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8)

10.

  

  살인적인 공모전 준비가 시작됐다. 주제와 스케치, 백그라운드 등 기초적인 작업과 총감독은 팀장인 여지운이 하되 패널과 모형작업등은 나눠서 하기로 했다. 보통은 공모전 출품은 몇 달 전부터 준비하는데 2주 만에 하려고 하니 죽을 맛이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에 데지 않기 위해서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당연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지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건강 생각한답시고 끊었던 담배는 일주일도 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흡연실에서 담배 필터를 빠는데 와, 이 맛이구나. 싶었다. 

  오전 회의와 작업, 오후 회의 후 결재, 또 작업, 작업, 작업……. 아직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초췌한 건 매한가지였다. 잠잘 시간도 모자라 눈 밑이 새카매지는 와중에도 샤워와 면도는 꼭 했다. 좀비 같은 낯빛의 팀원들이 팀장님만 빛난다고, 자동 식기세척기처럼 자동 샤워, 면도 기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사이 선연홍과는 두어 번 만났다. 오래는 아니고 잠깐씩, 그나마도 그가 회사 앞으로 찾아와서 보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약속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 식당 밥 말고 맛있는 것 먹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일 할 맛 나지. 영수증은 경비 처리해야 하니 갖다 주고.”

  “네.”

  얼마 전, 팀원들은 선연홍이 잘난 척을 하며 준 카드로 정말로 고급 중식당에 가서 코스 요리를 먹었다. 하지만 차마 최고급 코스는 시킬 수 없었는지 중간 가격으로 시켰다. 그것도 꽤 비쌌지만, 여지운의 성에 차지 않았다. 아깝다, 같이 갔으면 카드 한도를 박살 내는 건데. 

  “다녀오세요. 팀장님.” 

  “급한 일 있으면……, 아니 있어도 우리 점심시간은 서로 지켜줍시다.”

  “물론이죠. 바지에 똥을 싼다고 해도 팀장님에게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일은 더더욱 부르지 마시고요.”

  농담 섞인 이대리 말에 농담으로 맞받아치며 로비로 내려가자 선연홍이 기다리고 있었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다보는 걸 보니 기분 나쁜 연락이라도 받았나 보다.

  “선연홍씨.”

  고개를 든 선연홍은 활짝 웃었다. 말 걸기 힘들 정도로 싸늘했던 남자는 이제 봄 같이 화사하게 변했다.  

  “지운씨, 오랜만입니다.”

  “바쁜데 이렇게 찾아오면 곤란합니다.”

  ‘난 너와 달리 아주, 아주 바쁘다’는 티를 팍팍 냈다. 거들먹거리겠다는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점심시간까지 반납하며 일하는 게 현실이었으니. 

  “이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 왔다가 지운씨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근처?”

  “삼원동이요.”

  “삼원동? 여기서 자동차로 1시간 넘게 걸리는데?”

  1시간이 다 뭐냐, 출퇴근 시간이나 금요일 저녁에는 2시간 넘게 걸렸다. 

  “글쎄요, 한국 땅이면 다 근처 같은 걸요.”

  “뻥도 정도껏 치세요.”

  “저는 단지, 당신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 달콤한 말 속에 있는 건 가련한 연인의 애틋한 진심일까, 지배자의 오만한 눈속임일까.

  “지운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거, 식사 안 했을 것 같아서요.”

  “음, 일단 주니까 받긴 하겠는데…….”

  뚱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종이 가방 안을 슬쩍 곁눈질하는 모습은 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주인 눈을 피해 사료를 힐끔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고양이. 맞지. 도도하고 싸늘하지만, 가소롭고 귀여운 고양이. 선연홍은 여지운의 입안에 제 성기를 쑤셔 넣고 싶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눈 밑도 거뭇하고, 뺨에 살도 내려서.”

  단단한 손끝이 눈가를 툭 누르듯 쓰다듬었다. 그 얄궂은 손길에 여지운의 어깨가 흠칫했다. 선연홍은 그 모습을 못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내렸다.  

  “그래도 멋있어요. 귀여워요.”

  “장난합니까?”

  “아니요, 진심입니다. 그것보다 여기까지 왔는데 잠시만 시간 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귀찮게 구네요.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시간까지 내달라니.”

  툴툴거리면서도 선연홍을 데리고 회사 카페테리아로 갔다. 그냥 흔한 사내 카페인데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여기저기 둘러봤다. 갑자기 등장한 미남에게 회사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여지운이 혀를 찼다. 사적인 걸로도 모자라 공적인 공간까지 데려오다니. 실수다. 사실 그것보다 더 짜증 나는 건 선연홍에게 몰리는 시선이었다. 뭔가 짜증나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고 불편했다. 

  “생각보다 좋네요.”

  여지운은 대답 없이 자판기 버튼을 눌렀다. 띡. 텅. 텅텅텅. 손안에 닿는 캔을 선연홍에게 던졌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선연홍은 차가운 탄산음료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뚜껑을 땄다. 일부러 그가 안 먹는 종류의 음료를 준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짝 들린 고개, 턱 끝에서 시작된 선은 불룩 솟은 목울대를 지나 쇄골까지 수려하게 떨어졌다.   

  “지운씨?”

  “피곤해.”

  의식하기도 전에 툭 내뱉어진 말에 선연홍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걱정? 지가 뭐라고 걱정을 해. 혀끝까지 밀려온 말을 꾹 참았다.

  “일이 바쁜가 봅니다.”

  “직장인의 삶이 뭐 다 그렇죠. 거지 같은 회사에, 거지같은 야근, 한 대 치고 싶은 상사.”

  “저는 직장 생활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공감은 못 할 수도 있지만, 듣는 건 잘하니 답답하거나 화나는 일, 모두 다 말해 주세요.”

  “한 번도 못해봤다고? 요새는 예술가들도 전담 에이전시에 소속돼서 합작 많이 하던데.”

  선연홍의 직장 생활이라……. 상사에게 욕을 듣거나 고객에게 멱살 잡히면서 아랫도리를 세우는 모습을 떠올리자 소름 돋았다. 으, 여지운이 어깨를 조금 털었다.

  “지금 지운씨 표정을 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네요.”

  “그쪽이 좀 특이해야죠.”

  “그때도 말한 것 같지만, 지운씨 말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취급당하는 건 기분 나쁩니다. 아주요.”

  “제발 나도 좀 기분 나빠 해주십쇼.”

  선연홍이 준 것은 쇠고기 슈마이였다. 아직 따끈한 것을 입안에 넣자 얇은 피가 터지며 진한 육즙이 입안에 확 퍼졌다. 

  “맛있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선연홍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는 빈 캔을 옆에 내려놓고 두 손을 얼굴에 받친 채 본격적으로 봤다. 

  “입맛에 맞아서 다행입니다. 슈마이가 제일 유명하긴 하지만 다른 음식도 괜찮습니다. 다음에 같이 가 봐요.”

  “그것보다 선연홍씨는 어떻습니까. 작품 활동 같은 거요.”

  “저는, 음. 지금 제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한 사람뿐이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다고 말했었죠? 지금도 같습니다.”

  “이래저래 놀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건 아닙니다만.”

  아니긴 뭘 아니야. 그 말이 그 말이지.

  “정말입니다. 제 안의 여지운씨를 그려내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예. 개소리 잘 들었고, 바빠서 난 이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하하. 가벼운 웃음소리가 카페 안을 울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좀 더 노골적으로 모였다. 짧은 시간, 어느새 슈마이 상자 하나를 다 비운 여지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계속 먹다간 체할 것 같아 나머지는 따로 먹기로 했다.

  “아쉽지만 얼굴 봤으니 됐어요.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해요. 연락할게요.”

  

  * * *

  

  그로부터 이틀을 꼬박 더 매달려서 최종 도면을 완성했다. 해야 할 일이 한 가득하였지만, 도면이 나오자 심리적 압박감이 조금 줄었다. 컨셉이 정해지자마자 시작한 스케치는 퇴짜와 수정을 반복했다. 퇴짜를 맞을 때마다 여지운의 신경 줄도 같이 갈리는 느낌이었다. 자꾸 뱃속이 뒤틀려 이러다가 스트레스성 위염이라도 걸리겠다 싶을 때 최종 오케이가 떨어졌다. 정말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 진짜.”

