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길드] 벌꿀오소리: 잉? 맞네! 랭커! 법사 길드 아니셨어요?
[길드] 블랙체리: 아 네 맞아요ㅋㅋ
법사 길드는 <버프하면 사망> 길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무엇이든 줄여 불러야 만족하는 민족의 흔한 결과물이었다.
[길드] 벌꿀오소리: 법사 길드도 레이드 랭킹 15위 아닌가요? 뭐지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길드] 블랙체리: 법사 길드 망해서 다 흩어졌어요 ㅠㅠ
[길드] 카젤: 헐? 그럼 레이드 안 하세요?
[길드] 블랙체리: 뭐... 어떻게든 되겠죠ㅋ
설마 이번 랭킹은 완전히 포기한 건가?
라나탈의 각 클래스 랭킹 선정 기준은 아이템 레벨과 레이드 보스별 점수, 업적 점수, PVP 점수 등 많은 부분이 합산되어 들어간다. 그중 가장 비중을 크게 차지하는 것은 ‘레이드’였다. 레이드를 함으로써 아이템 레벨도 올릴 수 있고, 보스 점수도 들어가게 되니 중요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갈 곳이 없었으면 정규 레이드 팀이 있는 이곳에 왔을까. 그러고 보니 다른 상위권 길드에서 신규 모집한다는 글은 못 본 것 같다.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길드] 블랙체리: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죠ㅋㅋㅋㅋㅋ
[길드] 카젤: 파이팅ㅠㅠ
[길드] 벌꿀오소리: 파이팅ㅠㅠ22
[길드] 블랙체리: 네에...ㅎ
[길드] 카젤: 퀘스트 하다 모르는 거 나오면 물어보세요
[길드] 블랙체리: 네ㅋ
기존에 있던 길드가 사라지고 이곳까지 온 블랙체리를 보고 있자니 제 과거를 보는 듯해 주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저도 길드가 사라지고 막공9)을 전전하다 겨우 자진신고 길드에 온 것이니까.
동병상련. 어쩌면 주하의 마음은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레이드도 제대로 못 할 텐데, 최소한 그가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블랙체리가 길드에 들어오고 나서 또다시 단체 길드원 접속 알림이 떴다. 이제야 랭커 길드다운 접속률을 자랑하자 한시름 놓였다.
“어? 지역 넘어가네.”
복작복작했던 길드에 신경 쓰다 보니 퀘스트는 다음 지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키보드 M을 눌러 지도를 열자 지역의 전체 모습이 보였다. 처음 대륙에 넘어왔을 땐 맵 전체가 뿌옇게 가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숨겨져 있던 지역 대부분이 열려 있었다. 퀘스트를 하며 이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도가 열리는 시스템이었다.
지도의 90%가 오픈됐다는 것은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뜻. 커다란 산맥 하나를 정복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퀘스트를 따라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자 스킵할 수 없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네임드 NPC의 등장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펼쳐지는 동안 주하는 팔을 뻗어 스트레칭했다.
“으…… 찌뿌둥해.”
관심 없는 주하와 다르게, 라나탈의 메인 스토리는 꽤 잘 만들어져 있어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난세에서 운명의 별을 타고난 주인공이 시련을 이기며 영웅으로 성장하는 내용이 주된 스토리였다. 클리셰처럼 흔한 내용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연출이나 스토리의 개연성, 그리고 네임드 NPC의 캐릭터 디자인이 압도적으로 훌륭했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연출력과 네임드 NPC가 하드캐리 했다며 엄지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메인 스토리는 라나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하지만 지금의 주하에겐 합법적인 휴식 시간에 불과했다. 스토리를 하나하나 보며 가다간 뒤처지는데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나중에 여유 있을 때나 찾아보겠다며 지키지도 않을 다짐을 하는 그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스토리라고 해도 초반은 다 똑같네.”
주하는 턱을 괴며 모니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리 스킵충이라고 해도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NPC들의 반응과 퀘스트 목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게 있다.
처음엔 대부분 “멧돼지 좀 잡아 주겠어? 가져오면 보상을 줄게”와 같은 대사와 함께 간단한 퀘스트를 받는다. 그렇게 퀘스트를 하나씩 깨다 보면 점차 성장하여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데, 신규 대륙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 영웅 타이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야 새로운 대륙에서도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번 확장팩도 어김없이 그 절차를 똑같이 밟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라나탈은 초반 NPC 심부름꾼 일만 잘 버틴다면 충분히 즐길 만한 스토리였다.
김이 다 빠져 단맛만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주하는 잠시 휴식을 즐겼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간 잘 가네. 점검 기다릴 때는 그렇게 안 가더니.”
게임에 접속했을 때만 해도 어두웠는데, 지금은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단순히 시간으로 확인하는 것과 다르게 현실로 와 닿는 아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이없는 점은, 점검을 기다렸던 새벽엔 피곤함을 느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다. 방금 일어나서 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은 기분이랄까.
