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18)

1.

  

  여지운은 올해 서른둘이었다. 남자나 여자나 서른 전후로 많은 걸 느낀다고 했던가. 학생 때는 멀게 느껴졌는데, 막상 서른이 되어 보니 여러 가지 의미로 완성형이었다. 사회적 위치나 금전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여유는 자신감을 키우고 자존감을 피워냈다. 물론 나이를 먹음에 따라 특유의 풋풋함이나 상큼함은 점차 사라졌지만, 여지운은 애초에 그런 느낌의 남자가 아니었다. 아주 얇은 속 쌍꺼풀과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는 날카로웠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비스듬히 웃는 얼굴엔 자신과 자만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그를 보는 사람은 보통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싸가지 없다, 거만하다. 혹은, 섹시하고 매력 있다. 

  건축설계회사 ㈜해담의 디자인 3팀 소속으로 입사 5년 차에 팀장 직함을 달 만큼 능력 있었다. 아직은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하진 않지만, 미남 디자이너 같은 타이틀을 달고 관련 잡지에 몇 번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집은 비싼 땅덩어리 위에 지어진 신축 아파트였다. 물론 은행 지분이 더 많긴 했지만, 일단 소유자는 여지운이 맞았다. 끌고 다니는 차 역시 매끈한 곡선을 그리는 값비싼 외제 차였다. 

  매끈한 도로 위를 신나게 질주하는 아름다운 인생. 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런 여지운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그다지 유하지 못한,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싸가지 없는 성격이었다. 사실 초, 중학교 시절엔 전교에서 늘 상위권을 유지하는 얌전한 모범생이었으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180도 달라졌다. 아예 사람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급격한 변화로 본인 꼴리는 대로 살았다. 어찌나 자기중심적이고 거만한지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아주 좋게 말하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포장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지운은 본인의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이대로도 인기가 많은데 굳이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까? 당당함과 자신감 그리고 잘생긴 얼굴은 그의 단점을 가려주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는 성적 취향으로 여지운은 게이였다. 정확히는 여자 경험이 있는 게이. 뭘 몰랐을 때는 여자와 뒹굴었으나 성 정체성을 자각한 후 부터는 남자와의 섹스만 즐겼다. 

  그는 타인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했다. 본인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설사 그게 연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돌려 말하는 사람보다 솔직한 사람을 좋아했고, 진지한 관계보다 가볍고 얕은 것을 선호했다.    

  여지운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젊고 돈도 잘 버는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그마저도 매력으로 여겨졌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가득했다. 

  본인의 얼굴을 믿고 활용하는 것과 달리 상대 외모는 그렇게 따지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얼굴보다 다른 것을 봤고, 사실대로 말하면 남의 낯짝 따위는 상관없다고 할까? 그런 성향이 두드러진 것은 원나잇 혹은 섹스 파트너를 만날 때로 얼굴보다 몸매, 혹은 속궁합을 중요시했다. 얼굴 뜯어 먹고살 것도 아니고 속 맛만 좋으면 되지 뭘.

  

  * * *

  

  들이 마시는 공기에도 가을이 묻어나오기 시작하는 계절,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쓸쓸하고 쌀쌀했다. 옷깃에 묻은 물방울을 손끝으로 털어봤지만 이미 스며든 후였다.

  “비오니까 춥네.” 

  금요일 특유의 들뜬 분위기는 떨어지는 비와 함께 잦아들었다. 바닥에 고이는 물웅덩이는 제법 운치 있었지만, 감수성과는 동떨어진 남자에게는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회사에서 새 프로젝트가 시작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한동안 바빴다. 다행히 건축주와 의뢰주가 같아 인터뷰 따는 건 쉬웠지만, 워낙 까다로운 사람이라 콘셉트 정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원래라면 지금도 사무실에서 야근해야 했지만, 금요일인 오늘까지 그러면 정말 책상을 뒤집어엎을 것 같아 급히 나왔다.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단골 가게 문을 열며 우산을 오므리자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바닥으로 흘러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바bar [건즈앤로즈]

  90년대 초중반 선풍적 인기를 끈 미국 록그룹 이름이 떠오르는 이곳은 근방 중 가장 큰 게이  클럽이었다. 오죽하며 이곳에 없는 게이는 다른 가게도 없다는 소리가 나올까. 손님 관리도 철저한 편이고, 무엇보다 바텐더들이 잘생겨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지운은 항상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를 둘러싼 소문은 빨갛고 노랗고 새까맸다. 그와의 섹스를 원하며 추파를 던지거나 질투와 시기 섞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 그리고 여지운에게 상처받고 저주 섞인 분을 쏟아내는 옛 애인 등 다양했다. 호도, 불호도 관심의 발로였고 인기의 척도였다. 그를 둘러싼 소문들. 진실과 거짓, 가십이 뒤섞인 말들은 여지운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여지운씨, 오랜만에 보네요.”

  “잘 지냈어요? 백선우씨?”

  평소엔 여지운이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시선들이 꽂혔다. 그의 소문을 듣고 한번 엮여 보려는 이들 중 선택하면 되는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마른 모래 같은 시선들이 잠시 스치고 말았다.  

  뭐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으면서 괜히 턱 끝을 쓸어봤다. 어제오늘 면도를 못한 탓에 짧게 돋아난 털이 손바닥 사이에서 빳빳하게 섰다. 깔끔한 맛은 좀 덜해도 날 선 분위기는 좀 더 짙어졌을 텐데. 옷도 고가의 코트였고, 머리 스타일도 괜찮다. 여지운은 여전히 잘났으며 잘생겼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 다리를 꼬았다. 꽤 오래전부터 안면을 익힌 바텐더 백선우가 아는 척을 했다. 

  “한 3주 만에 보는 건가요?”

  “정확히는 19일 만입니다. 새 프로젝트가 시작 돼 더 바빠지기 전에 큰 맘 먹고 들렀는데.”

  애써 태연한 척 말하는 여지운을 보며 백선우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백선우는 중학교 때 처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는 형의 바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후 여러 곳을 거치다 이곳에 정착한 지 6년이 지났다. 눈치가 없을 순 없었다. 

  “오늘 좀 어수선하죠?”

  “뭐……. 무슨 일 있나 봐요? 아, 병맥주로 주세요.”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 표면에는 찬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빛은 퍽 예뻤지만 금세 떨어져 내렸다.

  “뉴 페이스가 왔거든요, 근데 그게 보기 드문 미남이라 다들 들떠서 저러는 거지, 사람들 표정 좀 봐요. 엄청 솔직하죠?” 

  “아아, 그렇군요. 새로운 사람이라……. 혹시 성향이?”

