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주하는 지금 자신이 아르바이트생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던 주하는 남자에게 물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제가 커피 한 잔 사 드려도 될까요?”
다행히도 남자는 주하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죠.”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울림. 아까 느끼긴 했는데 남자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노랫가락처럼 부드러웠다. 얼굴과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연예인인가 싶었지만, 얼굴을 가리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어서 아무래도 일반인 같았다.
먼저 움직이는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에 있던 다른 직원에게 커피 두 잔을 시키고 결제를 마쳤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알아서 가져다줬을 테지만 어차피 화장실도 갈 생각이었으니까, 뭐.
“커피 맛있게 드세요.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괜찮아요.”
사과도 했고, 붙잡고 할 이야기도 없고, 커피도 샀으니 더는 볼일이 없었다.
“네, 그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20분의 휴식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여기서 더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화장실로 향하면서 남자를 힐끔 보았다. 마주친 시선에 남자가 웃자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성격 좋네. 그런 생각을 하며 꾸벅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라나탈 하는 유저 같았는데.’
불현듯 자신의 화면을 보며 흥미로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상관인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그 많은 서버 중에 같은 서버일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고 저를 아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 것 같고. 그저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에 대한 작은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남자와의 만남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자리에 돌아와 화면을 보자 익숙한 상황이 저를 반기고 있었다. 개인주의와 일시불, 여름n모기가 제 앞에 앉아서 올려다보고 있고, 멜로디는 옆에 서 있는 모습이.
가방 정리를 위해 대도시로 돌아와 카젤을 세워 놨는데,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쉬기는 다 쉰 건가? 시간을 보니 2분 정도 남아 있었다.
[파티] 개인주의: 카젤 형 언제 오지?
[파티] 일시불: 아직 시간 남았어
[파티] 개인주의: 음... 으으으으음. 빨리 와서 친추 좀 받아주지 ㅠㅠㅋ
친추? 친구 신청했나?
주하는 도착했다는 말 대신 친구 정보창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친구 신청이 들어와 있었는데, 의아했던 건 신청자가 네 명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주의와 일시불은 그렇다 치고, 거기에 여름n모기까지 어찌어찌 이해한다고 해도 멜로디는 정말 예상외였다.
또 만날 일은 없지 않나? 영웅 던전을 같이 갈 리도 없고, 죄악의 탑도 이번 주만 하고 끝이고, 다른 콘텐츠도 같이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 설마……. 그 노예 계약서 어쩌고 하는 거 진심이었나?’
개인주의나 일시불 중 누구 하나 불러도 될 텐데…… 정말 저를 부려 먹을 작정인가 보다.
주하는 어이가 없었지만, 덕분에 던전 숙련 게이지를 빨리 올릴 수 있었으니 세 번 정도는 불려 가도 될 것 같았다. 굳이 친구 추가를 해야 하나 싶기는 했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친구 정보창에 사람이 늘어나는 것뿐이니까.
네 개의 친구 초대를 모두 받자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것은 역시 망나니들이었다.
[파티] 개인주의: 왔다왔다왔다! 초대받아 주셨다! ㅇ0ㅇ/
[파티] 일시불: 친구 아이콘 떴다 후후
라나탈에서 서로 친구가 되면 아이디 뒤에 작은 아이콘이 하나 생긴다. 그걸로 일반 유저와 친구를 구분할 수 있어서 보기 편했다. 또한 PVP 지역에서 서로 공격이 불가능했는데, 친구를 해제하면 공격이 가능하니 가끔 아군을 구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파티] 멜로디: 친구 해제하면 안 돼요
[파티] 카젤: 음... 왜요? 해제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파티] 멜로디: 그럼 앞으로 PVP 지역에서 퀘스트 못 하지
[파티] 카젤: .......
[파티] 여름n모기: .......
[파티] 일시불: 이 정도면 살인 예고 아님?;;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 어디 한번 해제해 봐!
[파티] 일시불: 나두 친구 해제당하면 대장님이랑 같이 쫓아다녀야징ㅋㅋ
[파티] 개인주의: 나두나두 ㅇ0ㅇ/
[파티] 카젤: 안 할 테니까 얌전히 좀 두셈;;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일시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멜로디: ㅋㅋ
아마 거절했으면 똑같이 죽이러 다니겠다 협박했겠는걸? 뭐에 꽂혀서 제게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재미있었다. 여러모로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멜로디는 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친구도 맺고 던전도 돌고 일일 퀘스트도 하고. 또다시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나자 저녁이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내기는 우리의 승리였다.
듣기로는 상대 팀은 던전 하나를 남겨 둔 채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어떻게 그리 빨리 돌았냐고, 말이 안 된다며 증거를 요구했고. 개인주의는 길드 오픈톡으로 화면을 캡처해서 보여 주었다고 했다.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쥔 파티원들은 이만 쉬러 가겠다며 모두 사라졌고 멜로디만이 파티에 남아 있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멜로디가 거래를 걸기에 주하는 냉큼 수락을 눌렀다.
