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의 뒤에는 필드 몹 여러 마리가 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근접형 몬스터만. 주하는 선율이 말한 편법이 어떤 건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길드] 카젤: 헐... 이렇게 잡는다고?
[길드] 개인주의: ㅇㅂㅇ 네!!!
지구침략은 우르르 몹을 끌고 적 본진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월차연차휴가가 적진으로 순간 이동해서 얼음 회오리로 몹과 베르메르의 발을 묶어 버렸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지구침략과 월차연차휴가는 유유히 외곽으로 몸을 뺐다. 그러자 공격 대상을 잃은 몹들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베르메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반] 베르메르: ㅆ
베르메르는 당장이라도 피하고 싶었지만, 속박당해 있어서 불가능했다. 거기다 생존기도 이미 사용해 버렸고, 팀원들은 견제받는 터라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피도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었다. 결국 베르메르는 몹에게 두들겨 맞아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다.
베르메르가 죽자마자 주하는 빠르게 캐릭터 정보 창을 열었다.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그전에 한 번 공격한 게 있어서 혹시나 킬러 포인트가 오르지 않았을까 해서. 그러나 길드전 대상이 아닌 유저를 공격했음에도 포인트는 오르지 않았다.
주하는 의아해하며 선율에게 물었다.
“원래 어시스트도 포인트 오르지 않았어?”
“막타로 죽이지만 않으면 안 올라.”
이런 게 바로 완벽한 편법이라는 거구나. 주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 여태 이렇게 잡았다니.”
“다 방법이 있는 거지.”
“형이 왜 악명 높았는지 알겠다. 이러니까 당하는 녀석들이 필드에 못 나오지…….”
“근데 이 방법을 나만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대부분 알고 있을걸?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니까 못 하는 거지. 잘못하면 몰이해 온 사람이 죽을 수가 있거든.”
“그렇긴 하겠다. 타이밍 못 맞추면 유저 본인이 위험해질 테고. 너무 멀어지면 몹이 돌아갈 수도 있고.”
편법이란 게 꼭 만능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변수 때문에 하나하나 신경 써야만 했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리고 저런 짓 하고 돌아다니는 애들은 필드에 있는 유저들이 합심해서 죽이니까 잘 안 나타나지.”
“……그럼 형은?”
“난 이유가 명확하고, 한 놈만 죽였으니까.”
“무분별한 PK가 아니다?”
주하의 질문에 선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본인 괴롭힌 사람만 쫓아다닌다면 유저들도 이해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와 자진신고 사이를 지켜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을에 숨었을 때만 조심하면 돼. 그리고 PK가 안 되는 일반 맵은 몹 몰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이래야 진정한 빌런이지. 주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진신고를 괴롭힐 방법은 이렇게나 무궁무진했다.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럼, 나머지도 잡으러 가 볼까?”
선율의 제안에 주하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자진신고에게는 전혀 미안하지 않았으므로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율 형과 대화하는 동안 팀원들은 이미 미쳐 날뛰고 있었다. 남아 있는 녀석이 몇 명 없을 정도로.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남은 놈들이라도 잡으려 빠르게 합류했다. 당사자가 뒤처질 순 없지 않은가.
욕설을 내뱉는 녀석들을 무시하며, 리프는 신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머리 써서 도망가도 숨을 곳은 없다는 걸 철저하게 각인시켜 주듯이.
사사게의 논란과 유저들의 반응은 이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달릴 뿐이었다.
***
운동과 게임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방학이 끝나 있었다. 주하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에게 어떻게 방학 동안 연락이 한 번도 되지 않느냐며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와, 강주하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살아는 있었네? 난 또 게임 하다 죽은 줄 알았지.”
그러나 주하는 조금 억울했다. 종강하자마자 게임에 집중할 테니 연락해도 받지 않겠다며 미리 말해 뒀기 때문이다. 분명 그땐 알겠다고 해 놓고선 이제 와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럴 거라고 말했었잖아.”
“야! 그래도 한 번은 봐야지!”
“방학 때마다 그랬는데 새삼스럽게…….”
