감춘 듯이, 제 감정도 그렇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신도는 내내 서툴게 안고만 있었다. 그만 울라고 등을 토닥이다가,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훔쳐 주고,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자 한숨을 쉬며 또 끌어안았다.
저를 울린 장본인이 그랬으니 가증스럽게 보여야 하는데, 뇌는 감정에게 농락당했는지 서툰 위로가 전처럼 달게 느껴졌다. 뭉친 응어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을 만큼. 다 녹지는 않았다. 쉬이 없어질 앙금은 아니었다.
차갑던 기류가 흩어지자 어색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섣불리 말 붙이기가 부끄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실수를 들킨 양, 주신도를 마주 보는 게 다른 의미로 계면쩍었다.
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해림이 상체를 틀었다. 주신도라면 열고 들어왔을 테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바깥에서 대답하라는 듯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혹시 유리가 들렸나 싶어 해림이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문밖이 잠잠해졌다. 현관문 앞에 섰을 때, 슬리퍼 앞에 흰 종이가 툭 하니 걸렸다. 문 밑으로 들어온 종이였다. 해림이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워들었다.
“누구세요.”
다시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제 눈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종이에 단서가 있을까, 해림이 접힌 종이를 펼쳤다.
[문이 열리면 지하 주차장으로. 이건 태워요.]
신음이 튀어나올까 봐 입을 막았다. 볼 사람도 없는데 누가 볼세라 해림이 황급히 종이를 구겼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쿵쾅거리며 터질 듯이 뛰었다.
해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테이블 아래 있는 라이터를 쥐었다. 싱크대로 달려가듯 걸어가 종이 끝에 불을 붙였다.
볼펜으로 휘갈겨 쓴 글씨체는 본 적 없는 종류였다. 처음에는 천운인가 싶었는데, 그였다면 마지막에 존대를 붙일 리 없었다. 대체 누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은 인오일 수도 있다. 홍콩에서 온 후로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생사는 아직 몰랐다. 그때 일에 앙심을 품고 저를 해치려고 거짓으로 쪽지를 보낸 걸 수도 있다.
종이가 타들어 갔다. 손에서 놓자 끝부분까지 재가 되었다. 내용은 머리에 박아 뒀다. 의심의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천운이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해 보낸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해림이 문득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든, 쪽지를 보낸 이가 누구든, 내용 자체는 사건이 터질 거라는 예고장이었다.
창문 너머로 저녁놀이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갔다. 땅거미가 어두운 배를 끌며 남청색 장막을 드리웠다. 바람은 소용돌이치는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손 삼아 창문을 긁고, 창문에 드리운 그림자는 악몽에서 그랬던 것처럼 까만 눈으로 소파에 앉은 해림을 구경했다.
해림은 엄지 살을 잘근잘근 물며 쪽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편두통이 몰려올 만큼 잘게 조각내서 따져 봐도 누가 보냈는지 뾰족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능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언제 나오라는지 구체적인 일시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 이란 조건만 달랑 있었다. 어떻게 문이 열릴 건지도 몰랐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 아니면 해림이 문을 부수고 나갈 상황이 조성되는지도.
살에 잇자국이 배길 정도로 물다가 번호 눌리는 소리를 듣고 해림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며 애써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주신도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려고 후, 심호흡하고 일어났다.
문 안으로 들어서는 덩치를 보자 해림의 눈가에 설핏 실망감이 어렸다. 영수였다. 얼굴을 확인하고는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검은 재킷 안으로 보이는 흰 셔츠에 피가 잔뜩 말라붙어 있었다.
시야에 핏물로 젖은 셔츠가 들어오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해림이 섣불리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최악의 사태가 떠올라서, 설마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여기면서도 입 밖으로 내면 현실이 될까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형님은 오늘 못 오십니다.”
해림이 당장이라도 밀치고 뛰쳐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영수가 뒷짐을 지며 통로를 막고 섰다. 해림의 눈에는 피로 물든 셔츠밖에 안 보였다.
“왜…….”
쥐어짜 낸 목소리가 떨렸다. 해림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고 영수를 붙들고 묻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참았다. 대신 소파 등받이에 구김이 가도록 움켜쥐고서 영수만 쳐다봤다. 저가 상상한 이유만은 아니길 바라며.
“일이 바빠서요.”
영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거짓말. 해림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저렇게 피범벅인 셔츠를 입고 와서 일이 바쁘다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불길한 감이 자꾸만 등골을 훑었다.
“혹시……, 다쳤습니까.”
영수가 침묵을 지켰다.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해림의 손등과 온몸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들떴다. 동공이 흔들리고 초조한 듯 연거푸 입술을 물었다.
“목숨엔 지장 없습니다.”
늦게나마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가 다쳤는지, 얼마만 한 부상인지 자세한 정보는 빠져 있었다. 해림이 입을 열기 전에 영수가 뒷짐을 풀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머뭇거리는 새에 영수는 문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커다랬다. 해림이 참았던 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를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던지 손이 잘게 떨리고 손바닥이 저렸다. 다른 손으로 그 손을 쥐고 꾹 눌렀다.
해림이 후우 하며 심호흡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심장은 여전히 불안하게 요동쳤다. 입술이 파르라니 질리고 안색도 창백했다.
“……죽진 않았어.”
누구도 옆에서 괜찮다고 말해 주지 않아 해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죽었으면 이보다 큰 난리가 일었을 터. 최소한 목숨을 붙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영수가 심드렁한 얼굴로 보고만 하고 나갔겠지.
안심하려고 해도 자꾸만 안 좋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벗어나려고 억세게 얼굴을 문질렀다. 뺨이 다 일그러지도록 눌러도 머리는 원치 않는 상상을 뽑아내고 코는 나지도 않는 비릿한 쇠 냄새를 맡았다.
얼마나 다쳤다는 걸까. 어디가 아프기에 못 돌아올 정도지. 혹시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심각한 부상인데 대충 둘러댄 건 아닐까.
셔츠에 잔뜩 묻었던 피가 주신도가 흘린 거면 어떡하지.
얼마나 다쳤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괜찮으냐고 묻고 싶고,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료는 잘 됐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수에게 질문조차 못 했는데 주신도를 직접 만나 보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동시에 머리 구석에 남은 이성이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주신도가 잘못되면 저는 자유를 되찾을 거라는, 깨달은 당시에도 무섬증을 느꼈던 문장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마음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걱정은 시야를 가리는데 머리는 잘됐다며 축배를 들라 한다. 감정과 이성이 가리키는 방향이 양 끝과 끝이었다.
해림이 무릎을 세우며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영수 앞에서는 벙긋거리지도 않던 입술이 지금은 잘만 열렸다.
“……괜찮아요?”
얼마나 다쳤어요, 해림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신도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할 질문이란 걸 안다.
“많이 아플 건데.”
종이에 손이 베여도 아픈 법인데,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집에 못 들어올 만큼이면 상처가 얼마나 클까.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조심하지 그랬어.”
마주 보고 해 줄 수는 없는 말이었다. 상대가 제 말을 들을 리 없기에 괜히 탓도 해 봤다.
