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다른 한쪽 무릎도 바닥에 꿇고 주하의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며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그 안에 들어갔다. 여전히 아래서 올려다보는 시야라 선율은 다시 한번 주하의 입술 아래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울 정도로 짧게 짧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주하는 어느새 떨림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제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그 말이, 기분 좋은 것만 하자는 권유가. 너무 다정해서 크게 뛰던 심장이 기분 좋은 울림으로 변했다.
주하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서 선율을 끌어안았다. 마주 안아 오는 묵직한 온기가 이렇게나 사랑스러울 줄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선율 형이 져 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 은근히 뿌듯했다.
목덜미에 닿아 오는 입술과 숨결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기분 좋은 열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주하는 천천히 시작된 애무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곤 선율의 목덜미에 똑같이 입술을 묻었다.
열락에 들뜬 소리가 차츰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푸른 새벽빛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지만, 암막 커튼에 가려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당장은 알 길이 없었다.
***
“주……야, 일어나.”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물속에 푹 잠겨 있는 듯하던 정신이 강제로 부상했다. 하나둘씩 깨어나는 신경들은 생각보다 느리게 주변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부어 있는 목구멍이었다.
“으…….”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을 흘리는데, 몸이 붕 뜨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입 안으로 미지근한 물이 천천히 들어왔다. 바짝 말라 있던 입 안과 목구멍이 드디어 생기를 되찾는다.
“쿨럭, 하아…….”
“깼어?”
“……형?”
주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렸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았는지 저를 내려다보는 선율의 얼굴이 흐릿하다. 미간을 잔뜩 구기며 초점을 잡아 보려 했지만, 눈꺼풀이 힘없이 닫혔다. 다시 시야가 암전되고, 그대로 잠이 들려는 찰나.
“주하야, 자면 안 돼.”
“……아.”
선율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붙들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드디어 잠이 서서히 달아났다.
“잘 잤어?”
“……몇 시야?”
“오후 6시. 밥 먹어야 하니까 이제 일어나야 해.”
안 먹어도 되는데. 그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조용히 닫았다. 요즘 제 식단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신 분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목이 왜 이렇게 부었지? 따끔거리진 않지만 조금 불편했다.
목을 한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데, 선율 형이 그 위로 제 손을 겹치며 물었다.
“목 아파?”
“응, 왜 그러지?”
“그야, 목을 많이 썼으니까?”
그 순간 번개처럼 지난 새벽의 기억이 떠올랐다. 주하는 허리를 벌떡 세우며 일어나 앉았다. 갑작스럽게 움직인 터라 머리가 띵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밤새 형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까무룩 잠이 들 때쯤 목구멍이 욱신거렸던 걸로 기억한다. 마지막엔 거의 흐느끼기까지 했으니까.
주하는 한 손으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끝까지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차마 선율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정말 같이 밤을 보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더운 얼굴을 이불에 비비며 나름 열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는데, 뭔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이불의 감촉, 제 몸에서 나는 익숙한 바디워시 향기.
이게 왜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고민하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주하는 떨리는 눈동자로 선율에게 물었다.
“형…… 설마 나…… 씻, 겼어?”
“응, 그대로 두면 불편하잖아.”
“윽!”
밤새도록 둘이 뒹굴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둠 속에서였다. 잠든 사이 저도 모르게 환한 빛 아래에서 그에게 죄다 내보였다니. 거기다 아기처럼 씻겨졌다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패닉에 빠져 있는 주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선율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차피 수영장에서 다 봤는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
“수……영장에서는 그래도 수영복 입었잖아!”
“같이 씻기도 했는데?”
“그땐……! 칸막이도 있었고, 수건으로도 가렸고.”
“설마, 고작 그걸로 안 보였을 거라고 안도한 거야?”
주하는 순간 숨을 흡, 들이마셨다. 당연히…… 안 보였던 게 아니야?
“칸막이는 어차피 내 어깨까지밖에 안 되는데.”
선율이 높이를 보여 주듯 손으로 자기 어깨 옆을 가로로 그었다. 이렇게 보니 고개만 조금 돌려도 옆자리까지 다 보일 위치였다. 그것을 깨달은 주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아무리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고 해도 밤새도록 만지고 입에 담았는데 모를 리가?”
“으악! 형!”
주하가 다급히 선율의 입을 막으려 두 손을 뻗었지만, 선율은 냉큼 그의 손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제게 쓰러지는 늘씬한 몸을 끌어안으며 선율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수영장에서든 어둠 속에서든 내 몸 다 봤잖아.”
“…….”