10만 골드를 기대하며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예상과 다른 금액이 올라와 있었다. 119,800골드? 이건 대체 무슨 계산법이지?
[파티] 카젤: 금액이 이상한데요?
[파티] 멜로디: 받아야 하는 금액 맞아요
[파티] 카젤: 음?
[파티] 멜로디: 그런 게 있음
더 준다고 하니 굳이 거절은 하지 않겠다만……. 확인을 누르자 짤그랑거리며 골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위해 고생하긴 했네. 확 늘어난 총금액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데, 멜로디가 말을 걸었다.
[파티] 멜로디: 카젤님
[파티] 카젤: 네?
[파티] 멜로디: 내일은 죄악의 탑 나머지 돌죠
[파티] 카젤: 내일이 마지막 날인가요?
[파티] 멜로디: ㅇㅇ
그러고 보니 던전 돈다고 실시간 랭킹을 확인 안 했는데 몇 위지? 대도시 중앙에 죄악의 탑 랭킹 게시판이 있어서 그리로 이동하려는데, 멜로디가 미리 보고 왔는지 바로 알려 주었다.
[파티] 멜로디: 지금 실랭 21위임
[파티] 카젤: 많이 떨어졌네요?
[파티] 멜로디: 내일 마지막이라 다들 달릴 것 같으니까 종일 해야 할 수도 있어요. 몇 시까지 접속할 수 있어요?
종일이라니. 힘들게 던전 끝냈더니 죄악의 탑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래도 1위를 놓칠 수는 없기에 주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파티] 카젤: 지금 저녁 11시니까... 내일 아침 9시쯤?
[파티] 멜로디: 이번에도 지각하면 가만 안 둠^^
[파티] 카젤: 네...
지각쟁이 꼬리표가 끝까지 붙어 있겠구나 싶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어느새 협박이 자연스러워진 것 같지 않나? 처음엔 그래도 예의는 차렸던 거 같은데…… 편해진 건지 아니면 저를 믿지 못하는 건지.
어쨌든 내일도 지각하지 않으려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남은 던전은 내기에 이길 거라 자신했는지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줬기에 어제처럼 쓰러질 것처럼 피곤하진 않았다. 24시간 깨어 있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파티] 멜로디: 이번에도 못 일어날 것 같으면 깨워 줄까요? ㅋ
[파티] 카젤: ㄱㅊ;; 지금 알람 맞춰 놨어요
편해진 게 아니라 못 믿는 거였군. 주하는 혹시 몰라 핸드폰을 꺼내 미리 알람을 맞춰 두었다. 팔짱을 낀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멜로디를 최대한 외면하면서.
[파티] 카젤: 그럼 먼저 갈게요
내일 보자는 멜로디의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라나탈을 종료했다. 가볍게 어깨를 돌리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게임을 이제 막 종료한 저와 달리 다른 이들은 열심히 게임 하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부터 나이 든 어른까지. 익숙한 PC방의 모습이었다.
모니터에 집중한 사람들을 살피고 있는데, 저 멀리 익숙한 남자를 발견했다. 의자 팔걸이에 한쪽 손을 올리고 턱을 괸 채 화면을 보는 그는 어째선지 조금 무료해 보였다. 저런 표정으로 게임을 열심히 하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갑작스레 시선이 마주쳤다. 피할 시간조차 없이 부닥친 사고처럼 그렇게.
비웃는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싶어 퍼뜩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행히도 남자는 불쾌하지 않은지 저처럼 픽 웃고만 말았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며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돌아오는 것은 살랑살랑 흔드는 손가락 인사. 장난기 다분한 그 모습에 주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헤드셋을 빼자 PC방 특유의 소음이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서자, 조용하고 후덥지근한 거리가 반긴다.
주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열대야의 더위가 그 뒤를 졸졸 따라붙어 긴 꼬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
[길드] 벌꿀오소리: 와... 카젤님 진짜 너무한 거 아님?
[길드] 카젤: ㅇㅇ? 뭐가요?
빵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벌꿀오소리의 난데없는 저격에 물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묻자 벌꿀오소리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길드] 벌꿀오소리: 악탑 2인 이따위로 하기 있음?!
[길드] 벌꿀오소리: 아니 어떻게!!!
[길드] 벌꿀오소리: 2등이랑 20층이나 차이가 날 수 있지?
[길드] 벌꿀오소리: 짐승인가? 폐인인가? 1등도 적당히 해야지 너무하는 거 아니야! 님! 잠은 잠?? 거의 풀접 같은데!
[길드] 카젤: 난 또 뭐라고
[길드] 카젤: 깜짝 놀랐잖아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