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았던 눈을 떴다. 옆에 사람이 없었다. 주신도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에 묻은 팝콘 부스러기를 무심한 손길로 툭툭 털었다. 발치에는 반쯤 남은 빈 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쳐다봤다. 영화가 한창이었다. 개봉 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던 영화인데, 치고 부수고 터트리는 장면들이 처음처럼 흥미진진하지가 않았다. 주신도는 이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새벽이라 그런지 영화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혹시 화장실에 있을까 가 봤지만 귀신이 불쑥 튀어나올 듯이 음산한 그곳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매표소도, 팝콘을 파는 곳도, 홀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에도 정해림은 없었다. 영화가 지루해 나갔다거나, 잠깐 볼일을 보러 갔다는 핑계도 제 발로 걷어찬 셈이다.
더 뒤져 봤자 소용없기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번 툭툭 두드리자 지도에 붉은 점이 떴다. 여러 개는 산 너머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유독 한 점만 건물 안에서 깜박거렸다.
그토록 시간을 줬는데도 아직도 건물 안이다. 이렇게 느려 터져서 무슨 배짱으로 몰래 나갔는지. 주신도가 홀 가운데 우뚝 서서 뻐근한 목을 뒤로 젖혔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나직한 한숨이 샜다.
“우리 도련님은, 참.”
사람이 자는 틈을 타 소리 없이 나가다니. 발칙하고 매정하기 짝이 없다. 텅 빈 도화지처럼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을 하고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지 않았나. 아무리 돗자리 깔아 줬다지만 거참, 깜찍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별 지랄을 다 하지.”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 조명이 눈부셨다. 고개를 바로 하고 어슬렁어슬렁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에 도착했는데도 빨간불은 아직 건물에서 아주 멀어지지 않았다. 기사에게 차를 빼라고 연락을 하고 주신도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 대 피우고 갈 여유는 있었다.
빗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커튼이 바람결에 나부끼듯이 몰아쳤다. 구두코와 바짓단이 젖어 드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화구에서 주홍색 불이 어른거리며 하얀 담배 끝을 벌겋게 지졌다.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주신도가 먼 곳을 응시했다. 가슴 깊이 연기를 들이마시자 일견 사납던 눈 끝이 흐릿하니 풀어졌다.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연기가 아랫입술을 훑고는 위로 스멀스멀 올라갔다. 시선은 기억 속을 헤매듯 먼 곳에 박혀 있다가, 느릿느릿 핸드폰으로 돌아왔다.
“…….”
움직이는 점을 보다 보니 금방 필터만 남았다. 다 타들어 간 꽁초를 물웅덩이에 던져 넣었다. 젖어 드는 꽁초를 힐끔 보고 주신도가 차가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토끼몰이 할 시간이었다.
* * *
좁고 구불거리는 길 끄트머리에 주신도가 사는 집이 있었다. 달이 손에 닿는 동네,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고 밤이 되면 쥐가 지붕을 달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 욕설이 터져 나왔다.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얻어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혀만 쯧쯧 차거나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모친은 떠났고, 주신도는 아비와 단둘만 남았다. 갈 곳 잃은 폭력은 하나뿐인 아들에게 쏟아졌다. 밥을 거르는 건 예사고 운이 안 좋으면 하루 종일 꼼짝도 못 할 만큼 얻어맞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방이 더럽다고, 노름판에서 돈을 잃었다고, 혹은 그냥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등판에서 피멍이 가실 날 없게 터지고 굴렀다.
환경이 그런지라 주신도는 걸음마를 떼기 무섭게 소리 없이 걷는 법을 배웠다. 기척을 죽이고 숨소리를 낮추고,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지내는 방법이 몸에 익었다. 생존을 위한 습성이었다.
모진 폭력 속에서도 주신도는 무럭무럭 자랐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도드라졌을망정 유전 탓인지 키는 아름드리나무처럼 컸다. 손과 발도 새끼 곰처럼 넙데데하고 단단해서, 동네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인네들은 주신도를 두고 저게 못 먹어서 그렇지 잘 먹었으면 천하장사는 우습게 했을 거라고 시시덕거렸다.
아무리 주신도의 덩치가 또래보다 크다 한들 여전히 어린 나이였다.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하루는 주신도가 이러다 죽겠다 싶어 팔을 들어 막았는데, 그게 아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식칼을 찾는답시고 부엌으로 등을 돌렸다. 예전에도 모친을 두고 저년 뱃가죽을 다 찢어 버리겠다고 칼을 들고 설쳤던 적이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다고, 아비가 한눈을 판 틈을 타 얼른 집 밖으로 도망쳤다.
어느 골목인지도 몰랐다. 집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무작정 뛰어왔더니 큰길이 코앞이었다. 대로변으로 나가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기는 싫어 어두운 골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얼마나 허겁지겁 뛰쳐나왔는지 신발도 짝짝이었다.
허기와 통증을 참으려고 몸을 웅크리는데, 우연처럼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단정한 교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먼지라고는 티끌도 안 묻은 깨끗한 셔츠와 어두운 골목이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꺼지라고 욕을 해도 소년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이 골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꾀죄죄한 몰골도, 피투성이인 온몸도 소년에게는 보이지 않는 성 싶었다.
