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바나나는 해맑게 웃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언제쯤이면 보석술사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려나 고민해 봤지만, 딱히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스킬이 너무 많고 스탠스를 변경하면서 해야 하니 진입 장벽이 높았다. 밸런스 패치가 있지 않은 한 당장은 답이 없었다.
주하는 씨앗을 외곽에 떨궈 놓고 다시 본진으로 합류했다. 이동하면서도 스킬을 계속해서 욱여넣었더니 바나나에게 등수는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1위는 여전히 리미티드였다.
기믹으로 인해 등수 차이가 나는 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나나는 다시 한번 저주를 내렸다.
—리밋이도 씨앗 한번 가자
—그러지 마…… 아!
그 순간 리미티드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의 머리 위에 씨앗 아이콘이 생겨난 것이다. 얼마나 놀랐으면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리미티드가 비명을 질렀을까. 단언컨대 바나나의 저주는 완벽했다.
[파티]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카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지구침략: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멜로디: ㅋㅋㅋ
파티원들은 마이크로도 웃고, 파티 말로도 웃었다. 이 즐거움을 고작 음성으로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놀리기에 특화된 사람들답게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아…… 망했어.
권투사는 근접 딜러라 씨앗을 빼러 외곽으로 이동하는 순간 딜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사이 카젤과 바나나가 치고 올라와 1위와 2위를 냉큼 주워 먹었다.
—맛있다, 맛있어.
“맛집이네요.”
—나나 누나 잊지 않을 거예요…….
—원래 인생이 다 그런 법이란다. 이제 카젤 님만 한 번 더 걸리면 되는데. 제발!
—글쎄…… 왠지 바나나 네가 또 걸릴 거 같은데?
—뭐야?
리미티드를 순위에서 밀어 버리고 한껏 즐거워하던 바나나는 멜로디의 섬뜩한 예고에 흠칫 놀랐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고, 말이 씨가 된다며 당장 취소하라고 말하던 그때였다. 바나나의 머리 위에 씨앗 모양의 아이콘이 둥실 떠올랐다.
—아악!!
안타깝게도 멜로디의 예고는 이변 없이 적용되었다. 딜러 두 명에게 내렸던 저주는 결국 저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간 셈이었다. 주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정의는 승리하네요, 누나.
—하이고, 나나야…….
—그러게 마음을 곱게 썼어야지.
“멀리 안 나가요. 잘 다녀오세요.”
지구침략을 제외하고 다들 바나나의 불행을 기뻐했다. 원래 주는 대로 받는 건 만고불멸의 진리였다.
바나나는 한껏 우는소리를 냈다. 멜로디 때문에 망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씨앗을 외곽에 버리고 오는 발걸음은 재빨랐다. 마지막 씨앗이라 더는 저주를 내릴 수 없다며 아쉬워하는 건 덤이었다.
안전 지역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분노한 엔트는 바닥에 쓰러졌다. 공략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딜을 충분히 뽑아야 하므로 은근히 까다로운 보스였다. 물론 지금 파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1등은 카젤 님이네…….
—현재 스코어는 리미티드 2승, 카젤 1승, 바나나는 없어.
—하, 이렇게 된 이상 빡집중 한다!
마치 지금까지는 몸풀기였다는 듯 바나나는 파이팅을 외쳤다. 남은 네 개의 던전에도 보스가 많아서 따라잡는 건 충분했으므로. 주하도 동감하는 바이기에 고작 1승이라고 해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이템 뭐 나왔는지 볼까?
내기에 정신이 팔린 딜러들을 놔두고 지구침략은 보물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템 선택 창이 떠올랐다.
<불타는 천사의 장갑(정령사)
체력: 45 / 지능: 120
능력치 2개 랜덤 부여
획득/포기>
<불타는 심판관의 장갑(혈기사)
체력: 110 / 힘: 60
능력치 2개 랜덤 부여
획득/포기>
—아…….
—와, 이러기 있냐.
“재주는 딜러가 부리고 아이템은 탱힐이 먹는구나…….”
영웅 던전에 가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템을 먹는 것이다. 내기는 그저 잠깐의 유희일 뿐이었다. 그런데 강화 물약을 먹어 가며 열심히 딜한 딜러는 버림받고, 탱커와 힐러의 아이템만 나오다니.
—투덜거릴 시간에 다음 던전으로 가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래, 억울해서라도 팀 내기랑 딜 내기 다 이겨야겠다.”
—어라라? 카젤 님, 그 발언으로 제 전투력이 확 올라갔어요!
—누가 이길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알죠.
—아무래도 파티 잘 들어온 거 같아.
지구침략의 흐뭇해하는 음성에도 딜러들의 경쟁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열심히 할수록 이득을 보는 이가 누구일지는 명확했지만, 그런 것 따위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하도 오랜만에 눈이 반짝반짝해서는 피곤함 따위는 모른다는 듯 불타오르고 있었다.
힐러인 멜로디와 탱커인 지구침략만 만족스럽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파티원들은 다음 던전으로 향했다.
***
던전 다섯 개의 보스는 총 스물세 마리. 그중 한 마리는 집계에 포함하지 않으니 스물두 마리로 순위를 책정했다.
현재 스코어 7:7:7.
