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95화 (95/130)

95화

주하는 선율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발에 힘을 잔뜩 줘 봤지만, 의미 없는 저항일 뿐이었다. 기어코 저와 함께 운동할 생각인가 보다.

“진심이야?”

“진심이지, 그럼.”

선율 형은 어느새 제 목 아래로 옷을 대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건 별로고, 이건 나쁘지 않은 것 같네, 하며 혼자 진지하게 살폈다. 손목은 여전히 붙잡혀 있었다.

그렇게 몇 벌을 고르면서 선율 형은 꾸준히 제게 의견을 물었다.

“이건 어때?”

“……저거랑 똑같은 거 같은데.”

“여기 포인트가 달라. 로고 위치도 다르고.”

내 눈엔 이게 이거 같고 저게 저거 같은데 고작 로고 위치 하나 바뀌었다고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운동하는데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사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제 옷을 고르면서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아무렴 어떤가 싶다. 운동도 결국 나 좋자고 하는 거니 싫어할 이유도 없을 것 같고. 어차피 해야 할 거면 즐기는 게 나을 것이다.

주하는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선율의 손을 가볍게 덮었다. 그러자 옷을 고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주하는 선율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도망 안 갈 테니까 이것 좀.”

“…….”

“운동할게. 옷도 살 거니까 편하게 보자.”

선율은 그제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곤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가만 보면 넌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쉽게 받아들이는 거 같아. 그거 안 좋은 습관이야, 알지?”

주하는 픽 웃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자진신고 일이 터지긴 했지만, 반대로 형이랑 만나고 리프 길드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단점이 확실한 만큼 장점도 확실했다. 하지만 그 말대로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을 상대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크게 달라지는데, 항상 좋은 사람들만 만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 반항해 봐?”

“지금 말고, 나한테도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만 깐깐해지면 돼.”

“아, 형은 제외하고?”

“당연하지. 네 행운이 난데.”

한번 들었던 말이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저 뻔뻔한 모습에 어이가 없다가도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제 진짜 도망가면 안 돼. 알았지?”

“알겠으니까, 옷이나 고르세요.”

등을 떠밀자 선율 형도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로 양말도 고르고, 신발도 세 켤레나 사고, 수영용품까지 모조리 구매했다. 처음엔 적당히 의견을 내놓았는데 나중엔 형에게 모두 떠넘겼다.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형이 고른 대부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쇼핑이 끝나자 짐은 두 손이 묵직할 정도였다. 과연 이걸 다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수영장과 헬스장에 들러 회원 등록을 했는데, 그 기간이 무려 1년이었다. 평생 회원을 하겠다는 걸 겨우 말려서 이 정도였지, 아니었으면 남의 카드로 플렉스를 외칠 뻔했다.

건물주는 역시 건물주였다.

밥도 먹고 쇼핑도 끝낸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가는 숫자를 지켜보던 선율은 주하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PC방 갈 거지?”

그러자 주하는 손에 들린 짐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들고?”

“짐은 내 차에 두자. 갈 때 데려다줄게.”

이대로 집에 간다고 하면 보내 줄 것 같지 않다. 주하는 어깨를 으쓱이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로 내려와 주차된 차에 짐을 실었다. 종이가방 여러 개가 뒷좌석에 일렬로 나열된 걸 보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주인공이 옷을 사 주는 건 많이 봤어도 운동복만 한가득 사 주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적어도 제목이 ‘사랑스러운 헬스장’ 정도는 되어야 하나 보다.

주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운전석 쪽에 서 있던 선율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주하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선율은 손으로 오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차에 탈래? 집에 데려다줄게.”

“왜? 무슨 일 있어?”

“조금 있다가 얘기해 줄게.”

주하는 차에 타며 운전석에 앉는 선율을 응시했다. 계속 웃는 모습만 봤더니 무표정한 모습이 어색하다. 예전에 멀리서 봤을 때도 표정이 없었지만, 그때는 무료한 느낌이었지 지금처럼 불쾌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정말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주소 알려 줘.”

그러나 제게 말을 거는 순간엔 익숙한 미소를 그렸다. 주하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며 선율을 힐끔거렸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출발했다. 집은 그리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집 앞에 차를 세운 선율은 핸들을 두어 번 툭툭 치고는 주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조용했던 적막이 깨졌다.

“단톡방 지금 난리 났어.”

“단톡방? 왜?”

“봐 봐.”