얼굴만 보면 더러운 건 다 피해 가며 산 도련님 같건만. 소년은 미간 한 번 구기지 않고 주신도의 손을 쥐었다. 하얗고 따스한 손에 감싸인 상처투성이 손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소년이 핏물이 말라붙은 손바닥 위에 빵과 우유와 반창고와 연고를 주섬주섬 놓았다. 온기가 손바닥 핏줄을 타고 팔목으로, 팔뚝과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가 전신으로 흩어졌다.
시선을 내렸다.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이 겨울 맞은 참새 꽁지깃처럼 빼곡하고 풍성했다. 그 아래 숨은 눈동자는 그 깊이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까맣고, 바다 같은 푸른빛이 얼핏 돌았다.
……곱다.
언젠가 동네 어른이 모친의 손을 쥐고 떠들던 소리였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꼭 아비 몰래 술을 입에 댔을 때처럼 머리가 어찔해서 멍하니 그 눈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유리병 끄트머리를 코앞에 댄 듯이 가슴이 쿵쾅거리며 질주했다. 입은 벌어졌지만 공기는 들어오지 않고, 등골과 뒤통수는 얼음을 쏟아부은 것처럼 오싹했다.
잡다한 것들을 안겨 주고, 그걸로 제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소년이 홀가분하게 뒤돌아섰다. 잔주름도 없는 하얀 셔츠를 보다가 주신도가 냅다 우유를 집어던졌다. 소년이 한 번만 더 저를 돌아봤으면 했다. 돌아오면, 그 손을 한 번만 더 쥐어 보고 그 온기를 느껴 보고 싶었다.
「비려, 씨발.」
우유가 벽에 부딪혀 폭탄처럼 하얗게 터졌다. 흰 물이 소년의 검은 바짓단을 적셨다. 아는 말이라고는 욕밖에 없어 그거라도 쏟아 냈다. 화가 나서라도 돌아볼 법한데, 소년은 잠깐 멈칫했다가 뒤통수만 머쓱하게 긁고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어떻게 불러 세워야 하는지 다른 방법은 몰랐다. 몸이 굳어 쫓아갈 수도 없었다.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에 소년이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골목에서 주신도는 한참을 허탈하게 서 있었다. 손만 묵묵하게 내려다보다 입술을 물었다. 손을 오므려 여남은 온기를 움켜쥐려 했으나 어느새 한기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잡을 걸 그랬다. 온기가 머무른 시간이 찰나였다. 너무나도 짧아서, 놓쳤다는 아쉬움에 가슴 한구석에 휑하니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돌아왔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세간은 뒤집히고 식칼은 바닥을 굴러다녔다.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칼에 한 군데는 찢겼겠구나 싶었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를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정신은 몽롱하고 손은 자꾸만 쥐였다, 펴졌다 하며 제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비척비척 걸어가 방에 올라갔다. 신발을 마루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이불 위에 철퍼덕 누웠다. 아까 본 소년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셔츠가 커서 헐렁한 목깃 사이로 설익은 복숭아처럼 뽀얀 목덜미가 보였다. 단추 하나를 풀러 셔츠가 훤히 벌어졌고, 그 사이로 곧은 쇄골과 가슴이 드러났다. 골 없이 밋밋한, 하지만 말랑말랑할 가슴과 더 아래로, 그 아래로.
목이 말랐다. 괜히 침을 삼키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손이 뜨거웠다. 없어진 온기가 다시금 위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리가 꼬이고 발가락도 오므라들었다.
욕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몸이 열병 앓듯이 뜨거웠다.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던 까만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통통한 입술, 그 안에 얼핏 보이던 하얗고 가지런한 이, 가느다란 목선과 둥그스름한 귓불, 작고 까만 귓구멍이 이어서 떠올랐다. 마주친 건 한순간이지만 각인처럼 새겨진 눈동자가 잡힐 듯이 생생했다.
다정한 목소리, 길고 하얗던 손가락, 제 손을 쥐었던 그 보드랍고 따스했던 손바닥이 열을 부채질했다. 으, 하며 주신도가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이불을 걷을 수가 없었다.
이불이 꿈질꿈질 움직였다. 밖으로 삐져나온 두 발도 꼼지락꼼지락 비벼졌다. 간간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움찔하며 이불이 위로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한참 후에 작은 머리통이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그 안이 답답하고 더웠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익고 이마는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와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주신도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봤다. 학생이 잡았던 그 손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나른하게 가라앉아서, 주신도가 한숨을 푸우우 내쉬었다. 일을 끝마치고 나니 허탈감이 몰려왔다. 부친이 저를 볼 때마다 하던 말도 천천히 뇌리를 스쳐 갔다.
미친 새끼가 별 지랄을 다 한다고.
* * *
@@냥냥웅@@공금 갠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애와 어른을 가리지 않는다. 먹고 살려면 뭐든 해야 했다. 일하기에 어린 나이인 주신도를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매일 열리는 노름판만이 그나마 어린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하고 몇 푼 얻어 가면, 그래도 그날은 굶지 않았다.
