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8)

9.

  

  “여기는 전체적으로 간이 삼삼한 편이라 지운씨 입에도 잘 맞을 겁니다.”

  마쉘리의 전시회는 좋았다. 국내외 통틀어 다녔던 전시회 중 한 손에 꼽을 수 있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여지운에게 기분이 좋으냐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한쪽 팔을 괜 채 얼굴을 구기고 있는 모습은 분명 심기가 편치 않아 보였다.

  “먹어요.”

  선연홍이 데려온 음식점은 ‘미옥(美玉)’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으로 여지운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연초에는 원래 예약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기도 했지만, 주로 단체 손님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곳이라 3인 이하는 아예 받지도 않는 곳인데 자리가 안내됐다. 두 사람은 가장 안쪽, 개별 방으로 향했다. 값비싼 음식점에서 가장 값비싼 코스요리를 주문한 선연홍이 반쯤 채운 물컵을 여지운의 앞에 놓았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혹은 데이트를 하면서 여러 음식점을 다녀봤지만 선연홍이 데려가는 곳은 항상 고급스러웠다. 종류도 가리지 않았다. 한식, 일식, 중식과 동남아, 유럽 음식을 하는 곳까지. 연락할 때도 항상 식사부터 챙겼다. 밥 먹었냐고, 밥 먹으라고, 밥 먹으러 가자고. 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달라붙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상큼한 얼굴로 수줍게 말했다. 

  ‘밥을 먹이는 거에 집착하는 이유라……. 사실은 제 좆을 물리고 싶은데, 매번 그럴 순 없으니까요.’ 

  “미친 새끼.”

  “네?”

  젓가락질하다가 난데없이 욕을 들어먹은 선연홍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별 거 아니라 생각했는지 전복 하나를 여지운의 밥그릇 위에 올렸다.

  “여기 전복 요리 잘하는데, 좀 먹어봐요.”

  간장에 조린 전복은 통통하고 쫄깃했다. 선연홍은 아주 흐뭇한 얼굴을 한 채 여지운이 먹는 것을 봤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수저를 뜰 때마다 반찬이 올려졌다.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네.

  “근데, 아는 사람입니까?”

  자꾸 쑤셔 넣어지는 음식을 넘기느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전 그 남자요.”

  눈동자를 굴리던 여지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 먼저 나서서 말하진 않았어도 숨기진 않았다. 이제껏 만났던 섹파가 몇 명이냐고 물어도 답해 줬을 것이다. “너무 많아서 생각이 안 납니다.” 하고. 그리고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굴 만났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대학교 때 교제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선연홍은 여전히 정갈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했다. 저러다가도 또 언제 휙 바뀔지 모르지. 심심하지 않아서 좋은데, 너무 심심하지 않아서 무서울 지경이다. 

  “선연홍씨와도 많이 마주쳤잖아요. 그때, 선연홍씨가.”

  “방해했었죠. 그 남자와 당신을요.”

  누구냐고 묻기에 모르나 했더니 모르는 척한 것이었다. 아마도 떠보려고 한 것이겠지. 선연홍은 기억력이 좋고 똑똑했다. 당사자조차 기억에 나지 않는 일들, 이를테면 두 사람이 교제 초반에 있었던 일 같은 것을 곧잘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은 없었다.

  “시각 디자인과, 임선열. 맞습니까?”

  다시 확인하듯 이름을 묻는 것은 빤히 보이는 수법이라 웃음이 났다. ‘나는 원래 이렇게 잘난 남자다.’ 하는 표정을 지으며 여지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임선열은 제가 첫 남자일 겁니다.”

  “여지운씨는 제게도 첫 남자인데요.”

  “……쿨럭.”

  순간 기침이 터져 나왔다. 앞자리에 앉은 선연홍이 건네는 물을 받아 마셨다. 아, 목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여지운씨. 매력적이죠. 저도 잊지 못해 이렇게 찾아왔지 않습니까?”

  “그쪽이 그렇게 말하니 묘하게 기분 나쁘네요.”

  “여지운씨는,”

  “네.”

  “그때의 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별생각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억도 희미합니다.”

  그때는 임선열을 어떻게 쓰러트릴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누가 뭘 어떻게, 어쨌다. 하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렇습니까?”

  한참을 웃던 선연홍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휘어진 눈 끝에는 작은 웃음들이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때 전 유명했습니다. ‘한국화과 선연홍.’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잔디 깔고 입학했다, 학생식당을 지어줬다 등 실체 없는 소문이 만연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때 좀, 소심하기도 했고 아시다시피 겉모습도…….”

  “알긴 뭘 압니까? 선연홍씨가 뭐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기억 안 난다니까 왜 이렇게 질척하게 구냐. 

  “그때와 지금의 저를 매치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때의 절 기억 못 하는 사람은 아마 여지운씨 밖에 없을 겁니다. 당시에도, 지금도 당신은 당신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보여요.”

  “……듣자 듣자 하니까 지금 넌 너밖에 모르는 좆같은 놈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제법 다정한 얼굴로 조근조근 말하고 있지만 내용을 까보면 ‘넌 네가 제일 중요한 줄 아는 인간이다.’였다.  

  남 따위가 뭐 어쨌다고. 인간들의 평판 같은 것에 신경 써봤자 피곤해 질뿐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수용을 해봤자 그 사람들이 그걸 알까? 오히려 더 나대면서 간섭하려 들겠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대부분 걱정이나 격려가 아니라 오지랖과 간섭이었다. 위로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안됐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잘됐다며 비웃는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아주 극소수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냥, 뭐랄까. 그때 전 아주 작은 해마였습니다. 작고 쪼글쪼글한 해마요. 다른 사람의 관심이 햇볕 같았죠. 그것이 강할수록 더 움츠러들었습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나를 지켜보는 것 같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음?”

  “사라지고 싶던 그때, 만났던 게 여지운씨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모습이. 내가 어떠하든,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공평하게 싸가지 없, 아……. 음,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멋져서 쫓아다니기 시작했죠.”

  “뭔 소리야.” 

  “그러니까 제게 여지운씨는…….”

  “선연홍씨, 전화 왔습니다.”

  여지운이 턱 끝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선연홍의 전화기를 가리켰다. 

  “안 받아도 될 것 같은데.”

  “받아요.”

  “네.”

  참 적절한 시기에 전화가 잘 왔다. 여지운은 사실 선연홍이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해마 어쩌고 하는데, 해마? 바다에 사는 물총같이 생긴 생물 말하는 건가. 본인이 해마 같았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야.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임선열이 떠올랐다. 임선열은 여지운이 정말로 오랫동안 공들여 만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발랑 까져서 여기저기 붙어먹었지만, 임선열이라면 오랫동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었다. 헤어진 이유와 원인은 늘 그렇듯 여지운 때문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땐 정말 미친 듯이 놀았다. 섹스하는 게 좋고, 노는 게 좋아서 한 사람이랑만 만나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고 할까. 그것은 자신이 쫓아다녔던 임선열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사귀고 난 다음에도 클럽에 가고, 원나잇하는 쓰레기 같은 일상을 이어갔다. 죄책감이랄 것도 없었다. 

  ‘임선열, 너도 그렇게 해. 다른 놈들이랑 떡 쳐도 별말 안 할 테니까.’ 같은 말을 달고 살았으니까. 그는 울면서 매달렸다. 처음의 관계성은 완전히 뒤집혀 어느새 임선열이 여지운에게 감정적으로 끌려다녔다. 신경질적이 됐고 쉽게 화를 냈으며 비난하는 일이 잦았다. 

  ‘여지운 넌 왜 그래?’, ‘왜 그렇게 말을 해, 왜 상처 주는 거야?’, ‘왜 우리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 안 해?’, ‘왜, 왜, 왜.’

  헤어졌다. 그냥 그게 끝이다. 연애하다 헤어지는 거. 다를 건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은 좀 곤란하고……. 아, 그렇습니까. 아니요, 당분간 작품 활동은 좀 어려울 듯합니다.”

