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8)

8.

  

  선연홍은 차 문을 열기 전 여지운의 머플러를 다시 꼼꼼히 매주었다. 

  “야.” 

  미적거리는 행동에 여지운이 짜증을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모텔 같은 데라도 가서 빨리 아랫도리를 해결하고 싶은데. 성기가 아파서 몸을 제대로 펴기도 힘들다고. 

  말로 내뱉진 않았지만 그대로 드러난 표정에 선연홍이 턱을 쓰다듬는 척하면 입을 가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지운씨.”

  시동은 끄지 않았던 차 안은 훈훈했지만, 선연홍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뜨거운 바람을 덮쳐 누르며 섞여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지운의 열기를 식혀주진 못했다. 원하는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무엇도 만족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어서.

  “닥쳐, 부르지 마.”

  여지운이 심호흡을 했다. 참아야 한다. 참자. 아무리 멋대로 살아왔지만, 여기에서 자신을 놓을 순 없었다. 차가운 숨이 목구멍에서 덜컹대며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끓는점은 자꾸 높아지는데 열기가 식지 않으니 미칠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간데 괜찮습니까?”

  “주둥이 좀 닥치라고 했지, 이 새끼야.”

  “흐음.”

  “빨리 운전이나 해.”

  “네.”

  어둠속을 가르던 자동차는 사람이 인기척이 드문 곳에 세워졌다. 자동차에 부착된 시계는 어느새 밤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멀리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네?”

  바지를 움켜쥔 채 한참을 끙끙대던 여지운이 입을 열었다. 창문을 완전히 열고 달린 덕에 뺨과 코끝이 새빨갛게 얼어붙었다. 이대로라면 감기 걸리겠네. 하지만 찬바람을 쐤더니 이성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 속으로 애국가를 10번 넘게 부른 효과도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아직 분출하지 욕망 탓에 여전히 욱신거리고 아프지만 좀 전처럼 정신이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야비한 새끼야. 먼저 손 안 댄다고 하지 않았냐.”

  어쩐지 자존심 상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온갖 감언이설로 사람의 정신을 흐려 놓고서는 지키지 않는 게 치졸하고 열 받았다.

  “음, 손 안 댔지 않습니까.”

  “지랄하네. 지금 말장난 하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지운씨와 장난하는 건 좋아하지만요.”

  선연홍이 그의 눈가를 살짝 쓸면서 웃었다. 빨간 얼굴이 귀엽다, 귀여워. 언제부턴가 여지운을 보면 그 말만이 떠올랐다. 

  “양아치 새끼.”

  “싫었으면 밀어내지 그랬습니까? 지운씨가 원하지 않았다면 멈췄을 거예요.”

  “…….”

  여지운은 사랑 없는 섹스는 있어도, 섹스 없는 연애는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난교만 안 했다 뿐이지 매일 같이 다른 상대와 뒹굴었다.  

  “지운씨는.”

  이제껏 육체적 쾌락을 주도하며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 여지운은 더 큰 쾌감에 철저하게 휩쓸렸다. 인간의 본능이란 어쩜 이렇게 짐승 같고 원초적인지.

  “참 솔직해요.”

  성적 욕구를 가장 첫 번째로 삼고 중요하게 여기는 여지운이 쾌감에 무너지는 건 당연했다. 선연홍이 어떤 사람이고 간에 그가 퍼부었던 단 한 번의 감각은 생각만으로도 휩쓸릴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하지만 순순히 인정하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 좆같았다.

  “동정 새끼가.”

  “음, 이제는 동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선연홍은 살짝 웃으며 시선을 조금 내렸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우습게도 풋내 낼 것 같은 수줍음이었다.

  “뭐? 이 새끼야? 무릎으로 사람을 농락하는 게…….”

  얼굴이 후끈거렸다. 농락당한다는 표현을 쓸 일이 있을 줄이야. 여지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린 살덩이가 치아에 짓이겨지며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여지운, 흥분하지 말자. 흥분하면 지는 거다.

  “이번엔 네가 누워.”

  “예?”

  “한 번씩 까자고. 새끼야.”

  선연홍과 다시는 몸을 비비지 않겠다는 여지운의 결심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서 무너졌다. 어이없게도 그는 또다시 ‘그런 기분’이 되었고, 눈앞에는 몸도 얼굴도, 속궁합까지 나무랄 데 없는 남자가 있다. 그리고 여지운은 그 남자를 올라탈 생각이었다. 모텔까지 갈 필요도 없이 카섹스가 더 좋다.

  “이번엔 네가 대라고. 뒤.”

  “아.”

  낮은 웃음소리가 좁은 자동차 안을 울렸다. 어깨까지 떨어가며 웃던 선연홍은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전에 이건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도 힘이 남아있다면 지운씨 말대로 하죠. 뒤를 대주는 게 뭐 어렵겠습니까?”

  “억!” 

  겨우 가라앉아 있던 살덩이가 다시 잡혔다. 이번에는 무릎 따위가 아닌 뜨거운 손이 여지운의 성기를 쥐어짜듯이 움켜쥐었다. 겨우 참고 있던 성기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딱딱하게 일어섰다. 극심한 배뇨감과 몸을 허리를 들썩이게 하는 짜릿함이 다시 찾아왔다. 여지운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성기, 그 끝에 몰린 감각이었다. 

  “하. 또, 또. 흐읏.”

  “그만 할까요?” 

  여지운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 선연홍이 피식 웃으며 손에 힘을 줬다. 예민한 몸뚱이는 고통마저도 쾌감으로 바꿀 것이다. 한번 겪고 나면 더, 더 큰 것을 원하게 된다. 

  “피 맛보고 싶으면 또 혀 깨물어도 돼요. 난 좋았으니까.”

  웃음과 유혹이 함께 녹은 혀가 여지운의 입술 위에 붙었다.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지며 혀가 엉켜 들었다. 여지운의 바지 속으로 들어온 손이 음낭을 터트릴 듯이 쥐면서 귀두 끝을 세게 꼬집었다.

  “하으, 으, 좋아……! 좀 더, 세게 주물러, 더. 으음.”

  좀 더 해줬으면 좋겠다. 조금 더 강렬하고 세게.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더, 더! 

  여지운의 엉덩이가 위로 슬쩍 들리며 허벅지가 딱딱해졌다.

  “세게! 씨, 씨이발. 하아……. 하앗, 하. 아.”

  겨우 딸 치는 것뿐인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이 새끼는 동정이라면서 왜 이렇게 잘 해.

