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

2.

  

  점심을 먹고 난 후 정신없이 일하고 나니 저 멀리 떠올랐던 해가 어느덧 지고 있었다. 내내 무덥던 계절은 10월을 기점으로 갑작스레 싸늘해 졌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은 점점 짧아질 것이고, 거리에는 곧 낙엽이 눈처럼 쌓이겠지.

  여지운이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며 손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요 며칠 내내 일하느라 운동은커녕 섹스도 못했다. 바에 간 것도 선연홍을 만났던 그때가 마지막이었고. 이럴 땐 따끈따끈하고 한바탕 뒹굴면 피로가 싹 풀리는데. 

  “아흐.” 

  근육이 늘어나며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손목을 털어내고 뒤집어 놨던 휴대폰을 들었다. 선연홍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선연홍입니다. 몇 시쯤 마치십니까. 

  -퇴근 시간이긴 한데 바로 나가지는 못할 것 같고 30분쯤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답을 보내자마자 다시 문자가 울렸다.

  -예. 일 다 보고 나오십시오. 여기 회사 근처 ‘J.UN’이라는 카페인데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벌써 도착했습니까?

  -아, 일정이 뒤로 미뤄져서요. 그럼 잠시 후 뵙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연홍이 무슨 일 하는지도 아직도 모르는구나. 여지운의 시선이 잠잠한 휴대전화기에 잠시 향했다가 다시 컴퓨터를 보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니 퇴근 시간보다 20분 정도가 더 지나 있었다.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드는 여지운을 보고 팀원들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 속에 깃든 감정이야 왜 모르겠느냐마는 오늘은 들어줄 수 없었다. 

  “와, 팀장님 퇴근하세요? 우리는 아직 이렇게 일이 많이 남았는데 먼저 퇴근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입사 2년 차 사원 서태경이 울상을 지었다. 박대리 역시 옆에서 한소리 거들었지만 정말로 억울해한다기보다 투정에 가까웠다. 

  “팀장님 권한으로 저희도 좀 집에 보내 주십쇼. 금요일 저녁에 사무실에 있는 건 너무 억울해요.”

  요새 워낙 바쁘게 지내다 보니 오늘이 금요일인지도 몰랐다. 얼마나 날짜 감각 없이 일했으면 요일도 모르지? 선연홍과 만나고 다시 회사로 와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그냥 집에 가야겠다. 아니면 오랜만에 건즈앤로즈에 가볼까? 피곤하긴 한데 술 마시고 놀면 스트레스가 풀릴지도 모르니까.

  “대충 마무리 짓고 집에 들어가요.”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며 선연홍에게 이제 나간다. 10분쯤 걸릴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다.

  -네. 조심히 오십시오. 

  건널목 앞에 선 여지운이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면서 문자를 다시 내려 봤다. 조심히 오십시오, 라……. 음, 별것 아닌데도 어쩐지 묘했다. 

  요즘 외롭나. 회사 일이 마무리 되고 시간이 좀 나면 스테디를 만들어 볼까. 두 달 좀 지나면 크리스마스인데.

  딸랑. 카페 문을 열리며 훈풍이 뺨을 스쳤다. 아직 완전한 겨울도 아닌데 이곳은 벌써 온풍기를 튼 듯했다. 차가운 손끝을 비비며 카페 안을 훑던 여지운이 찾던 사람을 단번에 발견했다. 선연홍은 창가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둥그런 테이블 위에는 서너 권의 책과 머그잔이 놓여 있었다. 주변엔 유난히 많은 사람이 앉아 있다. 선연홍을 힐끔대다가 저들끼리 수군대는 모습은 퍽 익숙했다. 그 역시 자주 느꼈으니까. 

  “웃기네.”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운 채 그를 향해 걸었다. 인기척을 느낀 선연홍이 고개를 들었다. 

  “왔습니까?”

  여지운의 시선이 머그잔에 잠시 머물렀다가 올라왔다. 커피 잔재가 말라붙은 둥근 머그잔 안은 비어 있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뇨. 좋았습니다.”

  오래 기다렸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좋았다는 헛소리였다.

  “네?”

  “어린 왕자 속 여우의 기분을 알겠더군요.”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여지운이 썩은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선연홍이 “고생했습니다.”하고 말했다.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여전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셔요? 예전엔 아무리 추워도 꼭 아이스만 찾지 않습니까?”

  “네.”

  “여지운씨 매운 것도 싫어했죠?” 

  아. 여지운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말 대로 여지운은 매운 것을 싫어했고 못 먹었다. 남들은 매운 것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데 그에겐 맵다는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시뻘건 게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면 피곤하다고. 한 입 먹고, 물 한 잔 마시고 하다가 나중에는 물로 배를 다 채웠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사람들은 여지운이 매운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긴 얼굴을 보면 빨간 게 생각나긴 하지. 뭐 예를 들면 거대하고 새빨간 아랫도리? 

  함께 일한 지 3년이 넘어가는 팀원들조차 ‘팀장님, 매운 거 좋아하시잖아요?’하고 말하는 와중 저런 말을 들으니 새삼 저 남자와 아는 사이라는 게 느껴졌다. 

  “주문하고 오죠.”

  “아니요, 어차피 제 것도 시켜야 합니다. 앉아 계세요.”

