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문을 열자 경쾌한 방울 소리가 났다. 카페 안은 쌀쌀한 바깥과 달리 훈훈한 공기가 돌고 있었다. 해림이 코트에 붙은 낙엽을 떼며 가볍게 고개를 까닥했다. 선반을 정리하던 직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해림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커피 맛이 좋아 며칠간 출석 도장을 찍었더니 고새 얼굴이 익은 모양이었다. 청년이 싱글벙글하며 커피 그라인더에 손을 올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 한 번, 맞으시죠?”
“네.”
단골은 이럴 때 좋았다.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 해림의 짧은 대답도 좋다고 청년이 해사하게 웃고는 손길을 분주하게 놀렸다. 진갈색 커피콩이 갈리는 소리, 고소하고도 씁쓰름한 커피 냄새가 카페를 가득 채웠다.
“커피 나왔습니다.”
청년이 낭랑하게 외쳤다. 해림이 창밖에 열없이 시선을 두고 있다가 픽업대로 걸어갔다. 종이 홀더를 두 겹 끼운 커피 컵이 선반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앙증맞은 곰 모양 쿠키도 같이 붙어 있었다.
“한 겹만 끼우면 손 시릴 거 같아서요. 요새 날씨가 좀 쌀쌀하더라고요. 쿠키는 서비스고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청년이 볼을 붉혔다. 해림이 흐릿하게 웃고는 고맙다며 커피를 들었다. 손에 물기만 안 묻어나면 되고, 단 것도 좋아하지 않아 둘 다 과한 친절이었다. 그럼에도 해림은 아무 말 없이 커피와 쿠키를 챙겼다.
“잘 먹을게요.”
“아, 쿠폰. 쿠폰 찍어 드릴게요.”
청년이 급하게 해림을 잡았다. 쿠폰은 직원이 챙기면 찍고, 깜박하면 그냥 넘기는 정도였다. 해 준다는데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지갑에서 종이를 꺼냈다. 청년이 도장 두 개를 꾹꾹 찍었다. 쿠폰을 뒤집어 뭔가를 열심히 쓰기도 한다.
“다음에 오시면 커피 한 잔 공짜로 드릴게요.”
“한 잔만 시켰는데.”
“아, 도장도 서비스에요.”
청년의 얼굴이 딸기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더 지적하면 뻥 터지게 생겨서 해림이 한발 물러났다. 단골손님 챙기는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돌아섰다. 또 오세요, 하고 발랄하게 외치는 소리가 문밖으로도 들렸다.
얼음이 가득한 커피를 마시기에는 찬 날씨였으나, 해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빨대를 물었다. 쭉 빨아들이자 들쩍지근한 시럽 맛이 씁쓰름한 커피 맛과 뒤섞여 올라왔다. 쓰려면 쓰고, 달려면 달 것이지 이도 저도 아닌 밋밋한 맛이었다. 그런데도 해림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덤덤하게 커피를 마셨다. 아직도 단 커피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데, 시럽을 안 넣으면 어딘지 모르게 심심했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 거리에 흩어진 낙엽을 흩날리며 해림의 옷자락에도 한 잎 붙이고 지나갔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하루가 다르게 두꺼워지고, 가로수들은 푸른 잎사귀를 붉고 노랗게 물들이며 계절의 흐름을 행인들에게 속삭였다. 뺨을 스치는 바람도 가을의 길목 마지막에 접어든 듯 싸늘함을 품었다.
바야흐로 겨울이 코앞이었다. 자유를 되찾았던 그 계절이, 1년여를 지나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해림은 전에 지내던 나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빚을 처리할 수 있는 기간이 기적적으로 남아 있었다. 발품을 팔며 승계가 안 되도록 해결하니 나니, 굳이 여기를 떠날 이유가 사라졌다. 어차피 전 회사에서도 해림을 자른 지 오래라 돌아가면 다시 직업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해야 했다.
그러느니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해림이 다른 이유는 모른 척하며 어영부영 눌러앉았다. 나름 외국 회사에서 경력이 있어 좋은 조건에 취직도 하고 근처에 방도 얻었다. 삶은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해도 될 만큼 평탄했다. 부채는 사라지고 월급은 달마다 들어왔으며, 힘든 일도 딱히 없었다. 다만 해림은 가끔씩, 불현듯 과거의 잔상이 떠오를 때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치거나, 심지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도 깊은 새벽이 올 때까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 날은 복잡한 상념이 물속의 뿌연 불순물처럼 일어 잠을 내쫓고 해림을 괴롭혔다.
과거는 시시때때로 해림의 일상에 불쑥 손을 뻗었다. 지나가다가 달콤한 주스를 보면, 어느 광고판에 붙은 홍콩의 야경을 보면, 길을 지나가는 행인들 중에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등이 널찍한 사람을 발견하면, 해림은 부지불식간에 저가 서 있는 곳이 한연동은 아닐까 착각에 빠졌다.
착각은 훅 끼쳐 온 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한연동은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 한번 용기 내어 차를 몰고 가봤으나, 까맣게 타 버린 산과 허물어진 건물만 남아 있었다. 그조차도 정문 밖에서 바라봤다. 출입 금지 팻말이 해림을 막았다.
거기서 만난 누구도 지금까지 우연이라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모두가 한여름 밤 꿈에서 만난 인물이었던 것처럼. 심지어 주신도마저 그랬다. 어쩌다 한 번쯤은 부딪칠 만도 한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잊을 때도 되지 않았나.
계절이 네 번을 지났는데도 아직 안 왔으면, 그쪽도 저를 잊은 거겠지.
누가 옆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휑한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주신도를 떠올릴 때마다 설명하기 애매한 저릿함이 가슴 한구석을 꾹 짓눌렀다.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흐려져야 하건만, 오래 지나도 도통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더해질수록 가시는 살갗을 깊숙이 헤집고 안으로 파고들며 상처를 새로 새겼다.
해림이 다 마신 커피를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손이 저절로 올라와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위치 추적기는 아직 빼지 않았다. 오늘 해야지, 내일은 없애야지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막상 병원에 가더라도 입구에서 망설이다가 돌아왔다. 혹시 저가 있는 곳을 몰라서 돌아오지 않는 걸까 봐 지레 겁먹고 남겨 뒀다.
보고 싶다.
사진 한 장 안 남겨 준 사람이었다. 끝까지 듣고 싶은 말 한마디 안 해 준 사람이 뭐가 그리 좋다고. 신 포도를 본 양 단점을 찾아 열거해도 마음은 머리를 따라가지 않았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어 해림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걸쳐 둔 코트를 드는데, 바닥으로 종이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카페에서 받은 쿠폰이었다.
해림이 허리를 굽혀 종이를 들었다. 뭔가를 열심히 쓰던 카페 직원의 모습이 기억났다. 핸드폰 번호였다. ‘심심하면 연락 주세요’라고 적힌 문장이 있었다.
“…….”
쿠폰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마음을 바꿔 테이블에 올려놨다. 청년은 어딘지 모르게 주신도를 닮았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주신도의 닮은 점 하나라도 찾아내는 게 습관 아닌 습관이라지만, 개중 청년은 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넓고 단단한 어깨나 굵직한 턱선이.
