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127화 (127/130)

127화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독창이 쏟아지면서 이동 전환 화살표가 떴다.

—허억! 여기서 이게 나온다고?

—와씨…… 피가 없으니까 괜히 더 쫄리네?

팀원들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창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처음에 적응해 둔 터라 여러 번 반전이 돼도 죽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팀원들의 피를 20%로 유지하며 이동해야 하는 멜로디였지만, 다행히도 그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별것 없이 지나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월차연차휴가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나 정배! 정신 지배당했어!

—허헐?

여전히 하늘에서는 독창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정신 지배에 걸린 월차연차휴가가 팀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건 좀 아닌데?

“스노우, 월차한테 공격받는 대상자에게도 힐 해.”

—으어…… 알겠어.

“딜러들은 메즈나 CC기 되는지 봐 봐.”

“내가 방금 해 봤는데 안 돼.”

주하가 이미 메즈를 걸어 봤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CC기도 마찬가지로 면역만 뜰 뿐이었다.

—근데 월차야, 독창은? 맞아도 되나?

—정신 지배당해서 대미지는 안 들어와. 근데 이거 똑같이 30초 유지네? 강화 버프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그것까지 있었으면 못 버티지.

패턴이 중첩돼서 나오긴 했지만, 단일로 나올 때와는 다르게 그나마 약해졌다. 독창도 광범위하게 쏟아지는 게 아니라 듬성듬성 뿌려져 피할 공간이 있었다. 딜러는 다행이라며 조금은 안도했지만, 힐러들은 아니었다.

—이동 반전 상대로 바닥도 피하고! 탱커도 힐하고! 정배 대상자도 힐하고! 힐러를 죽여라, 그냥!

—워워, 눈 누나 릴렉스.

—릴렉스하게 생겼냐? 개주 네가 힐 할래?

—아뇨…… 죄송합니다.

구석에 찌그러진 딜러, 개인주의는 조용히 독창만 피하며 딜에 집중했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딜하는 상태에서 힐러들의 어그로를 끌어오는 건 죽여 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바짝 기어야 할 때였다.

—월차가 걸려서 그나마 다행인데 나중에 카젤이나 리밋이가 걸리면 무서울 것 같지 않아?

—으…… 상상도 하기 싫은데.

탱커와 월차연차휴가에게 맞고 있는 팀원들을 가까스로 살리고 있던 Snow가 끔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선율이 중간중간 보조를 해 주고 있긴 하지만, 파티 전체 힐을 관리하는 상태여서 제약이 많았다.

그렇게 한 시간 같은 30초가 지나고, 월차연차휴가가 정신 지배에서 풀리자 Snow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잘했어, 눈아.

바나나의 칭찬에 Snow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고비를 겨우 넘기고 보니 생각보다 마나 소비가 많았다. 절반쯤 차 있어야 할 마나가 30%로 줄어 있었다. Snow는 마나 물약을 들이켜고 다시 지구침략에게 힐을 퍼부으며 독창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스모덴이 광역 마나번39)을 사용했다. 꼼짝없이 방금 채운 마나를 빼앗긴 Snow는 속이 쓰렸다.

—아…… 마나번까지 쓰네.

—아오, 내 마나.

“딱 절반 가져가네요.”

힐러뿐만 아니라 마나를 사용하는 월차연차휴가와 바나나, 카젤까지 모두 마나가 반 토막 났다. 공격과 힐에 영향을 주는 자원까지 강탈당하다니. 페널티가 상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였다.

—어? 뭐야? 유령 나왔어!

—흐억! 독창이 계속 떨어지는데 유령까지?

유령은 이번에도 전원에게 쇠사슬을 걸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독창이 떨어지고, 이동기는 반전에, 유령까지 나와서 끌고 가니 팀원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기믹은 아직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악! 외곽에서 창도 똑같이 날아오는데?

—허. 뭐야, 이거.

눈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기믹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는 20% 아래에서 출렁거리는데 죄다 피해야 하는 것들이니 정신이 혼몽할 지경이었다.

그때,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바나나가 중얼거렸다.

—설마…… 지금까지 나온 기믹 총집합, 뭐 그런 건가?

—나나 누나? 그런 무서운 소리를 막 하시며언?? 으억?

말이 씨가 된다고 개인주의가 기겁하며 몸을 피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스모덴의 어깨 양옆에서 두 마리의 마귀가 튀어나왔다. 팀원들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말도 안 돼.

—허, 허허, 허허허허허.

기믹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포탈에 들어가서 깼던 검은 수정과 힐로 피를 채웠던 하얀 수정도 나타났다. 체력은 전과 달리 절반이 줄어 있었지만, 타임 어택은 여전히 존재했다.

“검은 수정부터 공격해.”

선율의 지시에 딜러들은 유령을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곧장 검은 수정에 달라붙었다. 우선순위는 누가 뭐래도 수정이었다. 시간이 다 돼서 터지기 전에 잡아야 했다. 그건 힐러도 마찬가지였다.

