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길드] 지구침략: 그렇게 협박하면 잘도 네 하겠다;
[길드] 바나나: ㄴㄴ 이건 협박이 아니고 팩트지
[길드] 개인주의: ㅇㅇ 거기에 조언까지!
[길드] Snow: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ㅋㅋㅋㅋㅋ
길드원들이 말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뜻은 정확하게 관통하는 말이었다.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이’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미묘함. 이런 상태로 만난다면 더 혼란스러울 것은 뻔하니 차라리 시간을 두는 게 낫다. 그래서 선율 형이 만나자고 해도 요리조리 피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일까, 마주 보고 대화할 때는 어떤 느낌일까, 웃을 때의 얼굴은 어떨지, 저를 보고 실망하지는 않을지, 과연 그냥 형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또 만나고 나서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지에 관한 고민이 물밀 듯이 터져 나온다.
분명 방금까지 만나지 말아야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해 놓고 고작 몇 분 사이 결정을 번복할 만큼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하아.”
뭘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정말 바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 아니, 알면서도 용기가 없어 피하고 싶은 걸지도.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대상이 선율 형이라는 게 뭐랄까…….
[길드] 바나나: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 무기 강화가 더 중요하다!!
[길드] 바나나: 카젤아 ㄱㄱ
주하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리 강화를 신청한다는 알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쓸어내리곤 팝업 창에 있는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한참 대리 강화를 해 주다 보니 끝이 다가왔다. 무기 강화를 위해 준비를 많이 해 뒀는지 재료가 꽤 됐지만, 저번처럼 미친 운빨은 없었다. 그래도 나름 선방했다 할 수 있었다.
<바나나 님이 불타는 저주의 지팡이 20단계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길드] 바나나: 크으!!!! 이거지! 내가 했으면 19강도 못 했을 거야 ㅠㅠㅋㅋㅋ
[길드] 카젤: ㅋㅋ 누나 ㅊㅊㅊ
[길드] 개인주의: ㅊㅋㅊㅋㅠㅠㅠㅠㅠㅠ
[길드] 일시불: ㅠㅠㅠㅊㅊㅊㅊㅊ
[길드] 지구침략: ㅎㅎ 축하해
[길드] 월차연차휴가: ㅠㅠㅠㅠㅠㅠㅠㅠ부럽...
[길드] 바나나: 후후후 ㄱㅅㄱㅅ 카젤아 고마웡!
[길드] 카젤: 아닙니다ㅋㅋ
[길드] Snow: ㅋㅋㅋㅋ 카젤아 다음은 나!
[길드] 카젤: ㅇㅇ 강화 엔피씨 앞에 있어요
재료를 가지고 오겠다는 Snow를 기다리며 주하는 카젤 캐릭터 옆에 있는 멜로디를 응시했다. 제가 대리 강화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할 법한데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혹시 몰라 마우스를 이동해 움직여 보자 멜로디의 얼굴이 제 캐릭터를 따라다녔다. 주하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귓속말] 카젤: 안 심심해? 다른 거라도 하고 있지
[귓속말] 멜로디: 별로
[귓속말] 카젤: 가만히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하면서?
[귓속말] 멜로디: 너 구경하면 재미있어ㅋ
[귓속말] 카젤: 맨날 보는데 뭐가 재밌어;
[귓속말] 멜로디: 오늘은 다르거든
카젤 캐릭터의 외형이 바뀐 거라고는 무기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미 며칠 전의 일이라 오늘은 어제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혼잣말이 컸나 싶어 주하는 괜스레 헛기침하며 입을 다물었다.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모니터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귓속말] 카젤: 뭐가 다른데?
어쨌든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자 싶어 선율 형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귓속말] 카젤: 형?
[귓속말] 카젤: 뭐해?
[귓속말] 카젤: 자리 비웠나?
“아니, 자리에 있는데.”
기다리던 대답은 게임 채팅이 아닌 음성으로 돌아왔다.
내가 헤드셋을 끼고 있었던가? ……아닌데. 보이스 채팅방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음성으로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그렇다고 환청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 마치 실제 목소리처럼.
