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직장인에게 휴가는 꿈과도 같다. 그 휴가가 일주일 이상이면 환상에 가까웠다. 연차를 붙여 쓰려면 눈치가 보이고, 정당한 휴가를 보내려고 해도 다른 이들과 조율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해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 휴가는 더욱 받기 어려웠다. 보통 여름철에 직급에 맞춰 차례대로 다녀오는데, 거래처에서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회사 전체에 빨간불이 켜졌다. 발등에 타는 숯이 떨어졌건만 누가 감히 휴가를 입에 올릴까. 다들 자진 반납하고 급한 불을 끄느라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하여 가마솥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에 드디어 휴가를 받았다. 제일 고생이 많았다며 황금 연휴에 연차를 붙여 쓰는 사치도 허락받았다. 몸이 고단해 여행이고 뭐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으나,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주신도가 주둥이를 댓 발은 내밀고서 언제 휴가를 받는 거냐고 바가지를 득득 긁어 댄지라 더더욱.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응.」
「어디?」
「휴가 받으면 알려 줄게.」
어디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주신도는 히죽거리고 불길하게 웃기만 할 뿐 끝내 알려 주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 해림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으으, 하고 파티션 너머에서 박 대리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며칠간 일에 시달린지라 머리는 까치가 둥지를 텄고 눈 아래는 숯검정을 문지른 듯이 가뭇가뭇했다. 퀭한 두 눈을 벅벅 비비며 박 대리가 파티션에 팔을 기댔다.
“해림 씨는 내일부터 휴가지? 어디 갈 곳은 정했어?”
“아뇨, 아직.”
“기왕 길게 받은 거 비행기 타고 와. 휴양지는 어때. 접때 보니까 주호 씨는 발리 다녀왔던데.”
아무리 날을 길게 잡았다 해도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라 먼 곳은 후보 목록에서 지웠다. 국내 어디 가까운 곳이나 잠깐 바람 쐬러 다녀오면 되겠지.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있을까.
“괌도 좋아. 나 신혼여행 간 데가 괌이었거든. 근데 세상 참 좁더라. 거기서 고등학교 동창 만난 거 있지. 10년 넘게 소식도 모르고 살았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다니.”
박 대리가 피곤을 잊은 얼굴로 지지배배 떠들었다. 수다를 떨 때 살아나는 사람이었다. 해림이 듣고 있다는 성의 표시로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먼 타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놀라운 우연이긴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또 아니었다.
“참, 해림 씨는 여자 친구랑 둘이 가지?”
“……예.”
여자 친구라. 신체 건강하고 다부진 성인 남자를 여자 친구라고 부르려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해림이 차마 박 대리와 시선은 못 맞추고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돌렸다. 수줍어하는 걸로 보였는지 박 대리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럼 사람 드문 데로 가야지. 방해받으면 재밌게 못 놀잖아.”
신혼여행에서 동창을 만난 사람의 진지한 조언이었다. 해림이 고개를 주억였다. 과거를 아는 사람과 만나는 게 곤란하긴 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이형처럼 한연동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던 이들이라도 마주치면……. 해림과 달리 주신도와 조우하는 상황이 그들에게는 악몽의 재림일 수도 있었다.
휴가 때 어딜 갈지는 주신도와 진지하게 상의해 보는 편이 낫겠다. 해림이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아직 잔업이 남은 박 대리가 잘 가라며 다 쓰러져가는 몰골로 손을 흔들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떡하니 현관에 나와 있었다. 설마. 아닐 걸 알면서도 가슴이 철렁했다. 해림이 다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욕실에도 없고 서재에도 없다. 이름을 부르면 되는데, 그랬다가 아무 반응이 없을까 무서워 섣불리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뭘 그렇게 찾아.”
해림이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걱정이 무색하게 주신도가 미처 못 열어 본 방문을 열고 나왔다. 십년감수라도 한 양 해림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 두고 어디 간 줄 알았어요.”
“내가 어딜 간다 그래. 나 도련님 옆에서 평생 안 떨어질 거야.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 그러다가 주름 생긴다.”
주신도가 해림의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꼴이라 주신도 원망도 못 하겠다. 해림이 안정을 되찾고 주신도를 보는데, 이번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주신도가 입은 하와이안 셔츠가 알록달록하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하얀 바탕에 노랗고 파란 야자수 무늬가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한 번에 사로잡을 듯했다. 저런 옷을 입고도 여전히 잘생겨 보이다니, 이게 콩깍지인지 주신도의 얼굴이 기가 막히게 잘난 탓인지 헷갈렸다.
빤히 쳐다봐도 주신도는 씩 웃기만 하다가 다짜고짜 해림을 납치했다.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조차 알려 주지 않고 일단 차에 타라며 해림의 등을 떠다밀었다.
도착해 보니 공항이었다. 주신도가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건넸다. 용의주도하게 비행기 표도 끊어 놨다. 모든 일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벌어졌다. 눈만 껌벅거리며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었다.
“우리 정말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가 보면 안다니까.”
오는 길에 한 대여섯 번은 물었는데도 주신도는 능청스레 대답을 피했다. 돈은 어디서 났고, 언제부터 계획했고,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도 몰랐다. 장소만이라도 말해 달라고 해도 가 보면 안다며 어린애 달래듯 해림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걱정 마. 시간 맞춰서 돌아올 거니까.”
“정말이죠.”
영 믿을 수가 없어서 해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이름 모를 섬에 해림을 가둔다 하더라도 주신도 성격에 못 이룰 일도 아니었다. 의심 어린 눈초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신도가 어깨를 으쓱하며 앞에 꽂힌 책자를 뽑았다. 성의 없는 손길로 설렁설렁 넘기며 속고만 살았냐고 투덜거렸다.
“생각 같아선 거기다 아예 박아 놓고 싶은데, 참을 거야.”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돌아오는 건 사실인 성싶다. 그러고 보니 홍콩에 끌려갔을 때도 이랬다. 목적지만 알려 주고 아무 사전 정보도 없이 대뜸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갔더란다. 우여곡절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나, 결국 안전하게 돌아왔던 전적이 있었다.
하긴, 어딜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주신도만 옆에 있다면 정글이든 사막이든 설령 바다 한가운데라 해도 무섭지 않았다.
“눈 좀 붙여.”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노곤하니 졸음이 밀려왔다. 막바지까지 서류와 씨름하느라 어깨와 목도 천근만근이었다.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등석의 푹신한 시트에 몸이 빨려 들어갔다.
조막만 한 유리창 너머로 까만 밤하늘이 펼쳐졌다. 공항의 반짝거리는 불빛이 점차 멀어지고, 희끄무레한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해림의 눈도 가물가물해지다가 눈꺼풀이 묵직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종착지가 어디든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래 걸린다는 말이 마이애미에서 한 번 더 비행기를 타고 섬까지 날아간단 의미인 줄은 몰랐지.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대체 비행기를 몇 시간이나 타고 왔는지 따져 보기도 지쳤다. 마지막으로 공항에 내렸을 때는, 대륙을 발견한 유럽인이 왜 땅에 입을 맞췄는지 그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저라도 멀미 나는 배를 타고 몇 달을 항해하다가 처음 육지를 밟으면 감격해서 눈물을 줄줄 흘렸을 터였다.
공항에 내려서 차를 타고, 심지어 보트까지 타고 숙소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해림이 피곤에 겨워 휘청휘청하다가 숙소의 외관을 보고 눈을 비볐다. 해 봤자 어디 호텔이나 리조트를 생각했지, 이런 별장 같은 집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얀 벽과 기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훤히 뚫린 1층엔 술병을 일렬로 정리해 둔 작은 바가 있었고, 가운데엔 오색찬란한 쿠션을 쌓은 널따란 소파가 있었다. 그 너머로는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리고, 지붕 위로 쭉 뻗은 야자수가 바람결에 잎사귀를 다닥다닥 부딪치며 운치를 거들었다. 그 사이에 매달린 해먹도 바람결에 사부작사부작 흔들렸다.
“여기가 우리 숙소예요?”
보면서도 믿을 수 없어 해림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손에서 캐리어를 낚아채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는 사람이 쓰라고 빌려줬어. 저 뒤에는 수영장도 있는데. 가 볼까.”
해림이 자꾸 감기려는 눈을 꾹꾹 눌렀다. 이제 저 아는 사람 이야기엔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참에 그 아는 사람 정체가 뭐냐고 물어보려는데,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끌어당겼다. 해림은 당장에라도 바닥에 쓰러질 듯이 눈 밑이 가물가물하건만 주신도는 거친 파도에 맞서 서핑을 하고 돌아와도 끄떡없을 정도로 쌩쌩했다.
주신도의 손에 붙들려 별장 이곳저곳을 탐험했다. 부엌에는 환영한다는 작은 엽서와 그릇 가득 생소한 과일도 담겨 있었다. 그 너머에는 폭이 길고 바닥이 깊어 보이는 수영장이, 그 뒤로는 칠흑같이 까만 숲이 펼쳐졌다.
2층은 한연동에서 주신도가 머물던 펜트하우스와 비슷한 구조였다. 한쪽 벽이 통유리라 그 밖으로 밤 색깔을 입은 바다가 보였다. 포말이 파도를 타고 하얗게 솟았다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지금이야 빛이라고는 달도 보이지 않는 밤중이라 바다가 잘 보이지 않지만, 내일 아침이면 그 색이 어떨지 자못 기대감이 부풀었다.
마지막 장소는 침실이었다. 장정 두셋이 굴러도 남을 커다란 침대가 방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이불 위로 주신도가 풀썩 쓰러졌다. 환영한다는 인사인지, 뿌려져 있던 붉은 꽃잎들이 주신도에게 밀려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졌다.
“이리 와.”
주신도가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 옆에 앉자 주신도가 해림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졸지에 주신도의 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심이 든 듯 단단하니 꼭 굵다란 목침 같다.
“감상이 어때.”