마지막 던전의 최종 보스를 남겨두고 카젤과 바나나, 리미티드는 동점을 만들어 처음으로 돌아왔다. 결국, 마지막 보스의 딜 순위로 판가름이 나게 된 것이다. 이미 팀 대 팀의 내기는 승리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었고, 남은 것은 딜러들끼리의 내기뿐이었다.
[귓속말] 개인주의: 카젤 형!! 진짜 마지막 보스임? ㅠㅠㅠㅠ
[귓속말] 카젤: ㅇㅇ
[귓속말] 개인주의: 말도 안 돼! 우리 이제 던전 들어왔는데!
[귓속말] 개인주의: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잡아요?? ㅠㅠㅠ
[귓속말] 카젤: 그거야... 던전 내내 강화 물약을 먹으면 가능하죠
[귓속말] 개인주의: 헐? 보스 말고 일반 몹도요?
[귓속말] 카젤: ㅇㅇ 쿨마다 먹었어요
[귓속말] 개인주의: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ㅇ0ㅇ;;
[귓속말] 카젤: ...^^ 골드나 준비해 두고 있으셈
[귓속말] 개인주의: ㅠㅠㅠㅠㅠㅠㅠ 줴길!!!
딜에 눈이 돌아간 딜러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팀 대 팀 대결에서 이기지 않았는가. 주하는 개인주의를 깔끔하게 퇴치하고 보스 앞에 섰다.
마지막 던전은 어둠의 심장이라는 던전으로, 샤하스모르 지역의 가장 끝에 위치했다. 같은 5대 던전이라고 해도 난도가 조금씩은 달랐는데, 어둠의 심장은 다른 곳과 다르게 악명이 자자했다.
그중에서도 바로 눈앞에 있는 보스는 압도적이었다. 제단 위에 서 있는 놈은 이번 확장팩의 최종 보스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부하인 듯 이름도 남달랐다. 관리자 네테람. 악마형 몬스터로 덩치가 유독 컸다.
놈의 상체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가득 그려져 있었고, 허리엔 박쥐 날개 두 쌍이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다리는 검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데 그 뒤로 전형적인 악마형 꼬리가 느긋하게 살랑거렸다. 그 주변엔 수십 자루의 검이 둥둥 떠 있었다.
“이 보스는 잡은 팀이 많이 없다고 하더라.”
—공략법도 제대로 안 나왔어.
“나도 찾아봤는데, 1페이즈 공략만 있고 2페이즈는 없어. 확실히 이번 확팩 영웅 던전은 어렵게 나온 거 같아.”
—그러니까 재미있지.
“……뭐, 동감.”
경쟁에서 가장 짜릿한 건 역전승인 것처럼,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을 공략했을 때의 희열은 컸다.
—자, 쳐다만 본다고 잡는 건 아니니까 슬슬 가 볼까요!
“가시죠.”
가장 먼저 지구침략이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곧바로 시야를 반대쪽으로 돌리자 공중에 있던 수십 자루의 검이 춤을 추듯 휘몰아쳤다. 지구침략의 피가 순식간에 확 빠지자 멜로디의 폭힐이 타이밍 맞춰 들어갔다.
—공속 빠르다.
—칼이 많아서 그런 거 같아.
평타가 꽤 아파 보였지만, 딜러가 도와줄 수는 없는 부분이라 탱커와 힐러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주하는 가볍게 도트 스킬을 먼저 걸어 두고 시전 스킬로 딜을 넣기 시작했다.
보석술사의 딜 사이클은 꽤 복잡했는데, 도트 스킬 네 개를 넣어 딜을 하다가 시간이 끝날 때쯤 터트리면 자신에게 버프가 생긴다. 이 버프를 받은 상태에서 극딜을 퍼붓는데, 어떤 도트를 먼저 거냐에 따라 버프의 종류가 달라진다. 버프는 치명, 가속, 대미지, 쿨타임 감소가 있고, 상황에 따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주하는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클래스를 첫 캐릭터로 키워 놨더니 다른 클래스는 영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손이 심심하다고 해야 하나. 이미 보석술사에 익숙해져 다른 클래스로 갈아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딜을 하다 보니 딜 미터기는 1위와 3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오락가락하며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던 그때였다.
—3연타 탱버 온다.
관리자 네테람이 긴 시전 스킬을 사용하자 주변에서 공격하던 검들이 일제히 멈추고 세 무리로 나뉘기 시작했다. 지구침략이 말했던 3연타 공격의 준비 모션이었다.
똘똘 뭉친 검이 거대한 세 개의 무기 형상으로 바뀌자 시전이 끝났다. 그러자 왼쪽에 있던 것부터 순서대로 지구침략에게 날아들었다.
—내가 먼저.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망치 모양의 무기가 지구침략에게 내리쳤다. 첫 번째 공격을 탱커 생존기로 넘기자 곧바로 두 번째 무기가 공격을 이어 갔다.
거대한 대검 모양의 무기가 닿을 때쯤, 힐러인 멜로디의 외생기가 지구침략의 몸을 휘감았다. 그 상태로 두 번째 탱커 버스터까지 맞자 피가 간당간당하게 남아 있었다. 세 번째 공격이 오기 전에 피를 채워야 하는데, 힐을 시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멜로디는 3분 쿨타임을 가지고 있는 즉시 시전 스킬로 지구침략의 피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동시에 삼지창 모양의 무기가 내려꽂혔다. 3연타 탱커 버스터는 생각했던 것보다 속도가 엄청났다.
—미리 안 보고 왔으면 누웠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