홀로 있기엔 너무 넓은 공간이었다. 해림이 무릎을 껴안고 그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뭔가 타는 냄새가 흐릿하게 코끝에 닿았다. 해림이 반짝 눈을 떴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웅크려 자고 있었다. 메케하게 그슬린 냄새가 아까 종이를 태웠던 냄새와 비슷해 혹시 잔여물이 있나 하고 해림이 벌떡 일어났다. 오늘 밤 주신도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종이를 태워 버렸던 싱크대로 뛰어갔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도 물에 휩쓸려 배수구로 흘러갔다. 후우, 해림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싱크대를 두 손으로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심한 한편, 머리에는 좀 전에 꿨던 꿈이 방금 본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좋은 꿈은 아니었다. 예전에 꿨던 악몽처럼 사방이 물로 가득했다. 팔을 휘젓고 다리를 버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하다가, 문득 더 멀리서 어른거리는 인영을 발견했다. 주신도였다.
도와 달라고 손을 뻗었다. 당연히 저를 잡고 물 밖으로 끌어낼 줄 알았다. 주신도는 해림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섬뜩한 무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하얀 셔츠의 옆 부분이 눈동자만큼이나 검붉었다.
「안 돼요.」
한 발자국 멀어질 때마다 둥그런 핏자국이 붉은 꽃잎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영영 못 볼까 봐 있는 힘을 다해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다. 턱도 없었다. 발목을 휘감은 물이 한없이 무거웠다.
「제발.」
뒷모습이 점점 희미해졌다. 짙은 물안개가 주신도를 잡아먹었다. 매정하게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는 종래에 부친처럼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제발…….」
그리고 타는 냄새가 현실로 해림을 불러일으켰다. 해림이 찬물을 틀어 얼굴을 거푸 씻었다. 앞머리가 흠뻑 젖도록 물을 끼얹어도 타는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다쳤다는 말을 듣고는 뒤숭숭한 마음에 그런 꿈을 꾼 걸 테다. 꿈은 원래 현실과 반대라고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타는 냄새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아직도 꿈속인가 싶어 해림이 물기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숲이 오늘따라 환했다.
해림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이윽고 크게 떴다. 야트막한 언덕 너머 건물에서 회색 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노을 같은 주홍빛이 새카만 밤 홀로 선 가로등 불처럼 밝았다. 불길이 숲 아래서 어른거리다가 기둥을 타고 점차 그 몸집을 키웠다.
지하 건물이었다. 타는 냄새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해림이 멍하니 보고 있다가 황급히 거실로 뛰어갔다. 아는 번호라고는 실장뿐이지만 그녀에게라도 불이 났음을 알려야 했다.
한데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전화기가 없다. 인터폰도 내부에서 외부로는 연락이 불가했다. 완벽한 감옥이었다. 주신도의 방에도 멋대로 들어가 다 뒤집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주신도가 집에서는 개인 핸드폰으로만 연락을 취했던 게 생각났다.
해림이 문으로 뛰어가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누구라도 좋으니, 혹시 감시 하나라도 세워 놨으면 들으라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 없어요―!”
해림의 외침을 기다리기라도 한 양 알람이 요란하게 울었다. 벌건 불빛이 문 아래로 스미어 해림의 발치를 비췄다가 까매졌다가 다시금 비췄다. 연기가 스멀스멀 문틈 아래로 기어들어 와 해림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불난 곳이 저쪽 건물만이 아닌 성싶다.
해림이 현관 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스프링클러가 팍 소리를 내며 터졌다. 소낙비처럼 물줄기가 쏟아졌다. 거실이며 현관이며 할 거 없이 온갖 것을 적셨다. 셔츠 바람인 해림의 온몸도 적시고 바닥에 고였다.
물이 뿌려져도 연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담배 연기처럼 퍼졌다. 해림이 젖은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주먹으로 문을 두드려도, 알람만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터트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
“아무도…….”
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물과 불만 달랐다. 입을 벌리자 탄내가 가득한 연기가 훅 들어왔다. 해림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쏟아 냈다. 손에서 힘이 빠져 문을 두드리던 주먹이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목을 쥐어짜 외치더라도 주변이 텅 비었으면 헛수고였다. 해림이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죽게 될까. 퍽 비참한 죽음이었다. 제 생이 끝날지도 모르는 와중에, 머리는 생뚱맞게 다른 사람을 그렸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집에 갇혀 연기에 질식해 죽을 사람이 주신도가 아니라서.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연히 문을 열고 둘 다 살길을 도모했을 테지만.
그러다 퍼뜩 오기가 들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닥쳐도 물에 물을 섞은 양 흘려보내거나 덤덤하게 수용하던 내부에 욕심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살고 싶다는 본능과 아직은 끝낼 수 없다는 반항심이 해림의 다리를 이끌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았다. 해림이 식탁에서 무거운 의자를 질질 끌고 왔다. 유리로 된 거실 한 면을 후려치는데, 흠집만 가고 깨지질 않는다. 요 근래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약해진 근력도 한몫했다.
같은 부분을 연거푸 내려쳐도 창은 튼튼했다. 해림이 씩씩거리며 의자를 냅다 집어 던졌다. 유리가 해림을 비웃듯 의자를 튕겨 냈다. 의자가 바닥을 굴렀다.
어떡하지.
다른 비상구는 어디 있지.
머리를 굴리려는데, 띠딕, 현관문이 열리는 기계음이 터졌다. 해림의 고개가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문이 활짝 열리자 매운 연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해림이 쿨럭거리며 아래팔로 입을 틀어막았다. 연기 뒤에서 어른거리던 인영이 문 안으로 성큼 발을 디뎠다. 들어온 인물이 너무나도 의외라 해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형!”
다급하면서도 동시에 명랑한 목소리. 그제야 누가 쪽지를 썼는지 알아차렸다. 이형이었다.
* * *
일이 바쁘다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은 없었다. 주신도가 변덕을 부려 저지른 일은 끝났고 그 외의 일이 더 있더라도 오늘은 하지 못했다.
목숨엔 지장 없다는 말만 진실이었다. 그것조차 안 밝히면 사람이 허옇게 질리다 못해 시체처럼 쓰러질까 봐 마지못해 덧붙였다. 살았으면 됐지, 그거로는 마음이 안 놓이는지 도련님의 낯빛이 영수가 집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도 허여멀건 했다.
영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좀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일촉즉발이긴 했다. 기절한 줄 알았던 덩치가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저런 거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제압하던 주신도가,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뭐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지 한발 삐끗했다. 다행히 몸을 틀어 칼날이 급소는 피했지만 옆구리가 보기 좋게 너덜너덜 찢어졌다.
그 꼴을 하고도 주신도는 칼을 휘두른 놈을 작신작신 밟았다. 핏물을 후드득 흩날리며 사람을 밟는데, 드릴만 없다 뿐이지 그 광경이 사람 두개골에 구멍 뚫던 때만큼 괴이쩍었다.
영수가 몸을 날려 주신도를 말렸다. 한연동이 아닌 밖에서 살인을 저지를 판이었다. 제 구역 안에서야 죽여도 처리하기 쉬우니 상관없지만, 보는 눈 많은 외부에서 성질대로 날뛰었다간 무기 징역을 못 면했다.
이러다가 과다 출혈로 죽는다고 주신도를 달래고, 관리자를 마지막으로 협박한 후 돌아왔다. 주신도는 욕을 줄줄이 뱉으면서 오자마자 닥터부터 찾았다.
「사장님은 운도 좋으셔.」. ㄴㄴㅇ
아몬드 모양으로 입을 쩍 벌린 피부를 꿰매며 닥터가 휘파람을 불었다. 조금만 더 깊이 갈랐으면 내장이 튀어나왔을 건데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고. 주신도는 담배를 물고 마취 없이 통증을 참았다. 어찌나 독한지 입에서 흔한 신음 한 번 터지지 않았다. 구김살 간 미간과 악문 잇새에 칼 휘두른 놈을 덜 팼다는 짜증과 분노만 절절 끓었다.
