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옆구리가 저릿하니 피가 통하지 않았다. 묵직한 짐짝이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성싶었다. 뒤척여도 좁은 상자 안에 갇힌 듯이 몸이 굳어 해림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끔벅이자 막 맨 끝자리 숫자가 바뀐 시계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픈 옆구리부터 손을 뻗어 더듬었다. 딱딱하고 뜨끈뜨끈한 게 그 위에 올라가 있다. 고개를 비틀어 내려보니 남의 허벅지가 꼭 정글 속 몸통 두꺼운 나무뿌리처럼 제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빼내려고 해도 감은 힘이 어찌나 센지, 자고 일어난 몸으로는 영 이겨 내기가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등 뒤를 다 차지하고 누운 이가 더욱 바투 붙어왔다. 엉덩이 아래에도 제 옆구리를 감싼 허벅지처럼 딱딱하고 뜨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해림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간신히 상체를 틀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은 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침이라 턱에 삐쭉삐쭉 수염이 돋았다. 푸르스름한 턱을 보다가 그 뺨에 손을 댔다. 눈꺼풀 안에서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잠투정 부리듯이 목을 그릉그릉 울리며 해림의 목덜미에 이마를 파묻었다. 팔뚝에도 힘을 줘 빈틈없이 등과 가슴을 붙이고 조금만 더, 하고 낮게 읊조린다.
온몸을 이불처럼 덮은 체온이 싫지만은 않았다. 물기 없이 발등을 뭉근하게 문지르는 발끝도, 귓불 아래를 간질이는 머리카락도 해림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없던 게으름도 고개를 들고 더 누워 있으라고 해림의 팔다리를 침대에 내리눌렀다.
그래도.
“이거 풀어줘요. 저 출근해야죠.”
슬슬 준비할 시간이었다. 해림이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주신도가 불만을 토하듯 아래턱을 목덜미에 꾹꾹 누르며 문질렀다. 사포 같은 턱수염이 목덜미를 쓸고 지나가자 하얀 살결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해림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아파요.”
“10분만 더 자. 내가 데려다줄게.”
잠이 가득 묻은 목소리가 낮다. 해림은 어느 날 갑자기 주신도가 가져온 차를 떠올렸다. 잘 곳도 없다면서 차는 어떻게 구했냐고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잠깐 타라고 빌려줬단다. 까만 보닛 앞에 달린 은색 여신상이 자못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빌렸다 한들 주변 사람들 눈에 보이기엔 적절치 못한지라 해림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 직장 동료가 보면 뒷말이 오가거나 이상한 소문에 휩싸일 게 뻔했다.
“그냥 지하철 타고 갈게요.”
“왜.”
“그 차는 좀…….”
“별로야? 다른 걸로 바꿀까.”
“빌린 거라면서요.”
“……그 형이 차 모으는 게 취미라. 다른 것들도 많아.”
비싼 차를 거리낌 없이 빌려줄 인맥도 있고, 사람과 아주 단절하고 산 건 아니었구나. 묘하게 입맛이 씁쓸해 해림이 꾸물거리며 주신도의 품을 빠져나왔다. 주신도가 따라 일어났다. 해림이 침대맡에 앉자 그 등에 바짝 달라붙어 뽀얗게 드러난 목뒤에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한 입맞춤이 목선을 타고 올라가다가 귓가에 붙었다.
“그냥 오늘 연차 내면 안 돼? 나랑 놀자.”
출근 앞둔 주인 앞에서 끙끙거리는 강아지처럼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아, 하고 해림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주신도가 어김없이 맨살에 입술을 갖다 댔다. 열이 오르게 문지르고 은근슬쩍 손을 옷자락 안으로 넣어 납작한 배를 쓰다듬었다. 해림이 그 손등에 제 손을 부드럽게 겹치고서 바깥으로 빼냈다.
“안 돼요.”
둘 중 한 명은 일을 해야지. 이제 개털이라고, 거지라며 주신도가 제집에 맨몸으로 들어앉은 지가 얼마 전이었다. 먹여 살리려면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
“하여튼 우리 도련님은 참 사람이 냉정해. 애정이 없어, 애정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는 주신도를 침대에 놔두고 일어섰다. 침대가 얼마나 큰지 나가는 길이 비좁았다. 이 또한 주신도 작품이었다. 원래 있던 침대가 성인 둘이 자기에는 작아 한 명이 자다가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장정 셋이 뒹굴어도 남을 만한 크기의 침대가 침실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침대지.」
「전에 있던 침대는 어떡하고.」
「그거 너무 좁아서. 소리도 많이 나고.」
주신도가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있다가 옆으로 뒹굴었다. 팔을 구부려 손바닥 위에 머리를 괴고 옆자리를 탁탁 쳤다. 해림이 침대 모서리에 앉아 매트리스를 꾹 깊게 눌렀다. 손자국이 새겨졌다가 위로 튕겨 오르는 탄력이 머리만 대도 잠들 것처럼 훌륭했다.
「얼마나 줬어요?」
「아, 이거? 영수가 줬어. 자기는 새거 샀다고.」
주신도가 눈을 한 바퀴 굴렸다가 씩 웃었다. 더 캐어물으려고 하자 냅다 달려들며 해림을 덮쳤다. 질문도 못 하게 입으로 입술을 틀어막고서 옷을 휘휘 벗기는데, 그 손길이 얼마나 빠르고 능수능란한지 끽소리 한 번 못 더하고 침대의 성능만 온몸으로 확인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침대였다. 침대뿐만이 아니었다. 좁은 아파트에 주신도의 물품이 하나씩 늘어갔다. 욕실에는 칫솔과 면도기가 두 개씩 나란히 놓였고, 옷장 한편에는 해림의 옷보다 사이즈가 훨씬 큰 옷들이 걸렸다.
주신도의 침입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이 스며들어서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제 물건이 있는 자리 옆에 주신도의 물건이 있었다. 변화는 나쁘지 않았다. 불편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랬어야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일상에 자리를 잡았다.
씻고 나오자 갓 내린 커피 향이 거실에 그득했다. 해림이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거실 쪽으로 고개를 길게 뺐다. 주신도가 식탁에 토스트와 커피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왔느냐며 눈매 끝을 느슨하게 휘었다.
“앉아. 먹고 가.”
한연동에 머물 때도 종종 아침 식사를 챙겨 주곤 하더니. 제집에 들어와서는 밥값이라도 하려는 식으로 매일이 모자라게 아침을 차렸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려도 12첩 반상을 차리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게 굶는 거야.”
토스트에 초콜릿 잼을 듬뿍 올려 한입 베어 물며 주신도가 웅얼거렸다. 해림이 커피만 홀짝이자 버터 바른 토스트를 친절하게 입에 물려 줬다.
“입이 짧으니 비실거리지. 그런 체력으로 회사 일은 어떻게 버텨.”
“저 체력 그렇게 약한 편 아니에요.”
근력 쪽은 잘 못해도 유산소 운동은 자신 있었다. 주신도가 믿을 말을 하라며 혀를 찼다.
“두 번만 싸면 기절하잖아. 아니, 세 번? 저번에는 안 싸고 갔으니까 그거까지 세면…….”
주신도가 몇 번인지 세 볼 것처럼 손가락을 들었다. 해림이 발끈해서 벌게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하라고,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울며 빌어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감언이설로 꾀어 결국 다음 날 강제로 연차를 쓰게 만들었더란다.
뺨이 불그죽죽 익자 그제야 주신도가 장난기 가득하게 씩 웃으며 해림의 손목을 잡고 의자에 도로 앉혔다. 이런 대화로 부끄러울 시기는 지나도 한참 지났건만, 적응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사장님 체력이 비정상적인 거예요.”
한 번 달려들면 기어이 기절하듯 잠들 때까지 몰아붙이는 사람 눈에야 제 체력이 약해 보일 수도 있었다. 운동을 했으면 금메달로 한쪽 벽을 도배했을 인간이 하필 안 좋은 길로 빠져서는. 해림이 속에 맴도는 수많은 투정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식빵을 물었다. 바삭한 귀퉁이가 잇새에 씹혔다.
“도련님, 보약 먹을래?”
주신도가 진지하게 권했다. 보약 하니 안 좋은 추억부터 떠올랐다. 해림이 토스트를 얼른 해치우고 커피로 입가심했다. 맞은편에서 주신도가 손을 불쑥 뻗어 엄지로 기름진 입술을 문질렀다.
“왜 이렇게 잘 묻히고 먹어. 애도 아니고.”