  이쪽 세계는 그리 넓지 않아 한 다리만 건너도 거의 아는 사이였다. 따로 친분은 없어도 오다가다 만나며 얼굴을 익혀 간단한 신상은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 금방 소문이 났다. 특히 그 남자가 아주 괜찮다면 더더욱.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은 높은 확률로 초짜를 의미했고. 동정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놈들이 꽤 있거든. 물론 자신은 동정은 사절이었다.

  “왜요? 경쟁자가 될까 봐 신경 쓰여요?”

  “내가요? 아니요, 전혀.” 

  섹스하려면 넣는 쪽과 박히는 쪽이 있기 마련인데 여지운은 넣는 쪽, 즉 탑 성향이었다. 요즘 핫트렌드라는 영앤리치, 빅앤핸섬에 부합하는 여지운을 무시할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남자라는 뜻인데 혹시 바텀이면 한 번 건드려 볼 만하고.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화장실 갔나?”

  고개를 쭉 백선우가 주위를 살폈고 여지운은 관심 없는 척 맥주를 들이켰다. 부드럽고 싸한 느낌 뒤로 깔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의 성향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곧장 답을 얻었다. 

  “말 안 해도 알겠네요.”

  바텀 성향 남자들의 낯짝이 노골적으로 환해진 걸 보니 아마도 탑인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송전탑이겠지. 자신은 그런 철물 쪼가리 같은 게 아니라 번쩍번쩍 빛나는 번개 그 자체였다. 

  짧게 찾아왔던 위기감은 맥주병 표면을 따고 흐르는 물방울처럼 흩어졌다. 어떤 남자가 나타나도 자신보다 잘나진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여지운의 전신을 채웠다. 

  비도 오고 기분도 척척한데 오늘은 한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고 폭신한 애와 뒹굴어야겠다. 땀이 후두둑 떨어질 정도로 격렬한 섹스 후 담배 한 대를 물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아무나 데리고 빨리 나가자. 어느새 3병째인 맥주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드니 백선우가 눈짓을 했다. 그 안에 담긴 호기심과 흥미는 적나라했다. 대부분 사람 좋은 척 웃는 남자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건 흔치 않았으니까. 여지운의 시선이 백선우를 따라 이어졌다. 

  “…….”

  사람을 판단하는 데 3초가 걸리고, 그 첫인상을 바꾸는 데는 3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 첫인상을 판단하는 요소는 아주 높은 확률로 외모가 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취향에 따라 세세한 판단은 다르겠지만 그 취향마저도 모두 녹여 낼 수 있을 정도의 얼굴이라면? 

  “굉장히 잘생겼죠?”

  백선우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지금 여지운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순간의 정적과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가 뭉개진 것 같은 미묘한 공기 속,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저 남자가 그동안 지운씨가 없었던 동안 등장한 왕자님이십니다.”

  왕자님이라는 유치한 단어 안에는 일회용 흥미와 싸구려 자극이 가득했다. 여지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한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여지운은 맥주 주둥이에서 손을 떼지도 못하고 왕자님이라는 남자를 보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듯 손끝에 묻은 물방울들을 털어내는 남자는 상당한 장신이었다. 평균보다 훌쩍 큰 여지운보다 손가락 한 마디가 더 큰 듯했다. 어두운 조명 덕분에 뚜렷하게 드러난 윤곽은 상당히 부드럽고 단단했으며 널따란 어깨와 늘씬한 팔, 다리는 균형 잡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굉장히 상당히 잘……생겼다. 잘생겼다. 

  “음?”

  방금 언뜻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트 바지에 감싸인 다리가 유연하게 움직였다. 구두 앞 코가 반들반들 빛나며 바닥에 닿았다. 

  뚜벅 뚜벅. 이 시끄러운 클럽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리다니. 대체 얼마나 조용하면 그러할까. 남자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은 장미 가시처럼 따갑고 뾰족했으며 흥분이 가득했다. 노골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할 텐데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노란 빛이 남자의 머리 위에 쏟아져 빛 테두리를 만들며 내려앉았다. 왜,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등장할 때 번쩍이는 후광 같은 거. 쏟아지는 시선을 가르며 남자의 다리는 계속 움직였다. 뚜벅, 뚜벅, 뚜벅. 어쩐지 가까워지는 것 같은 것도 착각인가? 

  “이쪽으로 오네요.”

  백선우의 중얼거림에 여지운이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정말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느새 속눈썹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이곳에 앉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 자리 주인인지는 모르겠다. 여지운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반쯤 마시다 만 잔이 놓여 있긴 한데 색깔이나 뽀글뽀글 올라오는 거품을 보니 술은 아니었다. 그럼 수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저 남자가 탄산음료를 마셨다는 소리인데……. 

  “레미마틴 루이13세 한 잔 주십시오.”

  여지운의 상념을 깬 것은 귓가를 때리는 ‘레미마틴’이라는 단어였다. 순간 놀랐던 마음은 곧 비웃음이 되어 입술 끝에 맺혔다. 

  루이13세? 한 병에 기백이 넘는 그 술? 그게 여기 있겠냐? 멋있는 척하려고 별수를 다 쓴다는 생각은 백선우에 손에 들린 술병을 보면서 사라졌다. 정말 있을 줄이야.

  “여기서 이걸 시키는 사람은 드문데 어떻게 알았어요?”

  좁고 둥근 입구에서 졸졸졸 흐르는 소리는 바디가 넓은 코냑 전용 전 위로 미끄러지듯 쏟아졌다. 여지운지 이 바에 드나든 지 3년이 다 돼 가지만 루이13세가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놀란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처음과 느낌이 좀 달랐다. 멀리서 볼 땐 다소 위압적이고 단단했었는데 바로 옆에서 보니 굉장히 화사했다. 옆으로 쓸어 넘긴 머리카락 덕에 드러난 이마는 볼록하고 반듯했다. 살짝 내리뜬 눈 끝에 촘촘히 매달린 속눈썹은 길었고, 곧게 떨어지는 콧날과 그 아래 입술은 매끈하고 육감적이었다. 조명을 받은 피부는 부드럽고 탄탄했다. 선이 굵은 미남이라기보다 화려한 미인이었다. 그럼에도 이목구비가 여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건 단단한 턱 날 때문이겠고. 

  뭐, 괜찮네. 여지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객관적으로는 후한 평가였고, 주관적으로는 굉장히 박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는 어느 모로 보나 탑 포지션이었고 그것은 곧 여지운의 경쟁자를 의미했다. 쩝. 혀끝에 남이 있는 맥주의 잔재 때문인지 입안이 깔깔 했다. 남자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고, 얼굴을 그렇게 따지지 않는 여지운조차도 순간 혹하게 했다. 