  자리에 일어서는 여지운을 다시 앉힌 선연홍이 주문대로 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 역시 같이 옮겨졌다. 피리 부는 사나이 같군. 주문을 받는 알바생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지금 밖에는 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어 조금만 서 있어도 저렇게 뺨이 발갛게 얼어붙을 것이다. 선연홍이 품에서 지갑을 꺼내는 것까지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에 놓인 책들은 미술에 관한 것들이었다. 『현대 미술학』, 『한국화 계보』, 『섹스와 미술의 연관성』, 『섹스 체위와 인체』

  음, 섹스……. 꽤 노골적이고 화끈한 제목이네. 당연한 말이지만 섹스는 나쁜 게 아니었고,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당당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마음에 든다. 

  오래지 않아 선연홍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치즈케이크, 마카롱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그는 비닐 포장이 된 빨대를 집어 입구 쪽을 손가락으로 잡은 뒤 뒷부분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빨대를 구멍에 꽂아 넣고 나머지 위쪽 비닐을 벗겼다. 포크와 휴지를 여지운의 앞에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뭘까, 이 미묘한 배려는. 선연홍은 여지운이 그동안 관심 있는 남자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외국물 먹어서 매너가 몸에 뱄겠지 싶다가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자꾸 걸리는 느낌이다.

  “여지운씨?”

  “아, 네. 뭐라고 했습니까?”

  “아니요. 많이 바쁘신가 물어봤습니다.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 원래 이맘때쯤 바쁩니다. 그리고 연초까지는 더 바빠질 예정이죠.”

  “그렇군요. 아무래도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우리도 이제 삼십 대잖아요.”

  “그렇긴 해……도? 잠깐만요.”

  ‘30대야말로 가장 달콤한 과육이 맺히는 시기가 아닙니까?’ 하고 말하려던 여지운은 그 대신 다른 것을 꺼냈다.

  “선연홍씨는 나보다 삼 학번이 낮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 기억합니까? 여지운씨 성격상 모를 줄 알았는데.”

  “하하, 참나. 기억하냐니요?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보기보다 성격 참 이상하시네.”

  여지운에 지적에 선연홍이 가만히 웃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에는 알 수 없는 흡족함이 매달려 있었다. 성격 이상하다는 말이 좋은 건가? 

  “굳이 따지자면 제가 여지운씨 후배긴 하죠.”

  굳이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선연홍은 스물 아홉 살이었다. 생일이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지났다고 쳐도 만 스물여덟이다. 빼도 박도 못하고 서른 줄인 여지운과 달랐다.  나이를 알고 보니 좀 더 새로웠다. 반질반질한 피부나 웃는 모습은 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지만 입매를 굳히거나 무표정하게 있으면 왠지 말 붙이기 어려웠다.

  “그것보다 왜 연락 안 했습니까.”

  기다란 빨대 끝이 얼음 사이를 의미 없이 돌아다녔다. 그 틈으로 섞이는 목소리는 아메리카노처럼 썼다. 컵 안을 휘적시던 여지운이 선연홍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연락? 왜? 

  “내가 왜 연락해야 합니까?”

  그때 쫄딱 젖은 옷과 신발 드라이 맡긴다고 나간 돈이 얼만데. 퉁명스러운 여지운의 대답에 선연홍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머쓱한 듯 코끝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아, 기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의도도 없었고, 배려도 없군요.”

  “미안합니다.”

  의외로 산뜻한 사과에 민망해진 쪽은 여지운이었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쉽게 사과할 것 같지 않았는데. 저렇게 바로 사과하니까 되레 이쪽이 속이 좁아 보이잖아. 여지운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연홍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요. 제가 연락했으면 됐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죠?”

  “뭐…….”

  “하지만 혹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는 것은 즐거웠습니다.”

  ……작업이라고 말하기엔 무표정이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말 자체가 너무 달다. 여지운의 포크 끝이 치즈 케이크 귀퉁이를 잘랐다. 입안에 뭉그러지는 케이크는 부드러웠지만, 냉동 맛이 났다. 

  점심때 먹었던 초밥은 진짜 맛있었는데. 아.

  “오늘, 점심.”

  “어땠습니까. 입맛에 좀 맞던가요?”

  “맛있었습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잘그락. 얼음이 녹아내리며 소리를 냈다. 잠시 틈을 두고 여지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 가게 포장은 안 해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요?”

  “아, 원래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부탁을 들어줬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사장님이 부탁을 들어줬다니. 그 음식점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라는 뜻일까? 

  백화점 꼭대기 층에 있는 일화선은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됐다. 매일 아침 싱싱한 횟감을 직접 선별해 들여오고, 즉석에서 떠낸다. 예약제로 운영되니 당연히 그 수량에 맞게 재료를 준비하고 다 떨어지면 예외 없이 닫았다. 직업적인 면에서 접근해보자면 고급 음식점답게 공간 활용과 인테리어에 굉장한 신경과 돈을 쏟아 부었다. 일식 위주다 보니 전체적으로 목조 느낌은 간직하면서도 안 쪽 공간은 현대적이었다. 어쨌든 ‘우리 가게는 포장은 절대 안 해드립니다.’하고 대쪽같이 굴던 그 사장이 코스 요리 급으로 포장을 해줬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인데.

  “직업이 뭡니까?”

  “네? 저 말입니까?”

  “여기 그쪽 말고 누가 있습니까?” 

  “아, 그렇죠. 음……, 기쁘네요.”

  뭐가? 여지운의 눈빛을 읽은 것인지 선연홍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과 웃는 모습은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여지운씨가 저에게 질문을 해주는 것은 처음이지 않습니까? 과거까지 다 합쳐서요.”

  “그렇습니까? 딱히 신경을 안 써서 몰랐네요. 그래서 선연홍씨 직업이 뭔데요?”

  “저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이요?”