엄지에 묻은 부스러기를 제 입으로 가져가며 주신도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부스러기를 훑느라 입술 사이로 살짝 혀가 빠져나왔다. 불그스레한 혀끝이 조개처럼 아랫입술을 핥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해림이 눈을 내리깔았다. 귀 끝이 금세 뜨겁게 익었다.
“잘 먹었어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더 있다가는 뺨까지 붉어질라 해림이 도망치듯 일어섰다. 주신도가 해림의 손에 들린 그릇을 빼앗았다. 해림이 멍하니 쳐다봐도 싱크대에 그릇을 옮겨놓고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식기세척기 있는데 도련님이 왜 해. 그냥 놔두고 옷 입어.”
식기세척기도 주신도 작품이었다. 혼수 마련하는 것도 아니고, 좁은 아파트가 가득 차도록 하나둘씩 물건을 업어왔다. 가격도 만만치 않은 것들이라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면 출처가 죄다 맘씨 좋은 아는 사람이나 영수였다. 언젠가 영수를 만나는 날이 오면 꼭 물어보겠노라 해림이 다짐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주신도가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 다가왔다. 넥타이를 쓱 보더니 손을 뻗는다. 급하게 매느라 엉성했던 타이가 손짓 몇 번에 말끔하게 자리를 잡았다.
“넥타이도 제대로 못 매? 정말 도련님은 나 없이 어떻게 살 거야.”
고작 넥타이 하나 깔끔하게 못 맸다고 타박을 주는데도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다. 못 살 걸요, 라는 대답은 낯부끄러운 말이라 차마 하지 못했다. 늦었다는 핑계를 대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했다.
현관까지 가는 짧은 길에도 주신도가 졸졸 따라붙었다. 신발을 신는 동안 벽에 등을 기대고 해림이 하는 양을 영 마뜩잖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침에 어깨에 뺨을 부비적거릴 때는 강아지 같더니, 지금은 마음에 안 든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고 칠 기회를 엿보는 고양이 같다. 뭐든 공통점은 하나였다. 집에 홀로 두고 가야 했다.
“다녀올게요.”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나갔건만, 주신도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나가는 시간마다 아쉽고 한 번이라도 더 뒤돌아보게 됐다. 출근하기 싫다는 말에 그토록 공감할 줄은 몰랐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간신히 몸을 돌리고 현관문을 잡는데.
“그냥 가게?”
하고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을 잡았다. 돌아보니 좀 전까지만 해도 위로 말려 올라가 있던 입술 끝이 아래로 축 처졌다. 빨리, 하며 주신도가 뺨을 내밀며 재촉했다. 해림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다.
안 하면 물고 늘어질 기세기에 해림이 깨금발을 들었다. 입술이 주신도의 뺨에 스치듯이 닿았다. 애도 아니고, 목덜미가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워 얼른 몸을 돌리려던 찰나, 허리에 굵직한 팔이 채찍처럼 휙 감겨들었다.
“아.”
그대로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주신도가 재빨리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싸서 망정이지 현관문에 쿵 소리 나게 부딪힐 뻔했다. 코끝이 부딪쳤다가 옆으로 틀어지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초콜릿 향이 남은 혀끝이 숨어들었다. 담배를 입에 문 듯이 흡, 하고 장난스레 들이마시는 통에 해림이 주신도의 옷자락을 바짝 쥐었다.
찰싹 달라붙은 아랫도리가 뜨겁고 단단하게 익었다. 해림이 움칫하며 차가운 현관에 등을 기댔다. 귓불을 지분거리는 손가락이 귓구멍 안을 슬그머니 긁었다. 간지럽고 오싹해 해림이 고개를 비틀었다.
잘 다녀오란 인사치고는 너무 야하지 않은가. 숨이 점점 달떠 해림이 얼른 주신도의 어깨를 밀었다. 주신도가 아직 만족 못 했다는 듯이 해림의 아랫입술을 핥고 도로 달려들려고 입을 벌렸다. 잡아먹힐 것만 같아 해림이 주신도의 두 뺨을 손바닥 사이에 가뒀다.
“그만요.”
“누가 박는대. 맛만 보잖아.”
그런 것 치고는 아래가 성이 날 대로 나서 당장 현관이라는 사실도 잊고 제 바지를 벗겨 버릴 것만 같다. 맞붙은 허벅지에 윤곽이 불끈 솟아올랐다. 으르렁거리며 아래턱에 금이 가게 이를 꽉 물었는데, 일그러진 미간과 허연 송곳니가 깜박거리는 현관 등 아래서 유독 눈에 띄었다. 입술에 닿는 숨결도 거칠고 은근히 비비적거리는 아래는 곧이라도 덮치겠다는 신호였다.
정신 놓고 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해림이 시선을 딴 곳에 뒀다가 아랫입술을 물며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눈치가 귀신같은 주신도가 알아차리고 손목을 잡기 전에, 해림이 한발 빨리 문을 열었다.
“갈게요.”
머뭇대다가 잡히면 지각은 물론 저번처럼 강제로 연차도 써야 함이었다. 해림이 도망치듯 얼른 문밖으로 발을 뺐다. 주신도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허탈하게 보건 말건, 천적 만난 토끼처럼 후다닥 집을 벗어났다.
* * *
한가한 낮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에서 까치가 깍깍 우는 쉰 소리도 꾀꼬리 노랫소리처럼 감미로웠다. 영수가 제 손에는 장난감처럼 작은 커피 잔을 들고 책을 펼쳤다.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날이 오다니, 다시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갖는 위력을 깨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다섯 장을 넘기기 전에 문이 열렸다. 손님이야 아르바이트생이 받으니 흘끗 보고 말려 했는데, 들어온 얼굴이 무척이나 익숙하다. 까치는 새로운 사람을 보면 운다 하지 않았던가. 저 얼굴은 요새 매일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는데 왜 울었는지. 괜히 새대가리가 아니었다.
“형님 오셨어요.”
또 왔냐는 물음은 생략했다. 주신도가 모자를 벗고는 영수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영수는 주신도에게 고개만 까닥하고 카운터 쪽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바이트생이 낯짝이 술 마신 듯이 벌겋게 익었다. 저번에 주신도를 처음 보고 폭격처럼 질문을 저에게 쏟아 낸 사람다웠다.
몇 살이에요, 직업은 뭐예요, 연예인 아니에요, 애인 있어요 등등. 애인이 있다마다. 자각도 못 하는 주제에 한 사람을 위해 지 목숨 걸고 주변의 위험 요소들을 싹 다 치운 세기의 사랑꾼이었다. 주신도 본인만 모르는.
“망고주스하고 파르페 하나.”
카페에 없는 메뉴인데도 주신도가 당당하게 주문했다. 아르바이트생이 신이 나서 찬장에서 온갖 과자를 꺼냈다. 재고를 거덜 낼 기세기에 눈치를 주는데도 콧방귀만 흥 뀌며 제일 큰 컵에 생크림을 쌓고 과자를 잔뜩 꽂았다.
“이거 너 가져.”
주신도가 테이블에 차 키를 툭 던졌다. 얼마 전에 충동 구매한 차였다. 차에 욕심도 없는 사람이 웬일인가 싶었건만, 살 때 좋아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술이 퉁퉁 불어 있다.
“왜요. 도련님이 싫대요?”
남자에게 형수라는 호칭은 차마 붙일 수가 없어 도련님으로 합의를 봤다. 혼자만의 타협이었다. 주신도는 정해림을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걸 원할지도 몰랐다.
“부담스럽다던데. 간이 그렇게 콩알만 해서야, 원.”
일개 회사원이 타고 다니기엔 차고 넘치기는 하지. 눈빛을 보니 마음이 단단히 틀어졌다. 도로 가져갈 것 같지는 않아 영수가 주머니에 키를 챙겼다.
“팔고 돈 입금할게요.”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형님 지금 백수지 않습니까. 한 푼이 귀하죠.”
공식적으로는 백수였다. 통장에 돈이 차고 넘쳐 나는. 거지 같은 컨테이너를 거처로 삼아 돈이 없는 줄 알았더니, 뒤로 화수분 같은 동산과 부동산을 숨기고 있었다. 퇴직금을 넘치게 받아 억울한 감은 산화된 지 오래다.
커피를 홀짝이는데 생크림과 아이스크림이 무너지도록 쌓은 파르페가 불쑥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아르바이트생이 생글생글 웃으며 주신도를 바라봤다. 예전, 그러니까 도련님을 만나기 전에는 누가 시선만 보내도 손잡고 놀더니, 이젠 앞에서 옷을 다 벗고 춤을 춰도 눈길 하나 안 줄 듯이 심드렁했다.