「약 여기에 놓고 갈게요. 진통제하고 항생제. 먹으면 좀 졸릴 거예요. 헤로인이라도 좀 드릴까?」
「쓸데없는 건 빼.」
닥터가 키들거리며 알약을 한 움큼 내려놓았다. 주신도가 애처럼 얼굴을 구기고 쓴 약을 씹어 먹었다.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약을 삼키는 모습이 불쌍해 영수가 냉장고에서 주스 한 병을 꺼내 주신도 앞에 놓았다.
옆구리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서 주신도가 사장실 소파에 시들시들한 배추처럼 널브러졌다. 영수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어느덧 분노와 짜증은 식어 있었다. 약효가 강한지 천장을 응시하는 눈이 가물가물했다.
「예.」
「도련님한테 나 오늘 못 들어간다고 이야기 좀 전해 주라.」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소파 불편할 텐데요.」
「귀찮아.」
「피 보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귀찮다는 말로 눙쳐도 그 진위를 모를 영수가 아니었다. 도련님이 피 좀 본다고 놀라 자빠질 인물도 아니고. 이런 상처 조금 봤다고 기절할 나약한 인간이었으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다.
영수의 생각이 어쨌든 간에 주신도는 사장실에서 자겠다며 완고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버릇처럼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는데, 홀로 두면 담배뿐만 아니라 술병도 쥘까 봐 영수가 바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안 가.」
「술 마시면 덧날 겁니다.」
「구멍 한두 번 나 봐? 조금 마시는 걸로는 안 죽어.」
「아무래도 그냥 집에 들어가는 게.」
도련님하고 같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자중하겠지. 못난 자식 좋은 교사에게 맡기는 심정으로 권해도 주신도가 고개를 저었다. 더는 잔소리 듣기 싫다는 양 아래팔로 눈을 가리고 소파에 몸을 파묻는다.
「뭘 그러고 서 있어. 나가.」
잔소리는 거기까지만 들어 주겠다는 듯 주신도가 손을 휘휘 저었다. 더는 말 붙일 틈이 없었다. 영수가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흐릿한 목소리가 등 뒤에 따라붙었다. 제 이름을 부른 줄 알고 돌아봤지만 주신도는 잠에 빠진 듯이 미동도 없었다.
누구를 불렀는지는 복도로 나와서 깨달았다. 정해림, 이었다.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해 누구 이름인지 알아채는 데 한참이 걸렸다. 실수로라도 접대부는 본명으로 안 부르는 인간이 도련님 이름은 잘도 부른다.
한 명은 상대 다쳤다는 소리에 갓 죽은 귀신 몰골을 하고, 다른 한 명은 다친 꼴 보여 주기 싫다고 아픈 몸을 소파에 구기고 잔다. 옆에서 보니 참 답답한 길을 사서 걸어가는 인간들이었다. 둘이 붙여 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보라고 자리라도 마련해 줘야 하는지, 원. 속을 시원하게 털어놓으라 해도 할 양반들은 아니겠지만.
땅을 파다 못해 고대 유적을 발굴할 때까지 파고들 둘을 떠올리니 다시금 속이 답답하다. 영수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옷을 벗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좀 남았지만 피곤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다. 눈 좀 붙였다가 일찍 일어나서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눈을 붙인 시간은 채 10분을 넘지 못했다. 시끄러운 벨 소리가 영수를 잠에서 깨웠다. 영수가 이맛살을 구기며 전화를 받았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로 상대가 형님을 애타게 찾았다.
―형님, 지금 여기 불이, 불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도 못 이었다. 영수가 용수철처럼 튕겨 올랐다. 침대에서 일어나 두껍게 친 커튼을 걷자 굵직하게 솟구친 회색 연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안에 스프링클러가 다 고장 났어요. 애들이 물 퍼다 나르고 있는데 모자랍니다! 불길이 너무 거세요!
월요일이라 안에 사람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영수가 옷을 걸쳐 입었다. 소방차를 불러도 이 산길을 달려오려면 건물이 다 전소되고 난 후에 도착할 것이다.
“애들 소화기 들려서 보내고 너는 애들 몇 명 데리고 소화전에 호스 연결해.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제발 빨리 와 달라고 상대가 울먹였다. 자잘한 사건·사고야 많이 겪었고, 이것도 그중 하나에 불과할 텐데 예감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옷을 걸치며 주신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통화 중이었다. 약 먹고 뻗은 인간이 전화할 곳이 어디 있다고. 일이 안 풀릴 징조가 보여 영수가 이를 벅벅 갈며 문을 열었다.
탄 냄새가 저쪽에서 이쪽까지 넘어온 줄 알았건만. 복도에도 흰 연기가 자욱했다. 영수가 방에서 뛰쳐나오자 알람이 뒤늦게 벌건 불을 번쩍거리며 떠들썩하게 울었다.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에서 물줄기가 터지면서 복도에 물이 흥건히 고였다.
사장을 먼저 불러와야 하는지, 아니면 불난 곳부터 달려가고 사장에겐 전화로 보고를 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일단 불부터 끄는 게 우선이었다. 영수가 복도를 가로지르려는데, 코너에서 시커먼 인영들이 각자 손에 하나씩 들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하, 하고 영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맨 앞에 선 이가 낯익었다.
“임서야. 네가 왜 여기 있냐.”
주신도가 그래도 예뻐하던 이 중 한 명이었다. 인오야 항상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까 말까 했던 놈이라 언젠가 배신할 거라고 예측이나 했지, 임서까지 등을 돌렸을 줄은 몰랐다.
“이거 다 네가 그랬냐.”
“죄송합니다, 형님.”
진심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뵈는 사과였다. 뒤에 흉흉한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이들은 얼굴이 익은 애들도 있고 서류상 봤던 유성 파 덩치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조직이 오래 묵으면 내부든 외부든 적이 생기니 항상 긴장하라던 주신도의 말이 오늘에서야 빛을 발할지는 몰랐다.
“너 혼자 계획한 건 아닐 거고. 인오?”
“…….”
침묵은 긍정이었다. 역시 그때 망설이지 말고 죽였어야 했다. 후환으로 돌아올 걸 알았거늘 왜 방치했을까. 그놈이 뿌린 오물을 줍겠다고 풀어 놓은 게 실책이었다.
그나저나 사장은 괜찮을지. 소파에서 처량하게 몸을 구기고 자던 모습이 떠올랐다. 옆구리가 찢어져도 날뛰던 양반이라지만 약 먹고 해롱거리는 상태로 달려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남 걱정할 틈이 어디 있을까. 맨손으로 목 분지르는 게 특기인 인간이니 그 목숨, 최소한 잃지는 않겠지.
임서가 손에 휘휘 감은 쇠사슬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뒤에 포진한 이들도 무기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영수를 쳐다봤다. 진득한 살기가 목덜미를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신도 형님이 너무 유해지지 않았습니까. 조직을 이끌어 나가기엔 약합니다. 더 강한 사람이 필요해요.”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너 어려울 때 다 퍼다 준 사람 뒤통수 때리니 좋으냐.”
“조직을 위해섭니다.”
뭔 말을 해도 벽창호처럼 튕겨 낸다. 대화는 결렬이었다. 저쪽도 영수와 좋게 풀어 갈 기미는 눈곱만큼도 안 보였다.
