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멜로디는 기어코 남은 두 명의 자진신고 녀석들을 죽이고 카젤의 옆으로 돌아왔다. 조금 닳아 있는 팀원들의 생명을 풀로 채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주하는 옆을 돌아보았다.
적들에게 야차처럼 달려들던 사람 같지 않게 선율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보통은 필드에서 싸우거나 레이드를 할 때면 흥분한다든지 아니면 무섭게 집중하는데, 선율에게선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누가 보면 게임 하는 게 아니라 일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무료해 보였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 전체에 미소가 퍼진다. 이제야 즐거운 걸 발견했다는 양.
그 미소는 당연하게도 주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 때문에 미소 짓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기대하지 말라고, 정신 꽉 잡으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것이 요즘 주하가 알게 모르게 심란해하는 이유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선율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고운 미소가 가득했다. 주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선율이 즐거워하며 물었다.
“사고 치고 즐거워하는 문제아를 보는 표정인데?”
“……멜로디가 어딜 봐서 힐러야. 필드에서 날뛰는 것 보면 딜러보다 더한데.”
“이렇게 놀라고 준 스킬인데 써 줘야지.”
“아무리 봐도 스킬이 이상해. 형 것만 밸런스 안 맞는 거 아냐? 설명 좀 정확하게 보자.”
주하는 의자를 끌어 선율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에 감싸여 있는 마우스를 가져가려 했지만, 그는 심술 부리듯 손을 더 움켜쥐기만 했다. 뭐 하는 거냐며 선율을 올려다보자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낯이 보였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찡그린 주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율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 상태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어색했다. 그래도 최대한 무시하려 애썼다.
게임 내 스킬 창을 열어 하나씩 설명을 읽고 있는 주하를, 선율은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깜박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긴 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아래 숨어 있던 새카만 눈동자는 모니터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쭉 뻗은 콧날과 이어지는 입술 선은 어느 각도로 보든 절경이다. 그리고 입술 바로 아래, 아주 작은 점이 하나 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던 작은 점은 하얀 피부를 더욱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위치도 절묘해서 인상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지나 목덜미로 시선을 내리자 깨끗하고 매끈한 피부가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살갗이 오돌토돌하게 올라온다. 선율은 그곳을 빤히 쳐다보다가 눈을 길게 휘며 웃었다. 그는 붙잡혀 있는 오른손은 그대로 놔두고 왼손으로 주하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자 놀란 몸이 퍼뜩 튀어 올랐다. 주하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목덜미에 이마를 기댄 선율이 말했다.
“냉방이 좀 센가? 너 소름 돋았어.”
“아, 뭐, 뭐 하는 거야?”
“온기 나눠 주고 있지.”
주하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심장이 크게 펄떡이는 걸 느꼈다. 목덜미에 그가 이마를 대고 있는 터라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움츠리자 선율이 웃었다.
“시원해서 좋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주하는 순식간에 온몸이 달아올라 필사적으로 버둥댔다. 그러자 허리를 옥죈 손이 더 단단히 잡아 왔다.
“윽, ……형! 좀 놔, 봐.”
“싫은데. 시원하다니까?”
기어코 목에 얼굴을 묻은 선율은 그대로 비비기 시작했다. 주하는 두 손으로 목덜미를 가렸다. 그의 시선을 느꼈을 때부터 올라온 소름이 열기와 함께 넓게 퍼졌다. 아쉬웠는지 손등 위를 볼로 문지르는 것을 느끼며 주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 상태로 몇 번 더 볼을 비비던 선율은 주하의 정수리에 턱을 기대며 말했다. 즐거워하는 음성이었다.
“스킬은 다 봤어?”
“…….”
“딜 계수가 힐량을 기반으로 해서 대미지가 좋은 거야. 수치가 정해져 있었으면 아마 이렇게까지는 못 했을걸.”
“…….”
“구경 다 했으면 남은 악탑이나 갈까?”
주하는 말 대신 고개만 빠르게 끄덕였다. 그제야 허리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부리나케 몸을 빼자 선율이 진정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주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자리로 돌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선율 형은 스킨십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잡고, 아니면 이렇게 몸을 끌어안는 것에 전혀 어색함이 없다.
부끄러운 동시에 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럴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하는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려 마른세수를 몇 번이고 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크게 호흡하기도 했다. 겨우겨우 진정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최대한 무시하며 화면에만 집중했다.
죄악의 탑을 가려고 준비하려는데, 갑자기 길드 창이 시끄러워졌다.
[길드] 개인주의: 어라? 사사게에 자진신고 애들이 댓글 달았네여??
[길드] 일시불: 오잉? 진짜? 머라는데?
[길드]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1친ㅋㅋㅋ
[길드] 바나나: ㅇㅇ? 왜?