아르바이트생이 어떻게든 대화를 틀 틈을 찾다가 주신도의 무뚝뚝한 반응을 보고 침울하게 돌아갔다. 그러든 말든, 주신도가 긴 막대 과자 하나를 입에 물고 오독오독 씹었다.
“심심하십니까.”
마땅히 마음 나눌 친구도 없으니 퇴직한 부하 직원이 새로 차린 가게에 놀러 온 마음이야 이해는 한다. 정곡을 찔러도 주신도는 크게 노하지 않았다. 고개를 까닥거리며 팔짱을 꼈다.
“어. 집에서 뒹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뭐 할 만한 거 없나.”
“예전에 클럽 하나 찍어 둔 곳 있으시잖아요. 거기 인수하시는 건 어때요.”
퇴직금으로 목 좋은 곳에 건물을 사서 카페를 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영수가 권할 제안은 아니었다. 영수가 커피 잔에 입술을 대며 휘어지는 입가를 감췄다. 달마다 들어오는 불로 소득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쪽은 손 뗐다니까. 안 돌아가.”
평생을 건전치 못한 일을 업 삼아 했던 사람이거늘. 얌전한 고양이처럼 살기엔 좀이 쑤시지 않을까. 언젠가 돌아가지는 않을지 잠시 가늠해 봤지만 대답은 명확했다.
예전에 유리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건 분명 사랑이라고.
“아니면 CC 하나 인수하시던가요.”
“노인네들 수발들라고. 골프채 휘두르면 허리 나갈 노인네들만 올 텐데.”
“바지 사장 하나 앉히고 형님은 뒤에서 놀면 되죠.”
그럼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삶이 되겠지만. 주신도가 손가락 끝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좀 더 괜찮은 일 없냐.”
“그냥 도련님한테 밝히지 그래요. 평생 먹고 놀아도 남는 돈 있다고. 도련님이 출근하는 것도 싫어하시면서 왜 감추세요?”
“지금은 때가 아니라. 나중에 이야기할 거야.”
영수가 혀를 찼다. 옆에서 보니 참 꼴같잖다. 수중에 동전 한 닢 없는 척 정해림의 집에 들어앉아서, 길 잃은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불쌍한 척을 하고, 뒤로는 어떻게 해야 정해림을 완전히 제 손에 쥘 수 있을까 고민을 한다.
주신도는 손을 깨끗하게 씻어도 주신도였다. 집착하는 대상이 돈에서 정해림으로 바뀐 것뿐이다. 사람이 달라졌다고 잠시 착각을 했다. 천지가 개벽하는 한이 있어도 주신도가 변할 리 없었다.
독서는 오늘도 물 건너갔구나. 책을 덮는데 유리문이 열리며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오, 하고 영수가 가느다란 눈을 큼직하게 떴다. 까치가 울어 댄 이유가 있었다.
유리가 영수를 발견하고 들어오다 멈칫했다. 영수 앞에 앉은 뒤통수를 보고는 입가를 구겼다.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묵직한 한숨을 뱉고 척척 걸어왔다. 보기만 해도 무거운 책가방을 의자에 털썩 내려놓고는 자리를 잡았다.
“둘 다 오랜만이에요. 카페 차렸는지는 몰랐네.”
덤덤한 인사가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또 본 사람 같다. 주신도가 어, 하고 무심하게 맞받아쳤다.
뭐 하고 살아요, 무슨 공부 해요, 소소한 일상이나 근황 이야기가 오갔다. 분위기는 한연동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업무 보고 할 때나 긴장했지, 잡담까지 각 잡고 할 사이는 아니었다.
유리의 시선이 주신도의 왼손에 꽂혔다. 자잘한 흉터가 그득하고 두툼한 손가락엔 반지가 없었다. 문득 떠오른 것처럼, 유리가 입을 열었다.
“정하 씨는…….”
“―정해림.”
주신도가 유리의 말을 딱 끊고 정정했다. 히죽거리는 얼굴을 보고 유리가 보이지 않게 침을 삼켰다. 이 인간이 새사람 된 줄 알고 좀 편하게 굴었더니, 이름 한 번 잘못 불렀다고 사람을 아주 잡아먹으려고 한다.
“여기가 한연동이야? 애한테 멀쩡한 이름 있는데 뭐 그딴 걸로 불러.”
주신도가 직접 지어 준 가명이었다. 기가 차서 한 소리 하려다가 저 악독한 성격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치미는 욕설을 꾹꾹 내리눌렀다.
“해림 씨는 잘 지내요?”
“그럼. 잘 지내지. 오늘 아침에도 아주 신나서 출근하고.”
같이 사는 모양이었다. 우연히 카페에서 봤을 때 둘 사이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아봤지만 동거까지 할 줄이야. 하긴, 한연동에 있을 때도 어디 가지 못하게 제 둥지에 가둬 놨으니, 주신도가 동거 아닌 다른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영수가 추천한 커피를 입에 대며 유리가 주신도를 흘끔 바라봤다. 혈색은 좋아 보인다. 한연동에 있을 때보다 날카로운 기색이 많이 빠졌다. 그렇다고 둥글둥글하지는 않고, 뾰족한 모서리가 몇 번 쓴 연필 끝처럼 약간 무뎌진 정도였다.
문득 주신도를 갈고 닦는 데 일등 공적을 세운 해림이 어떻게 사나 궁금해졌다. 저번에 본 장면도 그렇고, 주신도가 하는 양도 보니 아주 힘들게 사는 성싶지는 않은데. 마치 주인공 둘이 행복하게 끝을 맺었지만 후일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듣고 싶은 것처럼 입술이 근질근질했다.
잘 산다고 한마디 들었으면 됐지, 오지랖 피울 건 없지 않나. 괜히 쓸데없는 질문 했다가 선 넘는다고 화내면 어째.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다르게 놀았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러가며 호기심을 참으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에라이, 하고 유리가 커피로 마른 목을 축였다. 한연동도 아니고, 설마 질문 하나 했다고 이 자리에서 주신도가 사람을 죽일까.
“고백은 했어요?”
둘이 같이 사니까 지지고 볶고 진도란 진도는 다 뺀 지 백만 년이 흘렀겠지,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두 사람 성격에 좋아해요, 사랑해요 염병을 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림이 전혀 그려지질 않으니 궁금할 수밖에.
주신도가 질문을 받고는 눈썹만 들어 올렸다. 팔짱은 내내 낀 채다. 어이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 하고 한쪽 입술 끝만 비죽이 올렸다.
“윤수정 씨가 우리 사이에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네. 다른 사람이 보면 둘 중 하나를 좋아한다고 착각이라도 하겠어. 응?”
주신도가 실실거리며 유리의 본명을 불렀다. 고개도 삐딱했다. 영수가 유리에게 눈치를 줬다. 여차하면 이사하겠다는 생각으로 유리가 뻔뻔하게 시선을 맞받아쳤다.
“궁금하잖아요.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무슨 난리. 내가 언제 난리를 쳤다고. 왜 죄 없는 사람 트집 잡고 그래.”
지금껏 저지른 모든 행동이 생난리였다. 난리를 난리라 부르지 못하고. 영수의 눈썹도 유리처럼 폭삭 썩기 직전이었다. 주신도만 태연하게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유리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돌렸다.
“그래서, 고백했어요?”
“그런 걸 굳이 왜 해. 우리가 애들인가.”
주신도가 한쪽 뺨이 위로 밀려 올라가게끔 손바닥으로 받치고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과연, 유리가 제 추측이 맞았음을 알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 바닥을 떠났어도 촉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주신도 입장이야 그렇다 치고, 해림도 같은 입장일까. 잘은 몰라도 예전 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해림은 만사에 무뎌도 주신도에 한해서는 은근히 예민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며 꼬챙이처럼 삐쩍 야위어 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이제 한연동에서 벗어났으니 맘 편하게 살 만도 하건만. 주신도가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니 그 속에 몰아치는 파도가 잠잠해질 날이 올까. 해림의 마음고생은 현재 진행형일 게 분명했다.
다른 때는 잘만 놀리던 주둥아리로 그 쉬운 말 한 마디를 안 해 주고. 주신도는 여전히 악당이었다. 해피 엔딩으로 끝난 줄 알았던 주인공들에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기분이 찜찜했다.
더 할 말은 없어서 유리가 조용히 커피를 홀짝였다. 유리를 위로하듯이 영수가 오렌지 조각을 올린 초콜릿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마주친 두 눈에 같은 기류가 흘렀다. 동병상련이었다.
* * *
해림은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았다. 오늘도 야근이라고 저녁 시간쯤에 전화가 왔다. 손톱만 한 회사 주제에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최근 제시간에 집에 들어온 적에 손에 꼽았다.