  “네. 일화선 사장님과도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대학 시절 여지운이 한창 작업 걸고 있던 남자는 시각 디자인이었고 선연홍은 한국화과였다. 퉁실한 몸에 비해 손이 굉장히 가지런하고 예뻤다. 확실히. 그때 바에서 만났을 때 배우고 싶은 게 있어서 유학 갔다고 한 것 같은데 그림인 걸까? 여지운의 시선이 컵을 쥔 선연홍의 손가락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부끄러우니 찾아보진 마시고요.”

  “아, 예에…….”

  저런 말을 굳이 하는 것을 보면 찾아보라는 뜻 같다. 혹은 찾으면 나온다는 말 같기도 했고. 나중에 생각나면 찾아봐야겠네. 여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빨대를 쭉 빨았다. 얼음이 녹은 탓에 약간 밍밍하긴 해도 나쁘진 않았다. 

  헤어질 때의 안 좋은 인상은 몇 번의 대화로 많이 지워졌다. 선연홍은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게 많았고 보기와 달리 말도 퍽 잘했다. 짜증 나고 어색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특히 미국 건축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여지운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선연홍 쪽으로 기울였다. 가득 차 있던 커피는 이미 바닥을 보였다.

  “커피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여지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탁 트인 곳이 아닌, 좀 더 조용하고 좁은,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지운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었다. 저 남자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지운 역시 웃으면 느낌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음, 점심때 일도 있고, 저녁 안 드셨으면 제가 사겠습니다.” 

  당연히 안 먹었을 거라는 전제하에 한 말이었다. 여지운의 머릿속은 이미 근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관한 정보를 뒤지고 있었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선연홍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어쩌죠? 사실은 이 뒤에 약속이 있습니다. 커피 한 잔 정도는 괜찮지만, 저녁은 힘들 것 같습니다.”

  “네? 네? ……아, 뭐. 그래요, 일이 더 중요하죠.”

  “다음엔 제가 사겠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해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 뒤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여지운의 얼굴엔 누가 봐도 애매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니, 웃음이 아니라 짜증이었다.

  이 뒤에 약속이 있다고? 이중 약속인가 뭐지, 대체. 까인 건가? 또? 심지어 선연홍은 그다음이 언제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다음 언제요.’하고 구질구질하게 묻는 것도 싫었다.

  “제 용건은 일단 마무리됐는데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아뇨, 나도 뭐…… 딱히.”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가라 가. 꺼져. 안 꺼지면 죽는다.

  노트북과 책을 챙기던 선연홍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주 사소한 일상을 묻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근데 최근 계속 야근하신 건 맞으시죠?”

  “? 예. 맞습니다. 그건 왜요?”

  “피곤해 보이셔서요. 그렇게 피곤하시면 다른 일도 못 보시겠습니다. 금요일인데.”

  피곤 해 보인다는 말은 왜 자꾸 하는 거지? 설마 지금 얼굴이 훅 갔다고 고도로 까는 건가? 여지운의 미간 사이가 눈에 띄게 구겨졌다.

  “글쎄요, 그보다 내가 뭘 하든 신경 끄시죠.”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연홍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오히려 그를 살펴보는 것은 여지운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외면하다가 결국 출입문 쪽을 슬쩍 돌아봤을 때 선연홍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저 새끼 저거 뭐야?”

  남은 케이크 위에 포크가 무섭게 꽂혔다. 보드라운 크림과 빵은 여지운의 자존심처럼 잘게 뭉그러졌다. 애매하게 구는 선연홍의 행동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것에 신경 쓰고 괜히 떠보는 자신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짜증 나게.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외국물 먹은 새끼라 그런가 하는 행동도 남달랐다. 짧은 순간, 훅 치고 들어왔다가 빠지는 게 보통이 아니다. 싸늘하게 굴다가도 금방 미소 지었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서로 극과 극에서 더 잘 느끼듯 사람을 홀리…….

  “뭔 생각 하냐, 진짜?” 

  혼잣말을 계속하는 거 보면 자신도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클럽을 가든가 섹파를 불러서 온종일 뒹굴겠다고 다짐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모든 게 귀찮았다. 결국, 다시 회사로 돌아가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 * *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샤워하기 전에 넣어놨던 맥주를 꺼내 흔들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수건을 목에 두르고 캔 뚜껑을 땄다. 치익. 살얼음이 적당히 낀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선연홍과 만남 이후 불쾌하게 달라붙었던 감정의 잔재들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맥주를 하나 더 챙겨 들고 소파에 앉았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여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집에 도착했습니까.

  “선연홍? 이 새끼가 또 이러네.”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갈 때는 언제고 또 먼저 연락을 하고 있다. 호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모호했다. 전화기를 소파 구석으로 던지는 것으로 답을 하고 테이블 위의 노트와 펜을 집었다. 뜬금없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어 집안 곳곳에 종이와 볼펜이 놓여 있다. 생각 없이 슥슥 그려 나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시간이 흘러 있었다.

  시간 외 근무했네. 누가 사진 좀 찍어서 회사 홈페이지에 안 올려 주려나? 입맛 쩝 다시고 이미 김이 다 빠진 맥주를 들이켰다. 한 번 집중력이 깨지니 그다음부터는 진도가 안 나갔다. 손을 털고 일어나 다시 주방으로 갔다.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찬장을 뒤지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라면은 안 되지. 몸매를 유지 하려면 이 시간에 탄수화물은 금물이다. 그는 균형 잡힌 가슴선과 탄탄한 복부를 내려 보며 유혹을 이겼다. 