  디저트로 나온 살짝 언 홍시를 가르다가 문득 선연홍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습관처럼 미소 짓고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작품 활동이라. 임선열은 시각 디자인 전공이었고 선연홍은 한국화과였다. 같은 미대니 교양 같은 건 겹치기도 했을 것이다. 선연홍이 유명했으면 임선열이 몰라봤을 리는 없을 텐데. 하지만 선연홍의 말대로 그때와 지금의 저 남자를 동일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생님. 선생님. 선연홍 작가님.’ 임선열이 그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임선열이 학부 시절 딱 한 번 장학금을 받지 못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밥도 안 먹고 작업에 매달렸을 만큼 욕심이 많았다. 자존감과 생기 넘치는 그 모습에 끌렸었다. 임선열, 그리고.

  선연홍 작가님. 

  “그건 다 끝마치고 작업실에 놔뒀습니다. 아, 지금은 밖이라 안 됩…….”

  “가죠.”

  전화기를 뺨에 댄 채 통화하던 선연홍이 여지운을 돌아봤다. 그는 삼각형으로 예쁘게 접힌 냅킨을 한 장 뽑아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급한 거 같은데 선연홍씨 작업실로 가자는 말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듯 선연홍이 입을 살짝 벌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화기를 얼굴에서 뗀 선연홍이 “지운씨?” 하고 불렀다.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선연홍이었다. 

  “알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사진 보낸 뒤 다시 연락하죠.”

  여지운은 턱을 괸 채 포크로 남은 홍시를 쿡쿡 쑤셨다. 선연홍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지운씨, 정말 괜찮습니까? 그때는…….”

  선연홍이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이어지진 않았지만, 저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았다. 선연홍은 “자신의 작업실에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보여주고 싶다.”하고 여러 번 권유했다. 그때마다 여지운은 지랄했다. “내가 거긴 왜 가냐, 우리가 뭐 개인적인 공간에 드나들 사이냐.”하며 정색하고 거절했고.

  사실 지금 즉흥적으로 내뱉은 것이다. 가고 싶다기보다 임선열을 떠올리다가, 임선열이 선연홍을 보던 눈빛을 떠올리다가 툭 내뱉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선연홍 작가님이 어떤 사람인지.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정말 기쁩니다.”

  하지만 선연홍은 꽤……. 아니, 상당히 기뻐 보였다. 괜히 숨을 크게 들이키며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고,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조금 전처럼 탐색하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정신 사납게 그만 좀 팔락거려요.”

  “좋아서요.”

  “뭐가?”

  “지운씨가 관심을 가져주는 게, 음. 그러니까 그 일이 있었던 후 처음으로 먼저 제의를 한 거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여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왠지, 하고 싶지 않았다.

  음식점을 나오자 해가 저 멀리 걸려 있었다. 쌉싸래한 하늘과 지금 날씨가 퍽 잘 어울렸다. 후우. 숨을 내 쉬어보자 하얀 입김이 번졌다. 흐릿한 연기를 보니 담배가 당겼다. 

  “타요.”

  선연홍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필요 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잠시뿐이고 잊을만하면 또 그랬다. 여지운도 운전석 문을 열어줬다. 처음에는 조수석 문 열어주는 미묘한 배려가 짜증 나서 시작한 건데 어느새 서로 문을 열어주는, 뭔가 애매한 상황이 됐다.

  “여기서 작업실까지 몇 분 정도 걸립니까?”

  “음, 차가 안 막힌다는 전제하에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함께 작업실 가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나네요. 대학생 때.”

  오늘은 어쩐 일인지 과거 이야기를 제법 했다. 그것은 선연홍의 작업실로 가는 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딘지 모르게 들뜬 기색의 선연홍은 주로 그때의 여지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로 성격에 대한 칭찬과 자신이 여지운을 얼마나 동경했는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선연홍씨, 취향이 좀……. 이상한 거 본인도 압니까? 진심으로 또라이 같아요. 개 또라이.” 

  계속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지운은 인기가 많았지만, 성격이 유하지 못한 탓에 장기적으로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니, 없다 시피가 아니라 없었다.

  회사에서는 제법 신임받고 호평받는 팀장이었지만 그들과 개인적인 생활을 공유하진 않았다. 팀원들에게 존경이 담긴 시선을 받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팀장 여지운이었지 인간 여지운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소한 듯하면서도 큰 차이였다. 

  “왜 그렇게 귀엽게 화냅니까? 좀 더 욕해 줬으면 좋겠네요.”

  인간 여지운에 관한 소문은 끊이질 않았다. 매력적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난과 욕도 많았다.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뿐이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귀가 있는데 어떻게 안 들려. 가만히 있어도 온갖 욕이 다 쏟아져 들어오는데. 

  항상 나쁜 얘기만 듣고 본인조차도 별로라고 생각하는 단점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것은 상당히 묘했다. 세상 누구도 ‘당신의 오만함이 귀엽다’, ‘욕하는 모습이 너무 흥분된다.’, ‘제멋대로 하는 점이 너무 좋다.’하고 말 하지는 않으니까. 

  무조건적인 애정과 칭찬은 부모에게도 듣지 못한 것이었다. 여지운은 초등학교 시절에 형과 비교당하며 자랐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열여덟의 여지운은 결국, 참지 못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라는 가식을 벗어던지고 본심을 드러냈다. 꾹 참고 지냈던 지난날의 한을 모두 풀듯 속에 있는 것을 여과 없이 꺼내기 시작했고, 지나치게 솔직하고 제멋대로인 모습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하지만, 선연홍은……. 애정 섞인 긍정이 어떤 느낌인지 우습게도 선연홍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취향 진짜 좆같네.”

  물론 그 애정이 남들과 조금 다른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전 아주 마음에 듭니다.”

  여지운은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뒀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고, 선연홍은 더 말을 잇는 대신 라디오를 눌렀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가 언젠데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가? 황당한 얼굴의 여지운이 돌아보자 선연홍이 ‘왜요?’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순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없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물들였던 섹스. 여지운은 축축하게 젖은 머릿속으로 새빨간 기억이 스며들려는 것을 온 힘을 다해 눌렀다. 

  

  * * *

  

  선연홍이 주차를 하러 간 사이 그의 작업실로 추정되는 건물을 올려봤다. 

  “……흐음.”

  작업실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콘크리트 건물을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길로 오기에 의심했던 것도 잠시, 지금 여지운은 아주 고풍스러운 기와집 앞에 서 있었다. 

  “한옥이네.”

  꽉 닫힌 거대한 문 가운데에는 도깨비문양의 쇠 문고리가 달려있었다. 저걸 손으로 잡고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 해야 할 것만 같다. 

  “오래 기다렸죠? 자, 들어가요.”

  어느 사이엔가 옆에 온 선연홍이 문을 열고 양옆으로 열었다. 집 안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넓네.’와 ‘예쁘다.’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래전에 지어진 것 같은데, 푸른색이 도는 기와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관리가 잘 돼 있었다. 고아한 선을 그리며 뻗은 용마루 끝에 늘어진 풍경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돌담을 따라 쭉 심어진 상록교목은 방문을 반기듯 이파리를 흔들었다. 널찍한 정원 한쪽에 자그마한 못에는 연꽃이 피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허리를 굽혀 살펴보니 그 안에  팔뚝만한 잉어들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헤엄치고 있었다. 또한,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봉 대에 걸친 고운 색의 한지가 바람에 팔락이고 있었다. 가장 현대적인 도시에서 만나는 옛 공간은 굉장히 서정적이고 새로웠다. 

  “멋지네.”

  시끄럽고 자극적인 것만 좋아할 것 같은 느낌과 다르게 여지운은 섹스 이외에는 조용하고 단정한 것을 선호했다. 얼마나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었는지 옆에서 선연홍이 빤히 보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연홍은 웃고 있었다. 일부러 만들어 낸 것도, 여지운을 괴롭히면서, 또는 흥분하는 것을 보면서 짓던 얄궂고 짓궂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풋풋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근데 이 집은 언제 지어…….”

  들뜬 기색으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던 여지운이 바로 옆에 있는 선연홍을 보고 흠칫 놀랐다. 

  “…….”

  “…….”

  아니, 왜 그런 얼굴로 보는 거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망함보다는 조금 가볍고, 어색함보다는 조금 깊었다.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여지운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말했다. 

  “언제 지어진 겁니까?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제 증조부의 조부 시절부터 내려왔다고 하니 적지 않은 세월일 겁니다.” 

  그럼 적어도 몇백 년은 됐을 텐데. 그런 것치고는 정말 관리가 잘 됐네.