저번에는 보고서에 사인하는 팀장의 손을 물끄러미 보느라 저에게 건넨 말을 놓치기도 했다. 단단한 손가락과 두툼한 손날, 손등에 울퉁불퉁하게 솟은 핏줄과 관절, 펜을 쥔 손마디는 뭉툭하고 손톱도 위에 흰 부분이 없이 짧게 다듬었다. 손등 위에 흉터만 새겨지면 저가 아는 사람의 손과 몹시도 흡사했다.
아니다. 해림이 우울해지기 전에 고개를 저으며 상념의 방향을 바꾸었다. 청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카페를 찾기도 귀찮아서 그런다.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창을 활짝 열었다. 병원에서 빠져나왔던 그 날과 달리 하늘은 곧 빗방울을 흩뿌릴 듯 두꺼운 먹구름이 깔려 있었다.
창턱을 짚고 찬바람을 맞았다. 때마침 빗방울이 해림의 손끝에 부딪혔다. 곧 회색 콘크리트 건물들을 적시며 소낙비가 내렸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이만큼 입맛에 맞는 곳을 찾기는 어려워 해림이 같은 카페를 찾아갔다. 분명 청년이 일하는 시간임에도 다른 이가 카운터에 서 있었다. 카페 주인이었다. 내색하지 않고 해림이 주문을 마쳤다. 쿠폰은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꺼내지는 않았다.
“원래 일하던 분은 어디 가셨나요.”
“아, 동주요. 그 친구 요번에 사고 나서요. 다리가 부러졌대요.”
“사고요?”
“네. 어쩌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네요. 운동 신경이 그렇게 둔한 친구가 아닌데. 다리 다 나을 때까지는 못 나올 것 같아요. 동주도 아쉬워하더라고요.”
“그래요.”
이상한 일이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주신도와 닮았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던 청년이 크게 다쳤는데도 일말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마음은 고요했고, 그것참 안 됐군, 하는 형식적인 말만 잠깐 뇌리를 스쳤다. 거기에 감정은 한 톨도 없었다.
항상 커피를 기다리던 테이블에 앉았다. 청년은 카페 구석에 놓인 모니터를 항상 꺼 놓고 있었는데, 주인은 심심했던 모양인지 뉴스를 틀어 놨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야 항상 비슷했다. 사건·사고나 새로운 정책들이나, 해림이 보기엔 반복의 연속이었다.
무심하게 흘려듣다가, 조직 폭력배를 대거 검거했다는 소리에 해림이 화면을 흘긋 돌아봤다. 경찰청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최근 세력을 확장하던 조직을 와해시켰다는 이야기였다. 심층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몇 명이 붙들렸으며 어떤 불법 행위를 했는지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혹시 짧은 자료 화면에 아는 얼굴이라도 나올까, 해림이 유심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잡힌 이들은 목 아래만 보여 줘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못 알아봤을 터였다.
해림이 얼른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다 뒤져 봐도 어떤 이가 잡혔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유성 파’라는 단어만 삼류 인터넷 기사 말미에 나왔다. 주신도가 운영한 조직이 무슨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해림은 몰랐다. 다만, 이번에 검거된 우두머리의 이름이 주신도가 아니라는데 마음을 놓았다.
같은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몇 개나 훑어보다가, 이내 허탈함이 몰려와 핸드폰을 내려놨다. 뭘 이렇게 다급하게 기사를 찾아봤는지. 잡혔으면 면회 가서 얼굴이나 보려고 했는지.
마침 커피가 나왔다는 소리에 해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릇처럼 커피를 들고 한 모금 마셨는데,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바로 뱉어 낼 뻔했다. 커피가 너무 달았다.
“저, 혹시 여기 시럽 많이 넣으셨나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주인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서 손을 뻗었다. 다시 만들어 준다며 커피를 빼앗아 가듯 해림의 손에서 빼냈다.
“이전 손님이 주문한 걸 그대로 했네. 많이 달죠. 한 번만 넣어야 하는데 세 번이나 넣었어.”
“…….”
“미안해요. 내가 바로 다시 만들어 줄게요.”
해림의 굳은 얼굴을 보고 주인이 서둘러 커피를 버리려 했다. 해림이 손을 뻗어 막았다.
“괜찮습니다. 그냥 마실게요. 주세요.”
“그래도, 제 실수인데.”
“괜찮아요.”
거듭 괜찮다고 말을 한 뒤에야 주인이 커피를 돌려줬다. 마시지도 않을 커피, 가져가서 뭐에 쓰냐고 생각하면서도 해림은 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테이블에 가져가 올려다 놓고 그저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렇게 쳐다보면 이전 손님의 모습이 커피 위에 그려지기라도 할 것처럼.
카페는 한가했고, 손님은 해림 혼자였다. 주인이 TV를 보는 것도 지겨운지 픽업 대에 상체를 기대며 해림에게 말을 붙였다.
“그 손님이요. 엄청 잘생겼더라고요.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
“……어떻게 생겼어요?”
해림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하고 나니 우스운 질문이었다. 누굴 닮았냐는 물음도 아니고, 어떻게 생겼냐니. 한데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소녀처럼 까르륵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너무 잘생겨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어요. 키도 진짜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게, 어휴. 내가 한 20년만 젊었어도 번호 땄어.”
해림이 컵을 만지작거렸다. 세상에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 주신도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이전 손님이 우연처럼, 주신도와 똑같은 입맛을 가진 남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다독이는데도 가슴이 쿵쿵거리며 심하게 뛰었다. 직원이 사고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미동도 없던 심장이, 겨우 주신도와 비슷한 입맛과 생김새를 가졌다는 인물의 목격담을 듣고는 전력 질주를 한 듯 난리를 피웠다.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네, 그 손님. 그땐 사진이라도 찍어놔야지.”
무턱대고 저도 보여 달라고 매달릴 수 없는 주제에 해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알면서도 삼킨 커피가 설탕을 들이부은 것처럼 달았다. 어느 아침, 누가 권해서 한 모금 삼킨 그 커피와 비슷한 맛이라 차마 뱉어 버릴 수가 없었다.
* * * @@냥냥웅@@공금 갠소
종종 꿈을 꾼다. 꿈이란 건 자각하지 못한다. 경험했던 기억인지 아니면 상상이 만들어 낸 허구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불이 꺼진 영화관에 홀로 앉아, 음소거 된 영상을 지켜볼 뿐이다.
화면 속에서 주신도는 내내 다정하다. 제 이름을 부르듯 입술을 부드럽게 휘고, 잠에서 갓 깬 고양이처럼 제 뺨에 뺨을 살금살금 문지른다. 마디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이마와 귓바퀴 뒤로 넘겨 주고, 눈을 바라보고, 코끝을 마주 대고, 입을 맞춘다.
정해림, 하는 낮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데도 메아리처럼 기억 속에서 흐른다. 저는 제삼자처럼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엔딩 크레디트 없이 영상이 어둠에 잠기면 꿈에서 밀려 나왔다.
해림이 느리게 눈을 떴다. 몸이 으슬으슬하니 공기가 싸늘했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욕조에서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따뜻했던 물은 어느덧 제 온도를 잃고 해림의 체온도 차갑게 식히려 들었다.
