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주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저보다 그가 더 화가 나 보여서 진실을 말하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파티] 멜로디: 팀원이랑 같이 영던 돈다고 하더니
[파티] 멜로디: 왜 너 혼자 돌고 있냐고
[파티] 멜로디: 대답해 빨리
텍스트만으로도 이렇게 위압감을 받을 수 있다니. 제가 그동안 겪었던 멜로디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화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인가 보다.
“…….”
멜로디가 쏟아 내는 차가운 분노에 주하의 손은 그저 키보드 위를 방황했다. 뭐라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상황이나 분위기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주하가 대답하지 않자 멜로디도 침묵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건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지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 이 침묵이 불편해질 즈음, 멜로디가 한풀 꺾인 느낌으로 카젤에게 물었다.
[파티] 멜로디: ...너 설마
[파티] 멜로디: 레이드 팀에서 나왔어?
주하는 깜짝 놀라 다급히 말했다.
[파티] 카젤: 그건 아니야
[파티] 멜로디: 그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게 분명했다.
제 상황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레이드 팀에서 나간 것은 아니다. 그저 블랙체리의 홀로서기를 위해 제가 조금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반강제긴 했어도 어쨌든 도움을 주는 건 주는 거였다.
그 이외 다른 수식어가 들어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제가 짜증이 났던 건 공팟의 복불복 때문이지, 팀원과 같이 던전을 돌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이미 공사 구분을 해 둬서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 상황과 제 기분을 제대로 전달해야 했기에, 주하는 진지하게 말했다.
[파티] 카젤: 길드에 랭커 유저가 들어왔는데 정공팀이 없어서 레이드 전까지만 도와주기로 했어
[파티] 멜로디: 레이드 전?
[파티] 카젤: 영던템까지 맞추면 그래도 다른 팀에 들어가기는 수월할 거 아냐. 그래서 영던까지만 양보하기로 했어
[파티] 멜로디: 그래서... 너만 혼자 따로 영던 돌고?
[파티] 카젤: 뭐... 그렇지?
저도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는데 멜로디라고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는 딱 봐도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의외로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파티] 멜로디: 근데 왜 나한텐 얘기 안 해? 무슨 일 생기면 말하라고 했잖아
[파티] 카젤: 이걸 왜 말해ㅋㅋㅋㅋ 별일도 아닌데
[파티] 카젤: 던전이야 공팟으로 돌면 되지
‘무슨 일’의 기준이 너무 광범위해 주하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멜로디에게 하소연할 만큼 큰일도 아니었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제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챈 듯 그는 더 따지지 않았다.
[파티] 멜로디: 레이드는 같이 하는 거 맞아?
[파티] 카젤: 어ㅋㅋ 천상님한테 확답받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파티] 멜로디: 정말? 진짜로?
[파티] 카젤: 네 맞습니다! 진짜로요! 정말로!
몇 번을 멜로디에게 확답을 주고서야 드디어 그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다른 팀의 공대장을 대체 왜 제가 달래야 하는 걸까. 그것도 자기 일로.
주하는 멜로디의 의외의 면을 발견하고 슬쩍 웃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남의 일에 관심도 많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뭐 하나 일관적이지 않은 그가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불규칙함은 쿨타임이 없나 보다. 멜로디는 곧바로 새로운 폭탄을 터트렸다.
[파티] 멜로디: 일단 영던 파티 없는 건 확실하지?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그럼 우리랑 돌아
[파티] 카젤: 엉?
[파티] 멜로디: 영던 우리랑 돌자고
[파티] 카젤: 무슨 소리야? 너넨 인원 다 있잖아
[파티] 멜로디: 딜러 한 명이 좀 더 늦어질 것 같다고 해서
[파티] 카젤: 2주 못 온다는 분? 근데 더 늦어진다고?
[파티] 멜로디: ㅇㅇ 그래서 지금 동생이 돌리고 있는데 일반 던전 게이지 올리고 있어서 어차피 당장은 한 자리 비어. 영던 합류하려면 3주는 걸릴 거 같아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돌아
주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어떻게 또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지. 아니, 이건 그저 그런 운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리프 공대라면 딜러 한 명쯤 쉽게 구할 텐데, 내 자리를 챙겨 주다니. 뭔가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벅차오르고, 굴러온 호박에 얼떨떨하기도 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멜로디가 이렇게 챙겨 주는데 이제 와 괜찮다고 알아서 하겠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고마운 마음으로 당장 그러겠노라 대답해야 했다.
“…….”
그래야 하는데…….