  이 일을 좋아하고 자긍심도 있지만 그건 생계가 걸려 있지 않을 때 얘기다. 고객, 마감, 결재 같은 것은 일을 좋아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다.

  여지운의 영혼이 털려가고 있는 사이 깔끔한 모습의 선연홍은 회사에 몇 번 더 왔다 갔다. 사무실에서 혼자 밥 먹다가 어쩌다 팀원들과 함께 식사하러 나왔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이 정도면 진짜 어디 몰래 카메라를 붙여 놓고 스토커 짓을 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됐다.

  집에 도착하면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다가 겨우 눈을 뜨고 나오기를 일주일가량 반복하다 보니 점점 더 초췌해졌다. 이런 모습을 선연홍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회사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다. 말 잘 듣는 선연홍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정말 회사엔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서 티 나게 서성였을 뿐.

  역시 팀원들 커피라도 사주려고 함께 내려가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덕분에 회사 밖에서 누군갈 기다리는 미남에 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여지운은 자신보다 더한, 그야말로 개썅 마이웨이 길을 걷고 있는 선연홍을 포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어차피 한 달 정도만 지나면 끝이다. 무의미한 감정 소모는 정말 하고 싶지 않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목과 어깨 부근이 유난히 뻐근했다. 눈도 뻑뻑하고 입안도 깔깔해 잠시 쉬기로 했다. 한쪽 구석에서 쭈그린 채 졸고 있는 팀원을 보다가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의 반대편에 그늘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아 요즘은 거의 달고 사는 담배를 꺼냈다. 원래라면 흡연실에 가야 하지만 졸리고 피곤해서 거기까지 가기도 귀찮았다. “아흐, 피곤하네.” 입을 쩍 벌려 하품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둥그렇고 얇은 종이의 끝을 물고 한 모금 빨자 텁텁하고 무거운 연기가 입안으로 탁 쏴 들어왔다. 

  “피곤할 땐 역시 담배가 최고네.”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빨고 있는 게 처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밤 10시인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고.”

  자주 만나지 못하는 대신 선연홍은 항상 같은 시간에 전화를 했다. 시간을 보지 않아도 지금처럼 전화가 오면 으레 10시겠거니 했다. 윗주머니에서 윙윙 울리는 전화기를 꺼냈다.

  “여지운입니다.”

  [선연홍입니다. 지운씨. 오늘도 야근하십니까?]

  “네.”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죽을 맛입니다. 그러니까 전화 좀 하지 마십쇼. 더 스트레스받으니까.”

  [스트레스라……. 속에 담아두시지 마시고 저한테 다 말해 주세요.]

  “……욕 듣고 싶어서 그러면서 지가 좋아하는 걸 괜히 내 생각해주는 것처럼 말하네. 이 새끼가.” 

  장사 한 두 번 해 본 것도 아닌데 어디서 약을 팔려고. 여지운이 입안에 고인 연기를 내뿜어냈다. 수화기 너머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니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너무 그런 짓을 하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음, 그렇다면 그런 짓을 하면 됩니까?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화장실인가 봅니다.]

  오늘따라 너무 피곤하네. 오늘은 집에 가는 대신 숙직실에서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짧아진 꽁초를 버리고 새것을 꺼내 물었다.  

  [잘 됐군요. 바지, 벗고 있습니까? 손바닥을 펴고 아래 내려 봐요. 아래가 보이죠? 한번 쥐어 보겠습니까?]

  눈꺼풀에 무겁게 매달려 있던 잠기운은 선연홍의 말과 함께 흩어졌다. 전화기 열 때문인지 유난히 뜨거운 귓가에는 여전히 선연홍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며칠 전, 카페에서 기억하죠? 그때 그 느낌을 떠올리면서 꽉 잡아 봐요. 세게, 조금 더, 세게. 아프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하게. 옷 위로 잡아도 좋습니다. 속옷과 바지가 살갗을 스치는 느낌이 꽤 자극적이죠?]

  “뭐? 지금 갑자기 무슨…….”

  당장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이 오가던 겨울의 카페. 수십 가지의 목소리들이 섞이고 엮여서 한 번에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여지운과 선연홍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누군가 고개를 숙이고 밑을 들여다보면 당장 알아차릴 것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구둣발로 동성의 사타구니를 밟고 누르고 있는 남자와, 시뻘건 얼굴로 땀을 흘리며 목을 움츠리고 있는 다른 남자를. 온풍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땀에 젖은 얼굴과 달아오른 귓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픕니까? 하지만 그 고통이 더 한 쾌감을 갖고 온다는 거, 이제는 너무 잘 알잖아요?]

  그때는 오로지 성기에 몰린 자극만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몸을 지배하는 것은 여지운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그 감각만이 다인 듯이. 바늘 같은 수치심이 찾아온 것은 그 뒤였다. 차라리 무릎에 비벼질 때가 나았지, 구둣발에 벌떡 일어서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고.

  흥분됐다.

  정신없이 휩쓸리며 작은 감각들이 온몸에 타닥타닥 달라붙었다. 뭐가 이래? 하고 생각될 정도였지.

  “후.”

  그때의 기억은 여지운의 하체가 빠듯하게 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고 발꿈치가 들썩였다. 바지와 속옷 아래의 성기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 밤, 싸늘한 공기 위로 달뜬 숨결이 하얗게 퍼졌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의 여지운이 허벅지까지 바지를 내리고, 속옷마저 벗으려고 할 때,

  “헉, 아.”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하고 떨어졌다. 맨 허벅지 위로 불씨가 떨어졌다. 아앗. 손톱만 한 회색 불덩이가 주는 뜨거움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공기가 희박한 곳을 헤매다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 온 것처럼 거친 숨이 터졌다. 장초였던 담배는 겨우 한 뼘 정도로 짧아져 있었다. 허벅지 위에 번진 회색 담뱃재는 마치 문신 같았다. 

  “…….” 

  여지운은 진정하려고 애쓰며 숨을 천천히 내 쉬었다. 수화기 너머에는 여전히 선연홍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운씨, 지운씨, 지운씨.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지.”

  [이런, 정신 들었어요? 아깝네.]

  웃음이 다분한 말에는 장난기도 함께 묻어 있었다. 

  “씨발 새끼.”

  그대로 전화를 끊은 여지운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얼마나 힘을 준 것인지 종아리 근육이 아직도 빳빳했다. 잠을 잘 자지 못해 피로가 누적됐다는 변명은 말 그대로 변명일 뿐이었다. 이건 미쳤다고 밖에는……. 아니, 아무래도 미친 게 맞는 것 같다. 

  

  * * *

  

  여지운의 일과는 2주일 가까이 똑같았다. 회사와 집. 주말도 없었다. 이쯤 되니 집에 갈 시간에 그냥 숙직실에서 자는 게 나을 정도였다. 새벽별 보고 출근해 새벽달 보고 퇴근했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새벽과 아침에만 파는 메뉴는 질리도록 먹었고, 24시 해장국 집에서 해장국을 허겁지겁 퍼먹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여지운 뿐 아니라 3팀 모두 다른 일은 모두 미뤄둔 채 공모전에만 매달렸다. 정 못 견디겠으면 구석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누워 쪽잠을 잤다. 무슨 전쟁터에 피난민도 아닌데 꾀죄죄한 모습을 보니 짠했다. 

  1팀 팀장이 자기들 때문에 미안해서 어쩌냐고 말했을 땐 한 대 칠 뻔했다. 주둥이로만 씨부리면 뭘 하냐, 정말 미안하면 성의 표시를 하든가. 웬만하면 괜찮다고도 말할 만한데 하지 않았던 건 괜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서 어쩌냐니. 그러게요. 어떻게 할 겁니까?”하고 말하자 1팀 팀장이 똥 씹은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예민한데 누가 건드리랬냐. 

  그래도 개같이 일하니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도면 캐드는 진작 완성됐고 이제 미니어처 모형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여지운은 원래 모형 작업은 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급박한 탓에 투입됐다. 3D로 작업한 것을 실물, 그것도 실제 크기보다 작은 것들로 표현하는 일은 상당히 고됐다. 다른 곳은 몰라도 허리는 절대 다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나무 모형을 바닥에 붙이는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끝, 끝났나요?”