“아.”
물이 다른 때보다 차가워 내려 봤더니 몸에 열이 올라 있었다. 다리 사이가 제멋대로 일어섰다. 무시하기엔 꿈속에서 봤던 얼굴과 예전에 뒤엉킨 기억이 선명했다. 부채질을 하면 했지 불씨를 꺼트리지는 못하게.
해림이 젖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슬그머니 팔을 아래로 내렸다. 차라리 빨리 해결하고 나가자며 잡고 흔들어도 별 느낌은 오지 않는다. 비참한 심정만 더해져 팔에서 힘을 풀고 물 위에 늘어졌다.
미적지근한 열감은 아직도 가려움처럼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손을 대고 긁어야 해소될 괴로움이었다. 다시금 손을 뻗었다. 눈을 감자 기억이 한층 선명해졌다. 과거의 기억이었다.
“읏…….”
입술을 물며 고개를 틀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추려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입술을 벌려 머금고 혀끝으로 목빗근을 짚어가다가 쇄골에 이를 세운다. 해림의 입에서 아, 하는 통증 어린 신음이 터질 때까지 잘근잘근 물다가, 두 손으로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양쪽 가슴을 움켜쥐고 손가락 사이로 솟은 젖꼭지에 혀끝을 댔다.
아래를 주무르는 걸로는 모자랐다. 손이 배를 타고 위로 올라왔다. 유두를 문지르고 손톱 끝으로 꾹 누르는 손길이 기억과 똑같았다. 빙글빙글 돌리거나, 주위의 오돌토돌한 유륜을 만지며 애태우다가 입술로 쏙 삼켜서 뜨뜻하고 말캉한 혀로 휘감았다. 쪽 빨아들이다가 잇새에 물면 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 손목으로 입을 막았다.
몸이 파도에 흔들리는 해초처럼 흐물흐물해질 적에, 뜨거운 손바닥으로 허벅지 안쪽을 매만지고, 손가락은 둔덕을 넘어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미끈하고 두꺼운 손가락이 꽉 다물린 바깥을 적셨다가 안쪽으로 슬금슬금 영역을 넓힌다. 미미한 불쾌감을 입맞춤으로 막고 손가락 마디까지 집어넣을 듯 깊숙이 들어와 헤집으면, 정의하기 어려운 열이 아랫배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손가락이 하나씩 늘어나며 안쪽이 빠듯하게 벌어지고, 더는 힘들어서 숨이 깔딱깔딱 넘어질 때쯤에 오금이 넓은 어깨에 닿는다. 다리에 한껏 벌어지고 허리 아래에 깃털을 가득 채운 베개가 깔린다. 환히 벌어진 치부가 너무나도 부끄러워 아래팔로 눈을 가리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직접 보라며 얄궂게도 속삭였다.
그러고는.
“……아읏.”
오랜 시간 건든 적 없어 손가락 하나만 들어가도 버거웠다. 해림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젖혔다. 머리카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이 수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꼭 감은 두 눈은 뜨지 않았고, 아랫입술은 윗니로 사리문 채 미간을 좁혔다. 젖은 어깨에 발개진 뺨을 문지르며 기억을 되짚었다.
제발 천천히 하라고 애원해도 상대는 봐주는 법이 없다. 한 번 끝까지 들어오면 그 후엔 모든 곳이 제 영역이라고 마구잡이로 날뛴다. 점막을 벌리고 속살을 누르고, 사방에서 꽉꽉 조여들면 망아지 고삐 잡고 당기듯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채찍을 휘갈기듯 난폭하게 밀고 들어왔다.
배 속이 엉망으로 휘저어지는 행위는 해도 해도 낯설었다. 겉살을 감싸는 아늑한 쾌감에만 익숙한 몸을 큰손에 쥐고 들어다가 푹푹 박아 대는데, 뱃가죽이 위로 덜그럭 솟으면 해림의 목에도 핏대가 솟고 도저히 참지 못한 신음이 정액처럼 길게도 솟구쳤다.
몇 번이나 절정이 찾아와 안에 든 게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벌벌 떨릴 지경이 다 되어서야 상대에게 끝이 다가온다. 품에 저를 꼬깃꼬깃 욱여넣고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건 아닐까 무서울 정도로 몰아친다.
아래에 들어찬 게 더 커져서 말뚝과 정처럼 몸에 틀어박히면, 끝내 한 몸처럼 포개져 귓가에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면, 더는 절정이 찾아와도 못 받아들이는 몸뚱이가 작은 소리 하나에도 버르르 떨리며 없는 쾌감을 쥐어짠다.
“……!”
해림이 욕조 벽을 쥐고 상체를 세웠다. 둥글게 말린 어깨에 바르르 떨렸다. 물이 파도처럼 흔들리며 욕조 밖으로 주르륵 흘러내리고, 거칠게 요동치던 수면 위로 뿌연 색이 흩어졌다.
해림이 감았던 눈을 떴다. 상상은 사라지고 식은 물과 자위의 잔재만 남았다. 위안이 끝날 때마다 으레 그렇지만, 이번엔 더욱 허탈하고 허무했다. 욕구를 처리했다고 홀가분하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가슴 한복판이 뚫린 듯한 허전함이 탈력감과 함께 달라붙었다.
해림이 희끗한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듯이 눈을 감았다. 열기가 사라진 몸이 추위를 감지했다. 온몸에 달라붙었던 체온도 기억 속에서만 따스했다. 현실은 여전히 차갑게 식은 물속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해림이 현관에 세워 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엔 차들이 빼곡하고 거리에는 색색의 우산을 들거나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지나갔다. 지하철로 들어가는 계단은 사람을 먹고 뱉기 바쁘고, 택시는 수시로 길가에 멈춰서 우산 접는 사람들을 싣고 날랐다.
몸이 피곤해 늑장을 부렸더니 다른 날보다 출근하는 시간이 늦었다. 평소엔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오곤 했다. 해림이 가방이 젖지 않게 어깨 끈을 단단히 쥐고 물웅덩이를 피했다. 밤새 비가 내렸더니 움푹 파인 구덩이에 물이 심심치 않게 고였다.
더 지체하다가는 지각할까 봐 해림이 걸음을 서둘렀다. 택시라도 잡아탈까 하는데, 직장까지 거리가 애매하다. 그냥 걸어가는 게 더 빠르겠다 싶어서 택시를 포기하고 우산을 곧추세웠다.
횡단보도에 서서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길 기다렸다. 빗소리를 뚫고 불이 바뀌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와 해림이 사람들과 발을 맞추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옆에 있던 사람이 시간에 쫓기는지 해림의 어깨를 밀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 탓에 우산이 갸우뚱거렸다.
사과를 외치며 그 사람은 멀리 달아나고, 해림만 빗물에 어깨가 젖었다. 툭툭 털고 해림이 우산을 바로 세우려던 그때였다. 저쪽 인파 속에서 머리 하나가 위로 올라와 있었다. 우산 아래로 너른 어깨와 등이 보였다. 검은 티가 가린 그 등을 해림이 홀린 듯이 쳐다봤다.