영수가 근육이 덜 풀린 목을 한 바퀴 천천히 돌리고 주먹을 쥐었다. 아까는 주신도 몫으로 넘기느라 제대로 싸워 보질 못했다. 오는 싸움 안 피하고 걸어온 싸움은 더더욱 환영한다. 영수가 쿵, 하고 육중한 발로 젖은 복도를 밟았다.
* * * @@냥냥웅@@공금 갠소
약에 취해 깊이 잠이 들었다가, 벨 소리를 듣고 현실로 올라왔다. 주신도가 시끄러운 소리를 외면하듯 몸을 돌렸다. 옆구리가 지끈거려 졸음이 단번에 훅 날아갔다. 으, 소릴 내고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소파 등받이에 건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벽을 향해 집어 던질까 하다가 욕이라도 해 주려고 전화를 받았다. 읍, 읍 거리는 입 막힌 신음이 먼저 들렸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이에요.
주신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유들유들한 이 목소리를 잊을 리 없었다.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온 인오의 목소리보다, 그 뒤로 배경음처럼 들리는 신음이 더욱 신경 쓰였다.
―우리 형님 보고 싶어서 내가 눈이 다 짓물렀어요. 신기한 게 눈알은 없는데 눈물은 나대. 여튼 형님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형님은 나 보기 싫을 거 아니야. 어떻게 하면 우리 형님 잘생긴 얼굴 좀 보나 고민하다가.
“본론이 뭐야.”
구구절절한 개소리 들어 주기 귀찮아 주신도가 말을 끊었다. 인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성질도 급하셔. 급할 게 뭐가 있어요. 인생 쉬엄쉬엄 가는 거지.
“본론.”
―사진 아직 안 봤어요? 형님이 좋아할 사진 보냈는데.
사진은 무슨. 한데 이렇게 전화까지 했으면 분명 믿을 구석이 있고 꿍꿍이가 있어서다. 주신도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을 쳐다봤다. 문자 함에 수신 알람이 떠 있었다. 들어가 보니 사진 한 장이 뜬다.
“…….”
해림이었다. 침대 아래 널브러져 있었다. 두 손목은 뒤로 묶였고 피부는 죽은 이처럼 창백하다. 검은 머리카락은 바닥에 흐트러져 있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마에 핏물이 묻어 있었다. 살인 사건 현장에서 찍었다고 해도 믿겠다.
―형님이 날 그냥 봐주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뭐라도 가지고 있어야지. 여기 지하 주차장이에요, 형님. 기다리고 있을게. 얼른 와요. 얘도 형님 보고 싶대.
전화가 뚝 끊겼다. 주신도가 한참 사진을 들여다봤다. 주변 배경은 보이지 않고 해림만 보였다. 집에서 습격을 당해 지하 주차장으로 끌려갔을까.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상대를 압박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빼앗는 게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이었다. 해림도 그렇게 되찾아야 맞았다. 한데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진은 실제 같고, 수화기 너머로 들린 신음은 해림이 낸 소리 같았으며,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수록 인오는 저가 했듯이 잔인한 고문을 해림에게 퍼부을 것만 같았다.
초조했다. 입술이 말랐다. 칼이 긋고 간 긴 상처에서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약이 불러온 졸음은 휘발되고 인오가 말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맹목적인 의지만 전신을 지배했다.
한 번 더 생각하고자 해도 이성으로는 제어가 안 됐다. 주신도의 다리는 재고할 새도 없이 벌써 문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복도 가득 알람이 시끄럽고 머리 위에서 빗물처럼 물줄기가 쏟아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욱한 탄내와 연기도 뒷전이었다. 홀린 듯이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가 단숨에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기껏 꿰맨 상처가 터져서 흰 붕대가 벌겋게 물들었다. 후끈한 통증과 미지근한 핏물을 느끼고서도 주신도는 정신없이 주차장을 둘러봤다. 발화점은 이곳이 아닌지 연기만 뿌옇고 다른 데보다 온도가 높을 뿐,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정해림!”
이름을 불러도 메아리만 돌아온다. 혹시 인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나 싶어 주신도가 황급히 돌아봤다. 옆구리의 상처가 순간 새로 찢어지는 듯이 욱신거렸다. 멈칫한 사이, 기둥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통증에 눈이 멀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푹, 하고 날카로운 게 뱃가죽을 후벼 팠다. 옆구리를 긁힌 것과 비교도 안 되는 통증에 온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니 손잡이를 잡은 두 손과 배를 칼집 삼아 안으로 움푹 들어간 나이프가 보였다.
작은 신음도 새지 않았다. 인오가 칼날을 더욱 깊숙이 박으려고 손잡이 쥔 손을 손바닥으로 말뚝 내려치듯 내리눌렀다. 주신도가 쓰러지려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부둥켜안았다. 히죽거리며 웃다가, 주신도의 뺨에 제 뺨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케이 그 새끼가 연기는 잘하죠. 신음을 아주 끝내주게 잘 내.”
전화기 너머로 들린 신음이 당연히 해림이라고 생각했다. 깜박 속았다. 속임수를 간파하기엔 판단력이 흐렸다. 약 때문도, 상처 탓도 아니었다.
“형님이 그랬잖아요. 대가리부터 따라고. 나 정말, 형님이 너무너무 좋은데, 너무 좋은데…….”
밀어라도 속삭이듯이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안대로 가리지 않은 한쪽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개를 젖혀 허공을 올려다보며 인오가 눈물을 삼켰다. 칼이 꽂힌 살갗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셔츠를 적셨다. 옆구리뿐만 아니라 배까지 검붉은 색이 먹었다.
“하……, 씨발.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요, 형님. 왜, 왜 이렇게.”
연극에서 과장된 독백을 떠드는 양 인오가 울먹였다. 죽어가는 왕을 바라보는 충신처럼 애타게 뺨을 문지르다가 얼굴을 뗐다. 반쯤 숙인 주신도의 머리에 제 이마를 갖다 대고 볼에 묻은 피를 닦아 줬다.
“……정해림은.”
인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차게 웃었다. 칼날이 한층 깊숙이 주신도의 뱃가죽을 꿰뚫었다. 배에 힘이 들어가 근육이 칼날을 물자 인오가 더는 넣지 못하고 손을 뗐다.
“형님이 이렇게 애절하게 굴지 누가 알았겠어요. 다행히 그 새끼는 아직 안 죽었어요. 사진 그거, 홍콩에서 찍은 거거든.”
완벽히 속았다. 제 잘못이라 주신도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머리는 어지럽고 시야는 자꾸만 흐릿해졌다. 진통제를 들이부은 덕택에 통증은 그나마 둔탁했다.
“먼저 가 있어요, 형님. 그 남창 새끼도 곧 형님 곁으로 보내 줄게. 그게 동생이 보여 주는 마지막 의리 아니겠습니까. ……아, 눈알은 뺄게요. 그럼 저승 가도 형님은 못 알아보겠네. 아쉬워라.”
인오가 키득거리며 어깨를 토닥였다. 주신도가 움칫했다. 아래로 내리깐 눈은 초점이 점점 사라지는지 흐리멍덩했다. 핏물이 바지를 적시다가 발아래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인오가 주신도의 이마에 작별 인사처럼 입을 맞추고 굽힌 허리를 폈다. 휘파람을 불며 돌아서는 그 때, 귀 뒤에서 두툼한 손아귀가 불쑥 튀어나와 양쪽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야……, 너희 정말 안 친하구나. 영수가 말 안 하든.”
