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52화 (52/130)

52화

“여보세요.”

—누구랑 파티 중이야?

멜로디는 인사도 없이 대뜸 질문부터 내밀었다. 보통은 저런 말투면 퉁명스러워야 하는데, 오히려 나긋나긋하기만 하니 추궁하는 건지, 달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길드원이랑 잠깐 이야기한다고. 방금 파티 풀었어.”

그러자 바로 파티 초대가 날아왔다. 수락을 누르자 멜로디가 말했다.

—귓말 차단하라니까 전체 차단을 해 두면 어떡해? 친구만 가능으로 바꿔.

“예에. 지금 바꿨습니다.”

—오늘부터 할 거 많으니까 보챗 들어와.

“할 거 많은 거랑 보챗이랑 무슨 관계가 있지?”

—귀찮음을 줄이는 효과가 있지.

“타자도 충분할 텐데.”

—목소리도 텄는데 굳이 타자 칠 필요 없잖아. 아니면…… 내 목소리 들으면 설레? 그래서 듣기 힘들어? 그럼 이해해 주고.

멜로디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도발하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그렇다며 뻔뻔하게 나가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헛소리를 해 볼까? 주하는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내 목소리 듣고 싶어서가 아니고?”

—음, 그 말도 맞긴 해. 네 목소리 차분해서 듣기 좋아. 발음도 정확해서 또렷하게 들리니까 성우나 아나운서 같아.

“……해당 직종 종사자가 들으면 비웃을 소리네. 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으니까 과하게 칭찬하지 않아도 돼. 어쨌든 보챗 들어와. 나도 들어갈게.”

—진짠데 안 믿네……. 일단, 난 이미 들어와 있어.

“그럼 전화 끊는다.”

—응.

주하는 멜로디가 있는 음성 채팅방에 들어가며 전화를 껐다. 반대로 헤드셋 마이크를 켜자 보이스 채팅에서 멜로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오후부터 영던이랑 업적이랑 평판작 번갈아 가면서 돌 거니까 오전엔 악탑 돌자.

“우리 몇 번 남았지?”

—다섯 번.

“생각보다 많이 남았네.”

—다 돌 필요는 없고 1위까지만 맞춰 두면 돼.

죄악의 탑은 한 주가 지나 리셋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지겨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유형의 클리어 조건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미 한번 적응을 끝마친 카젤과 멜로디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전주에도 100층 보스를 잡을 때나 연속으로 전멸했을 뿐, 그 이전 층에서는 전멸한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 지금 몇 등이야?”

—51등.

“1회에 10등까지 고?”

—콜.

멜로디는 제 제안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잘게 웃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에 저 또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 일찍 접속한 덕분에 시간은 넉넉했다. 오후에 영웅 던전이랑 노가다 작업을 하기 전에 남은 죄악의 탑을 돌아 두는 건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이번에도 순위에 들면 아이템 강화를 바로바로 해 볼까? 강화는 하면 할수록 캐릭터가 강해지니 굳이 재료를 쌓아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려면 그 전에 빨리 아이템을 먹어 두면 좋을 텐데…….

가장 먹기 어렵다는 로브도 먹었으니까 나머지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카젤과 멜로디는 긴 하루를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곧장 죄악의 탑으로 향했다.

탑을 도는 동안 귓속말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바나나와 지구침략, 그리고 나머지 리프 공대원들의 친구 추가 릴레이가 이어지는 해프닝만 빼면 무난한 하루였다.

아니, 그렇게 지나가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강화 기회를 놓친 자들의 질척거림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자들의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주하는 쏟아지는 귓속말에 웃는 이모티콘을 사용하며 말했다. 가게 문 닫은 지 오래라고. 가장 난리를 피운 건 역시나 막내인 개인주의와 일시불이었지만, 주하는 그저 길게 웃기만 했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

—아니, 거기 말고 왼쪽으로 세 발짝.

“여기? 이쯤?”

—오른쪽으로 반 발짝 더 가봐.

“이만큼?”

—그 상태로 직진.

“직진…… 직진, 얼마나 가?”

—더, 더, 더 가. 쭉 더 가 봐. 아니…… 기어가지 말고 넓은 보폭으로 가자. ……카젤 님, 뭐 하세요.

“또 실패하면 다섯 번째라고. 천천히 하더라도 제발 이번엔 성공하고 싶다. 응?”

멜로디의 지시를 따라 카젤이 움직이고 있는 이곳은 울부짖는 평원 남쪽 끝에 있는 갈대 섬이었다.

—그냥 내가 먼저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놉!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참아.”

—못산다, 진짜…….

멜로디는 푸슬푸슬 웃으며 여전히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카젤을 지켜보았다.

울부짖는 평원의 업적 중에는 <???의 비밀>이라는 목표가 하나 있었다. 내용에는 제목처럼 ???만 적혀 있고, 설명이나 힌트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남쪽 바다 멀리에 있는 섬을 하나 발견했고, 멜로디와 카젤은 혹시 몰라 섬까지 헤엄쳐 갔다. 두 사람이 그곳에 발을 딛자마자 숨겨져 있던 목표가 드러났다.

