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눈을 떠보니 하늘이 있었다. 새카만 밤하늘에서 별 같은 흰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별 같은, 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별이 맞았다.
왜 별이 보이는 걸까. 설마 길거리에서 잤나? 코끝에 싸늘한 것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듯 시렸다. 코를 훌쩍이며 목을 조금 움츠리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게 뭐야, 눈동자만을 굴려 내려다보니 담요와 그 위에 코트가 덮여있었다.
뭐지? 고개를 살짝 돌리자 별빛이 쏟아지던 하늘이 사라지고 꽉 닫힌 캄캄한 천장이 보였다. 여지운은 그제야 자신이 자동차 조수석에 모로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이 쏟아진다고 생각한 것은 차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아서였다. 아직 새벽인 듯 거대한 어둠이 세상을 덮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에 달이 걸려 있었다. 툭 치면 그대로 바스러질 것처럼 가느다랗다.
여지운의 시선 끝에 어릿어릿 흩어지는 흰 연기가 걸렸다. 마치 검은 물 안에 흰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그 선명함 끝에는 선연홍이 서 있었다. 겉옷 하나 없이 셔츠 하나만 입은 채 차 문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언뜻 보이는 옆모습은 밤 아래에서 희게 빛났다. 손가락 반 마디 정도로 살짝 벌어진 입 틈에서 입김이 쏟아졌다.
“…….”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았던 남자는 여지운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창틀에 팔을 얹고 얼굴을 숙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코끝에는 밤도 겨울도 잔뜩 묻어 있었다.
“잘 잤습니까?”
고요한 침묵을 깬 것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내가 왜, 여기……. 으, 머리야.”
목은 깔깔했고 속은 울렁거렸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여기, 물.”
선연홍이 뚜껑을 딴 물을 건네줬다. 차가운 것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정신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
“좀 괜찮습니까? 집 안에 모셔 드리려고 했는데 비밀번호 바꿨더군요. 호텔로 갈까 하다가 별빛이 너무 예뻐서 잠시 있었습니다. 금방 닫을 생각이었는데 깨웠나 봅니다.”
여지운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언제 이런 식으로 밤을 본 적이 있던가. 여지운에게 밤이란 야근으로 지친 하루의 끝, 혹은 섹스를 위한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예쁘죠? 다음엔 별 보러 갈까요? 제 소유의 건물 중 별이 아주 잘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망원경도 있어서 날 좋을 때 가면, 하늘이 쏟아지는 것 같…….”
“……난 원래 술 마시고 나면 이온음료를 마십니다.”
그러니까 좀 사와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연홍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이온음료. 다른 필요한 건 없습니까?”
“없습니다.”
“알았겠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좀 쉬고 있어요.”
셔츠만 입은 선연홍은 추워 보였고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손끝 역시 얼어붙어 있었다. 손등에 붉은 반점이 얼기설기 번진 것으로 봐서 꽤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 같다.
열어 놓은 창으로 제법 강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팔락 떠올랐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다시 내려앉은 그 순간, 여지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로 차 문을 열고 튀었다.
국내에 몇 대 없는 억대 외제차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는 자각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틈도 없이 계단을 서너 개 씩 밟고 올라갔다.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겨우 뱉어내며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내동댕이치다시피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방문까지 잠근 뒤 곧바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뭐냐고, 씨발.”
이번에야 말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까치집이 될 정도로 헝클이다가 소리를 질렀다.
“일러바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야? 그 새끼가 뭐라고 말 했냐고!”
진짜 무슨 갓 입학한 초등학생도 아니고 자신의 행동이 옳았느냐 물은 것 자체가 어이없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서 맹렬하게 헛발질을 했다. 그러고도 얼굴이 화끈거려 벌떡 일어나 베개 마구 주먹질을 하다가 매트리스에 내려쳤다. 그 언제와 흡사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숨이 차서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 돼서야 침대에 벌렁 누웠다.
“미쳤냐. 진짜 좆같다.”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여지운이 얼떨결에 선연홍의 코트를 집어 왔다는 것을 깨닫고 진저리치듯 바닥으로 내던졌다.
진짜, 요새 왜 이러냐. 뭐가 문젠데? 회사, 일, 연애, 섹스, 쾌락. 가볍지만 그래서 더 편하고 좋았던 일상들이 변화하는 느낌은 확실히 유쾌하진 않았다.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시각 이온음료와 숙취 음료를 사온 선연홍은 텅 빈 차를 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창문과 차 문이 보란 듯이 열려 있는 걸 보니 엿 먹어 보라는 심산이든가, 아니면 문을 닫지도 못할 만큼 당황했든가.
불 꺼진 집을 올려보는 선연홍의 표정은 미묘했다.
* * *
귓가를 파고드는 벨 소리에 머릿속 짜증도 함께 울렸다.
“아, 진짜……. 어느 새끼야?”
시트 밖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지만 걸리는 것은 없었다. 귀를 파고들던 벨 소리가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시끄러워.” 결국, 짜증 섞인 소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고 속이고, 울렁거리지 않은 곳에 없었다.
“아, 머리야.”
