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130화 (완결) (130/130)

130화

“7% 남았어요.”

보스 피를 가장 많이 뺐을 때가 5%였다. 문제는 그 5%를 여러 번 봤다는 거였다. 가히 마의 구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수치에 근접해 가자 주하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더.

여기까지 왔으면 슬슬 잡혀야 할 때 아닌가?

괜히 초조해지니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정말 몸의 세포가 각성이라도 했는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보이기 시작했다.

크게 확장된 동공에 화면이 가득 들어왔다.

“월차 형, 뒤돌아요.”

—아! 맞다. 미안.

주하의 지적에 기믹을 놓치고 있던 월차연차휴가가 곧장 뒤를 돌았다. 그와 동시에 번쩍하고 마귀의 눈이 빛났다. 아슬아슬하게 피했다는 것을 깨달은 월차연차휴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다. 정신 차릴게.

—5%다! 다들 집중!!

드디어 5% 구간에 들어섰다. 이쯤 되면 힐러나 딜러나 마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소진했어야 할 마나를 쥐어짜고 아끼고 채우며 부득부득 끌어왔다.

“모기, 생존기 써.”

—썼어!

4%.

아스모덴의 피가 1% 더 깎이자 오히려 보이스 채팅방이 조용해졌다.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소리, 그리고 선율의 지시만 흘러나왔다.

3%.

피가 조금 더 깎였을 때였다. 주하에게 벌꿀오소리의 귓속말이 날아왔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아오씨!!!! 5%!!!!!!!!!

[귓속말] 벌꿀오소리: [email protected]#*)&_*^%^&*

[귓속말] 벌꿀오소리: 우리 이번에 잡는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퍼클 우리 거야!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벌꿀오소리의 대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평소였다면 저 말에 흔들렸을 텐데,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2%.

—가자! 가자! 가자!!!

—어? 지금 수정 나왔는데? 어떡해?

“수정 패스하고 보스만 극딜해.”

—크윽! 배수진이다! 우리는 지금 뒤가 없다고!

선율의 지시에 수정을 포기하고 딜러들은 전원 아스모덴을 공격했다. 카운트가 떨어지는 시계 초침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째깍, 째깍.

그런데 그때,

—으악? 나 정배당했어!

붉게 변한 바나나가 갑자기 광역 공포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바나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헐? 여기서 광역 공포?

—나나야! 공포 안 빼놨어?

—미친! 쿨이 언제 돌아온 거야?

—저거 당하면 우리 무조건 죽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독창과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광역 대미지. 공포에 걸려 우왕좌왕 뛰어다닌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나자빠질 상황이었다.

정신 지배에 걸린 사람은 CC기도, 메즈도, 차단도 먹히지 않아 바나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캐스팅이 끝나고 광역 공포가 시전된 순간이었다.

<대정령 소환!>

멜로디에게서 화려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거대한 새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황금빛 오라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동시에 단단한 보호막이 팀원들을 감쌌다.

[대정령 소환: 보호막이 유지되는 동안 모든 마법, 물리 공격에 피해를 받지 않는다. 또한 이동이나 행동에 제약받지 않는다.]

멜로디의 궁극기 스킬, 대정령 소환이 바나나의 광역 공포를 막아 냈다.

—대자아아앙!!

—대장니이이임!!!

—으아아아아!!

—극딜해!!!

1%.

주하는 화면에 빨려 들어가듯 몸을 잔뜩 앞으로 기울였다. 손이 축축하게 젖었지만, 그걸 느낄 새가 없었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이제는 힐러인 멜로디와 Snow까지 딜에 합류했다. 무적기를 두른 리프는 기믹을 무시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공격을 감행했다. 정신 지배에 걸려 있는 바나나만이 팀원들에게 의미 없는 공격을 쏟아 낼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미레아 서버의 ‘리프’ 길드가 ‘어둠의 군단’을 전 서버 최초로 막아 냈습니다!>

귀공자 아스모덴이 쓰러지자 모든 서버에 시스템 알람으로 클리어 안내가 떠올랐다.

—미친!!!!

—퍼크으으을!!!!

—퍼클이다아아아아!!!!

—퍼클!!!!

—지켜 냈다아아!!!

—이게 리프지!!! 으하하하하!!!!

보이스 채팅방에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팀원들이 꽥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정작 주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서 있기만 했다. 숨을 쉬는 걸 잊은 사람처럼 멈춰 있는 모습이 마치 인형 같았다. 경악으로 물든 눈동자만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맛본 퍼클의 맛.

이런 기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치 조각난 세상이 하나로 뭉쳐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렁거림이 발끝에서부터 갑자기 확 치고 올라왔다.

주하는 그제야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크게 부푼 흉곽이 빠르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카젤아!!! 어떠냐, 퍼클한 기분이!!

