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멜로디의 힐을 믿고 있었던 지구침략은 마지막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생존기를 사용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3연타 공격이 끝나자마자 뭉쳐 있던 검들이 촤르륵 펼쳐지더니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바닥에 공격 범위를 알려 주는 히트 박스가 차례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공격은 교차해서 생기고, 어느 공격은 범위가 제각각이었다. 히트 박스가 생긴 것만 보면 피할 자리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히트 박스 위치랑 순서 기억해야 해요. 공격이 끝난 자리랑 공격이 들어올 자리 확인하고 움직이세요.”
주하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검날이 빗발쳤다.
—으악! 여기 아니었잖아!
—한 대 맞으니까 반 피 다네요.
—살려 줘! 줄로디!
—그렇게 부를 거면 그냥 죽어.
위치 선정 오류로 바나나가 한 방 맞자 피가 반이나 쭉 닳아 버렸다. 멜로디는 정말 살려 줄 생각이 없었는지 그냥 방치했다. 한 대 더 맞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던 바나나는 억지로라도 순서를 떠올리며 피하는 데 집중했다.
운이 따라 줬는지 정말로 기억해 낸 건지는 모르지만, 바나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제야 멜로디는 바나나의 피를 채워 주었다.
—와, 진짜 안 주냐?
—내 덕분에 집중해서 살았으면 감사하다고 해야지.
—어이없네. 카젤 님! 멜로디 좀 혼내 줘요!
“보호막이라도 드리지 그랬어.”
—강하게 크자는 주의라.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다르게 멜로디는 단호했다. 이런 것도 못 피하면 어떡하냐는 무언의 대답에 주하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광역 공격이 끝나자 무기는 다시 보스에게 돌아갔다. 몇 번의 평타 공격이 들어가고, 탱커와 근접 딜러가 피해야 하는 회전 베기 공격이 나왔다.
보스를 중심으로 270도 범위 공격이 세 번 연달아 이어졌다. 처음엔 뒤를 잡았고, 두 번째는 회피기를 사용하고, 세 번째는 다시 뒤를 잡아 무난하게 넘기자 다음 기믹이 곧바로 진행되었다.
—무슨 기믹이 쉬지도 않고 나오냐.
—이번까지가 공략에 나와 있는 거야. 다음부터는 트라이해야 해.
—이거 선 이어졌는데요?
탱커를 제외한 딜러 셋과 힐러에게 보스와 연결된 긴 줄이 생겨났다. 줄 두 개는 녹색이고, 다른 줄 두 개는 붉은색이었다.
—각각 다른 줄에 연결된 사람끼리 붙어.
멜로디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카젤과 바나나는 다급히 앞으로 튀어 나갔다. 멜로디와 리미티드는 붉은색 선, 카젤과 바나나는 녹색 선이기 때문에 둘 중 한 명이 근접 딜러인 리미티드에게 붙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분명 둘 중 ‘한 명’이 가야 했는데, 두 사람 모두 달려간 것이다. 멜로디는 예상치 못하게 버림받게 되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멜로디의 음성이 한 톤 올라갔다.
—둘 다 가면 어떡해? 카젤, 이리 와!
“아, 맞다.”
—푸하하! 멜로디 버림받았대요!
멜로디를 버렸다기보다는 자동으로 몸이 튀어 나간 것이다. 항상 기믹을 우선으로 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가장 먼 곳에 가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바나나가 가까운 멜로디에게 갈 줄 알았다.
“바나나 님이 멜로디한테 가실 줄 알고…….”
—네? 제가 카젤 님보다 앞에 있었어요. 당연히 리밋이한테 가야죠.
“그래도 제가 이속이 더 빠르잖아요.”
—앞에 사람이 있는데 굳이요……? 이 정도 거리면 저도 충분히 무빙하면서 딜 가능해요. 흑마법사도 도트 스킬이랑 즉시 시전 스킬 있답니다.
맞는 말이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막공에서도, 자진신고에서도 이런 기믹이 나올 땐 항상 제가 먼 곳으로 향했다.
—그래, 이 정도는 믿고 맡겨. 막공도 아닌데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멜로디까지 나서자 왠지 정공일 때도 그랬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주하는 알겠다고 말하며 일단 공략에 집중했다.
각각 다른 색 줄끼리 붙고 기믹을 파훼하니 또다시 줄이 연결되었다. 이번엔 검은색 줄과 파란색 줄이었다.
—이번엔 같은 줄끼리 붙어.
다행히 멜로디와 카젤, 바나나와 리미티드가 같은 색 줄로 연결되었다. 따로 움직일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진행하다가 드디어 보스 피가 50%가 되었다. 그러자 사면에 있던 벽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소리도,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너진 벽은 그 뒤에 있던 새카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만이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연출 보소.
—어둠의 심장이라더니 진짜 새카맣네.
어둠은 빛을 반사하지 않고 그대로 흡수했다. 무엇도 통과하지 않는 가장 어두운 검은색을 보는 듯했다.