인오가 두 손으로 주신도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핏줄과 힘줄과 근육이 절대 끊기지 않을 케이블 선처럼 단단하게 얽혀 있었다. 피하려고 했으나 한발 늦었다. 뚜둑,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암전이었다.
“그러게, 둘이 친하게 지내랬잖아.”
뱃가죽이 당겨서 마음껏 비웃어 주지도 못했다. 인오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위아래로 흰자가 드러나게 벌어진 한쪽 눈은 마지막까지 제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듯이 어리둥절했다.
윽, 하며 주신도가 기둥에 등을 기댔다가 미끄러지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간 참았던 통증 어린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후우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쭉 폈다. 나이프를 뺄까 하다가, 어차피 죽을 거 덜 아프게 죽자고 손대지 않았다.
지희의 예언이 맞았다. 칼 맞아 뒈지라고 욕할 때도 허허 웃고 넘겼는데, 알고 보니 신기가 흐르는 여자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복채도 주고 위험한 일 있으면 미리 알려 달라고 할 걸 그랬다.
주신도가 키득거리며 웃다가 나이프가 꽂힌 배에 손을 댔다. 핏물이 울컥 쏟아져 손바닥 가득 묻어났다.
개소리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그래도 5분은 벌었을 텐데. 그 정도 여유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갔을 수도 있겠다.
한데 인오가 떠든 말을 듣고는 이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옆구리에서 피가 다시 터진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정신없이 뛰어온 것처럼, 팔은 멋대로 앞으로 뻗어나갔고 온 힘이 손에 실렸다. 그 탓에 칼로 베이고 뚫린 구멍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지며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은 수명이 한 움큼은 줄어들었다.
연기가 짙어졌다. 저승길에 깔린 안개처럼. 언젠가 이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는 생각했지만, 길동무로 인오를 데려갈 줄은 몰랐다. 같이 간다면 사실 인오보다는 영수나 정해림이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더니만. 정해림을 만나고 내리 저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하나밖에 생각 못 하는 바보가 됐고, 주변이 보이지 않았고, 세상이 예전처럼 어두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이 길 말고도 더 안전하고 편하고 밝은 세상을 누릴 수도 있을 거라고, 주제넘은 꿈을 꿨다.
악인의 말로가 이렇지, 뭐.
제 세상에는 신이 없었다. 간절히 원해도 단 하나도 주지 않았다. 모두 제 손에 피를 묻혀 가며 강탈해야 얻을 수 있었다.
하나만 빼고. 아무리 가지려고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존재했다.
신이 정말 있다면, 저를 동정한다면, 한 번만 굽어살펴 죽기 전에 소원을 이뤄 줬으면 좋겠다. 비싼 소원도 아니었다. 아니, 세상에서 제일 값어치 나가는 소원일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뿌연 연기 속에서 환영처럼 인영이 그려졌다. 그리움이 만들어 낸 상상인지, 아니면 신이 가엾게 여겨 마지막 소원을 들어줬는지 모를 일이다. 가기 전에 봤으니 이제 미련의 반은 덜었다며 주신도가 가만히 히죽였다.
……우유를 던지지 않고 널 불렀다면, 그랬다면 네가 한 번쯤은 뒤돌아봤을까.
부질없는 질문,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그날처럼 춥고 졸렸다. 눈이 감겼다.
* * *
“형, 빨리 가요. 지금밖에 시간 안 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그런 거 따져 물을 시간 없어요!”
이형이 바락 소리를 지르며 해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해림이 신발을 구겨 신고 따라 나왔다. 집에 갇혀 연기에 질식하는 것보다야 바깥으로 나오는 게 나았다.
“쪽지 보낸 거, 너였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긴 했지만, 예. 저 맞아요.”
이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해림의 손목을 잡은 손이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굳건했다.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해림이 이형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일단 여길 벗어나는 게 먼저예요. 묻지 말고, 저만 따라와요.”
말 한마디 못 붙일 분위기였다. 지금까지 봤던 이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성싶었다. 벽 뒤에 숨어 복도에 누가 있나 살피며 이형이 비상구에 해림을 밀어 넣었다. 비상계단에도 연기와 탄내가 진동하고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알람이 들렸다. 해림이 내려가지 않고 멈칫하자 이형이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이제부터 앞만 보고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요.”
빛이 꺼진 계단에 비상구를 밝히는 알림판만 희끄무레 빛났다. 해림이 계단을 내려가자 뒤에 선 이형이 빨리 가라며 재촉했다. 급기야 해림의 손목을 도로 붙들고 두세 칸씩 뛰어 내려갔다.
해림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이형을 따라갔다. 초조한 기색이 이형의 옆얼굴에 가득했다. 어쩌다가 바깥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리기라도 하면, 숨까지 멈추고 벽에 등을 바싹 붙였다.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처럼 숨을 죽여 가며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저쪽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천운이었다. 천운이 고개를 양옆으로 돌려 주변을 확인하고 뛰어왔다. 해림을 보자마자 바특하게 껴안고서 양 팔뚝을 잡아 얼굴을 확인했다.
“내가 갔어야 했는데. 미안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구해 준다고 했잖아. 나가서 다 설명해 줄게. 일단 차에 타자.”
이번엔 천운이 해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해림이 힘없이 끌려가다가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붉은색이 얼핏 보였다. 꿈에 봤던 그 색과 똑같아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탄내에 묻혀 피 냄새가 날 리 없건만, 누가 코 아래 핏물을 묻힌 듯이 비릿한 내음이 훅 끼쳤다.
반대편 기둥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인형처럼 길게 뻗고 팔은 아래로 축 늘어졌다. 핏물이 바닥에 고여 굵직한 손가락과 손톱을 적셨다.
설마.
해림의 몸이 틀어졌다. 천운이 팔을 잡아당겼다. 팔이 곧게 펴졌다. 해림이 손목을 잡아 빼려고 아래팔을 비틀었다.
“보지 마.”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것만으로도 쓰러진 이가 누군지 알았다. 해림이 팔에 힘을 주고 천운을 뿌리치려 했다. 약해진 몸으로는 벗어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이거 놔.”
“끝났어. 이미 죽었어.”
“내 눈으로 확인할 거야. 이거 놓으라고.”
간신히 빠져나와 기둥 쪽으로 향했다. 계단을 뛰어 내려왔을 때처럼 빨랐던 걸음이, 몇 발자국 가지 못해 천천히 느려지다가 중간에서 완전히 멎었다. 문득 떠오른 가정 하나가 발목을 붙들었다.
정말 죽었으면.
그러면.
시선이 내려갔다. 고인 핏물이 해림 쪽으로 구불구불 몸을 틀며 기어 오는 환상이 보였다. 눈을 깜박하고 나서는 사라졌다. 핏물은 힘없이 널브러진 손가락 아래에만 고여 있었다.
“형! 정신 차려요.”
이형이 해림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시선을 마주하는 눈동자에 강렬한 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를 탈출하겠다는 열망이었다. 해림의 어깨를 잡은 손과 손목에 흉터가 울퉁불퉁 솟아올랐다. 이곳에서 있느니 생을 마감하겠다고 날붙이로 그은 흔적이었다.
“지금 저런 거에 신경 쓰면 안 돼요.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어. 제발, 형. 나를 봐서라도 보지 말고 그냥 가요.”