  완전 강제 수절이군. 내일은 정말 몸 좀 풀어야겠다. 약속을 잡기 위해 휴대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뒤지다가 소파 구석탱이에서 겨우 발견했다. 

  맞다. 선연홍 때문에 짜증 나서 집어 던졌었지. 또다시 떠오르는 남자의 얼굴을 흔들어 떨치고 액정을 켰다.

  부재중 17통 문자 7개.

  어? 무슨 부재 전화가 이렇게 많이 왔지? 회사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터졌나? 머릿속에서는 컴퓨터 블루 스크린, 바이러스, 자료 삭제 등 최악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도면 스케치해 놓은 게 없어진 거면 바로 회사를 때려치우겠다. 나름 비장한 결심을 하며 휴대폰을 열었다. 17통의 부재중 전화와, 7통의 문자는 모두 한 사람에게서 온 거였다. 선연홍.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어디 가신 겁니까. 피곤하다고 하시더니 클럽 같은 데 가신 건 아닐 테고, 그렇죠?

  -여지운씨, 집이십니까? 왜 답이 없지요?

  .

  .

  .

  -지금 집 근처입니다.

  마지막 문자까지 확인한 여지운이 눈가를 좁혔다. 선연홍에게서 온 게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봤지만 여전히 그 이름이 떠 있었다. 집 근처? 자기 집 근처라는 건가? 집에 들어갔다고 보고 하는 거?  

  보통 여지운을 보는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호감과 적의. 아니, 하나 더 있다. 호기심.  하지만 선연홍의 생각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답장할까 말까 고민하는 찰나 벨 소리가 울렸다. 마치 여지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여지운입니다.”

  [선연홍입니다. 여지운씨 어디시죠?]

  “갑자기 전화해서 뭔 소립니까?”

  [어디예요? 주위는 조용한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숨을 죽이고 뒤를 쫓는 것 같은 미묘하게 끊어지는 침묵과 미묘한 숨이 섞인 말소리.

  [여지운씨.] 

  “……집인데요.”

  하지만 착각이 아닐까? 이 상황에서 이 남자가 화를 낼 이유는 없으니까.

  [아, 그래요, 그래. 답이 없기에 혹시 답을 보내지 못할 상황인가 싶어서 걱정했습니다.]

  “답을 보내지 못할 상황이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납치라도 당했을까 봐? 참 쓸데없는 걱정이군요.”

  [하하. 남자라고 납치당하지 말란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살피는 듯한 기운은 어느새 사라졌다. 대신 그곳을 채우는 것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였다. “왜, 납치당하라고 고사라도 지내지요?”

  [걱정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그쪽이 왜 걱정 하냐고. 

  “……그것보다 집 근처라는 말은 무슨 소리입니까.”

  [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인데 여지운씨 생각이 나서 연락했습니다.]

  와,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선연홍을 알고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마 ‘뭐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런, 씨발.”

  결국 터진 것은 욕설이었다. 난데없이 욕을 먹은 선연홍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를 대신한 것은 숨소리였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큰 숨이 여지운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프리섹스 주의였다. 애인 여부와 상관없이 취향에 맞는 몸뚱이가 있으면 노골적으로 다가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쾌락이었으며, 그 쾌락에는 거칠 게 없었다.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여지운의 연애는 언제나 순탄 했…… 아니, 아니지. 이건 연애가 아니잖아. 

  [하, 지운씨.]

  “…….”

  [보고 싶네요.]

  더는 안 되겠다. 이런 좆도 아닌 관계.

  “집 근처면 좀 봅시다.”

  못 참겠다.

  [그럴까요, 그럼 어디서 볼까요?]

  “집으로 오시죠.”

  그다지 오래 통화한 것도 아닌데 귓가가 뜨끈했다. 여지운이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여지운씨 집 말입니까.]

  확실한 관심이 있었으면 집으로 오라는 말에 곧바로 응했을 것이다. 원래 역사는 집이나 모텔같이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나곤 했으니까. 하지만 한참 만에 내뱉은 선연홍의 목소리에는 탐탁잖음이 가득했다. 이 남자는 자신과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왜 오기 싫습니까? 그럼 다음에 보죠.”

  물론 그다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없을 거다. 이런 애매하고 미지근한 상황은 딱 질색이었다. 똥이면 피해 가는 게 상책이고, 된장이면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다. 이런 식으로 휘둘리는 것은 평소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끝이다. 다음에는 어떤 지랄을 해도 반응을 안 보일 것이다.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잠깐만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가겠습니다. 동 호수는 문자로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근처 마트에 들려서 뭐 좀 사가겠습니다. 먹고 싶은 것 있습니까?]

  “아뇨. 술은 집에 있으니 그쪽이 좋아하는 걸로 대충 사오세요. 곧 마트 문 닫을 시각이니까 빨리 가셔야 할 겁니다.”

  [예. 그럼 있다 뵙겠습니다. 2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새카맣게 변한 액정을 보던 여지운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단 질러놨긴 하는데 과연 잘하는 걸까, 모르겠다. 아무래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깝단 말이지. 음. 여지운이 턱을 쓸었다. 선연홍은 얼굴을 떠나서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누구는 그걸 매력이라고 하겠지만 그걸 굳이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같은 포지션일 것이 분명한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고 보니 더 이상했다. 그 남자도 분명 자신처럼 상대의 구멍을 쑤시고 흔들고 쌀 텐데, 집까지 불러서 뭘 어쩌자고? 같이 좆이라도 비비자는 거야 뭐야. 

  “에이씨.”