  “수고했어요.

  할 수 있는 작업은 다 했다. 이제 접착제가 잘 붙어 모형들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렇게 빡빡하게 일한 건 처음인 정아영과 박미애 주임은 거의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여지운 역시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예감이 좋네요, 대상 충분히 노려볼 만합니다.”

  마감을 이틀 앞두고 완성이라. 기적이네. 하……, 부장 새끼.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일을 내려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그래도 막상 완성된 것을 보니 뿌듯했다. 타 팀 사람들이 아직도 만세를 부르짖는 3팀을 힐끔대며 지나갔다. 누가 보면 로또라도 당첨됐는지 알겠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미리 말합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모형은 일단 접착제가 좀 마르게 놔두고 내일 최종 마무리합시다.”

  “네!”

  우렁찬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여지운이 팔을 쭉 뻗으며 근육을 늘렸다. 셔츠가 살짝 올라가며 탄탄한 허리선이 드러났다. 

  “야식을 그렇게 드시는데 팀장님은 어째 배가 하나도 안 나와요?”

  작년 가을에 한 결혼 이후 나날이 퉁실해지는 이대리가 억울한 얼굴을 했다.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야식을 많이 먹긴 했다. 하지만 이대리는 모를 거다. 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잠을 포기하고 조깅을 했다는 것을. 그 덕에 혼이 빠져나갈 만큼 피곤했다. 이대로 쓰러져 자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손뼉을 짝 쳤다.

  “수고들 했습니다. 다들 피곤해서 저녁 회식은 아무래도 힘들 듯하니 오늘 점심 같이 먹고 나머지 회의합시다.”

  “와아.”

  “그리고 오늘은 팀장 재량으로 정시에 퇴근합니다.”

  “와아!”

  신 난 것 같은데도 워낙 퀭하다 보니 불쌍해 보였다. 수면욕과 식욕 중 식욕을 택한 사람들이 옷을 챙기는데 정아영만 멀뚱히 서 있었다.

  “정아영씨. 안 갑니까?”

  “아. 팀장님. 사실 제가 어제부터 몸이 좀 안 좋아서 좀 쉬려고요.”

  “몸이 안 좋아요?”

  “그……, 음.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저는 괜찮으니까 다녀오세요.”

  여지운이 뒤늦게 탄식했다. 정신없이 일한다고 몰랐는데 정아영의 안색이 창백했다. 안절부절못하고 배 부분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게 확실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래도 티 내지 않고 끝까지 한 게 기특하다 싶으면서도 안타까웠다. 

  “많이 아픕니까? 약이라도 사다 줘요?”

  “어? 아니, 아니요. 가끔 씩 아픈……, 아무튼 약은 이미 먹었어요.”

  “열의를 가지는 건 칭찬할 만한데, 그래도 아픈 걸 참으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본인이 제1순위입니다. 아시겠죠? 뭐, 이번에는 상황이 좀 급하긴 했지만. 고생했어요, 정아영씨.”

  “감사합니다.”

  지난해 말, 자신 역시 선연홍과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미친 듯이 야근했지. ‘선연홍.’ 이제는 익숙한 이름을 혀끝으로 굴려봤다. 그 뒤로 선연홍과는 별다른 일이 없이 그냥 일상적인 연락을 할 뿐이었다. 일상. 그러니까 여지운이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아내고 풀어내면 그는 가만히 듣다가 가끔 개소리를 하는 그런.

  지난날, 스토커 의심설을 증명하듯 퇴근 시간에 귀신같이 맞춰 연락이 왔다. 새벽 2시, 3시라도 상관없었다. 한동안은 무시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숨지 마요, 쫓아가고 싶잖아요.’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자꾸 찜찜하고 불편했다. 특히 바빴던 요 며칠간은 그와 전화 통화만 했는데,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때때로 정신을 놓았다. 머릿속에서는 며칠 전 화장실에서의 일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지운씨. 자, 아랫도리 잡아 봐요. 좀 더 세게. 그 정도 자극으론 이제 안 될 텐데.’ 

  역시 안 되겠다. 진짜 안 되겠어. 무엇이 안 되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해 혼란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믿음직한 팀장인 척했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 할 거 아닙니까? 올 때 사올 테니 말 해봐요.”

  “괜찮은데. 음, 그럼 휘핑크림 올린 카페모카 부탁해도 될까요?”

  “아이스? 핫?”

  “뜨거운 걸로요.”

  “알겠습니다. 점심 먹고 오면 1시 좀 넘을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아니, 전화는 하지 마요.”

  “네. 팀장님.” 

  정아영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지운은 아주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연락을 잘 안 받았다. 물론 그 역시 퇴근 후에는 회사 사람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1, 2팀 역시 점심을 먹으러 간 듯,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문 잠그고 갈까요?” 물어보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알겠습니다. 쉬어요.”

  “예, 식사 맛있게 하세요.”

  팀원들과 함께 나가면서 힐끔 보니 정아영이 엎드리고 있었다. 

  카페에서 마시고 오겠다는 팀원들을 뒤로 한 채 아메리카노와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뜨거운 카페모카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저거, 뭐야.”

  여지운은 지금 벌어진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사무실에는 웬 남자가 있었고 정아영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 할 틈도 없이 웅성거리며 구경하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대체 뭡니까!”

  가까이 와서 보니 상황은 더 최악이었다.

  “이건 또 왜 이래?”

  불과 1시간 전까지 영혼을 갈아 넣으며 힘들게 완성한 모형이 박살, 그야말로 개 박살이 나 있었다. 바스락, 우드락이 발아래 밟히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할 말을 잃었다.

  “팀장님…….”

  “정아영씨?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여지운이 마지막으로 꽂아 넣었던 나무가 두 동강 난 채 뒹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직접 제단 해서 만든 한옥 건물과 창, 장독 같은 것들도 모두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그것을 신나게 짓밟고 있었다.

  난장판이네……. 너무 어이가 없으니 오히려 현실성이 없었다. 누가 뇌 속에 손을 넣어 마구 주무르는 느낌은 불유쾌했다. 처음 보는 남자 발아래에서 모형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던 여지운이 무릎을 꿇고 있는 정아영을 일으켜 세웠다. 

  “정아영씨.” 

  “티, 팀장님.”

  고개를 든 정아영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나 덜덜 떨리는 어깨를 보다가 정체불명의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2주간 피똥 싸면서 만들 결과물이 허무하게 사라진 이상 뭘 갖다 붙여도 최악이었다.

  “아니, 이것 보세요. 누군데 이렇게 함부로 사무실에 들어와서 난립니까? 이 난 장판을 만든 것도 당신입니까?”

  정아영 앞을 막아선 여지운이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구겨지고 언성이 높아졌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남자가 “오호라”하며 다짜고짜 삿대질했다.

  “넌 뭐 하는 새끼야?”

  “그쪽이 이랬냐고요.”

  “그래 내가 했다.”

  하고 있는 꼴을 볼 때부터 느꼈지만, 첫 마디에 반말하는 것을 보니 딱 봐도 진상의 향기가 풍겼다. 진상. 그래 뭐 그건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 진상이 내게로 오면 문제가 된다. 

  “당신 대체 누군데 이 행팹니까. 그리고 이건 대체 어쩔 겁니까.”

  “어쩌다가 내가 실수로 좀 건드렸다고, 저년이 얼마나 지랄을 하는지. 나한테 말이야, 나한테!” 

  색깔이 잘 나왔다고 좋아한 장독 모형이 남자의 발길에 치여 구석으로 날아갔다. 

  “씨발, 이런 게 다 뭐라고 어?”

  남자는 4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생각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초면이라는 건데 다짜고짜 웬 반말이며, 2주일 가까이 사람 몰골을 포기하며 만들었던 공모 출품 모형이 박살 난 것은 또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가뜩이나 요새 잠이 부족하고 피곤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는데 이런 좆같은 상황이 벌어지다니. 

