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아니라 공략이었다. 2위와 3위한테 쫓기는 상황이라 빠르게 보스 공략을 마치고 다시 거리를 벌려야 했다. 멜로디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더는 이상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파티] 카젤: 그런데
[파티] 카젤: 마법진에서 같은 문양을 발견했다고?
[파티] 카젤: 알에서 나오는 문양이랑 같아?
[파티] 멜로디: ㅋㅋㅋ 응 맞아
알에서 나오는 문양이랑 마법진 문양이 같다면 분명 연관된 기믹이라는 소린데……. 클릭할 수 있게 만들었고, 거기다 실패와 성공 여부가 있다는 건…….
주하는 고민하다가 마지막 단서가 될 만한 질문을 건넸다.
[파티] 카젤: 혹시 마법진 문양도 여섯 개야?
[파티] 멜로디: ㅇㅇ
답이 나왔다. 주하는 머릿속에서 중구난방으로 뒤섞인 정보들을 정리하며 공략법을 떠올렸다.
알의 종류도 여섯 개, 마법진 문양도 여섯 개. 그 두 개가 똑같은 문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마법진이 만들어질 때 문양이 하나하나 나타났었는데, 그 문양 순서에 맞게 해당 알을 클릭하는 것이 공략법인 듯했다. 일명 기억력 테스트 기믹이랄까? 다른 유형으로 여러 번 겪었던 터라 익숙했다.
[파티] 멜로디: 일단 순서를 외우려면 각각의 알이 어떤 문양을 가졌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두 번은 더 전멸해야 해
주하는 공략법을 설명하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가 멈칫했다. 말하는 걸 보니 멜로디도 이미 방법을 알아낸 것 같다.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저와 똑같은 공략법을 세운 멜로디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껏 이런 적은 없어서 생소하다고 해야 할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가 공략을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하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자진신고 길드에 들어가기 전에는 막공을 전전했다. 그때마다 항상 공략을 알아내고, 설명하는 것까지 제 일이었다. 인원은 매번 바뀌니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패턴에 익숙해지면 딜이 모자라거나 힐이 부족해서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언제나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레이드를 하다가 자진신고 길드에 들어오고 나서야 처음으로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었다.
공략할 때 팀원들과 의견이 다를 때가 많았지만, 그 또한 레이드 공략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제가 알려 주는 것만 습득하던 유저들과의 레이드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공략할 때가 재미있는 건 당연하니까. 게다가 팀원들의 컨트롤과 템이 좋아서 진도가 쭉쭉 나가니 그냥 모든 게 다 아름다워 보였다.
어쨌든 자진신고 길드에 왔을 때도 이렇게까지 생각이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벌꿀오소리가 그나마 제 의견에 동의하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주하는 기분이 이상해서 볼을 긁적였다.
[파티] 멜로디: 뭐 해? 안 들어가?
화면 정중앙에 떠 있는 입장 확인 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주하는 멜로디를 한번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파티] 카젤: 가자
두근거림을 진정하지 못한 채 멜로디와 함께 죄악의 탑에 다시 입장했다. 로딩 화면이 떠올랐다.
[파티] 멜로디: 순서 324516
[파티] 카젤: 내가 341
[파티] 멜로디: 256
두 번의 전멸로 알의 문양을 모두 알아내고 드디어 실전으로 들어갔다. 라스탈리온의 피가 75%가 되고 붉은 오라가 떠오를 때, 가장 먼저 멜로디가 3번 알을 클릭했다. 역시나 디버프는 생기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제대로 된 공략법이라는 뜻이었다.
자신감이 붙은 주하와 멜로디가 번갈아 가며 순서대로 알을 클릭했다. 그러자 이제 막 광역 공격을 시전하려던 라스탈리온이 넘어졌다. 드디어 75% 기믹을 넘은 것이다.
[파티] 카젤: 꽤 오래 트라이한 기분이네
[파티] 멜로디: 다섯 번째니까
[파티] 카젤: 하긴, 알 문양 알아내려고 세 번은 죽었으니
[파티] 멜로디: 진짜 레이드 보스 잡는 거 같아서 괜찮지 않나? 악탑을 파티 콘텐츠로 기획한 건 잘한 거 같아
[파티] 카젤: ㅋㅋㅋ
과거엔 왜 이렇게 만들었냐 투덜댔지만, 솔직히 지금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역시 라나탈은 사람들과 함께 레이드를 하는 재미가 최고였다.
주하는 다음엔 어떤 기믹이 나올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딜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쉬어 가는 타임인 듯 일반 공격이 이어졌다. 무난하게 진행하다가 드디어 보스 피가 60%쯤 됐을 때였다.
라스탈리온이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자 두 캐릭터 머리 위에 징표가 떠올랐다. 카젤의 머리 위엔 붉은색이, 멜로디의 머리 위엔 검은색이. 그와 동시에 라스탈리온 주변에 붉은 장판과 검은 장판이 여럿 생겼다.
황급히 디버프 창을 본 주하는 ‘상쇄’ 아이콘을 보자마자 검은 장판으로 올라갔다. 멜로디도 다른 쪽의 붉은 장판으로 가 있었다.
보통 상쇄로 나오는 기믹은 반대되는 속성에 들어가야 하는 게 공략법이었다. 그래서 붉은색 징표를 받은 카젤은 검은 장판으로, 검은색 징표를 받은 멜로디는 붉은색 장판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몇 초 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 장판에서 빛기둥이 올라왔다. 그러자 대미지는 받지 않고 머리 위에 있던 징표가 바뀌었다.
