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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5화 (5/130)

5화

멜로디는 NPC에게 말을 걸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저처럼 타워로 바로 직진하지 않는 것을 보니 퀘스트 내용을 읽고 상황을 파악했나 보다.

타워에 진입했다가 튕겨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 쓰린 속이 조금은 나아졌을 텐데. 주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조용히 멜로디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은 멜로디를 가까이서 볼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조금 신기하긴 하네.”

어쩌다 멀리서 지나가는 것을 본 것 말고는 그와 이렇다 할 접점은 없었다. 가까이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하는 시점을 당겨 멜로디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정령술사가 선택할 수 있는 종족인 묘인족이었다. 묘인족은 고양이 귀와 긴 꼬리를 가지고 있는데, 멜로디는 머리와 털빛을 모두 하얀색으로 맞춰 놓았다. 퍼클 전용인 아바타도 흰색이라 그런지 마치 품위 있는 귀족 고양이 같았다.

주하는 카젤 옆에 앉아 있는 자기 펫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멜로디를 보았다.

“비슷한가?”

물론 황금색으로 된 장식이나 망토 안쪽을 보라색으로 치장해 둬 마냥 하얀 건 아니었지만 꽤 닮아 있었다. 문득 본가에 있는 제 하얀 고양이 클로이가 떠올라 주하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사실 멜로디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어느 면에선 존경하기도 했다. 추한 감정보다는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편이 맞았다. 레이드 팀이나 클래스 랭킹 1위를 계속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을 땐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조금 미묘하긴 했다. 엄연히 자진신고 길드와 리프 길드는 경쟁 관계니까.

‘불편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도 같고……. 애매하다, 애매해.’

서로의 관계를 떠올리며 고민하던 주하는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멜로디를 보며 정신을 차렸다.

죄악의 탑을 보고 있던 멜로디는 어느새 몸을 돌려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주하도, 그리고 멜로디도 서로를 대상으로 잡진 않았지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미묘한 분위기가 깔짝깔짝 주변을 배회했다.

지진신고 길드와 리프 길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길드 명을 달고 있는 두 캐릭터는 한참을 침묵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서먹하지 않은 사이였는데, 퍼클을 경쟁하면서 서로에게 빈축을 샀더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 아득하기만 했다. 우리 쪽 팀원이 과한 경쟁심으로 먼저 도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번 터진 싸움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치한 싸움에서 자존심을 건드리는 싸움까지. 그러다 보니 자진신고 길드와 리프 길드는 어느새 앙숙이 되어 있었다.

이런 사이를 원하지 않았던 자신과 벌꿀오소리가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멜로디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둘 다 서로에게 파티 초대를 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힐러인 멜로디가 여기까지 왔다면 그 뒤를 따라오는 이들도 늦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주하는 화면을 돌려 어둑한 안개가 끼어 있는 길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유저들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유저가 나타났다. 흐릿한 인영이 안개를 뚫고 나오자 캐릭터와 아이디가 또렷하게 보였다. 주하는 작게 탄식했다.

“……아.”

다가오는 이는 한 명이 아닌 두 명, 그것도 같은 길드 마크를 달고 있는 듀오였다.

아이디까지 맞춘 것을 보니 현실 친구나 애인일 가능성이 컸다. 저나 멜로디에겐 불가침 영역이라는 소리였다.

그 예상에 화답하듯 두 사람은 카젤과 멜로디를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퀘스트를 받고 내용을 확인한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곧장 타워로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굳어 있던 주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직, 아직 두 명이 더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그들도 이곳에 도착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역에 있는 유저를 검색했다. 그러자 조금씩 사람들이 넘어왔는지 열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하긴, 한 시간 반이 지났는데 당연히 사람이 늘어나야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저들은 늘어날 것이다.

“…….”

좋긴 한데…… 기분이 묘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초조해졌다.

저는 여기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 그들은 쭉쭉 달리고 있으니까. 이대로 가다간 추월당하고 말 것이다. 이미 두 명의 유저가 타워에 들어갔고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주하는 멜로디를 힐끔 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캐릭터 이름 앞에 가 뜨지 않는 걸 보니 자리를 비운 건 아닌 듯했다.

같이 하자고 할까? 말까?

마음이 갈대같이 흔들렸다.

퀘스트만 끝내고 깔끔하게 헤어지면 되지 않나? 아니야, 서로 불편한데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어? ……그래도 이대로 있다간 또 다른 사람들한테 추월당할 텐데? 혹시 같이하자고 제의했다가 거부당하면? 그럼 좀 대미지가 큰데…….

“……하아.”

주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댔다.