쑤셔오는 이마를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사이에도 벨 소리는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와, 무슨 벨 소리가 이렇게 크냐? 구겨진 얼굴로 소리를 쫓아가다가 침대 구석에서 휴대폰을 발견했다. 액정 위에 떠오른 번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가로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늦은 오후, 당당한 자태의 여지운이 회사 문을 열었다. 반듯하고 곧은 자세와 달리 얼굴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사내에서 유명했던 여지운은 그 사건 이후로 더더욱 유명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붙는 시선은 것에 위축될 만도 했지만 적어도 그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쩌라고?’라는 얼굴로 무시했다. 사무실에 들르자 팀원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괜찮으냐고 묻는 이대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팀원들을 둘러봤다. 정아영은 보이지 않았다.
“박주임. 정아영씨 어디 갔습니까?”
“아, 팀장님. 아영씨 병가 냈어요.”
“많이 아프면 어쩔 수 없지만 견딜 만 하다면 내일 나오라고 하세요.”
“예? 팀장님…….”
“뭐라고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된 건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모두들 여지운이 잘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사무실 분위기는 침울했다. 본인 역시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답지 않게 우울했는데 이 지경까지 되자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속으론 이미 퇴직금과 실업급여 계산까지 마친 뒤다.
“일단 부장실에 다녀올 테니 정아영씨한테 연락해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공모전은 불참이었고 당연한 절차로 탈락했다. 모형 완성 직후 사진이라도 찍어 놨으면 포트폴리오에라도 추가했을 텐데.
“여지운입니다.”
“아, 여팀장. 잘 쉬었나?”
사흘 만에 보는 부장 새끼는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라는 말에 대꾸도 안 했다. 자숙이니 뭐니 지랄할 땐 언제고 다시 부르는 건 또 뭐지.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마음고생 많았나 봐. 그러니까 성질 좀 죽이래도.”
“하실 말씀이 뭡니까?”
숙취와 어젯밤의 추태로 헬쓱 해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측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쯧쯧, 혀를 차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뚱한 표정의 여지운을 데리고 간 곳은 사장실이었다. 사실 일개 팀장이 사장실에 오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겠는가? 그건 여지운도 마찬가지였다. 신년회 때 우수 사원으로 포상을 받긴 했지만 그건 공식적인 자리였지 지금처럼 개인적이진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퇴사의 기운이 더더욱 짙게 느껴졌다.
퇴사라……. 아무리 한 치 앞도 모른다고는 하지만, 인생 참 좆같다. 하지만 좆은, 나쁜 게 아니지. 이런 개소리가 떠오르는 걸 보면 확실히 지금 정상은 아닌 듯했다.
“여팀장. 말 잘 해.”
“소신 발언하겠습니다.”
말 잘하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짐작 갔다. 사장님 앞에서 잘못 했다고 납작 엎드리고 그 진상 고객에게도 똑같이 하라는 뜻이겠지.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사장님, 여팀장 데려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촌스러운 마호가니 책상이 보였다. 오랜만에 오는 사장실은 여전히 노티란 노티는 다 끌어 온 것처럼 칙칙했다. 아무리 취향이라지만 건축 디자인 사장실이 이 꼬라지라니.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싹 쓸어 엎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추며 사장에게 인사했다.
“3팀 팀장, 여지운입니다.”
“어서 앉게.”
사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손짓을 했다. ‘네가 회사에 끼친 손해가 얼마인지 아느냐, 당장 고객님에게 눈물의 사죄를 하라.’며 난리 칠 줄 알았는데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회장님. 여지운 팀장 왔습니다.”
회장님? 이상한 인테리어에 온통 신경을 빼앗겨 잘 몰랐는데 사장실에는 사장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여지운이 얼굴을 찡그리는 사이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굽은 허리에 성성한 백발, 얼굴에 드문드문 검버섯이 핀 남자는 언뜻 보기에는 그냥 기력 달리는 노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얼마나 날카롭고 정정한지 모른다. 그 날카롭고 정정한 성격의 피해자가 바로 여지운이었다.
“오랜만이네.”
“안녕하십니까?”
여지운이 노인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하나, 둘, 셋. 속으로 셋까지 센 뒤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 앉으십시오. 여팀장 자네도 앉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사장이 원래 저런 얼굴인지 알 정도로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반대로 여지운의 얼굴은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저 노인을 선택할 것이다. 연달아 3건이나 일을 맡겨준 덕분에 팀장 자리까지 고속승진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찍히면 등쌀을 견디다 못해 퇴사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깐깐한 노인이었다. 사측에야 큰돈을 팍팍 쓰는 중요고객이지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싸가지 없는 얼굴이 많이 죽은 것 같구먼.”
“하하, 회장님. 점점 노안이 심해지셔서 어쩝니까? 보약 한 채 해 드셔야겠습니다.”
“말하는 꼴을 보니 여전하네.”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합니까?”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미안하네.”
“예?”
너무 거두절미해서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에 곧바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저 노인이 ‘미안하다.’하고 내뱉을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뒤져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가게 리모델링 해준 게 작년 말인데……. 그때 너무 괴롭게 해서 미안하다는 뜻인가. 하지만 이제껏 겪은 것으로 봐서 절대 그런 걸로 미안해할 사람이 아니다.
