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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113화 (113/130)

113화

다른 일이 있다며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선율 형은 이미 제 일정을 다 알고 있었다.

학교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매일같이 붙어 다니기도 하고, 또 그날 있었던 일도 자연스럽게 말하다 보니 이젠 형이 저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게 없다시피 했다. 나중엔 과제 하는 시간까지 따로 관리해 주기도 했는데, 답답할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은근히 편했다. 괜히 대표들이 비서를 두는 게 아니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물론 제 일거수일투족을 형이 다 알고 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

웃고 있는 선율을 본 주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 방 풍경을 둘러보았다.

처음엔 컴퓨터만 있던 곳에 어느새 이것저것 많은 것들이 들어차 있었다. 음료수 냉장고와 간식 선반, 커피 머신과 얼음 냉장고, 두 대의 안마 의자, 거기다 라면을 끓일 수 있는 미니 주방까지.

선율 형은 왔다 갔다 하는 게 귀찮다며 하루 만에 폭풍 쇼핑을 했다. 움직이는 게 귀찮으신 분이 운동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커피 한 잔만.”

“어떤 걸로?”

“아이스로 부탁합니다.”

주하는 익숙하게 커피를 내리고 선율의 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본인 건 아이스 라테로 만들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방금 막 원두를 갈아서 만든 커피는 향이 무척 좋았다.

선율의 책상 위로 커피를 내려놓은 주하는 옆에 가만히 서서 그의 화면을 구경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카젤을 필드에 세워 뒀는데, 선율 형이 그 옆에서 제 캐릭터를 지키며 몹을 잡고 있었다.

주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선율에게 말했다.

“연약한 힐러님이 몹을 너무 잘 잡네.”

“아직도 삐져 있어?”

저렇게 쉽게 몹을 죽이는데, 당시엔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힐러가 자신을 쫓아온 게 무척 이상한 일임에도 그저 공격 아이템을 끼고 미친 듯이 달렸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너무 순진했지…….”

주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선율에게 붙잡혀 버렸다. 허리를 끌어안는 힘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제 등허리에 얼굴을 기대며 웃고 있는 형이 보였다.

“안 그랬으면 알아서 다니라고 했을 거 아니야.”

“…….”

“너랑 놀고 싶어서 그랬던 거니까, 귀엽게 봐줘.”

“귀엽게 보기엔 너무…… 크신데?”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하는데, 순간 허리에서 뜨끈한 숨결과 감촉이 느껴졌다.

“으앗! 형!”

언제 티셔츠를 올렸는지 선율이 주하의 맨허리에 얼굴을 묻고 비비고 있었다. 기겁한 주하가 옷을 내리려 발버둥 쳐 봤지만, 힘으로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간질간질한 기분과 묘한 느낌이 허리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주하는 몸을 웅크렸다. 요즘 들어 부쩍 스킨십이 많아지고 짙어지는 것 같아서 조금 곤란했다. 그동안 찾아본 바론 아무래도 제가 아래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아프다고 하던데……. 차마 영상까지 볼 자신은 없어서 정보만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소설에서 그랬다.

소설에서 보면 아파하다가도 나중엔 좋아한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주하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허리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최대한 무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자극을 참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찌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순간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

그 순간 선율의 움직임이 멈췄다. 주하는 쪽팔림에 얼굴을 붉히며 부랴부랴 몸을 물렸다.

‘거기서 왜 갑자기! 으…… 미치겠네.’

선율에게서 훌쩍 멀어지고 나서야 주하는 뒤늦게 달아오른 얼굴을 팔로 가려 버렸다. 형은 속을 알 수 없는 낯으로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말했다.

“너 은근히 예민한 거 알아?”

“누구든 그러면 당연히 놀란다고!”

“난 간지럽히려고만 했는데. 혹시…… 야한 생각 했어?”

“안 했거든요!”

답지 않게 소리치는 주하를 보며 선율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넘어가 줄까, 말까. 잠시 고민한 선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의식하는 건 좋지만, 너무 몰아붙였다간 오히려 경계만 심해질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다려 주는 게 나았다.

주하는 끌려다니는 것 같다가도 허용선을 넘어 버리면 단호해지는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그 경계를 잘 지켜야만 했다.

“알겠으니까, 이리 와. 악탑이나 가자.”

선율은 주하의 의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제야 살짝 경계하며 다가오는 주하에게 선율은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주하가 제게 모든 것을 내보일 때까지 지금껏 하던 대로 천천히 파고들어 가면 된다. 결국 지금도 이렇게 연인이 되지 않았나.

선율은 주하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의뭉스럽게 미소를 그렸다.

그때, 주하가 서늘한 기운을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선율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활짝 웃는 모습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선율은 그런 주하를 보며 눈을 길게 휘었다.

‘귀여워.’

연애 전선은 아직 화창했다.

***

리프 길드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요일이 되었다.