“이미 볼 거 다 봐 놓고 내외하는 거야?”
주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달아오른 얼굴을 최대한 숨겼다. 하지만 번쩍 들어 올리는 힘에 반항하지도 못하고 선율에게 고스란히 들켜 버렸다.
“으…… 형!”
발갛게 오른 눈가와 볼에 연신 입을 맞춘 선율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나갈 때도 주하는 발을 땅에 딛지 못했다.
“부끄러워하는 건 천천히 하고, 일단 밥부터 먹자.”
“그게 마음대로 되……. 아니, 일단 좀, 내려 줘.”
주하는 발버둥을 쳐 봤지만, 이미 안정적으로 안겨 있는 터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 더 꿈틀거리자 엉덩이를 받친 손이 톡톡 두들겨 댔다. 부드럽게 다독이는 손길이었다.
결국 주하는 식탁까지 선율에게 안겨서 왔다. 의자에 앉자마자 주하는 지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와중에 밥이라니.”
“네 생각이랑 다르게 몸은 허기져 있을걸.”
그런 소리를 들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정말 허기가 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위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하는 자신의 배를 슬슬 쓰다듬다가 고개를 들었다.
식탁 위에는 콩나물국과 흰 쌀밥, 그리고 각종 반찬이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선율이 어서 먹어 보라며 손짓했다. 주하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느릿느릿 수저를 들었다.
고춧가루를 푼 뜨끈한 콩나물국부터 한술 뜨자 속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술의 여독은 남아 있는 터라 해장으로 딱 맞았다.
“형이 끓였어?”
“그러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사 왔어.”
그러고 보니 형이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라면이랑 토스트뿐이었지, 참. 다이아 수저다운 모습에 주하는 이전의 상황도 잊고 슬쩍 웃었다. 그렇게 잘 먹으면서도 요리하는 취미는 없는 게 그다웠다.
주하는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며 밥을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찼다 싶었을 때,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음식에는 하나도 손을 대지 않은 채 저만 쳐다보고 있는 선율 형이 보였다.
“밥 안 먹어?”
“먹어야지.”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어?”
의아해하며 묻는데, 미묘하게 형의 시선이 비껴 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딜 보는 거지?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려 하자 즐거워하는 음성이 들렸다.
“우리 주하, 수영복 다시 사야겠다.”
눈이 가늘게 접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는 선율이었다. 덩달아 주하의 눈도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의심의 눈초리였다.
“갑자기 수영복은 왜?”
“앞으로 튜닉 슈트만 입어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뭔데?”
“상체까지 가리는 수영복이랄까?”
“상체는 왜…… 어?”
주하는 순간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다급히 고개를 숙이자 얼룩덜룩한 상체가 시야에 잡혔다.
“으악!”
밥이고 뭐고 두 손으로 상체를 가린 주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상황이 꽤 즐거운지 선율은 턱까지 괴며 소리 내 웃고 있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집에 있고, 내일 수영복 사러 가자.”
주하는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수영할 때만이 문제가 아니고 옷을 벗고 입을 때도 문제지 않던가.
“아니! 이거 다 사라질 때까지 수영장은 안…… 갈 거야.”
적어도 흔적은 지워져야지! 멍이 든 것처럼 보였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대부분이 울혈과 잇자국이었다. 쓰릴 정도로 집요하게 해 댔으니 적어도 며칠은 가지 않을까 싶다.
아니, 근데 왜 상의는 안 입혀 놨대. 속옷이랑 바지는 입혀 놓고. 입힐 거면 다 입혀 주지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주하는 가릴 것을 찾으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선율이 나붓한 음성으로 물었다.
“평생 안 가려고?”
엉덩이를 살짝 떼던 주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끼기긱 돌아가는 눈동자가 다정한 가면을 쓴 짐승에게 향했다.
방금…… 뭐라고? 평생?
“계속 달고 있을 건데 적응하는 게 낫지 않을까?”
“…….”
“탈의실에서는 수건 두르면 되니까 괜찮아. 수영도 이제 탄력받았는데 집중적으로 배워야지. 체력도 기를 겸, 겸사겸사.”
“…….”
“그래야 쉽게 안 지치지.”
주하는 등줄기에서 정수리까지 쭉 치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육식동물에게 뒷덜미를 콱 물려 바짝 엎드린 소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 운동시키려는 의도가 너무나 불순했다. 어찌 한순간에 태도가 변해 버린단 말인가.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는 주하에게 선율은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흑진주같이 빛나고 있었다. 약간 맛이 가 보인달까……?
“그러니까 열심히 해 보자, 주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