문득 시선을 느낀 듯이, 검은 우산을 든 사람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우산과 빗줄기가 가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나 옆모습에서 드러난 날렵한 콧대와 단단한 뺨이, 살짝 벌어진 입술 모양이 틀림없이 그 사람이었다.
인지하자마자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파도처럼 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밀려왔다. 그와 저 사이에 흘러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해림이 사람들을 헤치며 익숙한 뒷모습을 쫓아갔다. 어깨가 부딪쳐도 죄송하다는 인사 한번 못하고 시선을 뒷모습에 박았다.
가도 가도 멀어지기만 했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림을 못 본 것처럼. 해림이 잠깐만요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도, 다른 이들은 돌아봐도 그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제 목소리를 까맣게 잊은 듯이, 저와 함께 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 듯이.
속이 탔다. 이대로 놓치면 또 얼마나 기다리고 그리워해야 할지 무서웠다. 사람들 사이에서 넘어져도 좋으니 그 옷자락만이라도 잡고 싶었다.
“잠깐만요, 잠깐……!”
그 이름을 알면서도 큰 소리로 부르지 못했다. 우산을 놓쳤지만 주우러 갈 틈이 없었다. 물웅덩이를 밟는 것도 철퍽거리는 소리를 듣고 알았다. 바지와 구두가 흠뻑 젖어 들어도 해림은 발을 세우지 않았다. 넘어질 뻔한 다리를 가까스로 세우고 팔을 뻗었다.
드디어 잡았다.
남자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사장님,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아귀힘이 거셌는지, 남자가 우산을 뒤로 넘기며 해림을 돌아봤다.
“뭐야?”
위로 올라가려던 입술 끝이 아래로 추락했다. 입술이 벌어지고, 빗물이 적신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해림이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해림을 위아래로 보고는 이것 좀 놓으라며 팔을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남자는 주신도와 눈곱만큼도 닮지 않았다. 빗줄기가 만든 환상이었다.
남자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며 우산을 들고 멀어졌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길에 일어난 해프닝을 구경하듯이 해림을 흘긋거리다가, 그마저도 관심을 거두고 제 갈 길들을 걸었다.
해림 홀로 그 자리에 남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가 본 게 착각이란 걸 인정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눈앞에서, 혹은 등 뒤에서 주신도가 소리 없이 걸어와 다정하게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다.
아……, 하고 해림이 가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빗줄기가 부딪치는 곳마다 통증이 어렸다. 셔츠는 젖고 머리카락과 얼굴도 젖었다. 바짓단도 구두도 흙탕물로 더럽고 손끝과 입술은 파리하게 질렸다.
한데 그보다 속이 더 서늘하고 아팠다. 딱딱한 벽에 몸뚱이가 거세게 부딪친 듯이, 그래서 뼈가 부러지고 검붉게 피멍이 든 듯이 가슴이 저렸다. 사람들도 거리도 눈앞에서 지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주저앉지는 않았다. 서 있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아팠다. 그리움이 통증을 자아냈다. 거미줄처럼 줄줄이 뽑아내며 심장을 꽁꽁 감쌌다. 별것 아닌 얇은 실에 심장이 터져 버릴 듯이 뛰고, 아프고, 밉고, 슬프고 증오스럽고, 또.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다.
없는 사람의 환상을 모르는 이에게 뒤집어씌우고 달려올 만큼, 제발 그 사람이길 바라며 빗속을 헤맸듯이 그만큼. 지금 당장 볼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이 도로에 뛰어들어 제 몸을 부수는 거라도 기꺼이 할 만큼.
시간은 약이 되지 못했다. 둔해지지 않았다. 참을 수도 없었다. 괜찮다고 생각하던 일상을 살다가, 그리움은 어느 순간 사고처럼 가슴을 푹 찔렀다.
상대에겐 지나가는 바람처럼 의미 없을 기억이 저에게는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었다. 언제 피가 멎을지 기약 없는 상처였다. 바보처럼 전부를 내던져서 얻은 훈장과 교훈이었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줬다면, 이제 다시는 널 보지 않을 거라고 칼처럼 관계를 끊고 갔다면,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덜 아팠을까.
잔인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살갗을 찢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알았다.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아픔에 잇새로 침음이 흘렀다. 해림이 가슴을 움켜쥐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보고 싶은 마음이 지극해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그 인영이 어른거렸다. 그 체온을 껴안고, 목소리를 듣고, 미소를 보고, 손을 맞잡고 싶어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빗물이 눈동자를 적셨다. 속눈썹에 방울방울 매달렸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뺨 위로 빗물이 흘러내렸다. 입술과 턱을 타고, 지저분한 발치에 눈물처럼 흩어졌다.
@@냥냥웅@@공금 갠소
* * *
마음에 폭풍이 불어 닥쳐도 시간이 흐르면 잠잠해진다. 언제든 수면 아래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거센 파도를 일으켜 휩쓸어 가겠지만 일상은 잘도 흘러갔다.
보통 근처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하곤 하지만, 날이 좋을 때는 종종 공원을 뛰었다. 이어폰을 귀에 끼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마음을 뒤숭숭하게 헤집는 문제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좋았다.
숨이 턱에 닿을 만큼 뛰다가 해림이 멈칫했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온 노래가 익숙한 탓이었다. 어찌 잊으랴. 단어 하나, 음정 하나만 틀려도 있는 구박은 다 받았던 노래였다. 과거가 떠오를 만한 노래는 하나도 넣지 않았는데, 랜덤으로 넣다가 한 곡 우연히 들어간 성싶었다.
“후…….”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팔다리에서 기력이 쭉 빠졌다. 고작 노래 한 곡 들었다고 이 모양이다. 다음 순서로 넘기려다가 그냥 두었다. 대신 마른 목이나 축이려고 근처 간이 카페로 향했다. 공원 이용객들을 위한 테이크아웃 전용 카페였다.
심드렁하게 핸드폰을 두들기던 직원이 해림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은 해림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어서 오세요, 하며 인사하는데 두 눈에 반짝반짝 빛이 돌았다.
항상 마시는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데도 직원은 계속해서 해림을 흘끔거렸다. 어쩌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볼을 붉히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어려 보이는 외모나, 뺨을 붉히며 커피를 내리는 그 모습이 마치 홍콩에서 봤던 카페 직원을 떠올리게 한다.
“진짜 잘생기셨네요.”
커피를 건네며 직원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해림의 외모를 칭찬했다. 한두 번 들어 본 말도 아니고, 해림이 무심하게 아, 예. 하고 넘겼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오늘 저 운이 엄청 좋은가 봐요. 손님 바로 전에 온 분도 엄청 잘생겼었거든요.”
커피로 마른 목을 축이다가 해림이 직원을 돌아봤다. 직원이 턱을 괴고 시시덕거렸다.
혹시 그 손님이 커피에 시럽을 세 번 넣지 않았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질문을 커피와 함께 꿀꺽 삼켰다. 주신도와 비슷한 특징이 하나만이라도 툭 튀어나오면 어김없이 희망이 솟았다.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해림이 설마 하고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죽였다. 혹시나 싶지만 역시나 하는 결과는 지금껏 많이 겪었다. 굳이 또 실망에 휩싸이고 싶지는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이유는 아마 공원을 달려서일 거라고, 해림이 애써 방향을 돌리며 카페에서 멀리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마주 보는 자리에 벤치가 있는 쉼터였다.
