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유예기간은 개뿔. 긴장 풀고 있다가 훅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주하는 식은땀을 흘렸다.
[길드] 카젤: ;;;;;;
[길드] 벌꿀오소리: 그 멜로디랑 듀오라니ㅋㅋㅋㅋㅋ
[길드] 카젤: 아니... 퀘스트만 하려고 했는데;;
[길드] 벌꿀오소리: 게임사에 제대로 뒤통수 맞았죠? 초반에 달린 사람들 절반은 다 광폭화 모드던데요ㅋㅋㅋㅋㅋ
[길드] 카젤: ㅠㅠㅠㅠ
[길드] 벌꿀오소리: 기왕 이렇게 된 거 누가 1등 할지 내기 ㄱㄱ?
[길드] 천상검: 무슨 내기를 해요?
[길드] 벌꿀오소리: 우리가 이기니까 내기 걸어야죠! 카젤님 우리한테 밟혀도 원망하지 마요ㅋㅋ
[길드] 베르메르: 1위는 우리가 하는데?
[길드] 살금: 헛소리 ㄴㄴ 우리가 1위임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길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넘어갈 줄이야. 아무래도 다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해해 준 듯했다. 주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작게 안도했다.
[길드] 카젤: 그런데 팀은 어떻게 짰어요?
[길드] 벌꿀오소리: 듀오 그대로 함. 저랑 천상님, 베르님이랑 온별님, 살금님이랑 블랙체리님. 세렌님네도 각각 두 명씩!
레이드 팀 인원은 총 열 명이었다. 탱커 두 명, 힐러 두 명, 딜러 여섯 명. 다행히도 제가 빠진 자리를 블랙체리가 메꾸니 딱 맞았다.
[길드] 벌꿀오소리: 전쟁이야! 봐주는 거 없음!
[길드] 베르메르: 꿀벌님 미리 ㅈㅅㅇ 나중에 울면 안 돼요ㅋㅋㅋ
[길드] 벌꿀오소리: 베르님 코 수술할 준비 하세요ㅋㅋ 다음 주에 납작해질 예정임. 아니면 제가 펜치 준비할까요? 쏙 들어간 코 쭉 뽑아 줌
[길드] 천상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베르메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하는 벌꿀오소리의 높은 텐션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틀을 꼬박 새운 썩은물이 졸려 미쳐 있으니 참으로 볼만했다. 그렇다고 평소와 크게 다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 경계선을 미묘하게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역시 졸린 벌꿀오소리는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쨌든 멜로디와의 듀오가 큰 문제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불편했던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은 주하는 오늘 해야 할 일일 퀘스트를 받고 달리기 시작했다.
[귓속말] 멜로디: 카젤님
그때 멜로디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올 게 왔구나. 주하는 맵을 이동하며 대답했다.
[귓속말] 카젤: 네
[귓속말] 멜로디: 죄악의 탑 랭킹 이야기 들었죠?
안 그래도 그와 이야기를 해 보려 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랭킹에 도전해야 하는 듀오였으니까.
혹시라도 멜로디가 랭킹을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드룬에 골드에 평판 점수를 퍼 주는 타워 랭킹을 포기한다면 정령사 1위의 이름이 울지 않겠는가.
물론 타워 문에 집착하던 저를 기억하고 있을 그가 신경 쓰인다는 소소한 문제가 있지만. 앞으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참 얄궂은 일이었다.
[귓속말] 카젤: ㅇㅇ 하실 거?
[귓속말] 멜로디: 당연한 말을
“역시.”
사실 타워 랭킹을 노릴 수 있는 이유는 멜로디 덕이 컸다. 다른 일반 유저가 듀오였다면 아쉽지만 포기했을 것이다. 아무리 죄악의 탑에 시간을 투자해도 랭킹에 오르지 못할 테니까. 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고 다음 주를 기약했겠지.
그런데 이쯤에서 의구심이 들었다. 멜로디도 같은 생각일까? 그나마 저도 랭커긴 하지만 세간에서 보석술사란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다. 게다가 고작 타워 하단에서만 잠깐 봤을 뿐이라 제 실력도 모를 텐데.
[귓속말] 카젤: 그런데 몇 위까지 노리실 거예요?
[귓속말] 멜로디: 당연히 1위죠
[귓속말] 카젤: ...ㅋㅋㅋ 괜찮으시겠어요?
[귓속말] 멜로디: 충분함
대답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저를 믿는 건지, 아니면 본인을 믿는 건지 모르겠지만, 멜로디의 저런 확신 어린 대답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좋았다.
[귓속말] 카젤: 그럼 언제 할까요?
[귓속말] 멜로디: 괜찮으면 지금 한번 가 보죠
지금? 의외로 성격 급하네. 저는 이제 막 들어와서 아직 일일 퀘스트도 못 했는데.
[귓속말] 카젤: 저 방금 들어와서 아직 일퀘 못 했거든요. 이것만 하고 갈게요
[귓속말] 멜로디: 그럼 일퀘부터 같이 할까요?
[귓속말] 카젤: 같이요?
[귓속말] 멜로디: 저도 방금 막 들어온 거라
방금 들어왔으면 가장 먼저 일일 퀘스트부터 해야 하지 않나? 죄악의 탑을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만사 다 제치고 오려고 했을까. 주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어쨌든 동선이 같다면 따로 할 이유는 없었다.
[귓속말] 카젤: ㅇㅇ 샤하스모르 망자의 무덤으로 오세요
<멜로디 님이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들어온 파티 초대에 주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역시나 그의 파티 초대 속도는 경이로웠다.
