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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124화 (124/130)

124화

결전이 이루어질 보스 방은 거대한 만찬장이었다. 특이한 점은 식탁이 중앙이 아닌 좌우 외곽에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탁 위에는 칠면조 요리와 같은 바비큐가 가득했고, 와인 잔과 술병도 있었다. 꽤 디테일한 그래픽이라 정말 만찬장에 온 기분이었다.

—보스 이름은 귀공자 아스모덴.

—들고 있는 창끝에 녹색 기포가 올라오는 거 보니까 독 관련 기믹도 나올 것 같은데요.

—독이나 질병 같은 기믹 진짜 싫은데…….

투덜대는 막내들을 뒤로하고 선율은 도핑을 지시했다.

“일단 들이대 봐야지. 도핑들 해.”

—예압!

마지막 보스는 인간과 동물이 합성된 것 같은 외형이었다. 어깨 위에 얼굴만 세 개였는데, 그중 좌우에 있는 두 개의 얼굴은 동물, 중앙에 있는 얼굴은 인간의 형태였다. 아름다운 외양과 다르게 입에선 붉은 연기가 조금씩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의 왕은 자신이라는 듯, 녀석은 한쪽 팔에 섬뜩해 보이는 창을 붙잡곤 거대한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붉은 눈도 내리깔고 있었는데, 굉장히 거만해 보였다.

그게 묘하게 아니꼬웠던 팀원들이 눈을 흘기고 있을 때, 선율은 곧바로 전투를 진행했다.

“들어가자.”

—간다.

지구침략이 거대한 대검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가장 먼저 어그로를 먹고 시선을 돌려 탱킹하는 동안 딜러들의 폭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구침략은 딜러들에게 어그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공격형 물약을 먹은 채였다. 그럼에도 어그로 수치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었다.

—우리 딜러들 딜 많이 좋아졌네.

—오늘 나온 템이 죄다 딜러들 거니까요, 뭐. 흐흐.

중간 보스 네 마리가 떨꾼 에픽 방어구 모두 딜러용 아이템이었다. 그중 두 개는 팀에 없는 클래스 아이템이 나와 버려졌지만, 다행히도 나머지는 해당 딜러들에게 돌아갔다. 원활한 공략을 위해선 역시 딜러들의 스펙업이 최고였다.

아스모덴의 처음 패턴은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정면 회전 베기와 360도 소용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독, 광역 대미지 등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공격을 피하며 아스모덴의 피가 90%가 됐을 때였다.

지구침략이 만찬장 정중앙까지 끌고 왔던 노력이 무색하게 녀석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아스모덴이 창을 앞으로 내민 채 말했다.

<귀공자 아스모덴: 나는 공손한 이들에게 자비롭지.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녀석의 머리 위에 회색의 긴 시전바가 차오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전멸기였다.

—공손한 이들에게 자비로워?

—뭐야, 뭘 해야 해?

—주변에 클릭할 수 있는 거 찾아봐!

아스모덴은 공격도 들어가지 않았고, 차단도 할 수 없는 무적 상태였다. 심지어 그 상태로 시전바는 멈추지 않았다.

주하도 주변에 클릭할 수 있는 오브젝트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마우스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나저나 공손한 이들에게 자비롭다는 건 뭐지?’

오브젝트가 아니라면 어떤 행동을 취하라는 건데……. 혹시 만찬장 의자에 앉으라는 건가? 주하는 일단 생각한 걸 확인하기 위해 식탁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다들 채팅창에 감정 표현 ‘정중’ 써, 빨리.”

선율의 다급한 지시에 채팅창에 /정중을 써서 엔터를 썼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전원이 아스모덴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모션을 취했다. 그 순간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바비큐에서 반짝거리는 이펙트가 생겨났다.

지금껏 배경으로만 알고 있던 단순한 사물이 상호작용할 수 있게 바뀌었다. 그것을 확인한 주하와 팀원들은 잽싸게 식탁으로 달려갔다. 저 요리를 당장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요리를 먹은 건 팀원 중 절반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요리에 손도 대보지 못하고 전멸기에 맞아 죽어 버렸다.

—아악!! 나나 누나가 내 거 먹었어!

—이름 써 붙였냐?! 네 게 어딨어!

바로 눈앞에서 바나나에게 요리를 빼앗긴 개인주의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징징거렸다. 그 모습을 본 주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요리 하나당 한 명만 되네.”

—먹으면 사라지는 듯?

다섯 명이 살아남았지만, 탱커 두 명이 모두 죽은 터라 의미 없는 생존이었다. 다시 의자에서 일어난 아스모덴은 유유히 남은 유저들을 죽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영혼으로 뛰어와 재정비하는 동안 주하는 선율에게 물었다.

“그런데 감정 표현으로 ‘정중’ 써야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른 팀원들도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선율이 별것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보통 공손하다는 건 허리를 숙이는 거니까 혹시나 했지. 그리고 보스 콘셉트가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아서.”

“그게 뭔데?”

“악마 중에 비슷한 녀석이 있어. 아스모데우스라고 얼굴 세 개 달린 악마. 사람이 공손히 부탁하면 고기를 준다고 하는데, 저 녀석이랑 비슷해 보이지?”

—……넌 그런 걸 왜 알고 있냐?

바나나가 어이없어하며 묻자 선율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이번 확장팩 콘셉트가 악마라서 전에 한번 찾아봤어. 대충 비슷한 게 하나쯤은 나올 것 같아서.”

