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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93화 (93/130)

93화

주하는 조금 더 밀착해 오는 선율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몸도 뒤로 힘껏 빼 보지만, 상체만 겨우 멀어질 뿐이었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처음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어쨌든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손잡고 있을까?”

“어?”

“손 줘 봐.”

주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선율을 보았다. 도망 못 가게 하려고 손을 잡는다고? 그럼 게임은 어떻게 해? 아니, 게임이 문제가 아니잖아. 손을…… 잡겠다고?

주하는 다급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당황해하는 낯으로 쳐다보자 선율 형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까지는 심술이었어. 또 도망가면 정말 혼낼 거야.”

주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제멋대로인 저 심술보가 언제 또 터질지 알 수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 모니터 봐 볼래?”

주하는 왜 그러냐고 묻기보단 먼저 고개부터 돌렸다. 끼기긱, 기름칠하지 않아 소리 내는 철문처럼 어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여전히 가까이서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었다.

‘그’ 남자가 ‘그’ 선율 형이라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대체 무슨 인연인 걸까. 같은 동네에 같은 PC방, 거기다 저와 안면 있는 저 사람이 선율 형이란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는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곳에서 자신을 간절하게 찾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스노우 누나에게 대리 강화를 해 준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주하는 선율을 힐끔 보곤 슬금슬금 의자를 이동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저를 못 믿고 붙잡을 줄 알았는데 순순히 보내 주었다. 도망가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

약속이라도 잡고 만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너무 급작스러워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인기 많네, 우리 주하.”

어느새 의자를 끌고 온 선율은 주하의 게임 화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나 바짝 붙었는지 두 어깨가 닿아 있었다. 그 별것 아닌 접촉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던 주하는 선율을 힐끔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속이 조금 답답했다.

“너무, 붙은 거 같은데.”

“잘 안 보여서 그래.”

퍽이나 안 보이겠다. 슬쩍 몸을 옆으로 빼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는데, 제가 피한 만큼 선율 형이 다가왔다. 고개를 옆으로 쭉 빼고 쳐다보자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찡그리며 불만을 내비쳐도 선율 형은 웃기만 했다. 그러곤 턱짓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스노우 거의 울고 있는데?”

“…….”

할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게임에 제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길드] 카젤: ㅈㅅㅈㅅ 저 왔어요

[길드] Snow: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ㅠㅠㅠ

[길드] 카젤: ㅎ 근데 눈누나... 강화하는 거 내일로 미뤄도 돼요?

[길드] Snow: 어? 무슨 일 생겼어?

[길드] 카젤: 그냥... 왠지 안 될 것 같아서요

[길드] Snow: 머?? 그럼 당연히 미뤄야지!!!

[길드] 바나나: 오늘 운은 내가 다 썼나 보다ㅋㅋㅋㅋ

[길드] Snow: 젠장ㅠㅠㅠㅋㅋㅋㅋ

[길드] Snow: 개주야! 악탑이나 하러 가자

[길드] 개인주의: ㅇㅅㅇ

일단 급한 일은 미뤄 뒀고…….

주하는 여전히 제게 어깨를 기대고 있는 선율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무거운 만큼 가슴도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떨어지라며 어깨를 한번 움직이자 그제야 두툼한 상체가 물러났다. 수영이 취미라서 그런지 어깨가 아주 태평양이다. 1인용 공간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커다란 장벽이 사라지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선율 형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형은 저번부터 알고 있었겠네? 커피 쏟았던 그 날, 제 게임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형.”

“응?”

“여태 알고 있었으면서 왜 모른 척했어?”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보통은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말 걸지 않나? PC방에 올 때마다 손가락 인사나 묵례할 정도로 시선이 자주 마주쳤다.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쳐다본 것일 테다.

“이렇게 놀라게 해 주려고 참았지.”

“…….”

“그런데 계산 착오였던 거 같아.”

“왜?”

“네가 PC방으로 자주 안 오니까 볼 일이 거의 없잖아.”

이전에 마주쳤던 게 언제였던가를 떠올리던 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진신고에서 쫓겨나고 게임을 접을까 고민하던 그날이었다. 그게 3주 전이다. 그때 선율 형은 한 자리 건너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후로 PC방은 오지 않았다. 만나자며 저를 달달 볶은 건 얼마 전부터였으니 후회할 만도 했다. 그런데 하필 오늘 PC방에 오다니.

“여길 오면 안 됐었는데…….”

“너무 대놓고 말한다. 형 상처받게.”