  그걸 모르겠으니까, 그냥 비비고만 싶은지 아니면 좆대가리를 그 남자한테 쑤셔 넣고 싶은 건지 확인 해 보자는 거잖아. 

  여지운은 휴대폰을 충전해 놓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요즘 바쁜 탓에 잠만 자고 나가는 일이 많아 대체로 깨끗했다. 그래도 괜히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삐뚤어진 쿠션이라든가 식탁 위 컵 같은 것을 정리했다. 지금 이 기분은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기대감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날카롭고 빽빽하고 거슬림이라고 하기엔 가볍고 부드럽다. 둘 중 뭐든지 오늘 결정되겠지. 

  화장실에 들어가서 괜히 머리를 넘겼다가 흐트러트렸다가 난리 쳤다. 결국, 자연스럽게 쓸어내리며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안경을 썼다. 굵은 안경테가 사나워 보이는 눈매를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곧바로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드러난 목선이나 넓은 어깨가 흡족했다. 존나 매력 있네, 새끼. 

  밤도 늦었으니 너무 정돈하고 차려입으면 마치 준비한 것 같겠지? 너무 진한 향수 냄새 대신 바디로션을 목덜미에 바르던 여지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모양 빠지게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가지가지 한다. 진짜.”

  딩동. 때맞춰 벨이 울렸다. 너무 후다닥 나가면 또 없어 보일 것 같아서 잠시 뜸을 들인 후 문을 열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틈 사이로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가을을 몸에 감고 온 남자는 저기 떠 있는 달처럼 하얗고 서늘한 얼굴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에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오시죠.”

  여기요. 선연홍에게서 검은색 종이 가방과 마트 봉지를 함께 건네받았다. 봉지 안의 유리병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마트 봉지는 알겠는데 이건 뭐지.

  “이건 뭡니까?”

  “오늘 거래처 사람에게 받은 건데, 저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마 양주인 것 같은데 놔뒀다가 드세요.”

  “양주요?” 

  상자를 꺼내는 손은 잔뜩 신나 보였다. 종이 상자 뚜껑을 열어 그 안을 힐끔 보던 여지운이 입을 열었다.

  “이 브랜드에 30년산이면……. 제법 고가일 텐데요.”

  “그런가요? 술에는 관심이 없어서 가격은 잘 모르겠군요.”

  그런 새끼가 그 비싼 코냑을 시키냐, 하는 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술을 안 마신다면 더 고마운 일이었다. 이게 다 자신의 몫이라는 뜻이니까.

  “아, 이거 번번이 고맙습니다. 나는 뭐 해준 것도 없는데 얻어먹기만 하네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지운의 인사에 선연홍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 정도가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이라는 건 대체 어느 정도란 거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예, 초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급 원단에 감싸인 다리가 현관에 닿았다. 선연홍이 신발을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고 거실로 들어섰다. 

  “어서 와요, 선연홍씨.” 

  여태껏 이 집에 들어온 사람 중 멀쩡하게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여지운의 밑에 깔려 자지러지다가 갔지. 그럼 이 남자는 어떨까? 과연 자신과 섹스하지 않고 나가는 최초의 사람이 될까, 아니면 모두가 그랬듯 구멍에 좆을 꽂고 울게 될 것인가. 여지운은 머릿속에 온갖 음란한 생각을 한 채 선연홍을 보며 상냥하게 웃었고. 

  탕. 

  문이 닫혔다.

  

  * * *

  

  선연홍은 “실례하겠습니다.”하고 예의 바르게 말한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지운은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선연홍에게서 빼앗듯이 코트를 가져왔다. 

  “불편하잖아요, 걸어 놓을게요.”

  손바닥 사이에 착 감기는 롱코트는 분명 명품이었다. 얼마나 잘 나가는 예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개인이 사기엔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선연홍의 코트를 옷걸이에 걸다가 어깨 부분이 살짝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실로 나오자 선연홍이 멀뚱히 서 있다. 하얀 전등 아래에서 새카만 머리카락 역시 물기에 젖어 반짝였다. 

  “밖에 비 옵니까?”

  “아, 많이는 아니고 조금이요. 우산 쓰기엔 조금 애매한 날씨입니다.”

  여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베란다 쪽 블라인드를 걷었다. 그의 말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솜털처럼 같은 짧은 비가 약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예쁘네요.”

  어느새 옆으로 온 선연홍이 여지운을 따라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거대하고 까만 하늘 아래에는 네온사인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드문드문 우산을 쓴 사람들이 낙엽이 내린 거리를 종종 걷고 있었다. 몇 달 뒤에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되면 더욱 화려하게 물들 것이다. 종교는 없지만, 크리스마스와 그 후 연말 특유의 분위기를 퍽 좋아했다.

  “그렇습니까?”

  비싼 동네의 신축 아파트에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모른다. 뭣 같이 더럽고 치사한 회사 때려치우려다가도 대출금 생각만 하면 분노가 사그라졌다. 정말 거지처럼 살았지. 당시에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했지만, 막상 이렇게 야경을 내려 보고 있으면 그때의 고생이 잊혔다. 그때 집에 숙이고 들어갔으면 평생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옛 기억을 떠올린 건 여지운 만이 아닌 듯했다.

  “여지운씨를 만날 땐 항상 비가 오네요. 그때도 그랬죠? 우리 마지막.”

  “…….”

  두 사람의 마지막은 군데군데 폭행과 폭언으로 얼룩져 반듯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했다. 저번에는 은인 어쩌고 하더니 또 굳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선연홍을 돌아봤지만, 그는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침묵은 흐르는 빗물과 함께 씻겼다. 창문에 비치는 선연홍의 시선은 과거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여지운씨를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이 제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군요.” 