—무서운 자식…….

—여윽시 우리 대장님!

선율의 치밀한 준비에 팀원들은 경탄했다. 몇몇은 이보다 더 게임에 진심인 녀석은 있을 수 없다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옆에 앉아 있는 주하였다.

그는 한때 게임이 장난이냐고 물었던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엄청난 실례를 저질렀단 걸 새삼 깨달았다.

역시 썩은물 중의 썩은물, 라나탈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유저. 선율 형은, 아니, 멜로디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었다.

“준비 다 했으면 다시 출발.”

멍하니 선율을 보던 주하는 부랴부랴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퍼클을 향한 열망은 우리 중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 주하는 그제야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왜인지 웃음을 멈출 수 없어 어깨를 들썩이자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주하는 일부러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웃음을 멈췄다. 그러자 선율이 주하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내리곤 픽 웃었다. 봐준다는 느낌이 강한, 그런 제스처였다. 간질거리는 기분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다시 시작된 보스 공략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아스모덴의 전멸기를 가볍게 넘기고 일반 패턴을 피하며 계속 공략을 이어 갔다. 피가 어느 정도 빠지자 슬슬 다음 기믹이 나올 때가 됐다며 팀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곧 나올 거야.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네.

—어떤 게 나올…… 어?? 잠깐! 으악! 안 돼!!

그때, 별안간 일시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당혹스러워하는 그와 마찬가지로 주하도 경악했다.

“정신 지배!”

일시불과 카젤의 캐릭터가 붉게 물들며 덩치가 두 배로 커졌다. 문제는 유저들이 캐릭터를 전혀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스모덴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 두 딜러는 팀원들을 신나게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아! 아파!

—시불이 이 녀석! 왜 이렇게 아파?

—야야!! 메즈! 메즈부터 해 봐!

—미친! 카젤이 한 방에 반 피 닳았어!

일시불과 카젤의 캐릭터는 쿨타임이 돌아오는 스킬들을 빠짐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팀원들의 피가 한 방에 반이 닳을 정도는 아닐 텐데? 의아함에 화면을 보자 못 보던 버프 하나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주하는 마우스를 움직여 버프를 확인했다. 툴 팁과 함께 설명이 떠올랐다.

[정신 지배: 아스모덴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 공격력과 공격 속도 200% 상승.]

이러니 아플 수밖에. 주하는 떨떠름하게 화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지금 공격력과 공속 200% 증가됐어요. 지배 걸린 사람은 두 배로 강해지는 거 같은데요.”

—아오씨! 어쩐지!

—겁나 아파.

—이거 메즈도 안 되는데? 아무것도 안 먹혀!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정신 지배는 30초간 유지되는데, 어떤 걸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메즈도 안 되고, CC기도 안 되고. 무작위로 공격당하는 동안 그것을 커버해야 하는 건 오롯이 힐러의 몫이었다.

—차라리 월차가 걸려야 했는데. 카젤이 너무 아파.

—헐…… 눈 누나! 너무하잖아!

현재 딜러 중 최약체로 꼽히는 게 월차연차휴가였다. 그는 무기가 없어서 딜 미터기의 바닥을 장식하는 잔디가 된 상태였다. 팩트 폭격을 당한 리프의 마법사가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팀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맞는 말이지 뭐.

—다음 정배는 월차 형이 걸리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힐러를 위해 희생해라, 마법사여.

—하…….

월차연차휴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팀원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떠들썩한 딜러들과 다르게 힐러들은 정신이 없었다. 주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화면보다는, 선율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무섭도록 집중한 손이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달각거리며 눌리는 마우스의 소리도 메트로놈 200BPM과 닮아 있었다. 이 위로 선율이 흐른다면 격정적인 음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하는 제 상상력에 속으로 웃고 말았다.

게임 화면을 보자 팀원들의 피는 정신없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시선을 떼면 누군가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껏 살리고 있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으아아악! 너무 아파!

“모기, 개주한테 가로막기.”

—오케이.

하필이면 크리티컬이 터졌는지 개인주의의 피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었다. 그 상태로 한 대만 더 맞으면 죽을 듯이 보여서 선율은 탱커의 생존기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개인주의에게 카젤의 공격이 들어간 순간, 대미지를 대신 맞아 주는 ‘가로막기’가 빛을 발했다. 여름n모기에게 들어간 대미지가 탱커조차도 아플 정도의 크리티컬 대미지였던 것이다.

—오메! 나이스 타이밍! 으헉헉!

—와, 가로막기 없었으면 개주 죽었을 뻔?

—감사합니다, 대장님! 충성, 충성!

—어으…… 섬뜩하다.

“몇 초 남았어?”

—3초 남았습니다.

정신 지배는 30초였지만,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윽고 끝이 다가왔다. 정신 지배를 당했던 일시불과 카젤 캐릭터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명 피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 정배당하는 동안 내 스킬 쿨타임 돌아온 거 다 썼네.

“다음부터는 정배 시간 맞춰서 스킬 쿨타임 돌려야 할 것 같아. 아니면 딜 컷 한다든지. 진짜 잘못하면 팀원들 다 죽이겠다.”

—그것도 그런데, 제발 카젤이가 안 걸리길 바라야지…….

카젤의 현재 무기 강화는 27강이었다. 하필 맞았을 때 아파도 가장 아픈 사람이 정배에 걸리니 힐러들의 부담이 상당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주하는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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