  아! 아, 아! 그의 절정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터질 듯이 몰렸던 정액이 빠져나가며 몸이 들썩였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멍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여지운의 머릿속을 주물렀다. 가쁜 숨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하악, 학.” 사정했음에도 아직 부족했다. 더, 더 좋은 것, 미칠 것 같이 짜릿한 거, 그것. 그것을.

  원한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귀 옆, 짧은 머리털들을 혀로 핥으며 입맞춤을 했다. 쪽, 쪼옥. 젖은 살덩이가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귓속을 울렸다. 

  “지운씨, 이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

  “더 기쁘고 폭발적인 걸 이미 겪어 봤잖아요. 좋은 것 말입니다.” 

  뜨거운 숨이 함께 섞인 목소리는 은근하고 은밀했다. 평범한 단어들이었지만 그것들이 이어지다 보니 굉장히 야릇하고 매혹적이었다. 선연홍은 아주 익숙하게 여지운의 마음을 사로잡고  호렸으며, 궁금하게 했다. 

  “더, 좋은 것?”

  “네, 이런 조잡한 것 따위가 아니라, 더 깊고 커다란 거.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몸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감각.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선연홍은 일부러 한 박자 쉬었다가 말했다.

  “쾌감.”

  나른함으로 점철된 머릿속에서 강렬하고 새빨간 것이 툭 솟아올랐다. ‘더 좋은 것.’ 그것이 뭔지 여지운은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내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만져도 됩니까?”

  “아, 안…….”

  “안?”

  “……돼.”

  “돼?”

  “돼. 씨발, 된다고.”

  제정신이 아닌 이가 얼마나 충동적인지는 지금 여지운을 보면 알 것이다. 옷을 입은 채로 사정한 탓에 그의 속옷은 이미 젖어 있었다. 선연홍의 손가락이 어렵지 않게 구멍을 파고들었다. 사정감에 젖어 있던 몸뚱이가 다시 한 번 튀었다. 구부러든 손가락이 안쪽 살을 밀어 올리며 파고들었다. 엄지손가락은 구멍 주름을 더듬었다. 닫혀있던 구멍이 빠듯하게 열리며 손가락을 삼켰다. 손톱 끝이 속살을 빙글빙글 휘저으며 쑤셨다. 

  “하, 흑.”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내려가며 드러난 엉덩이 위로 더운 바람이 닿았다. 걸친 게 없는 지금, 물기 어린 소리가 좁은 공간을 노골적으로 울렸다. 물기 가득한 과일을 통째로 입에 넣고 씹는 것 같은 소리는 아주 야릇했다.    

  저게 진짜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 이게, 이 음란한 소리가? 생각과 감각이 뒤엉켜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이성을 겨우 붙잡은 여지운이 선연홍을 보았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벌어진 입술, 상기된 뺨은 그날, 그때, 그곳에서 보던 것이었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얼굴. 그걸 보는 순간 욕이 터져 나왔다. 

  “이런 씨발!”

  여지운은 그제야 제가 ‘또’ 선연홍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미친! 벗어나기 위해 발꿈치로 정수리를 찍으려는 순간 선연홍이 손이 몸 안쪽을 꾸욱 눌렀다. 끝 부분만 아주 살짝 걸쳤을 뿐이지만 잔뜩 예민해져 있던 몸뚱이는 곧장 반응했다.

  “여기가.”

  “크,흣.”

  “여지운씨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죠.” 

  선연홍의 손이 움직일수록 여지운의 허리가 조금씩 내려가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아.”

  온몸이 어딘가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선연홍을 떼어내야겠다는 생각도, 무엇도 들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갈망, 갈구, 열망? 하지만 이름 따위가 뭐 중요할까. 

  “하지만 지운씨가 싫어하니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잔뜩 흥분한 여지운과 달리 선연홍은 침착했다. 아니, 침착한 척했다. 멀끔한 얼굴과 달리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만이 지금 그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고 있었다.

  “아, 으! 그거, 말, 고. 씨발아.”

  “이 상황에서 욕이라니, 멋있군요.”

  “하, 앗. 잠깐, 아으. 거기 말고 더 안, 안쪽을 찔, 찔…….”

  “잘 안 들립니다.” 

  여지운은 차마 더 깊은 곳을 쑤셔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가쁜 숨만 내 쉬었다. 흥분이 녹아든 숨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워 들이마실 때마다 뜨거움이 쏟아 들어왔다.

  “뭘, 어떻게요.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성기를 꽉 잡아 기둥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 안쪽, 그곳을 문질렀다. 찌르는 것도 누르는 것도 아닌 그저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허리가 파르르 떨리며 배에 힘이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허벅지를 움츠렸지만 앞도 뒤도 이미 자극받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저었다.   

  원했다. 더 큰 쾌감을. 이미 한 번 느껴 본 적 있는 그, 뜨겁고 압도적인 감각들을.

  “하.”

  “하고 싶은 말 없습니까.”

  “흐, 아, 프……악.”

  독한 새끼. 미친 선연홍. 야비한 자식.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여우 같은 새끼. 

  하지만 곧 그런 생각조차 앞뒤로 쏟아지는 감각에 흔적도 없이 쓸려갔다. 남은 것은 늘 그렇듯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여지운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지금은 그 무엇보다 이 쾌감을 좀 더 극대화하고 싶을 뿐이다. 

  “아. 흐, 거기 말, 더 깊, 넣…….”

  “네? 잘 안 들립니다. 크게 말해 주시죠.”

  여지운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작은 동작이 몇 배의 자극이 되어 돌아온다. 

  “박으…… 흐, 씨발.”

  개자식아……. 내뱉어지는 말에는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말 못해, 도저히 못 하겠다. 

  단단한 선을 이루는 턱이 가늘게 떨렸다. 넓은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었고 새빨개진 귀는 바짝 서 있다.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닫는 모습은 가녀림마저 엿보였다. 

  여지운과 가녀림이라, 어디 가당키나 한 모습이던가. 선연홍은 이 안쓰러운 남자를 그만 놀리기로 했다. 

  “창피합니까? 알았어요. 그럼 고개만 끄덕여 봐요.”

  아래에 쑤셔 넣지 않은 손으로 여지운의 아랫입술을 훑었다. 옆으로 쓸려가던 붉은 살덩이가 손을 떼자 툭 솟아올랐다. 

  “그러면 지운씨가 그토록 원하는 걸 퍼부어 줄 테니까.” 

  “으, 으흐.” 