묻는 목소리에 미미한 흥분이 서려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선물을 등 뒤에 숨기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다가 내민 꼬마처럼 눈동자에 빛이 초롱초롱했다.
“좋아요.”
해림이 솔직하게 말했다. 먼 거리를 오느라 몸은 고달프지만 장소 자체는 잡지에서나 봤던 무릉도원이었다. 어쩌다 우연이라도 한연동 식구들을 마주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어찌 보면 애써서 데려온 보람이 없을 만큼 짧은 대답인데도 주신도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피곤이 묻은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해림의 몸을 껴안았다. 이마가 닿고 코끝에 숨결이 닿았다. 해림의 눈 끝도 포만감을 느낀 듯이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도련님하고 오고 싶었어.”
가슴이 뭉클하게 조여들었다. 말재주가 좋았으면 제 기분을 표현할 한 마디라도 뱉을 것을. 어떤 단어도 문장도 해림의 심정을 대변하지 못했다.
해림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팔을 뻗어 주신도를 껴안았다. 그 품에 얼굴을 묻고 이마를 문질렀다. 주신도가 다 안다는 듯이 해림의 등을 느긋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등을 도닥이다가 위로 올라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도 해림을 꿈으로 인도했다. 아직 짐도 못 풀었는데, 해야 할 게 남아 있는데 눈꺼풀은 천하장사가 와도 못 들 만큼 무겁다. 푹신한 매트리스도 모래 늪처럼 해림을 빨아들였다. 해림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얇은 커튼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햇볕은 옅은 미색으로 부서져 침대 위로 쏟아지고, 뾰족한 야자수 잎사귀들은 서로 부딪치며 사각사각 모래 밟히는 소리를 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혔다가 모래알을 끌고 바다 안으로 돌아가는 달가운 소리 역시 귓가를 간질였다.
포근한 베개에 뺨을 문지르다가 코끝에 스치는 낯선 감촉에 해림이 눈을 떴다. 손을 뻗어 코끝에 대자 어젯밤 미처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은 빨간 꽃잎 하나가 손가락에 붙었다.
집이 아니었다. 해림이 가만히 기억을 반추했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가 꿈결 같아 아직도 현실이 멀게만 느껴졌다.
자리에서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어젯밤은 워낙 피곤해 언제 잠들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려다가, 허리를 감싼 팔이 스르륵 미끄러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따사로운 햇살이 주신도의 단단한 뺨 위에 드리워 있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 봤다. 해림에게 바짝 달라붙어 그 큰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다가, 시선을 느낀 듯이 주신도가 눈을 떴다. 눈동자에 어린 졸음은 두어 번 깜박이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잠에서 갓 깨어 목소리가 낮기 그지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저음이다. 싫지만은 않아서, 해림의 입술 끝이 느슨하게 올라갔다. 어린 연인을 보듯이 푸른빛 도는 눈동자가 따스하게 달아올랐다. 조용하게 지켜보던 주신도가 불시에 팔을 뻗어 해림의 목덜미를 와락 껴안았다.
“더 자. 오늘은 출근 안 해도 되잖아.”
맞다. 휴가였다. 알람도 없었고 늦잠을 자더라도 누구도 저를 재촉하지 않았다. 휴식을 방해하며 불시에 쳐들어올 사람도 없었다. 해림이 마음껏 주신도의 품을 파고들었다. 뜨끈한 체온이 햇볕보다 따스하게 해림을 덮었다.
실컷 잠을 자다가 해가 하늘 가운데 떴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신도도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해림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냉장고 안에 음식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누가 이렇게 채워 놨을까 궁금해하다가, 어제 엽서를 남겨 놓은 관리인이 해 놨겠지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가볍게 요기를 하고,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산책이나 할 겸 바닷가로 나왔다. 짭짤한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바삭하게 밟히는 모래에선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올라오고, 눈 앞에 펼쳐진 바다는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를 부숴 채운 푸른빛이었다. 포말이 해림의 발치까지 밀려왔다가 흰 거품을 남기고 저 멀리 도망쳤다.
한데 아무리 걸어도 이상하게 둘 외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꽤 긴 백사장을 걷고 걸어도 숲과 해변만 이어질 뿐 다른 인가는 없었다. 해림이 한참을 걷다가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시내는 여기서 멀어요?”
“어. 보트 타고 나가야 해. 왜.”
“……보트요?”
차가 아니라. 해림의 말끝이 한 톤 올라갔다. 하긴, 어젯밤에도 별장까지 보트를 타고 들어왔다. 비몽사몽간에 도착한지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응.”
주신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림이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하얀 별장과 숲, 푸른 바다와 하늘 외에는 보이는 게 없다.
“설마, 여기 혹시…….”
“맞아.”
해림이 묻지 않아도 주신도가 미리 알고 대답했다.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한탄 같은 웃음이 터졌다. 맘씨 고운 사람이 빌려줬다기엔 그 스케일이 가히 어마어마했다. 믿지도 않았던 거, 사실이 무언지나 듣자고 해림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요. 여기 당신 거죠.”
“난 도련님이 당신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그렇게 좋더라. 더 불러봐.”
주신도의 눈가가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입꼬리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볼살을 밀며 위로 올라갔다. 슬쩍 드러난 가지런한 이와 조각배처럼 휜 입술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말 돌리지 말고.”
자꾸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가 얄미워 해림이 주신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주신도가 아파 죽겠다며 과한 엄살을 부렸다.
“내가 이런 거 살 돈이 어디 있어. 나 거지라니까. 도련님 없으면 밥도 굶을걸.”
“거짓말.”
“진짜야, 형.”
이럴 때만 사람 마음 약해지게 형이라고 부르지. 아직 진실을 밝힐 마음은 없어 보여 해림이 입을 다물었다. 굳이 취조하듯 캐내서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또 오면 그때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왜 소소한 거짓말을 일삼는지에 대해서도.
한참을 걷다가 햇살에 살이 발갛게 익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야자수가 그늘을 드리운 해먹에 누워 맥주를 마시고, 더할 나위 없는 여유를 즐기다가 오후에 들어 시내에 나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먼 길 왔는데 작은 섬에만 박혀 있기는 아쉬운 일이었다.
섬 뒤편에 작은 선착장이 있었다. 조그만 오두막이 그 옆에 붙어 있는데, 주신도가 문을 똑똑 두드리자 피부가 까무잡잡한 노인이 반색을 하며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어제 잠자리는 괜찮았어요?]
거친 피부와 관자놀이를 타고 오른 검버섯이 인상 깊은 노인이었다. 바닷바람이 새긴 주름이 더욱 깊어지도록 노인이 푸근하게 웃었다. 저를 제리라고 소개한 그가 섬과 별장을 관리한다며, 일이 있으면 엽서에 남긴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넉살도 좋게 말했다.
보트가 물살을 가로지르며 시내에 도착했다. 둘이 머무는 섬과 달리 사람들이 북적북적하고 활기가 가득했다. 바빠 보이는 현지인들과 어딘지 여유가 가득해 보이는 관광객들이 한데 섞여 뭉쳐 다녔다. 괜찮아 보이는 식당엔 앉을 자리도 없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어딜 가든 바다 냄새와 해산물을 익히는 들쩍지근한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
“저기 괜찮아 보이는데. 어디든 사람 많은 곳이면 실패는 안 해.”
주신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식당으로 해림을 끌고 갔다. 홍콩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때도 이랬다. 적응 못 한 해림을 잡고 이 골목 저 골목 끌고 다녔더란다. 그때 한입 먹었던 에그 타르트의 달큼하고 보드라운 필링, 바삭한 크러스트는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났다.
유명한 식당인지 대기하는 줄이 길었다. 화로에 들어간 팔뚝만 한 가재가 벌겋게 익어서 그릇에 실려 나갔다. 이름 모를 커다란 생선구이와 알록달록한 칵테일이 테이블마다 즐비했다.
어서 들어가길 고대하며 기다리는데, 주신도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기도 한다. 해림도 주신도의 시선을 따라갔다.
앞줄에 덩치가 커다란 이가 벽처럼 서 있었다. 밀짚모자, 등판을 가린 티셔츠는 주신도가 입고 온 것과 비슷한 화려한 하와이안 티셔츠였다. 선글라스까지 야무지게 챙겨 쓴 이의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해림도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눈동자에 느낌표가 팍 떠올랐다.
“여기 온다는 말 없었는데.”
주신도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다가 척척 다가가 덩치의 어깨를 두드렸다. 영수가 돌아봤다. 그도 적잖아 놀랐는지 선글라스 위로 흰자가 보였다. 입까지 쩍 벌리고 고개를 홱 돌려 해림을 확인하고는 허허,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형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내가 물을 말인데. 네가 여기 웬일이냐.”
“휴가 왔죠.”
“그러니까, 휴가를 왜 여기로 왔냐고.”
“자메이카에 커피 보러 왔다가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들렀습니다.”
영수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원래는 목적지만 들렀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그 긴 시간에 걸쳐 왔건만 바로 돌아가기는 아쉬운 노릇이었다. 근처에 들를 곳이 어디 있나 살피다가, 우연히 찾은 곳이 여기였다.
알고 보면 주신도가 같이 지내는 동안 바하마, 바하마하고 노래를 부른 게 저도 모르게 암시처럼 남아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번 휴가에 도련님하고 바하마에 갈 거라고, 카페에 찾아올 때마다 은근슬쩍 세뇌하듯 말을 남겼다.
“잘 지냈어요? 오랜만입니다.”
영수가 시선을 돌려 해림에게 손을 흔들었다. 한연동에서는 사람 한 명쯤이야 쉽게 잡을 백정 같더니, 장소와 옷차림이 인상을 백팔십도 바꿔 놨다. 해림이 과거와 전혀 다른 감상을 느끼며 고개를 까닥였다. 괌에서 동창을 만났다던 박 대리의 일화가 과장은 아니었다.
짐작대로 여행객들의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이었다. 영수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 별표 쳐 놓은 페이지를 보여 줬다. 한국인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라고 지은이가 별표 다섯 개를 주었다. 안 가면 후회한다는 과찬도 곁들었다. 어쩐지 외국인보다 익숙한 생김새들이 많이 보인다 싶었다.