“이형 씨 말이 맞아. 저건 저렇게 뒈져도 마땅한 쓰레기야. 해림이 네가 볼 사람이 아니야. 정신 차려.”
해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개가 자꾸만 옆으로 돌아갔다. 시선이 원래 있던 자리가 기둥 쪽이라는 듯이 머물렀다. 이형이 양 뺨을 붙들어도 해림의 몸은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제발, 형.”
이형이 고개를 푹 숙이며 부탁했다. 어깨를 쥔 손가락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형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가는 게 맞았다. 머리로 수많은 이성적인 이유들이 지나갔다. 여기를 빠져나가서 얻을 자유와 죽었을지도 모르는 주신도가 다시금 양 저울에 올라갔다. 무게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잴 수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무게였다가, 한쪽이 느릿느릿 밑으로 가라앉았다.
해림이 이형의 손을 잡고 어깨에서 아래로 끌어 내렸다. 용기를 내 망설임을 내던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주신도는 기둥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만사에 지쳐서 잠깐 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바퀴가 핏기없이 하얬다. 해림의 낯빛도 그만큼 새하얗게 물들었다.
해림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핏물이 발치에 닿았다. 눈에 들어온 셔츠가 악몽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젖어 있었다. 배에 박힌 나이프는 차마 건들지 못했다.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입술을 연거푸 열고 닫았다가 겨우 손을 들었다. 후들거리는 손가락을 코 아래 갖다 댔다. 숨결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해림의 입술이 벌어졌다. 눈가가 분홍색으로 익고 눈 아래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어쩔 줄을 모르며 해림이 덜덜 떠는 손으로 주신도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그 가슴에 이마를 댔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품에 뺨을 비빌 것처럼 해림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주, 깃털같이 얕은 숨결이 살갗에 닿은 건 그때였다. 해림이 주신도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손가락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이 아직 덜 가신 눈으로 천운과 이형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 살아 있어.”
목 옆에도 손을 대 맥을 짚었다. 미약하나마 두근거리는 고동이 느껴졌다.
“정신 차리라니까요. 형. 지금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지, 나가면 까맣게 잊을 거야. 이 인간이 형을, 우리를 어떻게 대했는데!”
안다. 잘 알았다. 주신도가 저를 어떻게 대하고, 다른 이들을 무엇으로 취급했는지 옆에서 누구보다 생생하게 지켜봤다. 주신도는 악당이었다. 악인이었고,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랬다. 해림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처음엔 이형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탈출을 꿈꿨고 제 인생에서 주신도를 내쫓고 싶기만 했다.
지금은.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한다. 관계에도 변화가 일었다. 과거는 추억이 되고 추억은 미련을 낳는다. 버려야 함을 알지만 생전 처음 맛본 감정은 이성을 배반한다.
입을 맞추고, 따스한 품으로 안아 주고, 노래처럼 위로를 속삭였다. 눈물 흘리는 절 앞두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서툴게 껴안던 주신도가, 저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나 다름없었다.
천운과 이형이 애가 타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런 시선을 받고도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끔찍하게 이기적이었다. 이들의 말이 옳다는 건 알았다. 부친의 문제도 있었다. 부친의 목에 직접 줄을 걸지는 않았어도 절벽 끝까지 몰아붙인 이는 주신도였다. 핏줄인 자신이 주신도를 사랑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림아. 이건 너한테 빚을 지우고 가지고 놀았어. 저걸 살리겠다고. 아니야. 저렇게 뒈지는 게 맞아.”
천운이 열불을 터트리며 한 발짝 나왔다. 구둣발이 피 웅덩이를 밟았다. 철퍽 튀어 오른 핏방울이 해림의 바짓단을 적셨다. 붉은색인데도, 해림의 눈에는 희묽은 우유 방울로 보였다.
……그때 돌아봤더라면, 그랬더라면 누군가는 다른 길을 밟았을까.
어두운 뒷골목에서 소년을 봤었다. 비쩍 마르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 소년이 해림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세한 이목구비는 기억나지 않지만 쓰러진 주신도가 마치 그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렇게 죽게 놔둘 수 없어.”
“정해림!”
“형!”
이형이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당장이라도 누가 와서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갈까 무서운 눈치였다. 천운도 속이 답답한지 뒷머리를 헝클이고 푸우우, 한숨을 쉬었다.
이들에게 과한 부탁이라는 건 안다. 그래도 해림은 주신도를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해림을 구성한 모든 성분이 거부했다.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해림이 무릎을 꿇었다. 핏물이 무릎에 묻었다. 천운의 바짓자락을 잡고 간절하게 빌었다. 손바닥을 붙여 빌라 하면 응당 그럴 수 있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뺨을 굴러가다가 턱 끝에 모여 피로 물든 바닥 위에 톡, 톡 떨어졌다. 이대로 둘이 저를 버리고 간다 해도 해림은 이해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주신도를 살리려고 애를 쓰다가 같이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천운이 해림을 외면하며 입술을 물었다. 이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림을 쳐다봤다.
해림은 요지부동이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기만을 기다리며 둘을 올려다봤다. 바닥에 고인 핏물이 번지면 번질수록 해림의 손가락 마디에 핏기가 사라졌다. 안색도 허옇게 질렸다. 꽉 깨문 입술엔 핏방울이 고이고 주신도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눈빛이 점점 어둡게 물들었다. 씨발, 하고 천운이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대신 병원까지만이야. 그 뒤로는 나도 몰라.”
“미쳤어요? 형이 미쳤으면 그쪽이라도 정신 차려야―”
“운전대는 내가 잡아요. 갈 거야, 말 거야?”
퉁명스러운 대꾸에 이형이 입을 다물었다. 천운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주신도의 한 팔을 제 어깨에 걸쳤다. 해림이 다른 쪽 팔을 어깨에 걸고 온 힘을 다해 무릎을 세웠다.
차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신도를 뒷자리에 태우고 해림이 그 옆에 앉았다. 제 옷을 벗어 피가 새는 부분을 누르고 앞을 돌아봤다. 막 시동을 걸며 룸미러로 천운이 해림과 시선을 맞췄다.
“정해림. 그거 죽으면 내다 버릴 거야.”
끝내 마음에 안 든다는 투였다. 해림이 손에 쥔 옷가지를 더욱 꾹 누르며 피를 막았다. 가슴 철렁한 그 순간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차가 매끄럽게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건물은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건조한 날씨에 힘입어 마른 나무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시뻘건 불길이 위로 솟구치며 벽을 시커멓게 그을리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장정들은 차에 탄 모두가 못 본 체했다.
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와 정문에 무사히 도착했다. 원래대로라면 틈 없이 닫혀 있어야 할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경비실에는 쓰러진 남자 한 명만 덩그러니 엎어져 있었다.
산을 벗어나 한참 동안 차 안은 숨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평평한 도로에 들어서고 나서 천운이 침묵을 깨트렸다.
“이것들이 독점이 길었어. 구 사장하고 먼 친척 관계인 사람이 신흥 조직에 몸담은 인간이었는데, 이것들 잘라 내겠다고 이 갈고 있었거든. 내부에도 첩자가 좀 있었고. 첩자 한 명만 있어도 구멍 뚫리는 거야 뭐, 시간문제지.”
홍콩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했다. 해림이 물끄러미 주신도를 내려다봤다. 머리를 잃은 조직은 어떻게 될까. 와해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해림이 상처를 누르며 뒤를 돌아봤다. 한연동과 그 주위를 둘러싼 숲도 함께 불타고 있었다. 제가 머문 과거도 재로 흩날려 버릴 듯이 주홍색 불길이 맹렬했다.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한연동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기억과 사람은 남았다. 숨결이 아직 붙어 있음을 계속 확인하며 해림이 까만 머리통에 이마를 갖다 댔다.
