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본인이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었는지 선율 형도 웃어 버렸다. 그런데 웃음소리가 생각보다 꽤 컸다. 주하는 선율이 있는 곳을 떠올리며 물었다.
“PC방에서 그렇게 크게 웃어도 돼?”
—사람이 별로 없어. 다들 어디 놀러 갔나? 아까 낮에도 없더니.
“마지막 여름휴가를 불태우려나 보지.”
—아…… 여름휴가.
“건물주님께선 모르시나 봅니다. 이런 휴가가 있다는걸.”
—라나탈 유저라서 여름휴가를 모르는 거겠지. 쉬는 날은 게임 하는 날 아닌가?
“역시 진정한 썩은물이시네요.”
—칭찬 고마워.
“천만에요.”
—그런데 이번엔 휴가를 보내도 괜찮을 것 같아. 말 나온 김에 주말에 어디 놀러 갈래?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주말에 놀러 가자고. 1박 2일도 좋고 당일치기도 좋고. 아, 웨이크보드 배워 보는 건 어때? 그건 수영 못해도 할 수 있거든. 아는 사람이 빠지 운영해서 예전엔 자주 놀러 갔는데 이번에 라나탈 때문에 가지도 못했네.
“형 취미가 너무…… 일관적이다.”
—몸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하지. 잘하기도 하고.
“……예에, 그러십니까.”
—가자. 웨이크보드 별로면 다른 곳 가도 되고. 응? 아니면 바람 좀 쐬고 맛있는 거 먹고 올까? 주하 넌 뭘 좋아해?
“게임이요. 시원한 집에서 게임 하는 거요.”
—…….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단번에 나온 대답에 선율은 침묵했다. 취미야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집에서 아예 나올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밖으로 끌어내야 뭘 하든가 하지. 나중에 제발 나가고 싶다며 제게 애원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선율은 다짐했다. 묘한 웃음이 입가에 머물렀지만, 주하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못 먹는 음식은 있어? 알레르기 있다거나.
“음, 딱히 그런 건 없어. 알레르기도 없고.”
—그건 좋네. 입은 좀 짧은 것 같지만. 아까 보니까 1인분도 겨우겨우 먹던데.
“형이 많이 먹는 거야. 3인분을 혼자서 다 먹잖아.”
매일같이 통화하고 대화를 나눴는데도 이야깃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실제로 얼굴을 봤더니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다 보니 주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PC방이 있는 큰 빌딩이 선율의 건물이라는 것을. 게다가 빌딩이 세워진 땅도 본인 소유라고 했다. 할아버지께 선물로 받았다는 걸 보니 그는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수저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통화는 잠이 들기 전까지 이어졌다. 평소보다 더 오래, 일상적인 대화로. 주하는 왠지 조금 더 선율과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묘하게 기뻐서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상황을 인지한 건,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
<길드원 카젤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 개인주의: 형 어서 오세요
[길드] 바나나: 어서 와
[길드] 지구침략: ㅎㅇㅎㅇ
[길드] 카젤: 안녕하세요
게임에 접속한 주하는 인사하고 나서 한동안 길드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어제 사사게에 쓴 천상검 글이 오늘 아침엔 베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댓글은 지금까지도 실시간으로 달리고 있었고, 대부분 리프 길드와 카젤을 욕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상대편 입장도 들어 봐야 한다는 댓글도 있었지만, 다들 자극적인 내용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길드] 일시불: 아오! 귀찮은 애들이 많네
[길드] 월차연차휴가: ㅋㅋㅋㅋㅋㅋ 적당히 겁만 줘
[길드] 일시불: 주기면 안 되나여? ㅇ_ㅇ...
[길드] 개인주의: 쥬기자 +_+
[길드] 월차연차휴가: 죽이려면 대장님한테 허락받고 죽여;
[길드] 일시불: 쳇
[길드] 개인주의: 췌엣
[길드] 카젤: 왜? 무슨 일인데?
자진신고 애들이었으면 못 죽여서 안달이었을 텐데, 방금 대화는 조금 달랐다. 일반 유저 중에 귀찮게 하는 애들이 있는 것 같았다.
[길드] 개인주의: 이상한 놈들이 자꾸만 몹 몰아서 우리 쪽으로 와여 ㅡㅡ 자리 옮겨도 쫓아오고 그러네여. 지금도 엄청나게 몰고 와서 ㅌㅌ 중;
[길드] 일시불: 고발 글에 감명받은 넘들 가틈ㅋㅋㅋ
[길드] 카젤: ;;;
[길드] 바나나: ㅋㅋㅋㅋㅋㅋ 치지는 못하겠고 괴롭히고는 싶고 그런 듯?
[길드] 지구침략: ㅎㅎ 그냥 죽이고 실수했다고 해. 선율이가 그런 애들까지 봐주는 녀석은 아니잖아. 어쩌면 여태 살려뒀다고 혼날 수도 있어
[길드] 개인주의: ㅎㄷㄷ;; ㅇㅋ;;
[길드] 바나나: 그럼 나랑 눈이랑 외계인도 그쪽으로 갈까?
[길드] 개인주의: ㅇㅅㅇ! 와 주세여! 같이 잡아 버리져!
[길드] 일시불: ㅇㅇ! 몹이랑 다 같이 쓸어 버려야 할 듯 ㄱㄱㄱ
필드에 있는 개인주의와 일시불은 평판 작업을 하다가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몰고 오는 몹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죽진 않지만, 여러모로 사냥이 불가능해지는 터라 상당히 귀찮았다.