그리고 우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해림이 먼저 발견했다. 입구에 막 들어서 자리를 찾아 고개를 돌리던 여자와 해림의 시선이 공중에서 딱 부딪쳤다. 이번엔 표정 변화가 드문 해림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적나라하게 떴다. 여자가 해림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옆에 앉은 주신도를 보고 온 얼굴 근육을 와작 구겼다.
“유리 씨!”
유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주신도가 아, 하고 짜증 섞인 숨을 터트리며 똑같이 미간에 구김살을 새겼다. 이 먼 타국까지 와서, 한국에서 지겹도록 본 얼굴을 또 볼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다. 영수야 언제 어디서 마주쳐도 놀랍지 않은 사이라지만.
해림만 극히 반가워하며 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형이나 천운이면 모를까, 유리는 우연히 만나도 불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유리가 갈팡질팡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테이블에 합석했다. 유리의 가방에도 영수와 똑같은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아주 뒈진 인오까지 다 오라고 하지 그래.”
주신도가 아무에게도 안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리에게 관심이 쏠린 터라 주신도의 허탈한 중얼거림은 허공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넌 여기 왜 왔어?”
묻는 목소리가 매우 아니꼬웠다. 유리가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며 주신도를 의연하게 쳐다봤다.
“제 버킷 리스트라서요.”
“공부한다며.”
“시험 끝났거든요. 머리 식힐 겸 왔어요.”
유리가 척척 받아넘겼다. 오랜만에 본 얼굴인데 어두운 과거는 잠시 묻어 두고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면 안 될까. 해림이 가만히 주신도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주신도가 방해 말고 꺼지라며 뒤집어엎으려다가, 손길을 느끼고 움칫하며 입을 닫았다. 유리가 심기를 건드려 딱딱하게 굳었던 눈썹이 해림의 손길 한 번에 슬슬 누그러졌다.
빨갛게 익은 바닷가재가 테이블의 가운데를 장식했다. 어색했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침묵은 금세 달그락거리며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덮였다. 그나마 대화다운 대화는 대부분 유리와 해림 사이에서만 일어났다.
“어휴, 시험공부 하느라 죽을 뻔했는데 끝나니까 허무하더라고요. 그래도 이제 머리 안 쓰니 편하지. 해림 씨는 요새 뭐 해요?”
“무역 회사 다니고 있어요.”
“맞아. 해림 씨 영어 잘한다고 했죠? 잊고 있었네.”
유리가 손뼉까지 치며 과거 기억을 상기했다. 쑥스러운 기분에 해림이 볼을 긁적였다. 잠시 숟갈을 멈춘 사이에 그릇 가득 하얀 속살이 쌓였다. 주신도가 제 입에는 안 넣고 해림 앞에만 가재 속살로 언덕을 세웠다.
“지금은 어디에서 묵어요?”
“아, 사장님하고 같이 있어요. 별장에.”
“개인 별장?”
“예. 섬에 있는…….”
예상외의 답에 유리의 눈이 보름달처럼 휘영청 벌어졌다. 섬이라는 말에는 입까지 쩍 벌렸다.
“그럼 지금 섬에 둘만 있어요? 별장 한 채 다 쓰고?”
“네. 아는 분이 빌려줬다고 해서.”
해림이 주신도를 흘끗 보고 들은 대로 밝혔다. 유리는 참지 못하고 풋 웃었고 영수는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을 쳤냐고 눈동자만 돌려 주신도를 쳐다봤다.
주신도는 여러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꿋꿋했다. 입맛은 없는지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해림이 제 앞에 놓인 립을 큼지막하게 잘라 주신도의 그릇에 옮겨 담았다.
“형님, 저 놀러 가도 됩니까.”
“안 돼.”
주신도가 딱 잘라 거절했다. 옆에서 듣는 해림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해림이 한 번 더 주신도의 허벅지를 도닥였다.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라는 다독임이었다. 주신도가 짜증이 난 듯이 제 손아귀로 해림의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저도 놀러 가고 싶어요. 여기 해변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가 상상한 거랑 거리가 좀 많이 멀거든.”
유리가 냉큼 영수를 거들었다. 해림은 당연히 괜찮았다. 둘이 있는 것도 좋지만 여럿이 있어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먼 바다 건너에서 이렇게 조우한 것도 기가 막힌 인연이지 않은가.
해림의 마음은 그랬지만 주신도의 눈빛은 불만이 넘치다 못해 불손했다. 기분이 바닥을 친 듯이 입술을 구기다가, 해림이 끈질기게 바라보자 마지못해 허락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 오래 머물 생각 말고.”
그것도 좋다고 영수와 유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해림이 잘했다며 주신도의 손가락을 마주 쥐었다. 주신도가 슬그머니 해림의 손에 손깍지를 끼었다.
갈 때는 둘, 올 때는 넷이었다. 빈손으로 가면 쓰냐고 영수와 유리가 한 짐 바리바리 챙겨왔다. 짐만 보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별장에 눌러앉을 기세였다.
바다와 하늘에 주홍색 물빛이 번졌다. 모래밭에 꺼내놓은 선 베드에 유리가 길게 누워 저녁놀을 구경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더없이 평온했다.
영수는 여기까지 와서 물고기 구경을 안 할 수는 없다며 바다로 뛰어 들어갔고, 주신도는 해림의 옆에 누워 누가 보든 신경 안 쓰고 하얀 손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보는 눈이 있어 피하다가, 유리도 영수도 그러든가 말든가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아 주신도가 하는 양을 내버려 두었다.
“역시 이런 해변이 좋네요. 조용하고, 평화롭고……. 이런 곳을 원했는데. 해림 씨는 좋겠어요. 부럽네.”
“좋지, 그럼.”
대답은 주신도가 대신했다. 유리는 누가 대답해도 상관없었는지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아까 가져온 맥주가 텅 비어 있었다.
“맥주 좀 가져올게요. 두 분 뭐 더 드실래요?”
“나도 한 병 더.”
“해림 씨는요.”
“저는 괜찮아요.”
유리가 다리에 묻은 모래알을 툭툭 털고 별장으로 들어갔다. 영수는 여전히 바위 근처를 빙빙 돌며 물고기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수나 유리나, 둘 다 한연동에서는 상상조차 못 했던 모습이었다. 주신도의 뒤에 천하대장군처럼 버티고 서 있던 험상궂은 남자가 애처럼 물속을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그 누가 감히 그려 봤을까.
“저것들 자고 갈 거 같은데.”
허락은 했어도 여전히 눈엣가시 같은지 주신도의 목소리에 불만이 잔뜩 서렸다. 선글라스 안으로 보이는 눈빛도 불량했다. 해림의 손을 조몰락거리는 걸로는 기분이 덜 풀리는 듯 손목과 아래팔, 팔뚝 아래 조금 말랑말랑한 살과 목덜미와 머리카락까지 손에 넣고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해림이 팔을 제물로 바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1층에 침실 두 개 있으니까 자리 정리해 놔야겠네요.”
“그럴 필요 없어. 아무 데서나 자라고 해. 바다에 빠져 죽지만 않으면 됐지, 뭘 바라. 눈치도 더럽게 없는 것들.”
주신도가 혀를 찼다. 눈빛만 보면 당장 둘과 둘이 가져온 짐을 같이 들어 물 깊은 곳에 처박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영수 씨 칵테일 만드는 솜씨는 좋던데요. 맛있었어요.”
유리가 오자마자 바를 보고 감탄하더니 대뜸 영수에게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며 부탁했다. 영수도 맞장구치며 오랜만에 솜씨 발휘 좀 해 보겠다고 칵테일 네 잔을 순식간에 만들었다.
“예전에 사람 부족할 때는 다 돌아가면서 해서. 나도 잘 만들어. 하나 만들어 줄까.”
주신도가 칵테일을 만들다니, 어울리면서도 어색하다. 해림이 상상만 하다가 네, 하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신이랑 같은 걸로요.”
호칭 정리야 저번에 끝냈다지만, 아직도 주신도의 이름은 입에 붙지 않았다. 주신도는 당신이란 호칭도 퍽 마음에 드는 눈치인지 굳이 고치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해림의 뺨에 입술을 꾹 누르고 주신도가 일어났다.
바통 터치하듯이 자연스레 유리가 맥주를 들고 돌아왔다. 빈자리를 보고는 심드렁하게 선 베드에 도로 누웠다. 맥주를 홀짝이며 해림 씨, 하고 운을 떼었다.
“나는 저 인간이 저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요.”
혹여나 주신도가 뒤에서 엿들을라, 유리가 어깨 너머를 슬쩍 확인하고 말을 마쳤다. 해림도 상상하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첫날을, 폐공장에서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지장을 찍게 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펼쳐진 모든 게 그저 꿈의 한 단면 같기만 했다. 천천히 내려앉는 저녁놀도, 싱그럽게 나부끼는 바닷바람도 모두.
“사장님이 그렇게 많이 변했어요?”
“그럼. 말도 못 하게 변했지. 저 인간 아는 사람 붙들고 물어봐요. 아예 딴 사람이라 그럴걸. 껍질은 같으니 성불 못 한 귀신 씐 거 아니냐고 하겠네. 아까 영수 씨하고 잠깐 이야기하는데 그러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이 확실히 돈 거 같다고.”
관자놀이 옆에서 검지를 빙빙 돌리며 유리가 선글라스 너머로 해림을 쳐다봤다. 적나라하게 쏟아지는 평가에 해림이 가볍게 웃었다. 저 역시 같은 감상이라 돌았다는 표현에 크게 반박하지는 못했다.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덕분에 이런 해변에서 노을 봤으면 됐지. 해림 씨는 행복해요?”
