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 왜 이렇게 답답하냐. 몸을 뒤틀어 봤지만,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그리고 묘하게 강압적이고 답답한 뭔가가 몸을 휘어 감고 있다. 뱀인가? 거대한 뱀이 지금 몸을 조이고 있는 걸까.
“……으으.”
저혈압 탓에 평소에도 한 번에 깨지 못했지만, 오늘은 더 했다. 누군가 무자비하게 눈꺼풀을 누르고 있는 듯 뻑뻑하고 무거웠다.
“몇 시냐……?”
습관적으로 휴대전화기를 찾아 바닥을 더듬던 여지운의 손끝에 따뜻하고 매끄러운 게 닿았다. 이게 뭐지? 가만히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시선 너머로 허연 것이 음산한 곡선을 그리며 펄럭였다. 귀신인가? 뻑뻑한 눈을 다시 한 번 감아다가 떴다. 아, 커튼이구나. 바람에 날리는 흰 커튼을 귀신으로 착각한 듯 했다. 새카만 하늘 아래 흩날리는 눈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딜까.
창 밖 풍경에 향했던 여지운의 시선이 방안을 천천히 훑었다. 채도가 높지 않은 벽지가 발린 방은 몰딩이 들어가지 않아 탁 트이고 시원 해 보였다. 옆쪽에는 심플한 모양의 책상과 스툴이 배치돼 있었다. 딱히 가구가 없음에도 창문이 워낙 크고 넓어서인지 허전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런 구조는 자칫 허접해지기 쉬운데 깔끔하게 잘 정리 했다. 직업병은 숨길 수 없는지 공간에 대한 평가를 하던 여지운이 문득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하고 중얼거렸다. 미간에 실금 같은 주름이 지며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졌다.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기억을 헤집었다.
원나잇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최근에는 원나잇을 한 적이 없다. 왜? 애인이 있으니까. 아주 마음에 드는 그 애인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호텔을 예약했다. 끝내주는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기 위해서. 그래, 애인. 순하고 다정한 애인, 선연홍.
“……!”
그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여지운의 심장이 덜컹댔다. 식은땀이 순식간에 맺히고 온몸에 좁쌀 같은 소름이 일어났다.
“잠든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할 텐데 더 자요. 지운씨.”
“헉.”
따뜻한 숨이 뒷목에 닿았다. 방안에서 팔락거리는 공기와는 전혀 다른 뜨거운 숨이었다. 여지운이 눈동자만을 돌려 옆을 봤다. 반듯한 이마와 옅게 달아오른 뺨의 남자가 눈을 감고 있었다.
“…….”
고통과 쾌감. 그리고 두 사람이 내 뿜던 열기, 숨, 소리들……. 격렬하고 야릇한 영상이 여지운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난잡하게 놀았다고 자부하는 여지운마저도 할 말을 잊을 정도로 질척임이 난무했다. 쾌감을 뒤쫓는 행동은 본능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 미, 미친, 이 새끼.”
먹잇감을 발견한 살쾡이처럼 순식간에 선연홍에게 올라탄 여지운이 그의 목을 졸랐다. 급소가 막혀 숨구멍이 조여들 텐데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미소 지었다. 그의 목을 조른 여지운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분노는 고통마저 잊게 했다.
“죽인다고 했지? 내가.”
“네. 지운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내가 못 할 줄 아냐?”
“아니오. 지운씨가 나 때문에 화내는 걸 보니까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기뻐요.”
선연홍은 제 목을 옥죄고 있는 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창문을 열어 놓은 탓에 방 안에는 찬 기운이 가득 찼다. 그 와중에 선연홍의 온기는 여지운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은 점점 새빨개지는데도 여전히 웃고 있다. 실체 없는 불안과 소름이 여지운에게 속삭였다.
이 남자는 미쳤다고.
“미친 새끼.”
결국 먼저 물러난 건 여지운이었다. 제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난 뒤에야 선연홍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쿨럭. 여지운이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어느새 흥건한 땀에 얼굴이 젖었다. 분노 때문에 한 발짝 물러서 있던 고통이 여지운의 몸뚱이를 잡고 늘어졌다. 관절이고 근육이고 욱신거리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무리할 정도로 벌리고 파헤쳐졌던 그곳은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번졌다.