  뻑뻑한 눈가를 손등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지금 입을 열면 쌍욕이 터질 것 같아 여지운이 애써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바람 사이로 비린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것은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더 진해져 토할 것 같았다. 

  “이런 장난감 쪼가리들 때문에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

  “좀 건드린 게 아니잖아요! 제가 엎드려 있는 틈을 타서 멋대로 만지다가 떨어트려서 망가진 거잖아요. 그걸 항의했더니 저렇게 다 부쉈…….”

  “지금 이년이 뭐라는 거야.” 

  옷차림이나 시계, 구두 같은 것을 보면 돈깨나 만지나 본데 그는 저런 부류를 잘 알고 있다. 자기 권력, 혹은 재력을 믿고 깝죽거리는 종자들. 일반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주 높은 확률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자신의 가족 중에도 있었으니까. 모두가 제 아래에 있다고 여기고 떠받들어져야 하니 자연히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가 여기 너희 둘 자르는 거 일도 아니야, 알아?”

  문제는 저 진상이 왜 이곳에 와서 지랄하느냐는 건데, 아마 거래처 사장이나 고객이 사무실을 잘못 찾아온 것 같다. 사실 저 남자가 VIP든 아니든, 혹은 잘못 찾아왔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지랄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사이에도 진상 새끼는 여지운의 뒤에 있는 정아영에게 삿대질하면서 소리치고 난리였다. 

  아, 머리야. 누군가 눈두덩을 꽉 조이는 것처럼 따갑고 지끈거렸다. 아주 급박한 일정 탓에 잘 시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요즘 다른 생각들이 여지운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꽃씨같이 부드럽고 간질거리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돌아다니다가 한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아주 예쁜 꽃이 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화려하고 예쁜 꽃이 폈다. 너무 예뻐서 꽃잎을 툭 눌렀더니 벌어진 이파리가 여지운의 손을 확 깨물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삼켜졌다. 

  본인이 생각하면서도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그냥 그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뜻이었다. 그 상황에서 며칠 밤을 새우며 모형을 완성했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고 일 한 이유는 욕구 때문이었다. 한 번 맡은 일은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과 자존심. 널널하고 가볍게 사는 여지운과는 다른 팀장으로서의 여지운. 

  “여기 책임자 누구야? 고객을 어디 이딴 식으로 대하는 게 어디 있어?”

  “일단 진정하시죠.”

  “진정? 책임자 나와서 사과하기 전에는 진정 못 하니까 그리 알아! 이래서 없는 것들이랑은 상종을 안 하는 건데.”

  “이것 보세요.”

  “넌 뭐야? 새파랗게 젊은 새끼가, 뒤에 있는 년 애인이냐?”

  하……. 피곤하네.

  간당간당 붙어 있던 이성이라는 끈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가늘어졌다. 여지운이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이성을 붙들고……, 붙들.  

  “내가 누군지 알고, 마음만 먹으면 이런 회사 망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야, 우리 아버지한테 말하면 다 길거리에 나앉는다고. 길거리에 나앉고 싶어? 어? 알아들었어? 책임자 빨리 불러!”

  붙들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계점까지 올라있던 화는 금방 머리를 뚫고 폭발했다. 펑. 

  축하합니다. 고객 새끼야. 

  “나다! 나라고, 이 새끼야!”

  “어헉.”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던 진상은 순식간에 멱살이 잡혀 콱 막힌 숨을 토해 냈다. 

  “뭐야, 이 새, 크윽.”

  이렇게 소리 지르면 사과를 하거나 책임자를 불러올 거라 생각했지 갑자기 멱살을 잡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책임자다. 아버지고 나발이고! 아, 씨발. 네놈 잘못 같은데 왜 지랄이야, 지랄이. 물품 파손 및 영업방해로 신고하기 전에 꺼져!”

  “뭐? 너 뭐야? 이 미친놈이? 웬 반말이야? 내가 누군 줄 알고!”

  입을 떡 벌린 채 놀란 얼굴을 하던 남자는 곧 정신을 차렸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멱살을 잡은 손을 들어 올리자 남자의 발끝이 달랑 들렸다. 난쟁이 똥자루 새끼가, 지랄하네. 회사라서 성질 많이 죽이고 있었지만 여지운은 싸가지가 없었다. 물론 최근에는 독보적인 또라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해 보였지만 성질머리로는 어디 가도 꿇리지 않았다. 

  “이것 보세요, 아저씨. 아저씨가 누군데? 말도 안 해 놓고서는 누구냐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왜 당신을 알아야 하는데? 그리고 먼저 반말 한 건 그쪽이라고요. 왜, 본인이 지랄하는 건 괜찮고 남이 지랄하는 건 싫나 봐? 존댓말 듣고 싶으면 나이에 맞게 행동하시던가요. 그 나이 쳐드시고 새끼새끼 거리는 새끼가 어디서 예의 타령이야, 타령이.”

  “뭐라고? 이 개새끼가.”

  “내가 개새끼면 너는 씨발새끼냐? 신고하기 전에 꺼지든가 아니면 여기서 두들겨 맞고 무릎 꿇고 빌던가.”

  지금 이 남자보다 키도 체격도 여지운이 더 좋았다. 상대방의 시선보다 아래에 있는 건 심리적인 위축감이 상당했다. 그 역시 최근 그것을 여실히 느끼지 않았던가. 올려 본다는 것, 단지 그뿐인데도 쪼그라들었다.

  “예? 처맞든가, 아까 우리 팀원처럼 무릎 꿇고 빌어. 무릎 연골 안 닳아 있으면 직접 갈아 버릴 테니까.”

  “너, 너 지금 이거, 이거.”

  “이거 뭐? 뚫린 입인데 이제 말도 못하네? 상황 파악 못하고 지랄하고 싶냐? 대가리가 목에서 분리되고 싶나 봐?”

  특히 여지운은 눈초리가 사납고 성깔 있어 보여 조금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러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날 것이라 생각했는지 정아영이 여지운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팀장님 고정하세요.”

  “고정은 무슨, 이 새끼의 면상을 바닥과 고정해 줄 생각입니다.” 

  그제야 남자도 여지운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양손을 들고 항복 표시를 했다. 지랄 발광하던 것과 달리 상당히 빠른 항복이었다. 원래 이런 새끼들은 강하게 나가면 바로 깨갱거린다. 이대로 모른 척 한 대 쳐줄까 하다가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지랄도 상대 봐가면서 하세요.”

  쿨럭, 쿨럭. 시뻘게진 얼굴로 한참이나 기침을 하던 남자는 금방 살만해졌는지 불과 몇 분 전의 상황도 잊고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혹시 이 아저씨도 뭐 맞는 거나 욕 들어 먹는 거 좋아하는 거 아냐?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고! 너 이름 뭐야? 내가 이 업계에 발 못 붙이게 해 줄 테다.”

  “하나도 안 무서우니 마음대로 해보시든가. 꼭 좆도 아닌 새끼들이 입만 나불대는데 내가 존나 싫어하는 부류거든? 주둥이를 찢어 버릴까 보다.”

  “이름 뭐냐고 새끼야!”

  “여지운. 3팀 팀장 여지운이다. 됐냐? 어서 가서 아빠한테 이르세요. 그 나이 처먹도록 기생충처럼 빌붙어 사는 아저씨. 우쭈쭈.” 

  여지운이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탁탁 털어냈다. 당황스럽고 화가 나는데 차마 다시 덤비지는 못하겠는지 남자는 산 멧돼지같이 거친 숨을 훅훅 몰아쉬더니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남기며 멀어 졌다.

  무슨 삼류 영화의 악당 퇴장 대사도 아니고 두고 보긴 뭘 두고 보자고 하는지 모르겠네. 

  예상은 했지만, 문밖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하긴 싸움났다는 소문이 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진상이 악당 같은 말을 남기고 퇴장하자 남은 것은 짧은 침묵과 그것을 덮는 소란스러움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사람들이 쏟아지며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여팀장 방금 뭐야, 뭐야? 저 남자 장성은 회장……. 아니, 이건 또 왜 이래.”

  평소 흡연실에서 친분을 쌓은 자재과 김과장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 구경이라고. 눈을 빛내며 묻다가 바닥에 박살 나 있는 모형을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이거 뭐야? 공모전 출품작 아냐?”

