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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6/21)

Epilogue

유리는 인출기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통장에 본 적 없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옆에는 퇴직금이라는 단순하고도 믿을 수 없는 단어 하나만 달랑 붙었다. 거액이었다. 목 좋은 곳에 가게 하나를 내고도 남을. 생전에 이런 액수를 제 손에 쥘 줄 꿈엔들 알았을까.

퇴직금을 넣어 줄 이는 단 한 명이었다. 유리는 원래 목적대로 적당한 현금을 뽑아 지갑에 넣고 넋 나간 정신을 되찾을 겸 근처 벤치에 앉았다. 매일 돈 아끼라고 잔소리를 퍼붓던 양반이 이리 큰 목돈을 제 통장에 넣었을 줄이야.

살아 있었구나.

유리가 먼 하늘을 응시했다. 저녁놀이 그날 한연동을 뒤덮은 불길처럼 불그스름했다.

불길이 하늘을 뚫고 높이도 올라갔던 그날, 한연동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지나가는 길마다 시체가 한둘씩은 쓰러져 있었다. 빨리 대피해서 망정이지 조금만 지체했다면 나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불타 죽었을지도 모른다.

두 조직이 충돌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건 나중에 들었다. 그 치들이 무슨 이유로 치고받고 죽이고 죽였는지 알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었다. 결과는 상관없이 갇힌 이들만 좋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한연동의 직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유리는 현명하게 병원을 찾아가 위치 추적기부터 제거했다. 혹시나 누가 와서 저를 잡아갈까 겁먹은 것도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차츰 괜찮아졌다. 이후로는 제법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고 일자리를 찾을 겸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오늘,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 양. 언젠가 만나면 남은 빚을 갚으라며 목줄 메서 끌고 갈 줄 알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간 청춘을 어두컴컴한 건물 구석에 박혀 날린 보상이라고 생각하자. 유리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미련은 오래 잡고 있을수록 멍청한 짓이다. 돈이 있는 한, 앞날은 밝았다.

유리는 가명을 버리고 본명을 되찾았다. 유리라는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본명이 더 어색할 때도 있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물장사의 유혹을 몇 번 받긴 했으나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간 배우고 싶었던 공부나 하자고 시험 합격을 목표로 삼았다. 술을 하도 많이 마셔 머리가 둔해지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힘들어도 재미도 있고 나름 할 만했다.

최근 자주 가는 카페 하나가 생겼다. 구석에 앉아 공부를 해도 눈치 주지 않는, 인심이 넉넉한 곳이었다. 초록색 화분을 갖다 놓은 테라스도 마음에 들고 커피 맛도 괜찮아 거의 매일 출석하다시피 들렀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두 시간 연속 쉬지 않고 몰아치자 머리가 슬슬 파업을 선언했다. 쉬는 시간을 줄 겸 목을 뒤로 젖히며 기지개를 켰다. 목도 한 바퀴 돌리는데, 순간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스쳐 유리가 크게 움찔했다.

설마, 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테라스 쪽을 살폈다. 사람들 시선이 잘 안 닿는 구석에서 낯익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주신도였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제 눈썰미를 피할 수야 없었다. 답지 않게 두꺼운 테의 안경을 쓰고 나름 변장이랍시고 스타일에도 변화를 줬지만 유리는 바로 알아챘다. 하긴, 저런 인물이 거적때기를 걸친다 한들 눈에 안 띌까. 외양만큼은 재수 없을 만큼 잘생겼다.

주신도의 입가엔 시종일관 시원스러운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게 너무나도 즐겁다는 듯이, 안경 너머 눈동자가 반짝반짝하고 잠시라도 다른 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세상에 눈앞에 있는 인물만 존재하는 듯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올곧게 꽂혀 있다. 눈빛이 얼마나 그윽한지, 앞에 있는 게 얼음이나 눈송이였으면 녹아도 벌써 녹았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유리 쪽에서 등만 보였다. 각도기로 잰 듯 허리를 곧게 세운 사람도 주신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까맣고 둥글고 아담한 머리통. 뒤통수만 봐도 거참 뉘 집 아들인지 잘생겼다는 감상이 튀어나오는 인물이었다. 주신도가 저런 눈을 하고 누구를 볼지는 뻔할 뻔 자였다.

주신도가 테이블에 팔을 쭉 펴고 그 위에 머리를 기울였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해림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해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신도가 웃으며 건넨 말에 손가락을 오므리며 마주 잡았다.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보며 손을 조몰락거리다가, 해림이 먼저 손을 거뒀다. 주신도가 입술을 삐죽이고 강아지처럼 눈만 배꼼 들어 해림을 쳐다봤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입술 모양을 봐도 모르겠다. 잠깐 말을 주고받다가 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신도가 고개를 돌리기에 유리가 이크, 두꺼운 책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가서 아는 척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을 것 같은데, 과거를 돌이켜 보기 싫어서 그런지 인사하기가 퍽 민망했다. 둘이 깨알 쏟는 순간을 방해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렸다가 책을 아래로 내렸다. 둘레둘레 고개를 돌리는데, 테라스와 카페 내부 어디에서도 둘을 찾을 수가 없었다. 후우, 하고 유리가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저렇게 됐구나.

저가 예측한 결말과는 다소 다르나 비극이 아니라 다행이다. 주신도는 악당이니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게 제 몫은 아니잖은가. 하늘이 계산해서 벌을 줄 거 주고, 상 받을 거면 받게 하겠지.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제 통장 불려 준 주신도를 죽어라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가 남들 삶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거 뭐 있겠느냐고 책을 펼쳤다. 도로 공부에 집중하려는데, 검은 앞치마를 두른 직원이 유리의 테이블로 다가와 새하얀 크림에 빨간 딸기가 올라간 케이크를 내려놨다. 주문한 적 없어서 유리가 고개를 들고 직원을 쳐다봤다.

“좀 전에 가신 손님이 이거 손님께 전해 주라고 하셨어요.”

“……아.”

그럼 그렇지. 저도 알아봤는데 그 귀신같은 양반이 절 못 봤을 리 없다. 그래도 와서 귀찮게 안 굴고 케이크 하나만 보낸 걸 보면 센스가 아주 나쁘지는 않다.

세상은 좁으니, 언젠가 다시 둘을 만날 수도 있겠지. 그날이 오면 굳이 모른 척하지 않고 가서 인사를 건넬 것이다. 잘 지냈느냐고, 덕분에 저도 잘 지낸다고.

언젠가 희연이 수줍게 속삭였던 그 말이 떠올랐다. 사장이 행복하길 바란다던. 당시엔 미쳤다고 여겼지만 이제 보니 딱히 신이 못 들어줄 바람은 아닌 것 같다. 신은 관대하니 악당인 주신도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공부나 하자.”

이미 지나간 사람들 곱씹어서 무엇하리. 유리가 이어폰을 귀에 걸며 케이크 모서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케이크가 다디달았다. 좀 전에 둘이 서로를 응시하던 눈빛을 맛으로 표현하면 이렇지 않을까,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각설, 날씨는 화창했고 케이크는 맛있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유리는 이내 둘에게 쏠렸던 관심을 접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주신도와 정해림에게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 것처럼, 유리에게도 달라진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데스 오어 파라다이스 3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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