공원은 고요했다.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도 쉼터에 앉아 가는 일이 없었다. 나무에서 들리는 새소리나 멀리서 아이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트리거나, 그런 소리 외에는 조용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더욱 크게 들렸다.
한연동에서 들었던 노래는 이미 지나갔다. 해림이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제목이 화면 위로 흘러갔다. 가사 단어 하나, 하나도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는 노래였다. 오기가 생겨서 운동을 하면서도 외웠더란다.
“…….”
잊으려고 노력했었나.
자신이 이렇게 집요하고 미련 많은 인간인 줄은 몰랐다. 주신도는 지우려고 할수록 지독하게 들러붙었다. 그 목소리, 미소, 눈동자, 입술, 체온, 제 몸을 누르던 묵직한 무게까지. 그래서 포기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고 먹히지 않을 위안을 했었다.
판단이 틀렸다. 잊히고도 남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미련과 그리움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주신도가 원망스러웠다. 밉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가망 없는 희망을 주지나 말지. 참고 인내하면 언젠가 만날 수도 있다고 덧없는 꿈을 품게 하고 떠났다.
만나면 멱살을 붙들고 화를 내고 싶었다. 왜 저를 거기에 두고 갔냐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도 작별 인사는 하고 가지 그랬느냐고,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지 않았겠냐고. 마음은 넘쳐흘러 자꾸만 고백이 튀어나오는데, 그 말조차 못 전하게 단 1분도 주지 않고 사라지는 게 어디 있냐고. 적어도 제 마음 털어 낼 시간은 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떻게든 이해도 해 보려 했다. 끝은 우울이었다. 이제는 정말 쓸모가 없어 버리고 간 건 아닐까, 절망에 가까운 결론도 내린 적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부끄럽게도 눈물이 솟아 얼른 다른 일에 신경을 쏟곤 했다.
노래가 끝났다. 새로운 노래는 해림이 익히 듣던 가사 없는 음률이었다.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해림이 반쯤 마신 커피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몸을 일으켰다가 멈칫했다. 해림에게 등을 돌리고 뛰어가는 사람이 시선을 빼앗았다. 이번에도 착각이겠지, 그 사람일 리가 없다고 머리로는 아는데 발은 홀린 듯이 뛰고 있었다. 그냥, 단순하게 확인만 하고 제 갈 길 가면 그만이라고 저를 위안했다.
“누군지 알고 쫓아가.”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해림의 걸음이 멎었다. 시선이 머물렀던 남자 위로 어른거렸던 환상은 어느덧 사라졌다. 신기루가 가시자 기억 속의 그 사람과는 하나도 닮지 않은 타인만 해림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여튼 우리 도련님, 눈도 나쁘고, 눈썰미도 없고.”
하지만 목소리는 지금껏 저가 만든 그 어떤 환상보다 사실에 가까웠다. 언제 다가왔는지, 인기척도 못 느꼈다. 머리 위로 지붕이 만든 그늘보다 짙은 그림자가 졌다. 원래 제자리가 거기였다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해림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푹 눌러쓴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손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어제 본 것처럼 낯익다.
“안녕.”
낯이 안 익을 수가 없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마저도 가끔 환각처럼 눈앞에도 어른거렸던 면상이었다. 해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몸은 딱딱하게 굳고, 눈은 주신도의 얼굴에 꽂혀 움직이질 않았다.
현실성이 없었다. 드디어 미쳐서 헛것을 보나 싶었다. 벤치 옆에 높게 솟은 나무에서 새가 지저귀고, 자전거가 따릉거리며 벨을 울리고 지나가는데도 마치 꿈결의 한 자락 같았다.
“도련님.”
주신도가 해림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딱, 하고 검지와 엄지를 부딪쳐 소리를 만들자 해림이 퍼뜩 놀라며 어깨를 움칫했다. 제가 본 걸 믿을 수 없는지 눈을 몇 번이고 깜박거렸다.
“정말……. 정말 맞아요?”
“응.”
이것도 망상일 것이다. 그리움이 만들어 낸 가짜가 이번엔 저를 미치게 만들려고 생생하게 달려드는 것일 테다. 해림이 속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거짓말.”
“진짜야.”
목소리를 듣고도 믿을 수가 없다. 주신도가 해림의 뺨을 제 손바닥으로 감쌌다. 따스한 체온과 익숙한 향이 꿈이 아님을 말했다.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해림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입술을 벌렸다 다물기만 반복하며 마주 앉은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주신도가 손을 떼기 싫은 듯이 계속 뺨을 어루만졌다. 해림이 고개를 틀며 커다란 손바닥에서 벗어났다.
“왜.”
튀어나오려는 질문이 너무 많았다. 어느 걸 먼저 꺼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해림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에 젖을 듯이 흔들렸다. 길고 빼곡한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내가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남았나요.”
보고 싶었다는 말이나, 그간 만나면 해 주려던 고백은 뒤로 밀려났다. 뻔뻔하게 찾아온 주신도에게 화가 났다. 예고라도 해 줬으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있다고 하면, 내 옆에 있을 거야?”
빚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다. 해림이 울컥해서 고개를 들었다. 주신도와 시선을 마주치고 그 이야긴 이제 끝났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해쓱해진 뺨이, 더 깊고 진해진 눈동자가 말문을 막았다.
“어떻게 해야 내 옆에 있을 건데.”
이번엔 주신도가 시선을 내렸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다소곳하게 손깍지를 끼고 고개를 숙였다. 어딘지 모르게 순종적인 태도였다. 해림이 내릴 판결만을 기다린다는 듯이.
“나는.”
해림이 입을 열자 깍지 낀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어깨도 경직됐다. 만약 여기서 싫다고, 이제 둘 사이엔 채무도 뭣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면 주신도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하나 해림은 이 기회를 쓸데없는 말로 흘리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희망의 끈을 멍청하게 붙들고 있던 시기가 지겨웠다.
“날 좋아해요?”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전세가 뒤집혀 역으로 자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을까 봐, 약자가 될까 봐 삼키고 또 삼켰었다.
“나를.”
“…….”
“날 사랑해?”
나진이 절 붙들고 강요하던 그 말을, 저가 다른 이에게 할 줄은 몰랐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애가 탔다.
“……나는.”
주신도 차례였다. 해림이 끈기 있게 기다렸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몰라 겁도 났다. 만약 원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시간만이 구원이라 믿고 지난하고 잔인한 세월을 또 보내야 할까.
“나는 너 없으면 죽을 거 같아.”
사랑한다는 대답은 아니었다. 주신도가 시선을 들었다. 눈동자가 불에 타듯이 붉었다. 그 눈만 보였다.
“매일 널 봤어. 안 보면 내가 뒈질 거 같아서. 숨이 막혀서.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난 그런 거 몰라. 받아 본 적도 없고 해 본 적도 없어. 그냥, 너 없이 못 산다는 것만 알아. 살 수가 없어. 네가 내 눈에 안 보이면 미칠 거 같아. 지금 너도 내가 만든 환상 같아.”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누르던 손가락이 풀어졌다. 손을 들고, 주춤거리다가 해림의 뺨에 살포시 갖다 댔다. 손끝이 일으키는 진동이 물 위에 퍼지는 파동처럼 뺨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나 좀 살려 줘, 정해림. 나 좀, 제발.”