  “알면서 왜 묻습니까.”

  싸늘한 대답에 김과장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저 사람 원래 자재 팀 고객인데 왜 여기까지 왔대? 그, 왜 맨날 여팀장한테 의뢰하는 장성은 회장 말이야. 거기 둘째인데 원래도 진상으로 유명해. 여팀장 고생 좀 하겠다.”

  김과장이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사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미처 다 토해내지 못한 짜증이 배가 되어 숨이 막혔다. 그는 아직 화가 남아있는 얼굴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여지운……. 말발 많이 죽었네. 겨우 그 정도밖에 못 하다니. 예전 같았으면 열 받아서 쓰러지게 해줬을 텐데, 요새 성질 진짜 많이 죽었다.

  그 사이 들어온 팀원들이 정아영을 위로 했다. 박미애 주임이 어깨를 토닥이자 참고 있던 서러움이 터진 듯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여지운이 그녀를 향해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박미애가 정아영을 달래며 데리고 나갔다.

  “하아…….”

  일단 진정시키고 난 다음에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물론 보지 않아도 예상이 갔지만 보고를 하려면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하니까. 하, 뭐야. 경위서라도 써야 하나? 설마 잘리는 건 아니겠지? 잘리기 전에 먼저 선빵을 날려야 할까? 

  “팀장님, 괜찮으세요?”

  이대리가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천천히 사무실을 훑어보니 모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미, 있겠지. 원래 싸움구경이랑 뒷담화가 제일 재밌거든.

  흥분이 가고 난 다음에는 현실이 찾아왔다. 현실, 그래 좋네. 현실……. 하하, 씨발…….

  뱃속이 욱신대는 것을 참은 여지운이 억지로 웃었다. 

  “불쾌한 것을 만졌더니 손이 더러워진 것 같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와. 손가락을 치켜드는 이대리의 표정엔 동경이 가득했다. 평소에도 보통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걷는 여지운의 뒤로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그리고 여지운은 변기 위에 털썩 주저앉아 참았던 숨을 탁 내쉬었다.

  “후……, 자, 여지운. 생각을 해보자.”

  깍지 낀 손을 무릎에 대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네가 정말 미쳤구나. 여지운. 이 새끼야. 흥분이 가고 난 다음에는 늘 그렇듯 타격이 밀려왔다. 그 진상에게 한 행동은 후회하지 않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런 것은 잘못한 일이었다. 그냥 어디 으슥한 곳에서 작살 내줬으면 모른 척 발뺌하겠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여지운이 빠른 승진이 가능했던 건 실력이 있어서였다. 특히 회사의 큰 고객이 여지운의 스타일을 좋아해서 굵직한 계약도 여러 건 따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새끼가 나댄다고 탐탁지 않게 보는 무리도 있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온갖 후 폭풍이 밀려온다. 사람이 부대끼는 일인데 잡음이 없을 순 없지만 갑과 을은 명확하게 나뉜다. 고객의 멱살을 잡은 것은 분명 좋지 못한 일이었다. 옳지 못한 게 아니라 좋지 못한. 

  이 회사에서 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더럽게 마무리되면 경력에 큰 흠집이 생길 수 있다. 여지운은 아직 젊고,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어정쩡한 상태가 되면 이도 저도 아니었다. 아니,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이 일이 아버지에게 들어간다면.

  얼굴을 감싼 손바닥 안으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로 쏟아지는 숨은 무거웠다.

  그 진상 새끼한테 사과해야 할까? 그건 더 싫은데. 애초에 그 새끼가 잘못 한 거잖아. 박살 난 모형을 떠올리자 다시 열이 뻗쳤다. 정아영도 그렇고, 자신에게 욕한 것도 그렇고 여전히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처럼 예민하거나 스트레스 받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참고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사적인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이자까지 쳐서 배로 갚아줬겠지만.

  “하. 진짜 뭣 같네.”

  고개를 들자 화장실 문에 붙어 있는 명언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이별. 좋지. 혹시라도 자르면 일단 부장이랑 사장 얼굴에 서류를 던지자. 소화 가능한 일정을 줘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시키면 다 되냐고, 아니면 네가 해보라고 지랄해야겠다. 어차피 경력 빌 텐데 막 나가야지. 그리고 바로 퇴직금을 받아서 장사라도 할까? 대출금은 어쩌고. 아니면 본가에 찾아가서 머리라도 숙여서……. 아니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됐어도 인간적으로 그건 싫다. 

  ‘네 형은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러니, 네 성격이 그러니 잘리지,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니, 이제 그만 놀고 제대로 살렴.’

  어머니는 늘 그렇듯 아주 진중하고 고상한 얼굴로 자신을 존재를 부정하시겠지. 그러면 자신은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더 막 살 것이다. 잘해도 못해도 같다면 최소한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으니까.

  “…….”

  모처럼 모든 것을 박살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세면대에 앞에 달린 거울 안에는 피곤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머리도 흐트러졌고 옷도 구겨졌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두어 번 하고 젖은 손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턱 끝으로 고개를 좌우로 둘러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참나, 이 와중에도 되게 잘생겼네. 거울 속의 남자에게 찡긋 윙크를 해준 뒤 사무실에 가니 1팀장이 부장실에서 부른다는 말을 전해 줬다. 애초에 거기서 공모 진행을 그대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부라리자 1팀 팀장이 살짝 찔린 얼굴을 했다.

  “갑니다.”

  부장이 부른다는 말을 들으니 올 것이 왔단 생각이 들었다. 야단맞으러 교무실에 가는 학생이 된 것 같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는 뻔질나게 드나들긴 했지만, 이 나이 돼서 또 이럴 줄은 몰랐네. 

  똑똑. 

  “여지운입니다.”

  가벼운 숨을 들이마신 채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손바닥 안에 감긴 쇠문이 유난히 차가웠다.

  

  * * *

  

  “야, 선연홍이……. 오랜, 만이다?”

  선연홍을 향해 손을 흔들자 그가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다가왔다. 여지운의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가 무겁게 뜨였다. 저 새끼는 또 왜 저래. 눈을 비벼 다시 봐도 여전히 몸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쟤도 술 마셨나. 술 마신 건 난데. 중얼거린 말에도 특유의 비리고 싸한 맛이 났다. 거칠게 흔들리는 파도 위에 몸을 뉘인 것처럼 머릿속이 출렁댔다. 분명 똑바로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턱을 괸 팔꿈치가 자꾸 풀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지운씨.”

  선연홍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지운의 이름을 불렀다. 늘 생각하지만, 무표정과 웃는 모습의 괴리가 참 컸다. 

  “버섯 같은 새끼.”

  “예?”

  버섯 중에 갈 황색 미치광이버섯이라는 노란 버섯이 있다. 굉장히 화려하고 예쁜 외견과 달리 독버섯이다. 우산같이 생긴 갓 부분을 입에 넣으면 불안한 상태, 갑작스러운 웃음과 환각증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겉모습은 보석같이 예쁜데 그 실상은 독버섯이라는 거다. 마치 쟤처럼. 여지운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짜증 나고 화나고, 들뜨고 재밌었다. 뱉어지는 웃음마다 술 냄새가 풍겼다. 

  “웬일로 먼저 연락을 한다고 생각했더니, 무슨 일 있습니까?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요.”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시고요. 골뱅이 무침 추가해주세요.” 

  마침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추가 주문을 했다. “예.”하고 돌아서는 직원을 선연홍이 붙잡았다.

  “됐습니다. 안 줘도 됩니다.”

  “……? 네.”

  알바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직원이 두 사람을 힐끔대다가 다른 테이블로 갔다. 

  “괜찮아요?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습니까?”

  선연홍이 테이블 위에 일렬로 서 있는 술병을 눈으로 셌다. 한 병, 두 병……, 네 병. 옆에는 맥주병도 있다. 여지운이 술이 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주량을 넘어섰다. 안주로 보이는 달걀말이와 감자튀김엔 손댄 흔적도 없었다. 

  안주도 안 먹고 혼자서 이렇게 많이 마셨다고?