  “추우니까 일단 방으로 들어가죠.” 

  새빨개진 여지운의 코끝을 핥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선연홍은 방문을 열고 다시 돌아와 여지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위험하니까 손잡아요.”

  툇마루와 마당까지의 높이는 고작해야 무릎 정도도 안 됐다. 그의 손길을 당연히 무시한 여지운이 혼자서 쑥 올라갔다. 허공에 뻗어진 손이 무안할 만도 할 텐데 선연홍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거뒀다. 

  약간 쌀쌀한 기운이 도는 널따란 방 안에는 각종 화구(畫具)와 종이, 그리고 그리다 만 그림 같은 것들이 널려있었다. 

  “좀 더럽죠? 작업 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잠시만 앉아 계세요. 차라도 내올……, 아, 혹시 드시고 싶은 것 있습니까.”

  “거품이 잔뜩 올라간 카페라테로 주십시오. 꼭, 꼭! 거품이 있어야 합니다.”

  “집에 우유가……”

  “먹고 싶은 거 말하래서 했을 뿐인데 없으면 사 와서라도 만들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믹스커피도 아니고 아메리카노도 아닌 애매한 메뉴에도 선연홍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문 열어 놔요.”

  “종이가 있는 곳이다 보니 난로가 없어서 추울 텐데요.”

  “괜찮습니다.”

  “그럼 반 정도만 열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문지방을 넘었던 선연홍은 되돌아와 코트를 벗었다. 멀뚱멀뚱 서있는 여지운의 어깨에 얹어준 뒤 실수인 척 그의 뺨을 살짝 쓸었다. 

  “추우니까 입고 있어요. 빨리 오겠습니다.”

  “그만 좀 꺼져요.” 

  알싸하고 버석거리는 겨울 저녁, 밤. 이 넓은 집에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니 뭔가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켜 보자 오래된 냄새들이 가득 스며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여지운은 코트 깃을 잡아당기며 방안을 둘러봤다. 방구석에는 제법 큰 카메라가 있었고, 옆에는 여지운의 어깨 정도의 삼단 책장이 놓여있다. 낮은 다리의 책상 아래의 방바닥에는 수십 장의 그림들이 흩어져 있었다. 넓은 방에 가구도 몇 개 없었지만, 화구와 종이가 많아서 그런지 어지러워 보였다.

  채찍이나, 초, 구속구 같은 거나 벨트 같은 것들을 생각했는데 의외로 멀쩡하네. 책장을 훑던 여지운의 손끝은 굉장히 낯익은 표지를 발견하고 멈췄다. 

  “이게 왜?”

  잡지 ‘건축과 실내디자인.’ 몇 년 전부터 이곳에 종종 칼럼 작성과 투고를 하고 있었으니 익숙한 게 당연했다. 여지운도 여러 권 갖고 있고 사내에도 배치돼 있지만, 타인의 집에서 발견한 건 처음이다. 그것도 선연홍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좀 더 이상한 기분이었다. 괜히 코끝을 매만지며 책장에서 뽑아냈다. 반질반질한 책 위로 책갈피가 불쑥 올라와 있었다.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여지운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잡지를 펼쳤다. 예상했던 대로 책갈피가 꽂혀 있던 페이지에는 여지운의 글이 사진과 함께 담겨 있었다. 

  “음?”

  잡지 속 제 사진을 보던 여지운이 문득 눈가를 좁혔다. 손바닥으로 책을 받쳐 들고 가까이 들여다보는 얼굴에는 희미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뭐지?”

  그는 형광등 불빛 바로 앞에 서서 종이를 비춰봤다. 잡지 종이는 원래 반질반질해서 빛 아래에서 보면 더 번들거리기 마련인데 이건 뭔가 좀 이상했다. 사진 부분이 뭔가 말라붙은 것처럼 쪼글쪼글하다. 꼭 물이 묻었다가 마른 것 같은 모양새인데, 물이 아니라 그것보다 좀 더 끈적한 느낌의…….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정액 같은 것이 묻었다가 굳은 것 같은데.

  에이, 설마. 설마 잡지 사진 같은 걸 보고 자위 했겠냐. 그 나이에. 

  ……하고 생각하면서도 선연홍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니 뭔 짓을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찜찜한 느낌에 좀 자세히 들여다보느라 미처 발아래를 보지 못했다.

  바스락. 얇고 건조한 것이 발아래에서 바스러지는 느낌에 아래를 보자 화선지를 밟고 있었다. 설마 찢어진 건 아니겠지? 이름 있는 작가 작품이 보통 얼마 정도 하더라.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은 여지운이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떼 냈다. 혹시 찢어졌나 싶어 살펴봤지만, 끝 부분이 아주 조금 접힌 것 말고는 상한 부분이 없어 보였다. “휴.” 안도감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호기심이 남았다. 임선열이 그리도 기대하고 열광하는 선연홍 선생님의 그림이다. 여지운이 망설임 없이 그림을 내려 봤다.

  “음…….”

  한국화에서 기본이라는 사군자(四君子) 중에 죽(竹), 즉 대나무 그림이었다. 나뭇살을 한 번에 휘어 갈긴 듯 마디가 거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 조예가 깊고 욕심이 많은 임선열이 ‘선생님, 작가님.’하고 부르며 눈을 빛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안의 그림을 책상 위에 올려놓던 여지운이 유난히 곱게 말린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당연히 궁금하잖아. 열린 방문을 잠깐 힐끔 본 뒤 돌돌 말린 그림을 펼쳤다.

  “…….”

  어째서 인간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걸까. 때로는 그 호기심이 화를 불러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판도라의 상자. 그 상자를 열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판도라는 알았을 것이다. 선악과를 손에 쥔 이브 역시 발갛고 매끄러운 표면을 보며 먹어도 되는지 고민했을 것이고. 하지만 판도라도 이브도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여지운 역시도. 

  “……하! 참나.”

  새하얀 종이 위에는 검은 선들이 수려하게 이어져 있었다. 독특한 느낌의 직선과 곡선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반적인 느낌의 화풍이 아닌 그보다 조금 더 독특한 새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화풍이나 특징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여기, 이 그림, 이게 중요했다. 

  “이거, 지금……!”

  여지운은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진짜인가, 혹시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그의 손에 들린 건 운우도(雲雨圖), 혹은 춘화(春畫)라고 불려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그림이었다. 

  그림 속 검은 머리의 사람은 눈을 반쯤 내리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그 안으로 조금 솟아오른 혓바닥이 보였다. 이마와 뺨에 늘어진 머리카락이 달라붙어있었고, 콧등과 뺨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치열과 울혈 자국이 가득한 가슴과 복부 아래의 다리는……. 활짝 벌어진 채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라 자세가 적나라했다.

  “이거, 설마?”

  흰 종이와 검은 먹 선을 제외하고 쓰인 색은 단 한 가지였다. 혀, 눈가와 뺨, 그리고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의 구멍에 칠해진 붉은색. 하지만 그 붉음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들쑤셨다. 여지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며 입안이 바짝 말랐다. 타액을 넘겨봐도 깔깔하고 쌉쌀한 입안은 그대로였다. 지금 그를 거울에 비춰보면 온몸이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지금 이 그림 속 남자처럼.

  꼴리게 할 목적이었다면 확실히 성공했다. 서른셋이 될 때까지 이렇게 적나라하고 야한 그림은 보지 못했으니까. 그저 평면적인 선과 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존나 야하네, 야한데……. 그래도, 그래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꼴리면 그거야말로 미친놈이잖아.

  “이거, 이거.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이딴 그림을 그려?”

  여지운이 손끝에서 그림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 얼마인지, 얼마나 중요한지 따위는 모두 휘발됐다.

  개새끼. 미친 새끼!! 

  사람의 마음에 불길을 붙일 아주 섬세하고 고운 선으로 이루어진 춘화도, 그리고 그 속의 여지운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내려 보는 것 같은 구조가 특이하다 싶었는데 선연홍의 시선으로 본 자신을 그린 모양이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지운씨, 오래 기다렸죠? 우유가 없어서 사오느라 좀 늦……, 아, 보셨네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들고 오던 선연홍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지운을 보다가 그의 손에서 처참히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실물 느낌을 내는 게 어렵네요.”