처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어깨 너머로 노름과 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누구를 호구로 잡고 누가 등을 처먹는지 관전했다. 제 눈에는 뻔히 보이는 속임수가 호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지, 매번 당하고 땅을 치고 울다가 어디서 쌈짓돈을 들고 와서 다시 도전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누구는 막내아들 수술비를 날리고, 누구는 차 키를 걸었다가 다음에는 집문서를 걸고 죄다 허공에 날렸다. 어른들이 호구가 차에 번개탄을 피우고 자살했더라, 는 말을 키득거리며 떠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란 게 그런 거였다. 술이 아니면 약을 해서라도 현실을 잊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신도에게 주어진 선택지도 둘 중 하나였다. 술과 약에 찌들어 돈 날리는 호구가 되느냐, 아니면 그들을 밟고 그 위에서 돈을 버는 인간이 되느냐.
주신도는 굶주림의 고통을 알았다. 돈의 무서움도 알았다. 한 푼에 목숨이 오가는 꼴을 봤고 두 푼에 자식과 마누라를 파는 막장을 봤다. 약의 부작용도 두 눈으로 봤다. 온몸을 긁으며 뒹구는 작태를, 눈알이 시뻘게져서 덜덜 떨다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죽어 가는 몰골을 많이도 지켜봤다.
그런 인간이 되기는 싫었다. 선택지가 둘이라면 차악을 택하리라. 약을 하느니 약을 파는 인간이 되는 게 나았다. 굶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동정 어린 빵 한 조각을 구걸하는 인간이 되는 건 최악이었다.
바닥에서 돈 버는 방법은 거기서 거기였다. 머리가 굵어지자 위험 부담이 높고 보수가 더 나은 일에 뛰어들었다. 마약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비실비실해서 곧 죽을 거 같은 놈들은 지하 조리실로, 발 빠르고 약은 놈들은 유통 쪽으로 분류되었다. 주신도는 당연하게도 유통 쪽이었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아이들은 좋은 운반책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시 처리하기도 쉽고 들킬 염려도 적었다. 책가방에 몇천만 원 상당의 마약을 들고 가도 뒤져 보는 경찰은 없었다. 하교 시간만 맞추면 배달도 쉬웠다.
조직이 운영하는 운반책은 미성년자가 대부분이었다. 개중 그나마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반장을 맡았다. 조직원에게 마약을 받으면 할당을 나누고 배달하는 장소를 알려 주는 역할이었다.
반장은 종종 아이들이 받아야 할 돈을 중간에서 떼어먹었다. 불만이 커도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반장이 할당량을 주지 않으면 한 푼도 못 받고 떨어져 나가야 했다. 다들 고만고만한 환경에 그날 일당이 하루 끼니를 결정해서, 반장의 권력은 무소불위였다.
폐차장은 갈 곳 없는 운반책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학교가 파하면―안 가는 아이들이 반 이상이었지만―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죽였다. 운이 좋으면 어른들 옆에서 배달 음식을 주워 먹고 운이 나쁘면 몇 대 얻어맞고 쫓겨났다. 그래도 비 피할 지붕과 몸 덮을 이불은 있었다.
“너는 화도 안 나냐? 이번에도 그 새끼가 반 이상을 떼어먹었잖아.”
“글쎄.”
주신도가 폐차 지붕 위에 앉아 히죽거리며 땅콩을 입에 던져 넣었다. 입을 오물거리며 쳐다보자 아이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가슴을 쿵쿵 쳐 댔다.
“저번에도 떼어먹어서 굶은 거 생각 안 나?”
“그랬지.”
그런 적도 있었지. 주신도가 남 일처럼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였다. 일은 일대로 하고 한 푼도 안 들어온 적도 있었다.
주신도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주신도보다 나이 많은 이들도 얌전히 있는데, 나서 봤자 저에게 이득 될 게 없었다.
“그나저나, 너 저번에 카메라 빌려준 거 언제 돌려줄 거야? 빨리 줘.”
아이가 툴툴거렸다. 아, 맞다, 하며 주신도가 마지막 땅콩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움칫하는 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어디 가냐고 부르는 소리는 이어폰을 귀에 끼며 무시했다.
적절한 시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달마다 조직원들이 찾아오는데, 운이 좋게 그 자리에 아이들이 모였다. 때는 이때였다. 주신도가 먼저 반장에게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가 나며 이목이 주신도에게 쏠렸다. 주신도가 손을 털며 방싯 웃었다.
“형님들, 우리 반장이요. 약 갖고 장난질 치던데요.”
그간 돈만 빼먹었으면 모를까, 약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조금씩 모아 뒷주머니로 팔고 다녔다. 반장이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서 아니라고 악악거렸다. 목숨이 걸렸으니 그만큼 반항할 만했다. 주신도는 어디서 개가 짖냐며 귓구멍만 성의 없이 후벼 팠다.
“제 눈으로 봤어요.”
조직원들이 흥미롭다는 듯이 쓰러진 반장과 주신도를 바라봤다. 뒤에 서 있던, 좀 더 지위가 높은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증거는?”
그런 것도 없이 무턱대고 덤볐다가는 역풍 맞기 십상이었다. 주신도가 현상해 놓은 사진을 상대편에게 넘겼다. 반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발뺌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사진이 나오자 입을 딱 다물었다. 벌그죽죽했던 낯빛이 시체처럼 푸르스름하게 질렸다.