좋은 게 좋은 거. 유리는 예전에도 저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었다. 이상한 일이지. 주신도를 봐도 한연동에서 겪었던 일이 오히려 희미한데, 유리나 영수를 보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유리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손님을 받을 수 있느냐, 괴로움에 차서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유리의 질문은 어색하지 않았다. 해림이 빈자리를 돌아봤다. 주신도가 곧 돌아올 것이다. 어디에 있든, 어디를 가든.
“네.”
대답은 담담하면서 동시에 확고했다. 누가 묻더라도 해림은 같은 답을 내놓을 터였다. 빈자리가 채워진다는 확신이 있는 한, 해림은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 감정을 모르고 살았다. 그림자만 봐도 푸스스 웃음이 새고 바닥을 걸어도 폭신폭신한 솜덩이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마음이 비누 거품처럼 몽글몽글 부풀고 입을 맞추면 매번이 첫 키스처럼 설레고 달콤했다.
해림의 입가에 미소가 들자 유리가 놀란 듯이 돌아봤다. 설마 저렇게 곱게 웃을지는 몰랐다고 온 얼굴로 말했다.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낸 게 민망해 해림이 두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사장만 변한 건 아니었네.”
유리가 혼잣말로 중얼대며 맥주 주둥이를 입에 갖다 댔다. 대화가 끝난 걸 아는 양 버석거리며 모래 밟히는 소리가 났다. 주신도가 양손에 칵테일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해림이 재빨리 손을 내렸다. 발그레 물든 뺨은 노을빛 때문이라는 핑계로 덮을 수 있으리라.
“둘이 뭔 이야기를 그렇게 해. 윤수정 씨, 아직도 궁금한 게 많이 남았어?”
“……됐어요. 사장님 이야긴 하나도 안 궁금해요.”
“윤수정 씨가 말하는 게 참 예쁘지. 그래서 우리 도련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말해 봐.”
주신도가 비죽거렸다. 한연동에서 줄기차게 봤던 모습이 언뜻 비쳤다. 내용 자체는 별것 없지만 장본인 앞에서 너 변했다고 대놓고 밝히기는 어려웠다. 해림이 다른 방법을 찾다가 얼른 칵테일을 홀짝였다. 커피 향이 가득한 한 모금이었다.
“이거, ……영수 씨가 만든 거보다 훨씬 더 맛있어요.”
뒷말은 주신도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성공이었다. 활시위처럼 팽팽하던 주신도의 눈초리가 느슨하게 늘어졌다.
노을이 가라앉으며 수평선이 타는 듯이 물들었다. 농익은 포돗빛과 짙은 남색이 뒤섞이며 바다 위를 덮었다. 별과 달이 하늘 저편에서 이쪽으로 넘어왔다. 영수도 실컷 놀다가 물 아래가 캄캄해져 안 보일 때쯤 돌아왔다.
별장에서도 술자리는 이어졌다. 다들 술이라면 지지 않는 사람들이라 테이블에 금세 빈 술병이 빼곡하게도 쌓였다. 영수는 바에 있는 술을 거덜 낼 기세로 칵테일을 만들어오고 유리는 이런 자리에 소주가 빠져서 아쉽다며 맥주로 목을 축였다.
술자리는 늦은 밤에야 슬슬 마무리되었다. 유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서 안 되겠다며, 해림이 알려 준 침실로 비척비척 들어가더니 이후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영수도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꾸벅꾸벅 졸다가 소파에 누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해림이 서랍에 있던 담요를 꺼내 영수 위를 덮었다. 상은 치우려다가 괜히 시끄럽게 굴어 둘을 깨울라 내일로 미뤘다. 주신도도 남은 술을 마저 비우고 일어났다.
해림이 소금기 남은 몸을 씻고 2층에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길고도 즐거운 하루였다. 우연치고는 과하다만 어쨌든 먼 바다 건너서 아는 얼굴도 만나고, 덕분에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냈다.
주신도는 둘의 등장이 아직도 마음에 안 드는지 눈썹 사이에 가는 주름이 가 있었다. 술기운에 나른해진 몸을 침대 위에서 굴리며, 해림이 주신도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저것들 때문에. 도련님도 그래. 저런 걸 왜 오라고 허락해. 내가 너하고 놀라고 온 거지 저것들 뒤치다꺼리하러 온 건가.”
“그래도 엄청난 우연이잖아요. 난 즐거웠는데.”
주신도가 해림의 목덜미에 이마를 푹 박았다. 넷이 있을 땐 잘만 떠들고 놀았으면서 뭐가 그리 실망스러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섭섭한 게 없지 않아 있겠지 싶어 해림이 위로하듯 주신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주신도가 나지막이 내쉬는 숨결이 헐렁한 옷가지 사이로 스몄다.
“이제 나랑 놀아.”
주신도가 삐진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뜻밖의 어리광이었다. 해림이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자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상의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술기운에 힘입어 다른 때보다 뜨거운 손바닥이 배를 슬금슬금 더듬더니 가슴으로 올라왔다. 손이 품은 의도가 명백했다. 해림이 옷 아래서 꿈틀대는 손을 황급히 쥐었다.
“안 돼요.”
잠들었다고 해도 손님이 있는 집에서는 할 짓이 못 된다. 해림이 찰싹 소리 나게 손등을 때려도 주신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채만 한 고양이처럼 해림을 구속하고 목뒤에 얼굴을 문질렀다. 뺨에 향낭이라도 숨긴 듯이, 그래서 해림의 목덜미에 제 체향이라고 박아 넣을 듯이.
내쉬는 숨결이 귓불 아래에서 흩어졌다. 깃털이 스친 듯이 간지러워 해림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만. 밑에 들리면 어쩌려고.”
“상관없어.”
말려도 소용없었다. 주신도도 만만치 않게 들이부었는데, 술에 취한 주제에 힘이 장사였다. 해림도 질 수 없었다. 져서는 안 되는 게임이었다.
“신도 씨, 그만. 안 된다니까.”
“우리 사이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주신도가 해림의 귓불에 이를 세우며 손목을 잡았다. 해림이 버둥거렸다. 주신도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줬다가 내일 아침 저 사람들을 무슨 염치로 보라고. 다리까지 휘저으며 필사적이었다.
“안 된다고, 좀! 진정해요, 신도 씨. 아, 좀…….”
아무리 말려도 주신도는 바윗돌처럼 해림의 몸 위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해림이 간신히 다리를 빼면 허리가 잡히고, 그 팔뚝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덫처럼 목을 조여 왔다. 종래에는 똬리 속에 먹이를 가두듯이 꽁꽁 싸매서 해림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있는 힘껏 팔을 빼냈다.
“그만해, 주신도. 진짜 적당히 하라고!”
숨까지 턱턱 막혔다. 정신 차리게 할 겸 해림이 팔을 휘둘렀다. 퍽, 소리가 나며 손등에 지끈한 통증이 번졌다. 노린 건 어깨였건만 주신도의 턱이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해림이 급하게 숨을 삼켰다. 뺨과 날렵한 턱선만 보이는 주신도의 옆모습이 심히 불길했다. 침마저 꼴깍 넘어갔다.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혀끝이 얼어서 그조차도 쉽지가 않다.
주신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입술 끝부분에 갓 터진 듯이 새붉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주먹으로 주신도에게 피를 낸 건 처음이라 해림의 눈썹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나 참.”
주신도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상체를 세웠다. 해림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엄지로 입술을 훑자 핏자국이 뭉개진 립스틱처럼 살갗 위로 번졌다. 두툼한 혀가 조갯살처럼 빠져나와 핏물 맛을 보고 입술 속으로 다시금 숨어들었다.
“우리 예쁜 도련님이 이렇게 거친 걸 좋아할 줄은 몰랐지.”
낮게 갈라진 저음이 절 잡으려고 다가온 사자의 목소리 같아 머리 뿌리가 곤두섰다. 핏물을 묻힌 채 올라간 입꼬리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양옆으로 벌어져서 해림의 입술이나 목덜미나 하다못해 뺨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위험했다.
미안하단 말은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도무지 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제 잘못이 크기에, 해림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미…….”
한 마디도 채 뱉기 전에 주신도가 해림의 입을 틀어막았다. 붉게 물든 입술이 답지 않게 야릇했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배 속 깊은 곳이 저릿하게 저렸다. 허벅지 안쪽이 움찔대고 마른입에는 침이 돌았다.
위협과 농염은 얄팍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불안함은 곧 불길처럼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을 달궜다. 올라탄 주신도가 지나치게 야한 탓이었다.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허무한 외침이었다. 주신도 앞에서는 금기도 없고 도덕도 다른 이들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녹아서 사라졌다. 암만 정신을 다잡으려도 해도 어느덧 이성은 희미해지고 한 가지만 갈구하게 된다.
해림이 흘끗 시선을 내렸다. 제 위를 타고 앉은 주신도의 오른쪽 허벅지도 두툼하게 불거졌다. 목울대가 침을 삼키느라 한 번 더 크게 울렁였다. 모르면 아예 손을 대지 않겠지만 아는 맛이 더 그립고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 않던가. 해림은 저 맛을 알았다. 뭉툭한 끝이 어떻게 배 속을 휘젓는지, 어떤 방식으로 미칠 듯이 몰아붙이는지, 뜨겁게 부딪치는 몸뚱이가 어떻게 사람을 녹여 대는지 그 모든 것을.
지푸라기에 붙은 불꽃이 녹은 쇳물처럼 타오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만 마주치면 되었다. 해림이 숨을 삼키듯 입술을 벌리고 혀를 꺼냈다. 짭짜름한 살맛이 혀끝을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가 갈증을 부추겼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 더 길게, 넓게 혓바닥을 펴고 손바닥을 핥았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입술에 번진 핏물보다 붉은빛이 돌았다. 해림의 눈매는 반대로 가느스름하게 뭉그러졌다. 깜박, 하고 나서는 으르렁거릴 듯 포악한 주신도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입을 막았던 손으로는 해림의 머리 옆을 짚었다.
해림이 기꺼이 입을 벌렸다. 먹는 자가 주신도라면, 해림은 언제든 두 팔과 두 다리로 휘감을 수 있었다.