  너무 당당하게 내뱉는 말에 오히려 이쪽이 더 황당했다. 제 손에 들린 것을 바로 내팽개치고 짓밟았다. 

  “이, 미친, 미친!”

  밖에 바람이 많이 부는지 코끝이 새빨개진 선연홍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을 내려놓고 이미 구겨진 그림을 집었다. 반듯했던 선은 이리저리 비틀렸지만 그럼에도 야릇함을 지울 순 없었다.   

  “이 그림말이죠. 자위용으로 그린 겁니다.”

  너무 황당하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딱 그 짝이다. 실성한 사람처럼 여지운이 웃었다.

  “하하, 하하. 자……, 뭐요?”

  “자위.”

  저걸, 저 그림을 딸 치는 용으로 그렸다고. 그것도 당사자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

  “노력했는데 전혀 표현이 안 되니 제 실력에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것보다 지운씨 말대로 우유 거품도 만들어왔습니다. 따뜻할 때 마셔요.”

  “지금 이 상황에서 우유 거품?”

  미치겠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명예훼손? 성희롱? 이 나이 돼서 동성에게 성희롱 당했다고 신고하라고? 아니, 그래. 할 수는 있지. 근데 선연홍 작가님이 날 그렸는데 씨발, 떡 칠 때 얼굴을 그렸어요. 좀 혼내주세요. 이렇게 말하라고? 정말 알면 알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새끼였다. 

  그리고 그 상상을 초월하는 새끼인 선연홍은 여지운을 살피고 있었다. 한껏 황당해하며 숨을 토해내고 있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설렜다. 그 어떤 것을 섞어도 지금 저 색은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예쁘다. 여지운의 흥분이 선연홍을 흥분시켰다. 특유의 그, 남을 깔보는 듯한 껍데기를 벗겨 내고 나면 저렇게 달콤하다. 선연홍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가 여지운과 눈이 마주쳤다. 습관처럼 웃었더니 손가락으로 머리 옆을 빙글빙글 돌렸다.

  “다음에는 화구를 옆에 놔두고 섹스해보면 좋겠네요. 눈앞에서 보고 바로 그릴 수 있게 말입니다.”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아니, 전혀요.”

  고개를 가뿐히 젓는 모습이나, 반듯한 얼굴 어디에도 당황이나 놀라움, 혹은 창피함 같은 것은 없었다. 화를 내고 있는 게 더 이상할 정도라 여지운은 입을 다물었다. 

  “닥쳐요, 그리고 다시는 이딴 그림 그리지 마십쇼. 진짜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자제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여지운은 침착하자를 속으로 되뇌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저기 돌돌 말린 종이들을 모두 펼쳐서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또다시 본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견딜 수……, 아니 그것보다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위험, 불안. 그것은 아마도 여지운의 세계를 철저하게 부수는 것들이었다.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지운씨 다리 벌리고 있는 손, 제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니 선연홍의 시선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선연홍이 보는 여지운. 솔직히 자신이 ‘갈 때’의 표정을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박을 때가 아닌 박힐 때 가는 표정은 정말…… 그건, 정말.

  “사실 여기는 작업실이고, 개인적인 그림은 옆방에서 그립니다. 잠깐 와보시겠어요?” 

  거절할 틈도 없이 선연홍에게 끌려갔다. 지금 팔을 잡은 손은 저기 하얀 김을 내는 커피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여깁니다.” 

  가구라고는 구석에 서있는 책장이 전부인 방은 조금 전 봤던 곳보다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아늑했으며 조금 더 복잡했다. 작업실이라고 한 곳도 수많은 그림이 있었지만 이곳은 정말이지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걸을 때마다 사박사박 소리가 나는 게 무성한 풀을 밟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느낌은 종이 안의 그림을 발견하면서 바스러졌다. 

  “이, 이, 이…….” 

  목구멍이 뭔가 콱 틀어 막힌 듯 답답해졌다. 그 어떤 말을 갖다 붙어도 지금 기분이 표현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여지운이 택한 건 주먹이었다. 

  그는 선연홍의 턱을 후려치고 비틀거린 틈을 타서 발을 비틀어버릴 듯 밟았다.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문득 선연홍이 원하는 게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아쉽네요. 더 해도 괜찮은데.”

  역시 저거 봐. 좋아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니까. 앞으론 절대 때리지도 욕도 하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역시 그림보다 실물이 좋네요.” 

  힘껏 쳤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타격은 없어 보였다. 살짝 멍이 든 뺨과 붉은 기가 번진 광대가 다였다. 선연홍이 주름 진 셔츠를 손으로 탁탁 털어냈다. 

  “정신병 걸렸습니까? 비오면 막 머리에 꽃 달고 춤추고 싶진 않고요?”

  “지극히 정상입니다. 전 그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뿐입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찬 그림들, 그 수많은 종이 위에는 모두 여지운의 얼굴, 신체, 행위가 그려 있었다. 작업실에서 둘둘 말린 그림을 보지 않으려 했던 노력은 모두 부질없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어서 더 민망하고 더 자극적이었다. 한결같이 야릇하고 노골적이었지만 그 조잡함이야 말로 사람의 마음을 들쑤셨다. 여지운은 짧은 숨을 몇 번을 더 들이마신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 얘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지운씨가 원하지 않으면 그렇게 해요.”

  “일이나 보십쇼. 그것 때문에 온 거니까.”

  “아, 그렇죠. 지운씨가 제 공간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다른 것은 떠올리지도 못했습니다.”

  “또 자기 혼자 지랄하네. 모노드라마야 뭐야.”

  “완성된 작품 찍어서 보내 주면 됩니다. 내일쯤 보낼 생각이었는데 급하게 요청을 하네요. 물론 그 덕에 함께 작업실에 올 수 있어서 좋은 일이었습니다만.”

  “……완성작? 나도 한번 봐도 됩니까.”

  “물론이죠, 돌아가요.”

  다시 작업실로 가기 전 여지운이 문득 뒤를 돌았다. 제 얼굴이 잔뜩 그려진 종이가 바닥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콧등 사이로 떨어지는 땀방울마저 아주 섬세하게 표현된 그 그림 역시 섹스 할 때 얼굴이었다. 가랑이 사이로 좆이 박힐 때 짓는, 표정.

  “이겁니다. 지운씨에게 보이려니 좀 부끄럽네요.”

  의뢰작이라는 이 그림에 쓰인 색채는 흰색, 검은색과 녹색이 다였다. 종이와 먹 외에 한 가지 색만 쓰는 것이 선연홍 고유의 화풍인 듯했다. 조금 전 그 야하고 되바라진 그림과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청량하고 파릇했다. 평소와 떡칠 때의 선연홍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이 의뢰를 끝으로 좀 쉴까 합니다. 원래라면 이것도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는 분 부탁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니. 왜요? 굉장히 좋은……, 그, 림인데요.”

  여지운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툭 내뱉다가 말끝을 흐렸다. 칭찬을 해주려니 왠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찰떡같이 알아들은 선연홍이 “지운씨가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군요.” 하고 말하며 웃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닫긴 했지만, 마음에 든 건 사실이었다. 하얗고 검은 세상에 홀로 도드라진 색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연홍이라는 인간을 떼고 직업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좋았다. 

  “요즘 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뺨을 쓸었다. 방문을 열어 놔서 싸늘한 공기 안에서 마주 잡은 온기는 유난히 뜨거웠다.

  “여지운씨요.”

  “예?” 

  여지운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고 선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한국화도 좋지만 사실 그것보다 여지운씨의 표정, 육체, 성기, 좀 더 안쪽 같은 것들을 그리고 싶습니다.”

  “뭘 그려요?”

  “쾌감에 푹 젖은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야한지, 그게 얼마나 저를 두근거리게 하는지 모릅니다. 예쁜 색으로 물든 귀, 단단한 턱과 곧은 목덜미, 펄럭이는 가슴. 잘게 떨리는 허벅지와 종아리, 복숭아뼈, 곧추선 성기, 귀두 끝으로 흐르는 정액, 그리고 제 것을 쑤셔 박을 때 하얗게 질리는 모습이.”

  “…….”

  “고통과 쾌감 중 어느 것을 잡아야 할지 몰라 허덕이며, 흐린 눈으로 저를 볼 때 그 얼굴. 입으로는 그만하라고 아프다고 하지만, 사실은 더 큰 쾌감을 바라며 허리를 흔드는 모습 같은 건……, 분명.”

