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일단 이번 주는 게임에만 집중해 볼까? 악탑이나 돌러 가자.”
선율은 주하를 위로하며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때 주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별것 아닌 접촉에도 괜히 긴장되었다. 그러나 금세 떨어져 나가는 손길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키보드로 향하는 커다란 손에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주하야?”
“어? 아…… 악탑 가자고?”
선율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저럴 때 보면 천사 같은데 등에 숨기고 있는 건 악마 날개라니. 그럼에도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내가 그렇게 좋아? 시선을 못 떼네.”
“신기해서 보는 거야, 신기해서!”
“그렇다고 보기엔 눈빛이…….”
“악탑 간다며? 화면이나 보시죠.”
주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자신의 화면을 보며 올라오는 열기를 최대한 무시했다.
오늘은 왠지 감당할 수 없는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주하는 화면 속 멜로디를 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
죄악의 탑을 끝내고 길드원 몇몇과 필드에서 평판작과 채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잘만 말을 걸던 선율이 갑자기 파티 창에서 주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것도 폭탄을 터트리며.
[파티] 멜로디: 주하야 저녁 뭐 먹을래?
[파티] 바나나: ????? 머야? 먼데? 갑자기 웬 저녁?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 이거슨 설마!!!
[파티] 지구침략: 둘이 오늘 만나기로 했어?
[파티] 월차연차휴가: 오ㅋㅋㅋ 결국 카젤이가 졌구나
[파티] 개인주의: 내기 성립도 안 되는 당연한 결과였졐ㅋㅋㅋ
주하는 어이없어하는 낯으로 선율을 쳐다보았다. 말로 물어보면 되지 갑자기 파티 창으로 이러지? 막 물어보려는 찰나, 선율 형이 저를 향해 웃고는 화면을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파티] 멜로디: 만나기로 한 게 아니라 이미 옆에 있어
[파티] 개인주의: 진짜여?????
[파티] 멜로디: ㅇㅇ
[파티] 바나나: 잠깐 몬가 이상한데? 아까 분명 우리가 만나라고 바람 잡지 않았나? 근데 지금 어케 옆에 있을 수가 있지?
[파티] 멜로디: PC방에서 만났어. 바로 옆자리던데?
[파티] 월차연차휴가: 헐???
[파티] 개인주의: ㄹㅇ?????
[파티] 바나나: ?????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
주하는 흘러가는 대화 내용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선율 형은 작정하고 알릴 생각이었던 거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긴 한데, 만나지 않겠다며 버텼던 제 노력은 어떻게 되는 걸까.
[파티]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1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지구침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월차연차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개인주의: 카젤 형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으셨길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카젤: 내가... 나라를 팔았나 보다...
[파티]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앀ㅋㅋㅋ 웃다가 침 흘렀엌ㅋㅋㅋㅋㅋ
[파티] 지구침략: ;;
[파티] 월차연차휴가: ㅋㅋㅋㅋ 그래서 지금 옆에 있어?
[파티] 카젤: ...ㅇㅇ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 어때요? 우리 대장님 겁나 잘생겨쪄?
고개를 돌리자 선율 형과 시선이 마주쳤다. 제 대답이 궁금한지 흥미로워하는 낯이었다. 억지로라도 못생겼다고 하고 싶었지만, 저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다이아몬드에 진흙을 바르는 기분이랄까? 주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아니, 그냥…… 얼굴이 너무 열일하는 거 같아서.”
“칭찬 고마워.”
항상 듣는 말이라 그런지 익숙해 보였다. 역시 사람 눈은 다 똑같은가 보다.
[파티] 카젤: 환상적인 미남이시네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개인주의: 아! 미남 하니까 생각났다ㅋㅋㅋ 대장님! 카젤 형은 어때요?
[파티] 바나나: 그래그래! 카젤은 어때? 별명 그대로야? +_+
[파티] 지구침략: 미남 카젤?
[파티] 바나나: ㅇㅇ!!!!
[파티] 월차연차휴가: ㅋㅋㅋㅋㅋㅋ
[파티] 멜로디: 주하는...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일부러 모니터만 노려보았다. 선율 형이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지만, 차분함을 가장했다.
그래도 오늘 오랜만에 가족들 만난다고 깔끔하게 하고 나왔는데 괜찮으려나? 모니터 화면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살피며 주하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때, 선율의 평가가 대화창에 올라왔다.
[파티] 멜로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파티] 바나나: ...??
[파티] 카젤: ?
[파티] 개인주의: 에?...
[파티] 월차연차휴가: 이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대장님? 어느 쪽이죠??
[파티] 지구침략: ㅋㅋㅋ
저건 대체 무슨 뜻일까. 아리송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못생겼다? 아니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차라리 못생겼다고 말해…….”
못생긴 게 나을 것이다. 얼굴로 비교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지친 음성으로 투덜거리자 선율 형은 웃기만 했다.
[파티] 멜로디: 비밀
[파티] 바나나: ????? 아니! 몬데!