처음 몸을 섞을 때에도 이렇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해림이 숨을 들이켰다. 소리가 자꾸만 터질 듯해 베갯잇을 잇새로 물었다. 퍽, 하고 치고 들어오는 몸짓에 입에 헤벌어지고 겨우 물었던 천 자락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땐 언제고, 지금은 흠뻑 젖어서 입 밖으로 나온 천에 물이 흥건했다.
“흐, 살살, 조금만 살살…….”
피를 본 주신도는 다른 때보다 과격하고 흉포했다. 물린 젖꼭지는 산수유처럼 붉게 익어서 흰 가슴에 도드라졌고, 옅은 분홍색이 도는 유륜도 술 취한 사람 낯빛처럼 익었다. 그 주변을 성벽처럼 두른 잇자국은 피를 내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은 양 깊었다. 희고 매끈한 배에는 두드러기처럼 붉은 순흔이, 허벅지 깊숙한 안쪽에도 짐승이 문 듯 둥근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늘씬한 몸에서 그나마 살집이 포동포동한 엉덩이에도 흔적이 수처럼 놓였다. 등에도, 날개 뼈 주변에도, 특히 목덜미는 얼핏 핏물도 비쳤다. 하룻밤이 지나면 푸릇푸릇 멍이 들 자국들이었다.
“아, 읍……!”
해림이 황급히 손목을 입에 물었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 단단한 벽이 섰다. 해림이 아무리 손으로 밀어도 금이 가긴커녕 부스러기조차 안 나올 굳건한 벽이었다. 밀어내도 소용이 없어 해림은 애꿎은 침대 시트만 움켜쥐었다.
들어올 때도 성급했다. 감히 피를 보게 한 해림을 단죄라도 하듯이 주신도가 거칠게 몸을 열었다. 해림의 아랫도리에서 사정없이 정액을 쥐어짜 입구에 처덕처덕 바르고, 안을 제대로 풀어 주지 않은 채 밀고 들어왔다.
찌릿한 통증에 해림이 이를 악물었다. 지끈거리는 아픔마저 야하기 짝이 없었다. 더 아프게 만들어도 아랫도리는 벌떡 서서 흰 물을 채신머리없이 질질 싸 댔을 터였다. 최음제를 대야로 들이켠 듯이 피부 위로 손가락이라도 스치면 솜털이 쭈뼛 서며 아래에 찔끔찔끔 물방울이 매달렸다.
머리 한구석에는 이곳에 둘만 있는 게 아니라고, 당장 다른 이들이 듣고 깰 수도 있다고 경고를 보내는데, 푹하고 박혀 몸이 들썩이면 모든 걱정이 단숨에 지워지고 눈앞에 하얗게 별이 떴다가 졌다.
아프고도 좋았다. 누가 날카롭고 단단하게 익은 고드름을 뒷골에 쑤셔 박는 듯하고, 아랫배엔 뜨끈한 돌덩이를 넣어 휘젓는 듯했다. 점막을 억지로 넓히며 들어왔다가 나가면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살집에 보조개가 폭 팼다가 풀어졌다.
“하, 하으, 흐흡, ……아! 너무 깊어요, 거긴 너무 깊어서…….”
더 깊이 밀어 넣을수록 넋 놓고 울고 싶기만 했다. 뱃가죽이 이대로 찢길 거 같아 해림이 허리를 비틀었다. 주신도가 잘록한 허리를 손아귀에 말아 쥐고 바투 잡아당겼다. 주름 없이 벌어진 구멍이 꾸역꾸역 기둥을 삼켰다. 기둥이 어떻게든 입을 다물려는 구멍을 억지로 열고 안으로 침입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해림이 이를 악물며 베갯잇에 뺨을 문질렀다. 굵직하기는 햇빛 잘 받고 자란 나무줄기 같아서, 거기에 엉킨 핏줄이 점막을 긁어 대니 눈물이 왈칵 솟을 만큼 욱신거리다가도 검은자위가 위로 휙 뒤집힐 만큼 야한 감각이 등줄기를 오르내렸다.
“엄살은. 다 안 들어갔어.”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해림이 눈물을 툭툭 떨어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배꼽을 향해 꼿꼿하게 곤두선 제 아랫도리 너머로 맞닿은 하복부가 보였다. 사포 같은 거웃이 배꼽 아래까지 타고 오른 거나, 그 주변에 포도 넝쿨처럼 오른 푸른 핏대와 울룩불룩한 근육 같은 게 숨김 없이 보였다. 눈에 비친 장면만으로도 흐으, 하고 야릇한 신음이 터져 해림이 입가를 가렸다.
“그만, 그만 들어와요.”
“싫어.”
“제발.”
“싫다니까, 형.”
형이라는 말에 해림이 어깨를 움칫했다. 주신도가 상체를 숙이며 해림의 귀 아래에 입술을 붙였다. 갈라진 배 근육에 빳빳한 아랫도리가 문질러지고, 톱질하듯 슬겅슬겅 안으로 들어갔다가 빼는 몸짓에 입구가 근질근질했다. 맞붙은 하반신에서 찔꺽거리며 난잡한 소리가 났다.
“아, 이건 싫어요. 이건 너무…….”
느리고 감질나.
해림이 도리질을 치며 주신도의 어깨를 잡았다. 적당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폭풍우처럼 사납게 몰아치면 죽을 거 같아 그만하라고 말리다가도, 이렇게 살금살금 몸을 흔들면 그건 그거대로 모자랐다. 더욱 깊게 들어와 전처럼 사납게 뒤집어 놨으면 좋겠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갈대도 도련님보단 지조 있을 텐데.”
“당신이 먼저……, 아읏, 괴롭히지 마요. 힉, 흐읏, 앗……!”
“내가 먼저 뭐. 내가 잘못하면 주먹으로 때려도, 되나?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폭력적이었어? 나 피 났어. 이거 봐. 형이 주먹으로, 이렇게, 응?”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 ……윽, 아!”
“말만?”
“아니……, 읏, 또……. 그렇게 하면, 나아, 하으…….”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조금씩 더 깊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굳은 점토 덩어리를 부드럽게 풀어 주듯 주물럭거리니 점막이 오물거리며 기둥을 씹고 안으로, 더 깊은 안으로 끌어들였다. 미끈한 혓바닥으로 목덜미와 귓불을, 귓속의 굴곡을 핥자 아래 깔린 배가 물결처럼 푸르르 떨리더니 꽉 막힌 속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해림이 저도 모르게 조르는 것처럼 허리를 들며 엉덩이를 봉긋 세웠다. 비음과 달짝지근한 신음이 자꾸만 섞여 나왔다. 현 위에 활을 켜듯 느릿느릿 아랫도리를 문지르던 주신도가 물렁물렁해진 속살 깊숙한 곳을 꾹 눌렀다. 해림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턱이 자극을 못 이기고 바르르 떨렸다.
후우, 하고 나직한 숨결이 귓가를 적셨다. 해림이 어깨를 움츠리며 침을 삼켰다. 배에 힘이라도 들어가면, 안에 가득 차서 속살을 사방팔방으로 밀어내는 기둥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숨을 내쉬어도, 마셔도 열기는 배 가운데 뭉쳐서 좀체 흩어지지 않았다.
밑에서 자는 이들이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 위로 올라올지도 모르는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건만 몸은 무슨 일인지 더욱 뜨겁게 달궈졌다. 배 속 깊은 곳이 간질거리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혀는 젖고 목구멍은 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불룩 솟아 위아래로 울렁였다. 젖꼭지는 누가 만져 주길 바라는 듯이 꼿꼿하게 서고, 아랫도리엔 이슬처럼 둥글게 물방울이 맺혔다.
말은 하지 않았다. 눈빛만 부딪쳤다. 해림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눈 테두리에서 물이 넘실거렸다. 재촉하고 싶었다. 차라리 빨리 휘몰아쳤으면 좋겠다. 속살이 기둥을 야금야금 물면 내장과 이어진 배꼽이 다 찌릿했다. 얼른 열기를 해소하고 싶어서 초조함마저 들었다.
“나, 빨리. 신도 씨, 빨리…….”
“사과는 안 하고 더 박아 달라고만 조르면 어떡해. 이렇게 야해서 우리 도련님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자지가 그렇게 좋아? 안에서, 후……. 잡아먹는 거 같은데. 씹어 먹으려고.”
“아니, 아, 그런 말 하지 마요. 그거 말고, 그렇게 움직이지 말고……, 흑, 읏.”
다른 때보다 더 붉어 보이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재촉하려고 입을 열면 신음이 크게 터져 나올까 봐 무섭다. 손목만 물고 애가 닳게 주신도를 쳐다봤다. 다른 때는 하지 말라고 말려도 제 고집대로 흔들어 대던 주신도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가만히 해림을 지켜보고만 있다. 그 눈에 비친 저가 어떤 모습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빨리…….”
인내심이 옅어졌다. 수위가 아슬아슬했다. 숨이 막히도록 깊게 푹 들어왔다가, 점막이 다 젖도록 쓸며 나갔다가, 도로 들어와 등골이 저리게끔 온몸을 쥐어짰으면 좋겠다. 그런 정사를 몸이 알았다. 그것만 익숙했다.
“아, 제발……. 그만 애태워요.”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깊게 박으면 무섭다 그러고, 얕게 박으면 또 더 해 달라고 그러고. 어느 장단에 맞춰 줄까요, 형. 그리고 그게 부탁하는 태도야. 이름 불러야지. 내가 누군지, 누가 형한테 자지를 박고 있는지.”
해림이 읏, 하며 신음을 참았다. 형이라는 소리가 달고 야했다. 귓바퀴마저 벌겋게 색이 변했다. 허연 허리를 손으로 잡자 그 부위에만 꽃이 피듯 붉게 익었다. 어딜 만져도 꽃이 필 상태였다.
“어서.”