  “이 씨발 새끼야! 입 닥쳐!”

  “네.”

  욕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바로 무너졌다. 하지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선연홍의 주둥이는 개소리를 내뱉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듯 끊임없이 이상한 말을 쏟아냈다. 

  “방금 한 말은 진심입니다. 지운씨로만 가득 차서 요새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힙니다.”

  “그건 선연홍씨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아무래도……, 음.”

  선연홍이 제 턱 끝을 쓰다듬더니 침을 삼켰다. 살짝 입을 벌렸다가 다물면서 시선을 조금 내렸다. 그리고 여지운은 눈앞에 보이는 선연홍의 정수리를 쪼개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살벌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부담을 주려고 한 건 아닙니다. 그냥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에요.”

  “아니요. 부담도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선연홍씨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비슷한 존재입니다.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이죠.”

  사실을 말하자면 요즘 여지운의 머릿속을 온통 휘젓고 있는 사람은 선연홍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습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에 든 그림을 내려놨다. 그리고는 여지운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싸우자고? 잘 생각 했습니다. 깔끔하게 서로 한 대씩 치죠.”

  “제가요? 지운씨를요?”

  선연홍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예쁘고 멋있는 사람을 어떻게 때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싸우자는 게 아니라 키스를 하자는 것 같았다. 선연홍과의 키스는 질척이고 야하고 묵직했다. 말 그대로 타액과 숨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눈두덩이 뜨끈해지고 입안의 침이 말랐다. 여지운이 시선을 조금 비켜 뜨며 입을 살짝 벌렸다.

  “……?”

  입안으로 빨려들 듯이 가까워졌던 숨결이 훅 멀어졌다. 숙였던 상체를 든 연홍이 “뭐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 얼굴 어디에도 감정의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다정하지도, 들떠 보이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건조하고 사무적인 모습이었다.

  “아니, 뭐.”

  키스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 그렇게, 그런 식으로, 그런 각도로 다가오는데 누구라도 키스 생각을 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었고 키스가 아닌 여지운의 뒤에 있는 카메라를 잡으려 한 것이다. 괜히 목이 타는 기분에 얼굴을 쓸어내렸고, 덕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선연홍을 보지 못했다.

  

  * * *

  

  신년 보고서를 쓰고 잡지에 투고할 글을 다듬던 여지운이 목을 빼고 사무실을 둘러봤다. 파티션 덕에 뭘 하는지 정확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모두 뭔가 하고 있긴 했다. 표정에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업무는 아닌 것 같지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바쁜 때가 있으면 이럴 때도 있어야지. 손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던 여지운이 포털 사이트를 켜고 선연홍을 검색했다.

  [선연홍] 이름과 함께 뜨는 것은 출생지, 학력 등의 특별할 것 없는 정보였다. 그 밑의 수상경력은 꽤 긴 것을 보니 아니꼽게 느껴졌다. 그 임선열이 ‘우리 선생님.’을 연발한 걸 보면 업계에서는 유명하겠지.  

  선연홍의 이름을 지우고 난 뒤 후장 섹…… 까지 쓰다가 급하게 지웠다. 괜히 찔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후.”

  목이라도 축이려 머그잔을 들었는데 하필이면 또 텅 비어 있었다.

  요즘의 여지운은 불량식품을 처음 맛본 어린아이 같았다. 기성 식품엔 맛볼 수 없는 그 자극적이고 강렬한 맛. 그게 몸에 나쁘다는 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량 식품은 어째서 저렇게 예쁘고 맛있는지. 차라리 몰랐더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니까, 그게 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의미 없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맛은, 자극은 참기가 힘들다. 입안을 굴러다니며, 넘어가는 타액마저도 달콤하게 만들어 주는 그것을 또 느끼고 싶었다.

  애인이 변태니까……. 아니, 씨발. 애인은 무슨 애인이냐. 계약 연애…….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계약 연애는 지랄. 여지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너무 답답해 회사라는 것도 잊고 “악!” 소리를 질렀다.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 머리는 왜……?”

  “아, 정아영씨.”

  젊은 남자가 한 팀의 장을 맡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실력은 당연하고 운, 그리고 시기 섞인 뒷담화를 이길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했다. 그 역시 공으로 팀장 자리에 오른 게 아니었다. 그의 사생활을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여지운은 꽤 신임받았다. 젊고 잘생긴데다가 능력까지 좋으니 팀원뿐 아니라 타 부서에서도 꽤 인기가 좋았다. 물론 묘하게 철벽을 치는 통에 그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했지만. 

  “팀장님?”

  마감 때나 밤샘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깔끔한 모습만 보여주던 사람이 저렇게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혼자서 난리를 치던 여지운이 정아영을 보고 헛기침을 했다. “그게 아니라…….” 변명을 하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부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자리에 있죠? 전달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부장님, 곧 점심시간인데 끝나고 말씀하시죠?”

  우거지상인 팀원들을 대신해 팀장 여지운이 총대를 멨다.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아무리 빨리 말한다고 해도 늦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회사에서 점심시간까지 방해받는 건 아니지.

  “여팀장이 난리 치니까 간단히 얘기하죠. 이번에 ‘국제 선 디자인 페스티벌’에 우리 회사도 나가는 거 알고 있죠? 원래는 1팀이지만 사내 사정상 3팀으로 변경됐으니 그렇게들 아시고. 공모 요강과 일정표는 여팀장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부장은 그 말만 하고 쌩하니 나갔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꺼져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난데없는 폭탄에 3팀 팀원들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개중 제일 황당한 여지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세한 상황 좀 듣고 올 테니 식사들하고 와요. 그리고 오후에 회의할 수도 있으니 준비들 하고 있어요.”

  “어? 팀장님같이 밥 먹으러 안 가요?”

  “부장 새끼……님이랑 먹으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팀원들은 곧 점심으로 뭘 먹을 것인지 토론하며 우르르 몰려나갔다. 

  국제 선 디자인 페스티벌. 다소 거창해 보이는 이름과 달리 그냥 공모전 중 하나였다. ‘국제’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거의 국내업체 대상이었고, 구색 맞추기 용으로 일본이나 중국에서 소수 참가했다. 올해로 7년째 치러지는 이 공모전은 매년 바뀌는 주제에 맞춘 배치도에서 실내도까지의 최종 도안,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미니어처 모형 제출이 조건이었다. 솔직히 상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공모전에 참여하는 이유는 대상과 함께 일거리를 받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市)에서 주관하는 만큼 규모는 고만고만하지만, 손가락 빨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문제는 이번 공모전은 1팀이 나간다고 못 박아 놓은 상태라 3팀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감이 겨우 2주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언제 컨셉 구상해서 모형까지 만들라는 건지. 

  이건 야근 지옥에 빠지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연말에 그 지랄 해놓고 또? 아주 만만한 게 3팀이지? 여지운이 잔뜩 굳은 얼굴로 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3팀에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내려놓은 주제에 방문 너머의 부장 새끼 목소리는 아주 평안했다. 

  “들어와요.”

  1팀이 손을 떼고 맡을 팀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젊은 3팀으로 배정된 것 같은데, 사실 이런 식으로 떠맡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포트폴리오 추가한다고 생각하자, 경력에 한 줄 더 쓴다는 마음으로 군말 없이 받아들였는데 가만히 있으니 정말 가마니로 보였던 듯싶었다. 부장에게 불편하고 곤란한 심정을 그대로 내비쳤다. 특유의 싸가지 없고 거만한 표정의 여지운을 보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 느꼈는지 부장이 답지 않게 조건을 걸었다. 

  휴식과 보너스. 급하게 조달한 조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상부에서 확정한 이상 따라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그에 합당한 대가는 받아야 했고, 이런 식으로 지랄해줘야 좆같이 안 굴었다. 결국 극적 타결을 보긴 했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런 이기적인 새끼.”

  여지운이 부장실을 나오면서 쌍욕을 내뱉었다. 점심시간이라 복도는 비어 있었지만 설사 누가 있었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팀원이 나란히 앉은 회의실에서 결정 사항을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다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특히 아직 신혼인 이대리는 세상이 무너진 듯 한숨을 쉬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잘해봅시다. 수상하면 보너스에 특별 휴가까지 있다고 하니 그걸 목표로 잡고.”