“스노우도 수정 힐하고. 내가 파티원 보고 있을 테니까.”

—어, 어. 알았어.

힐 분배를 다시 한 선율은 파티원들의 피를 10%로 유지하고 탱커인 지구침략까지 케어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누구 하나는 죽어 나갈 모양새였다.

그런데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우와…… 나 정배당했다아.

한번 끝났던 정신 지배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대상은 일시불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팀원들을 공격하는 일시불은 반 포기 상태로 영혼 없이 웃었다.

—어, 월차 형님 내가 죽였네?

—하…….

남아 있는 피는 고작 10%였으니 한 방만 맞아도 그대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

선율은 콧잔등까지 찡그리며 일시불의 공격 대상도 같이 힐하기 시작했다. 월차연차휴가가 죽은 게 퍽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마귀 디버프 나왔어요.

결국 검은색 마귀와 파란색 마귀의 디버프도 생겨났다. 팀원들은 도무지 이 모든 기믹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월차연차휴가도 죽어 버렸고, 그다음 타깃도 생존이 간당간당했다. 수정을 제시간에 잡기란 불가능했다. 거기다 디버프를 확인하며 정면을 보거나 춤을 출 여력도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몰아닥친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다.

—…….

—…….

보이스 채팅창에 침묵이 흘렀다. 살아 있던 이들도 한두 명씩 눕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수정이 터지면서 모두 죽어 버렸다.

주하는 회색 화면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라나탈은 라나탈이었다. 보스를 쉽게 만들 리가 없지.

아스모덴의 진정한 공략은 이제부터였다. 그렇게 열심히 딜을 넣었는데도 부족한 걸 보면, 한 명이라도 죽으면 절대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딜이든 힐이든 무빙이든. 지금껏 그랬지만, 마지막 보스는 더 높은 수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우르르 나올 수 있지?

다 알고 있는 공략이더라도 그걸 한 번에 맞닥뜨렸을 때는 저조차도 정신이 아찔했다. 주하는 슬쩍 선율을 보았다. 그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직면한 것처럼.

보이스 채팅에서는 여전히 침묵이 유지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공략을 위해 고민하고, 누군가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주하에게 귓속말이 들어왔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카젤아... 혹시 리프도 30% 넘겼냐?

[귓속말] 카젤: ?? 설마 너희도?

[귓속말] 벌꿀오소리: ㅇㅇ 초반 기믹은 쉬웠잖아

[귓속말] 카젤: 마귀 기믹은 빨리 찾기 어려웠을 텐데?;;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 아~ 그거

[귓속말] 벌꿀오소리: 이 누나가 한 방에 알아냈다는 거 아니냐ㅋㅋㅋㅋㅋ 리프 정모가 내게 영감을 줬지

[귓속말] 카젤: ......

주하는 모임에서 막내들이랑 열심히 놀았던 벌꿀오소리를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보나 마나 개인주의와 일시불이 대화하면서 이것저것 정보를 흘렸을 게 뻔했다. 그걸 기억하고 사용한 벌꿀오소리도 대단하긴 하지만.

[귓속말] 벌꿀오소리: 근데 30% 이거 미친 거 아냐?

[귓속말] 카젤: ...첫트했냐?

[귓속말] 벌꿀오소리: ㅇㅇ 짐 다들 정신 나가 있음

[귓속말] 카젤: ㅋㅋ 쉽지 않을 것 같지?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 ㅇㅇ

[귓속말] 벌꿀오소리: 근데 나 하면서 갑자기 생각났는데... 자진신고였으면 아마 욕하고 G랄하지 않았을까? ㅋㅋㅋㅋ

[귓속말] 카젤: ㅋㅋㅋㅋ 100%

[귓속말] 벌꿀오소리: 거기다 온별은 남 탓 하고 있었겠지

[귓속말] 카젤: ㅇㅇ

[귓속말] 벌꿀오소리: 그 진상짓 안 봐서 속이 시언하군ㅋㅋㅋ

[귓속말] 카젤: ㅋㅋㅋㅋㅋ 그렇게 싫었냐구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개싫었음

지금과 같은 상황일 때 자진신고 녀석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훤했다. 벌꿀오소리가 말한 것처럼 욕하고, 남 탓 하고, 짜증만 잔뜩 부리고 있었겠지. 이렇게 조용한 게 어쩐지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주하는 고개를 잘게 저었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그나저나 30%부터 진짜 트라이 같지 않아?

[귓속말] 카젤: ㅇㅇ 1페이즈는 이때를 위한 빌드업이었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근데 갑자기 또 웃기넼ㅋㅋㅋㅋㅋ

[귓속말] 카젤: ??? 뭐가;;

[귓속말] 벌꿀오소리: 너나 나나 둘 다 공략에 대해선 입도 뻥끗 안 하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자낰ㅋㅋㅋ

[귓속말] 카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벌꿀오소리: 역시 적은 적이군!

39) ‘마나를 태운다’다는 뜻으로, 적의 마나를 없애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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