약에 취한 사람이 이성을 잃고 떠드는 소리 같았다. 마약 중독자가 약을 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해림만이 절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줄 약인 것처럼 주신도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날, 제발.”
손이 내려왔다. 무릎에 닿은 해림의 손을 맞잡고 끌어당겼다. 손등 위에 이마가 닿았다. 병원에서 해림이 그랬던 것처럼, 핏물이 말라붙은 손을 쥐고 온 마음을 한 문장에 욱여넣고 간신히 뱉은 것처럼.
“버리지 마.”
절박했다.
손등을 물들인 체온이 소름을 일으켰다. 오싹한 희열이었다. 긴 기다림은 끝났고, 그리움 또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깨달음이었다. 아주, 매우 긴 시간을 이 말만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았다.
망설임은 있었다. 원망과 미움도 아직 숨 쉬고 있었다. 제가 모순적임을 알았다. 없으면 살 수 없다. 없이 살아야 하지만 불가능하다. 주신도의 부재는 숨 쉴 수 없는 고통과 맞먹었다. 싫어도 껴안고, 껴안아서 좋게 바꾸고 어떻게든 공존해야 했다.
저를 버리고 방치했다는 섭섭함이 멍청하게 넙죽 허락하지 말라고 대거리를 했다. 한 가지 색깔만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답은 애초에 하나였다. 다른 감정이 모든 걸 누를 만큼, 온 세상을 뒤덮을 만큼 커다랬다. 해림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럴게요.”
그 대답이 진심인지 확인할 것처럼 주신도가 해림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해림의 입술 끝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주신도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넘실거리며 촉촉한 물기가 배어났다. 그 안에 든 감정의 이름이 무언지 누구라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감정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주신도가 품은 마음이 훨씬 짙고 강렬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발목까지 오는 냇가처럼 얕고 가벼울 수도 있었다. 해림도 답은 몰랐다. 딱 떨어지는 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나눠야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었다. 왜 저를 두고 갔는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앞으로는 무엇을 할 건지. 시간은 많았고, 해림은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기로 했다. 서두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소를 보고 넋을 놓았던 주신도가, 두 손으로 해림의 손을 맞잡았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와락 껴안았다. 몸을 앞으로 숙이느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숨이 다 막히도록 껴안고서 목덜미에 코를 박고는 체향을 들이마셨다. 물 아래서 죽어 가다가 손을 잡고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폐부를 터트릴 듯이 깊숙이.
“날 구했으니 끝까지 책임져. 중간에 질려도 버리면 안 돼, 절대.”
그럴 일 없었다. 너울 같은 감정을 처음 알게 한 이를 내던질 리가. 뻔하고 지루한 대답 대신 해림이 주신도를 바특하게 껴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온기와 박동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주신도가 해림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코끝에 코끝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곧 입술이 마주 닿았다. 물길처럼 촉촉하게 물든 입술이 벌어지고 따스한 숨결이 오갔다.
결합보다 짙으면서도 동시에 첫 입맞춤처럼 수줍었다. 깊숙이 탐하려다가 그마저도 아까운 듯 입술을 입술로 문지르며 붙어 있었다. 응시하는 눈빛이 갈급하면서도 동시에 꿈속을 헤매듯 몽롱하고 황홀했다.
기억에 남은 입맞춤은 빛이 바란 사진처럼 차갑고 온기가 없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촉감이 싸늘한 입술을 덮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이었다. 입술 위로 꽃처럼 열이 피었다.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쳤던 시간이 봄을 맞이한 눈처럼 녹고, 휑하니 소슬바람이 불던 가슴 위로도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었다.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어떤 불안을 느끼든, 주신도가 옆에 있으면 금세 사라질 터였다.
마침내 제자리에 돌아왔다. 안온하고 안락한. 여기가 다시는 벗어나지 않을 제 둥지였다. 저가 머물 자리를 안 해림이 숨기지 않고 활짝 웃었다. 마주 닿은 입술에도 미소가 번져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
문이 벌컥 열렸다. 영수가 묵직한 아령을 들고 팔을 굽히다가 컨테이너 철문을 부술 듯이 연 주신도를 쳐다봤다. 검은 모자에 마스크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고 새벽에 나가더니 이제야 돌아왔다.
“일은 잘 처리하고 오셨습니까.”
“막혔어. 김윤중 이 새끼가 입을 안 열더라.”
“처리는요.”
“입 안 여는 새끼 살려 둬서 뭐 해.”
주신도가 모자를 벗고는 투덜거렸다. 영수가 아령을 내려놓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시큼털털한 홀아비 냄새가 좁은 방 안에 가득 차서 얼른 철창 달린 창문을 열었다.
전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숙소였다. 그래도 영수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낙후된 곳에서도 살아 봤다. 이 정도면 그래도 누워 잘 소파도 있고 냉장고도 놓을 수 있었다.
주신도가 소파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거의 밤을 꼴딱 새운 거나 다름없으니 피곤할 만했다. 아직 성치도 않은 몸을 끌며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것도 피로에 한 몫을 더할 테다.
“나 좀 잔다.”
“예. 주무십쇼. 저도 외출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 ……아, 영수야. 저번에 도끼 들고 설치던 그 미친 새끼 있지. 걔 대림동에 숨었다더라. 이름이 조병수던가.”
“잡을까요.”
“너 볼일 끝나면. 거기 애들은 다 칼 품고 다니니까 조심하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주신도가 담요를 뒤집어썼다. 다리가 워낙 길어 담요 아래로 발이 빠져나왔다. 영수가 속으로 혀를 차며 이불 하나를 소파 위로 휙 던졌다.
움직이기 전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가자고 영수가 컨테이너를 나와 담뱃갑을 꺼냈다. 끝에 불을 붙이고 피우는데, 담배 피울 여유도 생긴 걸 보니 예전보단 확실히 상황이 나아졌다 싶었다. 전엔 담배를 피우다가도 기척이 느껴지면 반 이상 남은 장초를 발밑에 던져 버리곤 했다.
“…….”
영수가 가만히 과거를 반추했다. 그날, 한연동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여기가 제 무덤이구나 각오도 했었다. 건물은 불길이 올라오지, 적들은 아무리 해치워도 개미 떼처럼 또 몰려오지, 사면이 초가요, 등 뒤가 절벽이었다.
다행히 그날이 명부에 찍힌 날은 아니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었지만 구사일생으로 건물을 탈출했다. 한데 주신도는 온데간데없고 가까스로 탈출한 직원들은 이미 산 아래로 줄행랑 중이었다. 낙동강에 오리알 신세가 따로 없었다.
구급차가 올라오면 잡혀가는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영수도 얼른 산을 내려갔다. 다친 곳이 많아 힘에 부치기는 했어도 어찌저찌 산 아래 있는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는 데는 성공했다. 부러진 팔뼈와 칼집 난 몸을 치료하고는 혹시 잔재한 이들이 쫓아올까 조용한 곳에 몸을 숨겼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영수가 숨은 곳에 주신도가 찾아왔다. 조직이 운영하는 안전 가옥도 아니었건만, 하여튼 사람 찾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였다.