  “그래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여지운에 한해서는 모든 집중력을 발휘하는 남자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마, 눈두덩, 뺨과 코끝, 마지막으로 입술 위로 입맞춤이 떨어졌다. 사나운 기운을 숨긴 채 상냥하게 웃던 선연홍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자마자 본성을 드러냈다. 

  “아, 학! 앗. 아으, 읏, 흣…….” 

  손가락이 빠져나간 곳을 한 번에 뚫고 들어 온 성기가 곧바로 여지운이 느끼는 곳을 쳐댔다. 퍽, 안쪽 살이 확 밀리며 허벅지끼리 부딪혔다. 몸뚱이가 흔들리며 여지운의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구두가 툭 벗겨졌다. 흰 양말이 신겨진 발이 애처롭게 흔들리다 라디오 버튼을 쿡 눌렀다. 밝은 빛과 함께 켜진 라디오에서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댕댕댕, 울리는 소리에 맞춰 몸이 들썩였다. 

  새해였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아!”

  “크리스마스에 이어서, 새해라……. 좋네요. 그렇죠?”

  “으음, 읏.”

  “올해도 잘 부탁합니다.”

  새해, 첫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까만 새벽 여지운은 선연홍에게 꿰뚫린 채 그가 주는 쾌감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오므라든 발가락에서 시작된 자극이 종아리를 타고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손 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시트를 긁어내리며 도리질을 쳤다. 이건, 아니, 아닌데. 차가운 쇠를 핥는 것처럼 소름 돋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지운씨, 새해도 됐으니 좀 더 솔직해져 봅시다. 먼저 말해 봐요.”

  “아으, 읏.”

  “말할 정신이 없나 보네요. 그럼 저 먼저, 후……. 하겠습니다. 우리 연인이잖아요. 당신과 저는 교제 중인데, 왜. 딴 새끼랑 뒹굴려고 하는 걸까요. 혹시 나로 부족한 건가?”

  둥글고 조용하게 시작된 말끝은 거칠었다. 그 흔한 웃음기마저 거둔 얼굴은 낯설 정도로 차가웠다. 

  “흐, 흣.”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공개 섹스 하고 싶은 걸로 생각할게요. 사람들 앞에서 박히고 싶으면 다른 새끼들이랑 놀아나 보든가.”

  “아, 이, 이건.”

  “제가 만족을 못 시켰나 봅니다. 좀 더 힘내 볼게요. 다시는 다른 사람 생각 안 나게요.”

  “아, 이건, 아닌……. 아니야.”

  “맞아요.”

  가벼운 웃음소리가 여지운의 몸 안쪽을 쿡쿡 누르는 움직임과 함께 맞물렸다. 살이 서로 비벼지면서 그 사이로 음란한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아, 좋아, 안 쪽, 더, 문질러서……. 그만 하고……, 읏, 좀 더, 더.”

  간간히 떨어지던 물줄기가 한 번에 쏟아져 위고 아래고, 겉이고 속이고 온통 끈적거리고 질척였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그 사이를 드나드는 성기를 콱 조였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허리를 잡고 내리며 강하게 박았다.

  “하! 으, 읏, 으흣.”

  고통이 한순간에 쾌감으로 변하고, 그 덩어리가 여지운의 이성을 지배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며 허리가 떴다. 선연홍은 이미 벌어진 허벅지를 좀 더 열고 몸을 붙였다.  

  “아아.”

  수렁에 빠져도 좋으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쾌감으로 적셔 줬으면 좋겠다. 쾌감 앞에 굴복한 여지운의 그 어디에도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걱정, 후우, 말아요. 지운씨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앞뒤로 흔들리는 몸짓에 발등이 라디오 버튼을 계속해서 눌렀다. 툭, 툭. 지직거리는 소음 사이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금 이 시각,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아. 하아, 아, 앗. 거, 아앗, 아, 아프, 아파. 으. 흐으.”

  “아픕니까?”

  “좀, 천천히.”

  선연홍이 좀 더 빠르고 강하게 찔러 왔다. 쿵쿵쿵. 조수석 등받이에 머리가 부딪쳤다. 선연홍이 몸이 점점 밀려 뭐라도 잡으려는 듯 허우적대는 여지운의 팔을 제 어깨를 짚게 했다. 하지만 그가 잡은 것은 선연홍의 머리카락이었다. 이 와중에도 머리채를 잡는 모습에 선연홍이 웃음을 삼켰다. 머리가 쥐어뜯기는 아픔보다 유쾌함이 더 컸다. 

  그래. 이래야 여지운이지.

  “씨,발……. 아프다, 고, 개, 으.”

  여지운의 양옆을 짚은 채 상체를 숙였던 선연홍이 고개를 들었다. 몸이 압박당하고 깔린 채로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느낌은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되게 했다. 

  “아픈 게 다가 아니잖아요. 왜 자꾸 아닌 척 해.” 

  “아흐, 지금, 너 이 새끼, 흣, 반말…….”

  “아프다는 사람이 이렇게.”

  빳빳하게 선 유두를 손가락으로 꼬집자 빳빳하게 일어선 작은 살덩이가 톡 퉁겨졌다. 동시에 여지운의 입에서 자극이 쏟아졌다. 

  “흣.”

  “좀 더, 애원해보라고.” 

  “죽어, 이 새끼.”

  “아직 살만한가 보네.”

  선연홍의 입술이 여지운의 턱 끝에 얇은 살들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프고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공간에서 몸이 거의 반으로 접혔다. 여지운은 조수석에 처박힌 채로 흔들렸다. 그 상태에서 얼굴이 들려지고 입안으로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덜컹이는 차, 숨소리, 물에 젖은 소리, 살이 스치는 소리, 신음……. 소리, 소리. 새해를 시작하는 소리는 이토록 자극적이고 음란했다.

  좋다, 너무, 미칠 정도로 짜릿하다. 너무, 너무.

  “하……. 존나……좋네.”

  선연홍의 허리 짓이 조금 더 빠르고 강해졌다. 엉덩이 양쪽 근육이 움푹 들어가고, 잘게 쪼개진 등 근육이 수축했다가 이완하길 반복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뚱이는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좀 더 야릇해 보였다. 여지운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머릿속으로는 어깨를 아작 내고 있었지만, 현실은 손톱자국이 다였다. 간지러워 미칠 것 같은 몸 안쪽을 선연홍의 성기가 뭉개듯이 쳐댔다. 뭉쳐있던 자극이 터지듯 퍼지면서 여지운의 몸 안에 전기가 울렸다. 미치겠다, 미치겠어. 이건, 정말.