제가 먹고 있던 콜라가 에너지 드링크였던가 싶고. 정말 고인물은 어쩔 수 없는 건가. 괜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때마침 영상이 끝났는지 카젤 캐릭터가 나타났다.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다시 퀘스트에 집중하며 플레이를 하는 사이 길드원들이 이것저것 물어 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퀘스트 속도 차이로 인해 같은 질문이 여러 번 나오긴 했지만, 주하는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물론 당근 퀘스트를 알려 줬을 땐 길드 채팅창도 지역 채팅창처럼 비속어가 남발했다. ***으로 이루어진 향연 속에서 벌꿀오소리만이 ㅋㅋㅋㅋ로 자신의 빡친 기분을 표현했다. 그게 욕설보다 더 섬뜩해 보여서 길드원들은 한동안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퀘스트를 따라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길드] 벌꿀오소리: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 벌써 저녁이네
[길드] 천상검: 벌꿀님 안 피곤해요? 조금만 쉴까요?
[길드] 벌꿀오소리: 나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ㅋㅋㅋ 저랑 같이 키우기로 했으면 끝날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음
[길드] 천상검: 네ㅋㅋ 당연하죠
[길드] 베르메르: 오 꿀벌님 천상이한테 집착하시네ㅋㅋ
[길드] 벌꿀오소리: 설마요. 당장이라도 포기 가능함^^ 탱커라 봐주고 있는 거야...... 아시겠어요 천상님?
[길드] 천상검: 감사합니다?ㅋㅋㅋ
벌꿀오소리와 길드원들이 접속한 시간이 비슷하다 보니 팀을 짜서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눠진 팀은, 탱커인 천상검과 딜러인 벌꿀오소리, 힐러인 온별과 딜러인 베르메르, 딜러와 딜러 조합인 살금과 블랙체리가 되었다.
블랙체리가 길드에 들어오자마자 같이 듀오를 맺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길드] 벌꿀오소리: 그나저나 카젤님 지금 어디쯤임?
벌꿀오소리는 주하의 진행 상황을 물었다. 현재 가장 빠른 사람이 그였으니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길드] 카젤: 방금 울부짖는 평원 다 했어요
확장팩과 함께 열린 신대륙은 총 여섯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울부짖는 평원은 다섯 번째 지역으로 주하는 마지막 지역만 남은 것이다. 대부분의 유저가 이제야 울부짖는 평원으로 넘어온 것을 보면 꽤 빠른 속도였다.
[길드] 벌꿀오소리: 더러운 보술...
[길드] 카젤: 빨리 오시죠ㅋㅋ
[길드] 베르메르: 일찍 접속했으니까 당연하죠ㅋ 나도 빨리 접했으면 저기쯤이었을 텐데... 온별ㅅㄲ가 늦잠 자서 후...
[길드] 온별: 뭔 헛소리야? 늦잠 자도 제시간에 왔는데
[길드] 살금: 겜방에서 하자고 조른 천상검이 문제야ㅋㅋ
[길드] 천상검: 쳐 자고 있던 네놈들 깨운 게 나다...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길드] 베르메르: 꿀벌님도 늦게 왔잖아 늦잠 잔 거 아님? 천상이한테 깨워 달라고 하면 됐을 텐데ㅋ
[길드] 천상검: 벌꿀님은 다정하게 깨워 드림^^
[길드] 벌꿀오소리: 천상님 저거 루팅하셈 빨리! 시체 사라진다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이루어졌다. 주하는 어이가 없어서 짧게 혀를 찼다. 저들끼리 잘 노는 것은 물론, 그 와중에도 여성 유저인 벌꿀오소리를 끼워 넣고 천상검과 엮기까지 하다니.
하지만 벌꿀오소리는 적당히 무시하면서 화제를 돌리는 기지를 발휘했다. 주하는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다 던져 놔도 잘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정신없는 길드 채팅창을 뒤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얀 고양이 펫이 그 옆을 같이 달리며 젤리 모양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앞으로 대충 여섯 시간 후면 메인 스토리는 다 밀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계산해 보았다. 신규 던전이랑 일일 퀘스트, 그리고 평판까지 열리는 타이밍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개발사는 퀘스트를 미는 것만으로도 최소 사흘은 걸리지 않을까 예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K 유저들의 콘텐츠 소모 속도는 만만치 않았다.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주하가 이미 퀘스트의 90%를 끝낸 상태였으니 말이다. 유저들은 항상 개발자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존재니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주하는 마지막 지역의 로딩 화면을 보며 미지근해진 음료를 홀짝였다.
“와…… 분위기 뭐지?”
로딩이 끝나고 나타난 지역을 본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지금껏 봐 왔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정반대였으므로.
스토리의 정점을 찍을 지역은 너무나 스산했다. 햇빛이 들지 않아 주변은 캄캄했고 주변엔 핏자국이 즐비했다.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알 수 없는 안개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게, 꼭 무언가 갑작스레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공포영화에서 나올 법한 BGM은 물론이고 까마귀 울음소리까지 간간이 들렸다.
9) ‘막 만든 공격대’를 뜻한다. 정공(정규 공격대)의 반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