“너 일부러 나 찾았냐? 복수 하려고?”
어제 선연홍이 한 말을 되돌려보면 건즈앤로즈에서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연홍은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교제를 할 생각이 없었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며 사람을 환장하게 했다.
“너, 진짜 뭐 하는 새끼야?”
“제가 지운씨에게 복수를 왜 합니까?”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그의 머릿속엔 지금 당장 이 좆같은 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참을 인(忍)자를 수십 수백 번을 읊으며 침대 밖으로 발을 내 디뎠던 여지운이 ‘헉’ 소리와 함께 허리를 구부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선연홍이 그를 부축 하려 했지만 매몰차게 내쳤다.
“많이 아파요? 미안합니다. 처음이라 조절이 안 된 것 같습니다.”
“닥쳐, 닥쳐!”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제대로 서지도, 앉지도 못할 정도로 힘겨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드러난 살갗엔 격렬했던 시간과 해소된 욕망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목덜미, 쇄골, 가슴. 배, 허벅지 할 거 없이 치열과 울혈이 가득했다.
선연홍이 침대 밖으로 내려오자 여지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 뒤 과장되게 어깨를 펴는 동작은 천적을 만나 가슴 털을 부풀리는 소동물 같았다. 귀여운 남자. 선연홍은 터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호텔 전화기를 들었다.
“지운씨, 뭐 먹고 싶은 것 있습니까.”
“…….”
“대답이 없으시네요. 그럼 제 마음대로 주문하겠습니다. 아, 여기 1802호입니다. 크리스마스 특선 두 개 부탁합니다. 하나는 커피 말고 녹차로 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선연홍이 옷장에서 가운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본인이 입고 나머지는 들고 여지운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엉거주춤 서 있는 이 자세에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불구덩이에 빠질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지금 그를 두드리는 고통은 컸다.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가운 입어요.”
그래도 여지운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가운을 그의 어깨에 걸치고 소매통에 팔을 끼워 넣어 입혀 주었다. 심지어 허리끈을 졸라매 리본까지 맸다. 퍽 만족스러운지 흐뭇한 얼굴로 여지운의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겼다.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다정한 연인이다. 하지만.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지금까지 나 만나면서 연기 한 거냐?”
“예? 연기라니요? 전 항상 지운씨에게 진심입니다.”
“진심? 지금 말장난 하냐? 욕 처해달라고 해놓고서 갑자기 주……인님이라고 부른다고 하질 않나, 욕해달라고 하질 않나, 또 사람을…….”
선연홍은 자신을 지배해달라는 둥 개소리를 해놓고 돌변했다. 꿇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여지운의 턱을 움켜쥐고 질척이는 키스를 했다. 닫혀 있던 몸을 열어, 알고 싶지 않던 쾌감까지 퍼부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 쾌감이라는 것이 여지운의 세계를 뒤흔들었을 정도라 화가 났다. 비참함과 처참함까지 모두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것도 사실입니다만, 그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게 뭔데.”
“섹스.”
입술 양쪽 끝이 벌어지며 혀가 윗니에 살짝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그리고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닫히며 그 사이로 바람이 빠진다. 섹스라는 단어는 그렇게 내뱉어졌다. 선연홍에게서 그 단어를 듣자마자 여지운이 얼굴을 찌푸렸다. 섹스가 기분이 좋다는 말은 인정하지만 그걸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선연홍은 새로운 것을 접해서 잔뜩 신이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살짝 내리뜬 눈이라든가 촉촉한 입술 같은 것이 어딘지 모르게 수줍어하는 것도 같았다.
왜 저래.
“무슨, 섹스 처음 해 본 얼뜨기처럼.”
“처음 맞습니다.”
“……뭐?”
여지운은 이번 크리스마스 연차를 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원래 연말 연초는 가게 인테리어 바꾸는 일이 많아서 바빴다. 야근은 일상이었고, 밥 먹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했다. 그 여파가 아직 남아 있나? 헛소리가 다 들리네.
“처음 맞습니다. 여지운씨가 처음이에요.”
