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54화 (54/130)

54화

—사람들 또 몰릴 거 같으니까 악탑이나 하러 가자. 던전은 아직 두 시간 남았으니까 당장은 못 가.

“그래에.”

아이템 강화했던 그 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쫓아와서 필드나 대도시는 금단의 구역이 되었던 날이다.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죄악의 탑, 아니면 던전뿐이었다.

멜로디와 카젤은 갈대 섬을 벗어나 죄악의 탑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동안 쫓아오던 이들도 있었고, 탑 앞에서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두 시간 동안 탑을 오르다가 영던 팀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던전으로 진입했으므로 사람들은 카젤과 멜로디를 만날 수 없었다.

[지역] 안녕하새우: 아니!! 히든 콘텐츠 어케 열었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자나! ㅠㅠ 제발 인터뷰라도 받아 줘 ㅠㅠㅠㅠ

[지역] Roou: ㅋㅋㅋㅋ 그냥 포기하셈

[지역] Kov: 너튭각은 저 멀리 ㅂㅂ

[지역] Lrot: 루우랑 코브. 너희 둘 빨리 던전 안 오냐? 지역 채팅창에서 놀고 있네? 버리고 간다?

[지역] VX: 그냥 버려

[지역] Kov: 안 돼!!! 지금 간다!!! 가!

[지역] Roou: 여기서도 여전하네......

***

다음 날, 주하는 멜로디에게 선물 받은 제복 의상을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남색 바탕에 황금색 장식이 우아하게 들어간 제복은 미리보기로 봤을 때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다리와 상체를 딱 맞게 감싸는 옷은 반질반질한 양장 천과 잘 어울려 세련돼 보였다.

이걸 입고 정말 춰야 하는 건가…….

왠지 두통이 일은 듯해 관자놀이를 꾹꾹 문질렀다.

앞에는 이미 제복을 입은 멜로디가 서 있었다. 제복 의상은 염색이 가능했는데, 멜로디는 이번에도 흰색으로 염색해 두었다. 포인트 컬러는 똑같이 보라색. 아주 한결같은 취향이었다.

[파티] 카젤: 예쁘네...

[파티] 멜로디: 너도 어서 입어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의상을 착용했다. 어제는 로브를 입고 있었기에 그나마 나았는데, 오늘은 딱 달라붙는 제복을 입고 있으니 몸선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아무래도 눈 둘 곳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카젤 캐릭터는 철저히 무시하고 멜로디만 봐야겠다.

[파티] 멜로디: 프로듀서 엔피씨 여기 있네

[파티] 카젤: 사람 많다;;

[파티] 멜로디: 어제 이걸로 영상 올린 사람들 많던데. 지금 엄청 핫한 거 알아? ㅋㅋ

[파티] 카젤: 알고 싶지 않다 -_-;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 근데 오늘은 왜 보챗 안 해?

[파티] 카젤: 내 멘탈을 보호해야 하니까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ㅋ 오늘은 봐줌

[파티] 카젤: 하...;

드디어 멜로디가 NPC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같은 파티인 카젤과 멜로디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백댄서 선택 사항이 있었는데, 사용하지 않음에 체크했더니 둘만 달랑 서 있었다.

[파티] 멜로디: 하드 모드로 한다

[파티] 카젤: 어... 그래...

이지 모드든 하드 모드든 상관없어서 대충 말했다. 멜로디가 길게 웃더니 게임을 시작했다.

반주를 들어 보니 오늘은 어제와 다른 노래였다. 50곡을 준비해 뒀다고 하더니 리듬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은 한동안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의 준비 시간이 지나가고 곧바로 바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떨어지는 개수가…….

“뭐야.”

RPG 게임 내의 미니게임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다. 어제도 빨랐고 떨어지는 게 많았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오른쪽에서 춤추는 두 캐릭터에게 시선을 주는 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어느 때보다 바짝 긴장한 채로 키보드를 열심히 눌렀다. 그러나 노력한 것이 무색하게 중간중간 콤보를 놓쳐 버렸다.

진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3분 40초를 버텨 낸 주하는 게임이 끝나자마자 의자에 풀썩 기댔다. 자신의 반응 속도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아서 왠지 허무해졌다.

[파티] 멜로디: 계속 틀리던데 어떻게 된 거지? ^^

[파티] 카젤: ...만만하게 봤는데 생각보다 어렵네

[파티] 멜로디: 리듬 게임 안 해 봤어?

[파티] 카젤: 핸드폰 게임으로 한두 번 정도? 조금 하다 말았지

[파티] 멜로디: ㅋㅋㅋ 어쨌든 퍼펙트 못 했으니까 나중에 다시 해야 해. 미리미리 연습해라

[파티] 카젤: 헐? 뭐라고? 그런 말은 없었잖아

[파티] 멜로디: 칼군무 못 했는데 당연하지 않아? 약속은 지켜야지. 내가 조금 양보해서 노래 한 곡을 지정해 줄 테니까. 일주일 동안 연습해 ^^

[파티] 카젤: $%&~*(^@#_+%^*$

이걸 대체 왜? 랭킹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연습해야 하는데?

멜로디에게 반박해 봤지만, 그는 약속은 약속이라며 단호하게 잘랐다. 둘 다 퍼펙트로 끝내지 않는 한 끝이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투자한 값은 꼭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던 그는 자신이 녹화한 영상을 메신저로 공유했다.