  여지운은 어제저녁부터 오늘 오후까지 연락이 안 됐다. 선연홍은 처음에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줄 알았다. 요즘 그는 연락을 잘 받지도 않고, 받아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지운씨?”하고 부르면 그제야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맥락 없는 욕을 해댔다. 회사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것도 알고 있고 피곤한 것도 알았다.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분노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자극하려고 기다렸다. 선연홍은 여지운의 부정적인 감정까지도 너무 원했다. 치밀어 오르는 충동들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 목소리로 참았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는 연락이 끊겼다. 이유가 뭘까……? 예상되는 게 너무 많아서 감이 안 잡혔다. 전화로 자위해보라고 한 게 충격이었을까. 때로는 직접 겪는 것보다 한 겹 가로막힌 것이 더 자극적으로 느끼기 마련이니까.  

  오늘도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을 서성였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시계를 봤을 때에는 이미 저녁 9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야근하나? 모른 척 올라 가볼까? 사무실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면 일할 때마다 생각날 텐데, 로비로 들어가는 와중 전화가 울렸다. 그가 온종일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그 특유의 거만한 얼굴을 볼 생각에 들떴던 것도 잠시 상황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여지운은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위아래로 검은색에다가 하의에는 흰 줄무늬가 들어간 트레이닝복, 츄리닝. 그게 다였다. 이 날씨에 코트도 점퍼도 입지 않았다. 맨발에는 삼선 슬리퍼가 달랑달랑 신겨 있다. 머리는 제멋대로 뻗쳐있었고, 얼굴도 부어 보이는 게 전체적으로 자다가 바로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동네니까 그럴 수 있지만 선연홍이 아는 여지운은 집 앞 편의점엘 가도 차려입고 가는 타입이었다. 그는 본인의 잘생김을 시도 때도 없이 뽐내고 싶어 했으니.

  여지운이 선연홍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눈알까지 새빨개진 모습은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아, 조심해요.”

  시선을 잠시 돌린 사이 여지운의 몸이 기우뚱했다. 테이블에 부딪히기 전 손바닥으로 받쳤다. 평소라면 바로 뿌리칠 텐데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이상했다. 이상해. 오늘따라, 더 귀엽네. 

  “지운씨, 지운씨? 무슨 일 있습니까?”

  “……연, 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 어야 부릅니까.”

  여지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술에 절여져 돌돌 말려 있었다. 

  연인? 설마 여지운의 입에서 연인이라는 단어를 들을 줄 몰랐던 선연홍이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기운에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썩 기분이 좋았다.

  “그래요. 지운씨 말이 맞아요. 우리 사이에 이유 따위야 필요 없지요. 어떻습니까?”

  “아, 왜 자꾸, 눈앞이 흔들려. 존나 머리 아프네.” 

  여지운은 제가 무슨 말을 내뱉은 지도 모른 채 투덜거렸다. 선연홍이 여지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저는 지운씨가 보고 싶었습니다.”

  귓가에 속살거렸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술에 젖은 귓불을 만졌다. 여지운이 팔을 휘저었다. 두 손으로 귀를 감싼 모습을 보니 술이 깬 것 같지는 않은데 당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보고 싶었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이것만큼 마음을 잘 나타내는 것 또한 없었다. 여지운이 이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제껏 적지 않은 숫자의 연애를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개중에는 여지운 만큼이나 무심한 사람도, 제 감정을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간지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보고 싶어, 뭐했어, 사랑해, 넌 내 전부야. 우리 나중에 꼭 외국에서 결혼하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었다. 여지운은 그런 종류의 말을 참지 못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엔조이, 가볍게 주고받기, 킬링 타임, 단물 빠지면 바로 버리는 츄잉껌 같은 관계들. 인스턴트적인 감정과 소비가 여지운이 생각하는 연애였다. 그러니 애정이나 애틋함이 있을 리 없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그를 견디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에는 저주 섞인 비난을 내뱉으며 멀어졌다. 한탄이나 한숨 같은 건 익숙했다. 여지운의 10대 시절을 조금만 갈라 봐도 한가득 나올 테니까. 

  “이것 보세요……. 선연홍씨.”

  “네.”

  선연홍이 물컵을 여지운에게 건넸다.

  온갖 종류의 술 냄새와 음식 냄새, 크고 작은 목소리들, 후끈한 바람이 뒤섞인 공간은 분명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동네 한구석에 있는 좁은 술집과 선연홍은 어울리지 않았다. 검은색들 사이에 혼자 도드라진 흰색. 사내새끼에게 이런 비유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하얗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여지운은 자신이 왜 선연홍을 불렀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저 남자가 마치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처럼 어느 순간 뿅 하고 나타났을 뿐.

  딱히 부를만한 사람은 없었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바(bar)나 클럽에 가기도 싫었다. 옛 애인들, 섹파들……, 백선우, 임선열……. 하나하나 다 꼽아 봤지만 모두 탈락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높은 확률로 비웃을 것이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 역시 온갖 양념을 쳐 가며 비웃었을 테니까 딱히 억울하진 않았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우고 나니까 남는 것은 선연홍 뿐이더라.

  그럼 또, 왜? 어째서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그와는 서로 밑바닥까지 보였다. 선연홍은 특이한 성적 취향, 혹은 좆같은 개썅 마이웨이를 보였고, 자신은 그에게 뒤를……. 하. 어쨌든, 서로의 원초적인 모습까지 봤으니 더 실망할 것도 없다. 실망할 것이 없으니 어떤 것도 가감 없이 다 내보였다. 아무하고 뒹굴며 속에 말을 다 내뱉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전자가 자포자기 느낌이라면 선연홍은……. 무슨 말과 행동을 해도 긍정하고 받아들일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알코올에 절은 머리는 뭐가 맞고 그른지 분별하지 못했다. 일어나면 분명 허공에 헛발질하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술병을 잡으려고 하는데 자꾸 손이 헛돌았다. “아 씨발.”하고 욕을 내뱉는 순간, “여지운씨.”하고 선연홍이 불렀다.  

  “근데, 정말 무슨 일 있었습니까?”

  무슨 일? 어제 공모전 모형 사건 이후 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이것저것 구질구질한 얘기 다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그 진상은 회사의 중요 고객이 맞으니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아니, 잘못은 그쪽이 했고 피해받은 건 우리 팀인데, 사과라니요? 저는 물론이고 정아영씨는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부장이 혀를 쯧쯧 찼다. 얼마나 잘 처먹었는지 가슴 부분은 지나치게 당겨져 그 부근의 단추가 금방이라도 뜯어질 것처럼 아슬아슬 달려 있었다.   

  ‘여팀장,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

  알긴 뭘 알아? 그 새끼가 진상이라는 건 알겠다. 머릿속에서는 큰 소리를 내며 부장의 책상을 엎거나 난동을 부리는 상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저 속으로 욕을 내뱉는 것밖에 없었다. 부장은 한 술 더 떠 고객님에게는 회사 차원에서 무거운 징계를 내렸다고 할 테니 다시 부를 때까지 일단 집에서 자숙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부장님. 날밤 까며 만든 작품, 1시간도 안 돼서 망가졌습니다. 우리 팀, 그동안 어떻게 일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일단 이번 주 주말까지 집에 있다가 다음 주에 출근해서 고객님께 사과하라는 말을 듣고 내쫓기듯 부장실을 나왔다 .

  ‘자숙?’

  그 자숙이라는 말도 웃겼다. 미쳤냐. 무슨 범죄자라도 아닌데 자숙은 무슨 놈의 자숙. 여지운이 그 즉시 옷가지와 가방을 가지고 퇴근했다. 퇴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는데, 꾹 눌러 참았다. 적어도 이런 일 때문에 나가고 싶진 않았다.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항상 일어나던 시간이더라. 원래라면 씻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휴대폰도 꺼놓고 온종일 처박혀 있다가 술 마시러 나왔다. 이것도 ‘무슨 일’에 속할까?

  “별로.”

  “근데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선연홍은 답지 않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 그 아래의 눈썹 그 사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여지운이 검지로 그 부분을 눌렀다.

  “……지운씨?”