회사를 뒤집어엎으려다가 참을 인을 열 번 정도 쓰며 참았다. 그깟 회사, 무너뜨려 봤자 손에 들어오는 것도 없다. 해림은 취직을 한답시고 또 뽈뽈거리며 돌아다닐 게 눈에 보였다.
어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가둬 두려면 못할 것도 없지마는. 자주 그런 마음이 불쑥불쑥 솟고는 하지만, 주신도는 다른 사람이 보면 놀라 자빠질 만큼 인내하고 있었다.
소파 위에 널브러져 리모컨 버튼 누르는 일도 지겹다. 리모컨을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 시계를 쳐다봤다. 작은 바늘이 숫자 12를 가리키는데도 끝났다는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런 여유가 익숙하지 않다. 평화롭지만 지루했다. 뭐라도 일을 하고 손에 들어오는 게 있으면 모를까,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해림을 옆구리에 끼고 있으면 잡념이 들 새가 없는데, 혼자 있을 땐 어디서 슬금슬금 기어 나와 머릿속에 흰 연기처럼 차올랐다.
한연동 내였다면 어디에 있든 당장 납치해서 집으로 끌고 왔겠건만. 최대한 자유롭게 놔두자고, 못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자고 되뇌어도 울컥거리는 심정을 억누르는 건 쉽지 않다.
딱 30분만 더 기다렸다가 오지 않으면 당장 가서 데리고 와야지. 마음을 먹고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해림이 품에 없으면 잠도 못 자는 상등신이 됐다.
시계를 보니 겨우 1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해림이 없는 시간은 무척이나 더디게 흘러갔다. 1분은 30분처럼, 30분은 4시간처럼, 하루는 수십 일처럼 느렸다. 내일이 오지 않는 오늘에 갇혀 사는 기분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었다.
“…….”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 싶어 상체를 세웠다. 동시에 현관에서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박자, 묘하게 차분한 음이 해림과 닮았다.
주신도가 벌떡 일어났다. 귀가 있으면 쫑긋 서고 꼬리가 있으면 살랑살랑 흔들었을 표정으로 척척 걸어갔다. 현관문이 열리며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든 해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홍색 현관 센서 등 불빛이 피곤에 젖어 든 눈가에 드리웠다. 빼곡하고 긴 속눈썹. 부챗살처럼 넓게 펴진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깃털이 가슴께를 스치고 지나간 듯이 간질거렸다.
“다녀왔어요.”
졸린 지 비척거리는 해림의 등에 붙어 졸졸 따라갔다. 넥타이를 풀러 주고 셔츠를 벗기고 벨트에도 손을 댔다. 어깨에 입술을 대고 속옷과 바지를 잡아 한꺼번에 벗기려는데 해림이 막았다. 졸려서 눈을 끔벅끔벅하면서도 위기 의식은 살아 있었다.
“제가 할게요.”
“씻겨 줄게. 피곤하잖아.”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자 잠결처럼 가늘게 피곤하긴 한데, 하며 앓는 소리를 낸다. 조르는 것처럼 들려 벨트를 잡은 손을 속옷 안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단단한 골반과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그 안쪽으로 파고들려는데.
“아뇨. 그래도 내가 할 거야.”
정말 지쳤는지 해림이 반말까지 입에 올리며 단호하게 몸을 틀었다. 바짓자락 잡을 틈도 없이 욕실로 쪼르르 도망가 문을 닫았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무래도 문을 잠근 듯싶다.
주신도가 쳇, 하고 혀를 차며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옷걸이에 걸면서, 어쩌다 저가 이런 잡다한 일거리를 도맡아 하는 신세가 되었는지 잠시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의미 없는 한탄은 해림이 욕실에서 나오면서 끝났다. 못 볼 곳도 다 본 사이에 뭐가 부끄럽다고, 잠옷까지 착실하게 챙겨 입고 해림이 비척비척 침대 위로 올라왔다. 팔을 벌리자 꼼지락거리며 품을 파고들었다. 그 등을 껴안고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달큼한 샴푸 향이 담배 연기보다 자극적으로 폐부를 훑는다.
목덜미에서도 좋은 향이 났다. 같은 용품을 쓰는데도 해림의 몸에서는 다른 향이 났다. 좀 더 달았다. 맛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맛있는 냄새였다. 입이 축축하게 젖어 맛만 한번 보려고 입을 벌려 옴폭 팬 목덜미를 물었다. 혀끝과 혓바닥으로 살결을 핥자 배 아래쪽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해림의 다리에 제 다리를 얽고 주신도가 고개를 들었다. 정해림, 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름을 불러도 해림은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너무 졸려서……. 못 해요. 다음에…….”
간신히 대답하는 목소리도 잠에 잠겨 있었다. 피곤하단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숨소리가 금세 고르게 가라앉았다. 주신도가 허벅지에 아랫도리를 바짝 밀어붙여도 피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애 손에 들린 인형처럼 맥이 하나도 없다.
“하.”
아침에도 그러더니 저녁까지. 이대로 재우기엔 오늘 하루 같이하지 못한 시간들이 아깝다. 깨우려고 해림을 내려다봤다가, 주신도가 묵직한 한숨을 터트렸다. 세상이 무너져도 안 일어날 듯이 눈꺼풀을 굳게도 닫았다. 숨소리도 작디작아 확인차 코 아래 검지를 갖다 댔다. 부드러운 들숨 날숨이 손가락 위로 흩어졌다.
그 옆에 털썩 누웠다가 팔에 머리를 괴고서 해림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이 절로 해림의 얼굴로 향했다. 손끝으로 이마와 미간과, 콧대를 덧그렸다. 누가 자를 대고 그린 듯한 눈썹, 콧잔등, 입술과, 우유를 들이부은 것처럼 하얀 피부가 어릴 적과 다름이 없다. 애티만 벗어던졌는데, 그마저도 잘 찾아보면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이대로 재우기는 아쉬워서 품에 보듬어 안고 이마에 입술을 댔다. 쪽하고 빨아들여도 성에 차지 않는다. 아예 흐느적거리는 몸을 팔다리로 칭칭 감고서 뺨에도 입을 맞췄다. 보들보들하고 매끄럽고 색은 도홧빛이 도는 볼이었다. 깨물어 먹으면 갓 태어난 짐승 새끼의 여린 살점처럼 혀에 닿는 순간 녹아 사라질 듯싶다.
해림을 보면, 가끔씩 식욕과 성욕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은 목덜미부터 복사뼈까지 살점을 남김없이 발라먹고 싶다가, 어느 날은 아늑하고 녹아내릴 듯이 뜨거운 몸속을 휘젓고 싶다가, 어느 날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 허벅지에 머리를 괴고서 낮잠을 즐기고 싶었다. 입을 맞추다가도 혀를 깨물고 싶고, 껴안고 있다가도 숨도 못 쉬게 품에 욱여넣고 싶었다. 할딱거리는 해림이 제 옷자락을 잡고 살려 달라고 매달리게끔.
변덕은 시시때때로 일어나 간신히 붙들고 있는 이성을 뒤죽박죽으로 흔들고 사라졌다. 지금은 먹고 싶었다. 무방비하게 잠든 해림을 깨워다가 그 눈으로 저를 보게 하고, 손가락부터 오독오독 씹어 먹고 싶었다. 팔다리만 먹으면 적어도 저 몰래 사라지지는 않겠지.
손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어느새 해림의 손을 쥐고 있었다. 하얗고 깔끔한, 고생이라고는 펜 쥔 게 다 일 고운 손이었다. 손가락이 꿀 바른 막대처럼 달콤해 보여서 입술 가까이 끌어당겼다.
퍼뜩, 주신도가 움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오늘 낮에 유리가 했던 질문이 망치처럼 뒤통수를 두드렸다. 하마터면 깨물 뻔한 손가락을 침대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고백은 했어요?」
고백이라니.
해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일이 벌어질 뻔했는지도 모르고 새근새근 잘도 잔다. 눈 뜨고 있을 땐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 보이는데, 눈을 감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순진무구하다.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남들 다 하는 그 말이 뭐가 어렵다고. 고작 그 한마디로 붕 떠 있는 해림의 발목을 단단히 틀어쥘 수만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혀가 닳도록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당연히 할 수 있었다. 유리의 말을 반박하려는 듯 주신도가 입을 열었다. 사, 라는 말을 뱉으려는데, 이상하게도 목이 콱 메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에 이상이 있나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두 번째도 실패였다.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낯은 뜨겁고 가슴은 답답했다. 끝을 꽁꽁 동여매 물이 터지지 않는 호스처럼 목구멍에 치솟다 만 말들이 부풀었다. 속에서 울컥울컥 치미는 것들이 막힌 목 아래 켜켜이 쌓였다.
