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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6화 (6/130)

6화

초반 선두는 저까지 합해서 총 여섯 명이었다. 그중 네 명이 듀오였고 남은 건 저와 멜로디밖에 없었다. 앞으로 사람들이 여기에 올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다 그들이 듀오가 아닐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기다린 것만 해도 꽤 타격이 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멜로디랑 퀘스트를 끝내는 게 낫지 않나?”

주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멜로디를 응시했다.

가만히 있어도 살랑살랑 움직이는 하얀 꼬리가 저를 유혹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언제나 옳긴 하지만……. 어떻게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일반] 멜로디: 카젤님

멜로디가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주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일반] 카젤: 네?

[일반] 멜로디: 죄악의 탑 해야 되죠?

[일반] 카젤: 네... 당연히 해야죠?

[일반] 멜로디: 그럼, 같이 할래요?

욕망에 먼저 무너진 것은 제가 아닌 멜로디였나 보다. 그도 저와 같이 선두를 달리던 유저였다. 게다가 힐러인 정령사로 딜러를 쫓아올 정도의 지독한 사람.

힐러들도 공격 스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딜러만큼의 대미지는 넣지 못하는 모기 딜이었다. 여기까지 달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의 집념 때문일 터였다.

역시 이 정도는 돼야 랭킹 1위를 하는구나. 순수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길드끼리는 그렇다고 쳐도, 저와 크게 문제 있던 사람도 아니니까……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퀘스트만 끝내고 바로 헤어지면 되는 거잖아.

[일반] 멜로디: 어때요?

[일반] 멜로디: 여기서 계속 기다리는 것보단

[일반] 멜로디: 나을 것 같은데

대답 없는 제가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멜로디의 재빠른 설득이 이어졌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발을 동동 구르는 멜로디였다. 그의 위명과 어울리지 않는 초조해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거절은 무슨, 멜로디가 조금만 늦었어도 제가 먼저 요청했을지도 모르는데. 주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멜로디에게 대답했다.

[일반] 카젤: 네 가죠 ㄱㄱ

말풍선이 뜨기 무섭게 화면에 시스템 창이 떴다.

<멜로디 님이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반응 속도가 무서운 건지, 아니면 파티 초대를 준비하고 있던 건지. 이렇게 빠른 파티 초대는 처음이었다. 어이없어서 실실 웃으며 확인을 누르자 멜로디는 곧장 타워로 달려갔다.

일렁이는 포탈 안으로 멜로디가 먼저 진입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멜로디 님과 페어를 맺고 죄악의 탑 2인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주하는 대수롭지 않게 예를 눌렀다. 그러자 카젤과 멜로디가 동시에 죄악의 탑 안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지지부진하게 막혀 있던 퀘스트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죄악의 탑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아무래도 파티로 진행되는 콘텐츠라 공간을 크게 만든 듯했다.

‘이러면 괜히 불안해진단 말이지.’

주하는 꼼꼼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한 검은 바닥과 창문 하나 없는 벽. 심지어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문도 보이지 않았다. 외곽에 세워진 네 개의 커다란 기둥 위로는 엄청난 크기의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워 외형과 잘 어울리는 음침한 내부였다.

탑에 진입하고 5초쯤 멀뚱히 서 있었다. 멜로디도 별말 없는 걸 보니 맵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시작 안 하지? 화면 왼쪽 상단에 분명 1층이라고 돼 있는데. 아무리 같이 퀘스트를 하기로 했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해도 어색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야 리프 길마랑 타워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확 와 닿았다.

“빨리 시작하자.”

괜히 초조해져 중얼거리던 그때,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전투 시작과 함께 맵 가운데에 게이트가 생성되고 몹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스킬을 쓰려던 주하는 몹을 확인하자마자 움찔 멈춰 버렸다.

탑 1층이니 저렙 몹이 나올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이건 솔직히 좀…… 너무하지 않나?

주하의 눈앞엔 토끼, 고양이, 강아지, 고슴도치 등의 소동물이 눈을 새빨갛게 빛내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 고양이는 본가에 있는 클로이와 무척 닮아 있었다.

“…….”

우르르 몰려오는 몹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캐릭터 위로 둥근 구체가 둘렸다. 정령술사 스킬, 물의 보호막이었다. 그제야 주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외형이 실제와 닮았다고 해도 저것은 분명 몹이다. ……귀여운 몹.

주하는 혀를 차며 광역 스킬을 사용했다. 생명력이 낮아서 세 번 스킬을 시전하자 몹은 모두 누워 버렸다.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지만, 늦게 반응했던 게 떠올라 멜로디의 눈치가 보였다.

[파티] 카젤: ...동물이 귀엽네요

동물을 너무 사실적으로 만들어 놔서 놀랐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멜로디에게는 다르게 전달된 듯했다.

[파티] 멜로디: 잘 죽이시던데요

귀여운 동물을 거리낌 없이 죽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주하는 다급히 변명했다.