여지운이 저 노인을 맡은 것도 그 당시 팀장이 급작스럽게 그만두어서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이어받았었다. 그 뒤 몇 번의 퇴짜와 수정안이 오갔는지 모르겠다. 스무 번까지 세고 그만뒀으니까. 한 달 가까이 밤을 새다시피 해 겨우 통과했을 때 ‘보기보다 근성 있네.’ 하는 말이 돌아왔다. 여지운은 속으로 쌍욕을 내뱉으며 웃었다.
‘아니요. 실력입니다.’
노인이 얼마나 부자고 위상이 어쨌던가는 관심 딱히 관심 없었다. 저 할배를 생각하느니 젊고 잘생긴 애들 엉덩이 생각하는 게 심신 안정에 훨씬 더 도움이 됐으니까.
“대체 무슨 얘깁니까?”
노인이 쥐고 있던 지팡이로 여지운의 구둣발을 툭툭 쳤다. 묘하게 사람 성질 건드는 건 여전하네.
“우리 둘째가 어제 여기 와서 행패 부렸다고 하던데, 아닌가?”
“예?”
행패? 행패라는 단어를 듣자 며칠 전 일이 번뜩 떠올랐다. 뒤이어 ‘우리 둘째’라는 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우리 둘째……라면 혹시 며칠 전에 깽판 쳤던 그 개진상이 회장님 아드님입니까?”
가감 없는 단어에 노인은 조금 불편한 얼굴을 했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로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란이 있었는지 어제 알았네.”
“대체 이유가 뭐랍니까? 왜 남의 사무실에 와서 지랄……, 그 난리를 친 겁니까?”
“다른 일이 있어 방문 했다가 그 사달이 벌어진 모양이네.”
“…….”
여지운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얼마 전의 그 남자가 그 나이 처먹고 우리 아버지에게 이르니 마니 지랄했던 이유를 알겠다. 저 할배는 사장도 굽실거릴 정도로 큰 고객님이었으니까.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기어코 고자질했단 뜻인데.
“아드님 덕분에 회장님께 사과도 다 받아 보네요. 그런데.”
허풍을 섞어 가며 여지운에 관해 욕을 했을 텐데도 이렇게 사과를 한다는 것은 그 남자의 평소 행실이 어땠는지 짐작 가게 했다. 혹은 회장님께서 제 아들에게마저 팍팍하게 구신다거나.
“사과는 그 고객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아들놈의 멱살을 잡은 사람이 자네만 아니었다면, 이리 찾아오지도 않았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은 그 동안 겪어온 풍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지금 눈앞의 노인은 여지운이 아니었다면, 혹은 자신이 여지운을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면 사과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제 아들의 잘못도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웠을 테지. 그러니 적당히 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심기 불편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에서 그만 접기로 했다. 부장이고 사장이고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만 뻣뻣하게 굴라 이거지.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공모전 출품작이 반나절도 안 돼서 망가졌습니다.”
덤덤한 얼굴로 툭 내뱉었지만, 속내는 책임져라, 내지는 피해 보상을 하라는 뜻이었다. 여지운이 미끼를 살짝 던졌지만, 세월의 견딘 물고기는 노련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자네가 아들놈 멱살을 먼저 잡았다고 들었네만?”
“……부득이하게 그렇게 됐지만, 그 아드님은 우리 쪽 직원을 무릎 꿇리고 있었습니다. 정당방위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직원이 내 아들 멱살을 잡아야지.”
한마디도 안지네. 영감탱이.
그 진상 때문에 징계를 당하고, 화가 난 나머지 술을 마시고, 선연홍 불러 추태를 부린 걸 생각하면 정신적 피해 보상을 받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인은 지문이 다 닳아 뭉툭한 손으로 커피를 마셨다. 취향에 맞지 않았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이컵을 탁탁 쳤다. 눈치 빠른 부장이 여지운을 힐끔 봤다. 모르는 척 눈을 굴렸지만 결국 “여팀장.”하고 꼭 집어 부르자 더는 외면 할 수 없었다.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똥 씹은 표정을 억지웃음으로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노인의 취향은 믹스 커피 한 봉, 하고 반을 더. 물은 조금 적어서 빡빡하고 아주 달게.
“고맙네.”
호로록, 사무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그 탓에 커피가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소파에 세워 두었던 지팡이가 바닥으로 기울어졌고, 여지운이 잡아서 제자리에 놔두었다.
“어쨌거나, 내가 이리 온 것은……. 사측에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서네.”
여지운을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 노인에게 향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진다면 살아나 봤자 어차피 지옥일 텐데 괴로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너진 하늘 그 위가 지옥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이를테면 얼마 전, 차 너머로 봤던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한 우주라면 어떨까.
노인은 은퇴 후 여생을 보낼 저택을 지을 예정이라고 했다. 시공 일자는 내년 후반기쯤, 부지 말고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으니 회사에 모두 일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여지운이 맡아 주기를 바랐다. 겨우 팀장 직급인 서른 초반의 젊은 설계자에게.