놀람도 잠시, 주신도는 저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어제 죽은 시체가 관에서 튀어나와도 주신도보단 나을 성싶었다. 찢긴 뱃가죽은 붙다 말았고 몸은 거죽과 근육만 남아 도검처럼 날카롭게 날이 섰다. 남들이 보면 건장하다 할 테지만, 이전의 주신도를 아는 영수의 눈에는 비쩍 곯은 기아로 보였다.
「다시 시작하시게요?」
「아니.」
「어쩌시려고요.」
「복수는 해야지.」
「사업은 안 하고?」
「어. 저것들 조지고 손 뗄 거야.」
「이유를 물어봐도 됩니까.」
주신도는 대답하지 않고 송곳니를 보이며 씩 웃기만 했다. 눈은 악당답지 않게 총기가 돌고 웃음엔 자신감이 넘쳐 났다. 처음 주신도 하나 믿고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간 그때 보여 줬던 얼굴이었다. 사람에게 근거 없는 믿음과 신뢰를 안기는.
그 뒤로는 열심히 굴렀다. 전에 했던 일과 얼추 비슷했다. 누구를 잡아다가 협박하고 정보를 캐내고 수집하고. 주변이 죄다 적이라 몰래 활동하는 게 힘들기는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굽실거리던 이들은 죄다 냉대와 멸시를 일삼고 가끔은 동정하는 눈빛까지 보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도 힘든데다, 어쩔 때는 밀고도 당해 편히 잠드는 날이 드물었다.
주신도는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목표는 단 하나뿐이라는 듯이 묵묵하게 밀고 나갔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주신도의 등과 허리에 새로운 흉터가 다섯 개는 더 생기고, 미라처럼 팔과 등허리를 붕대로 칭칭 감고 살았다. 자는 중에 도끼를 든 미친놈 몇 명이 급습해 저와 주신도를 죽이려던 일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다사다난했다.
영수가 볼일을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열었는데, 주신도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손에 든 걸 황급히 숨기려 들었다. 손을 잘못 놀려 사진 한 장이 팔랑거리다가 영수의 발치에 닿았다. 거기 찍힌 인물이야 영수도 잘 알았다.
“뭘 이런 걸 숨기고 보십니까.”
영수가 허리를 굽혀 사진을 들었다. 몰래 찍은 사진인지 도련님이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셔츠에 목에는 파란 줄로 된 직원증을 걸고, 다른 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었다. 외모 하나는 타고나서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이 화보처럼 보인다.
“내놔.”
주신도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사진을 줬더니 책상 맨 아래 서랍에 고이 넣어 둔다. 그 안에 이미 도련님 사진이 한 뭉치는 숨어 있었다.
“그러지 말고 가서 상황을 알려 줘요. 아님 데려오든가.”
지지리 궁상이다. 제 성질대로 그냥 납치해서 옆에 두든가, 아니면 가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이라도 붙이든가. 고릿적 순정처럼 멀리서 지켜만 보고, 흥신소 직원이 찍어 준 사진만 품에 안고 있으면 도련님이 어디 그 마음 알아준다던.
“안 돼. 위험해.”
“도련님이 여잡니까.”
“정해림은 다치면 안 돼.”
상사병에 가슴앓이하다가 시름시름 죽어 가는 사람이 딱 주신도였다. 잠을 설치다가 숙소 밖에서 밤을 새우고 들어오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가끔 길을 걷다가 도련님과 비슷한 체구를 지닌 사람만 봐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면, 도련님 이름을 잇새로 내뱉다가 식은땀에 흠뻑 절어서 깨기도 했다. 가지 말라고, 버리지 말라고 잠꼬대처럼 흘리는 목소리가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가슴이 저릴 만큼 애절했다.
그런 밤이면, 주신도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도련님의 사진만 한참 들여다봤다. 사진 위를 더듬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저도 모르겠다는 양 한숨을 쉬고,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줄곧 도련님에게 박혀 있었다.
버리지도 못하고 품지도 못하니 사람이 미쳐 돌아가지. 옆에서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답답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지 그럽니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예전에 잘 놀던 형님은 어디 갔어요.”
“죽었어.”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영수도 지지 않았다.
“정 안 되겠으면 닮은 사람이라도 찾든가요. 제가 한 번 알아볼까요.”
주신도가 별소리 다 한다며 영수를 흘끔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정해림 하고 닮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많겠죠.”
“없어.”
있더라도 제 손으로 죽일 거라는 단호한 말투였다. 영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답이 없다. 예로부터 사랑에 눈먼 인간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그랬더란다. 멀리 볼 것도 없었다. 주신도가 그랬다.
* * *
일이 마무리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자료는 모을 만큼 모았고, 이제 적당한 사람에게 넘기기만 하면 되었다. 주신도는 유성 파 두목 목을 제 손으로 딴 후에 공권력의 힘을 빌리겠다고 잠시 유예 기간을 뒀다.
그랬던 주신도가 세상 험악한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깍지를 끼고 정면을 쳐다보는데,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거렸다. 아무리 변했다 한들 본성 어디 안 간다고, 옛날 실실거리다가 한순간에 돌아 사람 목을 따던 그때 주신도가 여태 남아 있는 성싶었다. 분명 기분 좋게 도련님 보고 온다며 나갔다가 왜 저 모양으로 돌아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분명 있다.
“왜요. 도련님이 형님 이제 싫대요?”
둘만 지내다 보니 영수도 이제는 제 간이 가끔 붓는 걸 느꼈다. 주신도가 눈빛을 희번덕 빛내다가 속을 진정시키듯 후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계단에서 굴렸는데 분이 안 풀려.”
“누구를요.”
“정해림이 아주 맹랑해. 1년도 안 지났는데 고새 딴 새끼하고 놀라 그러네.”
아하, 영수가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도련님 뒤를 밟다가 다른 놈하고 시시덕거리는 꼴을 봤고, 열이 받아서 그놈을 족치고 씩씩거리며 돌아온 것이다. 그간 도련님이 딴 사람과 엮이는 일 없이 얌전하게 지내서 안심하고 있다가 뒤통수 맞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늘 일 처리해야지. 그냥 놔뒀다가는 어떤 새끼가 또 꼬일지 몰라.”
“아…….”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던데.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더란다. 영수가 말리려 해도 주신도는 마음을 정한 듯 벌떡 일어났다. 그간 모아 둔 자료를 정리해 영수에게 넘기고 사람 처리할 때 쓰던 장갑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품에는 나이프를, 손아귀에는 쇠 파이프를 쥐었다. 아, 하고 영수가 이마를 짚었다.
“오늘 강성철 이 새끼 골프 치고 19홀 뛰지? 지암동에서.”
흔히 골프 끝나고 난잡하게 뒤풀이하는 일을 19홀이라고 표현했다. 유성 파 우두머리가 언제 무얼 하는지 주신도는 장소도 시간도 다 꿰고 있었다. 그게 주신도의 무서운 점이었다.
“영선이한테 연락 넣어 둬. 빚 한 번에 갚게 해 준다고.”
