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본가에 있는 고양이와 자기 펫이 모두 흰색이라는 것을 주하는 잠시 망각하기로 했다.
화면을 보며 집중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웃음에 감정이 한껏 녹아 있는 게 느껴졌다. 그보다 PC방에서 누가 이렇게 웃어? 아무리 재미있어도 적당히 자제해야지.
웃음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했지만, 다시 시작되는 멜로디의 공격이 시선을 붙잡았다. 주하는 채팅창을 노려보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파티] 멜로디: 그럴 리가. 잿물에서 뒹굴다 온 거 아님?
[파티] 카젤: 원래 검은색이거든?
[파티] 멜로디: 꼬질꼬질한 검은색? 그럼 태생이 못생긴 건가?
[파티] 카젤: 태생이 못... 와 진짜ㅋㅋㅋ
[파티] 카젤: 눈이 많이 아픈가 봐? ^^
[파티] 멜로디: 나 눈 좋아. 보는 눈도 높고
[파티] 카젤: 요즘 눈이 좋다는 말의 뜻이 바뀌었나? 아니면 반어법인가?
[파티] 멜로디: ㅋㅋㅋ
아무리 봐도 검은 털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붉은 눈은 보석처럼 화려했다. 저랑 똑 닮은 고양이는 절대 추레할 수 없었다. 왜 자꾸 못생겼다고 하는 거야?
[파티] 멜로디: 못생긴 걸 못생겼다 말도 못 하게 하네
[파티] 카젤: 무슨 헛소리야? 잘생긴 걸 못생겼다고 하면서
[파티] 멜로디: ㅋㅋ
[파티] 멜로디: 그런가?
[파티] 멜로디: 근데 이상하지 않아?
주하는 당장이라도 네가 이상하다고 말하려다 꾹 참았다. 어디 무슨 말을 지껄이나 지켜보자는 심보였다.
[파티] 카젤: 뭐가?
[파티] 멜로디: 왜 이렇게 흥분해?
[파티] 멜로디: 내 고양이 이야기하는데 욱할 이유가 있어? 너도 네 고양이 이야기한 거잖아
말이라도 못 하면 차라리 중간이라도 가지. 얄미운 놈. 하지만 제가 말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주하는 크게 한숨을 쉬며 올라왔던 화를 내리눌렀다.
[파티] 카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니까 그러지
[파티] 멜로디: 컬러는 개인 취향 아닌가?
[파티] 카젤: 그럼 흰색으로 바꾸든가
[파티] 멜로디: 검은색이 못생겨서 잘 달릴 것 같아
[파티] 카젤: 하
멜로디의 뻔뻔함에 더는 짜증을 숨길 수 없었다. 주하는 탈것 모션 중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자신의 고양이가 앞발로 검은 고양이를 툭 쳤다. 온 힘을 다해 할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모션을 취했다.
그런데 멜로디는 뭐가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멜로디답지 않게 ㅋ의 향연이 길게 이어졌다. 보통 ‘ㅋㅋ’거나 ‘ㅋㅋㅋ’만 사용하던 그가 이렇게 반응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나치게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은가.
저 때문일 게 분명해서 주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상대 안 하는 게 심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그의 도발에 일일이 반응해서 같이 유치해지긴 싫었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주하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멜로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따라붙었다.
[파티] 멜로디: 그러게 왜 먼저 도발해
[파티] 카젤: 내가 언제
[파티] 멜로디: 방금 그랬잖아
[파티] 카젤: 예쁘다고 했는데
[파티] 멜로디: 불순한 의도였다는 건 인정하는 거야?
칭찬이었을 뿐 도발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려 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와 똑 닮은 고양이를 꺼내서 탔다는 건 불순한 의도가 맞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예쁘다고 해 줬는데. 본인은 저와 닮은 고양이를 못생겼다고 놀려 놓고는 이렇게 뻔뻔하게 굴 줄은 몰랐다. 인정머리 없긴. 멜로디는 보지 못할 모니터 너머에서 괜스레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얜 왜 갑자기 반말이지?’
이제 예의 차리는 건 귀찮아졌나? 잘만 존대하다가 갑자기 반말로 바뀌는 게 어이없었다. 주하는 멜로디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파티] 카젤: 그보다 갑자기 웬 반말이죠?
[파티] 멜로디: 먼저 말 놨잖아
[파티] 카젤: 제가요?
[파티] 카젤: 언제요?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멜로디: 은근히 골 때리는 녀석이네
사람한테 대놓고 골 때린다고 하다니. 지가 더 골 때리는 놈이란 것을 스스로가 알았으면 좋겠다.
[파티] 카젤: 예의 없는 그 입 좀 다물어 줄래요?
[파티] 멜로디: 입? 우리 보이스 챗 중이었어?
[파티] 카젤: 후......
[파티] 카젤: 그냥 말 걸지 말아요
[파티] 멜로디: ㅋㅋ
주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멜로디가 이런 성격이란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저도 막 나갔을 텐데. 뒤늦게 뒤통수 맞은 뇌가 얼얼했다.
[파티] 멜로디: 반말 잘만 하던데 하던 대로 해 그냥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온 거 같지 않아?