[길드] 개인주의: 사진이랑 영상 다 조작된 거라곸ㅋㅋㅋㅋ
[길드] 개인주의: 자료 다 의뢰했는데 조작으로 판명됐다며 이상한 감정서? 같은 사진도 같이 올려놨어옄ㅋㅋㅋ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감정서?
[길드] 개인주의: ㅇㅇ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려서 늦게 해명한다고 그러네여ㅋㅋㅋ
[길드] Snow: 애쓴다...
[길드] 여름n모기: 진짜네;; 근데 그걸 믿는 애들이 있어ㅋㅋ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안 믿는 애들도 반인 듯?ㅋㅋㅋㅋ
[길드] 지구침략: 근데 저런 거 검사해 주는 곳도 있어?
[길드] Snow: 모르겠음ㅋㅋㅋ
[길드] 일시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대다나다... 이 정도면 ㄹㅇ 인정해 줘야 할 듯;;;
[길드] 바나나: 게임 접기 싫었나바^^
주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선율을 보았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해 당혹스러운데, 이상하게도 그는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선율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신경 안 써도 돼.”
“……그냥 놔둬?”
“응, 가만히 있어도 애들이 알아서 판별해 줄 거야. 인터넷에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능력자들이 많거든.”
“그러다 누가 또 거짓말하면?”
“자기들끼리 싸우겠지.”
너무 태평해서 걱정하는 제가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주하는 긴장을 풀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저런 것들이랑 얽힌 게 좀 억울하네.”
“동감이야. 대체 자진신고는 어떻게 들어간 거야?”
주하는 자진신고에 들어가던 날을 떠올리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돌이켜 보면 제 라나탈 생은 생각보다 다사다난했다. 자진신고도 그렇지만, 전 길드에서의 일도 그랬다.
“전에 있던 길드에서 문제가 생겨서 다들 뿔뿔이 흩어지거나 게임 접었거든. 그래서 길드 없이 막공 다니다가 자진신고 공개 모집 보고 지원했었어.”
“전 길드에서 무슨 일 있었는데?”
전에 있던 길드는 라나탈이 오픈하자마자 생겼던 길드였다. 처음엔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조금씩 친해졌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사람도 늘고, 길드가 커져 부딪치는 게 많아졌다. 그 상태로 조금씩 곪아 가던 곳이었다.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굳이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조용히 쳐다보는 선율 형을 보니 저절로 입이 열렸다.
“처음엔 잘 지냈는데 사람이 모이다 보니까 별별 일이 다 생기더라고.”
“무슨 일?”
“흔한 일이지.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그룹이 나뉘어서 따로 논다든지 하는 그런 거.”
“뿔뿔이 흩어지게 된 계기는 뭔데?”
주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곤 천천히 설명을 이어 갔다.
“같이 게임 하던 과 친구가 있었는데, 걔가 나랑 찍은 사진을 단톡방에 올린 거야. 난 그때 알람 꺼 놔서 나중에서야 알았어.”
“네 사진을?”
“응.”
“그래서?”
“……그때 다들 내 연락처를 물어보고 그랬나 봐. 제 딴에는 연애해 보라고 밀어주려던 것 같은데. 하필 나한테 전화한 사람이 애인이 있던 사람이었어. 그것도 같은 길드에 있는 친한 형의 애인.”
“연락처를 마음대로 오픈했다고?”
“어. 그래서 내가 형이 처음에 연락처 알려 달라고 할 때 아무한테나 알려 주지 말라고 한 거야. 이거 번호 바꾼 거거든.”
“번호를 바꿀 정도로 연락이 많이 왔어?”
“차단하면 다른 번호로 연락하고 그러더라. 만나자고 그러고 실제로 보고 싶다고 그러고. 나중엔 학교까지 찾아오려고 해서 안 되겠다 싶어서 그 형한테 말했지.”
“……난리 났겠네?”
“아니,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형이 믿어 줬어. 그 사람 핸드폰 가져가서 확인했나 봐. 오히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그나마 다행이다.”
주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도 상처는 받았겠지. 게임에서 만난 애인이었는데 그 때문에 회의감이 들었나 봐. 그 형이 길마였는데 어느 날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더라고.”
“…….”
“자긴 게임 접는다면서 길마 자리 넘기겠다고 했는데, 길드 사람들이 서로 자기가 하겠다며 싸우더라. 큰 길드 길마는 얻는 게 많잖아.”
“……혹시, 타임레스 길드?”
“어? 알고 있네?”
“워낙 시끄러웠으니까. 거기다 개주가 길드에다 시시콜콜 다 말해서 모르는 애들 없을걸.”
“그래? 그럼 그 후의 일은 알겠네. 길마 형이 길드 해체하고 길드명 못 가져가게 만든 다음에 게임 접었어. 그다음부터 난리 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