주하는 정신없이 올라오는 단체 톡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들 서울에 살고 있어서 모임 장소는 당연하게도 서울 중심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이제 막 출발했는데, 몇 명은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개인주의: ㅠㅠㅠㅠㅠ왜 아무도 없습니까아ㅏㅏㅏ]

[일시불: 가게 포스가.... ㅎㄷㄷㄷ]

[바나나: ㅋㅋㅋ 예약자 신서영으로 확인하고 들어가 있어]

[개인주의: 누나 짐 어딘데여?]

[바나나: 거의 다 도착했어ㅋㅋ]

[개인주의: 왠지 쫓겨날 것 같은데...]

[Snow: ㅋㅋㅋ 뭘 쫓겨나. 언능 들어가!]

[개인주의: ㅠㅠㅠ 걍 밖에서 기다릴래여]

[바나나: 앞에서 알짱거리다가 진짜 쫓겨날 수도 있어]

[일시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개인주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개인주의: 대체 왜... 이런 고급 식당을 예약하신 겁니까....]

[바나나: 내 돈 아니니까 ㅇㅅㅇ]

[지구침략: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겠다 ㅎㅎ]

[여름n모기: 이때 아니면 길마 뜯어먹기 어렵다고ㅋㅋ]

[바나나: 옳소! 쟨 돈을 팍팍 써야 할 의무가 있어! 감히 날 강등시키다니... 오늘 내가 벼르고 있으니까 조심해라]

[Snow: 나도... 오늘만을 기다렸다. 우리 걸작을 마음대로 철거한 걸 후회하게 해 줄 거야!!]

주하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바나나와 Snow가 꾸몄던 하우징을 떠올리면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조잡함을 따라올 하우스가 또 있을까? 지금은 리미티드가 세련되게 꾸며 놔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형, 누나들이 오늘 벼르고 있다는데?”

“마음대로 하라 그래.”

운전하고 있는 선율을 대신해 주하가 대답했다.

[카젤: 선율 형이 마음대로 하라는데요? ㅋㅋㅋ]

[바나나: 아오... 저쉑 거덜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여름n모기: ...네가 생각하는 거 다 사도 안 될걸?;;]

[바나나: ㅅㅂ;;;;]

[개인주의: 호달달... 우리 대장님께 제가 평생 충성한다고 전해 주세여... 카젤 형]

[일시불: 저두여 ㅇ.<]

[카젤: ㅋㅋㅋㅋㅋㅋㅋㅋ]

[여름n모기: 근데 카젤이는 길마랑 같이 오는 중?]

[카젤: ㅇㅇ 형 지금 운전 중이에요]

[바나나: 거바 내가 뭐랬어ㅋㅋㅋ]

[카젤: ^^ 편안하게 갑니다]

[여름n모기: 우리랑 같이 이동해도 됐을 텐데]

[리미티드: 모기 형... 커플 사이에 끼는 거 아니에요]

[월차연차휴가: 리밋이 요즘 왜 저러냐;;]

[여름n모기: ;;;그러게]

[리미티드: ㅋㅋ]

리미티드는 며칠 전부터 저와 선율 형을 커플로 보고 있었다. 장난인지 아니면 눈치를 챈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뭐라 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대체 불안하게 왜 저래…….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일 만난다는 것만 빼면 게임 내에서 티를 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선율 형이야 원래부터 애인이니 내 거니 했으니 달라진 건 없고. 저도 평소대로 행동했는데.

주하는 목덜미를 쓸며 찝찝함을 덜어내고자 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선율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왜? 리밋이가 또 그래?”

“어? ……아, 응. 쟤 갑자기 왜 저러지?”

“그야, 걔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어…… 어? 뭐라고?”

주하는 깜짝 놀라 선율을 쳐다보았다. 리밋이가 알고 있다고?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저번에 둘이 진짜 사귀는 거 같은데 맞냐고 물어보더라.”

“허…… 언제?”

“우리 사귄 다음 날?”

다음 날이면 주말이다. 그날은 자진신고 녀석들을 잡느라 하루를 다 할애했을 때였다. 길드원들 전원이 추노가 되어 싸움만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래서 그렇다고 했어?”

“대답은 안 하고, 그렇게 보이냐고 물어봤지.”

“그래서? 뭐래?”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축하한다고 하던데.”

뭐야, 대체? 리미티드 이 녀석 뭐 하는 녀석이야? 사귀는 것 같다고 물어보고, 대답도 안 했는데 축하한다고 했다고? 대체 뭘 보고?

주하가 혼란에 빠져 있자 선율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입 무거운 녀석이라 걱정 안 해도 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축하한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대화할 때도 우리한테 호의적이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기분이 묘했다. 선율 형과 제 사이를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것이. 아직은 다른 시선을 걱정할 여유 따윈 없었다. 지금도 하루하루 새로운 감정을 알아 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니까.

갑자기 현실로 끌려온 기분이라 조금 당혹스럽긴 하다.

잠시 멍해 있는데, 차가 멈춰 섰다. 고개를 드니 언제 도착했는지 이미 주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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