괜히 숨죽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뒤통수 후려칠 때 이 정도 준비도 없으면 관에 들어가는 건 제 몸뚱이였다.
남자가 흥미롭게 사진을 쳐다봤다. 반장이 고객이 아닌 다른 쪽에 약을 넘기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반장이 덜덜 떨면서 아니라고, 저 새끼가 거짓말하는 거고 사진 속 사람은 고객이라고 꿱꿱거렸다. 덩치 둘이 반장이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양팔을 옭아맸다.
“이긴 놈이 맞는 말을 한 거겠지.”
남자가 턱 끝으로 신호를 보내자 덩치들이 반장을 놓았다. 어리둥절한 반장을 보고 남자가 웃었다. 턱으로 신호를 보내자 뒤에 있던 장정이 어깨에 이고 있던 쇠 파이프를 바닥에 내던졌다. 실적이 부실한 아이가 있으면 불러 세워 족치는 용이었다. 끝이 날카로워 푹 찌르면 죽창처럼 살을 관통했다. 저번에 주신도보다 어린 어떤 아이는 저 뾰족한 끝에 종아리가 꿰뚫렸었다.
“이긴 놈이 맞는 말을 한 거라니까?”
반장의 눈동자가 희번덕 빛났다.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쇠 파이프를 주워들었다. 쇠 파이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터트리며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어릴 적부터 맞고 피하고 때리는 건 이골이 났다. 주신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가볍게 피했다. 남자가 실실 웃는 순간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 역시 도박판에서 많이 본 광경이었다. 거기는 칼이었고, 여기는 그나마 봐줘서 쇠 파이프였다.
반장은 체구가 투실투실하고 한 번 가격하는 데 힘을 싣는 쪽이었다. 속도는 느려도 맞으면 타격이 제법 컸다. 적당히 피해 다니다 주신도가 반장의 오금을 정강이로 있는 힘껏 후려쳤다. 반장이 어억, 소릴 내며 나뒹굴었다. 쇠 파이프를 주워 후려 팰까 하다가, 발로 멀리 차 버리고 반장 위에 올라타 주먹을 들었다.
팔을 휘두르는 기세가 사람 하나 잡을 듯이 흉흉해 주변 사람들이 숨까지 죽이며 지켜봤다. 반장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체구는 반장보다 작았지만 주먹은 성인 주먹만 해서 한 대 맞을 때마다 단단한 쇳덩이로 두들기는 소리가 터졌다. 아무리 반장이 힘을 써도 주신도가 광대 쪽을 후려치면 입에서 핏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꽉 쥔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싱거운 한 판이었다. 승리가 명백했다. 지켜보던 남자가 흥미가 떨어진 듯이 손을 들었다. 주신도의 주먹도, 옷도, 그리고 아래 깔린 반장의 얼굴도 피범벅이었다. 쿨럭거리며 터진 핏물에 허연 조각이 섞여 있었다. 주신도가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쓱 닦고 상체를 세웠다.
“거짓말은 저 새끼가 했네.”
생사는 이렇게 갈렸다. 얼굴이 퉁퉁 부어 억 소리도 제대로 못 내던 반장은 그렇게 장정들의 손에 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켜보던 아이들은 벌벌 떨면서 혈흔이 낭자한 바닥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네가 오늘부터 반장 맡아. 이름이 뭐라고?”
“주신도요.”
주신도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도 감히 저가 반장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괜히 나섰다가 이전 반장 꼴이 날 수도 있음을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저런 일 안 당하게 잘하고. 응?”
“예에.”
주신도가 착한 아이처럼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대답했다. 남자가 흡족하게 웃으며 주신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장정들이 가고, 핏물과 아이들만 남은 공터에서 주신도가 머리를 툭툭 털었다. 환하게 지었던 미소는 사그라지고 없었다. 싸늘하게 굳은 입가와 날 선 눈매만 벗겨진 가면 아래 남았다.
“더럽게 만지고 지랄이야.”
그간 얌전히 지내던 이유가 있었다. 불만을 제기한다 한들, 폭력을 휘두른다 한들 반장의 자리는 제 것이 아니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이들이 채 갈 게 빤한데 굳이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적정한 때에 반장의 부정을 고하고, 증인들 앞에서 권력을 쟁취해야 정당하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계획이 먹혀서 다행이었다. 주신도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원주인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움찔하다가 두 손으로 공손히 카메라를 받았다. 소매로 피 묻은 카메라를 벅벅 닦다가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반장이라고 불러?”
“어.”
귀찮은 일이 늘어도 그만큼 들어오는 소득도 짭짤하다. 한 단계 오른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공터에서 멀어지는 주신도의 걸음이 깃털처럼 팔랑팔랑 가벼웠다.
조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도박판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은 어린애들 소꿉장난이었다. 정식 조직원은 아니더라도, 주먹깨나 쓰고 덩치가 좋아 이곳저곳 불려갔다. 귀찮아도 꼬박꼬박 가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혔다. 약을 거래하는 방법부터 배신자를 찾아내 처단하고 처리하는 방식,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람을 쥐어짤 수 있는지, 돈을 단번에 많이 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머릿속에 새겼다.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방법들이었다.