디자인부터, 시공사 선정까지 분명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것이다. 납득 가능한 금액이면 얼마가 들어가도 된다고 하니, 그것은 곧 회사의 이익과 직결됐다. 하지만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아주 선심 쓰듯 말했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노인은 자신에게 맡겼을 것이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공간 활용이나 구조, 디자인 같은 것들은 상당 부분 일치했으니까. 저 능구렁이 같은 쭈구렁탱이 할배와 자신이 비슷한 취향이라고 생각하니 찜찜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선연홍과도 꽤 취향이 잘 맞았다. 그 남자와 함께 다닌 전시회, 영화, 뮤지컬, 음식점…….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그림마저도 좋았다. 그 좆같은 춘화도를 제외하면. 아니, 자신의 얼굴만 아니었다면 그것 역시 마음에 들어 했을 테지.
그 미친 새끼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 돋았다. 아주 간지럽고, 숨 막히는 소름이.
“여팀장?”
“아, 예.”
“회장님 계시는데 왜 그리 넋을 빼놓고 있나?”
아……. 또다. 최근 이런 식으로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았는데 그 끝은 항상 같은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어떤 느낌의 건물을 좋아하실까 생각하느라.”
사실 건물 따위야 전혀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능숙하게 내뱉었다. 매끈한 얼굴에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보십시오, 회장님 우리 여팀장이 이렇게 성실합니다.”
우리 여팀장은 무슨. 정작 노인은 가만히 있는데 사장과 부장이 더 흥분하며 여지운을 마구잡이로 칭찬했다.
술 먹고 난리 치면서 진상 부린 게 바로 어젠데 이렇게 허무하게 해결이 되자 얼떨떨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게 다 자신이 잘나서,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겠는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선연홍에게 연락했다. 다 내가 잘 나서 해결됐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띵.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여지운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타요?”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직원이 이상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아니, 대체 선연홍에게 왜?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연락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자랑하듯이 문자를 보낸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고 어이없었다. 뭐지. 순간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흠칫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에게서 답이 와 있었다.
-잘했어요.
그러니까, 왜냐고.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탁상달력을 낚아채듯 잡은 여지운이 날짜를 셌다.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려던 팀원들은 심상치 않은 모습에 궁금증을 눌러 삼켰다. 그러나 당사자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손끝이 달력 숫자를 훑어갔다.
“…….”
선연홍과 약속했던 두 달까지는 앞으로 3주가량 남아 있었다.
* * *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도착한 여지운이 곧바로 샤워했다. 살갗 위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며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옷장 앞에 서서 일렬로 걸린 옷들을 손으로 더듬었지만 도통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것저것 꺼내 보다가 결국 짙은 초록색 니트와 검은 면바지를 입었다. 신발장 앞에 붙은 거울에는 뚱한 표정의 남자가 비쳤다. 손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나왔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선연홍에게서 연락이 왔다. “백선우를 만나러 가고 있다.”는 말에 잠시 침묵하던 선연홍은 [백선우, 백선우.] 이름을 두어번 내뱉었다.
[속은 괜찮습니까? 어제 많이 마셔서 술 냄새만 맡아도 안 좋을 텐데요.]
“괜찮으니까 가는 거 아닙니까?”
[일이 잘 해결 되어서 다행입니다. 기념으로 지운씨와 저녁이라도 할까 했는데 아쉽게 오늘은 저도 선약이 있네요. 근데 혼자 바에 있으면 지루하지 않겠습니까]
선연홍은 유난히 ‘혼자’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집에 갈 때 연락해요. 데리러 갈게요.]하고 말했다.
“…….”
건즈앤로즈라는 말 대신 백선우의 이름을 내뱉은 건 무슨 이유였을까? 이것은 마치 남자를 낚으러 가는 게 아니라 백선우와 할 말이 있다는 변명, 혹은 보고에 가깝지 않은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대체 왜?’를 중얼거리며 가게 문을 열었다. 컵을 닦고 있던 백선우가 여지운을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게 누구야? 지운씨 아니에요?”
“오랜만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마지막으로 들렸을 때 ‘그 일’이 일어났었다. 따지고 보면 아직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수많은 시선도, 무릎에 발기했다는 수치도 없었다. 그저 아래의 열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만이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애인이랑 논다고 바빴나 보네? 근데, 오늘도 혼자 온 거예요? 항상 여지운씨 먼저 오고 함께 방문 한 건 한 번도 못 봤네요.”
“약속이 있다고 합니다.”
“아…….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헤어진 건 아닌가 봐요.”
선연홍과의 내기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이었으니 굳이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고 소문이 따라다니는 것도 좋았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바늘 정도로 가느다란 소문도 입을 거치면 쇠못처럼 변했다. 사람들의 입을 거친 소문이 다시 되돌아올 즈음에는 바늘이 아니라 소처럼 아예 다른 형태일 것이다. 전혀, 상상도 못한.
“지난달에 새로 들어온 맥주 있는데 그거 줘요? 아직 이 일대에 안 깔려서 여기서 밖에 못 마셔요.”
“아니, 탄산수로 주십쇼.”
“네? 탄산수?”