  “폭언이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시다시피 그때는…….”

  “네, 압니다. 제가 당신에게 원인 제공을 했다는 걸. 그때는 어리기도 했지만, 처음이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살피지도 않고 무작정 쫓아다니기만 했죠. 여지운씨가 화냈던 것도 이해합니다. 마지막 날, 여지운씨가 제게 침을 뱉고.”

  “…….”

  “턱을 후려쳤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그 질문은 이상했다. 무슨 생각을 했겠냐니. 당연히 기분 나쁜 것 말고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나? 혹시 뭔가 숨은 뜻이 있나 싶어서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담담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금 마음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좀 제대로 말해 줬으면 좋겠다.

  “당신은 제게 한여름의 녹음(綠陰) 같은 사람이기도 했고, 동시에 겨울에 내리는 눈 같기도 했습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처 맞은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녹음, 겨울 얘기는 뭔데? 예술을 해서 그런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찬란함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죠. 보기만 해도 좋았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여지운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건데?’로 꽉 차 있었다. 그럼에도 곧장 잘라내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자신은 선연홍이 꽤 마음에 드나 보다. 조련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은 더러운데 묘한 승부욕을 일으켰다.  

  “자, 비도 오고 한잔하기 딱 좋은 날씨 아닙니까?”

  “그러네요, 여지운씨.”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선연홍은 어느새 여지운을 보고 있었다.

  

  * * *

  

  조촐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얼음을 넣은 위스키와 치즈, 그리고 선연홍이 사온 멜론과 구운 베이컨.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급하게 차린 것치고는 그래도 제법 괜찮았다. 

  챙. 차가운 유리잔이 서로 부딪쳤다. 알싸한 알코올이 입안에서 맴돌다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뜨거운 감각이 아랫배에 퍼지자 몸뚱이가 긴장했다. 독한 술의 첫 잔은 항상 성(性)적 긴장감과 닮아 있었다. 

  여지운은 조각난 치즈를 집어 먹었고, 선연홍은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니 약한 건 아닌 듯했다. 노래하나 틀어 놓지 않은 거실에는 침묵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어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실 8년 만에 만나는 동문과 단둘이 집에서 술을 마시는 상황은 흔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거실 소파, 여기서 몇 발짝만 더 가면 문이 있고, 그 문고리를 돌리면 침실이 있다. 아주 폭신하고 커다란 침대가 있는. 여지운이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비웃음과 닮은 미소는 상대를 유혹하겠다는 의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술 마시다가 피곤하면 자고 가도 됩…….”  

  “미국에 있을 때는.”

  선연홍은 그 유혹을 손쉽게 잘라냈다. 여지운의 의도를 알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하필 타이밍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헛웃음이 터졌다. 새끼, 존나 철벽 치네. 

  “처음 미국에 갔었을 때는 힘들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동방 작은 나라에서 온 뚱뚱한 남자를 반기지 않았죠. 이상했어요. 차별이라는 게 말이죠. 저보다 훨씬 더 뚱뚱하고 덩치 큰 사람들도 많았는데 유독 제게만 그러더군요.”

  “아, 네에.”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요. 학교는커녕 거의 1년 가까이 집 밖에도 안 나갔습니다. 방안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내도록 그린 것 같습니다.” 

  과거의 선연홍은 참 구질구질했다. 외모를 떠나 자신감이 없었고 자존감이 낮았다. 그런 종류의 사람은 여지운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괴롭히거나 차별하면 더 좆같이 굴어야지, 분명 아무 말도 못 하고 빌빌거렸겠지. 안 봐도 뻔했다.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했고, 하는 거라곤 그저 잠자는 것과 그리는 것뿐.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방 밖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을 땐…….”

  선연홍이 쥐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백열등이 뿜은 빛은 유리컵과 얼음, 그리고 호박색 술을 투과하며 빛그림자를 만들었다. 

  “세상이 뒤집혀 있었습니다.”

  “세상이 뒤집혀요?”

  “네. 나는 변한 게 없는 데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내 얼굴을, 몸을 꼬집고 수군거리던 이들이 다른 눈으로 보더군요.”

  선연홍의 말끝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계기야 어쨌든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즈음엔 뭔가 몰두할 게 필요했다고 할까요? 외견은 날이 갈수록 변하고 절 보는 사람들의 시선 역시 동경과 호기심에 반짝였죠. 그래서 저는…….” 

  선연홍이 고개를 떨구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타인에게 박한 여지운마저 시선을 뺏길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짐작 갔다. 동경과 호기심, 관심.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좋은 껍데기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아주 큰 행운입니다. 그걸 왜 불편해하는 거죠?”

  이해가 안 되네.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담긴 호감과 혐오, 그 온도 차이가 견디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남들이 뭘 어떻게 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보기보다 소심하시네.”

  비꼬듯이 던져진 말에 선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여지운씨 생각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사귄 친구여서 더 그랬겠지만.”

  “하하……. 친구요.”

  여지운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동동 떠있었다. 마지막으로 사귄 친구라니?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선연홍과 하하 호호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여지운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몸으로 쌓는 관계 아닌 감정 교류를 말하는 거면 쌀알보다 작고 가벼운 관심이 다였다. 선연홍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관심이 있긴 했네. 짜증나서 팰 만큼. 

  “한국에 가면 꼭 찾고 싶었습니다. 여지운씨 인기 많았잖습니까.”

