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파티] 카젤: 저기 알 클릭해야 해
[파티] 멜로디: ㄱㄱ
주하는 멜로디와 함께 알이 가득한 벽 쪽으로 달려갔다. 자세히 보니 검은 알도 있고, 우그러진 알도 있고, 반쯤 깨진 알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모양이 각각 다른 게 뭔가 찝찝했지만, 일단 가까운 붉은 알 하나를 건드려 보았다.
캐스팅이 길게 이어지고 마지막에 다다른 순간 알이 깨지며 효과가 들어왔다.
[실패(디버프): 5초간 행동 불능]
[파티] 카젤: 이게 뭐야? 실패?
[파티] 멜로디: 나도 실패
두 사람 모두 5초간 그로기20) 상태가 되자 광역 공격에 누워 버렸다. 죄악의 탑 밖으로 튕겨 나온 카젤은 방금 보았던 알을 떠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실패라고? 실패가 있다면 성공도 있다는 거 아닌가?
75% 기믹을 넘기는 열쇠는 분명 알이었다. 그런데 제가 본 유형만 네 개다. 나머지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일단 붉은 알이 실패인 걸 보면 다른 알을 클릭해야 하는 것 같았다.
[파티] 멜로디: 무슨 알 클릭했어?
멜로디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물어 오기에 주하는 곧장 대답했다.
[파티] 카젤: 나 붉은 알. 넌?
[파티] 멜로디: 노란 알
[파티] 카젤: 헐... 노란 것도 있었어? 알이 몇 개지?
[파티] 멜로디: 영상 찍어 둔 거 있어 기다려 봐
주하는 멜로디의 말에 황당함이 뒤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타워에서도 영상을 찍고 있었을 줄이야.
유저들은 보통 레이드 던전 공략을 위해 영상을 찍은 후 분석하고는 했지만, 이런 작은 콘텐츠는 찍지 않는다. 하드 용량을 너무 많이 잡아먹을뿐더러 이렇다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저 또한 2인 레이드라고 인식하긴 했다. 그럼에도 영상 촬영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죄악의 탑 보스가 어렵게 나올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했지만, 그보단 레이드 던전이 아닌 곳에서의 촬영은 익숙하지 않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멜로디의 치밀함이 오늘따라 무척 예뻐 보여서 주하는 그의 옆에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상을 분석하고 있으니 제 모습은 보지 못할 터였다.
[파티] 멜로디: 왜 쓰다듬어?
하지만 그의 치밀함은 게임 화면에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설마 눈이 두 쌍인 건 아니지?
[파티] 카젤: 잘했다고 칭찬하는 건데
[파티] 카젤: 쓰다듬으면 안 돼?
[파티] 멜로디: ㅇㅇ
[파티] 카젤: 왜?
[파티] 멜로디: 고양이 예뻐하는 거 같잖아
[파티] 카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묘인족은 쓰다듬기 모션을 받으면 귀가 뒤로 살짝 눕는다. 그 때문인지 마을을 돌아다닐 때 종종 쓰다듬을 받곤 하는데, 마치 실제 고양이를 귀여워해 주는 모양새였다.
[파티] 카젤: 그게 싫으면 종족 변경하지?
[파티] 멜로디: 정령사는 묘인족이 가장 효율 높아
아, 그런 거라면 뭐. 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탈은 클래스마다 효율이 좋은 종족이 있는데, 이는 대부분 종족 성향에 맞춰진다. 예를 들어 엘프가 마법이나 궁수에 잘 어울리는 것처럼. 물론 아주 미세한 차이라 선택에 있어서 강제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라도 포기하지 못하는 게 바로 랭커들이었다. 저 또한 인간을 선택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으니까.
지능 3과 대미지 5. 정말 별 볼 일 없는 수치를 꾸역꾸역 챙기는 건 역시 고인물밖에 없었다. 멜로디는 그보다 더한 썩은물이니까 애완동물이 된다고 해도 묘인족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주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파티] 멜로디: 그러니까 캐릭터는 쓰다듬지 마
[파티] 카젤: 글쎄? 생각해 보고
이 정도면 나중에 협상용으로 쓰기 딱 좋은 아이템 아닌가? 멜로디가 절 놀리려 할 때마다 공격할 게 없었는데 다행이었다.
[파티] 멜로디: 쓰다듬으려면 차라리 실제로 쓰다듬어
[파티] 카젤: 실제로? 게임에서 말고 현실에서 쓰다듬으라고?
[파티] 멜로디: ㅇㅇ
무슨 헛소리야? 게임이랑 현실 구분이 안 되나? 웃음밖에 나오지 않아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파티] 카젤: 영상은 봤어? 알 유형 몇 개야?
[파티] 멜로디: 대답도 안 하네
[파티] 카젤: 헛소리는 읽씹이 최고지. 그래서 알은?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
멜로디는 제 반응을 즐기는 듯 길게 웃더니 ‘시불이가 왜 불타오른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아’라고 말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 대꾸 없이 가만히 있자 멜로디도 질척이지 않고 넘어갔다. 은근히 분위기 파악 잘하는 녀석이었다.