하지만 선연홍은 여지운이 착각 혹은 외면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담담했고 진지한 얼굴엔 하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진짜 돌겠네.”
여지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변태부터 시작해서, 스토커, 마조, 사디, 이제는 첫, 동정남까지, 동정남. 동정……. 하, 지랄도 이 정도면 염병 수준이네. 지랄 염병이다.
“네가 고자, 아니 동정이라고? 이게 어디서 구라를 쳐.”
“어째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선연홍은 눈을 깜빡이였다. 생기 넘치는 얼굴은 여전히 반짝였지만, 저 껍데기에 속으면 안 된다. 섹스가 처음이라는 동정새끼가 온종일 한다고? 여지운이 남자와 놀아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뒤가 뚫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 말인즉슨, 아예 뻑뻑한 황무지란 뜻이다. 좆대가리를 어찌어찌 처넣은 것도 놀라운데 처음인 사람을 느끼게까지 한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나? 장사 한 두 번 해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구라를 쳐도 저런 구라를. 섹스의 신이 현신한 게 아니고서야 동정남이 그렇게 사람을 잘 후릴 수는 없다.
“…….”
여지운은 좋고 싫음이 분명했다. 그는 질척이고 지저분하게 노는 것이 좋았다. 떡칠 때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육체도 정신도 모두 흠뻑 젖기를 원했다. 여지운이 지금 가장 심란한 이유는, 선연홍과 했던 섹스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섹스를 다 합쳐 가장 강렬하고 폭발적이었다는 것이다. 맨 처음 몸이 열릴 때 그 극심한 고통마저도 기묘하게 다가왔다. 흠뻑 젖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녹아내렸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 아니다. 사실 그런 생각도 못 했다.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좋다는 감정만이 여지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근데 뭐? 동정한테 뒷구멍을 후벼 파이면서 질질 짰다고? 그거야말로 헛소리다. 절대 인정 못 한다.
“됐다. 개한테 물린 셈 친다.”
여지운의 머릿속에서는 아직 이런저런 생각이 튀어 올랐지만, 일단은 모든 게 귀찮고 피곤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니 허용치를 넘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젓던 여지운이 탁자 위에 놓인 옷가지를 발견했다.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갠 옷 옆에 걸레짝이 된 여지운의 옷도 있었다. 하긴 어제 그 난리를 쳤는데 멀쩡할 리 없었다. 속옷은 물론이고 셔츠와 바지까지 구겨져 있다. 하루 사이에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너무.
가운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 선연홍의 셔츠를 껴입었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옷인 것처럼 스스럼없었다. “으흑.” 부드러운 면이 처참하게 씹혀 너덜대는 젖꼭지를 스칠 때 헛숨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셔츠와 바지를 다 입은 여지운이 코트를 걸쳤을 때까지도 선연홍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게 더 불안했다. 저 남자는 정상인의 범위를 벗어났다. 슬쩍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지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근육이 바짝 수축했다.
“아직 이브인데요? 크리스마스 때까지 온종일 뒹굴겠다 안 했습니까?”
“…….”
“……그러니까 못 나가요.”
포식자로서 본능이 깨어난 선연홍이 야릇하게 웃었다. 여지운이 주춤 물러섰다.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여지운이 제 발을 내려 보았다.
저 미친 새끼가 달려들면 이길 수 있을까. 정 안되면 컵으로 대가리라도 부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탁자 위 스탠드 기둥을 슬쩍 쥐었다.
[딩동]
벨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현관문으로 향했다. 꿀꺽. 침을 삼킨 여지운이 뒷걸음질치며 현관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선연홍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였다.
“누구, 아…… 씨발, 목 아파. 누구십니까.”
-룸서비스 왔습니다. 손님.
지금 이 상황에서 룸서비스고 지랄이고 말도 안 된다 생각했지만,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룸서비스 왔단다. 문 열게.”
여지운의 손이 문고리에 닿은 순간 등 뒤로 체온이 느껴졌다. 선연홍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훅 달라붙었다.
“아으으.”