  이상형은 따로 없지만, 굳이 따지면 귀여운 강아지 과를 좋아했는데 저 정도면 취향을 파괴할 만했다. 남자가 팔목 셔츠를 조금 걷어붙였다. 그 끝에 달린 커프스 버튼과 그 아래의 시계는 상당한 고가 브랜드였다. 

  “음.”

  남자는 손끝으로 살짝 잔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돌렸다. 별것 아닌 동작인데 묘하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여지운의 시선이 향하는 순간 남자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

  “…….”

  의미 없는 침묵이 텁텁한 공기 위로 내려앉았다. 남자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눈을 내리뜬 채 여지운을 응시했고 그 역시 남자를 보고 있었다. 익숙한 시선과 생소한 감각이 뺨에 꽂혔다. 여기 있는 모두, 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모두에 가까운 수십 쌍의 시선이 이쪽, 정확히는 남자를 향해 있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벌써 텄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군가를 못 건져갈까 싶지만, 짜증은 이미 코끝까지 차올라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네. 여지운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 예? 아, 예.”

  여지운은 처음에 자신에게 한 말인지 몰라 애매한 대답을 했고, 남자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뵙는다니. 무슨 소리일까. 자신이 언제 저 남자를 본 적이 있었나? 남자를 이루는 외형과 엇비슷한 것을 찾아보려 머릿속을 뒤져본다. 

  여지운은 사적으로 만난, 특히 이쪽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섹파를 구하는데 얼굴을 따지지 않는 이유와 같았다. 그에게 인연이란 초콜릿 포장지에 불과했다. 달콤한 내용물은 먹은 뒤 구겨 버리는 은색 종이. 하지만 의미 없다 뿐이지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저런 외모의 남자라면 관심 여부를 떠나서 기억을 못 할 리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뒤져봐도 저 남자의 얼굴은, 없다.

  “기억 안 납니까?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었잖습니까.”

  “그쪽이랑 내가요?”

  난 너 전혀 기억 안 나는데요.

  “다시 만난 기념으로 제가 한 잔 사죠.”

  “예?”

  “여기도 같은 걸로 한 잔 부탁합니다.”

  뭐 하는 새끼야, 욕을 중얼거리면서도 엉거주춤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구겨졌던 얼굴은 어느새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루이13세를 산다고 하는데 남자를 알고 말고 여부는 상관없다. 착각했더라도 그건 그쪽 사정이고.  

  여지운은 잘 나가고 또래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균 선이었지 한잔에 몇 십 하는 술을 막 마실 만큼은 아니었다. 고가의 액체는 잔 위로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명쾌했다. 술이 약한 사람이라면 향만으로 취할 것 같은 짙은 냄새가 났다. 여지운이 잔을 감싸 쥐고 흔들었다. 코냑은 얼음을 넣어 마시는 것보다 이렇게 손 온도로 데워 마시는 게 가장 맛있다.  

  “좀 변한 것도 같군요.”

  “예?”

  입안에 든 술 음미하다 느리게 목구멍으로 넘기며 남자를 봤다. 그는 짙은 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 청색? 어두워서 정확하게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딱 떨어지는 선만 봐도 맞춤, 그것도 고가가 분명했다. 뱀의 가죽처럼 광택이 흐르는 넥타이와 핀은 물론이고 바닥에 낳은 구두까지 모두, 상당한 가격의 명품. 특히 팔목에 감긴 저 시계는 너무 갖고 싶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월급에 보너스까지 다 때려 박아야 겨우 살 수 있을 정도 비싸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선우가 ‘저 남자랑 아는 사이?’ 하고 눈으로 물었다. 여지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고.

  “음, 그래요. 예전과 변한 것 같습니다. 여지운씨.”

  그리고 옆으로 돌아간 고개가 제자리에 돌아오기도 전에 남자가 정확하게 여지운의 이름을 내뱉었다. ‘‘여지운’씨는 ‘예전’과 변한 것 같다.’는 말은 과거의 여지운을 안다는 말과 같았다. 아는 사이가 맞나? 어디서 봤었지?

  “기억 안 나는데……. 이름이 뭡니까?”

  아. 남자가 입을 벌리고 짧은 숨을 토했다. 지금 저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 같은 놀라움? 실망? 짧은 침묵은 품을 뒤적이는 손과 함께 깨졌다.

  “여기.”

  남자의 손끝에 달랑달랑 매달린 것은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었다. 

  “제 명함입니다.”

  잠시 내려 보던 여지운이 그것을 받아들고 앞뒤로 뒤집었다. 보통 모서리가 각진 것과 달리 둥글게 깎인 명함 위에는 붓글씨처럼 흘려 쓴 필체로 ‘선연홍’이라는 이름이 적혀, 아니 그려져 있었다. 

  선연홍? 선연홍, 선연홍, 선연홍…….

  정면으로 이름을 마주 했는데도 낯설다. 여지운이 명함을 내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선연홍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 봤다.  

  “A대학교 건축학과 다녔죠? 저도 그 학교 다녔습니다.”

  “A대요?”

  “네, A대학교 한국화과 선연홍입니다.”

  한국화과 선연홍. 여지운의 눈가가 점점 좁혀 들어갔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은 뿌연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나려면 아예 아무것도 안 나든가 이렇게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하니 더 답답하다.

  “이러면 생각날까요? 8년 전, 푸르른 녹음이 비처럼 떨어지던 여름과 가을 사이의 어느 날.”

  “8년 전이요?”

  “여지운씨가 절, 구해 줬지요.”

  “내가? 구해줬다고요?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는데.” 

  “네. 맞고 있는 저를 여지운씨가 구해줬습니다. 음……. 그럼, 동양화과 빽돼지라고 하면 기억하시겠습니까? 꽤 오랫동안 여지운씨를 졸졸 쫓아다녔는데 말입니다.”

  “아, 아!”

  입안에 퍼지는 루이13세와 함께 기억이 번졌다. 동양화과 빽돼지라는 별명보다 졸졸 쫓아다녔다는 말이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때라면 여지운이 제대 후 막 복학했을 때고, 그 시기쯤 정말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었던 새끼가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이름이 특이했다. 뭔가 꽃을 떠오르게 하는 이름이었는데. 선연홍, 선연홍.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근데 그 남자는.

  “돼지……. 아니, 체격이 되게 좋았는데.”

  돼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여지운이 남자를 힐끔 보고서 말을 고쳤다. 선연홍이 흐리게 웃으며 술잔 옆의 물 컵을 집어 들었다. 내내 딱딱하고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걸렸다. 