혀가 뭉텅 잘려 나간 느낌이다. 세 글자를 뱉으려 하면 숨부터 막혔다. 속이 터질 것 같아 허연 목덜미에 이마를 가볍게 찧었다. 해림이 눈을 뜨고 저를 어떻게든 구해 줬으면 하건만 몸만 뒤척일 뿐 일어나질 않는다. 해림의 목덜미가 침대 헤드라도 되는 양 쿵, 쿵 더 들이받았다. 그 몸뚱이 위에 올라타 상체를 눕히고 이마를 문질러도 꽉 막힌 속은 뚫리지 않았다.
으음, 하고 해림이 눈꺼풀을 슬쩍 들었다. 가늘게 뜬 눈에 초점이 없었다. 눈동자가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주신도의 얼굴에 꽂혔다. 입술이 비실비실 풀어졌다.
“사장님도 얼른 자요…….”
침대에 늘어진 팔을 들어 주신도의 등을 껴안고 도닥인다. 잠투정을 부리는 애를 달래듯이 조곤조곤하게. 그러다가 곧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등에 닿은 온기는 사라지고 귀에 닿는 숨소리가 고르게 흩어졌다.
하, 하고 주신도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웃었다. 보잘것없는 접촉에 몸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당장 실오라기 한 올 안 걸치게 정해림의 옷을 벗기고, 잠에서 깨든 말든 거칠게 그 속을 헤집고 싶었다. 아파하든 말든, 눈물을 뚝뚝 흘리든 말든, 제 욕심을 퍼붓고 이게 제 것이라는 증명을 온 몸뚱이에 남기고 싶었다.
주신도가 상체를 들었다. 해림은 뭔 짓을 저질러도 모를 듯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순진한 그 얼굴조차 야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먹고 싶었다. 박고 싶었다. 정액을 그 안에 잔뜩 싸놓고, 허벅지를 타고 뚝뚝 흐르는 액체를 즐겁게 구경하고 싶었다.
“후…….”
상상만 해도 아래가 벌끈했다. 무릎으로 일어선 채 바지춤을 열었다. 배꼽에 닿을 만큼 성이 불쑥 나서 표면에 핏줄도 도드라졌다. 손아귀에 말아 쥐자 부피를 키웠다. 시선은 아래 깔린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꼭 그날 같았다. 눈송이처럼 닿았다 사라진 온기에 취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던 어린 그날.
슬쩍 벌어진 입술이 예전 기억을 상기시킨다. 초기에는 죽을상을 하고 차라리 생선 주둥이에 자지를 박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못하더니만, 후반엔 그나마 나아졌다.
처음엔 보기도 싫은 듯이 질끈 눈을 감는다. 반대로 혀는 길게 빼고서 불알과 밑동 사이에 혀끝을 댄다. 길이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할 것처럼 혓바닥으로 쓸어 올리다가, 대가리에 이르러서는 여기가 끝인지 보려는 듯 눈을 뜬다. 제 표정도 같이 보고 싶은 것처럼 눈동자를 위로 든다.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아래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읏, 하고 주신도가 입술을 물었다.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허벅지도 근육이 탄탄하게 부풀어서는, 곧이라도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갈 것만 같다. 턱턱 거리며 손아귀와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를 악문 소리가 섞였다.
도망치려는 작은 머리통을 두 손에 쥐고 자지를 깊게 박으면, 놀란 혓바닥이 혀뿌리를 누르며 내려가고 목구멍이 길을 열었다. 눈물이 질질 새는 눈꼬리를 내려다보며 숨통을 틔워 줬다가, 목젖을 긁어 버릴 듯이 더 깊이, 더 깊숙이 쑤시고 들어갔다. 좁아 든 목구멍이 사방에서 자지를 압박하고, 정해림이 짧은 손톱을 세워 허벅지를 긁어내리면 그제야.
주신도가 다급하게 침대 헤드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휘감긴 자지 끝에서 걸쭉하게 정액이 터져 나왔다. 짙은 하얀 액체가 해림의 목덜미와 가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어서 터진 정액은 해림의 배꼽 근처와 아랫배에 묻고, 나머지는 주신도의 손마디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제야 정해림의 입천장과 점막과 치아가 다 젖도록 정액을 토해 낸다. 숨을 들이마시느라 벌어진 입에 정액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모습이, 벌겋게 상기되어 가쁜 숨을 내쉬는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눈가가, 유리알 같은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엉킨 속눈썹이 다시 없을 디저트였다.
주신도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늘게 뜬 눈에 절정의 여운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바로 하자 해림의 멀끔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정액이 잔뜩 묻은 손을 들었다. 손바닥과 해림의 얼굴을 가만히 번갈아 보다가, 그 뺨에 정액을 처덕처덕 발랐다. 뽀얀 뺨이 희묽은 액체로 범벅이 되도록 정성을 들여 문질렀다. 짐승이 영역 표시하듯이 꼼꼼하게.
미끈거리는 정액이 뻑뻑해질 때까지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뗐다. 가슴은 아직도 꽉 막혀 있는데 배 속은 텅 비었다. 허기는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다. 무얼 쑤셔 넣든 굶주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주신도가 추운 듯이 몸을 웅크리며 해림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비좁고 불편하고 동시에 아늑했다. 비릿한 냄새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해림이 잠결에 뒤척이며 주신도를 품에 보듬어 안았다. 이불처럼 해림의 팔을 덮고 주신도가 눈을 감았다.
* * *
해림이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잔업이 끝났다. 눈 밑이 퍼레진 김 주임도 기운을 축 빼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의자 옆에 놓인 쓰레기통엔 그동안 팀원들이 부어라 마셔라 들이부은 에너지 드링크와 커피 공병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되겠지? 양심이 있으면 일찍 보내 줄 거야. 암, 그렇고말고.”
철야는 아니더라도, 요 며칠간 제시간에 귀가한 적이 없었다. 해림도 내심 동의했다. 얼른 집에 가서 주신도와 오붓하게 저녁 식사나 하고 싶었다.
“이런 날은 꼭 회식 하지 않아요? 저번에도 그랬고.”
앞 파티션에서 얼굴을 불쑥 내민 이 사원이 초를 쳤다. 김 주임이 상체를 벌떡 들고서 말이 씨가 된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사원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어.”
김 주임이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하나 어디 세상사가 제 마음대로 돌아가던가. 아니나 다를까, 이 사원의 예상이 맞았다.
“금요일인데 다들 뭐 해? 일도 끝났겠다, 밥이나 먹고 들어가.”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한 명이 대뜸 물론입죠, 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김 주임이었다. 이 사원에게 무안 줄 때는 언제고 김 주임이 간신배처럼 헤헤거리며 부장에게 알랑거렸다. 이 사원은 막내 위치라 울며 겨자 먹기로 부장에게 붙었다.
“아, 저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팀원들 중 아무도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빠지기엔 눈치가 보인다. 하는 수 없이 1차가 끝나면 분위기 봐서 몰래 빠져나가기로 하고 회식에 참석했다.
“저, 잠깐 전화 좀.”
“누구야. 해림 씨 애인 생겼어?”
부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오만상을 찌푸렸던 박 대리가 음흉하게 흐흐거리며 해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해림이 애매하게 미소 짓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에 들어가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왜, 하는 무뚝뚝한 음성을 듣자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가 조금 느슨해졌다.
“오늘 팀 회식한대요. 밥만 먹고 바로 들어갈게요.”
―어디서 하는데.
“아직 모르겠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주신도도 해림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남은 할 말도 딱히 없는지라 숨소리만 오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가 약간 거칠었다.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운동.
해림이 벽에 등을 기댔다. 주신도가 무슨 운동을 하는지 눈앞에서 보듯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창고로 쓰는 방에 주신도가 사용하는 운동 기구가 잔뜩 늘었다. 해림은 두 손으로도 들기 무거운 아령에 바벨에, 맨몸 운동도 자주 했다.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팔굽혀 펴기를 할 때는, 아, 저래서 팔뚝 두께가, 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장소 정해지면 말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도련님 술 마시면 개 되는 거 알지. 나니까 받아 주지, 다른 사람한테 보일 모습은 아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요?”
마지막 말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 해림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주신도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넘실거리는 웃음소리에 고막이 간질거렸다.
―계속 연락하고.
“네.”
끊어야 하는데 끊기가 싫다. 기분이 숨소리처럼 오르락내리락거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해림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쉬워서 까매진 화면을 만지작거리는데, 거기에 비친 제 얼굴이 퍽 낯설었다.