이다지도 불편한 사이라니. 괜히 자신의 캐릭터 이름 아래 달린 <자진신고> 길드 명이 무겁게 느껴졌다. 벨크로 테이프처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답잖은 생각들이 슬슬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점령하려는 헛된 망상을 겨우 물리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으…… 진짜, 미치겠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니 당장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신규 던전, 평판 오픈 그리고 일일 퀘스트.

안타깝게도 평판만 세 개고 신규 던전은 다섯 개다. 할 게 너무나 많아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버리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잘 알고 있는 심장이 불안하게 펄떡였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그때, 저 멀리서 다가오는 유저를 발견했다. 주하는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잽싸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

“……하.”

절망을 맞이했다.

이번에도 같은 길드의 듀오 팀이 나타난 것이다. 망했다. 진짜, 정말로 망했다. 주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새로 나타난 두 명의 유저는 앞에 서 있는 카젤과 멜로디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들은 두 사람을 경계하며 살금살금 퀘스트 NPC에 다가갔다. NPC에 말을 걸자 퀘스트 내용이 떠올랐다.

<퀘스트: 죄악의 탑 진입>

[죄악의 탑에 들어간 아이델과 파이톤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네. 듣자 하니 꽤 실력이 좋다고 하던데 타워에 들어가 그들을 찾아 주겠나? 보상은 두둑이 하지. 하지만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내면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다른 이들과 함께 들어가도록 하게나.

―2인 또는 5인으로 죄악의 탑 진입

―죄악의 탑에 있는 아이델과 파이톤 찾기]

퀘스트를 받은 두 명의 유저는 드디어 상황을 파악했는지 실실 웃기 시작했다.

[일반] 스윙: ㅋㅋ

[일반] 오배건: 파티 퀘... ㅎ

[일반] 스윙: 솔플로 달리다 막혔고만ㅋㅋㅋㅋㅋㅋㅋ

[일반] 오배건: 그런데 하필 신고 길드랑 리프 길드라니?

스윙은 멜로디와 카젤 사이에 서서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뭘 재고 있는지는 뻔했다.

[일반] 스윙: 이게 바로 거리감인가?ㅋㅋㅋㅋㅋ

그들은 지난 시즌 퍼클을 두고 자진신고 길드와 리프 길드가 신경전을 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경쟁 상대라 차마 파티는 못 하겠고, 퀘스트는 해야 하는 카젤과 멜로디의 상황이 너무나 꿀잼이었다.

[일반] 스윙: 님들 안 들어감?

[일반] 오배건: ㅋㅋㅋㅋㅋㅋㅋ

눈앞에서 알짱대는 두 사람을 보는 주하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맨주먹으로 카젤과 멜로디를 툭툭 쳤다. 샤하스모르는 PVP 필드라 서로 공격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주하는 -1씩 떨어지다 자유 회복으로 다시 차오르는 생명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싸우자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이런 상황에 이런 장난을 치는 게 더 질이 나빴다.

나눠서 진행해 달라 요청하려 했던 생각이 쏙 들어갔다. 어차피 그들에게 부탁해도 도와주지 않을 게 뻔했다. 눈앞에서 약 올리며 웃고 있는 모습만 봐도 훤했다. 얌전히 들어가기나 할 것이지 신경을 건드리다니.

툭, 툭 맨주먹에 맞을 때마다 카젤과 멜로디의 캐릭터가 움찔거렸다. ‘적당히’를 모르네…….

주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키보드를 조작했다. 그러자 가만히 맞고만 있던 카젤 캐릭터가 무기를 빼 들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일반] 스윙: 엌!

[일반] 오배건: ;;;;;;;

그런데 카젤이 무기를 꺼낸 것과 동시에 멜로디도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강화 마지막 단계인 30강의 화려한 무기 두 개가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전투 태세에 돌입한 카젤과 멜로디를 보며 두 사람은 기겁하며 멀어졌다. 랭커와 필드에서 싸움이 나면 불리한 것은 그들이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쳐 낼 것 같았는지 스윙과 오배건은 타워로 냅다 도망쳤다.

“…….”

깔짝대던 놈들이 사라지자 다시 주변은 고요해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전투 태세를 취하던 멜로디와 카젤은 대상이 사라지자 평화 모드로 돌아왔다.

두 캐릭터가 똑같이 움직였다는 건, 멜로디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뜻이겠지? 그래…… 너나 나나 속은 똑같이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주하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때 마침 처음 들어갔던 두 명의 유저가 타워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주하는 그들을 말없이 응시했다. 저렇게 빨리 끝나는 퀘스트를 몇 시간째 못 하고 있다니. 속이 쓰리다 못해 두통까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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