  군대에 갔을 때 처음 만났던 선임은 여지운보다 세 살이 많은 상병이었다. 그는 동기나 일병들에게는 ‘개선임’이라고 불릴 정도로 뭣 같은 성질을 자랑했다.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몸매는 제법 괜찮았다. 등이 곧고 허리가 낭창했거든. 처음 여지운을 보고 개지랄을 하며 소리 지르던 선임은 제대할 때쯤엔 개처럼 엎드린 채 여지운의 성기를 꽂았다. 

  “음.”

  잘 조이고 허리도 잘 돌렸는데, 잘살고 있으려나.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았잖습니까.’가 아니고 지금도 많습니다.” 

  “그렇죠.”

  선연홍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잘난 척하는 게 아닌 사실이었으니까.

  “여지운씨를 만났던 그 여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무척 선명했습니다. 10년 다 돼가는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요.”

  선연홍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며 술잔을 들었다.

  “여지운씨가 웃던 얼굴도, 화내던 얼굴도, 욕을 하는 것도. 흥분해서…….”

  “……음?”

  그는 반쯤 남은 술을 털어 넘기고선 한숨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여지운의 시선이 몽우리 진 입술 끝으로 향했다.

  “때리는 것까지 모두.”

  뭐?

  “너무 선명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여지운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선연홍을 봤다. 그는 아주 담담하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방금.”

  “네?”

  “아닙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다. 여기에서 ‘흥분해서 때리는 것’이라는 말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여지운씨가 좀 흥분하셨잖습니까. 물론 제가 다 잘못해서 그런 거지만요.”

  아, 그래. 여지운은 그제야 수긍했다. 선연홍이 말하는 ‘흥분’은 ‘그 흥분’이 아니라 그냥 화가 났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깜짝이야. 애매하게 말을 하고 난리야. 왠지 머쓱해 콧등을 매만졌다.

  늦가을에서 겨울 방학하기 전까지는 선연홍을 많이 괴롭혔다. 소리치고, 욕하고, 때리기까지. 이상한 점은 선연홍이 여지운을 가장 열렬히 쫓아다녔던 시기도 그때였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었었다. 이쯤 하면 안 쫓아다니겠지 싶을 정도로 모욕을 퍼부어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엿 먹으라고 일부러 이렇게 구나 싶어서 딱딱한 엿을 실제로 사서 입에 처넣은 적도 있었다. 빵떡처럼 뽀얀 뺨이 시뻘게져선 땀을 흘리는데…….  

  “하지만 좋았습니다.”

  좋았다고? 여지운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연홍은 어떻게든 그 시절을 포장하고 싶은 듯했다. 

  “제게 여지운씨는 선명한 색채입니다. 눈을 감아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예? 아, 그랬습니까.”

  “아름다워요. 여전히, 그때처럼.” 

  벌어진 입에서 뿜어진 말은 막 만들어진 솜사탕처럼 달고 뜨거웠다. 여지운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것은 연거푸 마신 술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아무래도 지금 분위기가 음, 그거 같지? 여지운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요?”

  “…….”

  아름답다는 말까지 하면서도 선연홍은 정작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창문에 처덕처덕 달라붙는 빗줄기, 그 위로 번지는 작은 빛들. 테이블 위의 치즈, 술잔, 그 사이에서 두 남자는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런 표정으로 아름답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다음이 없다. 선연홍의 뺨과 광대 부근 홍조가 어렸다. 아주 잘 익은 사과 같았다. 조금만 더 하면 그 사과를 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면 먼저 사과나무를 잡고 흔들면 되는 거 아닌가? 여지운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기회는 여러 번 있었음에도 결정적인 것은 없었다. 가벼운 잽을 여러 번 날리면 뭘 하나.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데. 선연홍은 옛 추억만 계속해서 소환했다. 대학 시절, 석 달이 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 여지운이 자신에게 얼마나 강렬했는지에 관한 찬양만을 계속, 계속. 과거 따위 엿 먹으라고 해.

  “그래서.”

  뻗어져 나온 손이 선연홍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테이블이 덜컹거리며 그 위의 술잔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흔들렸다.

  “그래서, 지금 나랑 키스할 겁니까, 말 겁니까.” 

  “……어떨 것 같습니까.”

  유혹당한 남자가 웃었다. 나른하게 휘어진 눈 끝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이거, 잘못하다간 내가 유혹당할 것 같네. 본능적인 경계심을 삼키며 그에게 상체를 조금 더 기울였다. 손가락 사이로 넥타이가 흘러내리며 아찔한 숨결이 훅 다가왔다. 

  “여지운씨, 저는 8년 전에도 지금도, 같습니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팔을 잡아당겼다. 눈앞에서 검은 눈이 반짝거렸다. 예쁘다. 

  “어땠는데요?”

  그는 대답 대신 여지운의 아랫입술을 눌렀다. 얇은 표피 위로 차가운 손끝이 닿았다. 아, 입이 벌어지며 그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혀를 꾹 눌렀다. 축축한 살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넘실대던 타액이 넘어가며 목구멍이 열렸다.

  “입 벌려 봐요, 더.” 

  빗소리에 섞이는 목소리는 은밀한 의도가 가득했다. 여지운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더 벌렸다. 

  “하, ……음.” 

  가까이 다가온 선연홍이 여지운의 혀를 빨았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는 일반적인 키스가 아니라 좀 더 기묘하고 새로운. 일방적으로 혀가 빨리는 느낌은 상당히 야릇했다. 그리고 좋았다.