  8년 전, 제대 후 막 복학했을 때였다. 여지운이 군대에 일찍 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어린 새끼들에게 명령받는 게 좆같아서. 물론 자신이 그 어린 새끼가 되어 나이 많은 후임에게 명령하는 건 제법 재밌었지만. 그 빽돼지를 만난 게 아마 23살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지운은 미술학부 건물 근처를 매일 같이 서성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당시 노리던 남자가 시각디자인과였다. 여지운의 인생에서 남자의 뒤꽁무니를 쫓아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게, 그렇게 쫓아다녀서 교제하고 반년이 채 되기도 전에 깨졌다. 어쨌든 그때는 그와 어떻게든 한번 해보려고 틈날 때마다 미대 근처를 서성였다. 그리고 그 돼지……, 남자를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개강하고 사나흘 정도 지났던 것 같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던 걸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때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새로 산 운동화가 더러워져 아주 짜증 났었거든. 

  당시 여지운은 한창 꼬시던 남자를 만나러 지름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연이었다. 미대 건물 뒤편,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공터를 지나다가 거대한 몸집을 쓰레기봉지처럼 쭈그린 남자와 그 주위를 둘러싼 이들을 발견한 것 역시. 잔뜩 웅크린 거대한 등과 그 위로 쏟아지는 발길질. 그것을 본 것도, 눈이 마주친 것도 모두 우연이었다. 우연의 산물, 아주 사소한 우연이 모여 때로 상상도 못한 인연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목과 어깨를 한껏 움츠린 모습은 안쓰럽다기보다 볼썽사나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학과 특성상 여자 비율이 높아서 가뜩이나 남자가 눈에 띄었는데 성격마저 소심하다 보니 괴롭힘을 당하는 듯했다. 물론 대학교에서 아웃사이더야 특이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 남자는 확실히 왕따였다. 하지만 여지운은 누구의 성격이 어떠하든, 어떻게 생겨서 왕따를 당하든 말든 아무 생각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당연히 정의감이 넘치진 않았다. 정의감은커녕,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탓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니까 그건 그 남자를 위한 게 아니었다. 새로 산 운동화가 더럽혀진 것에 대한 화풀이가 필요했고, 마침 그들이 눈에 띄었을 뿐.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 뒤로 여지운의 뒤를 부단히 따라다녔다. 학과도 다르고 주로 활동하는 반경 역시 달랐는데 보이지 않는 곳은 없었다. 미대 다니는 새끼가 건축 학과 전공 수업까지 들었으니. 딴에는 여지운이 눈치 채지 못한 줄 알고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모를 리가 있나. 한 두 번 저러다 말겠지 하고 관심 껐는데, 그 한 두 번이 열 번, 스무 번이 되어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딱히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유명 했다. 한국화과 빽돼지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남자가 그쪽이라고요?”

  “네.”

  여지운이 새삼스런 시선으로 남자를 다시 훑었다.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저 남자에게서 그때 빽돼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빽’돼지라는 별명은 아마 하얗고 반들반들한 피부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선연홍의 뺨은 갓 쪄낸 백설기 같았으니까. 

  어지럽게 흔들리는 조명 탓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눈앞 남자의 뺨 역시 부드럽고 탄력적이었다. 근데 그것을 제외하면 닮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손가락이나 그 끝에 달린 손톱도 달라 보였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기억도 희미한 그 남자를 사칭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의문과 의심이 섞인 표정을 알아차린 것인지 선연홍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많이 변했죠?”

  “변한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일 이후, 자퇴하고 유학 갔습니다.”

  선연홍이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랗게 펼쳐진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고 그 안의 검은 눈동자가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물들었다.

  ‘그 일.’ 선연홍이 여지운을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석 달, 여지운은 참지 못했다. 선연홍의 외모가 어쨌다던 가의 이유가 아니었다. 남의 외모 따위야 뭐가 어떻든 관심 없었다. 문제는 그의 행동이었다. 

  여지운이 선연홍을 의도치 않게 구해 준 그날부터 시작된 그의 행동은 점차 도를 넘어갔다. 제 수업은 모두 팽개친 채 알아듣지도 못할 건축학과 수업을 꾸역꾸역 듣는 것도, 두 사람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흐르는 것도 다 이해했다. 소문 같은 거야 애초에 신경도 안 썼으니 피해만 주지 않았으면 스토킹을 하든 말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지운이 당시 찍어 놨던 남자와 어떻게 좀 잘해 보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방해하는 건 곤란했다. 학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으면 끼어든다든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 남자를 만나러 찾아간 미대 건물에서 선연홍을 더 자주 봤으면 말 다 했으려나. 심지어 고백하려고 부른 술자리도 어떻게 알아차리고 기어 나왔는지. 정제되지 않은 분노는 선연홍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욕설, 폭언……. 

  선연홍은 매달렸다. 하지만 그 매달림마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저 눈 안에는 무슨 감정이 담겨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 없었다. 

  자신이 그를 구해줬다가도 여겨서 이렇게 좆같이 구는 거라면 그 구원을 짓밟으면 되는 것이다. 

  ‘이 지겨운 새끼야, 그만 좀 꺼져. 이 미친 새끼!’

  여지운이 그리 말하면 선연홍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턱이 안쪽으로 말리고 어깨가 움츠러들면서도 여지운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선연홍이 여지운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2학기 종강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이른 첫눈이 아침부터 내렸다. 선연홍의 갖은 방해에도 여지운과 그 남자와 거리는 가까워졌다. 그날은 일단 속궁합부터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어김없이 선연홍이 들러붙었다. 당연히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협박 섞인 욕설에도 선연홍은 묵묵했다. 결국, 지친 여지운이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순간 팔이 잡혔다. 

  ‘아, 씨발.’

  두꺼운 코트 위로도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온기를 뿌리친 것은 본능이었다. 터져 나오는 욕설을 수습할 틈도 없이 주먹이 뻗어져 나갔다. 

  뻑.

  선연홍은 발갛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턱을 부여잡고 눈을 깜빡였다. 파들파들 떨리는 뺨과 더운 숨이 쏟아지는 입, 들썩이는 어깨와 하얗게 질린 손끝이 지금 그의 기분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지겹고 짜증나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들지도 않았다. 대체 무얼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좆같은 새끼야, 다시 한 번만 눈에 띄면 뒤질 줄 알아라. 이 씨발 새끼. 꺼지라고.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경고하는데 내 앞에 나타나면 죽여 버린다.’

  ‘…….’

  ‘야, 나 존나 개새끼인거 알겠지? 그러니까 앞으로 모른 척해라. 어?’

  턱 끝에서 퍼지기 시작한 붉은 기운은 곧 그 얼굴 전체를 물들였다. 손대면 붉음이 그대로 묻어날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생각지도 못한 것을 마주한 듯 눈을 둥글게 떴다. 