관리자 네테람은 어둠을 불러내자 외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그려져 있던 문신에서 오라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더니 전신을 덮는 붉은색 갑옷이 만들어졌다.
허리에 있던 박쥐 날개는 좌우로 활짝 펼쳐졌으며,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검은색 가루가 주변으로 흩날렸다.
—저 날개에서 나오는 가루, 지속 대미지네.
가까이에 있던 지구침략과 리미티드가 가루에 닿자마자 피가 닳기 시작했다. 멜로디가 도트 힐을 넣었지만, 차오르는 생명력보다 대미지가 더 강한지 피가 조금씩 깎이고 있었다.
그때, 관리자 네테람이 공중에 천천히 떠오르더니 탱커가 아닌 본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구침략이 도발했지만, 보스는 끄떡하지 않았다.
—뭔가 불안하다.
—다들 여기서 전멸한다고 하대.
딜은 계속 들어가서 피가 빠지고 있긴 한데 묘하게 불안했다. 주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란색이던 관리자 네테람의 눈이 붉은 화염으로 화르륵 불타오르더니 대사를 크게 외쳤다.
<관리자 네테람: 죽음은 언제나 함께하는 법. 모두 다 어둠에 삼켜지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벽 뒤에 일렁이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화면 전체를 덮어 버렸다. 캐릭터는 완벽한 어둠에 가려져 무기와 아이템에서 반짝였던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외곽 라인만 보일 정도였다.
—뭐야, 하나도 안 보여!
—자세히 보면 캐릭터 실루엣은 보여.
—잉? 그러네. 그런데 이걸로 뭐 어쩌라는 거지?
그때, 네테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빛은 항상 그대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화면이 찰나의 순간 깜박하고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주하는 그 잠깐 사이 맵에 변화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맵 바닥이 바뀌었어요.”
—헐,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못 봄
“오른쪽 맵 절반이 검은색으로 일렁였어요. 최대한 왼쪽으로…….”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마이크에서도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나 죽었어!
—나도 죽었어…….
바나나와 지구침략이 자신들의 죽음을 알렸다. 오른쪽에 보였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 같다.
일단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으니 놔두고 다시 집중하고 있는데, 어두웠던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새빨간 피가 화면을 타고 흐르더니 갑작스레 주하의 캐릭터도 쓰러져 버렸다.
뭐야, 방금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나 죽었어.
—저도 죽었어요.
“……저도요.”
살아남았던 다른 팀원들도 죽음을 알려 왔다. 대체 뭐지? 어이가 없어서 회색빛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멜로디가 다시 뛰라는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유령 상태로 어둠의 심장으로 달리는 동안 파티원들은 공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살짝 보였다고 쳐도, 두 번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죽었어.
—붉은색으로 변한 건 대체 뭘까?
—그 전처럼 잠깐이라도 화면 안 나왔어?
—전혀. 그냥 핏물 흐르는 연출만 나오던데.
“첫 번째처럼 뭔가를 피해야 하는 걸까요?”
—그럼 힌트를 줬을 텐데…….
힌트라…… 힌트. 조용히 중얼거리던 주하는 문득 힌트가 없어도 공략할 방법을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아예 없던 기믹은 아니었다.
“혹시 피했던 쪽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오…… 일리 있는데요? 한번 해 보죠.
—가능성 있다.
당장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했기에 파티원들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다시 던전으로 들어와 버프하고 도핑도 하고 보스 앞까지 달렸다. 처음 모습 그대로 제단 위에 선 관리자 네테람은 유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공략은 죽지 말고.
—처음 봐서 그런 거야. 이젠 확실히 피할 수 있음!
—잘 피해 볼게.
멜로디의 지적에 바나나와 지구침략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략은 다시 시작되었다. 50%까지는 쉬웠기에 별다른 문제 없이 두 번째 페이즈로 넘어갔다. 벽이 무너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다들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번에도 NPC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화면이 깜박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 말도 안 돼.
—이건…… 좀.
관리자 네테람을 공격하고 있던 지구침략과 리미티드가 신음을 흘렸다. 전과 다른 위치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인 탓이었다. 이전에는 좌우로 나누어져 있었다면, 이번엔 위아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안전 지역은 아래쪽이었고, 위에 있던 지구침략과 리미티드는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최대한 아래쪽으로 달려오려던 둘은 커다란 굉음과 함께 시체가 되었다.
—보스 치고 있을 여유가 없는데?
—아무래도 중앙에 모여야 할 거 같아.
—일단 살아남은 사람들은 집중해 봐.
멜로디의 말에 주하는 화면을 응시한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앞이 붉게 변하고 또다시 핏물이 흐르는 연출이 나왔다. 충분히 위로 이동했기에 생존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기대했던 게 무색하게 이번에도 세 사람은 죽어 버렸다.
“반대쪽으로 가는 공략은 아닌가 보네요.”
—아, 그럼 뭘까요.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