선율은 두 손을 가슴에 올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며 주하는 허탈하게 웃었다.

“당한 건 난데?”

“그러게 만나자고 했을 때 수락했어야지.”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낯이 생글거렸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 양심 따윈 내다 버린 모습이었다.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이렇게 한결같다니.

“……모르겠다.”

“모를 게 뭐 있어? 앞으로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지.”

단순히 그 문제가 아니라서 곤란했다. 주하는 제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는 선율을 보며 작게 탄식했다.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던 사람이지만 그가 선율 형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왜 어색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건지, 왜…… 심장이 간질간질하게 뛰는 건지 모르겠다. 더불어 느껴지는 묘한 해방감에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하야.”

“……왜?”

“약속, 지킬 거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선율 형은 눈을 휘며 웃었다.

“수영복 있어?”

“수, 영복?”

“내일부터 나랑 운동해야지.”

“…….”

“월수금은 수영하고, 화목은 헬스장 가자. 주말은 쉬거나 한 번씩 밖으로 놀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술술 흘러나오는 일정에 주하는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만나야 하는 날이 최소 주 6일이지 않은가. 거의 매일같이 끌려다녀야 한다는 소리였다. 곤란해도 너무 곤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기, 선생님?”

“응?”

“저 곧, 방학 끝나는데요.”

“그래? 개강 언젠데?”

“다음 주 목요일입니다.”

방학이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다. 9월로 넘어가는 순간 게임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다. 그래서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평판 작업을 해 놔야 하는데 운동할 시간이 있을 리가. 거기다 자진신고와의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간표 나왔지? 줘 봐.”

“형…….”

그러나 선율 형은 남은 시간뿐만 아니라 개강 이후의 일정까지 정하려는 듯했다.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망한 시간표였으면 부담 없이 내밀 수 있었겠지만, 하필이면 이번 수강 신청은 역대급으로 성공해 버렸다. 동기들이 부러워하고 선배들이 감탄한 황금 같은 시간표가 핸드폰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설마 이런 미래를 예상한 건 아니겠지?

“같이 게임 하니까 일정을 조율해야지. 시간표 보고 무리하지 않는 선으로 정리할 테니까 어서 줘 봐.”

주하는 자신의 겜생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겜생과 현생 모두 경고음이 울렸다.

“형, 그게, 그러니까…….”

“안 주면 이대로 한다? 새벽 시간에 운동하면 되니까 시간표 망해도 운동하는 덴 지장 없어.”

순간 주하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운동하고 공부하면 게임은? 라나탈은? 레이드는?? 아직도 할 게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니, 레이드는 어쩌고? 그러면 게임에 소홀해지잖아. 설마 형한테 게임은 장난이었어?”

주하가 조금 흥분한 채로 말하자 선율의 낯이 묘하게 변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듯한, 곤란하면서도 어이없어하는 그런 표정으로. 그러다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현생 좀 살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이런 말은 처음 듣네. 주하야, 내가 누구지?”

“누구긴, 당연히 멜로디…….”

“그래, 멜로디. 그 멜로디는 어떤 유저지?”

순간 주하의 입이 꾹 다물렸다. 멜로디는 클래스 랭킹 1위와 레이드 퍼클을 뺏기지 않는 하드 유저 중의 하드 유저였다. 그런 사람에게 게임이 장난이냐는 말을 하다니. 잠깐 정신이 나갔나 보다.

“라나탈도 제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세 개를 어떻게 다 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거든. 처음엔 힘들겠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결국 내가 적응할 때까지 굴리겠다는 소리 아니야? 주하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러니까 빨리 시간표.”

선율이 손을 흔들며 재촉하자 주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저 단호함에서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를 끌고 다닐 거라는 집념이 말이다. 결국 주하는 반쯤 포기한 채 핸드폰에 있는 시간표를 보여 주었다. 일정을 확인한 선율은 웃음을 터트렸다.

“와, 시간표 장난 아니네? 나 학교 다닐 때도 이런 건 본 적이 없어. 대단한데?”

“나도 처음이야. 그래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수업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그중 오전 수업은 전공 필수 과목 하나로 화요일뿐이었다. 나머진 오후 수업이고 중간에 뜨는 시간 없이 잘 배치되어 있었다.

“화요일 빼고는 다 오후 수업이고, 시간도 좋고. 근데 과목 수가 좀 적네? 학점 괜찮아?”

“1, 2학년 때랑 3학년 1학기까지 빡빡하게 했거든.”

“좋네, 딱이다.”

대체 누구한테 좋은 시간표인 걸까? 주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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