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107화 (107/130)

107화

주차된 차에 올라타면서 주하는 선율에게 물었다.

“형, 아까 그거 그냥 애들 보내려고 한 말이지?”

“뭐가?”

“매일 온다는 거.”

안전벨트를 매며 조금은 기대하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말 매일 데리러 온다는 건 아닐 거다. 아마 경고의 의미겠지. 가족이어도, 아니 애인 사이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러니까 눈치껏 상황 판단하기로 했다.

“덕분에 이제 애들한테 안 잡히겠다.”

“…….”

“저녁 먹고 들어갈까? 오늘은 내가 살게.”

“주하야.”

그렇게 흘려 넘기려던 주하였지만, 선율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하를 물끄러미 보는 선율의 눈빛은 단호했다.

“지금쯤이면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 부족해?”

“……어?”

“오지도 않을 거면 그런 말 하지도 않았어.”

주하가 멍하니 바라보자 선율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바나나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다며.”

“…….”

“듣고 나서 무슨 생각이 먼저 들었어?”

주하는 눈을 깜박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선율과 남이 알고 있는 선율의 모습. 너무나 달라서 인정하기 쉽지 않았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동기들의 팔을 떼어 낼 때도, 그들을 보는 시선도. 제게 보여 주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러면 괜히 기대하게 되는데.’

주하는 고민하다가 다시 선율을 힐끗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까지 휘며 웃는 모습이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 좋아하는 게임을 할 때도 무료한 낯이었는데, 왜 항상 저를 볼 때마다 웃고 있을까. 그것도 어쩌다 한번 웃는다는 사람이.

누구와 닿는 것도 싫어하고, 대화도 가끔 무시한다는 남자는 저에게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거기다 길드 동생들을 귀여워하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일정 선을 긋고 있었다.

또 다른 점은, 선율 형이 제게 짓궂은 장난을 치면 길드원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간 보였던 모습과는 상반되기 때문이겠지. 제게 당하는 선율 형의 모습도 신기하다고 했고.

빈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도 본 적 없었는데, 그건 아마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그렇다면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근데…… 그게 가능해?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의아하기만 했다.

주하는 말없이 선율을 응시했다.

내 멋대로 결론 내리고 싶은 마음도 들고, 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왠지 비겁한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제대로 고백도 못 해 보고 어영부영 결말에 다다르면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솔직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착각의 말로는 생각보다 참혹할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것이다. 물론 확률이 무척 낮긴 하지만 말이다.

그동안은 누군가에게 키스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그 첫 대상이 남자인 선율 형이었다. 몇 번이나 의심하고 검열해 오던 마음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확실해졌다.

그래서 인정했고, 그래서 받아들였다.

더는 숨기고 누른다고 해서 감춰질 감정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 주는 행동에 기약 없이 흔들리기만 한다면 언젠가 분명 후회하겠지. 그럴 바에야 확실하게 고백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할 거라면, 적어도 미련이 남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주하는 입술을 한 번 축이고는 선율에게 말했다.

“형, 오늘 레이드 끝나고 나랑 술 마실래?”

“술? 갑자기?”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 거기다 내일은 수업도 없고.”

“그럼 마셔야지.”

선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하의 권유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저 또한 바라고 있었던 일이므로.

“레이드 시간 앞당겨 볼까?”

“우리 대학생들 오늘 다 개강 날이라 힘들 텐데. 술 마시러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야 할걸?”

“막내 둘이랑 월차랑 리밋인가?”

“형, 갈궈도 안 되는 건 안 돼.”

잠시 생각하던 선율이 빙긋 웃었다. 금방이라도 나쁜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모습에 주하는 그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꿍꿍이 가득한 낯이 오늘따라 불안했다.

선율은 핸드폰을 들어 무언가를 쓰더니 주하에게 보여 주었다.

[멜로디: 레이드 일정 내일로 변경한다]

[바나나: 잉? 왜 갑자기?]

[개인주의: 진짜여???? 다행이다ㅠㅠㅠㅠ]

[Snow: 다행이라니?]

[일시불: ㅋㅋㅋ선배들이 오늘 술 마시자구 하는 거 아직 거절 못 했거든여ㅋㅋㅋㅋㅋ]

[개인주의: 오늘은 ㄹㅇ 내가 좋아는 선배여따구!!!!]

[리미티드: 그럼 저도 오늘은 술 마시러 갑니다]

[월차연차휴가: 앜! 후배들이 붙잡는 거 겨우 떼놓고 왔는데;]

[Snow: 오늘 다들 개강이라 정신 없구나ㅋㅋㅋㅋㅋ]

[지구침략: ㅋㅋㅋㅋ 잘 놀다 와]

[여름n모기: 우린 자진신고나 잡고 있자]

[바나나: ㅇㅋ]

[Snow: 내일 보자ㅋㅋ]

선율의 추진력에 주하는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레이드 시간을 앞당길 수 없자 다른 날로 변경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아무래도 파밍하는 토벌전 레이드라서 여유 있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주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그럼 밥부터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소갈비찜 맛있게 하는 곳 있는데 갈래?”