주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이 남자가 말한 건가? 나한테 한 말은 아니겠지? 우연히 말이 겹쳤나 싶어 쓱 훑어보는데 그런 것 치고는 남자는 헤드셋도, 핸드폰도 하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왠지 익숙한 게…….
의아해하던 그때였다.
“안녕, 주하야.”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인사가 들려왔다. 멍하니 있던 주하는 불현듯 무언가 깨달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의자가 뒤로 쭉 밀려났다.
남자는 멀어진 의자를 한번 보고는 주하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 다시 한번 열렸다.
“반응이 너무 격한데.”
주하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못 지른다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주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올려다보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남자는 밀려난 의자를 끌어 오곤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상체를 기울인 채 주하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도망가면 혼난다.”
남자는, 주하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선율, 형?”
혼란스러움과 경악이 뒤섞인 표정으로 주하가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 남자는 멜로디, 주선율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나?
주하는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선율을 응시했다. 그러다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하가 앉은 의자를 자기 앞으로 쭉 끌어온 선율은 양쪽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흠칫 놀란 주하가 등받이에 몸을 물리자 가만히 쳐다보던 선율이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만났네.”
“…….”
“같은 동네 사는데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서야.”
같은 동네라고? 아니, 그보다…… 이 사람이 정말 선율 형이라고? 주하는 여전히 믿기지 않아 눈만 크게 뜬 채 끔뻑거렸다. 현실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서 꿀 떨어지겠다.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왜 그렇게 도망 다녔어. 서운하게.”
“…….”
순간 주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헛소리의 강도가 너무나 익숙하다. 그리고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도.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듣고, 게임 하면서 듣고, 잠들기 전에 듣던 선율 형의 목소리다.
주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진짜, 선율 형…… 맞아, 요?”
“정황상 맞지 않을까?”
선율은 주하의 의자를 끌어당기곤 자신의 모니터를 보라며 손짓했다. 뚝뚝 끊기는 시계 초침처럼 이동한 눈동자가 화면 속의 캐릭터로 향했다.
하얀 옷을 입은 고양이 귀의 묘인족, 그 위에 떠 있는 익숙한 아이디,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자신의 캐릭터, 카젤.
그제야 주하는 숨을 흡, 집어삼켰다.
“이제 좀 믿어져?”
“말도…… 안 돼.”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주하를 보며 선율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몸을 숙여 바짝 다가가 주하를 대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항상 옆모습만 봐서 그런지 익숙하다. 곧게 뻗은 얼굴선도 세련돼 보인다. 하지만 화면 속에 있는 멜로디와 카젤을 보는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주하의 그런 흔들리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눈이 길게 휘었다.
이렇게 도망 다닐 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말을 걸 것을. 뭐, 그래도 덕분에 격한 반응을 볼 수 있었으니 됐나? 선율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주하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제게 닿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존재감이 남다른 사람의 눈빛은 강렬하다 못해 뜨거웠다. 등 뒤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주하야.”
주하가 곤란해하는 걸 알아챘는지 선율은 나붓이 그를 불렀다. 그러자 주하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고개 돌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저번에 나랑 했던 약속, 기억하고 있어?”
약속? 이런 와중에도 궁금증은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눈만 깜박이자 선율이 해사하게 웃었다.
“만나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하기로 했던 거.”
“……어?”
“네가 분명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제야 그날의 기억이 벼락같이 떠올랐다. 주하는 다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보다 선율의 손이 더 빨랐다.
“이런, 방심할 수가 없네.”
주하의 허리를 끌어안은 선율은 팔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주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 잠깐! 손이……!”
“손이 뭐?”
선율은 무슨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주하는 제 허리를 감싼 커다란 손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러운 접촉도 당혹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율 형’이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더는 ‘남’이 아니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땐 연예인을 보듯 감탄만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큰일 났다.
“도망 안 갈 테니까 손 좀…….”
“어떻게 믿어?”
“믿…… 아니, 진짜로 도망 안 간다니까?”
“넌 워낙 잘 도망 다녀서 믿음이 안 가. 난 이미 두 번이나 당했잖아. 아니, 방금 것까지 세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