  “아흑, 흐으, 흣, 좋, 아, 아. 좀 더, 그, 좋아.” 

  여지운의 몸이 떨리고, 때맞춰 안쪽에서도 뜨거운 게 터졌다. 몸속에 정액이 퍼지는 느낌은 아직도 생소하기만 했다. 제 욕망을 마음껏 분출한 선연홍이 목덜미에 입맞춤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후, 숨을 내 쉬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생기 넘치다 못해 반짝반짝 빛나는 껍데기는 매력적이었다. 여지운이 그 모습을 멍하니 올려 봤다. 아직 남아 있는 감각의 잔재에 몸이 간헐적으로 퍼덕였다. 미칠 정도로 짜릿했던 감각이 지나고 남은 것은 자괴감과 수치심, 그리고 후회였다. 그는 잠든 척 눈을 감았지만, 사실 깨 있었다. 차라리 지금은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평소 자신하던 체력이 지금은 원망스러웠다.  

  여지운, 네가 드디어 돌았구나. 이번에는 도저히 할 말이 없다. 그 어떤 변명도, 비난도 못하겠다. 강요에 가깝긴 했지만, 선택을 한 건 자신이었다.

  처음 선연홍과 떡 쳤던 그날 이후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뭔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자존심도, 품위도 무엇도 필요 없었다. 그 순간 그를 지배하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고통과 쾌감. 이제껏 자신이 예민하다거나 민감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상대방에게 애무해 줄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식전에 먹는 가벼운 샐러드와 같았다. 메인 메뉴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는 그런 사소한 것들.

  하지만 선연홍은 아니었다. 그가 주는 것들은 이제껏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입안에서 육즙이 터지고, 과육이 꽉 찼다. 목구멍을 꿀떡 대며 넘어가는 것에 몸뚱이가 환장했다. 감각들이 미쳐 날뛰고 솜털들까지도 바짝 일어섰다. 저 발아래에서부터 올라온 감각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머리끝까지 올라붙었다. 감당이 안 됐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뒤로 느끼는 게 그렇게 좋다며? 천성인가 보네. 나하고도 한번 하자. 하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면서. 하지만 이게 자기 일이 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저는 여지운씨가 흥분한 모습에 흥분하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선명하고 분명한 감각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 

  “도도하고 오만한 얼굴이 고통과 쾌락으로 물드는 모습은 마치 화선지 위에 먹이 번지는 것처럼 너무 뚜렷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

  “좀! 좀, 좀, 닥쳐! 닥쳐!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으니까!”

  “안 잤습니까?”

  눈을 감고 몸을 모로 돌린 여지운이 사실 깨어있다는 것은 선연홍도 알 것이다. 그리고 선연홍이 알고 있다는 것을 여지운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른 척 묻는 게 재수 없었다. 조수석 서랍에서 물을 꺼낸 선연홍이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목이 많이 쉬었네요, 미안해요.”

  “미안? 지금! 지금 와서! 내가, 하!”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울분 가득한 탄식이 목구멍에 걸렸다.

  “내가, 내가…….”

  더 해달라고 보챘던 것도 고개를 끄덕인 것도 여지운 자신이 맞았다. 하지만……. 미치게 좋았다고. 두 번째였는데도 여전히 좋았단 말이야. 그곳은 역시 신세계였다. 온통 번쩍이고 강렬한 것들로 가득 찬 세계.

  선연홍의 손에서 물병을 거칠게 낚아채 입안으로 콸콸 쏟아 넣었다. 미처 들어가지 못한 물줄기가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여지운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타액에, 땀에, 눈물에.  

  후, 여지운.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자.

  “착각할까 봐 말하는데, 내가 먼저 해달라고 한 건 아닙……니다. 애초에 손대지 않겠, 후. 다는 약속을 어긴 건 선연홍씨였으니까요.”

  “네, 지운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여지운이 우울한 시선으로 반쯤 남은 물통을 내려 봤다.

  “하지만 약속해줘야겠습니다.”

  “무슨 약속?”

  평범한 직장인은 평생을 모아도 살까 말까 한 값비싼 외제 차 안은 곳곳에 묻은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조수석 구석에 박힌 제 바지를 보던 여지운은 괜히 심란해 창문을 열었다. 새해의 첫 밤 공기가 날카롭게 스며들었다. 

  “이제 두 달이 채 안 남았죠?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 해주셨으면 합니다.”

  최선? 지랄하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그럽니까? 사실 좀, 전의 그 남자와도 그냥 고민 상담을 했을 뿐인데요. 다짜고짜 의처, 아니. 의부증 행세한 것은 그쪽입니다.”

  선연홍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지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끝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학교 다니면서, 절연 당하다시피 집을 뛰쳐나오며, 사회에 나와 수많은 사람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여지운에겐 어느 정도 감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물론 그것을 맹신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의 촉을 꽤 믿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행해질 행동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연홍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무슨 떠올려도 그 이상이었다. 여지운 인생에서 저토록 신비한, 아니, 이상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지운씨가…….”

  예측을 할 수 없으니 대책을 세우는 것도 힘들었다. ‘선연홍은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상대하지 말고 그냥 개소리로 치부하자.’ 그렇게 다짐해도 막상 엮이게 되면 이성이고 뭐고 모두 날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면 말려들다 못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이 이런 식으로 휩쓸리는 건 처음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앞으로 주의, 아 죄송. 조심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새해군요. 새로운 시작을 지운씨와 함께 하게 돼서 참 기쁩니다.” 

  선연홍은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여지운의 새해는 설렘보다 쓸쓸함이 더 컸다. 

  “올해도 잘 부탁합니다.”

  여지운이 제게로 뻗어진 손을 한참 보고 있다가 맞잡았다. 선연홍이 검지를 살짝 구부려 여지운의 손바닥을 긁었다. 그 같잖은 행태에 비웃다가 손을 앞으로 확 당겼다. 제게로 쏟아지는 선연홍의 상체를 끌어안고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고개가 꺾이자 뚜렷한 얼굴선이 드러났다. 음영이 지며 노란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화려하다.