“그래.”

드디어 시동이 걸리고 차가 출발했다. 주하는 운전하는 선율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긴 했어도 긴장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조심스럽게 숨을 가다듬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 안에 땀이 차오르는 것 같아 문질러 봤지만, 바싹 말라 있을 뿐이었다.

차는 어느새 학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

간단하다고 말할 수 없는 갈비찜 특대를 클리어하고 술집으로 향했다. 적당히 먹으려고 했던 주하는 이미 평소 식사량을 넘긴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안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배가 불러서 엎어져 있는데, 그런 주하의 등을 선율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웬일로 잘 먹는다 했더니, 체한 건 아니지?”

“……체한 건 아니고. 너무 배불러서 힘들어.”

“그렇게 맛있었어?”

“엄청.”

주하는 답답한 가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음식에 관심이 없던 이유는 엄마의 요리 솜씨 때문이었다. 레시피를 따라 요리해도 맛이 미묘했고, 이것저것 도전해 본다며 추가하면 근본을 알 수 없는 퓨전 요리가 만들어졌다. 아버지도 요리해 보고 싶다며 살살 꾀어내려 했지만, 어찌나 단호하시던지 요리만큼은 손대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결국 아버지와 형제들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본인들이 버틸 수 있는 만큼만 먹었다. 그러다 보니 다들 생존을 위해서 먹는 것에 익숙해졌다. 입이 짧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엄마는 아직도 식구들이 먹는 양이 적다며 한탄하시기만 할 뿐,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고 계셨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잘 먹으니까 좋다. 다음에도 맛있는 데 알려 줄게.”

주하는 엎드린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안 그래도 요즘 이른 아침에 운동했더니 식욕이 많이 오른 상태였다. 특히 수영하는 날이 그랬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면 힘들어서 드러눕기 바쁜데, 수영하고 나오면 그렇게 허기가 졌다.

등부터 시작해서 허리까지 쓸어내리는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엎드려 있는데, 시간이 꽤 흘렀는지 안주와 술이 나왔다. 그래도 조금 효과가 있었는지 불편함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시간 많으니까 무리해서 먹지 마.”

옆에 앉아 있던 선율은 주하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반대쪽 자리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하는 제가 술을 마시자고 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소주병을 집어 든 그는 선율에게 한 잔 따르고 제 잔에도 따른 뒤 내려놓았다.

“형, 술 잘 마셔?”

“마실 만큼은 마시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잘 먹더라.”

짠.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마시자 알싸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 비해 요즘은 많이 순해졌다고 하던데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어차피 결국 술은 술이지 않던가.

잔을 내려놓자 이번엔 선율 형이 채워 주었다.

“너는 잘 마셔?”

“나는, 글쎄……. 취할 때까지 마셔 본 적은 없어서.”

“이게 더 무서운 대답인데?”

“그래 봤자 한 병이야.”

투덜거리자 형은 웃기만 했다.

주하는 안주를 먹는 선율을 가만히 구경했다. 그렇게 많이, 그것도 잘 먹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 모습이 단정하기만 하다. 고급스럽다고 해야 하나? 단순히 제게 콩깍지가 씌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젓가락질도 잘하고 음식을 입에 넣을 때도 깔끔하다. 보는 맛이 있어서 빤히 쳐다보자 형이 입을 오물거리면서 의아해했다.

“내 얼굴 뚫어지겠다. 먹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해?”

음식을 삼키고 나서야 물어보는 그에게 주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가 형 보면 엄청 좋아할 거 같아.”

“……그럴까?”

“왜 우리보고 깨작거리지 말라고 하는지 알겠어.”

“좋아해 주시면 나야 감사하지.”

선율 형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먹성만큼이나 술도 잘 마시는 것 같으니 저는 적당히 조절하면서 마셔야겠다. 아무래도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근데 갑자기 술은 왜 마시고 싶어졌을까?”

“그냥, 형이랑 안 마셔 봤으니까.”

“취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럼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감당할 수 있겠어? 나도 내 주사 모르는데.”

“그래?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선율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주하는 어이가 없었지만, 픽 웃고는 잔을 부딪쳤다. 방금까지 적당히 조절하면서 마시겠다고 해 놓고 금세 흐지부지해진다. 형이 저렇게 권유하면 과연 제가 거부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첫 잔과 달리 두 번째 잔은 쓴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게 느껴지는 술맛에 주하는 잘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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