조직은 마약 밀매부터 시작해 돈이 된다는 건 거의 다 손에 쥐고 있었다. 사채도 그중 하나였다. 돈을 빌려주고 고금리로 다시 토해 내게 하는 거야, 어렸을 적부터 지겹게 봐서 하품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학업에 열중할 때, 주신도는 운반책에서 벗어나 사채에 발을 들였다. 직접 찾아가서 상 좀 뒤집어엎고,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푼돈이라도 뱉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양심은 원래부터 없었고 보고 자란 것도 누굴 겁박하는 거라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날도 연체가 밀릴 대로 밀린 누군가를 족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게, 주식에는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다. 사채까지 끼고 작전주에 들이부으니 이런 꼴이 나지. 작전을 세운 주포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어린애라는 걸 알면 길길이 날뛸 텐데, 알려 줄까.
주신도는 분수를 모르는 것들을 싫어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떵떵거리고, 협박을 하면 질질 울어 대는 것들을 경멸했다. 특히 고추 달린 것들이 눈물을 짜면 연민보다 살심에 가까운 짜증과 분노가 먼저 솟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에 사로잡혀 시간 낭비할 바에 1초라도 빨리 살 궁리를 먼저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정면에 보이는 유리문을 열었다. 사무실이라고 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사무실과 거리가 멀었다. 키 높은 조명과 뒤에 베이지색 커튼을 달아 놓은 조잡한 스테이지가 있었다. 카메라 셔터 음이 쉴 새 없이 찰칵찰칵 돌아갔다.
누가 들어와도 모를 정도로 다들 촬영에 몰입해 있었다. 소란 피울 거 없어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뭘 그렇게 찍어 대는지 궁금해 스테이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모델은 의자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졸린 듯 노곤하게 풀어진 눈매와 헤벌어진 입술이 일견 멍해 보인다. 햇볕을 받아 뺨은 뽀얗게 빛나고, 입술은 체리 사탕이라도 문지른 것처럼 불그스레하며 머리를 넘겨 드러난 이마는 야트막한 언덕처럼 봉긋하다. 콧대는 누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양 선이 곱고 동그란 코끝과 물방울 모양의 콧방울까지, 모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누군지 단숨에 알아봤다. 한 번 본 건 잘 잊지 않는 데다가, 상대는 앳된 티가 양 뺨과 갸름한 턱에 아직 남아 있었다.
황급히 볼 캡을 아래로 푹 내리눌렀다. 저쪽이 알아볼 리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었다. 여기에 볼일은 없으니 바로 나가면 그만일진대, 발바닥이 더운 여름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것처럼 바닥에 들러붙었다.
하는 수 없이 에어컨 바람이나 쐬고 가자고 마음을 바꿔 먹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기척을 죽여서 그런지, 촬영이 바쁜지 이쪽을 돌아보는 이는 다행히 없었다. 돌아본다 해도 대충 직원인 척 둘러대도 모를 듯했다.
옷을 권한 사람이 누구인지 안목 한번 더럽게 없었다. 잉크에 담갔다 뺀 듯 새빨간 옷이 하얀 피부와 따로 놀았다. 저런 색보다는 연한 파스텔톤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가령, 하양과 노랑을 적절하게 섞은 병아리색 같은.
카메라를 들고 설치는 인간의 지시에 따라 모델이 이리저리 자세를 바꿨다. 조명이 뜨거운지 뺨이 발그스레하다. 이 정도야 사람 고생시키는 축에도 들지 않건만, 반말로 모델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사진기사의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가기 전에 뒤집어 놓을까.
쓸데없는 데 힘들이지 말자는 게 신조거늘 날이 더우니 별생각을 다 한다. 피식 웃고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댔다.
촬영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제 가야지, 싶으면 어김없이 모델이 자세를 바꿨다.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게 어울릴 법한 길고 곧은 손가락, 길쭉한 다리, 접어 올린 바지 밖으로 드러난 발목은 늘씬하고 복사뼈는 둥근 데다 뺨처럼 분홍빛이 돌았다.
뉘 집 도련님인지 거참 지나치게 잘생겼네. 감탄을 하며 보는데, 사진 기사가 팔을 들고 쉬는 시간을 외쳤다. 다들 한숨 돌리며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를 늘어트렸다. 모델도 그랬다. 입술을 금붕어처럼 툭 내밀고 후우, 길게 단 숨을 쉬었다.
더 있으면 안 되는데, 들키기 전에 나가는 게 좋을 텐데. 이대로 소리 죽여 나가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사라질 수 있었다.
한데 시선은 모델에게서 떨어지지가 않고, 다리도 멋대로 문이 아닌 반대편으로 향했다. 빈손으로 다가가면 적당히 둘러댈 핑곗거리가 없어 테이블에 있는 커피를 주워 들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어린 날 골목에서 줬던 빵 한 조각에 보답하고자 함이었다.
기억할까.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자 앞에 선 것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알아채길 바라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다.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알아봤으면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이것 참 우연이라고 웃고 떠들 수 있게.