  씨발, 욕을 내뱉은 여지운이 잡아 뜯듯 거친 키스를 퍼부었다. 혀가 적극적으로 얽어왔다. 야릇한 소리로 가득했던 좁은 공간은 이제 축축한 소리들이 차기 시작했다. 선연홍의 혀가 여지운의 입안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 보답으로 여지운이 선연홍의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또다시 허벅지를 벌리려는 무릎을 찼다. 무릎으로 치고받고, 발등을 지지고 밟고 난리인 아래쪽에 반해 키스는 숨 막힐 정도로 농밀하고 끈적했다.

  후, 한 박자 멈춘 틈을 타서 입술을 뗐다. 하지만 선연홍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여지운의 뺨을 잡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열이 오른 입술이 턱을 핥았다. 

  “지운씨가 먼저 키스해주다니, 기쁘네요.”

  “당하고는 못살아서. 이번 일은 상호 간의 뭐, 그런 걸로 합시다. 선연홍씨가 먼저 손 대……. 아,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아무튼, 변하는 건 없습니다.”

  “제가 지운씨에게 먼저 손 안 대는 것 말이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키스는 허락해 주세요.”

  선연홍은 더없이 간절하고 애틋한 연인의 얼굴을 한 채 속삭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니 알고 봐도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애절해 보였다. 

  가증스러운 새끼.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몸을 비비는 것만큼 선연홍과의 키스 역시 기분이 좋았다. 

  “알겠습니다.”

  “네. 그럼, 이제 일출을 보러 갈까요? 호텔까지 40분 정도 걸립니다.”

  “일출? 이 꼴을 하고 말입니까?”

  제정신이냐. 새끼야. 

  자신은 물론이고 선연홍도 멀쩡하진 않았다. 드러난 살갗은 땀에 젖어 번들거렸고 옷은 구겨져 희끄무레한 액체들이 묻어 있었다. 와중에 표정만은 담담하니 참 묘했다.

  “그럼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습니까.”

  “집에 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새해인데 오늘 하루 정도는 같이 보내도 되지 않습니까.” 

  “안됩니다.”

  “제 집이나 작업실에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디서 약 팝니까? 안 사니까 꺼져요.”

  선연홍의 집과 작업실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이것저것 떠올랐다. 일단 제정신이 아닌 놈이니까 평범하지 않을 것 같다. 전기의자나, 초, 가죽 벨트, 채찍, 구속구, 안대 뭐 이런 것들이 있으려나? 지나치게 솔직한 여지운의 표정을 읽은 선연홍이 짧은 웃음을 토해냈다.

  “알았습니다. 집에 모셔다 드릴 테니 좀 자요. 깨워 드리겠습니다.”

  “창문 더 열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히터 틀까요?”

  “아뇨. 이대로도 좋습니다.”

  “그래요.”

  선연홍이 뒷좌석에서 모포를 꺼내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모포는 분홍색 바탕에 둥실 한 토끼가 그려져 있다.

  “옷이 젖어서 추울지도 모르니 덮고 계십시오.”

  “지랄. 배려 한번 끝내주네요.”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몸을 다 감싸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얼굴을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그건 적어도 도착하기 전까지는 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여지운은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너무, 너무 피곤했다. 

  

  * * *

  

  최악의 새해를 맞이했다. 최악이라는 단어로도 지금 여지운의 심정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날 이후 그의 상황은 꽤 좋았다. 액땜이라도 한 듯이. 회사 신연회 때 상패와 상금을 받았다. 지난해 말, 정말 피똥을 쌀 정도로 뺑이 쳤던 보람이 있었다. 그 당시 스트레스를 모두 선연홍에게 풀었다.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었겠지? 변태새끼. 

  손끝으로 봉투를 매만지며 금액을 가늠했다. 선연홍과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투자한 돈이 기 백이었다. 그런 밤을 보내기 위해 쓴 돈은 아니었는데. 결국, 남은 건 어마어마한 카드값과 절대 알지 말았어야 할 감각이었다. 처음 한 번은 실수라고 쳐도 떡 치면서 새해를 맞이한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쾌감을 쫓는 건 본능이니까 괜찮다고, 당연하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셔츠와 수트 상의는 멀쩡하게 입은 채 바지와 팬티만 벗겨졌다. 그 와중 양말은 신고 있어 더 비참하고 자극적이었다. 발끝이 버튼을 툭 누르자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서류를 뒤적이는 척하지만 이미 머릿속은 다른 것들로 꽉 찼다. 심상치 않은 표정에 팀원들은 팀장님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말이 들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밥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이를테면 감각과 감정의 상관관계 같은 것. 그때 자신의 육체를 지배했던 쾌감은 거대했지만, 그것이 선연홍에게 기반을 둔 감정이냐고 하면 그건 모르겠다. 만약 육체적 자극일 뿐이라면 꼭 선연홍이 아니어도 상관없단 말인데.

  “아니, 그건 아니야.”

  다른 새끼들이라니, 생각만 해도 토 나왔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여지운이 얼굴을 구겼다. 

  “음, 잠깐…….”

  이러니까 마치 선연홍이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건 더 말이 안 됐다.

  “엇, 팀장님. 사무실에 계셨네요? 점심 안 드셨어요?”

  3팀의 막내 정아영이 심각한 얼굴로 야릇한 망상을 하는 팀장에게 말을 걸었다. 점심 먹고 카페라도 다녀온 것인지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입맛이 별로 없어서요.”

  “그래도 식사는 하시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아영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보통 팀장과 막내 사원은 가까운데 앉는 경우가 많아 그녀 역시 여지운의 옆자리였다. 

  “아, 맞다. 팀장님. 남자들은 보통 무슨 선물 좋아해요?”

  오후에 있을 회의 준비를 하던 여지운이 고개를 들었다. 정아영이 파티션 옆으로 고개를 쭉 빼고 있었다.  

  “몇 살인데요? 직업과 나이에 따라 필요한 것도 다르니까.”

  “저랑 동갑이니까 스물넷인데 아직 학생이에요.”

  “남자친구?”

  “아뇨. 그냥 친구요.”

  “아, 혹시 정아영씨가 종종 말하던 그 친굽니까?”

  “네.”

  정아영은 신입답지 않게 일 처리가 빠르고 꼼꼼해 여지운이 눈여겨보고 있었다. 성격도 발랄해서 본인이나 친구에 관한 애기도 종종 했다. 친구의 애인이 상당히 이상하다고 했나? 저번 회식 때는 내 친구 안타까워서 어쩌냐며 한탄을 했던 것도 같다. 

  “생일 선물인데 제가 줬다는 거 알면 그 미친놈이……. 어머, 죄송해요. 친구 애인이 난리 날걸요.”