[파티] 멜로디: 알은 총 여섯 개야
[파티] 멜로디: 붉은 알, 노란 알, 검은 알, 깨진 알, 우그러진 알, 얼룩진 알. 이렇게
[파티] 카젤: 방금 두 개 클릭해 봤으니까 남은 네 개 해 봐야겠네. 다음엔 네가 검은 알 클릭해. 내가 깨진 알 클릭할게
[파티] 멜로디: ㅇㅇ 근데 이상한 게 있어
[파티] 카젤: 뭐가?
[파티] 멜로디: 아까 알 클릭했을 때 무슨 문양 안 나왔었어?
[파티] 카젤: 문양?
[파티] 멜로디: 마지막에 하얀 연기가 나오면서 어떤 문양이 그려지던데. 영상에도 보였고
[파티] 카젤: 그런 게 있었어?
문양이…… 있었던가?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알이 깨지고 곧바로 그로기 상태가 돼서 디버프 확인하느라 볼 새가 없었다.
좀 더 집중해서 볼걸, 다른 데 신경 쓴다고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파티] 멜로디: 진짜 못 봤어?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흐음... 눈썰미가 영...
[파티] 카젤: 디버프 먼저 보느라 못 봤지;
[파티] 멜로디: 그렇다고 해 줄까?
[파티] 카젤: ...ㅋ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
웃냐? 웃음이 나와?
주하는 삐죽 심술이 돋아 멜로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로 옆에 있었기에 멜로디는 도망가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내어 주었다.
카젤의 손이 닿자마자 멜로디의 하얀 귀가 뒤로 누웠다. 귀여운 그 모습에 주하는 속절없이 웃어 버렸다. 가만히 있을 땐 분위기 있어 보이더니 이쁨받을 땐 영락없는 고양이다. 그 간극이 재미있어 한 번 더 쓰다듬자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기분 나쁜 티를 풀풀 풍기며 멀찍이 떨어진 그는 ‘멜로디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당신을 응시합니다’라는 감정 표현을 사용했다. 주하는 다시 한번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그러게 누가 놀리래?
[파티] 카젤: 왜? ^^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는지 멜로디가 말없이 쳐다보았다.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참 그 시선을 즐기고 있는데, 문득 이러고 놀 시간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티] 카젤: 그만 노려보고 영상 좀 더 봐 봐
[파티] 카젤: 보스 잡아야지
[파티] 멜로디: ...네가 할 말이 아닌 거 같은데?
[파티] 카젤: ㅋㅋㅋㅋㅋㅋㅋ
멜로디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잠시 후에야 영상을 보고 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주하는 방치되어 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람이었다.
“내일부턴 겜방 안 와도 되겠네.”
고장 난 컴퓨터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PC방에 온 게 조금은 억울했는데 다행이다. 전원이 그렇게 나가 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부족한 지식엔 역시 경험이 답이었다. 그 탓에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쳤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남자는 여기 단골인가? 라나탈 하는 것 같던데. 혹시 지금도 여기 있으려나?’
주변을 힐끔거리던 주하는 같은 줄, 왼쪽 끝에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그때와 똑같이 턱을 괸 채 무료해 보이는 모습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원래 표정이 저런 건가? 참 건조하게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드디어 남자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레이하는 건 아닌 것 같고, 타속이 빠른 걸 보니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개도 갸웃하고 눈도 빠르게 깜박이는 게 당혹감보다는 황당해하는 느낌이 강했다. 남자는 한참 그렇게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갑작스럽게 고개를 휙 돌렸다.
“……!”
깜짝이야.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왼쪽 볼이 따끔한 걸 보니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굉장히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설마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안 건가? 놀라서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시선을 최대한 무시하고자 화면을 노려보는데, 문득 채팅창에 시선이 닿았다. 멜로디의 글이 연속으로 올라와 있었다.
[파티] 멜로디: 하나 찾았다
[파티] 멜로디: 방금 소환하는 부분부터 다시 봤는데
[파티] 멜로디: 바닥 마법진에서 똑같은 문양을 발견했어
[파티] 멜로디: ...보고 있어?
[파티] 멜로디: 뭐 해?
[파티] 멜로디: 어디 갔나?
[파티] 멜로디: 카젤
[파티] 멜로디: ????
언제 이렇게 저를 찾고 있었지? 시간이 얼마큼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이 있음을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파티] 카젤: 왔어. 잠깐 뭐 좀 보느라
잠시 후 대답이 돌아왔다.
[파티] 멜로디: 뭐 봤는데?
[파티] 카젤: 어?
[파티] 멜로디: 잘생긴 남자라도 봤어?
멜로디의 묘한 질문에 주하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전과 달리 모니터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잘생……기긴 했지만, 굳이 멜로디에게 전할 말은 아니었다.
[파티] 카젤: 아니. 겁나 못생긴 남자랑 눈 마주칠 뻔
어디선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웃는 사람들이 많아? 아까도 누군가가 크게 웃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도 웃고 있고, 지금도 누군가 웃음을 참고 있다.
키보드 샷건 치는 소리나 욕설보다는 낫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20)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