왜인지……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주하는 복잡해 보이는 낯으로 멜로디를 응시했다. 떠올려 보면 제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그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처음엔 죄악의 탑에서 우연으로, 그 후로는 멜로디가 저를 신경 써 주면서.
이번만 하더라도 팀원들과 같이 할 줄 알았던 악탑과 던전이 제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는데, 그는 그때마다 제게 오는 불행을 막아 주는 것처럼 제안하지 않았던가.
나랑 같이해. 우리랑 같이해. 너랑 다 맞춰 놔서 기다릴게.
제가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숨겼음에도 결국엔 멜로디와 함께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마치 그게 운명인 것처럼.
‘멜로디, 리프 공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제게 어울리는 팀은 자진신고가 아니라 리프 길드가 아닌가 하고. 처음부터 멜로디와 함께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그럼 더 재미있고 즐겁게 레이드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자꾸만 그런 바람이, 아니, 욕심이 머리를 들이밀고 올라오려 했다.
멜로디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인지 알게 될수록 욕심은 커졌다. 지금 자리를 비운 딜러가 계속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못된 생각까지 하게 될 정도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저는 결국 자진신고에서 레이드를 할 테고 멜로디와 리프 길드와는 경쟁 상대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너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좋은 사람들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저만 잘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주하는 다짐하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파티] 카젤: ㅇㅇ 그래
[파티] 멜로디: 딜러님이 고민이 너무 긴 거 아냐?
[파티] 카젤: ㅋㅋㅋ 나만 한 딜러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 정도 기다림쯤이야 ^^
[파티] 멜로디: 그건 그렇지ㅋ
[파티] 카젤: --;; 당황스럽게 뭘 긍정하고 있냐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
웃기지 말라는 소리가 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하여튼 멜로디는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허를 찌르니 방심할 수가 없다.
[파티] 멜로디: 그럼 바로 가 볼까?
[파티] 카젤: 지금 바로?
[파티] 멜로디: ㅇㅇ
죄악의 탑을 같이 하기로 한 날도 그러더니, 멜로디는 결정하면 바로 진행하는 스타일인가?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 말린다, 진짜.
그래도 이제부터 제대로 영웅 던전을 즐길 수 있겠구나. 파티 구하려고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고, 공략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을 테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방금까지 막공에 지쳐 늘어져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팔팔해졌다. 이래서 괜히 고인물, 고인물 하는 게 아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사이, 파티에 사람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지구침략 님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바나나 님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리미티드 님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파티] 바나나: 카젤님! 안녕하세요!!
[파티] 지구침략: 안녕하세요^^
[파티] 리미티드: 안녕하세요
이번엔 일반 던전에서 같이 했던 여름n모기나 일시불, 개인주의가 아닌 다른 팀원이 합류했다. 그래도 이미 한 번 이상은 봤던 사람들이라 어색하진 않았다.
[파티] 카젤: 안녕하세요
[파티] 바나나: 크!!!! 드디어 카젤님이랑 던전을 같이 돌게 되네요! 내기 이후로 정말 벼르고 있었거든요 +_+
[파티] 카젤: ;;; 절 어쩌시려고;
[파티] 바나나: 어쩌긴요^^ 또 내기해야죠
[파티] 지구침략: ㅎㅎ 이번엔 같은 파티니까 이기지 않을까 해서 기대 중입니다
[파티] 카젤: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ㅋㅋ
[파티] 바나나: 노놉! 분명 카젤님한테는 뭔가 있어... 승리로 이끄는 그 무언가가...
[파티] 카젤: --; 그랬으면 지난 시즌에 퍼클을 저희가 했겠죠
[파티]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가?
[파티] 지구침략: ㅎㅎ 자진신고가 카젤님이랑 벌꿀오소리님 모시고 2위까지 올라온 거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파티] 카젤: 어?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파티] 지구침략: 이전 로그랑 미터기 다 뜯어봤죠^^
자진신고는 처음부터 상위권 팀이 아니었다. 무난한 중위권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단숨에 치고 올라왔는데, 그때 합류했던 사람이 카젤과 벌꿀오소리였다.
[파티] 지구침략: 지난 시즌 막넴 50%에서 우리가 추월당한 게 카젤님 보문 때문이었다는 거 들었어요
[파티] 카젤: 아...ㅋㅋ;;
[파티] 지구침략: 사실 그때 저희 진짜 멘탈 나갈 뻔했어요ㅎㅎ
[파티] 지구침략: 50% 기믹을 그렇게 빨리 넘길 줄 몰라서
[파티] 바나나: 저희 딜러들 멜로디한테 개까였다니까요 ㅠㅠㅠㅠㅠㅠ 저긴 다 넘기는데 너넨 왜 못 넘기냐고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