  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타액은 선연홍의 운동화 위로 떨어졌다. 

  ‘아, 씨발. 왜 이리 추워.’

  여지운은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깨를 움츠렸다. 상당히 충격받은 것 같았던 선연홍은 더는 잡지 않았다. 그 뒤로 겨울 방학이 시작됐고, 개강했을 때는 선연홍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선연홍이라는 이름도 그때 처음 의식했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홀가분함만이 가득했던 감정은 어느 순간부터 죄책감처럼 묘하게 변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두 달쯤 지났을 때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지운은 어느새 선연홍을 괴롭히는 사람이 돼 있었다. 

  

  * * *

  

  그래, 그랬었어.

  지난날을 회상하던 여지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구원자는 약탈자가 되어 선연홍을 짓밟았다. 과거의 가해자 여진운이 음, 침음을 삼키며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선연홍이 제게 말을 건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아마도 그때의 사과를 받거나 면박을 주려고 한 것 같은데 그러든가 말든가. 저 남자가 뭐라고 지껄여도 자신에게는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 대가가 값비싼 술 한 잔이면 뭐, 남는 장사네. 여지운은 있지도 않은 미안함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제가 여지운씨를 좀 괴롭혔죠? 화내던 것도 이해합니다.”

  “예?”

  “이제 와서 사과를 바라진 않습니다. 어쨌거나 여지운씨가 절 구해준 건 사실이고 아직도 제게 영……음, 은인이니까요.”

  구해준? 여지운이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구해줬다는 말은 추측이고 욕하고 때린 건 사실인데 저렇게 말하니 오히려 민망했다. 설마 아닌 척 엿 먹이는 건가 싶어 살펴봤지만, 그의 눈 안은 진지한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지운씨와 마지막 만남 때 일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유학은 꼭 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타이밍이 그랬을 뿐이죠. 다만 급하게 가느라 인사를 못한 점이 걸리더군요.”

  “아, 예…….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굳이 거기에 대고 ‘아닌 게 아니다.’ 하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볼 땐 똥인데 먹는 사람이 된장이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똥이 아닌 된장이겠지. 여지운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을 내려놨다. 빈 유리 술잔 위로 빛이 통과해 검은 테이블에 둥근 테가 그려졌다.  

  “여태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완전히 옮긴 겁니까?”

  “글쎄요. 일 때문에 오긴 했습니다만,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연홍이 내뱉는 말은 나직하지만 부드러웠고 묘한 음률이 있었기에 듣기 좋았다. 귀가 쫑긋해지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해야 할지, 묘하게 집중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여지운씨?”

  “예.”

  여지운이 생각을 멈추고 선연홍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웃음기를 거둔 남자와 몇 번째일지 모를 눈이 마주쳤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강산이 변해 봤자 물과 숲인데 저것은 강산이 아니라 하늘이 됐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국에 있을 때만이라도 연락하고 지내죠.”

  선연홍의 시선이 여지운의 손에 들린 자신의 명함으로 향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압박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너도 어서 명함을 내 놔라 같은? 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무덤덤한 얼굴이잖아. 저를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선연홍이 살짝 웃었다. 입매를 굳혔다가 미소 짓기를 반복하는 얼굴은 봄과 겨울 사이를 오갔다.  

  “여지운씨?”

  “음, 네.”

  여지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완전히 꺼내기도 전에 뻗어 나온 손이 낚아챘다. 

  어?

  “(주)해담 건축 디자인 3팀 팀장, 여지운.”

  내 뱉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며, 명함을 살펴보는 눈은 싸늘했다. 

  “해담, 해담, 해담…….” 

  선연홍은 되뇌듯이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명함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마치 쓰레기를 쥐듯 엄지와 검지만으로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묘하게 기분 나빠 입을 열려는 찰나, 진동 소리가 울렸다. 여지운은 처음에는 제 것인 줄 알고 품을 뒤적였지만, 옆에 있는 남자의 전화기였다. 윗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선연홍이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양해를 구하듯 손을 들었다. 

  “선연홍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그 건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하시면 좀 곤란하다고 전해 주세요.”

  살짝 구겨진 이마나 고저 없는 목소리를 보면 반가운 상대는 아닌 듯했다. 그는 끝까지 날카롭게 말을 내뱉었으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려 여지운을 봤을 땐 여전히 무표정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그래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잘 가십쇼.”

  “여지운씨도 들어 가 보셔야죠?”

  “예?”

  물론 처음에는 그냥 집에 가려고 했지만, 막상 술을 마시니 몸에 열기도 오르고, 모처럼 스트레스도 풀고 싶어졌다. 여기서 한 명 낚은 후에 내일까지 뒹굴 생각인데. 내가 어딜 가?

  하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하지 못한 사이 자리에서 일어선 선연홍이 여지운을 내려봤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이만 들어가셔야죠. 방금 마신 술은 도수가 꽤 높습니다.”

  “코냑이 도수가 높은 건 당연한 거고 나는…….”

  “여지운씨?”

  안 일어납니까. 뒤엣말은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선연홍의 의도를 모를 순 없었다. 겨우 술 한 잔 사줬다고 이 새끼가 미쳤나?

  “저기, 선연홍씨 지금 너무 주제넘지 않습니까. 어? 어.”

  팔을 붙든 손은 꽤 강압적이었고 어, 어어. 하는 사이 여지운은 밖에 나와 있었다. 

  “차 가지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지금 무슨 소리 합니까? 나는 집에 갈 생각이……, 선연홍씨!”

  안 갈 건데요. 라는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선연홍이 사라졌다. 여지운의 얼굴에 황망함이 퍼졌다. 그는 이미 사라진 뒷모습을 쫓다가 헛숨을 내뱉었다.

  “저 새끼 뭐야?”

  가을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려와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끝에 맺혀있던 물이 머리 위로 뚝 떨어졌고, 황당함과 짜증은 좀 더 짙어졌다. 

  분명 몇 분 전만 해도 따뜻한 코냑을 기분 좋게 마셨다. 그다음에는 몸 안의 술을 땀으로 다 배출할 정도로 격하게 뒹굴 예정이었는데 이 날씨에 왜 밖에 나와서 비나 처 맞고 있을까.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 남자에게 제대로 된 말도 못 했단 것이다. 여지운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해야 했다. 그가 눈치를 보는 것은 공적인 영역이었고, 그나마도 직속 상사나 중요한 고객이 다였다. 

  사적인 관계, 특히 이런 클럽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굽히거나 밀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선연홍은……, 선연홍 같은 경우는 더 그랬다. 그 남자야말로 앞으로 더 볼 일이 없다. 역시 다시 들어가야겠다, 는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클랙슨이 빵빵 울렸다. 일부러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이 눈앞을 때렸다. 여지운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눈을 손등으로 막았다.