아, 진짜 미치겠다. 한번 자극받은 몸뚱이는 조금의 감각으로도 예민해졌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존심이 상했다. 귀를 스친 손이 여지운의 뺨을 미묘하게 건드리며 뻗어 나갔다. 그가 목을 살짝 움츠린 순간, 선연홍이 픽 웃으며 문을 열었다.
“룸서비스 왔습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바람과 함께 스며든 호텔직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선연홍이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화끈거리는 뺨에 분노가 실려 파드득 떨렸다.
개자식이, 끝까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사흘을 예약했기 때문에 아직 하룻밤 더 묵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는 여기 머무를 수 없었다. 이 모든 사달의 중심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사나운 얼굴의 여지운이 뒤를 돌자 선연홍이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애정이 묻어 있었다.
“정신 나간 놈.”
턱 근육이 불거질 정도로 이를 꽉 사려 문 여지운이 그 분노를 모두 모아 무릎으로 선연홍의 중심을, 중심을 깠다. 뻑.
“윽.”
아무리 선연홍이라도 이 상황에서 급소가 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방심한 듯 했다. 허리를 구부리며 배를 감쌌다.
“이거나 처먹어라!”
고간을 찬 것도 모자라 주먹으로 선연홍의 턱을 후려갈겼다. 반쯤 열린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트롤러 손잡이를 쥔 채 굳어 있는 호텔 직원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의 복도에서는 캐럴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트롤러 위의 그릇을 낚아채 선연홍을 향해 던졌다.
“이 변태 새끼야, 마주치면 엉덩이에 딜도 처넣을 줄 알아라.”
여전히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아프고 욱신거렸지만 어기적대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일부러 더 턱을 꼿꼿하게 쳐들고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침묵이 가득했다.
“아……. 저, 손님. 괜찮으십니까?”
호텔에서 일한 지 3년이 넘어가지만 처음 겪는 상황에 놀라 굳어있던 호텔 직원이 배를 감싸고 웅크린 남자를 조심스레 살폈다. 본인도 남자인지라 급소를 채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다. 염려와 걱정을 가득 담고 손님의 어깨를 조심스레 짚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고객님이 갑자기 “하하.”하고 웃었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나갔나……?
“하하, 여지운씨. 진짜 귀여워.”
한참을 어깨를 떨며 웃던 선연홍이 고개를 들었다. 모난 곳 없이 매끄러운 얼굴에 옅은 홍조가 꽃처럼 피어 있었다. 그는 머리 위로 쏟아진 채소 조각을 털어 냈다. 달큼하고 상큼한 유자 소스 향이 코 안으로 스며들었다.
발이 붕 뜬 것처럼 같은 고양감이 느껴졌다. 저 남자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지만, 설마 급소를 찰 줄이야. 어떻게 저런 선명하고 다채로운 사람이 있을까. 정말 산뜻하고 뚜렷하다. 역시 잘못 보지 않았다. 오랫동안 잊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역시 선연홍에게 여지운은, 여지운밖에 없었다.
* * *
어떤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무너지듯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등이 축축 했고, 손바닥과 목덜미에도 땀이 흥건했다. 억지로 내리눌렀던 분노는 익숙한 장소에 도착하고 나자 터지듯이 폭발했다.
“후…….”
비척비척 일어나 코트를 벗어 거실에 내팽개치고 마구 짓밟았다. 발아래에서 구겨지는 옷이 마치 지금 자신의 심정 같았다.
“씨발 새끼.”
누군가에게 제압당한다는 느낌은 상당히 생소했고 복잡했다. 하나의 감정으로 단전 짓기 어려운
“미친! 미친 놈!”
거친 숨이 터져 나오며 뒤늦게 몸이 쑤셨다. 허벅지에서부터 배꼽 아래는 더했다. 누군가 라이터로 똥꼬를 지지는 것 같은데다가 그 똥꼬에 심장이라도 달린 듯 욱신댔다. 아무래도 선연홍의 좆을 차는 게 아니고 아예 부러트리고 나올 걸 그랬다.
“일단 씻자, 씻고 잠이나 자자.”
욕실로 향하는 여지운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쏴. 머리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밀폐된 샤워부스는 이미 뿌연 수증기로 흐렸다.