의문이 어린 얼굴의 백선우가 “탄산수? 진짜 탄산수요?”하고 되묻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과음해서 오늘은 자제 좀 하려고요.”
“음, 잠시만요.”
고개를 끄덕인 백선우가 차가운 탄산수와 잘게 찢긴 육포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건 주문 안 했는데요?”하고 물으니 살짝 웃으며 “서비스입니다.”하는 답이 돌아왔다.
여지운이 건즈앤로즈에 발을 들인지도 올해로 5년째다. 지금 회사에 취직하면서 드물어지긴 했지만, 초반에는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다. 월급이나 보너스를 받으면 꽤 고가의 양주도 시켰으니 그때 킵 해둔 술이 지금도 한 손을 족히 넘을 것이다. 여지운이 유명해지면서 그를 보러 온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다 보니 과일 안주 정도는 서비스로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백선우는 따라 웃으면서 “과일 안줏값 내면 줄게요.”하고 말했다. 그 독한 백선우가 말하지 않은 서비스를 내어 주자 기쁘다기보다 찜찜했다.
“뭡니까? 가게 그만둬요?”
“아니요. 돌아온 탕아를 위한 선물이랄까?”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다 말았다.
육포를 씹으며 둘러본바 안은 늘 그렇듯 북적북적했다.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참 좋을 때다 싶었다. 자신도 그 언젠가는 내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놀았던 것 같은데 어쩐지 아주 먼일처럼 느껴졌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쭈그렁바가지도 아니고 웬 청승이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낸 여지운이 백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뭐 재미있는 소식 없습니까?”
“재미있는 소식이요?”
다른 손님에게 술을 내 주고 돌아온 백선우가 여지운의 말을 따라 했다. 둥둥. 시끄러운 음악 소리 덕분에 목소리를 키웠다.
“뭐, 뉴 페이스라든가, 치정이라든가. 싸움. 아니면 뭐 더러운 소문 같은 거?”
“오랜만에 왔는데도 여전하네요.”
참 너도 너다. 하는 뜻이 담긴 그 말에 여지운이 킬킬대며 웃었다. 과거의 여지운은 본인이 말하는 그 치정이나 더러운 소문의 중심에 서 있었다. 여지운의 애인이 언제 바뀌나, 어떤 식으로 난리가 나는지 등으로 내기 판이 열릴 지경이었다. 판돈으로 금전뿐 아니라 물건에, 원나잇 같은 것도 걸릴 정도라 은근히 기다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선연홍과 때문에 섹파는커녕 다른 사람 자체를 만나지 못했으니 소문이랄 것도 없었다.
“없어요?”
이쪽은 두 다리만 건너도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판이 좁았다. 직접적인 친분은 없더라도 이름만 대면 “아! 걔?” 하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까. 그 탓에 새로운 사람이나 사건 같은 것이 있으면 금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바에 들르지 못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사람이 부대끼는 일에는 온갖 소문과 지저분한 사건이 발생하기 마련이니까.
여지운의 말을 들은 백선우가 묘한 얼굴을 했다. 어쩐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음과 안타까움. 전혀 반대되는 두 감정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다. 주변 사람에게는 상당히, 아주 재미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아주 더러울 소문.
역시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을 리가 없지. 누군지는 몰라도 안 됐네. 제법 흥미가 돋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여지운의 어깨를 탁. 잡았다.
백선우의 시선이 어깨너머로 향하는 것을 보며, 여지운 역시 뒤를 돌았다. 선연홍이 아닐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정선주.”
여지운보다 두 살이 많은 정선주는 이쪽에서 나름 인지도가 인간이었다. 190cm에 가까운 큰 키에 덩치도 커서 곰 같은 스타일을 선호하 이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다. 물론 여지운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건즈앤로즈 사람들이면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1년 전, 정선주가 결혼과 동시에 외국으로 떠난 뒤 잊혀졌다.
그는 전형적인 땅 부잣집 아들로 여지운과 같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왔다. 게이바에서 처음 보고 놀란 것도 잠시, 곧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포지션이 겹치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 역시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바텀 한 명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 적도 여러 번이었고, 어제의 정선주 애인이 오늘 여지운 섹파일 때도,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진짜 짜증 난다, 꼴도 보기도 싫다는 생각을 할 즈음 정선주가 돌연 결혼했다. 3대 독자에다가 그 부모가 워낙 유난이라는 건 이미 알았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그 부모에 그 자식보다 정선주와 함께 살게 된 여자가 불쌍했다. 근데 미국에 간 줄 알았더니 여긴 웬일이지?
“손 치워.”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싸늘한 손길에 정선주가 피식 웃었다.
“여전하네, 여지운.”
백선우도 정선주도 모두 여지운을 향해 여전하다고 말했다. 정작 자신은 지금 너무 다른 것 같아서 불안한데.
이것도 다 선연……. 그만 생각하자.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상황에서 재수 없는 면상까지 보고 있으니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새 신랑님. 집에 기다리는 사람 있을 텐데 이제 여기 오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다혈질인 새끼가 노골적인 비아냥에도 반응이 없었다.
“나 이혼했어. 몰랐어?”
“이혼하든 말든 관심 없거든? 그래도 그 여자는 다행이네. 지금이라도 지옥 탈출해서.”