“아무리 그래도 좀 천천히…….”
“그리고 넌 그 USB, 내가 저번에 알려 준 그 인간한테 전해.”
자금 마련 방식, 자금책, 돈세탁, 불법 영업과 자잘한 폭력 및 살인 가담 증거 등, 한 번 감옥에 들어가면 몇십 년은 푹 썩을 증거가 USB에 가득 들어 있었다. 최근 유성 파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어 경찰 쪽과 단단히 틀어진 게 저희에겐 천운이었다. 이 기회에 아예 조직 폭력을 뿌리 뽑아 버리겠다고 경찰 쪽이 악으로 깡으로 똘똘 뭉쳤다.
주신도는 약아 빠졌다. 여우가 따로 없었다. 제 손 덜 더럽히고 복수하겠다고 능청스레 공권력에 숟가락을 얹었다. 자료를 모으느라 고생깨나 한 점을 보면 마냥 공으로 먹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저렇게 본격적이면 말려도 소용이 없다. 영수가 USB를 손에 쥐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시고요.”
“연락 없으면 몸 숨겨. 조심하고.”
“예.”
주신도가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문을 나섰다. 영수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어 숙소를 박차고 나갔다.
USB 전달은 무사히 했고, 이제 주신도만 돌아오면 계획한 일은 모두 끝난다. 초조함을 참을 수가 없어 다리를 덜덜 떨며 주신도를 기다렸다. 뛰쳐나가려는 걸 몇 번이나 참고서 기다린 끝에, 드디어 밤늦게 연락을 받았다. 영수와 주신도 둘이 알고 지내는 돌팔이 의사한테서였다. 주신도가 제집에 있으니 오라는 것이었다.
영수가 당장 그쪽으로 뛰어갔다. 설마 시체가 기다리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형님!”
침대에 주신도가 누워 있었다. 영수가 쿵쾅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주신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영수가 부축하자 간신히 침대맡에 기대앉았다.
“죽다 살아나셨소. 목숨도 질겨.”
옆에서 늙수레한 의사가 툴툴거렸다. 상체는 붕대와 거즈와 핏물로 성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야, 몸이 예전 같지 않나 봐.”
걸레짝 같은 몸뚱이를 하고도 주신도가 넉살을 떨었다. 영수가 그럼 언제까지 젊을 줄 알았느냐고 맞받아쳤다. 주신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가 찢긴 부위가 아픈지 인상을 구겼다.
“영수야. 우리 이제 다 끝났다.”
“강성철 멱 따셨습니까?”
“안 땄으면 안 끝났지.”
“정말요.”
“어.”
“다시 사업하실 생각은 없으시고요.”
“응.”
“왜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저번엔 대답 안 해 주셨잖아요.”
주신도가 음, 하며 목뒤를 쓱쓱 문질렀다. 영수가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안전하지가 않아서.”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다 터졌다. 주신도가 언제 몸의 안위를 따져가며 밑바닥 장사를 했던가. 남들 해치는 일도 저 다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돈만 개처럼 쫓던 양반이.
“형님 목숨이?”
“아니.”
누가 위험에 처할지 영수는 묻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주신도가 뼈와 살을 깎으면서 어떻게든 위험 요소를 없애려고 달려온 이유가 단 하나를 위해서란 것만 깨달았다. 그걸 알고도 영수는 억울하지 않았다. 놀랍기만 했다. 저가 알던 잔악무도한 주신도는, 저번에 그가 장난처럼 말했듯이 죽고 없어진 듯싶다.
“그럼 앞으로는 뭐 하실 계획입니까.”
“일단 정해림을 찾아가서.”
“저번처럼 납치하시게요?”
“아니.”
통증이 밀려왔는지 주신도가 뱃가죽에 손을 대며 미간을 구겼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손을 떼는데, 붕대에도 손바닥에도 핏물이 묻었다. 의사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며 붕대를 다시 갈았다. 붕대를 풀자 드러난 살갗엔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긁히고 붓고 터지고 멍들고. 멍석말이 당한 사람도 이보다는 나았다.
영수가 못 본 척 대화를 이었다.
“그럼요.”
“바하마 별장이나 갈까. 거기 사 두고 한 번도 못 갔거든.”
“돈은 어떻게 버시려고요. 저 보고 이제 가난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전용기는 못 사. 여기저기 돈 뿌리고 다니느라 잔고가 좀 비었어. 참, 퇴직금은 넉넉하게 넣었으니까 나중에 통장 확인해 봐.”
영수가 기다릴 것도 없이 주신도 눈앞에서 핸드폰으로 계좌를 확인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영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에 붙은 영의 개수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우리 왜 컨테이너에서 산 겁니까?”
불쑥 억울함이 솟았다. 이 정도면 경비 업체로 무장한 좋은 집에서 먹고 살 수도 있었다. 불침번 선다고 밤을 지새우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거기가 제일 안전하니까.”
“와, 이 돈이면…….”
영수가 손으로 입과 턱을 쓸어내렸다. 간간이 줄 잘못 선 거 같다는 후회가 모두 녹아 사라졌다. 다시 한번 구르라 하더라도 열심히 굴러 주겠다는 충성심이 절로 솟는 액수였다.
“만약에요, 형님.”
그래도 심술은 났다. 모든 일이 도련님 하나만을 위해 진행한 거라고 여기니 미처 몰랐던 유치한 질투심도 솟았다.
“도련님이 거부하면 어쩔 겁니까.”
그런 건 미처 예상 못 했는지 주신도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눈을 내리깔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대답이야 쉽게 추측 가능했다. 납치한다거나, 어디에 감금한다거나, 없는 빚이라도 만들어서 협박한다거나 뭐 그런 류가 아닐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빌 거야.”
“……네?”
황당해서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주신도가 시선을 들었다.
“받아 줄 때까지 붙어 있어야지.”
와, 하고 영수가 감탄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바뀌거나, 아니면 죽음을 겪고 난 후 바뀐다고들 한다. 두 개를 다 겪어서 그런지,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면 도련님이 대단한 걸 수도 있다. 절대 바뀌지 않을 인간을 이렇게 백팔십도로 뒤집어 놨으니. 이 절절한 마음을 부디 도련님이 받아 줘야 할 텐데.
“절대 못 놔.”
주신도가 히죽거리며 음산하게 뇌까렸다. 그래도 끈질긴 사냥개 본성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한번 물면 안 놔주는 습성이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맛도 봤으니 더더욱.
“자리 잡히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도련님하고 같이 놀러 오세요.”
“어.”
주신도가 눈을 끔벅이다가 졸린 듯이 손으로 문질렀다. 긴장이 풀렸는지, 아니면 진통제의 힘인지 시들시들하니 영 맥을 못 추린다. 이러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질라, 영수가 주신도를 편히 눕혔다.
“쉬세요.”
어쩌면 모든 걸 놓고 바다 건너 타지에서 편안히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닐 하나만을 위해 맹렬하게도 달려왔다. 손에 하나 쥔 것 없이 무작정 헤쳐 나가는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영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짐을 덜 시간이다. 영수가 침대에 누운 주신도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전등을 껐다.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밤이었다.
<데스 오어 파라다이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