후두둑. 물이 떨어질 때마다 몸이 떨렸다. 평소라면 경쾌하게 느꼈을 물줄기는 뾰족한 나뭇가지처럼 몸을 찔렀다. 특히 새빨갛게 부푼 젖꼭지는 참혹할 정도였다. 쓰라림과 따가움을 이기지 못한 여지운이 결국 수압을 내렸다. 그는 물방울이 촘촘하게 달라붙어 보이지 않는 거울을 노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입안은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먹은 듯 깔깔했다. 머뭇대던 손끝이 아래를 더듬었다. 부푼 살덩이가 닿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았다. “헉.” 제 행동에 제가 놀라 손을 뗐다.
“…….”
참혹 할 정도로 부어 있긴 하지만 터지지도 찢어지지도 않은 듯 했다. 다행이었다.
“하, 다행? 다행이라고. 이 미친.”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여지운이 손바닥으로 거울을 치자 송골송골 맺혀있던 물방울이 팍하고 튀어 올랐다.
“어? 어!”
거울을 닦아내는 손이 빨라졌다. 뿌연 연기가 조금씩 녹아내리며 상을 주듯 여지운을 선명하게 비춰냈다. 이윽고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 여지운이 탄식을 내뱉었다.
“이건 진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거울 속의 남자는 사나워 보였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은 그 끝이 살짝 올라갔으며 꽉 다문 입은 단단해 보였다. 턱은 둥글고 부드럽기보다 날카로운 선을 그려 한눈에 봐도 성깔 있어 보였다. 거기까지는 익숙했다. 자기 얼굴이니까. 하지만 그 아래의 몸은 낯설었다. 드러난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뺨이나 팔목, 종아리까지 빨리고 씹힌 자국이 가득했다.
“이런 곳까지…….”
적나라하게 새겨진 정사의 흔적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옷을 입어도 숨길 수 없을 정도의 노골적인 영역표시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씨발 새끼.
분노와 상처만 가득했던 샤워를 마친 여지운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닦아내지 못한 물방울들이 머리카락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이번 연휴에는 컴퓨터 같은 건 켜지 않고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 줄 알았는데. 하긴 뒹굴긴 했었다. 깔린 채로.
“씨, 발.”
괜히 신경질 나 목에 둘린 수건을 침대 위로 거칠게 던졌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네모난 검색창에 마조히스트, 사디스트라는 글씨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마조히스트]
1. 사전적으로는 피가학적 변태라 일컬어지며, 상대에게 가학 당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메조히스트라고도 하며, 남성은 멜섭, 여성은 펨섭이라고도 한다.
[사디스트]
[명사] 사디즘의 경향이 있는 사람.
노트북 위의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사디즘]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가학증 또는 학대음란증이라고 한다.
“…….”
선연홍은 마조도 사디도 아니라고 했지만, 여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사전에서도 변태라고 표현되어 있다. 번들대는 눈 안에 번진 것은 광기와도 닮은 흥분이었다. 도저히 정상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 다정한 낯짝도, 순한 행동들도 다 계산된 것이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놈이다. 그동안 자신이 그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쏟은 건 인정한다. 말끝마다 짜증이 섞여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화를 냈다. 한두 시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으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선연홍은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소름 돋았다. 속으로 다 즐기고 있었을 것 아냐. 크리스마스가 남겨 준 것은 알지 말았어야 할 감각과 새로운 세계가 전부였다.
새로운, 세계.
* * *
남은 연휴 이틀 동안 나가지 않고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휴대폰은 소파 구석에 넣어 둔 채 꺼내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선연홍이 집에 찾아올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없는 척을 했다. 그리고 연차가 끝난 날 아침,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눈을 반쯤 감은 채 화장실 거울을 보자 너무 많이 자서 퉁퉁 부은 얼굴이 보였다.
“회사 가기 싫다.”
틈만 나면 클럽에 원나잇에 섹스를 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집안에 박혀 있던 건 처음이다. 어떤 의미로 확실한 휴식을 취하긴 했네. 비록 정신은 이렇게 피폐해졌지만.