  눈썹 사이를 누른 손끝이 빙글빙글 춤을 췄다. 온 힘을 모으고 있어서 꽤 아플 텐데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다. 그게 또 웃겨서 킬킬대며 웃었다. 

  “웃는 걸 보니 좋긴 한데,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으니 일단 일어납시다.” 

  선연홍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 안에는 어떤 감정이 꾹꾹 담겨 있었다. 

  “왜, 선연홍씨 이런 거 좋아하잖습니까. 아픈 거.”

  “그 행위가 좋다기보다…….”

  “변태 새끼가 좋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좋아하잖아.” 

  여지운이 발끝으로 선연홍의 종아리를 툭툭 쳤다. 검은 슬리퍼가 발가락 끝에서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야, 빨아 봐.” 

  우스운 얘기지만 교제를 시작한 이후로 여지운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내가 차인 것 아니냐는 말에 백선우는 ‘헤어지자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도록 행동했잖아요.’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선연홍은 어떨까? 이 남자는 어디까지 받아주고 수용할까. 불쑥 솟은 의문은 여지운을 충동질했다. 

  “못하겠냐? 후, 좋아한다며, 이런 짓 하는 거.”

  살피듯 보던 선연홍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지운이 선연홍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전등 빛에 눈을 감았다가 뜬 그 짧은 순간, 발목이 잡혔다. 천천히 무릎을 꿇은 남자가 여지운의 발뒤꿈치를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잘게 겹쳐진 발 뒤 주름에 닿는 손바닥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유난히 까만 머리카락이 발등 위로 쏟아지며 뜨거운 숨이 닿았다. 발가락이 놀란 소라게처럼 확 오므라들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여지운이 선연홍의 머리통을 밀어내려 했지만, 술에 전 손은 그의 옆머리를 쓸었을 뿐이다. 발목을 뒤틀며 벗어내려고 해봤자 복숭아뼈가 아플 정도의 강한 힘으로 옥죄어졌다. 

  아, 축축한 살덩이가 발가락을 핥았다. 붉은 혀가 발 사이를 가르며 들어왔다. 중학교 2학년, 친구 집에서 기르던 뱀의 살갗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간지럽고 뜨거운. 절로 사타구니가 오므라드는 소름이 당황스럽다.

  “씨, 씨발.” 

  주위의 웅성거림도, 조악한 조명도 쏟아진 술잔에서 떨어진 술이 허벅지를 적시는 것까지도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혼미했다. 기어코 발가락 사이를 모두 핥은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까만 눈 안에는 알 수 없는 희열이 가득했다. 

  “네. 좋아합니다.”

  발끝에 닿는 키스는 요망하게 움직이던 혀와 달리 아주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 술 취한 와중에도 더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발이 꼬이며 넘어지려는 몸을 선연홍이 부축했다. 팔을 잡는 손을 털어내고 뛰듯이 나갔다. 

  “그런 식으로 도망가지 말라고 말한 것 같은데.”

  대신 계산 하고 나온 선연홍이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여지운을 발견하고 걸어왔다.

  “속은 좀 괜찮습니까? 그런 데서 술 마시지 마요.”

  “그런 데가 어떤 덴데.”

  “남자 많은 곳 말입니다. 누가 지운씨 보고 반하면 어쩝니까.”

  “안 그래도 방금 그쪽이 지랄 한 덕분에 다시는 못 갈 것 같으니까, 입 좀 닫아.”

  멀끔하게 차려입은 미남이 잔뜩 술에 전 남자의 발을 잡아 키스하며, 발가락 사이를 핥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기서 도발한 자신도 미쳤고, 응한 저 남자도 미쳤고, 둘 다 미쳤다. 미쳤어. 여지운은 미쳤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고, 선연홍은 조금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잘 됐네요. 다음에는 건즈앤로즈에서 해볼까요? 내가 미친 놈인 걸 알면 아무도 지운씨 넘보지 못하겠지요. 그걸 위해서라면 발가락을 핥는 것 쯤은 굴욕적인 것도 아닙니다.”  

  “닥치라고 했지, 머리 울리니까.”

  무작정 걷던 여지운이 오래지 않아 벤치를 발견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 아니, 그보다 더 안쪽의 뇌가 울리는 것 같았다. 눈앞이 빙글 돌고, 물체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했다. 

  “이 추운 날씨에, 겉옷도 안 입고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선연홍이 제 코트를 벗어 어지운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늘어진 트레이닝 복 위로 빳빳한 코트가 내려앉았다.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작업실에 갔었을 때도 문을 열어 놓으라는 말에 되돌아와서 옷을 벗어 주고 갔다. 춥지 않았는데. 그때도, 지금도. 

  선연홍의 시선이 여지운의 발에 향했다. 삼선 슬리퍼 아래로 툭 비어져 나온 발가락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발가락, 맛있었지. 고개를 기울인 채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발가락 빨지 마, 새끼야.”

  선연홍이 여지운의 맨발을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발등과 살짝 곱아든 발가락을 쓰다듬었다. 

  “아쉽지만, 지운씨가 그렇게 말하니 안 하겠습니다.”

  숙인 얼굴, 검은 머리카락 위에는 가로등 불빛 위태롭게 내려앉았다. 

  여기서 반지라도 꺼내면 완전히 프러포즈겠네. 쓸모없고 막연한 생각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반지 대신 머플러가 발에 감겼다. 발갛게 얼었던 발등은 이제 부드러운 머플러에 둘둘 말렸다. 여지운의 발을 꼼꼼하게 싸맨 선연홍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졸리고 피곤해서 정신이 멍한데도 그 모습은 유난히 확대돼 보였다. 하얀 얼굴과 빨간 혀. 단정한 얼굴로 묘한 야릇함이 어려 있다. 선연홍은 여지운에게 흥분된 모습이 어쩌고, 섹시가 어쩌고 하지만 사실 예쁘장한 쪽은 선연홍이었다. 확실히. 휘어진 눈꼬리는 마치 고양이의 발바닥처럼 말랑거렸다.

  “어제, 회사에서…….”

  서로의 실체, 혹은 밑바닥까지 봤다고 해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선연홍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것은 팀장 여지운이었다. 그에게 막무가내로 굴거나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것은 차라리 상관없었다. 하지만 회사일 때문에 우울해하고 침울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그건 패배자와 같았으니까.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이 저절로 열렸다. 알코올에 잔뜩 전 머리는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입은 마음대로 지껄였다. 마치 학교에서 싸우고 부모에게 이르는 중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정작 부모에게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음에도.

  마음 한구석에선 지금 뭐 하고 있는지 거지? 싶으면서도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었다. 이번 공모전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짜증나고 예민했는지와 또, 또……. 어제 그 진상 새끼 때문에 얼마나 분노했고 화가 났는지까지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연홍의 얼굴은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굳었다. 

  설마, 선연홍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버지, 어머니처럼 말이지. 

  “그 고객이라는 남자.”

  그 지랄 같은 성질 못 이겨서 결국에는 사고 쳤구나, 라고 말하려나? 그럼 너나 잘하라고 되받아쳐야겠다. 

  “남자, 뭐?”

  “그 남자 지운씨한테 손댔습니까?”

  “뭐?”

  “손, 댔냐고 묻고 있습니다. 혹시, 때렸습니까?” 

  어……? 순간 선연홍이 뭐라 말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그의 기운은 더욱 험악해졌다. 두꺼운 코트 아래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여지운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지나칠 정도로 딱딱하고 사나웠다.

  왜 이래…….

  “뭔, 소리합니까. 내가 어디서 맞을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럼 때렸습니까?”

  “예?” 

  어쩐지 안심했다는 얼굴을 하던 선연홍이 이번에는 다르게 물었다. 험한 기색이 사라진 얼굴은 갓 쪄낸 백설기처럼 촉촉하고 보드라웠다. 

  “그 남자 때렸습니까? 안 되는데 여지운씨. 아무나 때리고 다니지 마세요. 흥분하고 날뛰는 모습은 제게만 보여주세요.” 

  “이, 미친 새끼야!” 