[파티] 카젤: 하... 진짜
이런 상황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 차라리 맨 얼굴로 마주하는 게 낫겠다. 멜로디도 다시 존댓말 할 생각은 없어 보이고, 저 또한 멜로디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파티] 카젤: 맘대로 해라
이건 절대 친해져서 말을 놓은 게 아니다.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신경 써 줄 만큼의 사이도 아니기에 막 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마치 될 대로 되란 심정이랄까.
[파티] 멜로디: ㅋㅋㅋ
[파티] 카젤: 웃지 마
[파티] 멜로디: 왜? 정들 것 같아?
[파티] 카젤: ...ㅋ 아니. 없던 정도 뚝 떨어질 것 같아
[파티] 멜로디: 저런, 난 네가 맘에 드는데
[파티] 카젤: ^^ㅗ
멜로디는 자신의 대답에 또 한 번 길게 웃었다. 과묵하기는 개뿔, 성격 좋아 보인다는 말도 취소다.
[파티] 카젤: 그만 웃고 풀링이나 해 와
어느새 목표 지점에 도착했는지 주변엔 몬스터로 가득했다. 퀘스트 몹이 아닌 업적용 몹이라 그런지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쾌적했다.
[파티] 멜로디: 말 놨다고 바로 부려 먹는 것 봐
[파티] 카젤: 싫으면 파탈 하든가?
[파티] 멜로디: 연약한 힐러한테 바라는 게 많아 우리 딜러님은?
[파티] 카젤: 안 어울리니까 연약한 척하지 마라
[파티] 멜로디: 악탑에서는 잘만 지켜 주더니... 너무하다
[파티] 카젤: ^^... 내가 나갈까?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 까칠하긴
놀리는 것과 달리 멜로디는 탈것에서 내려 몹을 몰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몹은 스킬을 사용하고, 가까운 몹은 보호막을 두른 채 몸으로 끌어왔다.
그렇게 다섯 마리가 열 마리 되고, 열 마리가 스무 마리로 늘어난 몹 무리를 뒤꽁무니에 달고 멜로디는 카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주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파티] 멜로디: 뭐 해?
멀뚱히 서 있는 카젤을 본 멜로디가 달려오며 물었다. 그러나 카젤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는 카젤을 스쳐 지나가며 다시 한번 불렀다. 조금은 다급한 모습이었다.
[파티] 멜로디: 빨리 잡아 나 힐탬이야
카젤이 몹을 잡지 않는다면, 멜로디가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힐탬은 말 그대로 힐에 특화된 아이템이라 공격력이 미미하기 때문이었다.
주하는 열심히 뛰어다니는 멜로디를 지켜보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파티] 카젤: 살려 주세요 하면 잡아 주고
[파티] 멜로디: ...
[파티] 카젤: 싫으면 계속 뛰어다니든가?
이곳 몬스터는 이동 속도가 빠른 놈들밖에 없었다. 멜로디가 제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어 아슬아슬했다.
시전 스킬인 광역 CC기를 쓸 여유도 없고, 몹을 잡을 수 있는 스킬도 없는 힐러가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멀리 도망가면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그전에 죽을 게 뻔했다. 스무 마리 넘는 몹에 맞으면 힐이 따라가지 못할 테니까.
멜로디가 죽는다면 영혼으로 열심히 이곳까지 달려와야 하는데, 과연 멜로디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주하는 느긋하게 웃었다.
[파티] 카젤: 자알 뛰네 ㅋㅋ
[파티] 멜로디: 이렇게 나온다고?
[파티] 카젤: ㅇㅅㅇ
[파티] 멜로디: 얄미우니까 개인주의 빙의하지 마라
[파티] 카젤: ㅋㅋㅋ
그러게 평판을 잘 쌓았어야지. 주하는 바닥에 앉아 뛰어다니는 멜로디를 즐겁게 구경했다.
멜로디는 카젤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뒤엔 눈이 벌겋게 변해 쫓아다니는 몹이 한가득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몹에 쫓긴 채 주변을 맴돌던 멜로디의 머리 위로 드디어 말풍선이 떴다.
[파티] 멜로디: 살려 줘
[파티] 카젤: 주세요
[파티] 멜로디: ㅋㅋ 미치겠네
[파티] 카젤: ㅋㅋㅋㅋ
[파티] 멜로디: 살려... 주세요
주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은 통쾌한 기분으로 몹에 스턴을 걸자 멜로디가 제게 다가왔다.
[파티] 멜로디: 힐러 괴롭히니까 재밌어?
[파티] 카젤: 누가 먼저 괴롭혔더라
주하는 광역 스킬과 CC기도 적절히 사용하며 손쉽게 몹을 잡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조하려던 멜로디가 카젤이 알아서 다 잡고 있자 얌전히 곁을 지켰다.
이렇게 보면 힐러 맞는데……. 주하는 피식 웃으며 전투를 마무리했다.
[파티] 카젤: 한 번 더 몰아올래?
[파티] 멜로디: 싫어
[파티] 카젤: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멜로디: 이번엔 네가 몰아
[파티] 카젤: 그러지 뭐ㅋㅋ
역시 딜러가 황족인 힐러를 이길 수 있는 곳은 필드뿐이었다. 주하는 여전히 저를 의심하는 멜로디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 맛에 놀리는 거지.
업적 포인트는 착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멜로디와 함께 열심히 울부짖는 평원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저녁 8시쯤 되자 죄악의 탑 실시간 랭킹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2위와 3위를 제치고 올라온 뉴페이스는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