늘어진 티를 벗고 오랜만에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했다. 문 닫기 전 힐끔 본 거실에는 아직 그날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선연홍의 셔츠, 바지, 코트. 허물처럼 뭉친 옷가지에 자꾸 시선이 갔지만 애써 외면하고 문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찾던 여지운이 그제야 호텔에서 차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타고 왔고 그 이후로 나간 적이 없으니 운전할 일도 없었다. 진짜 재수 옴 붙었네.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으며 택시를 잡았다. 하필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잘 잡히지도 않았다. 왠지 느낌이 싸한 것이 종일 일진이 좋지 않을 것 같다.
며칠 만에 출근한 회사는 그 사이 일거리가 많이 쌓여 있어 일진을 평가할 시간도 없었다. 쌓여있는 기획서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연차 따위 내지 말걸 그랬다. 그러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바쁘지도 않을 텐데.
“팀장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어요?”
잘 보냈냐고? 여지운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속을 애써 누르며 팀원을 향해 애매하게 웃었다.
“자자, 다들 일합시다!”
미친 듯이 일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머지는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인사 하는 팀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사무실에 나왔다. 건물 밖을 나오니 찬바람이 훅 불어왔다. 온종일 히터가 무겁게 돌아가는 사무실 안에 있어서 답답했는데 숨이 뻥 뚫렸다. 차를 찾아와야 하긴 하는데 막상 가려니까 또 귀찮았다.
일단 오늘은 택시 타고 집에 가자. 옷깃 틈을 노리며 들어오는 바람을 막으며 손을 뻗는 순간, 어깨에 닿는 예상치 못한 온기에 여지운이 소스라쳤다.
“헉!”
너무 과도하게 놀란 것 같아 민망함과 인기척 없이 다가온 사람에 대한 짜증을 섞어 돌아보았다. 그리고 익숙하고도 낯선 남자와 마주했다.
“선연홍.”
“지운씨”
“내가 한 번만 더 눈에 보이면 가만히 안 둔다고 했을 텐데.”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어요?”
“오랜만입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그는 어디 다녀온 것인지 머리를 멀끔하게 넘기고 코트에 회색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투버튼의 코트 기장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비율이 어지간히 좋지 않고는 소화하지 못하는데. 기성복을 마치 맞춤복처럼 걸친 여유로운 얼굴의 선연홍을 보자 심기가 뒤틀렸다.
“미안합니다.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지운씨를 혼자 뒀네요.”
“지랄 마. 앞으로도 너와 함께 할 일은 없을 테니까.”
“밥 먹었습니까?”
“꺼져, 가라고.”
“여기서 한 20분 더 가면 이탈리아 요리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언제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오늘 가면 되겠네요.”
“야! 지랄병 하지 말라고 했지?”
내뱉어진 욕에 선연홍이 나직이 웃었다. 잘 익은 과육이 툭 쪼개져 새빨간 속살을 드러낸 것 같다. 여지운이 그동안 겪은 선연홍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똑똑했다. 교제 기간엔 지나치게 자신의 기분을 살피고 순종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기분을 파악할 줄 알고 다루는 법을 알았다. 그런 남자가 지금은 막무가내로 굴고 있었다.
“혹시…….”
“예?”
혹시 화가 난 것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뭐가 좋다고 웃어.”
“좋네요.”
“네네, 앞으로도 혼자서 처 좋아하시고요. 난 집에 간다. 그…… 그때 있었던 일, 혹시라도 떠벌였다가는 대가리를 분리 시켜 줄 테니까 입 닥치고 조용히 찌그러져.”
“떠벌린다? 지운씨에 대한 것은 아주 조금도 나누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선연홍이 턱을 쓰다듬었다. 머플러에 묻혀있던 턱 끝은 드러나는 것만으로 느낌이 달라졌다.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떠벌리라고 하는 것 같아서 고민되네요.”
“장난 치냐?”
“장난? 전 그냥 지운씨가 곤란해 하는 걸 보고 싶을 뿐입니다. ……음, 하지만 역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네요.”
“뭐?”
곤란해 하고 싶은 걸 보고 싶다니? 이건 정말 미친놈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거 상종도 못 할 놈 아냐?”
“여지운씨 말대로 저는 변태라서 욕을 듣고 있으니 키스하고 싶네요. 어떻습니까? 저랑 같이 가실래요. 아니면.”