  그렇게 원하면 맞아라. 여지운은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 개소리를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의 팔이 제대로 뻗어질 리 없었다. 선연홍은 제게 다가오는 손을 가볍게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손등에 쪽 뽀뽀를 하고 내렸다.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지운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선연홍이 제 무릎 위에 놓인 여지운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간지러운 감각이 여지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마도 술을 먹어서, 그래서……. 

  “아, 그리고 그 진상이라는 남자 누군지 알려 주, 음…….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죠.”

  “……? 뭐라고요?”

  “그만 갑시다. 데려다 줄게요.”

  후. 숨과 함께 섞인 것은 여전한 술 냄새였다. 손을 내려다보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그래서 자신의 시야가 흔들리기 때문이고, 몸이 휘청대고 있어서 일 것이다. 마음 같은 것이 아니라.  

  “괜찮습니까? 겨우 그 정도 일 가지고 왜 술을 마셔요.”

  “그 정도? 내 일이 당신한테는 그냥 그 정도 일입니까.”

  평소에는 생각도 안 해본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남의 일인데 당연히 그 정도 일이지. 반대로 선연홍이 제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따위 일이라고 대답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짜증이 났다. 그 말에 선연홍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발을 감싼 머플러를 풀어내던 여지운은 생각처럼 잘되지 않자 때려치웠다. 

  “그게 아니라. 그 일은 여지운씨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 힘들어할 가치도 없어요. 잘한 일입니다. 잘한 일에는 후회할 필요 없어요.” 

  “……남의 일이라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겁니다. 회사 때려치우면……, 남은 대출금.”

  분명 조금 전에는 내 일이 그 정도밖에 안 되냐며 난리 쳤으면서 지금은 남의 일이라서 쉽게 얘기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지만 선연홍은 이번에도 수긍했다.

  “그럼 행동으로 보이면 됩니까? 일단 지갑부터 드려요?”

  “지, 랄도 풍작입니다.”

  “가뭄보단 풍작이 좋지요.”

  아 진짜 짜증 나는 새끼, 사람이 너무 어이없다 보면 웃음이 나온다. 하, 하하……. 썩은 미소를 짓자 선연홍이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 차이도 그렇게 나지 않는데, 또 어린아이 대하듯 한다.

  “손, 치워.”

  “어쨌든,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그건 지운씨가 더 잘 알잖습니까.”

  선연홍의 눈동자 안에 번져 있는 것은 여지운에 대한 걱정이 전부였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잘못이 없다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정상적으로 굴어서…….” 

  헛손질 하는 여지운을 대신해 머플러를 푼 선연홍이 여지운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넉넉하고 단단한 손 두 개가 서로 겹쳐졌다. 노란 가로등 아래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은 마치 춤추기 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집에 가야겠다.”

  “네. 가요. 데려다 주겠습니다.”

  짤깍. 조수석에 탄 여지운의 안전띠를 매준 선연홍이 “자, 됐습니다. 잘했어요.”하고 말했다. 

  한 것도 없는데 뭘 잘했다는 거냐. 속으로 생각했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아직 술기운 있으니까 히터는 안 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틀지 마십쇼.”

  “그럼 담요 드릴까요? 바람이 차갑습니다.”

  “아니, 그냥 출발.”

  “예.”

  여지운은 백미러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오른 남자가 비쳤다. 저거 나 맞냐? 상태가 왜 저리 후줄근해.

  “졸립니까?”

  “그냥 닥치고 출발이나 해주시죠.”

  “예. 그럼 닥치고 출발하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게 조심해요.”

  차는 천천히 달렸다. 열어 놓은 창 너머로 건물 불빛들이 스쳐 지나갔다. 

  “도착했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눈을 감고 있던 여지운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몸도 머릿속도 물 위를 부유하는 것처럼 울렁댔다.

  부드럽게 달리다가 조용히 멈춘 차는 시동을 끄지 않아 여전히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 위로 간지러운 숨결이 훅 느껴졌다. 털이 쭈뼛 서고 목덜미가 간지러워지는 이것은 아마도 시선이겠지. 지금 고개를 든다면 저를 보고 있는 선연홍과 눈이 마주칠 것이다. 여지운은 눈을 뜨는 대신 턱을 조금 더 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한껏 싸늘해진 공기 위로 뜨거운 숨이 달라붙었다. 어쩐지 침이 고이게 하는 단내가 술 냄새를 덮고 스며들었다. 따끔거릴 정도로 집요한 시선은 꽤 오래 이어지다가 몸 위로 부드러운 것이 덮이면서 끝났다. 차가운 살갗 위로 닿은 것은 닿은 것은 키스가 아닌 담요였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술 냄새, 고기 냄새가 밴 머리카락이 손바닥 아래에 감겨 흔들렸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지운씨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설사 잘한 일이 아니라도 뭐 어떻습니까?”

  “…….”

  “결과가 어떻더라도 본인이 납득한 일이라면 지운씨에게 아무것도, 아무 고통도, 상처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잘했습니다.” 

  공과 사, 일상과 사회. 그 선을 철저하게 지켰다. 밖에서는 모럴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막 살아도 팀장 여지운은 능력 있고 믿음직했다. 그 부모님 밑에서 형과 비교당하며 주운 습득력이었다. 그렇게 거부하고 진절머리 냈음에도 20년 가까이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의 시선 따위야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하는 생각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항상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것은 타인의 인정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었다. 

  아주 유치하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일탈은 자유를 줬고, 해방시켰으며 동시에 벽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요즘 그는 물에 잔뜩 녹은 휴지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손으로 뭉개면 바로 찢어질 것 같은 눅눅한 상태가 계속됐다. 그래도 회사에서는 잘하고 있으니까 괜찮다는 생각은 최근 있었던 일로 완전히 무너졌다.  

  주도권을 움켜쥐고 흔드는 것도 버리는 것도 모두 쉽게 했는데 요즘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사람 사이에서 갑이 되는 건 쉬웠다. 진심이 되지 않아서, 상대방보다 더 깊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관계의 우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 

  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이제 담요 위를 토닥였다. 뭐야, 진짜. 왜 이러는 건데? 평소처럼 좆을 잡고 협박하며 좆같이 굴든가, 미친 소리를 지껄였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그리 질색을 해도 정신 나간 것처럼 굴더니, 오늘 같은 날에는 왜 이렇게 정상인처럼 하는지 모르겠다. 

  하필, 이럴 때.

  스트레스와 술에 잔뜩 절여진 의식은 빨리 가라앉았다. 잔뜩 긴장한 몸뚱이와 어색하게 내뱉어지던 숨이 낮아지며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여지운의 머리를 쓰다듬던 선연홍은 그제야 상체를 일으켰다. 조수석 의자를 딛고 덮치듯이 올라탔다.

  여지운의 턱선을 따라 핥아 내리던 혀는 마지막으로 열이 올라 따끈한 귓불을 깨물었다. 새빨개질 정도로 오랫동안 빨던 선연홍이 입맛을 한 번 다신 뒤, 여지운의 턱을 들고 키스를 했다. 음……. 과도하게 들린 목이 불편했는지 여지운이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지만 집요하게 쫓았다. 앓는 소리들마저 모두 빨아 목구멍으로 넘겼다. 콧날이 스치고 속눈썹이 닿을 정도로 밀착됐다. 손을 더듬어 창문을 닫고 히터를 틀자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처덕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물고 빠는 키스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더운 숨, 젖은 타액과 잔뜩 달아오른 공기, 그리고 몸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술기운에 여지운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하지만 채 흐르기도 전에 선연홍의 혀가 핥았다. 

  “불편해 보이네.”

  정작 불편할 정도로 턱을 꽉 움켜쥔 선연홍이 말했다. 중얼거림에 가까울 정도로 낮게 속삭여지는 말에 맞닿은 살덩이들이 서로 맞물리며 움직였다. 좀 전 여지운에게 덮어줬던 담요는 격렬한 키스 덕분에 흐트러져 있었다. 선연홍의 시선이 드러난 목덜미로 향했다.

  “음.”

  잠시 고민하던 선연홍은 결국 조수석에서 내려왔다. 그제야 해방된 여지운이 편한 숨을 내뱉었다. 

  “잘 자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여지운을 잡아먹을 듯이 거칠게 키스하던 남자는 순한 양의 얼굴을 한 채 뺨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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