“그렇지 않아도 위자료로 왕창 뜯겼다. 사실 그것 때문에 우리 엄마 난리야. 벌써 재혼, 재혼 노래를 부르는데 도저히 못 참아서 오피스텔 얻어 나왔다. 근데, 너 전화번호 바꿨냐?”
“관심 좀 꺼주라.”
“형 안 보고 싶었냐?”
뭐? 미국 물 마시고 오더니 배탈이라도 났나. 보고 싶긴 개뿔. 안 그래도 재수 없는 새끼가 느끼하기까지 하네. 그동안 재수 없는 낯짝 안 봐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다. 정선주가 한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건즈앤로즈에는 진작 발길을 끊었을 것이다.
“형? 네가 왜 내 형이냐, 있는 형 새끼도 없애고 싶은 마당에 지랄하네. 면상 보니 토할 것 같다. 제발 좀 꺼져라.”
내내 여유롭던 정선주는 토하는 시늉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는 여지운의 얼굴, 목, 어깨와 허벅지까지 차례대로 보다가 탄산수를 뺏어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졸지에 손안의 것을 강탈당한 여지운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이 새끼가? 뭐 하냐, 진짜?”
“야, 뭐냐? 훼이크인 줄 알았더니 진짜네. 천하의 여지운이 탄산수를 다 처마셔?”
“내가 뭘 처마시든지 무슨 상관이세요. 미국물이 아니라 기름이라도 마셨나, 왜 이렇게 질척하게 들러붙어?”
“아기새에게 상냥하게 구는 건 당연한 거지.”
“뭐?”
이게 뭔 개소리야?
“아기새?”
동성 간 육체 관계에서 박는 사람과 박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은 여러 개가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로는 탑과 바텀 혹은 대짜와 마짜가 있다. 각자 나름 생각해서 부르기도 했는데 여지운은 딱히 지칭하는 게 없었고 정선주는 아기새라고 불렀다. 이런 게 안 맞는다는 거다. 아기새가 뭐냐, 아기새가? 존나 소름 돋게.
하지만 정선주가 아기새라고 하든지 비둘기, 갈매기라고 하든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야. 개소리 좀 작작해. 상대하기도 지친다. 그냥 너 볼일이나 봐.”
“왜 한 번 깔리고 나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냐?”
휙휙. 여지운이 손을 내 저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 왔다. 그 뿐 아니라 엄지와 검지로 여지운의 턱을 잡아 올렸다.
“뭐하냐?”
잔뜩 찡그린 얼굴은 심기가 불편 해 보였다. 올라간 눈꼬리는 사납게 보였고 실제 성질머리도 더럽다. 정선주는 아주 은근하고 낮게, 그러나 여지운은 알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박또박 말했다.
“여지운, 너 포지션 바꿨다며? 박히는 걸로.”
“뭔 소리야?”
“뉴 페이스한테 따먹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여기 들어오자마자 난리도 아니던데? 여지운이 뒷구멍 개통했다고.”
“이, 씨발 새끼가!”
여지운이 정선주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휙.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던 백선우는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었다. 미묘하게 올라간 입술 끝이나 흥미로 가득한 눈동자 같은 것이 지금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이 분명 했다.
“지금. 뭔, 깔……려. 누, 가.”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진 뭔가가 여지운의 뱃속을 뜨끈하게 물들였다. 여기서 당황하면 안 된다. 여지운, 정신 차려.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내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정선주, 저 새끼가 무슨 개소리를 듣고 온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바에 와서 쓸모없는 소문이라도 주워들은 모양이지. 입술 안쪽 살이 너덜거릴 정도로 꽉 씹은 여지운이 순간의 당황을 지워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뭔 개소리야. 어디 정신병원에라도 다녀왔냐? 누가 뚫려, 내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문 듣고 와서 지랄인데?”
“너 지금 당황 했냐? 얼굴 빨갛다, 야?”
정선주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체격이 좋아서 그런지 온몸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자신의 속이 흔들리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건 줄도 몰랐다. 손을 뻗은 정선주가 여지운의 팔을 잡고 제게로 당겼다. 구둣발이 엉기며 정선주와 가까이 붙었다. 여지운의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는 손이나,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 드러난 치아 같은 것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려 주었다.
“만 1년 만에 귀국했더니, 재밌는 소문이 돌지 뭐냐? 우리 여지운이 깔렸다고.”
빳빳한 깃을 쓰다듬던 손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 손길을 따라 소름이, 분노가, 짜증이 함께 돋아났다. 여지운이 바 안을 힐끔 살폈다. 언제나 그렇듯, 노골적인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아예 대 놓고 흥미진진한 얼굴도 많았다. 뿌연 담배 연기만큼이나 불쾌하고 매캐한 호기심이다.
뭐, 그래. 대놓고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니던 남자가 뚫렸다는 소문이 재미있겠지. 당하는 사람은 좆같지만.
“뒤가 간지러우면 형아 한테 말하지 그랬어? 우리 인연이 얼마나 오래됐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냐?”
“뭐라고?”
“여지운이 깔릴 줄 알았으면……. 내가.”