사사게의 무서운 점이 이런 거였다. 누군가가 잘못했다고 판단되면 이렇게 우르르 몰려들어 괴롭힌다. 본인들은 단죄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이유일 뿐일까? 그렇게 정의롭다면 상대방 입장을 듣고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상황은 리프 길드에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주하는 자신이 같이 움직여도 괜찮을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안 좋은 소문만 날 것 같아 주저하게 되었다.
머뭇거리는 손이 키보드 위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길드원 멜로디 님이 접속했습니다.>
때마침 기다리던 멜로디가 등장했다. 주하는 인사보다 먼저 날아온 파티 초대에 수락을 눌렀다.
[길드] 개인주의: 대장님! 대장님!! +0+
[길드] 일시불: 저희 괴롭히는 애들 다 죽여도 대요?
[길드] 바나나: 인사보다 허락이 먼저냐?ㅋㅋㅋ
[길드] Snow: ㅋㅋㅋㅋ 아휴 저 쫄보들
[길드] 월차연차휴가: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멜로디: 누가 괴롭혀?
[길드] 개인주의: ㅇㅇ 저희 쫓아다니면서 몰이하는 넘들이 있어여
[길드] 멜로디: 죽여 그럼
[길드] 일시불: 역싴ㅋㅋㅋㅋㅋ! 마음이 편해져써 ꔷ̑◡ꔷ̑
[길드]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ㅋㅋ 영상 다 찍고 있으니까 누가 ㅈㄹ하믄 다 올려 버려야징
개인주의와 일시불이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멜로디는 흔쾌히 허락했다. 건드리지 않으면 얌전하지만 공격당하는 순간부터는 가만두지 않는, 지극히 그다운 모습이었다. 길드원들도 사사게 글에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당한 만큼 갚아 주고 있었다.
주하는 고민하다가 멜로디에게 물었다.
[파티] 카젤: 형 나도 저기 가서 도와줘도 될까?
[파티] 멜로디: 그냥 놔둬. 알아서 잘 놀고 있는데 뭐
[파티] 카젤: 그래도...
[파티] 멜로디: 주하야. 설마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정말 방심할 수가 없네. 우리 주하는 ^^ 대체 어디까지 땅 파고 들어가려는지 궁금할 지경이야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나 닮고 싶다며? 그럼 그런 마음가짐부터 바꿔ㅋ
맞는 말이라 주하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빌런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파티] 멜로디: 그보다 아침에 데리러 간다니까 왜 거절해...? 같이 PC방 가자니까
[파티] 카젤: 뭘 데리러 와;; 난 그냥 집이 편해
[파티] 멜로디: 그래?
멜로디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던 주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화면을 응시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텐데…….
그래도 당장 큰 문제는 그가 아니라 이 상황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니 분명 나름의 해결책이 있을 텐데 너무나 태평하기만 하다. 주하는 왼쪽 손등을 한번 문지르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파티] 카젤: 근데 형
[파티] 카젤: 천상검 저 글은 어떻게 해?
[파티] 카젤: 점점 상황이 악화하는 거 같은데
어젯밤에 올라온 글이 단숨에 베스트까지 올라간 걸 보면 확실히 엄청난 이슈였다. 사사게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이번 일에 대해선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파티] 멜로디: 아직 조율이 안 끝나서 얘기 중이야
[파티] 카젤: 조율? 누구랑?
[파티] 멜로디: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
[파티] 카젤: 관련된... 사람들?
[파티] 멜로디: ㅇㅇ 특히 사바나의 분조장은 말이 잘 안 통하네?
사바나의 분조장? 벌꿀 님 말하는 건가?
주하는 친구 창을 열어 벌꿀오소리가 접속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곧장 귓속말을 날리자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귓속말] 카젤: 똑똑
[귓속말] 벌꿀오소리: ㅎㅇ 굿모닝
[귓속말] 카젤: ㅋㅋ 저한텐 굿모닝은 아닌 듯;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 이런 거로 기죽지 마셈
[귓속말] 카젤: ㅇㅇ 근데 선율 형이랑 무슨 일 있어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선율 형?
[귓속말] 카젤: 아; 멜로디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헐;; 벌써 실명까지 오픈함?ㅋㅋㅋㅋ 역시 줄로딬ㅋㅋ 개 빠르네ㅋㅋㅋㅋㅋ
[귓속말] 카젤: ㅋㅋㅋ;;;;
[귓속말] 벌꿀오소리: 암튼 무슨 일 있지. 아주 중요한 일이
[귓속말] 카젤: 뭔데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아주 중요한 일 ㅇㅇ
[귓속말] 카젤: ......
두 사람 다 대답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선율 형이 만나자고 했을 때 그러자고 할 걸 그랬나? 그럼 옆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제가 엮인 일인데도 쉬쉬하는 모습을 보니 자꾸만 궁금해진다.
[귓속말] 카젤: 당사자 놔두고 둘이 뭐 하는데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어허? 나도 당사자고 멜로디도 당사자임! 이건 카젤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귓속말] 카젤: 그러니까 같이 좀 압시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그건 시릉데?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카젤: ㅡㅡ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 노려봐도 안댐
[귓속말] 카젤: 저도 대충 상황은 알아야죠
[귓속말] 벌꿀오소리: 천상검한테 당했던 것들 스샷 찍어 놨으면 공유해 드림. 있음?
[귓속말] 카젤: ......
[귓속말] 벌꿀오소리: 이 순딩이가 진짜... 으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