손부채질로 열을 식히고 있는 남자에게 불쑥 컵을 내밀었다. 남자가 커피를 보다가 팔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 의심도 깃들지 않은 말간 눈동자. 쿵, 쿵 하고 북을 내려치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고맙습니다.”
남자가 커피를 받아들었다. 손끝이 스쳤다. 에어컨 바람이 겨울날처럼 싸늘한데 손끝의 온기는 그날보다 뜨거웠다. 커피를 건네고 재빨리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북 치는 소리가 여전히 시끄러웠다.
“아.”
컵 밖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아래로 투두둑 떨어졌다. 하필이면 헐렁한 니트 안으로 길게 궤적을 그리며 들어갔다. 남자가 검지를 니트의 목 부근에 걸고 살짝 잡아당겼다. 고개를 숙이자 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 몇 올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니트 사이가 벌어지며 속살이 언뜻 드러났다. 판판한 가슴에서 젖꼭지만 유독 볼록 튀어나왔다. 풍만한 가슴도 아닌데, 시선이 절로 그리 꽂혔다.
조금만 더.
남자는 이내 니트를 손에서 놓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짙은 갈색 액체가 투명한 빨대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꿀꺽, 하고 볼록한 목울대가 위아래로 울렁였다. 제 목구멍을 더 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
내려다보는 시선을 이제야 느꼈는지, 남자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의아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주신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갈 시간이었다. 엑스트라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해림아!”
때마침, 저쪽에서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누군가가 남자를 불렀다. 남자가 커피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틈을 타 한 걸음 물러났다. 남자가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는 걸 흘끔 보고, 어수선한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해림.
이름도 남자와 잘 어울렸다. 차갑고 서늘한, 깊은 심해를 연상케 했다. 해림. 입천장과 혓바닥에 맴도는 이름을 곱씹었다.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듯한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사무실은 다른 층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져 다들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빚을 진 사람만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구경꾼들이 많아야 효과가 좋은데, 아쉽게 되었다.
“사장님, 돈을 빌릴 때는 그렇게 사정하더니 입 쓱 닦으면 어떡하십니까. 우리도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줄줄이 딸렸는데 사장님이 돈을 안 주니 다들 손가락만 빨고 있잖아요. 사장님 가족들도 똑같이 굶어 봐야 아나.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이 굶으면 얼마나 슬플 거야. 에이, 그런 건 사장님도 싫겠지.”
처음에는 어린놈이라고 얕보기에 가볍게 몇 번 손봐 줬더니 금세 꼬리를 내렸다. 강한 놈에게 약하고 약한 놈에게 강한 인간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 별로 안 좋아하는 부류라 더 손봐 줄까 하다가, 묘하게 기분이 들떠 있어 적절한 선에서 물러났다.
일을 마치고 나와 마른 목을 축일 겸 카페에 들렀다. 버릇처럼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를 시키려는데, 이상하게도 아까 본 커피 이름에 눈이 꽂혔다. 종이 홀더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라고 적혀 있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시럽 없이.”
충동적으로 새로운 메뉴를 주문했다. 수금한 돈을 확인하는 동안 음료가 나왔다. 반투명한 갈색 액체, 컵에 가득 담긴 얼음이 그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밖으로 나와 한 모금 마셨다. 혀 위에 커피가 닿는 순간, 오만상을 찌푸리고 가로수에 퉷, 뱉어 냈다. 이딴 쓰레기 같은 것도 음료라고 잘도 마셔 대다니, 생긴 건 멀쩡한데 입맛은 돌아 버린 게 분명했다.
“별…….”
그래도 산 걸 내다 버리긴 아까워 카페로 돌아가 시럽을 왕창 부었다. 세 번 정도 붓자 그제야 사람이 마실 만한 맛이 됐다.
그렇게나 시럽을 부어도 여전히 쓴맛이 남은 커피를 삼키자 좀 전에 본 그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햇볕 아래서 나른한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던, 새하얀 피부가 어딘지 모르게 눈처럼 차가운 그 사람이.
다시 만날 날이 올까.
……그럴 리가 없지.
두 번이면 넘치는 우연이다. 세 번은 기대하지 않았다. 답지 않은 감상이 우스워 주신도가 피식 웃었다. 자조 섞인 소리였다.
커피를 남김없이 마시고 카페에서 나왔다. 고개를 돌려 아까 그 건물을 한 번 올려다봤지만, 이내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 * *
주신도는 이곳저곳 다양하게도 불려갔다. 여러모로 쓸모 있다는 구실이 뒤이었지만 정식 조직원은 되지 않았다. 주신도도, 그쪽도 간 보고 있었다. 잘했다며 칭찬은 해도 조직원으로 들이기엔 너무 어리다고 봤는지, 아니면 위험하다고 봤는지 자잘한 일로만 부려 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만 주면 뭐든 상관없었다. 이렇게 살다가 더 벌고 싶을 때 정식으로 들어가도 되는 거고, 아니면 길을 틀어도 괜찮았다.