  “괜찮습니다. 미친놈을 미쳤다고 하는 건데요. 저도 한 미친놈 알고 있는데 아주 골 때립니다.” 

  “그렇죠? 옆에서 보는 저도 속 터져 죽겠어요. 걔는 그 미친놈이 뭐가 좋다고.”

  그러면서도 살짝 눈치를 보는 게 직속 상사에게 괜한 말을 하는 것 같아 민망한 듯했다. 하지만 정아영이 뭐라 하든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격한 공감을 하고 있었지. 미친놈이라면 여지운이 아는 그 미친놈도 만만치 않았다. 평소에는 멀쩡한 척하면서 특정 상황에서 정신이 획 도는 것도 이상했다. 

  여지운과 정아영은 한동안 미친놈은 왜 그 모양 그 꼴인가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각자 업무에 복귀했다. 

  

  * * *

  

  “지운씨. 오늘도 고생했어요.”

  온종일 미친놈에 관해 생각했더니 그 미친놈이 퇴근 후 회사에 마중 나와 있었다. 여전히 반질반질한 낯짝을 새삼스럽게 훑었다. 

  저렇게 생긴 애가 성격은 왜 그럴까. 

  “지운씨?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재수 없음이 묻었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선연홍이 배시시 웃었다. 볼록하게 솟아오르는 뺨을 보고 있다가 차에 탔다. 곧바로 운전석에 탄 그가 여지운에게 핫팩을 쥐여 줬다. 딱 좋을 정도의 따끈함이 손바닥을 녹였다.

  “뭡니까?”

  “오늘 상당히 춥지 않습니까. 손 좀 녹이시라고요.” 

  “매너 있는 척은…….”

  “저녁 드셨습니까.”

  “네.” 

  선을 긋는 느낌으로 딱 잘라 대답했는데도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항상 그랬지. 그는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에 긍정했다. 

  “최근 K호텔에 괜찮은 음식점이 생겼는데 거기서 저녁 먹을까요?”

  “K호텔?”

  원래 두 사람은 새해를 그곳에서 보려고 했다.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카섹스로 첫날을 맞았다. 으……. 여지운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를 떠올리니 또다시 뺨이 화끈거렸다.

  “아,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 전시회가 있는데 시간 됩니까?”

  “싫습…… 음, 전시회? 무슨 전시회요?”

  습관적으로 거절하려던 여지운이 전시회라는 말을 곱씹더니 모른 척 다시 입을 열었다.

  “타이틀은 공간과 미술이고, 건축가 마쉘리 로 샤브르 전시회 입…… 아, 조심해요.”

  바퀴가 방지 턱에 걸린 차체가 덜컹거렸다. 앞으로 쏠리는 몸을 선연홍이 막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여지운이 딱 그런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뭐합니까? 저 여자 아닙니다.”

  “여기서 성별이 왜 나옵니까? 저는 그냥 지운씨가 위험한 상황이 싫은 겁니다.”

  “…….”

  “그냥, 그런 거예요.”

  가슴을 막은 손이 목을 타고 올라와 여지운의 턱 끝을 살짝 잡고 눌렀다. 입술이 벌어지자 엄지로 혀 가운데를 꾹 눌렀다. 뚱한 얼굴의 여지운이 그 순을 매몰차게 쳐냈다.

  “개수작은 그만 하라고 말했을 텐데요.”

  “하하. 어쨌든 마쉘리 로 샤브르 전시회는 사실입니다. 같이 가시겠어요?”

  “좋습니다.” 

  “기뻐하는 것 같아서 저도 기쁘군요.”

  “……닥치고 운전이나 하시죠.”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하는 대신 여지운의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간단한 디저트를 시켰다. 수요일인데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예전에 아웃팅에 예민한 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 뭐만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하며 전전긍긍했다. 그 남자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생각, 혹은 사고방식이 다르니 간섭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여지운의 입장에선 이해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요즘은 그 남자의 심정이 아주 조금 이해가 됐다. 선연홍이 집이나 회사 근처에서 지랄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곤 했으니까.

  “자, 여기. 차가우니까 조심해요.”

  “너나 조심하시죠.”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말은 낮은 웃음소리로 되돌아왔다. 여지운도 딱히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지만, 저 남자는 그것과는 좀 더 다른 느낌이다. 눈치를 보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타인을 인식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들에게 향하는 모든 신경을 여지운에게 쏟아 붓는 느낌.

  “토요일 오전에 데리러 갈게요. 아, 지운씨 혹시 토요일에 회사 가십니까.”

  “아니요. 다음 주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점심 먹고 보죠.”

  “점심 먹기 전에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맛있는 곳을 알…….”

  “먹고 보자고요. 나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 사람입니다.”

  “알았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여지운은 별 대꾸 없이 빨대를 쪽 빨았고 선연홍의 시선은 그 입술에 향해 있었다.

  

  * * *

  

  선연홍과 있으면 이상하게 말렸다. 딱히 약점 잡힌 것도 아닌데 뭔가 심리적으로 밀렸다. 온갖 말을 지껄이며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 가보니 선연홍이 나와 있었다. 

  “지운씨, 잘 잤어요? 오늘도 귀……. 음, 멋있습니다.”

  “네.”

  내가 잘난 건 나도 알거든. 노골적인 자신감에 선연홍이 조용히 웃으며 손에 쥐고 있었던 꽃다발을 건넸다.

  “뭡니까.”

  “오는 길에 예뻐서 샀습니다. 지운씨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요.”

  “…….”

  포장지에 감싸인 겨울꽃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꽃이 쓸데없는 선물이라는 것에 동감하는 편인데 가끔은 쓸모보다 기분이 중요할 때가 있다. 특히 남자는 꽃을 받아볼 기회가 없어서 더 잘 먹혔다. 그래서 여지운도 종종 꽃 선물을 했는데, 대부분 반응이 좋았다. 그때는 그냥 넘겼는데 직접 받아보니 의외로 기분이 묘했다. 선연홍은 꽃 선물을 좋아했다. 서너 번 만나면 한 번 정도로 지금껏 받은 것만 해도 스무 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꽃이 어울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군요.” 

  “말 그대롭니다, 지운씨가 예뻐서.”

  어딜 보나 미인인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본인이 한 일이 단숨에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되었지만, 그는 그마저도 좋은지 휘어진 눈 끝에 웃음을 올망졸망 매달았다.

  “출발할게요.”