[파티] 카젤: 아니! 원래 이렇지는 않은데;

[파티] 멜로디: 안 죽인다고요? 몹을?

[파티] 카젤: 네? 아...

[파티] 카젤: 몹은... 죽여야죠?

[파티] 멜로디: ㅇㅇ 딜러는 잘 죽여야죠

뭔가 멜로디와 대화가 겉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크게 실수하지는 않은 듯하다. 주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멜로디와 함께 있으니 괜히 긴장되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다.

[파티] 멜로디: 문이 두 개 생겼네

화면을 보자 멜로디의 말대로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둘 다 상호작용이 되는 걸 보니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같았다.

[파티] 멜로디: 어디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좋은 게 있다는 뜻. 그리고 그와 반대로 나쁜 것도 있다는 뜻이다. 나타나는 결과에 의해서 내가 똥손인지, 금손인지 알 수 있었다.

주하는 자신의 운을 믿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파티] 카젤: 왼쪽이요

멜로디는 별말 없이 왼쪽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이 모두 사라지고 게이트가 하나 나타났다. 블랙홀 같은 어둡고 음침한 게이트가.

과연 이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멜로디와 카젤은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죄악의 탑 일러스트와 함께 로딩이 끝나자 전과 다름없는 탑 내부가 보였다. 왼쪽 설명 창을 보니 2층으로 나와 있었다. 다음 스테이지로 잘 온 것 같긴 한데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이번에도 저렙 몹이 우르르 몰려나왔고, 카젤은 1층 때보다 빠르게 몹을 잡았다. 다시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파티] 멜로디: 이번엔 제가

[파티] 카젤: ㅇㅇ

멜로디는 다시 왼쪽 문을 선택했다. 그러자 문이 사라지며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게이트가 나타났다. 눈이 부시다 못해 찬란하게까지 느껴지는 황금색 게이트가.

“…….”

주하는 모니터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황금색 게이트. 누가 봐도 행운의 게이트였다. 음침하게 일렁이는 검은색 게이트와 화려하게 빛나는 황금색 게이트는 이미 그래픽에서 그 차이가 명확했다.

[파티] 멜로디: ㄱㄱ

그래, 얼마나 좋은지 한번 보자.

주하는 멜로디를 따라 황금색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로딩이 이어지고 다시 탑 내부가 나타났다. 전과 다를 것 없는 모습에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 메시지가 올라왔다.

<죄악의 탑 3층 공략 완료>

“완료했다고? 아무것도 안 했…….”

채 의아해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사라지고 두 개의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주하는 탄식을 흘리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파티] 멜로디: 황금색 게이트는

[파티] 멜로디: 다음 스테이지 자동 완료네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검은색은 그대로 진행해야 하고

안다.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다음번엔 분명 황금색 게이트를 열 수 있을 테니까.

[파티] 멜로디: 선택해 볼래요?

“…….”

멜로디의 제안에 주하의 눈썹이 작게 요동쳤다. 이상하다……. 왜 놀리는 것 같지? 쫑긋거리는 멜로디의 하얀 귀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설마.

[파티] 카젤: 오른쪽이요

어차피 확률은 반반. 아이템 강화 중 가장 최악으로 꼽히는 성공확률 0.001%의 30강도 성공했던 자신 아니던가. 고작 50%에서 무너질 순 없었다.

주하의 대답에 멜로디는 곧바로 오른쪽 문을 열었다. 선택을 마치자 문은 사라졌고, 일렁이며 게이트가 나타났다.

[파티] 카젤: 아니...

[파티] 멜로디: ㅋㅋ

또 검은색 게이트.

설마 계속 걸릴까 싶어 다음과 그다음 문도 제가 선택했다. 하지만 전부 검은색 게이트만 나타났다.

이거 솔직히 황금색 게이트가 드문 거 아냐? 딱 한 번 선택했던 멜로디가 우연히 운이 좋았던 거 아니냐고. 다음 스테이지를 자동으로 완료시켜 주는 게이트를 50% 확률로 주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뒤늦게 자신에게 핑계를 대 보지만, 찝찝함은 감출 수 없었다.

[파티] 멜로디: 카젤님

[파티] 카젤: 네?

[파티] 멜로디: 그만 선택해요. 엔피씨도 찾았는데

“어?”

다음 문도 홀린 듯이 손을 대려다가 멜로디에 의해 저지당했다. NPC를…… 언제 찾았지?

주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저 멀리서 벽이 스르륵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어두컴컴한 내부엔 앉아 있는 NPC와 누워 있는 NPC가 있었다. 이름은 역시 아이델과 파이톤. 찾고 있던 NPC가 맞았다.

주하는 멜로디와 함께 가까이 다가갔다. 파이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아이델은 그 옆에 앉아 울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그들의 한계였던 듯했다.

NPC를 찾아내자 이곳에 들어왔었던 목적이 떠올랐다. 황금색 게이트를 여는 것이 아닌, 퀘스트를 완료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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