해림이 위로 올라간 입술 끝을 더듬었다. 언제부터 웃고 있었는지, 피곤해서 얼굴이 푸석푸석한데도 입가에는 미소가 가라앉질 않았다. 헤실거리며 돌아갔다가 추궁 아닌 추궁을 받을까, 해림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입술을 물었다. 가볍게 놀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어서 미소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이라 번화가에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가끔 들르던 고깃집에서 부장이 마시고 죽자며 소주에 맥주를 테이블 위에 가득 깔았다. 피곤한 상태에서 마시다가 다른 이들에게 민폐 끼칠까 봐 입에 안 대려는데, 김 주임이 낙지처럼 달라붙었다.
“어른이 주는 술을 안 마시면 안 되지.”
나이 차도 얼마 안 나건만 굳이 어른 행세를 한다. 박 대리가 별꼴을 다 본다고 인상을 찌푸렸다가 김 주임과 눈이 마주치고는 활짝 웃었다.
“자자, 다들 마셔. 어차피 내일 주말인데 다들 할 것도 없잖나. 마음껏 들어.”
부장이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 술잔을 받았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금방 두 병으로 늘어났다. 불판에는 고기가 눌어붙고 몇몇은 거나하게 취해서 고개를 꾸벅꾸벅 떨어트렸다. 해림도 알딸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엔 이 정도로 취하지는 않지만 피곤이 누적되었다 보니 다른 때보다 취기가 빨리 올랐다.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해림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곰곰이 생각하니, 굳이 따를 말이 아니다. 술 마시면 개가 된다니, 저가 언제 그랬다고. 한연동에 있을 때 한 번 죽자고 양주를 들이켜긴 했지만 원인 제공은 주신도가 했다. 회상하니 당시 느꼈던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쳐서 해림이 빈 잔에 소주를 부었다.
주신도와 같이 살면서 내색하거나 표현한 적은 없으나, 사실 아직 앙금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가도 침대에 머리를 대면 질문들과 원망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대놓고 묻지 못하고 돌아눕는 걸로 속을 달랬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 기분이 붕 떴다가도 어느 날은 지하에 갇힌 듯이 가라앉는다. 미소가 떴다가도 주신도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불안이 요동치고 눈물이 터질 듯이 눈가가 시큰거렸다. 매번 하늘과 땅을 오가니 무슨 감정인지 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 보느니 앓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혹여 원망을 내비쳤다가 사과는커녕 매정하게 도로 사라지면…….
상상만으로 가슴이 턱턱 막혔다. 해림이 찰랑거리는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해림 씨, 혹시 요새 연애해?”
박 대리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하면 되는데 어느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음, 하고 해림이 얼버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 대리가 옆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얼굴이 되게 훤해져서. 오늘은 좀 어둡긴 한데, 그거야 다들 계속 야근해서 그런 거 같고. 사실 몇 달 전만 해도 해림 씨 항상 우울해 보였거든. 말수야 원래도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보다 심했으니까.”
“그래요?”
해림이 멋쩍게 대꾸했다. 박 대리가 해림의 빈 술잔에 술을 채우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요새는 자주 웃잖아. 담배 피우면서도 넋이 빠져있었는데 요즘엔 핸드폰만 보고 있고. 그러다가 갑자기 실실 웃고. 연애하는 거 아니면 설명이 안 돼.”
남에게 듣는 제 모습이 어색했다. 저리 확신하는데 연애 같은 거 안 한다고 발뺌할 수도 없었다. 해림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그래, 어떤 아가씨야? 어떤 아가씨가 해림 씨를 그렇게 웃게 만들었어. 예뻐?”
예쁘다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상대가 매우 건장했다. 키는 저보다 한 뼘 이상 컸고 덩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선사할 정도였다. 눈매는 칼날 같고 눈동자는 붉은빛이 돌며, 입술은 보통 고양이 꼬리처럼 휘어 있다. 얼굴만 놓고 보자면 누구든 감탄부터 터트리는 미남이었다.
“……예뻐요.”
잘 보면 예쁜 구석도 있었다. 해림을 놀릴 때마다 반짝거리는 눈빛이나, 햇살에 부서지는 까만 머리카락 같은 게.
“엄청 예쁜가 봐. 해림 씨 또 멍해졌네.”
박 대리가 키득거렸다. 낯이 달아올라 해림이 애꿎은 술을 들이켰다. 박 대리가 시시덕거리며 제 아내도 그렇게 예뻐서 누가 채 갈까 봐 맘고생 많이 했다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남발했다. 해림이 대충 맞장구치면서 술잔을 비웠다. 몸만 여기 있을 뿐, 마음은 영 딴 곳에 가 있었다.
식사만 하고 몰래 빠져나가려 했는데, 주임이 물귀신처럼 들러붙었다. 저 혼자 죽을 수는 없노라며 같이 가자고 해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주호 이거는 막내 주제에 언제 튀었어! 월요일 날 두고 보자. 해림 씨하고 영훈 씨는 나 버리지 마.”
고약한 주사였다. 주임이 징징거리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해림도 쓰린 속을 달래려고 술을 붓다 보니 알큰하게 취했건만 주임이 한술 더 떴다. 해림이 난감해해도 취한 사람의 괴력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버리지 말라고…….”
옆에 선 박 대리가 어휴, 이 진상 하며 손을 뻗었다. 박 대리의 팔까지 뿌리치며 주임이 해림에게 매달렸다. 술 냄새가 얼큰한 주둥이를 쭉 내밀고 해림의 얼굴에 제 뺨을 문질렀다. 해림이 속으로 질색하며 가까스로 빠져나가려던 차였다.
박 대리가 해림의 어깨 너머를 보며 어, 어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 대리의 시선을 따라 해림이 어깨를 돌렸다. 건장한 팔뚝이 해림의 어깨 너머로 불쑥 넘어왔다.
해림을 바위 삼아 철썩 들러붙은 주임의 멱살을 흉터 가득한 손이 움켜쥐었다. 해림이 안간힘을 다 써도 안 떨어지더니만, 남자가 손쉽게 주임을 떼어 냈다. 주임의 뒤꿈치가 바닥에서 허공으로 휙 들렸다.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저가 어디 있다고 문자 보낸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고 해림이 기겁을 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주신도를 말렸다. 박 대리는 갑작스레 벌어진 사태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저희 회사 주임님이세요. 이거 놔요.”
해림이 간곡하게 부탁해도 주신도는 손을 풀지 않았다. 시선은 시뻘겋게 익어 가는 주임의 얼굴에 계속 꽂혀 있다. 그게 꼭 한연동에서 봤던 모습 같아서, 당장이라도 주임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아서 해림이 온 힘을 다해 주신도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만하라니까. 손 풀어요. 어서.”
박 대리도 정신 차리고 주신도에게 매달렸다. 허공에서 발을 허우적거리던 주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가 푸르게 식었다가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욱, 하고 두꺼비가 울음을 토해 내듯이 목을 부풀렸다가 이어 볼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웠다.
주신도가 멈칫하며 손을 풀려던 찰나였다. 주임이 좀비 같은 소릴 내며 입을 벌렸다. 시큼한 토사물이 주신도의 상의 위로 주르륵 떨어졌다. 손을 놓자 주임이 바닥에 엎어져서 도로 위에 속을 게워 냈다.
“이 씨발…….”
주신도가 젖은 옷을 보며 눈썹 사이를 구겼다. 잇새로 샌 욕설이 사람 하나 죽일 듯이 살벌했다. 박 대리가 욕을 듣고는 차렷 자세로 팔을 몸통에 딱 붙이고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주신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람 많은 이곳에서, 해프닝을 보고 웅성거리는 인파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사실 해림도 단언할 수 없었다.
해림이 냅다 주신도의 팔뚝을 끌어안고 온 무게를 실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살인은 몰라도 폭행은 쉬울 것 같았다. 주신도가 발로 한 대 걷어차면 김 주임의 장기는 안녕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부장이 나오기 전에 사태를 수습해야 할 텐데. 해림이 고개를 들고 속으로 제발을 연발하며 주신도를 쳐다봤다.
“집에 가요. ……제발.”
속삭이듯 간청했다. 주신도가 주임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떼며 해림을 쳐다봤다. 눈빛에 번뜩거리는 살기가 감돌았다가, 해림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해림이 껴안은 팔뚝도 목 부풀린 뱀처럼 성이 났다가 힘이 빠졌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급한 불은 꺼진 셈이다.
“저 들어가 볼게요. 주말 잘 보내세요.”
주임을 부탁한다느니 어쨌느니 떠들 여유가 없었다. 얌전해졌다 한들 마음까지 가라앉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당장 태도를 바꿔 주임의 머리통을 축구공처럼 걷어찬다 해도 그 성격에 어울리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을 터였다.