[파티] 멜로디: 평판 세 개 다 여셨죠?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그럼 세 군데 일퀘 다 하고 타워 ㄱㄱ
[파티] 카젤: 네
망자의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멜로디가 보였다. 미리 퀘스트를 받아 놓고 그가 가까이 올 때쯤 퀘스트 공유를 누르자 상대가 수락했다는 알람이 떴다. 멈칫하는 게 왠지 놀란 것처럼 보여서 주하는 속으로 웃었다.
퀘스트 목표는 무덤 꽃을 제거하는 것과 방황하는 혼령을 잡아 아이템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일일 퀘스트는 매일 종류가 바뀌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무난하고 쉬운 퀘스트였다.
퀘스트 수행 지역에 도착한 멜로디와 카젤은 전투 준비를 마쳤다.
[파티] 카젤: 무덤 꽃은 같이 되니까 멜로디님이 클릭하세요. 저는 혼령 잡고 있을게요
[파티] 멜로디: ㅇㅇ
무덤이 즐비한 맵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는 멜로디를 확인한 주하는 주변에 있는 혼령을 몰기 시작했다. 도트를 걸고 광역 스킬로 몰아 잡는 동안 무덤 꽃은 착실히 카운트가 오르고 있었다.
몹이 눕는 순간 멜로디의 펫과 자신의 하얀 고양이 펫이 냅다 달려와 아이템을 주웠다. 퀘스트 아이템은 캐릭터마다 확률로 나오기 때문에 획득 개수는 각자의 운에 따라 달랐다.
주하는 멜로디의 가방으로 들어가는 퀘스트 아이템과 자기 가방으로 들어오는 퀘스트 아이템 개수를 셌다. 몹을 얼마나 더 잡아야 하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는데…… 뭐야, 왜 이렇게 차이가 나지?
주워야 하는 개수는 총 20개. 그런데 멜로디는 벌써 여덟 개 주웠고 자신은 고작 세 개였다. 이렇게까지 차이 나기 있냐?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게이머에겐 이마저도 경쟁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정신없이 혼령을 몰아 잡는 동안 무덤 꽃 제거가 끝났는지 멜로디가 다가왔다. 또다시 두 마리의 펫은 루팅을 했고, 결과가 나타나자 주하는 다시 말없이 혼령을 몰기 시작했다.
멜로디 20개, 카젤 10개. 완벽한 패배였다.
[파티] 멜로디: 카젤님은 왜 이렇게 안 나오지?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ㅋㅋㅋ
[파티] 멜로디: 이쪽 몹도 몰아오겠음^^
약오르니까 웃지 마라. 경쟁에서 졌다는 생각이 들어 뾰족하게 날이 섰다. 그 후로 아이템 열 개를 더 줍기 위해서 서른 마리의 몹을 잡았더니 머리 위에 먹구름이 끼었다. 어이없네, 진짜.
[파티] 멜로디: 완료했으니까 다음 지역 가죠
[파티] 카젤: ...네
다른 지역의 평판 퀘스트를 진행하던 주하는 혹시나 이번에도 그럴까 싶어 지켜보았다. 다행히 아이템 개수가 차곡차곡 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만 제 저주가 증폭되어 옮겨갔는지 멜로디는 저보다 더 심하게 아이템이 나오지 않았다.
[파티] 카젤: 이상하다... 아까보다 더 안 나오지 않나?
[파티] 멜로디: ...
[파티] 카젤: 몹도 얼마 없는데
[파티] 멜로디: ㅋ
[파티] 카젤: 열심히 찾아 볼까요? ㅋㅋㅋㅋㅋ
[파티] 멜로디: ㅋ... 그래 볼까요?
이게 뭐라고 속이 개운한지,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렵사리 멜로디도 퀘스트를 완료하고 남은 평판 퀘스트를 진행했는데, 이번엔 둘 다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예상외로 다사다난했던 숙제를 마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죄악의 탑으로 향했다.
“사람 많네?”
어제와 다르게 죄악의 탑 앞은 유저들로 바글바글했다. 최상위권 유저들은 이미 던전까지 끝냈고, 상위권 유저들이 이제야 타워 앞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정보가 공개된 죄악의 탑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역] 내일의집: 악탑 골드 티어 가실 540↑ 마법사1 구함(4/5)
[지역] 밀가루: 악탑 실버 이상 520 이상 탱1/궁수1(3/5)
[지역] Cocomon: 악탑 골드 갑니다. 듀오 535↑ 정령사1 모셔요
[지역] 렌지: 악탑/플래/560 이상/마검사1(4/5)
상위 세 팀을 제외한 그 아래 티어에도 아드룬이 보상으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합을 맞춰 팀을 짜기 시작했다. 비슷한 아이템 레벨의 유저들이 오길 바라며 최소 컷을 올려 두고 광고를 올리는 유저들이 대다수였다.
상황이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지만, 주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일반] 밀가루: 어? 멜로디랑 카젤이다
[일반] 내일의집: 응? 진짜네ㅋㅋㅋㅋㅋㅋ
베스트 댓글에서 핫하게 굴려지고 있는 카젤과 멜로디가 죄악의 탑에 나타나자 유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반] 렌지: 진짜 둘이 같이 해요? ㅋㅋ
[일반] 밀가루: 같이 하니까 지금 여기 온 거 아님? ㅋㅋㅋㅋㅋ
[일반] Cocomon: 오호라. 로미젤과 줄로디 등장인가?
[일반] 렌지: ㅋㅋㅋㅋㅋㅋ 로미젤과 줄로딬ㅋㅋㅋㅋ
[일반] 밀가루: 미1친 ㅈㄴ적절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반] 내일의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미젤과 줄로디? 어이가 없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비슷한 상황이긴 했다. 서로 적대적인 길드에 속해 있고, 죄악의 탑을 위해 만나야 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좀 웃기긴 하네.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