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게임 할 에너지를 충분히 보충한 주하는 길드 정보창을 확인했다. 일반 길드원들은 아직 네 번째 지역에서 퀘스트를 하고 있었고, 레이드 팀원들은.
“……다 던전에 들어가 있네?”
블랙체리를 포함한 열 명이 제가 없는 동안 파티를 꾸렸던 모양이다. 하필 이럴 때 타이밍이 안 맞다니. 아쉬운 기분에 길드 채팅창을 응시했다.
[길드] 벌꿀오소리: 아니 일반 던전인데 여기서 삽질하기 있음?!
[길드] 천상검: 아직 피로가 안 풀린 듯;
[길드] 벌꿀오소리: 다섯 시간 자고 왔는데??
[길드] 천상검: 전 두 시간도 못 잤다고요 ㅠㅠ
[길드] 벌꿀오소리: 누가 자지 말래요 ʘ言ʘ... 일반에서 이러면 영웅 던전은 어찌하려고!
[길드] 천상검: ㅠㅠㅠ
[길드] 베르메르: 천상이 꽉 잡혀 사네ㅋㅋㅋ
[길드] 천상검: ㅠㅠㅠㅠㅠㅠ
[길드] 블랙체리: 쫄 또 나오는데요 천상님ㅋㅋ
[길드] 온별: 저쪽 팀 겁나 시끄러워
[길드] 살금: ㅋㅋㅋㅋㅋㅋ여기는 편-안
레이드 팀원들은 두 파티로 나눠 각자 다른 던전을 돌고 있었다. 아, 조금만 일찍 들어올걸. 그럼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길드] 카젤: 다들 던전이세요?
[길드] 벌꿀오소리: 엌 카젤님이다! 왜 이제 와요ㅠㅠ
[길드] 카젤: 밥 먹고 왔어요
[길드] 천상검: 자리에 안 계시길래 그냥 출발했어요. 따로 도셔야 할 것 같은데
[길드] 카젤: 숙련 게이지 다 채우시게요?
[길드] 천상검: 네
보통은 레이드 팀원들끼리 모여서 던전 숙련 게이지를 채우고 영웅 던전을 해금한다. 그렇게 함께 돌면서 손발도 맞추고, 아이템도 맞추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먼저 출발할 줄이야.
[길드] 천상검: 그런데 카젤님
[길드] 카젤: 네
[길드] 천상검: 체리님이랑 던전 다섯 개 다 돌아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던전 한 개가 아니라 다섯 개를 다?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주하는 멈칫했다. 천상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고민하는데, 벌꿀오소리가 따지기 시작했다.
[길드] 벌꿀오소리: 잉? 무슨 소리예요?
[길드] 벌꿀오소리: 그럼 카젤님이 오셔야 하지 않아요?
[길드] 천상검: 여기서 체리님을 버릴 순 없잖아요
[길드] 벌꿀오소리: 버리다뇨; 던전 하나씩 하면 되는데;
[길드] 천상검: 그게 더 죄송스럽죠;; 필요할 때만 부르고 아니면 버리는 거 같잖아요;;
[길드] 벌꿀오소리: 그건... 아니죠
[길드] 벌꿀오소리: 시간이 맞아서 같이 돈 건데...
벌꿀오소리는 처음과 달리 주춤거렸다. 잘못하다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상황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길드] 천상검: 체리님은 우리랑 지금까지 같이 했는데 이러면 좀 그렇잖아요; 게다가 일반 던전인데 뭐 어때요. 카젤님은 플레이 시간도 길어서 괜찮지 않을까요?
[길드] 블랙체리: 앗! 저 괜찮아요
[길드] 블랙체리: 이러면 제가 카젤님께 죄송해서; 던전 하나만 하고 나머진 혼자 해도 됨 ㅎㅎ;;;
[길드] 베르메르: 아... 쫌 그런데;;
[길드] 온별: 그러게
[길드] 온별: 체리님 보기 민망하네
[길드] 살금: 뭐야? 체리님 버리려고?
일반적으로 정공 팀원들끼리 같이 가긴 하지만, 무조건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웅 던전이라면 모를까. 일반 던전은 지인들끼리 다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천상검의 말처럼 플레이 시간이 긴 제가 좀 더 노력하면 되는 부분이기는 하다.
단지 시원하게 그러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길드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뭔가 흐름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제가 예민한 걸 수도 있고.
[길드] 블랙체리: 저 진짜 괜찮아요;;
[길드] 블랙체리: 그냥 지금 빠지는 게 나을 듯 ㅎㅎ;; 카젤님 죄송해요ㅠㅠ
이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블랙체리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연신 괜찮다고 말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네가 무슨 죄냐. 상황이 이렇게 된 것뿐인데.
주하는 깔끔하게 자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찌 보면 제가 늦게 온 탓도 있으니까.