여기서 키스하실래요.
“…….”
진짜 양아치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여지운의 얼굴에서 답을 찾은 선연홍이 차 문을 열었다. 같잖은 에스코트를 하는 선연홍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억 소리 나는 차 문짝 역시 박살 낼까 하다가 그냥 탔다. 며칠 만에 타는 선연홍의 차 안에는 여전히 달콤한 향으로 가득했다. 복숭아 같기도 하고, 자두 냄새 같기도 한 향은 차 주인의 체취와 똑 닮아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순간 향이 진해지며 눈앞에 그늘이 졌다. 고개를 드니 선연홍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있었다.
“뭐, 왜.”
“안전띠. 제가 해드릴까요.”
“개수작하지 마.”
“알았습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여지운이 허겁지겁 안전띠를 찾는 것을 본 선연홍이 목구멍에 걸린 웃음을 삼켰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식당 안은 아직 사람들로 붐볐다. 크리스마스가 지났음에도 계산대 한쪽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트리와 꼬마전구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가 이어지는 식당 한가운데 여지운과 선연홍은 마주 보고 앉은 채였다.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니, 불편하고 불안한 것은 여지운 혼자뿐으로 선연홍은 퍽 즐거워 보였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과 이렇게 밥을 먹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지운의 포크가 접시 위를 방황했다.
“왜 안 먹습니까? 제법 괜찮은 곳이니 여지운씨의 입맛에도 맞을 겁니다.”
“…….”
“아니면 다른 것으로 주문할까요?”
“우리가, 여기서 사이좋게 밥을 먹을 그건 아니잖아.”
“왜 아닙니까. 우리는 연인인데요.”
“연, 인?”
이게 무슨 개소리야.
“교제 중이지 않습니까.”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찾지 못해 떡 벌어진 여지운의 입안으로 잘게 잘린 스테이크가 쑥 들어왔다. 당황한 여지운이 일단 입안의 고기를 씹었다. 이 와중에 맛있는 게 짜증 났다.
“연인? 야, 와, 기막혀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네.”
“여지운를 차갑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사실은 ‘성격이 더럽다, 개판이다, 싸가지 없다. 쓰레기다.’ 같은 적나라한 평가가 많았지만 선연홍은 어떻든 여지운을 포장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도.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틀렸습니다. 여지운씨는 야하고 귀엽습니다. 눈물과 정액, 타액으로 흠뻑 젖은 얼굴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야, 이, 변……! 태 새끼야. 제발 좀 닥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소리치던 여지운이 주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느끼고 선연홍의 입을 막았다.
“……! 이, 씨발.”
손바닥 아래에 느껴지는 물컹하고 축축한 감각에 황급히 손을 떼려 했으나, 선연홍이 그 손을 붙잡고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아무리 미쳤어도 장소 구분은 좀 하자.”
“보고 싶었습니다.”
“지랄 좀 하지 마.”
“제게 무릎을 꿇으라 한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저는 여지운씨의 모든 게.”
그는 여지운의 손끝, 손톱 위에 입맞춤을 했다. 아주 정중하고 묵직했다.
“좋습니다.”
지금 이 공간을 울리는 음악도, 테이블 위에 놓인 디퓨져도 향기롭고 경쾌했다. 하지만 여지운은 ‘이 새낀 뭐야?’ 하는 얼굴을 했다. 그는 냅킨으로 손을 벅벅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얘기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섹스가 굉장히 중요해서. 속궁합이 안 맞으면 아예 상종을 안 해. 그러니까…….”
“안 맞았습니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선연홍이 치고 들어왔다. 부드러웠지만 단호한 자신감이 녹아 있었다.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사실 이 자리에서 널 개망신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만 더는 엮이고 싶진 않아. 그러니 그만 하자고.”
아니라는 말은 결국 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싸늘하게 내뱉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여지운이 계산서를 집자 선연홍이 따라 일어섰다.
“계산서 주세요. 제가 모셨으니 제가 내겠습니다.”
“됐어. 너 따위에게 얻어먹을 생각은 없어.”