  연애를 시작할 때 딱히 날짜를 기억하지 않았다. 연애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했고 귀찮았다. 언제였더라, 한창 떡 치고 난 뒤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상대방이 ‘지운씨. 우리 무슨 사이야?’ 하고 물었던 적이 있다. 무슨 사이? 만나면 떡 치는 것밖에 없는데 무슨 사이랄 게 있나?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뿜어내며 여지운이 방긋 웃었다.  

  ‘섹파지.’

  

  * * *

  

  비 오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선연홍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지운씨, 우리 무슨 사이입니까?]

  샤워 후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맥주를 마시던 여지운이 입술을 핥았다. 쌉쌀한 거품 잔재가 혀끝 아래서 녹아내렸다. 무슨 사이냐니, 그거야 당연히,

  “애인이죠, 안 그런가요? 선연홍씨.”

  그 통화를 기점으로 출퇴근 시에는 물론이고 바쁜 와중에도 선연홍과의 연락은 틈틈이 이어졌다. 주말엔 드라이브도 하고 영화도 봤다.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에 타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라 새로웠다. 분위기 좋은 음식점에서 밥도 먹었다. 주로 선연홍이 데리고 갔는데 한 끼로 먹기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가격대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분위기도 맛도 좋았다. 

  선연홍은 여지운에게 자주 뭔가를 안겼다. 명함 케이스, 넥타이, 커프스 버튼, 향수 같은 소소한 것에서부터 지갑이나 서류 가방같이 가격대 있는 선물도 있었다. 여지운이 먼저 요구한 적도 없었고, 갖고 싶다고 티를 낸 적도 없었다. 여지운도 나름 사회적 위치가 있었고, 또래보다 더 벌기 때문에 딱히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사주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취향이 어찌나 고급스러운지 그가 준 선물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하긴 하나같이 명품이라 솔직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 덕분에 여지운의 소지품은 선연홍에게서 받은 것으로 하나, 둘 바뀌고 있었다.

  선연홍은 대학교 때 전공 그대로 한국화를 직업으로 삼았다. 화가라고 하면 보통 배고픈 예술인을 떠올리는데 그는 한눈에 봐도 여유가 넘쳤다. 선연홍이 괴롭힘 당했던 이유도 학교 미대 건물 올려주고 들어온 거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시발점이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알아보지 않았음에도 런 소문이 돌 정도면 상당한 재력가 집안임에는 분명 할 것이다. 

  데려가는 곳이나 선물들, 자동차, 몸에 걸치는 것 모두가 고가였다. 특히 코트와 신발같이 몸에 걸치는 것은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었다. 

  선연홍과의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좋았다. 좋아하는 영화 스타일이라던가, 공연, 음식 등 제법 통하는 것이 많았다. 차갑고 도도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그는 굉장히 순한, 음. 그래. 순한 스타일이었다. 초반의 그 짜증 나는 밀고 당기기를 하던 것이 무색하게 애인으로서의 선연홍은 굉장히 순종적이고 다정했다.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거절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곧 있을 회의 자료를 준비하던 여지운이 선연홍에게서 온 문자를 내려 보며 턱을 쓸었다. 

  -까페 J.UN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것. 오늘 선연홍과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퇴근 직전 일이 터져 자연스럽게 야근하는 분위기가 됐다. 약속은 당연히 미룰 수밖에 없었다. 만날 시각이 다 돼서 못 나가겠다고 통보했다. 심지어 상대방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약속을 어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기다리는 것은 더 싫어했다. 아무리 호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늦으면 정떨어졌다. 

  -늦게라도 괜찮으니 얼굴 봐요. 기다릴게요.

  다정함이 묻어나는 문자를 보던 여지운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었다. 사회는 불황이라고 난린데 이놈의 회사는 왜 이리 바쁜지. 아이러니하게도 경제가 나쁠수록 업종 변경이나 인테리어를 바꾸는 일이 많았다. 밑에 애들 다 뺑이 치는데 쌩 까고 퇴근할 수도 없고. 

  “아, 진짜 짜증나고 피곤하다.”

  벌써 몇 잔째 비운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회의실로 향했다. 퇴근 시간에 회의하는 뭣 같은 회사. 분노는 예민함을 만들었고, 곧 먼지처럼 쌓였다. 끝이 보이지 않던 일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마무리됐다. 가뜩이나 야근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부장 새끼가 이런 흔한 컨셉이 말이 되냐며 지랄을 했다. 목 끝까지 나온 ‘그럼 네가 해보든가.’ 라는 말을 겨우 삼켰다. 퇴근 시간 즈음 연락한 것 말고는 선연홍에게 연락도 못 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원래 약속된 시간에서 4시간이 지나 있었다. 

  당연히 갔겠지, 뭐라고 해야 하나, 생각하며 전화기를 꺼내자 마침 선연홍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지운입니다.”

  [선연홍입니다. 마쳤습니까?]

  “예, 막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합니다. 회의가 너무 길어져서…….”

  [아, 괜찮습니다. 고생 많았죠? 저한테 풀어도 됩니다. 직장 경험이 없어 도움은 못 드리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할 수 있으니까요.]

  “…….”

  [그러니까 저한테 화내도 됩니다. 스트레스 받는 거 다 말하고 풀어요.]

  부정적인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쏟아내는 사람은 후련하겠지만 듣는 사람은 감정의 잔해가 쌓이게 된다. 누구도 어두운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연인이라 해도 처음 한두 번은 열심히 위로해주겠지. 하지만 그 일이 반복 되면 관계는 점점 일그러지고 틀어지게 된다. 감정의 쓰레기통 노릇 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선연홍은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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