슬슬 진로를 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쯤 조직이 와해되는 큰 사건이 터졌다. 내부가 두 파로 갈라져 옥신각신 드잡이질하고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시기였다. 눈을 감았다 뜨면 오늘은 몇 명이 실종됐네, 몇 명이 분쇄기에 갈렸네 하는 흉흉한 소문이 들렸다. 머리 위에서 저승사자들이 낫을 들고 칼춤을 추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목이 댕강댕강 잘려 나갔다.
주신도는 쇠 비린내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질기게 살아남았다. 나름 탄탄하다고 여긴 조직은 오래되어 좀먹은 성벽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가까스로 남은 조직원들은 각자 살길을 모색하며 흩어지거나 저들끼리 뭉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너도 들어오지 그러냐.”
나름 친하게 지내던 조직원이 권했다. 주신도가 실실 웃으며 거절했다. 신흥 조직은 위험도도 높은 데다 자칫 잘못하면 덤터기는 덤터기대로 쓰고 버려지기 일쑤였다.
그럴 바엔 홀로 움직이는 게 낫다. 밑천은 없지만 언제는 돈을 쥐고 살았던. 지금껏 배운 게 다 돈 불리고 버는 일이었다. 이제 실전에 뛰어들 차례였다.
고금리 사채로 목돈을 만들고, 마약을 사서 되팔며 사업을 키웠다. 돈이 모이니 자연스레 사람도 모였다. 조직을 만들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그만큼 부리는 머릿수가 늘었다. 유도 국가 대표를 꿈꿨지만 부상으로 포기한 영수와, 그 바닥에서 반푼이라며 인정 못 받던 화교인 인오와도 인연이 생겼다. 완전히 믿지는 못해도 쓰임새가 높은 이들이었다.
조직이 커갈수록 위험도도 높아졌다.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칼에 찔리고 베이고, 몸에 상처와 흉터가 훈장처럼 늘어났다. 그 수가 늘어날수록 사업체도 부풀었다. 돈이 되는 건 사람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팔았더니 수익은 어느새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증가해 있었다. 관리하는 클럽 수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었다.
항상 절벽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느낌은 받았다. 그래도 돌아갈 길은 없었다. 새로운 길도 보이지 않았다. 저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고 선택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둘뿐이었다.
추락하든가, 계속 가든가.
추위와 굶주림에선 완전히 벗어났다. 가난은 더 이상 주신도를 괴롭히지 못했다. 한데 원하던 이상을 손에 이상을 쥐고 쥐어도 속은 채워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허기가 가끔씩 주신도에게 불면의 밤을 선사했다.
무료했다. 뭘 해도 흥미가 일지 않았다. 권태만이 가는 길에 모난 자갈처럼 깔려 있었다. 기계의 부속품이 된 기분이었다.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실행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기름칠을 하지 않아 녹이 슬어도 삐걱거리며 돌아가야만 하는.
“형님. 좀 쉬지 그러십니까.”
하루는 영수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시답잖은 소리라 대꾸하기도 귀찮아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뻑뻑한 눈을 꾹꾹 누르며 도로 서류에 집중했다.
“너무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여행도 다녀오시고요.”
“형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지. 넌 가끔 눈 뜨고 헛소리하더라. 이 중요한 시기에 놀라고. 뇌에서 근육이 덜 빠졌나.”
인오가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빈정거렸다. 영수가 깔끔하게 무시했다.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 자리를 만들어도 서로 개와 원숭이처럼 으르렁거리다가 파투를 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알아서들 하겠지 하고 내버려 뒀다.
“홍콩 쪽은?”
“잘돼 갑니다. 아직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어요. 근데 형님은 나 보고 그런 말밖에 할 게 없소. 좀 더 다정한 말 좀 해 줘요. 보고 싶었다, 애썼다, 그런 거. 내가 사랑한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잖아.”
“미친.”
영수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욕을 했다. 인오가 툴툴거리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형님한테 언제 예쁘다는 말을 들어 볼꼬. 칭찬이 너무 비싸다, 우리 형님은.”
서운한지 입을 삐죽거리다가 인오가 밖으로 나갔다. 영수가 혐오스러운 거 보듯이 온 얼굴을 구겼다. 그러다가 일에 집중하는 게 낫다 싶었는지 옆구리에 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이번에 장 마담이 데려온 사람입니다. 한번 보세요.”
사채도 푼돈 빌려주고 받는 일을 넘어, 이제는 고객 대부분이 큰손들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어떤 호구를 물어왔을까 궁금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영수가 준 봉투를 열었다. 눈 아래와 입술 옆에 고랑이 깊이 팬 중년 남성 사진과 서류가 함께 들어 있었다. 묘하게 낯이 익었다.
“신원 무역 회사 사장입니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데, 돈 융통이 잘 안 돼서 곧 무너질 거 같습니다. 최근엔 도박에 손을 대서 그나마 있는 돈도 다 털리고 있고요. 별로 득 될 거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형님이 한번 보셔야 할 거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얼마나 빌려 달래.”
“5억이요. 규모는 작습니다.”
다 죽어 가는 노인네 내장을 닥닥 긁어 팔아도 회수하지 못할 거,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나. 돈세탁할 유령 회사라면 굳이 죽어 가는 회사 처먹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많이 있었다.
흥미가 사라져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종이가 흐트러지며 그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이 삐죽 튀어나왔다. 못 본 사진이라 손을 뻗었다. 영수가 참, 하며 덧붙였다.