거기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학기 중에도 시간이 나면 라나탈만 했고, 방학해서도 똑같았다. 그런데도 매번 찾아 대는데,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누가 쟤보고 착하다고 하면 내 입이 근질거려.”
“나도. 강주하 은근히 매정한 놈이야.”
주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동기들은 허구한 날 모여 술만 마시고 소개팅을 부르짖었다. 저와는 취미가 맞지 않고, 소개팅도 관심 없으니 부른다고 해도 가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빼지 마라.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친히! 모시러 온 거니까.”
“방학 끝났으니까 이제 못 튄다, 너.”
동기들이 주하의 양쪽에서 죄인을 압송하듯 팔을 붙들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붙들린 팔을 흔들어 보지만 끄떡하지 않는다. 주하는 끙끙대며 발버둥 쳤다. 오늘은 토벌전 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무조건 가야 했다. 한 주가 리셋되고 가장 바쁠 시기에 동기들에게 붙잡힐 수는 없었다.
“안 가. 나 약속 있어.”
“약속은 개뿔, 또 게임 하려는 거잖아!”
“게임 약속도 약속이야.”
“응, 안 돼. 오늘은 꼭 데려갈 테니까 포기해.”
주하를 더 단단히 옭아맨 동기들은 반항하는 그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원체 만나기 어려운 녀석이라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으면 또 도망갈 것이다.
주하는 자주 얼굴을 내밀지 않음에도 선배나 후배, 그리고 동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성격이었다. 누구를 쉽게 헐뜯지도 않고, 부담스럽게 하지도 않는다. 어느 모로 보나 잘난 녀석이 무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으니 누구나 다 어울리고 싶어 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적당한 거리를 벌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게임만 하는 걸지도 모른다며 동기들은 안타까워했다. 몇몇은 그 얼굴 안 쓸 거면 내놓으라던 녀석들도 있었다.
어쨌든 동기들은 이번 학기만큼은 무조건 끌고 다니겠다며 다짐한 상태였다. 이렇게 다니다 보면 금방 적응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겸사겸사 주하 덕을 보려는 이유도 있었다.
“이것 좀 놓자.”
하지만 게임 말고는 관심 없던 주하는 동기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흔들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그런데 동기들이 생각보다 더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터라 쉽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술집까지 끌려가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싫어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강요하면 안 되지.”
나긋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몸을 옥죄고 있던 것들이 단번에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주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주하는 나랑 선약이 있어서.”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는 남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는 주선율이었다.
“……형? 여긴 어떻게?”
“너 끝날 때 됐잖아. 데리러 왔지.”
주하의 얼굴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뜯어지듯 떨어져 나간 동기들은 멍한 낯으로 선율과 주하를 번갈아 보았다.
그 강주하가 사람을 반긴다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거기다 그렇게 꽉 옭매고 있었는데 남자의 손짓 한 번에 튕겨 나갔다는 것이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근데 전화는 왜 안 받아?”
“어? 전화했었어?”
주하는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선율에게 온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보였다.
“아, 수업 시간에 무음으로 해 놨다가 까먹었네.”
“앞으로 계속 데리러 올 테니까, 수업 끝나자마자 연락해.”
“계속 온다고?”
“오늘 보니까…… 안 그러면 너 뺏길 거 같아.”
선율은 주하의 동기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묘하게 적대적이라 동기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선율은 그들을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주하랑 놀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렇게 막무가내로 끌고 가면 안 되지.”
“…….”
“…….”
“난 또 주하가 무슨 죄지은 줄 알았잖아.”
잔뜩 굳어 있는 동기들을 본 주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율 형의 말에 동감은 하지만,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바나나 누나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형은 화가 나 보였다. 그게 신기해서 물끄러미 보고 있었더니 선율 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선율은 조금은 다정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하의 퍼스널 스페이스는 존중해 주지 않겠어?”
“아…… 그게…….”
선율은 주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동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하가 움찔거리긴 했어도 남자의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갈까?”
주하를 이끌고 걸음을 옮기는 선율의 뒷모습을, 동기들은 그저 넋 놓고 바라만 보았다. 충격적인 일이 한 번에 몰아친 것 같았다.
그러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뒤늦게 주하를 빼앗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