손이 스멀스멀 올라와 유두를 가볍게 튕겼다. 손가락 사이에 놓고 조몰락거리다가, 앞으로 잡아당겼다가 살 안으로 옴폭 들어가게끔 눌렀다. 해림이 핏줄 선 손등을 잡아도 젖꼭지는 손가락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씨발, 빨리.”
잇새로 새는 목소리가 언뜻 사나웠다. 주신도의 인내심도 나노미터로 작아졌다는 경고였다.
까칠한 거웃이 엉덩잇살을 붉게 쓸고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도 찰나만 지나면 쾌락이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해림이 간신히 입술을 벙긋거렸다. 목소리가 물속에서 낸 듯 작았다. 뭐라고, 되물으며 주신도가 끝까지 몰아붙였다.
“형 안에 있는 자지가 누구 거냐고. 확실히 말해.”
“……너, 흐읏, 주신, 주신도.”
더 벌게질 수 없을 만큼 해림의 온 피부에 짙은 분홍빛이 돌았다. 얼굴을 아래팔로 가리고 간신히 뱉었는데, 잘했다는 칭찬 하나 돌아오지 않고 격렬하게 몸만 부딪쳤다. 해림이 황급히 숨을 주워 삼키며 입을 막으려 했다.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을 머리 위로 내리눌렀다. 아래에서 쾅쾅 들이받듯 쳐올리는 통에 해림의 홉 뜬 눈에서 눈물이 어룽어룽 고였다가 줄줄 떨어졌다.
“흐흑, 흐읍……, 읏, 좀만 살, 살, 천천히 신도 씨, 아으, 이거 아냐, 이거는 너무, 하……!”
뺨을 베개에 문지르고 아랫입술을 아무리 물어봐도 신음은 거푸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좀 전만 해도 빨리 어떻게 해 달라고 재촉한 건 까맣게 잊고, 해림이 울먹이며 치미는 감각을 참았다. 아래가 한계까지 벌어져서 매섭게 부딪칠 때마다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과 입구까지 화끈거렸다. 속살에 기둥이 문질러지면 아픔은 금방 쾌감이 되어 배 속을 훑고 머리카락 뿌리를 쭈뼛하게 세웠다.
“……아!”
아랫배 거죽이 불거질 만큼 깊게도 들어왔다. 해림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제법 크게 터졌다. 바로 단단한 손아귀가 입을 틀어막았다. 해림이 눈동자만 굴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해림을 장난감처럼 들고 퍽퍽 박고 흔들어 대는 이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가 소리 듣고 들어왔으면 좋겠어?”
해림이 고개를 휘휘 젓자 어린애처럼 키득거렸다. 아래는 웃음소리와 달리 몰아치는 기세가 사람 잡고도 남을 만큼 맹렬하다.
푹푹 치고 들어올 때마다 숨이 꼴깍 넘어갈 것만 같다. 살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반죽 덩어리를 쳐 대듯이 난잡했다. 내장을 다 뒤집어 놓을 듯이 밀어붙이는 무시무시한 힘에 허리가 꺾이고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입을 틀어막은 손이 곧바로 턱을 잡았다. 입술이 부딪쳐 신음이 터지는 족족 주신도의 입 안에서 맴돌다 사그라졌다.
“흐읍, 흣……, 아, 응, 흐읍, 신도 씨. 신도야……, 아윽.”
“정해림, 더 불러. 내 이름……. 더. 해림 형, 그렇게, 더.”
어쩌다 입술이 떨어져 이름을 부르면 안 그래도 버거운 크기가 내장에 제 이름도 새길 기세로 더 크게 부풀었다. 굽어서 잘 열리지 않는 그곳을 끄트머리가 꾹꾹 누르고, 그러면 해림의 눈꺼풀과 속눈썹이 후들후들 떨리며 아랫도리에서도 거미줄 같은 점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해림의 젖꼭지에서 젖이라도 짜낼 듯이 꼬집던 손가락이 허리에 안착했다. 손등에 힘줄이 돋도록 허리를 세게 쥐고서 주신도가 몸을 욱여넣었다. 혀가 뒤엉키며 내는 질척거리는 소리와 울먹이는 신음이 방 벽에 부딪혔다. 큰 소리는 못 내는지라 침대가 끽끽거리며 대신 크게 울었다.
“하으, 으, 아윽, 아, 잠깐. 잠깐만, 너무 깊어요, 아, 거기까지는 싫어. 싫……!”
해림이 허둥지둥 몸을 뒤로 뺐다. 주신도가 그걸 놔둘 리 없었다. 허우적거리는 해림을 뒤집어 제 밑에 깔고 그 위에 올라탔다. 둥글둥글한 엉덩이가 납작해지게끔 무게를 실어 누르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아악, 하고 해림이 비명을 터트렸다. 지레 놀라 허겁지겁 손에 잡히는 뭐든 입으로 끌어당겨 물었다. 목울음이 혀를 타고 입술 위로 올라왔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가 후드득 떨어졌다.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아픈지 좋은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반짝이를 채운 풍선이 펑펑 터지고 배 속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머리도 백지였다. 벌어진 입술 옆으로 침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철퍽철퍽 웅덩이 짓밟는 소리가 고막을 적시고 머리 위에서는 짐승이 사냥을 끝마치듯이 몰아붙이는 숨소리가 떨어졌다. 공포와 쾌감이 한 몸이었다. 벼락같은 전율이 정수리 위로 사정없이 연발로 내리꽂혔다.
해림의 무릎이 굽어지며 종아리가 위로 올라왔다. 발끝이 뾰족하게 섰다가 발가락 사이가 물갈퀴 달린 양 활짝 벌어졌다. 다른 발은 시트 위에서 구부러졌다가 박박 밀었다. 붉게 물든 엉덩이가 하체에 눌려 짜부라질 때마다 해림이 힉, 힉 놀란 숨을 삼키며 어깨를 퍼뜩퍼뜩 떨었다.
“으윽, 아으, 신도 씨, 신도야 거기는, 그만, 흐, 아! 제발. 제발…… 주신도, 제발, 하으으, 아, 아!”
신도야, 하는 말에 속살을 짓이기는 몸짓이 말릴 틈 없이 거세졌다. 제발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은 순간이었다. 해림의 허리가 경직되듯 위로 솟았다. 곧게 선 기둥에서 흰 물이 왈칵 튀어 올랐다. 아랫배를 적시고 시트에도 점점이 떨어졌다. 뭉개진 엉덩잇살이 부들부들 떨리고, 허벅지 안쪽도 푸들푸들 잔 경련이 일었다.
해림이 털썩 쓰러졌다. 주신도는 이제 시작이었다. 쓰러진 해림의 허리를 뒤로 잡아당겨 무릎으로 서게 했다. 힘이 빠져 상체는 앞으로 쓰러지고 엉덩이만 주신도의 아랫도리와 맞붙었다.
뒤에서 맞붙자 결합이 한층 깊어졌다. 기둥이 아까 미처 못 들어간 후미진 곳을 후벼 팠다. 해림의 눈앞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저가 내지른 신음을 누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는 이성이 있을 때나 느낄 사치였다.
“아, 아읏, 아, 흐윽……, 신도 씨, 잠깐만요, 살려 줘요. 그만해. 나, 나 또……!”
씨발, 하는 욕설과 정해림, 하는 낮은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퍽, 하고 배 속을 후려 맞았다. 더 깊게 들어가려는 듯이 주신도가 몸을 밀어붙였다. 뿌리까지 다 삼키자 엉덩잇살에 작은 보조개가 패고 해림의 뱃가죽에 낯선 윤곽이 일어섰다.
점막이 안에 든 기둥을 잘라 먹을 듯이 죄는 통에 주신도의 입에서 낮게 신음이 터졌다. 간신히 몸을 뒤로 물렸다가 허벅지에 근육을 세우고 욱여넣자, 입을 다물고 안 열어 주던 속살 구석이 문을 열었다. 그 안에 폭죽을 터트리듯 하얗게 쏟아 냈다.
해림이 시트를 그러쥐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말간 침이 턱 끝에 모이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이 흐릿했다. 머리 옆에 기둥처럼 버티고 선 팔뚝에 핏줄과 힘줄이 원래 새겨진 물결 조각처럼 일어났다.
배 속을 역류하는 미적지근한 액이 등골을 핥는 듯싶었다. 짜릿한 감각에 아랫도리에서 남은 흰 물을 핏핏 뱉어 냈다가 투명한 물도 조르륵 흘렸다. 떨림이 발끝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허벅지와 허리로, 허리에서 날개 뼈와 어깨와 눈꺼풀로 올라왔다가 머릿속을 훑고 전신으로 퍼졌다.
여운이 긴 절정이었다. 오한이 드는 사람처럼 몸이 떨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에 잔 떨림이 거푸 일어나 막기 바빴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다리를 끌어안으려 해도 등 뒤에 무게가 실려 할 수 없었다. 주신도가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이마에, 발긋하게 익은 어깨에, 열이 남아 보드레한 뺨과 목덜미에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정신은 천천히 돌아왔다. 아직 여운이 몸 깊숙한 곳을 들쑤셨지만 주변을 돌아볼 여유는 찾았다.
수치심은 그제야 몰려와 해림이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워서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 아침 그들의 얼굴을 어찌 볼까. 쾌락에 눈이 멀어 주신도에게 장단을 맞춰 준 제 죄도 컸다. 아니다. 주신도보다 제 죄가 훨씬 무거웠다. 아무리 주신도가 달려들어도 연장자인 본인이 말려야 했다. 야해 빠진 그 얼굴을 보고 좋다고 손바닥을 핥다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우리 어떡해요.”
소리 죽인 목소리에서도 떨림이 가시질 않았다. 어깨도 나비 날갯짓하듯 가늘게 흔들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아래에 들렸을 거예요.”
“형 신음이 크긴 했지. 너무 좋아하던데. 이거 봐. 정액 말고도 질질 쌌잖아.”
주신도가 증거랍시고 흥건하게 젖은 뱃가죽을 문질렀다. 태평하고 뻔뻔스러운 그 모습에 해림이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모래 더미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베개를 끌어당겨 타오르는 눈코입을 가렸다. 머리 껍질까지 새빨갛게 익었을 게 분명했다.