제목은 <갈대 섬의 비밀>. 이 섬에 있는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섬에는 낮은 언덕이 하나 있고, 그 아래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갈대숲이 펼쳐져 있었다. 섬 전체를 둘러봤지만, 비밀이 숨겨져 있을 만한 특별한 무언가는 없었다.

그곳에서 30분 이상을 살펴보다가 카젤은 갈대숲, 멜로디는 언덕 위로 향했는데 멜로디가 어느 한 지점에서 시야를 돌리자마자 거대한 미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갈대숲 안쪽에 희미하게 빛나는 선들이 만들어낸 미로를.

그런데 시선을 조금만 틀어도 선으로 이루어진 미로는 보이지 않았다. 해서 시야를 고정하고 확인하는데, 아래에 있는 카젤이 선을 건드릴 때마다 미로가 변했다.

한 명은 위에서 길을 찾고, 한 명은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미로가 바뀌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첫 도전자는 카젤이었다.

멜로디의 지시에 따라 카젤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미로는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모양이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는 사선이고, 어느 곳에서는 구불구불하고, 어디서는 동그랬다.

나름 잘 설명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카젤 입장에서는 모호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선에 닿았고, 지금은 다섯 번째 시도 중이었다.

—거기서 멈춰. 오른 방향으로 90도 틀면 앞에 구불구불한 길이 있어. 오른쪽 대각선으로 한 발, 왼쪽 대각선으로 한 발, 한 걸음 앞으로, 다시 오른쪽 대각선…….

“오른쪽 대각선, 왼쪽 대각선, 한 걸음 앞으로.”

멜로디가 지시한 걸 그대로 중얼거리며 주하는 앞으로 나아갔다. 보이지도 않는 길을 감으로만 가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뭐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놨어…….”

—이것저것 많이 시도한 티는 나네.

“좋은 방향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뭐, 그렇긴 하지.

“장담하는데, 다른 유저들 이거 하다가 커뮤니티 달려가서 욕이란 욕은 다 쏟아 낸다. 나도 당장 가서 하고 싶을 정도야.”

—그럼 지금 쓰고 올래? 기다려 줄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계속 물결 모양이야?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해?”

—스톱, 멈춰. 가만히, 움직이지 마.

“왜? 왜? 뭔데?”

—앞에 움직이는 미로야. 기다려, 아직. 왼쪽으로 한 걸음. 기다렸다가…… 지금 직진.

“됐어?”

—어, 됐어. 그대로 앞으로 가.

“쭉? 성큼성큼?”

—성……큼, 성큼. 응, 맞아. 쭉. ……풋.

길을 안내하다 말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는 멜로디에 주하는 미간을 찡그렸다.

“전부터 계속 그러는데,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 대는 거야? 성큼성큼이 그렇게 웃겨?”

—아니, 그냥…… 귀여워서.

“미치려면 곱게 미쳤음 좋겠다…….”

—내가 원래 좀 개성 있어.

“칭찬 아니라고.”

—어, 앞에.

“앞에 뭐? 또 이상한 거 있어? 멈춰?”

—푸흐흐. 아무것도, 없어. 계속 가.

“아, 진짜!”

제가 낸 소리인데도, 주하는 움찔 떨었다. 이렇게 큰소리를 낼 정도로, 요즘 저를 놀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왜 이렇게 사람을 건드리는 걸까? 게임 친구가 아니라 현실 친구라고 해도 믿게 생겼다.

멜로디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언덕 아래에 도착했다. 섬 한 바퀴를 빙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끝까지 온 것 같은데? 앞에 단상 있어. 다섯 걸음 앞으로 가 봐.

조심스럽게 다섯 걸음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스킬 창이 변경되었다.

“맞게 온 거 같다.”

—어때?

“스킬 창 변경되고 새로운 스킬 네 개 생겼어.”

—설명 읽어 봐.

“잠깐만…… 왼쪽으로 한 바퀴 돌며 골반을 흔들…… 어?”

—응? 뭐를 뭘 한다고?

주하는 스킬 설명을 읽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골반을 흔들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다른 것들은 어떤가 하고 살펴봤는데, 하나는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며 골반을 흔들고, 하나는 손으로 몸을 쓸어내리면서 무릎을 굽히는 것이었다. 남은 하나는 어깨를 좌우로 흔들다가 빙그르르 몸을 회전하는 스킬이었다.

“이거…… 춤, 같은데?”

—춤? 잠깐만, 나도 화면 바뀌었는데. 네가 정면으로 보이고 뒤에, 저게 뭐지? 라쿤인가? 여덟 마리가 서 있는데?

“…….”

주하는 불길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단상 위에 여덟 마리의 라쿤과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이라니. 마치 무대 위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스킬도 춤을 추는 모션인 것 같고.

떨떠름해하며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면 중앙에 라쿤 한 마리가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안녕! 이곳의 비밀을 찾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구나. 처음 봐서 좀 신기하다. 인간은 이렇게 생겼구만. 음음, 좋았어. 그런데 나한테서 얻고 싶은 게 있지? 나는 그게 뭔지도 알고, 또 줄 수도 있어. 어때? 기분 좋지? 음…… 그런데 그냥 주기엔 뭔가 좀 아쉽네. 자격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이렇게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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