내밀어진 손을 매몰차게 쳐내고 직원에게 건넸다. 띡, 마그네틱 카드를 긁던 직원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손님 한도가…….”
“네?”
“한도 초과라고 나옵니다.”
“…….”
하필.
굳은 얼굴의 여지운이 품을 뒤적여 지갑을 찾는데, 옆에서 카드가 쑥 내밀어 졌다.
“이걸로 해주십시오.”
직원의 시선이 선연홍에게 머물렀다. 그 짧은 순간 그 안에 담긴 호감을 눈치챈 여지운이 헛웃음을 쳤다.
“야, 내가 계산…….”
“그럼 다음에 사주십시오.”
“다음이라니, 다음은 없어. 너랑 보는 건 오늘이 끝인데 내가 너한테 왜 사야하냐?”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 영수증은 안 줘도 됩니다.”
선연홍은 당연하다는 듯이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차 문짝을 잡고 가네 마네 승강이를 벌이다 결국 진 것은 여지운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니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선연홍은 아무리 열심히 휘둘려도 결국은 튕겨 나오는 스쿼시처럼 순종적인 척하면서 제 멋대로였다.
“지운씨, 그런데…….”
“말 걸지 마.”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팔짱을 끼고 자는 척하던 여지운은 어느 순간 정말로 잠들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오랜만에 일한 육체 피로가 쌓인 듯했다.
깊숙하게 푹 젖어 있는 정신을 일깨운 건 기묘한 감각이었다. 닿을 듯 말듯 솜털이 바짝 서는 미묘한 간지러움에 뺨이 경련했다. 꺼져. 꺼지라고. 손을 휘저어 봤지만 기묘한 열기와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뭐야? 번쩍 눈을 뜬 여지운이 자신을 내려 보는 선연홍을 발견했다. 찰나의 침묵 후 먼저 움직인 것은 여지운이었다. 그는 선연홍의 눈알을 찌르기 위해 손을 쭉 뻗었으나. 아슬아슬하게 몸을 뒤로 빼는 데 성공한 선연홍이 피식 웃었다.
“이거, 아쉽겠어요.”
“…….”
선연홍이 상체를 숙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키스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따뜻한 숨결이 여지운의 윗입술을 간지럽혔다. 선연홍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꺾이며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점차 좁아졌다. 가까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분위기는 야릇하게 변했다. 여지운이 빙그레 웃자 선연홍이 따라 웃었다.
여지운은 어울리지 않게 방실방실 웃으며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빠악! 여지운의 이마와 선연홍의 코가 빡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부딪혔다. 매끈한 콧등이 순식간에 발개지더니 피가 주룩 흘렀다. 이마의 고통에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지만 정신적인 충족이 더 컸다. 선연홍은 드물게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
“하하. 씨발 새끼. 코피 쳐나는 것 좀 봐라.”
“…….”
선연홍이 코를 슥 닦았다. 손등과 뺨 위로 핏물이 죽 그어졌다. 그는 피범벅인 제 손을 내려 봤다.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다시 여지운에게 향했을 때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건 오히려 절 도발할 뿐입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턱을 타고 흐른 핏줄기가 뚝뚝 떨어졌다. 여지운의 시선이 낙하하는 액체를 따라 움직였다.
“이럴 땐.”
어느새 다가온 선연홍이 여지운의 양어깨를 짚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보드라운 혀끝과 달리 입술을 물어뜯는 행동은 사나웠다. 따끔한 고통과 뜨뜻한 것이 맺히는 감각이 선명했다.
어깨를 타고 온 손가락이 목덜미를 두드리듯 쓸다가 여지운의 턱을 움켜쥐었다.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선연홍의 피인지 제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의 키스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뜨겁고 빨갛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간 비린 타액에 속이 울렁댔다.
“이 정도는 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참동안 맞물린 채 엉기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여지운이 선연홍을 후려쳤다.
“정신 나간 새끼.”
“집에 다 왔으니 들어가 보십시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코를 대충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여지운은 혹여 그가 무슨 짓을 할까 봐 잔뜩 경계하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여지운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여지운이 멈칫했다. 그는 최대한 선연홍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애쓰며 돌아봤다.
“조심히 가요. 내일 연락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