끝이지만,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병원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작은 규모에 시간도 늦어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따분하게 핸드폰을 두드리던 접수원이 시체 꼴인 주신도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해서 의사를 불렀다.
그 후로는 해림의 기억에도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았다. 피범벅인 주신도를 침대로 옮기고 간호사와 의사가 침대째로 데려간 것만 기억이 났다.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들이 귀에 들어왔다가도 튕겨 나가고, 저도 모르게 따라가려다가 보호자는 밖에서 기다리라는 소리에 바깥으로 쫓겨난 것만 떠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몸엔 주신도가 흘린 피가 페인트를 통으로 쏟아부은 것처럼 묻어 있었다. 손바닥에도 헐벗은 상체에도 잔뜩. 차에선 혹시나 잘못될까 긴장하느라 손가락 끝까지 힘을 주고 있었는데, 대기실에 남겨지고는 해림이 지푸라기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게 폭풍처럼 지나갔다.
“해림아.”
“형, 괜찮아요?”
이형과 천운이 해림을 부축했다. 천운의 셔츠에도 손바닥으로 문지른 듯 핏물이 묻어 있다. 이만큼이나 피를 쏟았는데 정말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까. 당장이라도 의사가 문을 열고 나와 환자가 사망했다고 고할 것만 같다.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할 것만 같았다. 해림이 입을 틀어막았다가 역한 쇠 비린내에 기어이 헛구역질을 했다.
“걱정 마. 원래 나쁜 짓 한 새끼들이 명은 더럽게 기니까. 일단 피부터 씻자.”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에 질식할 것만 같다. 해림이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찾았다. 주신도의 상처를 누르느라 손에 쥐고 있던 셔츠는 본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피범벅이었다. 도저히 도로 입을 수가 없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해림이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 손바닥에도 얼굴에도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었다. 차가운 물줄기에 손을 비벼 씻고 얼굴도 문질렀다. 뺨에 묻은 핏물이 물줄기를 따라 소용돌이치다가 배수구로 흘러 들어갔다.
천운은 해림이 핏물을 다 씻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맨 상체에 물기가 축축하게 남은 해림이 곧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간 무슨 고생을 했는지, 매끈한 가슴 아래로 갈비뼈가 슬쩍 드러날 만큼 말랐다. 천운이 혀를 차며 수건과 옷을 내밀었다.
“이거 입어. 차에 있는 거 가져왔어.”
품이 넉넉한 후드 티였다. 해림이 말없이 옷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피 냄새가 사라지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요?”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이형이 한 마디 던졌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눈과 고개는 자꾸만 병원 문 쪽으로 돌아갔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 내려오면서 봤는데, 소방차 올라가고 있었어요. 부상자 있으면 이 병원으로 데려올 거야. 그 전에 빨리 움직여요. 이렇게 머뭇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
천운이 한숨을 쉬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차 키를 꺼냈다. 이형에게 툭 던지고 턱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차에 들어가 있어요. 곧 갈 테니까.”
이형이 머뭇거리다가 차 키를 손에 꾹 쥐었다. 몸을 돌려 몇 걸음 가다가, 문득 할 말이 떠올랐는지 돌아왔다.
“……고마워요, 형. 그리고 형 좀 미친 거 같아요. 이 말 하고 싶었어. 어디 가서든 잘 살고. 인연 되면 또 봐요.”
마지막 인사였다. 해림이 그래, 하고 덤덤하게 인사를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토해 냈는지 이형이 홀가분하게 뒤돌아섰다. 가다가 두어 번 해림을 돌아봤지만, 이내 입을 앙다물고 병원을 나갔다.
“너도 얼른 가 봐.”
천운도 마냥 여기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형이나 해림처럼 노예 취급받지는 않았어도, 이형을 완전히 탈출시키려면 천운이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담배 한 대 피울까?”
“이형이 기다릴 텐데.”
“5분인데, 뭐. 정 뭐하면 지가 알아서 도망치겠지.”
천운이 심드렁하게 귀를 후벼 팠다. 같이 안 피우면 안 가겠노라고 으름장도 놨다. 하는 수 없이 해림이 건물 뒤쪽 벤치로 향했다.
천운이 해림에게 담배 한 대를 건넸다. 손가락이 벌벌 떨려 불을 붙이는 작은 일도 어려웠다. 간신히 담배 끝을 태우고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래도 절벽에 매달린 듯한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해림이 연기를 뱉었다.
“해림아. 나랑 같이 갈래?”
“……미안.”
“그냥 해 본 소리야. 안 갈 거 알았어.”
천운에게는 빚을 졌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갚아야 할 부채였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주신도 외에 다른 건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모든 초점이 한 명에게 가 있었다. 이 점을 아는지 천운이 장난스럽게 웃어넘겼다.
“나, 경찰 부를 거야.”
해림이 숙인 고개를 들었다. 천운이 정면을 보며 볼이 홀쭉해지게끔 연기를 들이마셨다. 코와 입으로 흐릿하게 내뱉고는 해림을 돌아봤다.
“네가 부탁해서 병원까지는 데려다줬는데, 저런 놈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지.”
“천운아.”
“그건 네가 뭐라고 해도 안 돼.”
천운이 단호하게 말 붙일 틈을 차단했다. 해림이 담배를 입에 물며 잠깐 침묵했다. 흰 기둥의 반이 타들어 갈 때까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3일만.”
“…….”
“3일만 시간을 줘.”
주신도가 죽을지, 아니면 혼수상태로 나올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그래도 살 거란 희망을 가지고 3일을 내걸었다.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 사람에게 바로 수갑을 채울 수는 없었다.
“염치없는 거 알아. 미안해. 그래도…….”
“잘 아네. 너 그거 염치없는 거 맞아.”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손이 다시금 떨렸다. 손가락에 걸렸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운이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긁적였다. 나 원 참, 하며 저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하루. 그 이상은 안 돼. 내일 저녁까지야.”
“고마워.”
넉넉한 시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신도의 생사를 확인하고 곁에 머물 시간은 벌었다. 해림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옅게나마 미소가 뜬 해림을 보고 천운이 얼굴 근육을 구깃구깃하게 접었다.
“너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거 알고 이러는 거지?”
천운이 저에게 갖는 감정이 남들과 다르다는 건 알았다. 음, 하고 해림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소리를 냈다.
“됐다. 어쨌든 우연하게라도 만났으니 됐어. 잘 살고. 웬만하면 저런 놈은 정리해. 세상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디 핵폐기물 같은 개새끼한테 목을 매.”
주신도가 다른 이들에게 사탄이나 악마급인 건 알지만, 저에게 핵폐기물 정도는 아니다. 해림이 음, 하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목을 울린 소리에 불만이 어렴풋이 섞여 있었다.
“이만 가 볼게.”
바로 가지는 않고 천운이 그 자리에서 뭉그적거렸다.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 해림이 왜 그러고 있느냐고 가만히 쳐다보자, 천운이 냅다 팔을 벌리고 와락 껴안았다.
“그동안 즐거웠어.”
이형이 그랬던 것처럼, 천운도 마지막 인사였다. 해림이 두 팔로 천운의 어깨를 마주 안았다. 토닥거리자 한 차례 더 힘껏 껴안고 천운이 팔을 풀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해림도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어떻게 눌러 참았는지, 마치 날아가듯 뛰어갔다.