“사장한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해외에 있고, 생긴 건 괜찮은데 큰돈이 될 거 같진 않아요. 장 마담한테 거절한다고 알릴까요.”
손에 사진의 모서리가 잡혔다. 가리고 있는 종이를 치우자 그 안에 든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사진 위에서 멈칫했다.
“형님?”
천천히 사진을 들어 올렸다. 시간이 비껴간 듯 과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남자가 사진 속에 있었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햇볕을 받는 모습이, 언젠가 봤던 장면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하하, 하고 너털웃음이 터졌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입술 끄트머리가 멋대로 위로 올라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는 소리가 아이처럼 해맑아서 영수가 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님, 하고 이번에는 걱정하는 어조로 불렀다. 일에 몰두하다가 드디어 머리가 돌아 버린 게 아닐까. 당장이라도 닥터를 부를 듯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었다.
“와, 진짜.”
그러거나 말거나, 주신도는 사진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정도면 신이 농간질을 쳐도 도가 지나쳤다.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홀린 듯이 사진만 보다가 주신도가 고개를 들었다.
“영수야.”
두 번까지는 우연이라 봐도, 세 번째는 아니었다. 만나면 이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장난질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겠지. 단칼에 결단을 내렸다. 주신도가 내려가지 않는 입꼬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쓸어내렸다.
“손님이 왕인데 우리가 감히 어떻게 거절을 하겠냐. 원하는 대로 빌려 드려.”
“원금 회수도 힘들 건데요.”
영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투였다. 주신도도 본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힘껏 쥐어짜더라도 득보다 실이 많을 장사였다. 그런데도 해야 했다. 잡아야 했다. 놓치면 다시는 못 볼 거라는, 초조함에 가까운 감이 강하게 들었다.
“남은 거 담보 다 걸고, 집 팔고 장기 팔고 자식 팔면 얼추 손해는 안 봐. 대신 조건 걸어. 아들,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거절하면 장 마담한테 판 더 크게 벌이라고 해.”
“……아는 분이십니까?”
망설이다가 영수가 물었다. 글쎄, 주신도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봐야지.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사진을 높이 들었다. 사진 속 남자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 평화를 깨트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감이 부풀어 가슴이 쿵쿵거리며 시끄럽게 뛰었다. 철컹거리며 도로 매끄럽게 굴러가는 기계음과도 닮은 소리였다.
폐에 바람 든 사람처럼 종잡을 수 없이 웃음을 흘리는 주신도를 영수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 시선을 알면서도 새는 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주신도가 키득거리며 내려가지 않는 입꼬리를 사진으로 가렸다.
자살을 택할 줄은 몰랐는데. 나약하긴 해도 그리 쉽게 목숨을 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차피 뜯어 낼 수 있는 건 거의 뜯어 낸 터라 상대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해림을 만날 자연스러운 핑곗거리를 주고 간 건만 칭찬할 거리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카만 넥타이를 목에 맸다. 인생에서 이렇게 설렌 적이 있을까.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과 약속이라도 잡은 듯이 가슴이 가볍게 뛰고 입술은 내내 손톱달처럼 휘어 있었다. 남의 장례식에 가는데 흥얼거리는 건 실례라지만, 새어 나오는 가락을 막기가 어려웠다.
늦은 새벽이라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빚지고 죽은 양반, 찾아올 사람이 빚쟁이밖에 더 있으랴. 이름을 확인하고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남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신도를 바라봤다.
아.
시선이 부딪치자 시계가 거꾸로 돌아갔다. 골목에서 봤던 눈동자가, 커피를 건네며 마주쳤던 눈동자가 그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오늘 본 눈동자도 그때처럼 깊은 바닷속이었다.
드디어.
과거를 현재로 불러일으키는 눈동자에 숨통이 턱 하니 막혔다. 넥타이에 손을 걸어 풀어내며 구두를 벗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머리카락이 삐쭉 서고 배 속에 흥분이 들끓었다. 허기와도 비슷했다. 그날처럼 배가 고팠다. 속을 채울 건 빵이나 우유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강렬한 맛을 원했다. 교복 깃 너머로 보였던 목덜미나 니트 사이로 보였던 쇄골처럼, 핥으면 단맛이 날 살결 같은 게.
“아이고, 이분이 아드님이시구나. 사진으로만 봤지 이렇게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네. 고생이 많으십니다.”
주절주절 떠들어 대며 그 손을 맞잡았다. 제 손안에 쏙 들어간 손이 하얗고 작았다. 잡질 못해서 안달을 냈던 그 온기를 돌고 돌아 이제야 잡았다. 뿌듯하게 감기는 체온에 목구멍까지 희열이 차올랐다.
더는 우유를 던져 관심을 끌려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엑스트라도 아니었다. 초라한 모습은 없었다. 당당하게 그 인생에 발을 들이고 손을 넣고 휘저을 수 있었다.
혹여 해림이 손을 잡아 뺄라 주신도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우윳빛 손등이 어두운 손그림자에 가려졌다. 주신도가 사람 좋은 웃음 꾸며 내며 그 손을 가뒀다.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