해림이 부끄러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열이 아직 식지 않은 손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작아진 음낭을 조물거리다가 둔덕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해림이 움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딜 만져요. 손 치워요.”
“왜. 안에 넣고 있게? 나야 좋지. 임신 가능성도 높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임신 타령에 해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신도가 히죽거리며 해림의 불퉁한 입술에 뽀뽀를 쪽쪽 해 댔다.
“우리 도련님은 가끔 보면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 같단 말이야. 나보고 거짓말한다는데 사실 도련님이 훨씬 잘하는 거 아니야? 이리 와. 한 번으로는 아쉽잖아.”
“안 아쉬워요. 아, 만지지 말라니까. 나 피곤해요. 잘래.”
“앙탈 그만 부리고. 한 번만 더 하자, 형. 이번엔 착하게 할게. 응? 천천히, 소리도 안 내고……. 아, 정액 흘리지 마. 아깝잖아.”
아래로 진득한 흰 물이 흘러내리는 기분에 해림이 엉덩이를 움칫했다. 얼마나 많이 싸질렀는지 액이 배 속에서 꾸물거리다가 음낭 위로 느른하게 떨어졌다. 주신도가 혀를 차며 검지로 정액을 훑고 도로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해림이 새된 숨을 삼키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 말라니까 왜 자꾸 그래요.”
더는 수치심을 느끼기 싫어 손을 피하자 주신도의 미간에 대번 주름이 잡혔다. 고개가 삐딱해지고 입술도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왜. 저 새끼들이 들을까 봐? 무슨 상관이야. 누가 초대했어? 지들이 제 발로 쳐들어왔는데 내가 그 사정을 왜 신경 써야 해. 도련님도 신경 쓰지 마. 신경 쓸 필요 없어. 형은 나한테만 신경 쓰면 돼.”
한 번만 더 거절했다가는 자는 두 사람을 깨워 바다에 처박아 버리겠단 협박이 깃든 목소리였다. 주춤주춤 도망치는 해림을 주신도가 냉큼 잡아다가 품에 끌어안았다. 버둥거리는 해림을 누르고 다리를 벌려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나 아직 입술 아파, 형. 여기 많이 찢어진 거 같은데.”
반항하던 해림이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주신도가 아직 풀 죽지 않은 기둥을 구멍에 대고 눌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누글누글한 속살이 집어삼켰다.
하, 하고 동시에 비슷한 신음이 터졌다. 주신도가 쾌락과 충족감에 겨워 내뱉었다면, 해림의 신음엔 체념과 약한 거부와 다시금 타오르려는 감각을 죽이려는 인내가 담겨 있었다.
“살살한다니까.”
이번에도 거짓말이지. 이렇게 좋아하는데 말릴 수도 없고. 해림이 포기하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시트를 쥐었다. 아아, 하고 신음과 탄식이 모호하게 섞인 한숨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신음을 죽이려는 해림을 도와주듯이 주신도가 입술로 입술을 덮었다.
침대 다리가 또 한 번 바닥을 죽죽 긁으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침실과 혹은 그 아래까지 은밀하게 울려 퍼졌다. 몸 부딪치는 소리가 이내 파도 소리와 비슷하게 젖었다. 깊어지는 입맞춤처럼, 밤도 이슥하게 깊어졌다.
* * *
한숨도 못 잤다. 유리가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퀭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은 따사롭게 모래알을 비추고 파도는 부드럽게 일렁이며 여기가 집이 아님을 일깨웠다. 바람 소리와 닮은 파도 소리가 창문을 넘어 유리가 앉은 침대까지 다가왔다.
밤새 들었지만 새삼스럽다. 유리가 진저리를 쳤다. 어제 밤잠을 설치게 만든 소리가 저 소리와 몹시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어디서 고양이가 우나 싶었다. 노곤하게 자다가 소음이 거슬려 눈을 떴는데, 눈을 뜨고 나니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렸다.
진원지는 머리 위였다. 집은 좋은데 방음은 그렇지 않았다. 벽이 얄팍하기 짝이 없었다. 삐걱거리며 일정한 박자로 침대가 흔들리는 소리가 밑에까지 쟁쟁 울렸다. 신음은 또 어떻고. 막겠다고 읍읍거리기는 하나 간간이 터지는 한 음 높은 신음과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 울먹이며 그만하라고, 죽을 거 같다고 말리는 소리, 나중에는 심지어 사람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렸다.
한 군데에서만 들리면 말을 안 해. 온 방을 굴러다니면서 몸을 비벼 대는지 머리 위에서 들렸다가 벽을 타고 소리가 내려왔다가, 저쪽 끝에서 들렸다가 활짝 열린 창가를 통해서도 들렸다. 쿠당탕 뭔가 넘어지는 소리, 뭔가 부딪치는 소리 또한 빠지지 않았다.
남들에 비해 청력이 예민하기는 하나 이런 소리까지 들을 줄은. 한연동에서 못 볼 꼴 다 봐서 이런 거에는 이골이 났건만, 오랜만에 들리니 적응이 되질 않았다.
헛기침을 해 볼까, 그러면 저쪽이 알아채고 소리를 죽일까 잠시 고민도 했으나 이행하지는 않았다. 주신도 성격에 유리가 인기척이라도 내면, 그래서 해림이 강렬하게 거부하면 당장 제 머리채를 쥐고 섬 어디 조용한 곳에 파묻어 버릴 게 자명했다.
해림도 해림이었다. 그렇게 사람 애간장 다 녹이는 목소리로 애원하면 그게 불을 붙이는 꼴이지 끄는 꼴이겠는가. 주신도가 좋아서 미쳐 날뛰는 게 보지 않아도 선명했고, 그런 그림을 순간이라도 그린 자신이 유리는 너무나도 싫었다.
후회는 흘러흘러 왜 바하마에 왔는지 그 이유를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왜 하필 여기였지. 왜 하필 TV에서 바하마 여행기를 보게 됐을까. 돼지들의 천국이며 이구아나가 살아 숨 쉰다는 섬, 상어를 코앞에서 보는 다양한 경험과, 푸른 바다에 휩싸인 천국 같은 휴양지라는 그 설명에 껌벅 속아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그깟 식빵 쪼가리를 돼지한테 던져 주는 일과 지느러미 흔들어 대는 상어가 뭐라고. 피부 쭈글쭈글한 못생긴 파충류들이 뭐라고!
달콤한 칵테일 한 잔과 싱그러운 오션 브리즈는 좋았다 해도, 아는 사람 둘의 신음을 밤새 듣고 있자니 아름다운 기억마저 훼손되는 것이었다.
사람 한 명 잡아먹는 소리는 새벽빛이 뜨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뚝 멎는 게 해림이 기절이라도 한 성싶었다. 그제라도 눈 좀 붙이려 했는데, 이번엔 파도 소리가 야한 신음과 닮아 잠이 오지 않았다.
하여 꼴딱 새고 아침이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수만 대충 하고 머리를 묶고서 비실비실 방을 빠져나왔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 너른 침대에 몸을 묻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주신도와 영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둘 다 잘 먹고 잘 잔 양 얼굴에서 번드르르 윤기가 났다. 특히 주신도는 밤새 혼자서 몸에 좋은 보양식을 다 처먹은 듯이 생기가 휘황찬란했다. 유리만 푸석푸석한 얼굴로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사만 하고 빨리 가자. 마음을 먹고 고개를 들었다. 영수가 유리 앞에 토스트와 삶은 계란, 샐러드를 소담하게 담은 그릇을 내려놨다. 오렌지 주스도 옆에 놨다. 한연동에서 종종 먹던 메뉴였다.
“고마워요.”
밤을 새워서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예의상 샐러드를 한입 물었다. 입 안이 꺼끌꺼끌했다.
간신히 음식을 욱여넣으며 둘을 쳐다봤다. 영수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곱만큼도 모르는 듯 해맑았고, 주신도는 잠을 설치게 만든 장본인 주제에 뻔뻔한 얼굴로 단 냄새가 풀풀 풍기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둘 다 빨리 먹고 꺼져. 관리자한테 연락해 놓을 테니까.”
예, 하고 영수가 속도 좋게 대답했다. 유리가 오렌지 주스로 목을 축였다. 해림이 안 보였다. 하긴, 어젯밤 들리는 신음으로 미루어 볼 때 오늘 아침에 멀쩡하게 걸어 나오면 그게 사람일까, 괴물이지.
“해림 씨는요?”
그래도 물어봤다. 주신도가 커피 잔을 내려놨다. 웃고 있는 입매와 달리 유리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지나가던 개미가 해림에게 관심을 줘도 구둣발로 짓밟아 버릴 인간이었다.
“그건 왜 물어.”
“……살아 있어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주신도 손에 죽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힐 건데. 걱정하면서도, 잠을 한숨도 못 잔 억울함과 분노에 유리가 울컥했다.
주신도가 예상과 달리 피식 웃었다. 뿌듯함이 가득한 미소였다. 오래 굶주렸다가 포식한 짐승 같기도 하고, 번식에 성공한 수컷처럼 여유롭기도 하다. 나른한 눈매와 입가가 인정하기 싫도록 야스럽다. 유리가 밤새 소음에 시달린 걸 알아차렸으면서도 미안한 기색은 한 터럭도 안 묻어 있었다.
“설마 내가 도련님을 죽였을까.”
어젯밤에 들은 걸로는 잡아서 뼈째 발라 먹던데. 뼈라도 남아 있을려나 몰라. 저 성격에 뼈도 오독오독 씹어 먹었겠지.
……아서라. 더 관심 줬다가는 제 기분만 더럽다. 한연동에서 그 난리법석을 쳐 댔지만 결국 둘은 손잡고 행복해하지 않았던가. 커플 일에 훈수나 관심 둬서 잘 된 역사가 없다. 미래야 모를 일이나 지금으로 봐서는 해피엔딩에 가까우니 그걸로 되었다.
