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만반의 준비로 조금 더 튼튼해진 탱커들이 다시금 선두에 섰다. 첫 번째 보스에게 가는 길엔 총 다섯 무리의 몬스터가 지키고 서 있었는데, 정리하는 데만 20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것도 최소로 잡은 시간이었다.
지금부터는 랭킹이 집계되는 터라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물약을 먹든, 돈을 퍼붓든 무조건 달려야 했다. 그래야만 퍼클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경쟁자들은 한둘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늘어지는 순간 그동안 리프가 쌓아 온 아성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어떤 도전자가 나타나도 출발점은 항상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또 자진신고 같은 팀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확장팩이 나오면서 해산한 공대도 많고, 새로 만들어진 팀도 있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 이번 퍼클이 중요한 거 알고 있지?”
리프는 그런 경쟁 속에서 계속 퍼클을 해 왔다. 하지만 이번 퍼클은 의미가 남다르다. 카젤이 합류한 첫 레이드이지 않던가.
선율은 주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퍼클하면 어떤 기분인지 주하한테 알려 줘야지.”
[공격대] 바나나: ㅋㅋㅋㅋㅋ당연하지!!!
[공격대] Snow: ㅇㅇ 퍼클로 꼬셨는데 제대로 보여 줘야지ㅋㅋ
[공격대] 개인주의: 비즈니스석으로 편안하게 모시겠슴다!! ٩( °ꇴ °)۶
[공격대] 일시불: 이번 퍼클은 카젤 형님께 바치겠습니다! ㅇ.<찡긋
[공격대] 월차연차휴가: 앞으로는 지겨울 거다ㅋㅋ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주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선율과 팀원들의 자신감이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하는 바로 뻘쭘해하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선율이 마이크를 켜고 있는 동안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깜빡했다.
[공격대] 지구침략: 응? 방금 선율이 마이크에서 누구 웃음소리가 들렸는데?
[공격대] 리미티드: 카젤이 웃는 소리네요
[공격대] 바나나: ㅉㅉ 내가 머랬어 같이 있을 거라고 했지?
[공격대] 개인주의: 만나서 같이 하시는구나!!! 저랑 시불이도 같이 하고 있어용! ^0^
[공격대] 월차연차휴가: 나도 리밋이랑 같이 하는 중ㅋㅋ
[공격대] 여름n모기: 다 만나서 하고 있네;; 우리도 피방에 넷이 모임ㅋ;
오늘 결전의 날이라고 다들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끼리 뭉친 것 같았다. 팀원들도 자신이 선율과 같은 동네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이진 않겠지. 주하는 약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격대] Snow: 카젤아 말 좀 해바ㅋㅋ
[공격대] 개인주의: ㅇㅇ 아무 말이라도 해주세옹!
[공격대] 바나나: ㅋㅋㅋㅋ
팀원들의 요청에 주하가 선율이 사용하는 마이크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퍼클 익스프레스 기대해 봅니다.”
[공격대] 지구침략: 그래ㅋㅋㅋ
[공격대] 바나나: 달려 보자!
[공격대] Snow: ㅋㅋㅋㅋㅋㅋㅋ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리프는 전투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냥 중에 딴짓하는 건 이들에게 일상이었다. 예상치 못한 난도였지만, 보스도 아닌 놈들에게 다리가 묶일 일은 없었다. 4년째 레이드 랭킹 1위를 거머쥐고, 클래스 랭킹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한 멤버들이다. 익숙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주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흥분으로 점철된 박동이었다. 마우스를 움켜쥔 손과 키보드를 누르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바야흐로 퍼클을 향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
저녁 7시부터 시작한 레이드는 아침 11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레이드 팀들은 두 번째 보스에서 좌절한 채 해산했고, 지금까지 계속 트라이하는 팀들은 상위권 랭커들뿐이었다.
이번 레이드 보스는 한 놈만 빼고 모두 상당한 난도를 자랑했다. 엄청난 딜량을 요구하는 타임 어택은 기본이고, 최소 생명력을 요구하는 녀석들도 있었는데, 이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이템 레벨도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영웅 던전 아이템을 풀셋으로 맞추고, 강화도 20강은 넘겨야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밸런스 패치를 통해 난도를 조절하겠지만, 지금은 막 나온 따끈따끈한 최상위 레이드였으니 문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아오오!! 진짜!!!!
—으아아아아악!!
—드디어!!!
리프는 보통 레이드를 진행할 때 공대장인 선율이 마이크를 사용하고, 팀원들은 채팅창을 이용했다. 목소리가 겹쳐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공략에 여유가 없을 때만큼은 예외였다. 지금은 팀원 모두가 마이크를 켜고 있었다.
—개빡친다!!
“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짐승형 보스를 본 주하도 화를 내는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거친 한숨을 내뱉었다.
잡힐 듯 말 듯 끈질기게 팀원들을 괴롭힌 건 네 번째 보스였다. 이 녀석한테만 무려 일곱 시간을 꼬라박았다. 억까 패턴에 당한 것만 여러 번에, 처음 보는 기믹도 있었고, 말도 안 되는 타임 어택까지. 힐러와 딜러, 탱커 모두가 한계를 시험당했다. 네 번째 보스가 이 정도면 마지막 보스는 어떨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항상 느끼지만, 개발자 vs 유저 같아.
—맞아요!
바나나의 투덜거림에 개인주의가 격하게 동의했다. 레이드는 대놓고 어디 한번 잡아 봐! 하고 도발하는 게임사와 그딴 건 모르겠고 단숨에 다 잡아 버리겠다! 하는 유저들과의 싸움이었다.