영상을 보자마자 머리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딱 달라붙는 옷을 입혔더니 춤이 아주 색정적이다. 로브를 입고 췄을 때와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저놈의 골반을 잡고 못 움직이게 해야 했는데.

그러나 춤도 춤이지만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멜로디는 끊김 없이 쭉 춤을 추는데, 카젤만 중간중간에 멈칫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게 생각보다 굉장히 거슬렸다.

마치 힐러인 멜로디에게 딜로 진 기분이랄까?

주하는 슬그머니 올라오는 경쟁심을 느끼며 멜로디의 제안을 수락했다. 꼭 일주일 내로 퍼펙트를 만들어서 칼군무를 만들겠노라고.

그러자 멜로디는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파티] 멜로디: 기대할게 ^^

순간 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혼자만 멈칫거리던 자신의 캐릭터가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적어도 완벽하게 끝내고 돌아선다면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하는 짬짬이 시간을 내서 ‘오늘부터 아이돌!’을 열심히 연습했다.

일주일 후, 카젤은 퍼펙트를 달성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드 모드를 퍼펙트로 깬 유저들은 자동으로 ‘내가 제일 잘해’ 게시판에 영상이 업로드된다. 보통은 금방 밀려나지만, 하필 유저들이 히든 콘텐츠를 열어 준 두 사람에게 보답한다며 영상에 ‘좋아요’를 너무 많이 눌러 줘서 상단에 고정되어 버렸다.

결국 주하는 리프 길드원들과 벌꿀오소리에게 한동안 칭찬을 가장한 놀림을 받았다. 멜로디는 겸허하게 받아들였지만, 카젤이 적응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부터 아이돌!’은 라나탈에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와 점점 더 열기를 더해 갔다. 그와 동시에 상단에 고정된 카젤과 멜로디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한동안 제복 붐이 일었다는 건, 판매 숍에서 베스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라나탈은 ‘오늘부터 아이돌!’ 덕분에 대호황을 맞이했다.

***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리프 길드원과 멜로디와 함께 각종 콘텐츠를 즐기는 동안 어느덧 3주가 지났다. 토벌전 레이드가 나오는 3.1 패치가 열흘 뒤 열린다는 소식이 공지와 함께 발표되었다.

그동안 죄악의 탑은 멜로디와 함께 1위에 공고히 자리 잡았고, 세 개의 세력 중 하나는 평판을 모두 올릴 수 있었다. 멜로디의 철저한 계획하에 효율적으로 움직인 덕분이었다.

거기에 울부짖는 평원 지역의 업적도 80퍼센트까지 채웠더니 스탯을 보상으로 받았다. 다음 패치 전까진 100퍼센트를 채울 수 없기에 일단 지역 하나는 완료했다 볼 수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남을 때는 재료 수급을 위한 채집을 이어 갔다. 요리 재료는 평판작과 함께 할 수 없어서 따로 시간을 내야 했는데, 이때 리프 길드원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이제는 멜로디와 음성으로 대화하고, 리프 길드원들과 노는 게 당연해져 있었다. 그동안 자진신고 팀원들은 본 적 없었고, 그나마 유일하게 벌꿀오소리와 간간이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주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대화까지 단절된 채로 지내면 레이드에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아무리 친해지기를 포기했다 하더라도 너무 과한 것 같았다.

곧 리프 공대의 딜러도 돌아올 테고 레이드도 시작할 테니 적어도 팀워크를 위해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주하는 길드에 조금 더 관심을 두기로 했다.

게임에 접속한 주하는 멜로디를 기다리며 낚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길드 채팅창에 올라오는 대화를 지켜보았다.

[길드] 블랙체리: 으악!!! 이번에도 바지 안 나왔어ㅠㅠㅠㅠ %₩@%#*$!!!!

[길드] 살금: 저주도 저런 저주가 음닼ㅋㅋㅋ

[길드] 세렌디피티: ㅋㅋㅋㅋㅋ 혼자 계속 미터기 꼴찌 하쥬? 언제 올라오려나 저 블래스터님은

[길드] 온별: 너만 바지 먹으면 되는데 왜 안 나오냐...... 아오 진짜... 사흘 동안 어둠의 심장만 몇 번을 도는 거야ㅠ

[길드] 블랙체리: 죄송 ㅠㅠㅠㅠ

[길드] 살금: 블래스터 바지 존재하기는 해?

[길드] 세렌디피티: 존재는 하지 체리한테는 보이지 않겠지만ㅋ

[길드] 블랙체리: 아니, 형들도 아직 못 먹은 부위 있잖아! 나만 그런게 아닌데???

[길드] 살금: 넌 바지 포함 세 부위잖아

[길드] 온별: 우리는 하나 아니면 두 개 남았어 어딜 비교해ㅋㅋ

순수한 궁금증이 든 건 그때였다. 블렉체리가 아이템을 얼마나 맞췄는지, 바지 말고 먹지 못한 부위는 어디인지 그런 것들이.

[길드] 카젤: 아이템 많이 맞추셨어요? 체리님?

오랜만에 블랙체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시끌벅적하게 대화하던 팀원들과 블랙체리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제 질문 뒤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고, 심지어 다른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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