음식을 남기기는 싫어 유리가 토스트를 크게 베어 물었다. 얼른 여기를 빠져나가야겠다 싶어서 먹는 속도를 열심히 올렸다. 영수가 커피를 타 준다기에 잠시라도 시간을 줄이려고 거절했다. 영수에게도 빨리 탈출하자고 눈치를 보내자 그제야 그가 아쉽다는 듯 그릇을 비웠다.
주신도는 유리와 영수가 아침을 먹는 동안 쟁반에 이것저것을 담았다. 요리하는 뒷모습도 놀랍거니와, 둘에게 준 음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찬이었다. 탑처럼 쌓은 팬케이크에 정성이 소복소복하게도 담겼다.
“다들 알아서 잘 가. 인사는 됐어.”
그러더니 둘만 남기고 위층으로 총총 올라갔다. 주신도의 등 뒤로 존재하지 않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환영이 보였다. 유리가 입에 든 샐러드를 꿀꺽 삼키고 무겁게 탄식했다.
“영수 씨.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여기까지 따라왔을까요.”
“왜,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요? 전 바로 잠들어서.”
“정말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믿을 수가 없었다. 한연동에서 기척에 예민하기로는 주신도 버금갔던 영수가 어젯밤의 24세 이상 관람 포르노를 못 들었을 리가.
그런 유리를 보며 영수가 푸근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홍색 고무 덩어리였다. 말랑말랑하니 귓구멍에 넣으면 부풀어 어느 소리도 안 들리게끔 잘 막아 줄 것 같다.
“이거 없어요? 여행 필수품인데.”
그럼 그렇지. 여기까지 오며 귀마개를 준비하지 않은 제 어리석음을 탓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이 별장에, 이 나라에 오는 게 아니었다. 하고 많은 휴양지들 사이에서 하필 주신도와 같은 시간, 같은 곳에 머물다니. 호젓한 해변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짓을 했다.
그릇을 닥닥 비우고 얼른 일어났다. 머뭇거리다가 신체 건강한 둘이 아침에 한 판 더 뜨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끔찍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서둘러 제 짐을 가지고 유리가 방을 빠져나왔다. 그림 같은 저녁놀과 인적 드문 아름다운 백사장도 이제 더는 아쉽지 않았다.
* * *
하루 종일 몸이 노곤했다. 생선으로 치자면 살점 하나 안 남기고 죄다 발라 먹힌 듯싶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었다. 밥술 뜰힘도 없어 주신도가 주는 대로 아기 새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받아먹었다. 몸을 씻고 싶어서 욕실로 가다가 무릎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고, 주신도에게 안겨 온몸 구석구석, 속살 깊은 곳까지 씻겼다.
애기처럼 먹고 자고 씻는 것까지 주신도의 손을 빌렸다. 나중에는 민망해서 눈만 마주쳐도 뺨이 붉어졌다. 아무리 시달렸더라도 다 큰 성인이 할 도리가 아니었다.
반면 주신도는 해림이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는 게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수발을 들었다. 해림 옆에 누워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 볼살이 밀리도록 입을 맞췄다가 쓰다듬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가 저녁놀이 가라앉은 후에야 해림이 눈을 떴다. 파도 소리와 다른, 물살을 헤치는 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렸다. 창문을 열자 그 아래로 푸른 물이 가득 담긴 수영장이 보였다. 그 안에서 범고래처럼 유유하게 유영하는 인물이 한 명 말고 달리 있을까.
수영하는 건 처음 봤다.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해림이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계단을 내려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물살을 가로지르는 팔이 거침이 없었다. 한 번 팔을 뻗을 때마다 앞으로 시원스레 헤치고 나갔다. 해림이 물이 넘실거리는 수영장 테두리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주신도가 반대쪽 끝을 찍고 이쪽으로 돌아왔다. 해림을 봤는지 중간에 멈춰 섰다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물 아래 어른거리는 색이 군더더기 없는 살색이다. 야밤에, 볼 사람이라고는 해림뿐이라 그런지 나체로 물을 가로지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나무줄기처럼 단단한 등줄기가 수면 아래에서 일렁였다. 해림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긁었는지 손톱자국이 날개 뼈 주위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저건 분명 약과이리라. 욕실 거울에 얼핏 봤던 제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뺨부터 발등까지 잇자국과 순흔이 안 새겨진 곳이 없었다.
주신도가 느릿느릿 해림의 발치에 팔을 걸쳤다. 키가 워낙 커서 수심이 깊은데도 머리는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게 꼭 심해에 사는 인어가 인간답지 않은 꼬리를 물속에 감추고 상체만 내민 듯이 보였다. 나긋하게 접힌 눈꼬리가 조금만 방심해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처럼 요사스럽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주신도가 올려다봤다. 물방울이 머리에서 어깨로, 쇄골과 가슴으로 궤적을 남기며 떨어졌다.
“안 추워요?”
“응.”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약간은 쌀쌀했다. 해림이 허리를 굽혀 물속에 손을 넣었다. 바람보다 따스한 물결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이 정도면 감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저 체력에, 저 건강한 신체에 감기 걱정이 어불성설이긴 했다.
“도련님도 들어와.”
“저는 괜찮아요.”
점잖게 거절했건만, 주신도의 눈동자에 짓궂은 장난기가 번뜩했다. 아뿔싸, 해림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주신도가 먼저 발목을 낚아챘다. 어라 하는 사이에 풍덩 빠져 커다랗게 물보라가 일어났다.
수심이 깊어 해림의 웅크린 몸이 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공기 방울이 방울방울 뭉쳐 해림의 코와 입을 빠져나갔다. 주신도가 바로 팔을 뻗어 해림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해림도 주신도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디뎌도 머리를 수면 위로 빼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팔에 힘을 주고 주신도의 목에 매달렸다.
푸하, 해림이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당연하게 온몸이 젖었다. 흰 셔츠는 팔이며 가슴과 배와 등에 착 달라붙고 헐렁한 반바지도 허벅지에 휘감겼다. 머리는 축 늘어져 이마에 해초처럼 달라붙었다. 물 먹은 생쥐 꼴이 우스운지 주신도가 푸핫, 하고 소년같이 키득거렸다.
“아, 진짜.”
빠트리지 말라는 속뜻을 알아들었으면서. 미간을 찌푸리자 주신도가 해림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드러난 흰 이마에 입을 맞추고 제 이마도 콩 맞댔다.
“왜, 좋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물에 한 번은 들어가야지.”
“그래도. 이렇게 예고 없이 빠트리면 어떡해요.”
“미리 알려 주면 도망갔을 거 아니야.”
주신도가 해림의 엉덩이 아래로 팔을 걸고 들어 올렸다. 갑작스레 몸이 위로 솟아 해림이 화들짝 놀라며 주신도의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마주 닿은 맨살이 다른 곳보다 뜨거웠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체온을 뺏어가기에, 해림이 따스한 곳을 찾아 몸을 붙였다.
갑작스레 물에 빠졌는데도 화가 나기는커녕 못된 장난에 당했다는 당황만 잠깐 들었다가 말았다. 짜증도 나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고 씩 웃는 얼굴을 보면, 왈칵 치민 짜증도 어느 순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침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은은한 달빛이 수면 위에 드리웠다. 너울처럼 일렁이는 물결에 달빛이 어그러지며 타일 위로 밀려 나갔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었다. 지금껏 여행이라 해도 큰 감흥은 일지 않았는데, 주신도 말마따나 변덕이 이리 커서 이번엔 가는 시간의 꼬리라도 잡고 늘어지고 싶을 만큼 아쉬웠다.
해림이 주변을 둘러봤다. 풀벌레 소리, 파도 소리 외에는 사위가 고요했다. 항상 사방을 에워쌌던 시끄러운 도시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물 위로 떨어지는 불빛과 달빛만이 전부였다.
아무도 없는, 단둘만 있는 공간에서.
“이제 말해 줘요. 여기 당신 거죠.”
이곳을 떠나기 전에 궁금증을 해결해야겠다며 해림이 물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눈가를 설핏 구겼다.
“우리 도련님이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어.”
“어서. 거짓말 말고.”
주신도의 양 뺨에 손을 올렸다. 뺨을 꾹 누르자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그 입술로 주신도가 해림의 입술을 훔쳤다. 눈빛에서 장난기가 빠져나갔다.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가 무겁고 진지했다. 물결에 비친 달빛이 주신도의 눈빛에도 담겼다.
“어. 내 거야.”
“집에 있는 침대하고 가구도 다 당신이 샀고?”
“응.”
“왜 다른 사람이 줬다고 거짓말했어요.”
“도련님이 나 버릴까 봐.”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요.”
“거지라고 하면 불쌍해서 옆에 끼고 있을 줄 알았지. 옛날에도 그랬으니까. 아, 그때는 그냥 갔지만.”
“옛날이요? 우리가 만난 적이 있어요?”
옛날에 주신도를 만난 적이 있던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떠오르는 게 없다. 해림이 갸웃했다. 주신도가 그럴 줄 알았다며 해림의 코끝에 제 코끝을 문질렀다. 젖은 살결이 부딪치는 게 간지러워 해림이 작게 키득거렸다.
“그래. 도련님과 예전에, 아주 예전에 만난 적 있어. 아마 기억 못 할 거야. 마주친 순간이 되게 짧았으니까. 그게 언제였냐면…….”
아주 멀고 먼 과거로 날아가는 이야기였다. 해림이 주신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슬펐던 그 목소리가 나붓나붓 과거로 돌아갔다.
물속은 따스했고, 마주 닿은 가슴에서는 파도같이 느린 고동 소리가 났다. 해림은 웃고, 찌푸리고, 종종 입술을 물며 주신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보다 어린 주신도를 제 기억 옆에 그려 넣으며 미처 모르고 지나갔던 과거를 아쉬워했다.
예상치 못한 휴가의 마지막 밤이었다. 소곤거리는 둘의 목소리처럼 잔잔한 달빛이 물결 위로 길게 수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