[파티] 카젤: 설마 매번 바뀌는 거야?
[파티] 멜로디: 그런가 본데
언제는 바뀌고, 언제는 바뀌지 않는 징표를 보며 두 사람은 집중하며 장판을 밟았다. 장판 터지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색을 확인하고 곧바로 달리지 않는다면 늦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반응 속도가 좋고, 이동 속도도 빨라서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있는 모든 장판을 밟아 없애자 또다시 라스탈리온의 외침이 울렸다.
이번엔 다른 모양의 징표가 멜로디 머리 위에 떠올랐다. 둥근 원형 안에 화살표 모양. 익숙한 징표였다.
둘의 합이 맞아야 하는 기믹이라 카젤은 멜로디에게 뛰어갔다. 만약 징표자가 기믹을 혼자 맞는다면 즉사할 수도 있었다. 반대편에 있던 멜로디도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빠른 합류를 위해 달렸다.
둘이 만나 한 점으로 뭉치자 곧바로 큰 공격이 들어왔다. 멜로디가 혹시 몰라 보호막을 둘렀지만, 단순 기믹일 뿐인지 대미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징표가 바뀌었다. 이번엔 각자 따로 맞아야 하는 공격이었다. 언제 달라붙어 있었냐는 듯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파티] 카젤: 숨 쉴 틈도 안 주네
[파티] 멜로디: ㅋㅋ
이번에도 피는 닳지 않았다. 그저 징표가 바뀌며 다른 공격이 들어올 뿐이었다.
몰아치듯 공격이 쏟아졌지만, 이전에 많이 경험했던 터라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차라리 이런 직접적인 기믹이 처리하기엔 편했기에 투덜거리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뛰어다니면서도 공격은 게을리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라스탈리온의 피가 21%까지 내려갔다.
가끔 몇몇 네임드는 낮은 생명력에서 광폭화 모드가 시작되기도 해서 주하는 긴장한 채로 라스탈리온을 보았다. 광폭화가 되면 보스의 공격 대미지가 커지고, 공격 속도도 빨라져서 조심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라스탈리온은 20%가 되자마자 온몸이 검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눈까지 붉게 물든 보스는 입을 쩍 벌리며 크게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멜로디와 카젤 캐릭터가 맵 외곽으로 쭉 밀려났다. 그로기 상태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바닥에 히트 박스가 하나씩 중첩되기 시작했다. 곧 이곳에 공격이 순차적으로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파티] 멜로디: 그로기 끝나면 시계 방향으로 바로 뛰어
[파티] 카젤: ㅇㅇ
행동 불가가 풀리자마자 두 사람은 시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바닥에 계속해서 히트 박스가 생기며 그 뒤로 공격이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멈칫거리는 순간 연타로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그때, 갑자기 라스탈리온이 카젤을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목구멍 안에는 검붉은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주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불길함은 적중했다.
중심에서부터 외곽까지 부채꼴로 붉은 히트 박스가 생기더니 카젤을 따라다니다, 1초쯤 지나자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라스탈리온의 입에서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주하는 이동기를 써서 벗어나려 했지만, 안전지역과 너무 멀어져 있던 탓에 피할 수 없었다.
“아, 하필.”
엄청난 브레스 소리와 함께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자 생명력 바가 줄어드는 것도 없이 단번에 죽음에 이르렀다. 카젤 캐릭터가 바닥에 쓰러지자 화면은 죽음을 알리는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주하는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떼며 한숨을 쉬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죄악의 탑은 팀원 중 한 명이 죽으면 남은 유저가 그 층을 완료해야만 죽었던 이를 부활시킬 수 있었다. 지금은 보스를 트라이하고 있고, 기믹도 다 알아내지 못한 상황이다. 당연히 멜로디 혼자 보스를 잡기란 불가능했다.
그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기믹에 대해 많이 알아내는 것. 그것뿐이었다.
“제발 다음 기믹까지는 보고 가자.”
주하는 멜로디를 조용히 응원하며 관전 모드로 들어갔다.
외곽에 붙어 있으면 브레스 공격을 피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멜로디는 보스 가까이 달려갔다. 그때 또다시 맵의 1/4이 붉게 변했다. 멜로디가 있는 방향이었지만, 다행히도 미리 이동해 둔 터라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두 번의 브레스 공격이 이어졌지만, 모두 가뿐하게 피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공격도 드디어 멈췄다.
광폭화 모드의 라스탈리온은 브레스 공격을 끝내자마자 멜로디에게 달려들었다. 꼬리 치기와 몸통 박치기, 물어뜯기 공격 등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전보다 더 빨라졌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멜로디는 공격을 피하며 간간이 딜을 넣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시전을 하는 순간 라스탈리온의 공격이 들어와 여의찮았다. 어쩔 수 없이 평타라도 넣던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보호막을 두르고 스킬을 시전했다. 보스에게 맞으면서도 스킬 공격을 성공한 그가 말했다.
[파티] 멜로디: 평타랑 마법 공격 전부다 딜 1 들어가
[파티] 카젤: 1? 더 안 들어가?
[파티] 멜로디: ㅇㅇ 주먹으로 쳐도 1
[파티] 카젤: 그 정도면 무적이랑 다를 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