  “그래 놓고 또 연차에서 까니 마니 하는 거 아니에요?”

  “인사팀에 찾아가서 난리 치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 낼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고. 수상을 목표로가 아니라 수상해야 합니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도 너무 촉박하네요. 휴.”

  울상을 한 팀원들이 차례대로 나가고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서던 여지운은 문득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요새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이라기보다 그 어떤 강렬한 느낌이 드는 게, 가끔 숨이 가빠졌다. 

  초반의 그 수치스러운 몽정 같은 개꿈이 겨우 멈췄다 했더니 얼마 전 선연홍의 작업실에서 좆같은 춘화도를 본 다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그 그림 속의 얼굴이 너무 강렬해서 잊히지가 않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할 정도의 충격, ‘그런’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에 대한 놀라움 같은 감정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아주 은밀한 행위를 훔쳐 본 것 같은, 정확히는 선연홍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선연홍이 어떤 생각,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그러니까 선연홍이 그림 속의 남자……, 여지운을 어떻게 보는지 따위의.

  하아, 진짜 미치겠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젤을 발랐다는 걸 기억해 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되는 게 없었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일에 이것저것 회의를 하고 보니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팀원들 사기도 북돋아 줄 겸 간단하게 저녁이나 같이 먹기로 했다. 자율 참가였지만 오늘은 타이밍이 맞았는지 아니면 회사 뒷담화가 필요했는지 이대리를 제외한 팀원들이 함께 가기로 했다.

  “오늘은 정시 퇴근합시다.” 

  “팀장님 뭐 먹는데요?”

  “빨리 먹고 집에 가는 게 좋을 테니 근처에서 먹읍시다. 의견 받아요.”

  “추우니까 따뜻하게 국물 음식 어때요? 요 앞에 우동 집 새로 생겼던데.”

  “거기도 괜찮고 카페 J.UN 뒤에 싼싼치킨도 맛있어요. 이번 달 말까지 3마리 이상 주문하면 마늘닭똥집 서비스해준답니다. 

  정아영의 뒤를 이어 박미애주임이 치킨을 외쳤다. 

  “그럼 투표합시다. 우동이랑 치킨.”

  우동이요, 치킨이요. 팀원들이 서로 손을 들며 의견을 말했다. 결과는 역시 치킨이 압도적이었다. 홀로 우동을 외쳤던 정아영이 침울한 얼굴을 했다. 여지운이 코트와 가방을 챙겼다. 

  “으……. 춥다. 춥네요. 팀장님.” 

  밖에 나오니 칼바람이 불었다. 계절은 여전히 겨울의 한가운데였다. 저들끼리 팔짱을 끼며 추위를 피하는 사람들 사이로 여지운이 앞장섰다. 

  회사 근처 카페를 지나가는데 문득 선연홍이 생각났다. 그때 선연홍은 저녁을 사겠다는 여지운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었다. 

  그를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웠다. 욕설을 듣는다든가 무릎을 꿇는 등 굴욕적인 상황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수용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걸로 속단하기엔 뭔가 달랐다. 실제로 여지운과 할 때 도구나 기구 같은 걸 사용하지 않았다. 구멍에 박히는 건 선연홍의 성기가 전부였고 몸에는 그 어떤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욕을 듣는 것도, 괴롭히고 싶은 것도 모두 여지운씨 뿐이다.’

  ‘다른 사람은 기분이 나빠서.’

  그 말은 그럼 자신에게만 반응한다는 건가? 왜?

  “음?”

  하다 하다가 이제 환상까지 보나? 쟤가 왜 저기 있지. 혹시 싶어서 눈을 감았다가 떠도 카페 너머의 선연홍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다. 

  “진짜 선연홍?”

  “팀장님? 안 가세요?”

  여지운을 보고 빙그레 웃은 선연홍은 그 곁에 옹기종기 모여 선 팀원들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록색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피사체라는 느낌에 가까웠다. 설마 이쪽으로 올 줄 몰랐는지 팀원들이 “어어어?” 소리쳤다. 박미애 주임은 뒷걸음질까지 칠 정도로 놀란 듯했다. 하지만 선연홍은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열망과 열정이 어우러진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한 사람이 전부였다. 늘 그렇듯이.

  “지운씨.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퇴근했습니까?”

  “여기서 볼 줄 몰랐다고? 스……! 토커 짓 좀 그만 하세요.”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근처 카페에 있으면서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마치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앙큼 떠는 것이 가소로웠다. 한마디 해주려던 여지운이 팀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씹어 내듯이 중얼거렸다. 

  “또 뭔 지랄발광을 하려고 온 겁니까?”

  “딱히 그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만, 원하면 지랄발광 할까요? 지운씨가 원한다면 그런 것쯤이야.”

  “제발 그만 좀 합시다.”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여기서 무릎 꿇겠습니다.”

  “예?”

  회사 건물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고 퇴근 시간이라 거리에도 카페 안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바로 옆에선 팀원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는 시선의 수는 절대 적지 않았다. 

  근데도 뭐, 무릎을 꿇는다고? 물론 자신이 선연홍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화풀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은 화가 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았다.

  “지금 여기서?”

  “네.”

  진지한 얼굴에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살짝 상기 된 것이 들떠 보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여지운이 머뭇거리는 사이 선연홍은 정말로 무릎을 꿇으려는 듯 무릎을 조금 굽혔다. 이게 미쳤나? 사회생활을 박살 내려고.

  “하, 하하. 선연홍씨. 장난 그만하시고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급한 마음에 선연홍의 손목을 붙잡았던 여지운이 손바닥에 확 와 닿는 온기에 바로 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역으로 붙잡힌 후였다. 선연홍이 그의 귓가에 숨을 훅 불어넣었다. 흐으.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하, 개……소리도 참. 잘하시네.”

  “아무래도 아직 기분이 안 풀린 것 같군요. 아무래도 제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

  “알, 알았으니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이 미친놈이 또다시 미친 짓을 하기 전에 입을 틀어막았다. 웃고 있는 듯 눈꼬리가 휘어져 있었다. 답이 없다. 진짜. 

  “일단 들어가.”

  진짜 무슨 마가 꼈나, 진짜 어디서 이런 새끼가 들러붙어선. 굿이라도 해야 하나.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을 푹 내쉰 여지운이 팀원에게 회식비를 지급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선연홍이 제 카드를 내민 게 더 빨랐다. 

  “뭡니까?” 

  “팀원 분들 밥 사주려고 그러죠? 제가 지운씨 데려가는 거니까, 그 대신이라고 할까요. 음, 사실 지운씨가 다른 사람한테 돈 쓰는 거 싫습니다.”

  “…….”

  지랄도 참 풍작이다. 질린다는 표정의 여지운이 그의 카드를 낚아챘다. 지가 먼저 내민 건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정아영씨.”

  “네? 네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아영이 어깨를 퍼덕이며 놀랐다. 덩달아 흠칫한 여지운이 왜 저래. 하는 표정으로 보다가 선연홍의 카드를 내밀었다.

  “싼싼치킨 말고, 여기 근처에서 제일! 비싼 식당으로 가세요. 저기 길 건너서 중식 레스토랑 알죠? 코스요리 나오는데. 거기서 최고급 코스 요리로 먹어요.”

  “네? 팀장님 거기 최고급 코스면 인당 17만 원…….”

  여태 숨죽이고 있던 서태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여지운의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듯했다. 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여지운이 한 번 더 확실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최고급 코스에다가 다른 것들도 팍팍 시켜요. ……이거, 한도 얼마야?”

  “지운씨네 팀원뿐 아니라 회사 사람들 다 와도 먹을 정도는 됩니다.”

  지랄한다. 아주 재벌이세요?

  “들었죠? 그러니 절대 눈치 보지 말고 막 시켜요. 밥 먹고 영화, 아니다. 비싼 거 뭐 있지. 어디 바 같은 데 가서 양주 같은 거 마음껏 마시고 놀다가 카드 내일 줘요.”

  정아영은 여지운과 선연홍을 번갈아 보다가 “예, 예에…….” 하고 어물어물 대답했다. 여지운은 정말 팀원들이 한도를 꽉 채우길 바랐다. 그래야 다시는 건방지게 카드 따위 안 내밀지. 