해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하자마자 주신도가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보폭이 넓어 거의 끌려가다시피 뒤를 쫓아갔다. 그러다가 주신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상의를 휙 벗어 쓰레기봉투를 쌓아 놓은 곳에 던졌다.
맨몸이 드러나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주신도에게 쏠렸다. 그럴 만했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날씨에다, 바윗돌처럼 단단하게 근육이 뭉친 상체가, 거기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해림이 외투를 벗어 얼른 주신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주신도가 외투를 손으로 끌어 내리고는 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해림이 주신도를 쫓아갔다.
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다. 다행히 저번과 같은 차가 아니었다. 해림을 조수석에 밀어 넣고 주신도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며 후, 하고 해림의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한숨을 뱉었다. 그 숨에 차 안의 온도가 3도쯤은 더 내려간 듯싶다.
“옷 입어요.”
외투를 도로 건네도 주신도는 전면만 주시했다. 해림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난방 온도를 높였다. 헐벗은 주신도는 정작 추위를 못 느끼는 성싶다만, 보는 제 눈이 시렸다.
“나 없이 재밌게 놀던데.”
번화가를 빠져나와 주신도가 입을 열었다. 해림이 창밖을 보다가 주신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호등에 걸려도 주신도는 해림 쪽을 보지 않았다.
해림도 울컥했다. 당장 월요일에 회사에서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겪는 건데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대뜸 상대의 멱살부터 잡으면 뒷수습은 누가 하라고.
“그분 주사가 원래 그래요.”
“누가 그 새끼 변명 듣자고 물었어?”
“그럼요?”
해림의 목소리도 까칠했다. 여기는 한연동이 아니었다. 주신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됐다.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이 어쨌든, 최소한 법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했다. 협박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왜 그랬어요. 굳이 사장님이 안 그래도 제가 알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하필 회사 사람들 앞에서…….”
하, 하고 주신도가 해림의 말을 끊으며 차게 조소했다. 하하, 하고 이어서 터진 소리에 해림이 조개처럼 입을 닫았다. 욱 하고 치민 감정이 삭여지질 않는다.
“도련님은 씨발 그딴 걸 겪고도 그 새끼 변명은 왜 해 줘. 얼마나 친한 사이면 네 얼굴에다 지 얼굴을 비벼 대고 지랄인데. 그 자리에서 목 비틀고 싶은 거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그런 씨발 변태 새끼를 안 죽이고 살려 줬으면, 옷에다 토했는데도 혀 안 뽑고 참아 줬으면, 최소한도 잘했다고 칭찬부터 해야 할 거 아니야.”
“그게 칭찬할 거리에요? 처음부터 멱살을 안 잡았으면 됐잖아.”
“그 새끼가 너한테 지랄을 떠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우리 도련님이 많이 컸네. 혼자서도 잘한다고 그러고. 이야, 모텔로 끌려가도 아주 구경하라고 돗자리 깔아 주겠어.”
“빈정거리지 말아요.”
“빈정? 이게 빈정거리는 걸로 보여? 내가 도련님이 알아서 할 거라 믿고 회사에 보내 줬으면, 적어도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보는 앞에서 씨발 좆 달린 새끼하고 그딴 식으로 얼굴을 비벼 댈 거면―”
“―그만.”
“뭘 그만해. 어디서 말을 끊어.”
운전대를 움켜잡은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목에도 핏대가 섰다. 입술은 웃는데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당장이라도 방향을 돌려 주임의 목을 자르러 갈 듯이 차가 속도를 높였다.
해림도 주먹을 쥐었다. 속에서 뭔가 폭발할 듯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렇게 화가 난 적이 드물어 해림도 어떻게 통제를 하고 가라앉혀야 할지 몰랐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여기는 한연동이 아니에요.”
“……뭐?”
“한연동이 아니라고요. 왜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어요. 나왔으면,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 해는 끼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에요.”
“……와, 우리 예쁜 도련님이 오늘따라 말이 많네. 바른말만 하셔서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아주.”
“그런 의미가 아니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저가 누구를 가르칠 입장은 못 되어도 주신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건 말할 수 있었다. 하지 말라고 점잖게 타일렀으면 알았다고 받아들이면 되지, 그걸 가지고 바른 말이네 어쨌네 떠드는 저 주둥이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해림이 바락 성질을 내자 주신도가 거칠게 핸들을 내려쳤다.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텅 빈 도로 위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래도 해림은 겁을 먹지 않았다.
“내가 오늘 몇 번을 참았는지 알면 넌 그 소리 못 해. 그 새끼 멱따고 싶은 거, 그 자리에서 널 엎어 놓고 박아 버리고 싶은 거, 네가 입 놀릴 때마다 억지로 입 닥치게 하고 싶은 거! 존나 참느라 사리가 생길 지경인데 뭘 안다고 떠들어. 대체 얼마나 참아 줘야 하는데. 인내심을 어디까지 끌어내야 만족할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화가 나도 참고, 죽이고 싶어도 참고, 그 자리에서 모욕을 주고 싶어도 참고 남의 말을 듣기 싫어도 듣는 척이라도 해 준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주신도는 아니었다. 살던 세상이 달랐다. 화가 나면 누굴 패고 죽여도 되는 곳이 주신도의 집이었다. 해림의 옆자리는 주신도에게 마치 감옥 같으리라. 허락받았던 모든 것들이 금지된.
이해가 되지만 이해하기 싫었다. 납득하면 주신도가 원래의 삶을 되찾도록 보내 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럴 수는 없다. 절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해림이 손바닥으로 입술과 턱을 문지르며 대화를 단절하듯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을 보며 어수선한 속을 진정시키려 해도 시선은 창에 비친 주신도만 좇는다. 잡힐 듯이 가까운 거리인데도 마음은 천리만리 멀기만 하다. 그 모습이 어느 순간 안개처럼 사라질까 무서워, 해림이 질끈 눈을 감았다.
처음 주신도가 돈이 없다고 밝혔을 때 해림은 내심 기뻐했다. 갈 곳이 없다는 건, 돈이 없다는 건 제 옆에 머무를 시간이 늘어난단 소리였다. 돈이야 저가 벌면 되는 거고, 주신도도 시간이 흐르면 사회에 발을 내디디고 평범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저가 도울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주신도가 하나씩 가져오는 물품이 출처가 불분명해도 캐묻지 않았다. 어디서 얻어 왔다 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손에 쥐고 있는 게 없는 한 제 옆을 떠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에 다른 가능성은 보지 않으려 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집에 들어왔다. 주신도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해림이 신발을 벗고 걸음을 옮기다가, 주신도의 등을 보고 멈칫했다. 형광등이 비춘 맨 등에 그간 보지 못했던 흉터가 하얗고 길게, 우둘투둘하게 솟아 있었다. 옆에 없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 주는 과거의 흔적이었다.
주신도의 몸은 그가 살아온 세상의 축약판이었다. 바람과 칼날이 끊임없이 부딪친 바윗돌 같았다.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이렇게 수많은 흔적이 남지 않았을 텐데. 해림의 눈가가 설핏 일그러졌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바늘이 뚫었을 작은 구멍과 실선 자국이 다른 곳보다 도드라졌다. 손끝에 흉터가 닿았다. 주신도가 멈칫하며 몸을 돌렸다. 아랫배와 옆구리 사이에도 제법 길쭉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저 상처는 언제 생긴지 알았다. 쇠 비린내에 질식할 만큼 많은 핏물이 쏟아진 것도, 손가락을 스치는 숨결이 곧 사그라질 듯이 가늘었다는 것도.
상처에서 손가락을 뗐다. 보고 싶지 않았다. 주신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저와 얼마나 다르게 살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싫었다. 주신도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왈칵 들었다.
이대로 등을 돌려 나가면 어쩌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이곳은 저와 맞지 않는다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어쩌지. 차가운 눈을 하고, 더는 미련 없다는 듯이 훌훌 털고 사라지면.
잡고 싶었다. 뭐든. 주신도가 제 옆에 있어만 준다면 해림은 다 할 수 있었다. 외면할 수도 있고 입을 다물 수도 있고, 울라면 울 수 있고 웃으라면 웃을 수도 있었다. 다시는 그런 어둠 속에 홀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때요.”
목이 멨다. 주신도는 시한폭탄이었다. 언제 터질지 알 수 없었다. 흔적도 없이, 소리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텅 빈 옆자리를 마주할 수도 있었다. 이미 한 번 겪었다. 싸늘한 병실, 침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공간을.