  “아, 뭐야?”

  “타세요.”

  축축한 공기,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는 젖은 도로 위에 매끈한 곡선의 외제 차가 불빛을 번쩍이며 서 있었다.

  “뭐야, 저거.”

  여지운 역시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외제 차를 몰고 있었지만, 남자가, 선연홍의 차는  그야말로 슈퍼카라고 해도 인정할 만큼의 고가였다. 빗물이 매끈한 곡선을 타고 미끄러지는데 어찌나 요염한지. 그사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온 차의 창문이 열렸다. 

  “타요.”

  “내가 왜 탑니까?”

  “지금 벌써 자정이 다 돼 갑니다. 위험하니까 어서 타세요. 데려다 줄게요.”

  벌써 자정 가까이 됐다는 말보다 위험하니까 타라는 말이 더 어이없고 웃겼다. 설마 농담하나 싶어서 내려간 창문 틈으로 살펴봤지만 놀랍게도 선연홍은 진지했다. 정말 진심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여지운의 체구가 작거나 여리여리 하다면 몰라도 180cm가 넘는 건장한 남자에게 보통 위험하다고 하나? 

  게다가 여지운은 눈을 씻고 봐도 곱상하다거나 순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꼬리가 가로로 길게 찢어진데다 끝이 살짝 올라간 탓에 상당히 성깔 있어 보였다. 실제로도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지 그 느낌은 배가 됐다. 아마 선연홍과 여지운을 놓고 더 예쁘장한 사람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저 남자를 택할 것이다. 설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닐 테고, 놀리는 건가? 혹시 저게 진심이면 참 쓸데없다. 

  “그냥 그대로 꺼지면 되겠네요.”

  “이 차, 국내에 단 3대밖에 없습니다.”

  조수석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뜬금없이 웬 잘난 척이냐 싶으면서도 차 바디에 자꾸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맙니까?”

  “11억.”

  “11억…….”

  기다란 숫자 두 개는 마치 요술 봉과 같아 띠꺼운 표정의 여지운을 결국 차에 올라타게 했다. 그냥 날씨도 춥고 피곤해서 그런 거지 절대 이 슈퍼카에 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출발하겠습니다. 안전띠 맸죠?”

  여지운의 눈동자가 운전대와 기어, 불이 들어온 내부 등을 살피느라 정신을 팔린 사이,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잠깐, 잠깐만요!”

  여지운의 외침에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선연홍이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거 음주 운전 아닙니까?”

  “네?”

  “술 먹었잖습니까? 바에서요.”

  “아아.”

  가벼운 긍정에 여지운의 심기가 더욱 구겨졌다. 지금 이 미친 새끼가 음주 운전을 처하겠다는 건가? 뒈지려면 혼자 뒈지지. 입안에서 맴돌던 욕설이 혀끝을 타고 터지려는 찰나 선연홍이 “아니요.”하고 입을 열었다. 

  “술, 안 마셨습니다.”

  “안 마셨다고요? 술 시키는 걸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이제 거짓말까지 합니까?”

  “아, 그건…….”

  아, 선연홍이 탄성을 내뱉었다.

  “내리겠습니다.”

  “여지운씨, 잠깐만요.”

  안전띠를 푼 여지운이 차 문을 열려고 하자 선연홍이 그의 팔을 잡고 끌었다. 갑자기 닿은 온도에 놀라는 사이 몸이 옆으로 강하게 딸려갔다. 어? 내뱉는 숨결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선연홍의 입이 벌어졌다. 

  “술을 주문한 것은 맞지만 마시진 않았습니다.”

  “무슨 그런 거짓말을, 분명…….”

  “맹세하죠. 절대 안 마셨습니다.”

  아니면, 한 번 확인해 볼래요? 입술 위를 간지럽히던 따뜻한 숨결이 훅 다가왔다. 선연홍의 입술이 여지운의 입술 위로 닿았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각이 여지운을 덮었다. 혀끝에 닿은 것은 싸한 알코올이 아닌 좀 더 단맛이었다. 

  “지금 뭐 합니……, 음.”

  잠시 떨어졌던 입술은 여유도 없이 다시 닿았다. 이번에는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뜨거운 혀가 입안을 밀고 들어 왔다. 살덩이가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는 차체를 때리는 빗소리만큼이나 젖어 있었다. 여지운이 고개를 물리자 선연홍이 그만큼 따라왔다. 눈앞을 채우는 속눈썹을 쫓다 보니 어느새 보조석에 반쯤 누운 상태였다. 크고 넉넉한 손이 여지운의 뺨을 움켜잡자 입술이 좀 더 벌어지며 키스가 깊어졌다. 선연홍의 어깨를 짚었던 여지운이 어느새 그의 뒤통수를 잡고 적극적으로 끌어당겼다. 윗입술이 짓이겨지며 그 위를 혀가 핥았다. 맞물린 살덩이들이 흐르듯이 엉키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아, 음.” 선연홍은 여지운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밀어붙였다. 키스의 주도권을 빼앗긴 적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시작했던 키스는 어느새 폭풍같이 거칠게 변했다. 뿌옇게 서리가 낀 앞유리 위로 물방울들이 주룩 흔적을 남겼다. 비 오는 가을밤, 날씨는 쌀쌀했지만, 입술에 닿는 열기는 뜨겁기만 했다. 여지운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떨어진 선연홍이 가벼운 뽀뽀를 한 번 더 남겼다. 

  “음…….”

  보조석에 눕듯이 깔린 여지운 위로 선연홍이 바짝 다가왔다. 내뱉는 숨결에는 아직 지워지지 못한 열기가 서려 있어 솜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었다. 다시 닿을 듯 가까워졌던 입술은 뺨을 지나쳐 귓가에 닿았다.

  “어때요, 술 안 마셨다고 했잖아요.”

  “…….”

  선연홍이 슬며시 눈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줬다. 딸깍, 여지운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안전띠까지 매준 선연홍이 여지운의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 *

  

  비 오는 새벽을 달리는 사이 금요일은 토요일이 되었다. 늦은 시간에다가 날씨까지 궂어서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고 그 탓에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다.  

  “……고마웠습니다. 굳이 안 데려다 줘도 됐을 텐데요.”

  이제껏 누군가를 데려다 주었던 적은 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다 주었던 적은 거의 없어서 조금 생소했다. 특히 이렇게 비싼 차를 타고 온 건 처음이기도 했고. 부러움이나 경쟁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옆에 앉은 남자가 그때 그 선연홍이라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다. 

  “조심히 가십쇼.”

  “아, 여지운씨.”