「운이 정말 좋았습니다. 칼을 뽑았으면 그대로 죽었을 건데, 남겨 둬서 다행이에요. 장기도 멀쩡하고요. 젊으니 회복하는 것도 빠를 겁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인자하게 웃었다.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천운 앞에서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던 손도 평소대로 돌아왔다.
병실에는 주신도 홀로 누워 있었다. 머리 위에 달린 링거에서 방울이 뚝, 뚝 떨어지며 호스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 왔다. 흉터가 가득한 손등에는 바늘이 꽂혀 있고, 어깨부터 소매까지 단추로 이어진 환자복에는 군데군데 누런 소독약이 배어 있었다.
창밖은 아직도 새카맸다. 겨울은 밤이 길고 길어 동틀 녘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낯선 침대와 좁은 병실, 짙은 소독약 냄새만 아니었다면 한연동이라고 착각할 만큼 사위가 고요했다.
해림이 침대 옆에 앉았다. 분명 살았다고 했는데, 꽉 감긴 눈은 일견 죽은 듯이 보인다.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어 해림이 얼른 주신도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두근, 두근 하며 심장이 피를 뿜는 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일정하고 커다랬다. 안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손등에도, 상체와 뺨에도 아직 지우지 못한 핏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해림이 수건을 적셔 느리고 세심한 손길로 핏물을 지워 나갔다.
상체와 뺨은 닦았는데 손바닥에 묻은 피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길고 선명한 생명선을 따라 굳은 피를 닦아 내고 손등도 수건으로 문질렀다. 자잘한 흉터가 많고, 핏줄과 관절과 힘줄이 다듬어지지 않은 계곡과 산맥처럼 얽혀 있었다.
꼼꼼하던 해림의 손길이 서서히 느려졌다. 손에 잡히는 온기가 팔과 어깨를 넘어 눈 아래까지 올라왔다. 한 번 터트렸더니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터졌다. 해림이 고개를 숙이며 마른 핏물이 아직 남아 있는 손등에 이마를 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동안은 도저히 말할 수 없어 무덤처럼 묻어 놨었다. 결과는 상관없었다. 전하고 싶었다. 반응이 어떻게 나오든 제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좋아해요.”
듣지 못하는 걸 알았다.
“사랑해.”
지금 하기엔 비겁한 고백이었다. 다음에 주신도가 눈을 뜨면, 그 눈을 보고 말해 주리라 다짐했다. 제 속에 담고만 있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버거운 말이었다. 어떻게든 밖으로 끄집어내 상대도 이 무게를 짊어지게 해야 했다.
주신도가 저에게 저지른 많은 잘못들이 애정 앞에서 한낱 눈송이처럼 녹아내렸다.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심지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라며 새로운 믿음과 기회를 주게 된다. 없이는 살 수 없기에 가시가 가득한 선인장임을 알면서도 껴안게 되는 것이다.
뺨에 닿은 체온이 언젠가 침대에 누워 속삭였던 그때처럼 달콤하다. 잠들지 않으려 했는데, 익숙한 온기가 자꾸만 눈을 감게 만든다. 해림의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지다가 침대에 닿았다. 눈이 굳게 감겼다.
따끔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해림이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미처 여미지 못한 커튼 틈 사이로 밝은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좁은 틈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맑았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황급히 손을 뻗어 침대를 더듬었다. 사람이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링거는 매달려 있는데 바늘과 호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해림이 벌떡 일어나 병실을 둘러봤다. 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 문도 벌컥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제 저가 미쳐서 환상을 본 건 아닌지, 아니면 주신도는 이미 죽었고, 저만 병실에 처박힌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해림이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TV에서 산불이 크게 났으나 밤새 모두 진화됐다고 떠들어 댔지만 자세한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일 먼저 스테이션으로 달려갔다.
“저, 어제 응급실에서 들어온 환자요. 506호에 있었던. 그 사람 어디로 갔어요?”
저 모르는 사이에 상황이 심각해져 중환자실로 옮겼다거나, 아니면 다른 병실로 옮겨 갔을 수도 있다. 해림이 애써 침착하게 간호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만요, 하고 간호사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 506호 환자요. 오늘 아침에 퇴원하셨는데.”
“네?”
해림이 눈이 황당함을 담고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 얼굴을 보며 간호사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엄청 잘생긴…… 그분 말씀하시는 거죠, 506호 환자면. 그분 오늘 아침 아홉 시경에 퇴원하셨어요. 병원비도 다 내시고. 회진도 안 받고, 원무과에서 정산하려면 시간 걸린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내고 가셨어요. 친구분은 너무 깊게 잠들어서 안 깨운다고 하셨는데.”
“그,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저희도 말렸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친구분 깨어나면 나중에 다시 보러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허탈했다. 현기증이 몰려와 해림이 비틀거리며 손으로 벽을 짚었다. 간호사가 일어나 해림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며 손을 뻗었다. 해림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앞이 어찔했다.
“그리고…… 다른 말은 없었어요?”
“아, 네. 전해 달란 말은 그거뿐이었어요. 또 올 거라고.”
하……, 하고 해림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 남기고 주신도가 사라졌다. 누가 남이라고 오해라도 할라, 주신도는 끝까지 주신도다웠다. 어쩜 이렇게 사람을 제멋대로 들었다 놨다 손바닥 위에서 굴리는지. 흔한 전화번호, 언제 오겠다는 약속도 하나 주지 않은 채로, 막연한 기대감만 안겨 주고는.
끝에 끝까지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옆에 있었으면 그 멱살을 잡고 사람이 왜 이렇게 못됐느냐고 불같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한연동에서는 어디 가지도 못하게 집에 감금해 놨으면서. 밖에 나오자마자 제 일 급하다며 해림을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졌다.
원망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매정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인사를 할 시간은 주지. 언제 돌아오겠다고 날짜를 적은 쪽지 한 장이라도 남겨놓고 가지. 그 흔한 글자 하나 안 남기고 연기처럼 증발했다.
이참에 남은 정이 몽땅 떨어지면 좋으련만,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감정은 고개를 수그릴 줄 몰랐다. 속이 아프고 꽉 막힌 듯이 답답해서 해림이 가슴을 쥐어뜯을 듯 손으로 움켜잡았다.
“괜찮으세요?”
해림이 넋 놓고 앉아만 있자 간호사는 물론 지나가던 사람들도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일어났다.
“……네.”
언제까지 병원에 폐인처럼 앉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불행하게도 희망은 있었다. 해림은 주신도가 남긴 말에 저가 가진 모든 패를 걸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근데, 정말 괜찮으신 거죠? 아니면 검사받고 가시겠어요?”
간호사가 걱정과 의심이 담긴 눈으로 해림을 쳐다봤다. 해림이 고개를 저었다.
가지고 온 거 하나 없어 나가는 몸은 가벼웠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해림은 병원 문을 열었고, 아침에 주신도가 나갔을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겨울바람이 싸늘하게 귓가를 스치는데 반해 햇볕은 따사로웠다.
해림이 몇 걸음 가다가 멈추고 볕 좋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연동에서 갇혀 보던 하늘과 별반 다를 것 없는데도 손을 대면 새파란 물이 손가락에 묻어날 듯 더 넓고 생생했다.
아, 하고 해림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토록 바랄 때는 잡지 못했던, 드디어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