  급격하게 몰려오는 피로에 이마를 짚은 채 선연홍을 돌아봤다.

  “괜찮죠? 선연홍씨.”

  “물론입니다.”

  “여러분,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그리고 선연홍씨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여지운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팀원을 훑었다. 

  “…….”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는 그들을 내려 보는 얼굴엔 차가운 오만이 가득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위축되는 느낌에 팀원들이 눈치를 봤다.

  “지운씨, 팀 여러분. 전화해서 방해하지 말고. 저녁 맛있게 드십시오. 아, 그리고 팀장님 너무 좋아하지 마요. 일적이든 사적이든.”

  모두다.

  굉장히 날 서고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선연홍이 돌연 웃었다. 내뱉은 말을 파헤쳐보면 껄끄러운데 화려한 얼굴로 상큼하게 웃으니 헷갈렸다.

  “이제 그만 가보세요.”

  대놓고 방해꾼 취급을 받은 팀원들은 선연홍이 카페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제 갈 길을 갔다.

  바람이 제법 찬 밖과 카페 안은 훈훈했고 궁둥이에 닿는 의자는 부드럽고 폭신했다. 하지만 바늘같이 뾰족한 짜증이 이미 여지운의 머릿속에 박힌 뒤였다.

  “이것 보세요. 왜 이렇게 질척하게 굽니까?”

  “이 정도로 질척하게 굴지 않으면 여지운씨는 저에게 신경도 써주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것보다 배고프죠? 식사부터 하러 갈까요? 뭐 먹고 싶은 것 있습니까?”

  “밥 처먹을 기분 아니니까, 할 말 하고 빨리 꺼져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선연홍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 앉았다. 

  “어린 왕자 읽어 봤습니까?”

  테이블에는 서너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한 때는 그의 이런 부분도 좋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꼴값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책을 읽으면 뭐하나 이미 미친 것을.

  여지운은 제 앞에 놓인 선연홍의 아메리카노를 마치 제 것인 양 자연스럽게 끌어왔다. 쌉쌀한 커피를 입안에서 두어 번 굴리다가 넘겼다.   

  “어린 왕자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하죠. ‘길들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자, 그럼 여기서 길들인다는 건 무엇인 것 같습니까?”

  “뭔 소립니까? 지식 자랑 배틀 하려면 1대 100 같은 곳이라도 나가 보시던가요.”

  “음, 그럼 다른 질문을 하죠. 지운씨는 사람의 감각 중 가장 도드라진 것은 뭐라고 생각하죠?” 

  “고통?”

  무의식중에 대답한 여지운이 혀를 찼다. 상대를 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말이 툭 나갔다. 선연홍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맞습니다만, 쾌감이 가장 선명하다고 합니다.”

  “쾌감?”

  “방어본능의 일종이죠. 그리고 좀 다른 얘기지만 인간은 현 상황에 익숙해지면 다음을 원한다고 해요. 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메리카노에 항상 세 번의 시럽을 넣어 먹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보다 덜 넣으면 특유의 쓴맛에 몸서리를 치죠. 그런데 어쩌다가 두 번 넣은 것을 마시게 됩니다. ‘이게 뭐야.’하고 처음에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마시겠죠. 그러다 또 익숙해 질 겁니다. 그 두 번이 또 한 번으로 줄고. 결국, 마지막으로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시다가…….”

  “……?”

  “샷을 추가하게 됩니다. 그것 역시 처음엔 쓰다고 얼굴을 찌푸리다가, 점차 익숙해집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요. 결국, 세 번의 시럽을 넣어 마시던 사람이 결국 샷 추가한 아주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메리카노 홍보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사실 모르는 척 물었지만 어떤 의미로 말 한 건지는 어렴풋이 짐작됐다. 사람은 그 상황에 익숙해지면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된다는 건데, 고통을 쾌감으로 바꿔 보면 익숙해질수록 더 높고 깊은 쾌감을 원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전 여지운씨가 쾌감에 물든 모습에 흥분한다는 겁니다. 음, 지운씨 모습을 그렸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입니다.”

  “저기.”

  “그러니까 저는…….”

  “내일 시간 있습니까?”

  더는 듣고 싶지도 않아서 말을 중간에 툭 자른 여지운이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갑자기 떨어진 공모전 소식에 너무 화가 나서 점심도 먹지 않았다. 공복에 쓴 아메리카노를 부어 넣으니 속이 쓰라렸다.

  “물론이죠.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그럼 병원 좀 가보시죠. 정신과요. 요새는 보험 처리도 된다고 합니다. 혹시 기록에 남는 게 부담스러우면 제가 현금 지급하겠습니다. 원한다면 픽업도 해드리죠.”

  “친절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이렇지 않은데도 병원에 가봐야 할까요?”

  “예.”

  커피 잔을 손으로 감싼 여지운이 이걸 던질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 망상은 집에서 혼자 하시고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좀 바빠질 것 같으니 이런 식으로 기다리지 마세요.”

  “음? 왜요? 분명 다음 달 말까지는 저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잖습니까?”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후, 어쨌든 갑작스럽게 공모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마감이 그야말로 코앞이라, 2주 정도 많이 바쁠 것 같습니다. 좆같은 회사.”

  “그렇습니까? 그런데 ‘좆같은’이라면 좋은 뜻 아닙니까?”

  “지금 장난합니까?”

  얼굴을 굳힌 여지운이 선연홍을 노려봤다. 확연히 묻어나는 짜증에 선연홍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합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농담…….”

  “……도 가려가면서 하세요. 지 혼자만 재밌는 걸 무슨 농담이라고.”

  진짜 쟨 사회생활했으면 여러 번 맞았을 거다. 혼잣말하는 척하면서 소리 내 말했다. 분명히 들었을 선연홍이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말을 잘 듣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숨이 가득 섞인 말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쉬워 보였고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울해 보이기도 했다.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죠?”

  살짝 떨어트린 시선 아래로 단정한 얼굴선이 드러났다. 그림자를 만들며 팔락이는 속눈썹을 보고 있던 여지운이 문득 “선연홍씨.”하고 불렀다. 

  유독 일이 몰리거나 바쁘면 며칠씩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갑자기, 촉박할 경우는 더 그랬다. 그럼 당연히 교제 중인 사람이나 섹파와 만날 시간도 줄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여지운이 항상 하던 말이 있다.

  “그동안 다른 사람과 만나도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반응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뉘었다. 쓰레기 보듯 하는 사람과 당연하다는 듯 긍정하는 사람. 전자는 쌍욕은 기본이고 싸대기, 심지어 물 따귀도 맞아 봤다. 그런데도 여지운은 같은 상황이 오면 같은 말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 역시 당연히 그렇게 할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그게 여지운의 연애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아니 오히려 더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아무하고나 뒹굴어도 된다고요. 아니, 그래 주면 더 좋고.”

  말을 끝내고 턱을 들고 노려보듯이 마주 봤다. 선연홍은 입가를 매만지며 여지운을 살폈다. 지금 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참이면 어떤 생각인지 알아내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쉽게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여지운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재밌지도, 즐겁지도 않은데 입술 근육만 당긴 듯 버석한 느낌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는 그 찰나의 시간,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선연홍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지만, 긍정이라기보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이해의 의미에 가까웠다.

  “그렇습니까? 여지운씨의 말은 제가 아무하고나 뒹굴어도 된다는 거네요.”

  여차하면 정말 커피잔으로 머리를 치려고 했던 여지운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로 산뜻한 대답이었다. 

  “이해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불편한 것이 더 컸다. 손톱 끝에 가시가 박혀있는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은 뭘까? 그렇다고 해서 왜 그렇게 조용하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 차렸나 보지 뭐. 할 말은 다 했으니 가야겠다.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던 여지운이 “헉.” 하는 숨과 함께 어깨를 웅크렸다. 

  테이블 아래로 뻗어있는 다리 사이, 고간 위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하, 잠깐.” 

  “……저번에도 그렇고 경계심이 없네요.”

  딱딱한 구두의 끝이 성기 위를 꾸욱 눌렀다. 잔뜩 당황해 소리치는 여지운을 보며 어깨를 으쓱한 선연홍이 이번에는 발을 조금 틀어 구두바닥으로 세게 짓눌렀다. 날렵한 디자인의 명품 구두가 여지운의 허벅지 사이, 성기를 압박했다. 간당간당 걸려있던 가방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여지운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테이블을 짚은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너, 이 새끼 내가 만, 만하냐? 왜 자꾸 이 지랄이야.”