정선주는 비꼼 가득한 말을 내뱉다가 뭐가 뒤틀렸는지 갑자기 욕을 해댔다. 목 안쪽을 파고든 손이 목덜미에 살랑대는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근데, 아무한테나 막 대주냐? 뉴 페이스는 또 어떤 새끼야.”
바 안에서 이런 소문이 도는지 정말 몰랐다. 공모전 준비 때문에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놀기는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선연홍과 만난 후에는 섹파를 포함한 사람들과의 연락도 완전히 끊었다.
“형 잘하거든. 어떤 잡놈에게 뚫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새끼보다 내가 훨씬 더 잘할걸?”
잡놈.
소문은 진실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주 허무맹랑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사실에 기반을 두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여지운과 관계된 이야기들은 소문이 아닌 진실이었다.
지난 해 마지막 날.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조급함과 불안함은 여지운을 충동질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남자를 낀 채 건즈앤로즈에 있었다. 약속이 있다던 선연홍은 악당을 물리치는 히어로처럼 조명을 두른 채 등장했다. 예쁜 얼굴에 걸린 웃음은 사나웠고 마주친 눈동자는 번들거렸다.
이건, 위험한데.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그 순간만큼은 토끼 굴을 판다고 하던 선연홍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쾅쾅쾅!!
‘문, 열어요.’
애써 상냥한 척하는 목소리는 축축했고 끈적거렸다. 여지운이 멍청하게 있는 사이 문이 부서지고 그 너머로 선연홍이 걸어왔다. 한 발짝, 두 발짝. 그에 맞춰 여지운 역시 뒤로 물러섰다. 세 발짝, 네 발짝. 그 가소로운 반항은 얼마 못 가 막혔고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 온 무릎이 성기를 꾹 눌렀다. 숨이 턱 막히는데 그 안에서 기묘한 쾌감이 뭉글뭉글 솟았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그다음에는 거칠게, 마지막에는 모든 감각을 집어삼킬 만큼 거칠고 커다랗게.
12월 31일, 자정에 가까운 밤. 발 디딜 틈 하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을 훔쳐봤다. 딱 달라붙어 있던 몸뚱이와 은근하게 움직이던 아래, 그리고 선연홍에게 기대다시피 끌려간 여지운의 모습까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선연홍에겐 따로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문은 사실이었지만 그걸 인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누굴 위해서 인정 할 건데, 그리고 소문이 사실인 게 뭐 어떻다고?
자신이 어떤 잡놈에게 깔렸든, 그 잡놈과의 섹스가 미칠 정도로 좋든 말든 정선주가 이런 개 같은 행동을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자기들끼리야 뭔 소리를 지껄여도 좋지만, 이런 식으로 좆같이 굴면 안 되지.
“손 치우라고 했지? 정선주.”
“나랑 하자. 다른 놈 따위 생각 안 나게 해줄 테니까.”
결혼식 사흘 전이었나?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잔뜩 술에 절은 정선주가 전화 한 적이 있었다.
‘나 결혼해?’
한다는 통보가 아니라 마치 해도 되냐고 묻는 것처럼 말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뚱하게 내뱉었더니 곧바로 재수 없는 새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뒤는 뭐 개싸움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서로 온갖 쌍욕이 오갔다. 너무 당연히 정선주의 결혼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부인과 미국으로 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오늘 이렇게 보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정선주, 네 주제에?”
여지운에게 정선주는 ‘재수 없는 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오늘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새끼.
뒷덜미를 쓰다듬던 커다란 손은 목을 스쳐 이제 귀를 매만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여지운이 지랄을 해도 한참 했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이상했는지 정선주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화가 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는 웃고 있었다. 사납게 올라갔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고 눈썹이 처졌다. 뺨의 근육이 봉긋하게 올라가며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지운이 웃어? 정선주가 여지운을 안지 올해로 딱 13년째인데 그 긴 시간을 되돌려 봐도 오늘처럼 이렇게 활짝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지운은 넋이 나간 얼굴을 한 정선주를 향해 더 방긋 웃고 제 허리를 쓰다듬고 있는 손모가지를 잡아 비틀었다.
“억.”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어깨를 내리눌렀다.
“헉!”
순식간에 위치가 뒤바뀌어 이제는 정선주가 바 테이블에 반쯤 걸쳐 있었고 여지운이 그 위를 누르고 있었다. 꿈틀대는 명치를 팔꿈치 끝으로 세게 찍었다. 악 소리를 지르며 구부려지는 뒷덜미를 움켜쥐고 옆으로 꺾었다.
“악. 야! 여지운! 아악!”
어찌나 인정사정없이 찍어 내리는지 정선주의 입에서 연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틀린 팔목도, 잡힌 머리채도, 과도하게 꺾인 고개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는 낯을 비웃으며 여지운이 정선주의 허벅지 사이로 제 무릎을 밀어 넣었다.
위에서 누르는 사람보다 깔린 사람이 불리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렇게 고간을 꽉 누르면 옴짝달싹도 못한다. 정선주는 본능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하겠지만 그럴수록 틈이 없어지며 압박받게 된다. 직접 겪어 봤으니 알고 있다. 이 치욕적인 자세, 상황, 기분. 모두 선연홍에게 배웠던 것이다.