  안전띠를 풀고 차문을 여는 순간 선연홍이 불렀다. 목소리는 낮고 말투는 딱딱한데 이상하게 차갑게 들리진 않았다.

  “예?”

  “내리기 전에 잠시만 이리로 와볼래요?”

  흰 손이 여지운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기다란 손가락과 달리 손마디는 셌고 손끝은 굳은살로 딱딱했다. 뒤늦게 술이 오르는 것인지 여지운의 얼굴은 후끈할 정도의 열기가 어렸다.  

  “좀 더 가까이.”

  작고 부드러운 것들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느낌, 여지운은 호감이 듬뿍 담긴 이 분위기를 알고 있다. 

  사적인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제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물론 그 호감의 깊이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를 뿐이지. 이 분위기는 분명 사귀자고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봐도 포지션이 겹칠 것 같은데 거절할까? 옷차림이나 고가의 술을 스스럼없이 시킬 정도면 돈이 없진 않은 것 같고.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자동차만 보더라도 평범하지 않았다. 여지운 역시 풍족하게 자랐고 지금도 남부럽지 않게 살지만 10억이 넘는 차를 타고 다니진 못했다.  

  이 남자의 직업이 뭐였더라? 명함에 적혀 있었나? 아니, 그 명함에는 선연홍의 이름밖에 없었다. 연락처도 주소도 없이 오로지 제 이름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는 듯.

  짧은 시간 여지운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다 지나겠다. 여지운은 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딱 봐도 떫어 보이는 감은 찌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 수고로운 짓을 왜 해. 하지만 선연홍은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얼굴도 그랬지만 몸에 더 시선이 갔다. 긴 목선과 널따란 어깨, 균형 잡힌 팔다리는 수트 너머로 봐도 저렇게 괜찮은데 홀딱 벗겨 놓으면 얼마나 맛있을, 음……, 멋있을까. 

  예전의 선연홍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자기 입으로 빽돼지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 뭐. 살에 이목구비가 다 묻히고 의자 안에 몸을 다 구겨 넣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여지운씨.”

  “예, 말 하시죠.”

  다정하게 여지운을 부른 남자는 말이 없었다. 마주친 시선이 싸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기분 탓이겠지. 

  “잘 들어가십시오.”

  “예?”

  “잘 들어가라고요.”

  여지운이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대답을 했고 선연홍은 “잘 들어가라.” 하고 다시 한번 말 했다. 잠시 침묵하던 여지운이 거칠게 문을 열어 재꼈다. 

  분명 교제 신청 타이밍 아니었냐? 착각했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아니, 분명 분위기가, 키스는 왜 한 거냐. 대체. 밖으로 발을 내 딛자 구두 위로 비가 후두두 떨어졌다. 차에 타기 전보다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트렁크에 우산 있을 텐데 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이미 다 젖었구만 뒤늦게 우산은 무슨.

  “예, 그럼 조심히 가십쇼.”

  헤드라이트 불빛을 두어 번 깜빡한 차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사라졌다. 

  “……뭐냐?”

  뜨겁고 야릇한 공기에 갇혀 있다가 나와서인지 들이쉬는 숨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물기 없이 건조하던 머리카락이 흠뻑 젖을 정도로 굳어 있던 여지운이 곧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뭐냐, 진짜 뭐야?”

  작업건 거 아니었어? 착각이라고? 

  “저…… 매너도 없는 새끼!”

  대체 키스는 왜 한 건데 대체. 아, 그래. 의미 없는 키스, 가능하지. 하지만 그것도 때와 상황이 있지. 선연홍이 키스를 해서 얻는 이득이 있었을까.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차 안에서는 유혹하듯 부드럽게 굴던 남자는 헤어질 때쯤에는 더없이 냉정했다. 마치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듯 건조했다. 구겨진 자존심은 젖어드는 신발처럼 질척이고 짜증 났다. 이런 상황 따위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터라 뒤늦게 분개하며 욕을 내뱉었지만 차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황당함과 분노 때문에 떠올리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여지운은 선연홍에게 자신의 집이 어딘지 알려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지운의 집을 정확하게 찾아왔다. 그 어떤 안내도 없이. 

  

  * * *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선연홍은커녕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회사 일에 몰두했다. ㈜해담 건축은 외관 건축과 실내 디자인까지 겸비했다. 여지운이 젊은 나이로 팀장 직급까지 올라간 것도 그가 실내외 디자인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이 컸다. 물론 주 전공이 건축디자인이라 실내 쪽은 약간 깔짝이는 정도지만.

  야근이 당연시되는 시기가 이어졌지만 아직은 감당할 만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빡빡해지면 샌드위치나 김밥 같은 간단한 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먹으면서 일하는 일정이 이어졌다. 

  “근데 김 부장 그 새끼는 사사건건 시비야, 시비가. 열정 페이같은 소리하고 있네.”

  회사에서 쉬는 시간이라고는 두어 번의 짧은 담배 타임이 전부였고, 이런 때는 니코틴이 없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이건 뭐 소도 아니고. 기본적인 휴식 시간은 보장해줘야 할 거 아니냐. 미친 웃대가리들. 지들이 현장 와서 쳐 일해도 ‘우리 때는’이라는 개소리가 나오는지 보자. 

  오그라든 하얀 필터를 막 입에 물었을 때, 여지운의 휴대폰이 진동하면서 울렸다. 부장 새끼면 진짜 당장 찾아가서 책상을 엎어 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낯선 번호가 떠 있다. 일단 필터를 한번 빨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지운입니다.”

  [여지운씨?]

  때마침 흡연실의 문이 열리며 옆 팀 팀장이 들어왔다. 휴대전화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운 채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 사이에도 수화기 너머의 말소리는 이어졌다.

  [……니까?]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누구라고요?”

  […….]

  뭐지, 잘못 걸린 건가? 다시 화면을 내려 보았다. 통화 시간은 여전히 가고 있었다.

  [내 번호, 저장 안 한 겁니까?]

  “……아니, 댁이 누군데 내가, 잠깐.”

  귓가를 두드리는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독특한 느낌이 있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낮은 느낌의 이건, 그러니까…….

  “설마, 선연홍?”

  [맞습니다.]

  여지운은 설마 이 남자가 전화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놀라움은 배가 됐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

  알았습니까? 라는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손안의 명함을 빼앗듯 가져가던 선연홍이 떠올랐으니까. 가을비가 내리던 어두운 하늘, 축축하게 젖은 공기와 바닥을 두드리던 물웅덩이. 달뜬 숨이 가득했던 차 안. 그리고 선명하게 느껴지던 입술과 혀. 그리고 단순하다 못해 냉정하게 떠나가던 마지막까지. 그때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욕이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뵙기가 힘드네요.]