주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 앱을 열었다. 그러자 길드 단톡방에 300+가 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난 모양이다. 첫 메시지부터 개인주의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개인주의: 아니 ㅅㅂ 쟤네 진짜 미친 거 아녜요?]

[바나나: 무슨 일인데?]

[월차연차휴가: 자진신고? 걔네 대도시에 서 있는데? 왜?]

[개인주의: 사사게에 저격 글 올렸어요 저 새끼들이ㅡㅡ]

[바나나: 허????]

[Snow: 뭐라고?]

[개인주의: <링크: 리프 길드와 카젤을 고발…… 더보기> 이거 보세요]

“…….”

순간 주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주소에 쓰여 있는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는 예상되었다. 기어코 천상검이 사사게에 고발 글을 올린 것이다. 후회하게 될 거란 말이 이런 뜻이었나?

링크를 타고 들어가 보았다.

사건‧사고 게시판

제목: 리프 길드와 카젤을 고발합니다.

작성자: 천상검

안녕하세요. 자진신고 길드 길마 천상검입니다.

우선 요즘 저희와 리프 길드의 전쟁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유저 여러분께 사죄의 말을 올립니다. 월드 창도 시끄럽고 필드에서도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으실 겁니다. 저희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뜻대로 되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리프 길드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보니 많이 억울하네요.

확장팩 초반부터 카젤님이 멜로디와 함께 다닌 건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죠. 워낙 유명했으니까요.

저희는 그때 죄악의 탑 퀘스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녔던 걸 이해했습니다. 카젤님은 가장 선두에 있었고, 당시에 파티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멜로디가 유일했으니까요.

그런데 악탑만 하고 끝내면 될 걸, 계속 붙어 다니더라고요. 저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기에 불길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살펴봤는데, 던전도 같이 돌고 있더군요.

<스크린샷: 카젤 던전 위치>

<스크린샷: 리프 길드원 던전 위치>

저희는 며칠간 계속 지켜봤습니다. 괜한 오해를 하게 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역시나 리프 길드가 해당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카젤님도 그 던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스크린샷: 카젤+리프 길드원 던전 위치>

이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습니다. 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했습니다. 리프 길드 팀원에 대해서.

그런데 어이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확장팩 나오기 전부터 리프 길드의 ‘스콧’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리프 길드를 찍어 둔 스샷을 열어봤습니다. 확장팩 이후에도 스콧은 없더군요. 그 자리를 메꾼 건 카젤님이었습니다.

뒤에서 이렇게 몰래 사람을 빼가려고 한 리프도 어이없고, 그동안 같이 레이드를 해왔던 카젤님한테도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옮겨 가게 됐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멜로디랑 함께 다니면서도 계속 저희 길드에 있는 것도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꿍꿍이가 그려지더라고요. 스파이 짓 하고 있는 거구나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레이드 시작될 때쯤 나가면 이쪽에 피해도 줄 수 있을 테니 일석이조였겠죠.

그래서 저희가 당하기 전에 먼저 내쳤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바로 리프 길드로 들어가더군요.

<스크린샷: 길드 명 사라진 카젤>

<스크린샷: 같은 날 리프 길드 명 달고 있는 카젤>

그래요, 뭐.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잊으려 했습니다. 다행히도 길드에 레이드 가능한 분이 계셨거든요.

그렇게 3.1 패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패치 바로 전날 갑자기 벌꿀오소리님이 나가셨습니다. 상황을 보니 카젤님께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더라고요. 오해를 풀기도 전에 벌꿀오소리님은 다른 길드로 가셨습니다.

<스크린샷: 카젤을 내쫓았다며 화내는 벌꿀오소리>

<스크린샷: 길드 탈퇴하는 벌꿀오소리>

<스크린샷: 별똥 길드에 가입한 벌꿀오소리>

이렇게 이간질을 당할 줄은 몰라서 머리가 멍했습니다. 벌꿀오소리님은 카젤님께 세뇌를 당했는지 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더군요. 그래도 레이드는 해야 했기에 급히 마법사를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웬만한 분들은 이미 팀에 들어가셨으니까요. 그렇게 3.1 패치를 맞이했습니다.

저희는 토벌전 레이드를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속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카젤님과 벌꿀오소리님은 다 잡았더라고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길드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리프 길드의 개인주의와 일시불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리프 길드 때문이라고 생각한 길드원 한 명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 둘을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길드전을 선포하더군요. 저희가 먼저 죽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담담히 받아들였죠. 그런데 리프는 이때다 싶었는지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저희를 조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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