—카젤 형!!! 우리 약속 지켰어요!

—형님! 이 퍼클을 형님께 바칩니다!

—카젤아, 퍼클 축하해!

팀원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이제야 들렸다. 정신이 어디론가 멀리 떠났다가 급하게 돌아온 것만 같았다. 주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 쳤어.”

—저희가 원래 좀 미치긴 했죠!

—라나탈에 이 정도는 미쳐야 퍼클이 가능하다!

—카젤이 반응 개웃겨!

왁자지껄하게 웃는 팀원들을 뒤로하고 주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부드럽게 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선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주하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형!”

선율을 와락 끌어안은 주하는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어린아이처럼 마구 쏟아 내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쓴 ‘대정령 소환’ 미쳤어, 진짜! 보호막 생기자마자 소름이 쫙 돋았다고! 꼼짝없이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 정말! 어떻게 그 타이밍에 그렇게 쓸 수 있지? 형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겁나 멋있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잔뜩 흥분한 주하는 결국 선율의 얼굴을 붙잡고 여기저기에 마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마와 볼, 눈꺼풀과 콧잔등, 마지막에는 입술까지.

쪽쪽거리는 소리에 놀란 팀원들이 조용해질 무렵에도 주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선율이 그런 주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얌전히 제게 쏟아지는 애정을 받았다. 물론 보이스 채팅방의 존재는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우, 우와…… 카젤 형, 흥분하면 저렇게 변하는구나.

—대체 얼마나 좋았으면 멜로디한테 ……뽀뽀까지 하냐.

—그, 왜. 축구 선수들도 골 넣고 세리머니로 자주 하잖아요. 그런 거겠죠, 뭐.

—어디서 외국물이라도 먹고 왔나?

—딱 봐도 흥분했잖아요.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걸요?

—우리 대화도 안 들린다에 만골 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팀원들은 그런 주하의 행동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겼다. 나중에 정신 차리면 땅 파고 들어갈 거라며, 그땐 자신들이 열심히 묻어 주겠노라며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하가 미쳤다고 한 게 우리 퍼클 이야기가 아니라 대장님 이야기였어?

—그럴 만도 해. 바나나가 싼 똥을 길마가 치웠으니.

—아씨…… 미안하다고…….

—누나! 그건 미안해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닌데요!

—퍼클 못 했으면 카젤의 저런 모습도 못 봤겠네…….

—아! 미안하다니까?

—카젤 형님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야!! 1절만 해!

흥분해서 팀원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주하와 달리 선율은 귀를 열고 있었다. 분위기를 망치는 대화에 주하가 정신을 차릴까 싶어 몰래 마이크와 스피커를 껐다. 드디어 둘만 남게 되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선율은 얼굴까지 잔뜩 달아오른 주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좋아?”

“어! 당연하지! 퍼클이잖아! 그것도 형이 마지막에 캐리한!”

“바나나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데, 볼 수가 있어야지.”

“미쳤어, 진짜! 으으…… 너무 좋아!”

“지금 좋다고 한 건 나한테 하는 말인가?”

“응, 예뻐 죽겠어.”

또다시 선율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던 주하는 입술로 은근슬쩍 유도하는 그의 움직임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선율에게 삼켜져 버렸다. 순식간에 진한 키스로 넘어가게 되자 소리가 다른 온도로 바뀌었다.

주변의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두 사람 뒤로, 주하의 화면에서 핑크색 글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귓속말을 상징하는 그 색의 주인은 벌꿀오소리였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

[귓속말] 벌꿀오소리: 하...

[귓속말] 벌꿀오소리: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귓속말] 벌꿀오소리: 아니... 이게... 이렇게... 된다고?

[귓속말] 벌꿀오소리: 왜, 나만! 만년 2등이야!

[귓속말] 벌꿀오소리: 악!!!!!!!!!

[귓속말] 벌꿀오소리: 내 퍼크으으으으을ㅠㅠㅠㅠ

[귓속말] 벌꿀오소리: 야! 카젤!

[귓속말] 벌꿀오소리: ...카젤아?

[귓속말] 벌꿀오소리: 똑똑?

[귓속말] 벌꿀오소리: 여보세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

[귓속말] 벌꿀오소리: ...얘 어디 갔어?

[귓속말] 벌꿀오소리: 야!!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벌꿀오소리의 아픔이 두 배가 되었지만, 주하가 알게 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당장은 퍼클을 달성했다는 흥분과 연인과의 키스가 더 중요했으니까 말이다.

리프는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며 당당하게 1위를 지켜 냈고, 주하는 그토록 원하던 퍼클을 달성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결말을 맞이했다.

물론, 19금 같은 키스와 함께.

<끝.>

#################################공금##############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