불안했다. 실체가 없었다. 가슴이 주먹 안에서 쪼그라든 듯이 욱신거렸다. 단단하고 넓은 등을 보고 싶지 않았다. 흉터도 눈앞에서 지우고 싶었다. 원망이 눈앞을 가렸다. 사라진 줄 알았던 술기운이 도로 차오르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왜 그랬어요.”
뭐가, 하고 주신도가 되물었다. 해림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발치를 봤다. 그림자가 드리운 바닥이 어둡고 캄캄했다. 오랜 기간, 주신도 대신 제 옆에 붙어 있던 그늘이었다.
긴 시간 속으로만 품었던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답을 알고 싶었다. 묻어 두고 싶었는데, 술김을 핑계로 입에 올렸다.
“날 버렸잖아.”
다음 날이면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그 손을 붙들고 고백하고 싶었다. 희망은 부서지고 차가운 침대만 저를 기다렸다. 비 오던 거리에서 누군가의 등을 주신도라 착각하고 뛰어갔던 순간이 어른거렸다. 외로움이 뼈에 사무쳤던 많은 나날들이 눈가 아래로 몰려들었다.
“왜 떠났어.”
“정해림.”
“왜 떠나는지 알려는 주고 가지. 돌아오겠다는 말만 하고 가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그쪽은 알았어요? 그쪽이야말로 알면 나한테 이렇게 못해. 사람이 왜 그렇게 잔인해요.”
상처는 겉살로 얇게 덮었을 뿐,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곪아서 부푼 고름이 터지듯 해림의 입에서 목멘 소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주신도가 해림의 양팔을 움켜쥐었다. 시야가 어룽져서 주신도가 흐릿하게 뭉개졌다. 눈을 깜박이자 사방이 맑게 갰다.
주신도가 처음 보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굵은 눈썹은 일그러져 미간에 주름을 새겼고, 입술은 허옇게 질릴 정도로 꾹 다물렸다. 부지불식간에 솟은 감정을 온 힘으로 내리누르듯,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푹 꺼졌다.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저에게 안 좋은 소릴 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니. 닥치게 하고 싶은 걸 참았다던 그 소리가 떠올랐다.
이대로 목이 졸릴지도 몰랐다. 목숨이 온전히 주신도의 손에 달렸던 과거처럼 숨을 헐떡거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나를……, 또 떠날 거예요?”
주신도가 언제 저를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뺨 위로 길게 흘러내렸다. 왼쪽 눈동자에서, 오른쪽 눈동자에서 연이어 후드득 떨어졌다. 주신도가 입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다른 곳을 쳐다봤다. 눈빛에 초조함이 담겼다. 어깨는 경직되고 아래팔과 목에 핏줄이 불끈 돋았다, 가라앉았다 하며 펄떡거렸다.
“내가 널 왜 떠나.”
“이곳이 당신과 안 맞으니까요.”
사회가 정한 규율이 주신도에게는 철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있는 거라면, 언젠가 지쳐서 떠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왜 내가 너한테 돌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너 없이는 못 산다고, 살려 달라 말했지만 해림은 진심으로 여기지 않았다. 상황이 어려워서 잠시 저에게 의탁할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고 봤다.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라도 같이 있을 수 있어 좋았다.
“―대체!”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주신도가 목소리를 높였다. 해림이 움찔하며 주신도를 쳐다봤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주신도가 아랫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다른 새끼들이 틈만 나면 사시미 들고 날뛰는데 그런 상태로 어떻게 네 옆에 있어. 조금만 방심해도 그 새끼들이 너부터 조질 건데 어떻게 옆에 있냐고.”
“그…….”
“난 좆 빠지게 구르고 있는데 도련님은 카페에서 그 씨발 새끼하고 하하호호 놀고나 있고. 그러면서 뭐, 나한테 떠날 거냐고. 너야말로 돌지 않고는 그 말 못 하지.”
“날 계속 지켜봤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하지. 어떻게 널 놔둬. 네가 누구하고 놀아날지 알고. 걸핏하면 다른 애들만 신경 쓰고 난 안중에도 없는데.”
“왜요?”
“왜냐니, 당연히 내가 널…….”
주신도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다가 멈칫했다. 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문다.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억지로 밀어 넣는 것처럼 목에 푸릇한 핏줄이 돋았다.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해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대로 가면 도로 원점이다. 해림이 주신도의 팔목을 턱 움켜쥐었다. 그 정도야 손쉽게 뿌리칠 수 있으면서, 주신도가 고개를 돌려 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
“말해요.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신도의 입은 열릴 줄 몰랐다. 해림이 한 발 다가갔다. 거리가 좁아졌다. 해림은 다른 곳은 보지 않았다. 주신도의 입술을 보고 콧대를 타고 올라갔다. 콧잔등을 가로지른 색 옅은 흉터를 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아래로 내리깔린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해림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자꾸만 다른 곳을 헤맨다. 해림이 더욱 바짝 붙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은 재촉과도 같았다. 주신도의 팔을 붙들고 시선을 맞췄다. 말해 줬으면 좋겠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다른 말은 수도 없이 많이 들었지만 왜 제 곁에 남았는지 결정적인 이유는 듣지 못했다. 확신이 필요했다.
눈이 마주쳤다. 주신도의 팔목에서 뛰는 맥에 손바닥에 진동으로 전해졌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해림의 팔을 타고 가슴으로 이어졌다. 진동이 옮은 것처럼 해림의 가슴도 쿵, 쿵 하고 묵직한 소리를 냈다.
“내가, 널…….”
속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치미는 듯이 주신도의 눈가가 설핏 구겨졌다. 이를 악물었다가 숨을 참고, 입술을 물었다가 숨을 뱉었다. 답답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주신도가 사로잡힌 듯이 해림의 눈을 바라봤다. 깜박이지도 않았다. 눈동자의 실선까지 낱낱이 뜯어볼 것처럼 응시했다. 나는, 내가 만 연거푸 뱉다가, 주신도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사랑해서.”
귀에 닿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해림의 눈동자가 물방울처럼 부풀었다. 둥글게 부풀었다가 아래로 투두둑 쏟아졌다. 마주 본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해림이 아, 하고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장맛비처럼 뺨에 죽죽 선을 그었다.
“한 번 더 말해 줘요.”
“내가 널 사랑해서.”
머뭇거렸지만 확고한 목소리였다. 사랑해, 하고 주신도가 못을 박았다. 저도 주체할 수 없는지 다시 한번 사랑해, 하고 해림의 귓가에 깊게 새겨지도록 읊조렸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져 내렸다. 꼴사납다고, 당장 멈추라고 아무리 진정을 해 보려고 해도 눈은 젖고 입술은 떨렸다. 오한처럼 어깨가 떨리는데 가슴엔 손이 델 듯한 불이 피어올랐다.
감추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싫다고, 끔찍하다고,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다는 말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지 해림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주신도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제 마음 같지가 않다. 폭풍우 치는 날 바다처럼 파도가 몰아치는데 그 격동이 가히 저를 다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한없이 침전했다가 하늘에 닿을 듯이 고양되었다가, 어느 날은 눈물이 났고 어느 날은 웃음이 터졌다. 따뜻하다가도 차갑고, 서늘하다가도 뜨겁다.
지금도 그랬다. 속이 술을 부은 듯이 술렁거렸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는지 해림은 알고 있었다. 이미 가슴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우고 꽃까지 피운 감정이었다.
“울지 마.”
울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고, 주신도가 해림의 어깨를 감쌌다. 머리에 입술을 대고 숨이 막히도록 부둥켜안았다.
“제발 울지 마.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서툰 손길로 등을 토닥이고 끊임없이 입을 맞춘다. 사랑한다는 말을 위로처럼 쏟아 내고 서늘해진 해림의 몸을 더 뜨거운 체온으로 안았다. 간간이 바르르 떨리던 어깨에서 추위가 가시고, 속에 들어앉은 응어리도 온몸을 감싼 온기에 서서히 녹았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마요.”
“응.”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고백 외에 중요한 건 없었다. 계속, 계속 말해 달라고 해림이 매달렸다. 주신도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해림을 제 품에 욱여넣을 듯이 껴안고 귓가가 흐무러지도록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말이 해림에겐 너무나 달았다. 그런데도 그만하라고 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온 고백이었다. 더 원했다. 그동안 텅 빈 자리를 메우려면 한참은 부족했다.
두 팔을 뻗어 그 품에 저를 묻었다. 쏟아지는 말을 남김없이 제 가슴에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마주 보며 저 역시 자연스레 사랑한단 말을 인사처럼 건넬 수 있도록, 모자람 없이 차오르도록 흉터 가득한 그 등을 힘껏 그러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