“야, 정선주.”
근육이 고루 붙은 곰 같은 정선주 역시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있다. 명치와 아랫도리가 동시에 찍히는 고통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여지운이 제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곧은 목선과 탄탄한 가슴이 언뜻 비쳤다.
“하다하다 이제 별 거지 같은 새끼가.”
길게 찢어진 눈매가 반쯤 내려 감기자 긴장감이 나돌았다. 치켜든 턱은 거만해 보였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보였던 모습이 충격적이어서 그렇지 여지운이 매력적인 쓰레기라는 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와서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뒤가 간지러운 건 너 아냐? 야. 구멍 안 닫혀서 똥 질질 흐를 때까지 박아줘? 포르노 한 판 찍고 싶냐?”
“……야, 여지운.”
“어휴, 겨우 이딴 걸로 그동안 어떻게 좆질 하고 다녔냐? 너랑 한 애들이 불쌍하다 불쌍해. 혹시 이혼당한 것도 그 이유 아냐? 찌질한 새끼.”
“안 닥쳐?”
“닥치긴 뭘 닥쳐?”
정선주의 좆 크기가 어떻고 생긴 게 어떤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지운은 최대한 재수 없는 얼굴로 픽 웃었다.
“야. 정선주 너 지금 섰다? 기분 좋아? 흥분했냐?”
몸을 좀 더 밀착시키며 무릎을 밀어 넣었다. 섰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무릎 아래의 정선주의 성기는 묵직한 존재감을 뿜고 있었다. 정선주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땀에 셔츠가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거만한 표정의 여지운이 콧방귀를 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노골적인 시선에 당황하는 정선주를 노려보며 아주 느리게 무릎을 돌렸다. 헉. 정선주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흩어 나왔다.
“좋냐고, 어? 이 변태 새끼야?”
그래, 알지. 어떤 기분인지.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허리가 움찔거리지? 기분이 좆같이 더러운데, 좆같이 흥분되는 거.
정선주는 어느새 눕다시피 했다. 여지운이 그의 양옆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숨이 섞이고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워졌던 입술은 뺨을 지나 귓가에 멈추었다.
“박히고 싶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하지 그랬어, 이, 씨발 새끼야.”
정선주의 성기를 눌렀던 발을 내리며 딱딱해진 성기를 움켜쥐었다. 사람의 몸뚱이는 어찌 이렇게 솔직한지, 이 와중에도 무릎 같은 것에 발기하는 게 자신만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개수작 하면, 좆이고 불알이고 다 터트릴 테니까 고자 되기 싫으면 아는 척하지 마라.”
“어흐, 여지운 씨발놈.”
여지운이 손안에 있는 것이 짜부라질 정도로 꽉 쥐자 그야말로 영혼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비명이 울렸다. 정선주가 두 손으로 제 고간을 움켜쥐며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지운의 관심은 이미 그에게서 바 안으로 옮겨졌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언제나 그렇듯 흥미 어린 시선이 가득했다. 발아래가 웅웅 울릴 정도로 커다란 음악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품에서 담배를 꺼낸 여지운이 익숙한 동작으로 필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얇은 종이에 감싸인 잎들이 타들어 가며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뒤에서야 무슨 개소리를 지껄여도 상관은 없는데, 이렇게 대놓고 좆같이 굴면 내가 더 좆같이 굴고 싶잖아. 안 그러냐?”
겨우 두세 모금 빤 담배를 탁 뱉어내고 발로 비벼 껐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세 보진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상당했다.
“백선우씨, 다음에 봅시다.”
그대로 뒤돌아 걷던 여지운이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 정선주 쪽을 힐끔 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아랫도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정선주. 아까 그거 농담이야. 너 같은 새끼 쑤셔 줄 생각 없거든. 구멍 간지러우면 거기 맥주병으로 존나게 박든가. 그리고.”
“뭐?”
“무릎에 발정 나니까 좋냐? 무릎 크기랑 말 좆이랑 비슷하던데, 마구간에라도 가봐. 물론 걔들도 너 같은 거 상대 안 해주겠지만.”
평소와 다르게 조금 높은 듯한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다분히 묻어 있었다.
“정선주, 병신 새끼.”
허옇게 질린 얼굴의 정선주를 내버려 두고 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걷던 걸음은 바 입구와 멀어질수록 점점 빨라져 모퉁이를 돌 즈음에는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아무 편의점에 들어가 차가운 생수를 샀다.
“1,400원입니다.”
“아, 여기 있습니다.”
“봉지에 넣어 드릴까요?”
“됐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흘려들으며 곧바로 뚜껑을 따서 입안에 모두 털어 넣었다. 미처 넘어가지 못한 물이 턱 끝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코끝이 쨍해지며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씨발. 씨발. 씨발! 바닥에 빈 물통을 내팽개치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발길질했다.
“내가, 선연홍에게……?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마음에 불씨가 툭 던져졌다. 이미 넘실거리던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올라 그를 옭아맸다. 하, 여지운이 고개를 숙였다.
이건 자신이 아니다.