[파티] 개인주의: 대장님??? 이렇게 궁금하게 해 놓고 비밀이라고 하기 있어여?? ㅠㅠㅠㅠㅠ
[파티] 월차연차휴가: 그래... 이래야 우리 대장님이지
[파티] 지구침략: ㅎㅎ.. 빨리 만날 날짜 잡아야겠다
[파티] 바나나: 카젤아! 언제가 좋니?
[파티] 개인주의: 빠른 날이요! 가장 빠른 날!
하필이면 쓸데없는 기대감을 키워 놓다니. 이렇게 되자 오히려 부담감만 늘었다. 원래 이런 거 별로 신경 안 썼는데,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파티] 카젤: 미안하지만... 만날 시간이 없을 거 같아...
[파티] 바나나: ㅋㅋㅋㅋㅋㅋ 우리 카젤이가 혼나고 싶구나?
[파티] 카젤: ......^^
[파티] 개인주의: 노인정!!
[파티] 월차연차휴가: 학생이라 곧 방학 끝나지 않나?
[파티] 지구침략: 그럼 말 나온 김에 이번 주 금요일?
[파티] 바나나: 그묘일 조타! ㄱㄱㄱ!!
고작 제 얼굴이 어떤지 궁금해서 이렇게 빨리 날짜를 잡는다고? 주하는 저도 모르게 선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표정을 발견했다.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파티] 멜로디: 안 돼. 자진신고 애들 다 접을 때까지 못 만나
[파티] 바나나: ???? 왜?
[파티] 개인주의: 넹...?
[파티] 멜로디: 우리 없는 동안 활개 치면 어쩌려고?
[파티] 월차연차휴가: 그건...
[파티] 지구침략: ㅠㅠ
[파티] 바나나: 허...
[파티] 개인주의: 잠깐의... 숨통?
[파티] 멜로디: 숨통 열어 줄 생각 없으니까 주하 만나고 싶으면 저 녀석들부터 정리하고 와ㅋ
[파티] 바나나: 와... 이 독재자 ㅅㄲ!!! 그 핑계로 너만 볼라고?!
[파티] 멜로디: ㅇㅇ
[파티] 바나나: !!!!!!!
저를 위해 주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주하는 오늘처럼 지쳐 보기는 처음이라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은 선율의 밥 먹으러 간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주하야, 밥 먹으러 가자.”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생각보다 다정했다. 고개만 돌려 쳐다보자 언제 일어났는지 얼굴이 저 위에 있다.
“나가서 먹게?”
“응, 살 것도 있고.”
“그래…… 가자.”
게임을 끄고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자 따라오는 시선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통화할 때도 느꼈지만, 정말 잘 웃는 것 같아 보기엔 좋았다. 물론 그 속에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서 불안하긴 하지만. 주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뭐 사러 갈 건데?”
“밥부터 먹자. 더워서 그런지 지쳐 보여. 고기 먹으러 갈래?”
과연 더위 탓일까. 누구 때문에 힘든지 뻔히 알면서 능글맞기도 하지. 평생에 걸쳐 놀랄 걸 오늘 하루 만에 다 겪은 듯 감정의 피로가 극심했다.
적당히 하라며 팔꿈치로 선율 형의 팔을 툭 치자 커다란 손이 팔죽지를 잡아 온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 놀라 버렸다. 그런데 맨살에 닿은 손바닥이 무척이나 뜨겁다. 조금씩 전해져 오는 열기가 신경 쓰인다. 온 신경이 모두 그리로 몰려간 것만 같았다. 떨어뜨리려 몇 번 흔들어 봤지만, 오히려 얌전히 있으라며 꾹 누르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원래 이렇게 남을 잘 만지는 사람인가? 이젠 반대편 어깨까지 붙잡고 앞으로 쭉 밀기 시작했다.
“가자.”
“잠깐, 손부터 좀.”
“일단 나가고.”
그렇게 밀려 PC방을 나섰지만, 같은 빌딩에 있는 고깃집으로 향할 때까지 선율 형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붙잡힌 팔과 어깨에서 박동이 느껴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빠르게, 조금씩 크기를 키워 가며. 이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무척이나 좋지 않은.
주하는 선율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
PC방이 있는 건물은 25층 이상의 큰 빌딩이었다. 면적도 넓어서 웬만한 유명 매장은 다 들어와 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빌딩 안에서 식사와 쇼핑이 가능했다.
그중 최상층은 전체가 수영장이고, 아래층은 헬스장이었다. 헬스장 옆으로는 운동과 관련된 매장이 쭈욱 이어졌다.
주하는 선율이 구워 주는 고기를 양껏 먹고 배가 든든해진 채로 스포츠 브랜드 매장에 도착했다. 따라올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는데,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형, 뭐 사려고?”
“운동복이랑 수영복.”
“형 거…… 사는 거 맞지?”
대답은 미소로 돌아왔다.
제가 도망가리라는 걸 감지했는지 선율 형이 손목을 잡아 왔다.
“형, 설마?”
“설마 맞아. 네 거 사러 왔어.”
“잠깐!”
“잠깐은 없는데? 이리 와 봐, 저기 괜찮은 거 많네. 형이 사는 거니까 갖고 싶은 거 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