  선명한 색의 꽃다발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배가 고팠다. 어제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 보니 늦잠을 잤다. 아침 먹는 것보다 약속준비를 택했다. 옷장을 열어 놓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더욱 돋보일 수 있는지 한참이나 고민을 거듭했다. 

  “도착했습니다.”

  주말인데도 생각보다 빨리 전시회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마쉘리 로 샤브르의 사진과 함께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는 판넬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보니 다소 한산했다. 하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예전 파리 박물관에 갔던 적이 있는데 작품은 고사하고 인간들 머리만 지겹도록 보고 왔었다. 

  “선연홍씨, 혹시……,”

  “네?”

  “아닙니다. 가죠.”

  ‘마쉘리 로 샤브르, 아십니까?’ 하는 물음은 목구멍으로 넘겼다. 

  ‘여지운씨가 좋아할 것 같아서 준비했다.’하는 대답을 들으면 심란할 것 같았다. 물론 이 생각 자체가 김칫국을 마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랬다. 손바닥에 모래 알갱이가 남아 있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은 막상 전시회장 안에 들어가니 사라졌다. 

  마쉘리 로 샤브르는 건물 설계 및 공간과 실내 디자인을 하는 미국인으로 여지운이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였다. 안에는 그가 이제껏 작업한 건물을 축소한 미니어처 모형을 기준으로 각종 소품, 아이디어 스케치, 평면 에스키스 등 관련 자료들이 빼곡했다. 아무리 인지도가 없어도 너무 조용하다 싶었는데 들어와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이번 전시회는 일반인 상대가 아닌 VIP 전용이었다. 그러니까 좀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전시된 작품을 살 수 있거나, 혹은 손상되었을 때 값을 물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VIP 전시회는 표를 구할 가능성 자체가 희박했다. 창구는 물론이고 인터넷 예매처에도 오픈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당 전시회장의 유료회원이거나 권력, 인맥 혹은 인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선연홍 곁눈질 하던 여지운이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작품을 보고 있을 줄 알았던 선연홍이 여지운을 보고 있었다. 

  “뭡니까? 전시회에 와서 보라는 작품들은 안 보고 왜 날 보고 있어요.”

  제가 먼저 힐끔 봤음에도 되레 화를 내는 게 귀여운 듯 선연홍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여지운이 검지로 제 이마 옆을 빙글빙글 돌렸다. ‘정신 나갔냐?’ 하는 뜻이 담긴 행동에도 기쁜 얼굴이었다. 좋단다.

  전시회장 안 촬영은 당연히 금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눈에 담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옆에서 선연홍이 자꾸 치근댔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 해도 손깍지 끼고, 손등을 미묘하게 두드렸다. ‘이건 개새끼가 엉겨 붙는 거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작품에나 집중하자, 집중하자.’ 하고 되뇌던 여지운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 거 좀. 낄 때 끼고 빠질 때 좀 빠집시다.” 

  “너무.”

  “뭐요?”

  “귀엽긴 한데 너무 반짝이는 눈으로 작품 보지 마요. 질투 나니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싸늘한 첫인상의 선연홍은 교제를 시작하고 난여지운이 어떤 지랄을 해도 모두 이해하고 수용했다. 그 뒤엔 주인님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했다가, 주인님이 되고 싶다는 둥 미친 소리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다. 강압적이냐고 하면 그건 아닌데 이상하게 찜찜했다. 우위에 선 자가 그래그래. 그렇게 해줄게. 하고 우쭈쭈 하는 느낌이랄까. 

  “미친놈이라는 말도 이제는 정겹네요.”

  “…….”

  상대하지 말자고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작품들에 집하는 여지운의 손을 선연홍이 잡았다. 

  중간에 몇 번 열 받는 일이 있었지만,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은 전시회였다. 누가 기획이나 구성 어디 하나 흠 잡을 때 없었다. 모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나온 출구 앞에는 팸플릿을 든 직원이 서 있었다.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방명록과 기념품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비싼 전시회는 다르긴 하구나. 여지운이 손을 내밀었다. 

  “……?” 

  왜 반응이 없어? 혹시 못 봤나 싶어서 손을 다시 한 번 흔들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저기, 안 줍……, 어? 임선열?”

  결국 조금 짜증 난 상태로 고개를 돌렸던 여지운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임선열 맞나?”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고 하지. 그것은 사람 사이의 연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 여지운이네.”

  여지운이 노말 남자를 꼬셔서 떡 친 건 자주 있었지만 임선열은 특별했다. 물론 그 특별함은 감정적이라기보다 상황의 특수성에 가까웠다. 

  스물 셋의 임선열은 그 나이 또래의 평범한 남자였다. 성 정체성으로 평범함과 아님을 논하는 게 우스웠지만, 사회적 통념이 그랬다. 여지운처럼 좆도 신경을 안 쓰는 사람도 있었고 벽장에 꽉 닫힌 사람도, 혹은 관심도 없는 이도 있다. 

  여지운은 대학 시절 내내 임선열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그때는 선연홍이 여지운을 졸졸 따라다닐 시절이었다. 그래, 맞아.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떠올랐다. 임선열이랑 단둘이 있으면 어디서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모를 선연홍이 여지없이 끼어들었었다. 선연홍이 괴롭힘을 당하든 말든,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별 상관없었지만, 연애 사업을 방해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연홍에게 참 많이 지랄했었다. 그때 자신이 한 지랄이 더한 지랄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결론만 말하면 임선열과 섹스도 하고, 연애도, 이별도 했다. 

  “지운씨.”

  그러고 보니 상황이 되게 애매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지금.

  여지운이 선연홍을 돌아봤다. 무표정하던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었다. 요새 눈만 마주쳤다 하면 저렇게 방긋방긋 웃어댔다. 꼭 예쁨 받고 싶어 하는 어린 애처럼.

  앞에는 임선열, 옆에는 선연홍. 

  구남친과 현남친……. 게다가 세 사람은 같은 대학 동문이었다. 타 학과인 여지운을 제외하고라도 저기 두 사람은 같은 미대였다. 선연홍과 임선열이 서로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다. 아니야, 찔릴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어색할 건 뭔가. 

  “야, 임선열. 이렇게도 만나네. 이게 몇 년 만이야.” 

  여지운이 한 발짝 다가가며 악수를 하려 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아직 선연홍과 손을 붙잡은 채였다. 임선열의 시선이 엉겨있는 손으로 향했다. 손을 털어내려 했지만, 그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더 꽉 잡았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의 강한 압박에 손끝이 하얗게 변하며 팔뚝에 핏줄이 일어났다.