  “내가 바쁘고 말고가 그쪽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전화는 왜 한 겁니까, 우리가 더 할 말이 있던가요?”

  [저 지금 여지운씨 회사 앞입니다.]

  “예? 어디요?”

  여지운이 당황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쪽으로 신경 쓸 틈도 없이 “회사 앞? 우리 회사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가락 사이에 껴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 몇 모금 빨지도 못했는데 아깝게.

  [예, 해담건축 로비예요. 잠깐 내려올 수 있습니까? 시간 오래는 안 뺐습니다. 잠시면 돼요.] 

  아니 대체, 이 무슨 황당한 소리지? 얘가 우리 회사를 왜 와?

  “도대체, 회사 앞에는 무슨 일로……”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더 말할 틈도 없이 끊겼다. 뚜 뚜. 일정하게 쏟아지는 기계음을 듣던 여지운이 전화기를 황망하게 내려봤다.  

  “여팀장 왜 그래? 또 김부장이 지랄해?”  

  역시 김부장에게 원한 있는 옆 팀장이 안 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고개를 흔들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을 전하면서 흡연실을 나갔다. 점심시간까지 5분쯤 남았다. 일부러 알고 온 것은 아니겠지만,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내려가기 전 사무실에 들러 점심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겠다고 팀원들에게 일렀다.

  “다들 오늘만큼은 밥다운 밥 먹읍시다. 식사들 잘해요.”

  네. 유치원생처럼 착실하게 대답하는 팀원들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려고 하려다 다시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여지운이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살펴봤다. 며칠 야근을 한 탓에 턱수염이 짧게 자라나 있었다. 하필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일 때 오는 건 뭐냐. 손가락을 빗 삼아 머리를 대충 정돈했다. 세수라도 할까 하다가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그냥 손만 씻었다. 

  로비로 내려갔을 때 딱 12시가 되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선연홍을 발견했다. 여지운 뿐만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쏟아져 나오던 사람들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맹렬한 질투와 희미한 짜증이 여지운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사람을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이 회사에 그런 사람은 여지운 한 명이면 됐다. 

  “여지운씨.”

  선연홍이 한 손을 들고 아는 척을 했다. 회색 페도라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롱코트는 무척 잘 어울렸지만, 지가 연예인도 아니고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그 안에는 ‘너랑 내가 이렇게 친한 사이냐?’라는 뜻이 있었다. 숨기려는 의도가 없었으니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기분 나쁠 수도 있을 텐데 선연홍은 덤덤했다. 

  “이거 주려고 왔습니다.”

  그는 제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을 여지운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주변에 일이 있어서 들렸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지 않습니까? 식사 못했을 것 같아서 사왔습니다. 맛은 제법 괜찮을 겁니다.”

  여지운이 ‘일화선’이라는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내려 보았다. 

  “어, 여기……?”

  일화선이라면 여지운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일식집이었다. 근데 거기는 포장 안 해 준다고 들었는데 이건 뭘까? 종이봉투만 일화선이고 내용물은 다른 건가. 슬쩍 쇼핑백 안을 곁눈질 했지만, 자세하게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봤으니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갑니까?”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는다는 선연홍의 말은 사실이었다. 돌아서는 얼굴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진짜 이걸 전해 주러 온 건가? 왜? 

  “왜, 아쉬우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받으니 얼떨떨했다. 애인이 있을 때 먹을 것을 들고 그의 회사에 몇 번 찾아간 적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감이 있거나 애인 일 때였고. 이 남자와 자신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키스는 했지만, 그건 그때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이지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저녁에 시간 좀 나십니까?”

  “오늘 저녁이요?”

  “커피 한 잔이면 됩니다.”

  바쁘긴 한데 거절하기 어째 좀 그랬다. 여지운이 고민하는 척 턱 끝을 쓸었다. 사실 비 오던 그날은 정말 쪽팔리고 민망해 다시 만나면 욕이라도 퍼부어 주려고 했었다. 여지운이 새삼 선연홍을 다시 살폈다. 여전히 그 어디에도 들뜬 기운은 없어 보였지만 원래 표정 변화가 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어쩌지.” 

  일부러 소리 내 중얼거리던 여지운이 잠깐의 틈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연홍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정말 가보겠습니다. 여지운씨 마칠 시간쯤 돼서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이거, 잘 먹을게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멀어지는 선연홍을 보던 여지운이 휴게실로 향했다. 칼로리 소모를 위해 계단으로 이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들 식당에라도 내려간 건지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음식점 로고가 찍힌 봉투와 달리 내용물은 다른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정말 일화선 초밥이 맞았다. 일화선은 비싼 음식값도 값이었지만 재료 특성상 신선도를 위해 포장 판매는 안 한다고 공헌했다. 그런데 이렇게 떡하니 포장이 된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종이 상자를 열자 광어, 장어초밥 같은 무난한 것에서부터 연어알과 참치까지 있었다. 일반 나무젓가락과 달리 끝이 좁다란 젓가락이 연어를 집었다. 밥의 간은 적당하고 생선은 두툼하고 신선했다. 점심으로 먹기엔 고급스러웠다. 다른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롤이 있었고, 마지막 상자에는 아직 따끈따끈한 튀김이 있었다. 락교와 절인 생강, 장국까지. 이 정도면 코스요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최근에도 이 음식점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생선살이 더 두툼한 것 같다.

  “근데, 진짜 뭐 하자는 거지.” 

  키스를 했다가, 냉정하게 돌아서서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연락 한 통 없더니 오늘 갑자기 찾아와 점심을 안겨준다. 밀고 당기기인가 싶다가도 건조한 표정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여지운은 눈치가 빨랐고, 특히나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냈다. 그때 차 안에서 키스는 분명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농밀하고 짙은 키스였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다였다. 

  건즈앤로즈에서 자신과 이야기를 할 때도,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이것을 건넨 방금 까지도 그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스치듯 걸린 웃음은 그저 단순한 근육 움직임일 뿐 그 안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호감 가는 상대를 대할 때 나타나는 특유의 들뜬 설렘이 없어 보인다고 할까. 

  그럼, 이것을 준 목적은 뭘까? 대학 동문에 대한 반가움이라고 하기에는 그때 끝이 너무 지저분했다. 폭언과 폭행으로 점철됐던 그 과거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 

  “근데 내가 왜…….”

  더 짜증나는 것은 선연홍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살피는 자신이었다. 마음이 있으면 어찌할 거고 없으면 또 어찌할 건데.

  여지운이 들고 마시던 장국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놨다. 어쩌긴 뭘 어째. 호감이 있으면 사귀는 거고 없으면 마는 거지. 어딘지 모르게 울적한 얼굴로 쇼핑백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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