개발자들은 기상천외한 패턴을 집어넣고 유저들은 그것을 파훼한다. 물론 잡으라고 만들었기 때문에 대개 유저들이 승리하지만, 개발자들도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 않았다. 특히 라나탈이 그런 부분에서 조금은 집요하다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레이드는 어려웠고, 어려운 만큼 성취감은 컸다.
주하는 긴장을 풀고 의자에 반쯤 드러누웠다. 공략을 찾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하나의 오차도 없이 딜을 넣기 위해 집중한 시간이 상당했다.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드디어 마지막 보스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금세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며 다시 정신을 차린 주하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러곤 라나탈 홈페이지로 들어가 레이드 랭킹을 확인했다.
[어둠의 군단 Raid Ranking]
•실시간— AM 11:21:01
RK Team Kill Server
1 리프 4 아미레아
2 응꼬에 마요… 3 아미레아
3 TipTip 3 킬레이
4 내가누구냐고물… 3 바스크룸
․
․
.
다행히도 현재 실시간 랭킹 1위는 리프였다. 다른 팀들은 네 번째 보스에서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퍼클에 가장 가까운 팀이 우리라는 게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주하는 뿌듯하게 웃으며 랭킹 페이지를 응시했다.
허나 현재 1위라고 해도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랭킹이 확정되는 순간은 중간 보스가 아닌, 마지막 보스를 잡고 나서였으니까. 아무리 초반에 기선을 잡았다고 해도 막넴에서 삽질한다면 순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을 즐겨야 하는 법. 1위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어?”
갑자기 실시간 랭킹에 변화가 생겼다.
현재 2위인 별똥 길드가 3킬에서 4킬로 바뀐 것이다. 주하는 눈을 깜박이다가 갑자기 들리는 귓속말 알림에 게임 화면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잡아써!!!!!!!!!!
[귓속말] 벌꿀오소리: %^&*%@#$%T%!!!!!!
[귓속말] 벌꿀오소리: 더러운 4넴!!!! 으아아악아아아가가악!
[귓속말] 벌꿀오소리: ㅈㄴ화가난드아아아아!
미친 듯이 발광하며 기뻐하는 벌꿀오소리의 귓말에도 차마 축하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잡은 지 고작 10분밖에 안 지났는데 별똥 길드도 잡았다는 건…….
“……별똥도 4넴 잡았어.”
—뭐라고?!
—뭐야? 진짜??
—망했다!
—으악!!
퍼클을 놓고 별똥 길드와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휴식을 취하던 팀원들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걸 느꼈는지 비명을 질렀다.
선율은 주하의 화면을 힐끔 보더니 팀원들에게 물었다.
“아이템 먹은 사람들 준비 다 했어?”
—지금 강화 이전하고 있어요!
—전 지금 옵션 돌리고 있어요. 왜 필요 능력치 안 나와…….
방어구 능력치 두루마리로 원하는 옵션을 뽑고 있던 리미티드가 조금은 초조하게 말했다.
권투가는 공격력과 크리티컬을 최우선 능력으로 삼는 클래스라 무조건 그 두 가지 옵션을 뽑아야 했다. 거기다 수치도 최저 20에서 최대 50 중 랜덤으로 나와서 높은 수치를 적용해야만 했다. 공격력 30, 크리티컬 35 이런 수치는 허락할 수 없었다. 적어도 두 옵션이 40 이상은 나와야 했다.
—두루마리 남는 사람?
결국 모아 두었던 두루마리를 다 사용하고서도 옵션을 뽑지 못했는지 다급하게 헬프를 외쳤다. 그러자 월차연차휴가가 재빨리 대답했다.
—내가 줄게, 기다려.
아이템을 먹지 못해 던전 안에서 기다리던 월차연차휴가는 곧장 마을로 포탈을 탔다. 지금은 네 거, 내 거 따질 여유 따윈 없었다. 팀원들이 조금이라도 강해져야만 했으니까.
별똥 길드가 쫓아왔다는 걸 알자마자 팀원들은 부랴부랴 움직였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우리 리프~ 엉덩이에 불났늬?
[귓속말] 벌꿀오소리: 마을에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네?? ^^
그 모습을 봤는지 벌꿀오소리의 도발이 날아왔다. 주하는 미간을 한번 찡그리다가 픽 웃었다.
[귓속말] 카젤: 별똥 엉덩이는 안녕하시고?
[귓속말] 벌꿀오소리: 우린 ㅅㅅ만 조심하면 대
[귓속말] 카젤: ㅅㅅ?
[귓속말] 벌꿀오소리: ㅅㅓㅅㅏ
[귓속말] 벌꿀오소리: ㄹ
[귓속말] 카젤: ;;;; 아 진짜;;;; 너까지 물들었냐?;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말고 우리 팀원들이 조심해야 댄다고!!!
[귓속말] 벌꿀오소리: 암튼!!! 서로 잘해 보자???
[귓속말] 카젤: ㅇㅇ
[귓속말] 벌꿀오소리: ㅇㅋ
예상치 못한 경쟁이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자진신고 같은 녀석들이 아닌 별똥 길드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퍼클을 빼앗길 수는 없지. 주하는 정신없는 팀원들을 보다가 선율에게 물었다.
“괜찮겠지?”
초조한 시선과 덤덤한 시선이 마주쳤다. 주하의 걱정과 달리 선율은 이 상황을 곤란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 평정심이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켰다. 주하는 조금 홀가분해져서 슬쩍 웃었다. 그제야 선율이 주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약속 안 지키는 거 봤어?”
“……아니.”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돼.”
주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리미티드는 원하는 옵션을 뽑았는지 월차연차휴가와 던전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다 왔다! 가자, 가자, 가자!
—퍼클하러 가자!
그 어느 때보다 팀원들의 목소리에는 파이팅이 넘쳤다. 열여섯 시간 내내 레이드를 돈 사람들답지 않은 쌩쌩함이었다.
주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보스를 향해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