[길드] 카젤: 괜찮아요
[길드] 카젤: 막공 많으니까 찾아서 다니면 됨
[길드] 블랙체리: ㅠㅠㅠ
[길드] 온별: 체리님 초대 다시 받으셈
[길드] 블랙체리: ㅠ
[길드] 온별: 빨리요
[길드] 블랙체리: 네에;;
파티까지 탈퇴했던 블랙체리는 다시 합류한 것 같았다. 이후 길드 채팅창은 조용해졌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
[귓속말] 카젤: ㅋㅋㅋ 괜찮음
[귓속말] 벌꿀오소리: 차라리 개인적으로 물어보지. 길드에서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네;
[귓속말] 카젤: 제 자리라고 찜해 둔 것도 아닌데요 뭐
[귓속말] 벌꿀오소리: 그래도 -_-
[귓속말] 카젤: 알아서 다닐 테니 걱정 마요 ㅋㅋㅋ
[귓속말] 벌꿀오소리: 어휴 진짜! 왜 하필 자리를 비워서
[귓속말] 카젤: 밥은 먹고 살아야지;;
[귓속말] 벌꿀오소리: 으휴! 으휴!
한참 타박 아닌 타박을 늘어놓던 벌꿀오소리는 이만 던전 돌아야 한다며 사라졌다. 마지막엔 호구라며 야무지게 갈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구는 아닌데.”
그렇게 바보처럼 보였나? 사실 천상검과 귓속말로 이야기했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그에게 블랙체리는 챙겨 줘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랭커가 자리 못 잡고 방황하는 게 신경 쓰였을 것이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 이제부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주하는 필드 몹을 잡으면서 파티 찾기 채널을 확인했다. 1서버라 그런지 파티를 찾는 이들은 꽤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탱커나 힐러를 구했다. 가끔 딜러를 찾는 파티도 있었지만, 파티 신청을 보내기도 전에 구인이 끝나 있었다.
“아…… 역시 파티 찾기 빡세네.”
이럴 땐 랭커고 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천한 딜러가 던전 파티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으므로. 황족으로 통하는 탱커와 힐러만 여유롭게 골라 갈 수 있었다.
“지금은 그냥 노가다나 할까.”
어차피 해야 할 것은 많았다. 평판 노가다도 해야 했고, 채집도 해야 했다. 거기다 일명 ‘내실’이라 불리는 업적 쌓기도 필수였다.
업적은 지역마다 있는 임무를 완료하면 주는 포인트로, 50%, 80%, 100%가 쌓일 때마다 스탯과 능력치를 준다. 모두 완료하면 아이템 하나를 더 착용한 만큼의 효율을 보여주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완료해야 하는 콘텐츠였다.
사람이 많은 저녁 타임이라 던전 가기는 힘들 것 같고……. 차라리 업적 노가다나 하다가 새벽쯤에 던전 파티를 찾는 게 나으려나.
무지성으로 필드 몹을 잡으며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귓속말] 멜로디: 카젤님
죄악의 탑을 끝내고 헤어졌던 멜로디가 말을 걸었다.
[귓속말] 카젤: 네?
[귓속말] 멜로디: 혹시 던전 파티 있으세요?
던전 파티? 게이지 채우는 던전 팟을 말하는 건가?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대답부터 했다.
[귓속말] 카젤: 아뇨
[귓속말] 멜로디: 딜러 한 명 부족해서 그런데 오실래요?
[귓속말] 카젤: 네? 딜러 자리요?
리프 길드에서 딜러 자리가 남을 수가 있나? 주하는 당장 리프 길드를 검색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일반 길드원들을 제외하면 레이드 팀원은 아홉 명뿐이었다. 아홉 명이라니? 한 명은 어디 갔지?
[귓속말] 멜로디: 딜러 한 명이 일이 생겨서요
[귓속말] 멜로디: 숙련 게이지 다 찰 때까지 돌 건데 괜찮죠?
“아…….”
그럼 그렇지. 밤새 달릴 텐데 저 텐션 따라갈 수 있는 딜러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제게는 아주 제격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파티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그러나 조금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귓속말] 카젤: 그 딜러분도 게이지 채워야지 않아요?
[귓속말] 멜로디: 저희 딜러는 알아서 하기로 했어요
딜러가 알아서 채워 온다고? 와…… 접속 안 했다고 가차 없이 버리는구나. 사회의 비정함에 다시금 몸서리쳐지지만, 어쨌든 제게는 굴러 들어온 복이었다.
그런데 사이가 안 좋은 길드랑 같이 돌아도 되는 걸까? 죄악의 탑은 상황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지만, 던전 도는 건 다른 문제니까 말이다.
감정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리프 길드원과 엮이면 안 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저는 던전을 혼자 돌아야 하는데, 딜러라 파티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레이드 팀원들과 속도를 맞춰야만 영웅 던전을 같이 갈 수 있으니 멜로디의 제안은 제게 구명줄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아쉬운 사람은 멜로디가 아닌 자신이었다. 그가 딜러를 모집한다고 하면 너도나도 데려가 달라 애원할 것이다. 이 기회를 발로 차 버리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잠깐의 의리를 위해 현실을 포기할 것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대답은 ‘아니오’ 였다. 눈 딱 감고 미래를 위해 멜로디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서로의 길드가 발목을 붙잡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귓속말] 멜로디: 못 가면 다른 사람 데려가고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 순간 이런 고민은 사치가 돼 버렸다. 재고 따지다가 현실을 구렁텅이에 던져 버릴 뻔했다.
[귓속말] 멜로디: 어떻게 하실?
어떻게 하긴, 당연히.
[귓속말] 카젤: 초대 주세요
같이 가야지. 어떻게 해서든 던전 게이지를 올려놔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영웅 던전 갈 때 혼자 낙오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귓속말] 멜로디: ㅋㅋㅋ
<멜로디 님이 파티에 초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