  “그럴 리가요. 아까 말하다 말았지요? 계속 말해보자면 그러니까 저는 여지운씨가 ‘괴로움에 부들거리는 것을 계속 보고 싶은 모양이다.’하려고 했습니다.” 

  선연홍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여지운 앞에 놓인 커피를 가지고 왔다. 

  “다 마셨네요. 커피.” 

  언뜻 보이는 눈꼬리는 휘어 있었고 그 안의 눈동자는 빛났다.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발을 치워내기도 전에 허리가 수그러들었다. 악, 비명이 터질 만큼 무거운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훅. 귓가로 제가 내뱉는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수치, 이번에야말로 수치라는 말이 와 닿았다. 퇴근길, 회사 앞, 카페 안. 이 수많은 사람 중 여지운을 아는 사람 한 명 없을까. 이건 그가 제멋대로 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公) 사(私)는 구별 돼야 했다. 그 말은 적어도 지금 선연홍에게 주먹을 퍼부어 이목을 집중시킨다든가, 동성에게 아랫도리를 짓눌려 흥분하는 모습엔 문제가 있다는 거였다.

  문제. 그래, 문제. 문제! 

  작년에 바 안에서 선연홍의 무릎에 발기한 좆같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새벽이었고, 게이바였으며 어두웠다. 적어도 지금처럼 ‘밖’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일상이긴 하되, 일상이 아닌 일탈에 가까웠다. 다른 말로 하면 사적인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었지. 지금은 완벽한 현실이었다.

  “아까 뭐라고 했죠? 잘 못 들어서 말입니다. 정말로 다른 사람과 만나도 됩니까?”

  겨울이고 옷이 두꺼워서 아랫도리가 선 게 표시가 잘 안 날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라는 공포는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했다.

  “나는 안 되겠는데? 여지운씨가 다른 사람들이랑 그런 식으로 만나는 거 못 참겠어요. 적어도 약속이 끝날 때까지는 나에게 집중해 달라고 했잖습니까.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왜 개소리를 하고 그래요. 화나게.”

  어? 여지운이 고개는 숙인 채 눈만 들어 힐끔 봤다. 방금, 뭔가, 말이…… 거칠지 않았나?

  하지만 선연홍은 담담해, 아니, 거만해 보였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발끝으로 농락하는 모습은 그가 그렇게 말하던 ‘주인님’과 닮아 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잘못 한 게 없다. 씨발, 그냥 여기서 흥분하고 있다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일이 전부였다. 

  “어서 말 해봐요.”

  순간, 성기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참았던 숨을 겨우 쉬던 여지운이 욕설을 퍼부으려는 순간 다시 그 위를 눌렀다. 옅어졌다고 느꼈던 수치가 다시 살갗 위로 달라붙었다. 아, 아프, 아프다고.

  탁. 무거운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선연홍이 휴지를 네모나게 접어 여지운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손에 목이 쭈그러들었다. 

  “어서요.”

  “무슨, 대답을 원…… 하, 흐.”

  “지운씨, 혹시 사람들이 있어서 더 흥분한 겁니까?”

  “개, 개소리하지 마.”

  “하하. 이대로 싸면 볼만하겠네요. 저는 뭘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선연홍은 음심(淫心)이라고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얼굴로 여지운의 성기를 꾸욱 꾹 눌렀다. 분노와도 닮은 기묘한 흥분이 이성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동안에도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가 아무리 좆으로 이루어진 생물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알았…….”

  여지운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잔뜩 오므린 무릎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두 손은 불안한 듯 서로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망설이는 여지운이 귓가에, “네? 바쁠 때 뭘, 어떻게 해도 된다고 했지요?” 라는 말이 파고들었다.

  “알, 알았으니까……. 만나지 마.”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저도 모르게 버럭 나온 소리에 주변에서 시선이 조금 모였다. 여지운은 사색에 잠긴 척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 진짜……. 어쩌다가 이런 놈에게 걸려서. 이 정도면 삼재 수준이 아닌데. 전생에 뭔 짓이라도 했나? 미신 같은 것은 절대로 믿지 않았지만 지금 기분이라면 부적이라도 써 붙일 수 있다.

  “나도 안 만날, 어차피 만날 시간도 없, 다고. 집에도 못 가는데…….”

  “확실히.”

  “아무하고도 안 만, 날게. 씨발놈아.”

  “네. 잘했어요.”

  빙그레 웃은 선연홍이 여지운의 뺨을 툭툭, 두 번 두드리고선 발을 치웠다. 수치심과 고통이 여지운을 내리쳤다. 

  “그리고 팀원들과도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고요.”

  “…….”

  “밥도 따로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것까지는 봐줄게요.”

  순간, 온몸을 지배하던 뻣뻣한 긴장이 탁 풀렸다. 여지운은 무너지듯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성기는 아플 정도로 욱신거리고 있었다. 속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을 불러도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부장 새끼, 사장 새끼, 그 동안 시안을 수도 없이 퇴짜 놨던 VIP고객 회장 할배까지 떠올리고 나서야 겨우겨우 잦아들었다. 아랫도리가 잠잠해지자마자 여지운이 벌떡 일어섰다. 

  혹시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극심한 분노로 변모했다. 그대로 손을 뻗어 선연홍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탁자 위로 처박았다. 쾅! 덜컹. 테이블이 흔들리며 그 위에 놓인 컵과 냅킨, 책과 휴대폰 따위가 함께 흔들렸다. 

  “가만히 있으니까 좆밥인 줄 알고 이 지랄 하나 본데. 작작해라. 진짜. 한 번 만 더 이딴 식으로 굴면 발모가지를 비틀어 줄 테니까.” 

  험악한 씹어 내듯 말한 여지운이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쌩하니 나갔다. 온풍이 불어 훈훈한 공기가 가득한 이곳에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싸늘해 보였다. 다짜고짜 테이블에 처박힌 선연홍은 테이블에 뺨을 댄 채 여지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마에서 시작된 욱신거림이 곧 얼굴 전체로 번졌다. 아마 내일이면 멍이 들 것 같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기꺼웠다.

  “이래 봤자 하나도 안 아픈데, 아직도 그걸 모르네.”

  강인한 것이야말로 가장 약하다. 여지운처럼 확고한 자기 기준이 있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더 그랬다. 파헤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한 번 안을 들여다보고 나면 그다음은 쉬웠다. 당해 본 적이 없으니까 면역력이 없거든. 모른 척 밀고 나가면 대처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귀여워.”

  선연홍은 여지운과의 첫 번째 섹스를 떠올렸다. 생각보다 더 흥분되고 고양되던, 짜릿하고 저릿한 그 느낌. 육체적 쾌감도 쾌감이었지만 그보다 더 빠듯하게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왜 진작 한국을 찾지 않았을까, 저 남자를 찾지 않았을까? 매일 생각하고 상상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만났어야 했는데. 

  선연홍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쓴 커피를 마셨는데도 왠지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이대로 따라가서 좀 더 자극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녁을 먹이는 게 우선일 것 같다. 그를 위해 마쉘리 로 샤브르 작품집도 갖고 왔다. 조금이라도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겨 붙은 피들이 멍 자국을 만들어내는 것도 욱신대는 고통도 여지운이 주는 거라면 좋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지. 

  선연홍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일어섰다. 나간 지 좀 됐으니 따라잡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가방에 넣는 사이 문자가 울렸다. 혹시 여지운의 욕설 문자가 아닐까? 뺨에 홍조가 살짝 어릴 정도로 설레며 기대했던 것과 달리 다른 사람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눈가를 좁히며 휴대전화기를 유심히 내려다보던 선연홍이 고개를 들어 여지운이 사라진 쪽을 보았다.   

  “음.”

  미간을 가볍게 찌푸린 표정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액정 위를 톡톡 두드리다가 답장을 보냈다. 

  -만나서 얘기합시다. 

  주변에서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선연홍에게는 익숙함을 넘어 일상에 가까웠다. 예전 모습일 때도, 변하고 난 뒤에도. 저런 눈빛과 감정, 얼굴들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를 흥분시키고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한 사람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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