  “이 미친…… 음, 선연홍씨. 손 좀 놓으시죠? 하하. 수족냉증이 있다고 해서 잡아 드렸더니 아직도 이러고 계시네.”

  빨리 놓으라고 이 자식아. 여지운이 복화술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선연홍은 싸늘함에 가까운 표정으로 손을 천천히 놓았다. 손톱 끝이 여지운의 손바닥을 긁듯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소름이 돋았으나 애써 모른 척 몸을 돌렸다. 

  “잘 지냈나봐? 임선열. 좋아 보인다.”

  두 사람이 마주 잡고 있던 손에서 선연홍에게로 시선을 옮겼던 임선열은 제 이름을 듣고 나서야 여지운을 봤다. 

  “잘 지냈지. 쓰레기 같던 누구 때문에 학점 다 망쳐서 이 악물고 재수강했거든. 그 덕에 여기 취직도 했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 하냐? 하하. 그 쓰레기 덕분에 잘 된 것 같은데.”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저 쓰레기가 누굴 뜻하는지 눈치 챌 텐데 당사자가 모를 리 없었다. 곧바로 되돌아오는 비꼼에 임선열이 피식 웃었다.  

  “너야말로 좋아 보이네. 여지운.” 

  “난 늘 좋지.”

  “어쩌면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그놈의 자신감은. 어쨌든 반갑다. 보다시피 내가 지금 일하고 있어서 오래 얘기는 못 하고……. 이거 내 번혼데 연락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얼굴 보니까 옛 감정이 막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임선열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명함을 꺼냈다.

  옛 감정이라. 오랫동안 탐색하고 짧은 만남과 지저분한 결말을 맞이했으니 좋은 감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결말이라는 것도 여지운에게는 흔한 이별 중 하나 일 뿐이었다.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가 명함을 집기도 전에 뒤에서 쑥 뻗어 나온 손이 그것을 낚아챘다. 텅 빈 제 손을 내려 보던 여지운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갤러리 Esti’ 큐레이터, 임선열.”

  명함에 적힌 내용들을 소리 내어 읽던 선연홍이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건 제 명함이니 여지운씨에게 할 이야기는 저를 통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선연홍은 지갑에서 꺼낸 명함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채 임선열 쪽으로 내밀었다. 여지운을 대할 때와는 판이한, 거만한 태도였다. 여지운은 저게 또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얼굴을 했고, 임선열은 얼떨떨한 얼굴로 제 손에 쥐어진 작고 빳빳한 종이를 내려 보았다.

  “이보세요. 선연홍씨. 낄 데, 못 낄 데 구분 좀 하자고 한 게 바로 몇 분 전인데요.”

  “지금이 그 낄 타이밍 같습니다.” 

  쇠붙이의 단면같이 차가운 얼굴의 선연홍은 여지운을 볼 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았다. 하지만 여지운은 녹은 아이스크림은 끈적하다는 것도, 웃고 있는 선연홍이 보기만큼 달콤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작년 마지막 날, 건즈앤로즈 문을 박살 내던 그때도 저런 얼굴을 했다. 선연홍이 손을 들자 여지운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눈을 반쯤 내리깐 선연홍이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뭐가 묻어서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두 사람 사이를 가른 것은 임선열이었다.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임선열이 “저, 혹시!”하고 입을 열었다. 먼 곳으로 빨려 들어가던 정신을 급하게 수습한 여지운이 숨을 토해냈다.

  “혹시, 선연홍 작가님 아니세요?”

  그 목소리 안에는 희미한 들뜸이 묻어났다. 제 바짓단에 급하게 손을 닦은 임선열이 선연홍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선연홍 작가님이 아니신지…….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 여쭤봤습니다.”

  선연홍이 차갑고 예민한 작가 선생님의 얼굴로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놨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아직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아닙니다. 저 선생님 팬입니다. 정말, 너무 영광입니다.”

  순식간에 보이지 않은 벽이 생기며 여지운은 소외됐다. 저 두 사람을 둘러싼 벽은 아무리 두드려도 깨질 것 같을 것처럼 단단해 급격히 기분 나빠졌다. 

  아니, 아니지. 이게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지? 이 상황에서 왜 기분이 나쁘냐?

  그가 고민에 빠진 사이에도 두 사람은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두 손으로 선연홍의 명함을 쥔 임선열이 동경하는 대상을 만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세상에, 선생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작품은 많이 봤지만 한 번도 사진이 실린 적이 없어서 몰라 뵀습니다. 혹시나 여쭤봤는데 본인이실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그렇군요.”

  “저 선생님 팬입니다. 정말로요. 아,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 저……. 기회가 되면 저희 쪽과 전시회를…….”

  여지운에게 선연홍은 예술을 하는 작가님이라기보다 그저 욕 처먹는 것을 좋아하고,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미친 변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선연홍에게는 그런 모습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 남자, 당당하고 믿음직한 예술가. 임선열은 저 새끼가 얼마나 변태스러운지 알까? 저건 웃는 낯으로 구석까지 몰아붙이고 ‘여지운씨의 주인님이 되고 싶은 듯합니다.’ 하고 말을 하는 미친놈이라고.   

  대나무 숲에서 당나귀 귀를 외치고 싶은 그와 달리 두 사람은 아직도 하하 호호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는 그중에 ‘봄 색’이라는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흑백에 포인트 하나만을 준 선생님 특유의 삼색 화풍이…….”

  “야, 지금 동창회 하냐? 팸플릿이나 줘. 뒤에 사람 서 있는 거 안 보여?”

  한창 열에 들떠 있던 임선열이 여지운의 말에 순간 얼굴을 구겼다가 선연홍의 눈치를 슬쩍  보고 웃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억지웃음이었다. 

  “사람 무안하게 하는 건 하나도 안 변했구나. 하긴 여지운이 변할 거였으면 내가 그 난리도 안쳤겠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는 왜 하는 건지 모르겠네. 됐고, 바빠서 이만 간다. 여기 내 연락처 일단 두고 간다.”

  여지운이 임선열의 손에 들린 팸플릿을 낚아채며 제 명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임선열이 여지운에게 명함을 주는 것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던 선연홍은 반대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지운은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선연홍이 임선열의 얼굴을 새기듯이 훑고서 그의 뒤를 따랐다. 

  “저 사람에게 연락하지 마십시오.”

  “예?”

  형식적이나마 걸려 있던 웃음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어찌나 싸늘한지 말을 붙이는 것조차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혼자 남은 임선열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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